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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216화 (216/235)

00213 「22-2 : 부활하는 주인공 (2)」 =========================

부활(復活)이란 말은 참으로 멋진 말이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멈춰있던 무언가가 다시금 활동을 재개(再開)한다는 뜻이니까.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이나 소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는 죽음이나 침묵상태에서 깨어나 다시금 굉장한 힘을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겠지.

물론 악당의 비밀병기나 최후의 발악. 히든카드 등이 부활했다는 이벤트도 있긴 했지만……그 경우에는 ‘적의 마지막 발악을 어떻게 저지할 것인가?’라는 긴박감을 부여해 보다 작품에 몰입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기도 했다. 아군이 하든 적이 하든 간에 독자를 매료시키는 이벤트. 그게 바로 부활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위기에 처한 상황. 사람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혜성처럼 나타나 모두를 구하는 히어로(英雄). 영웅의 등장을 보다 환상적이고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웅의 부재(不在)였다.

영웅이 멋지게 나타나 적들을 때려눕히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장면이었다만……처음부터 나타나 적들을 쓰러뜨리는 것은 매우 지루하고 단조로운 전개였다. 적과 주인공이 맞닥뜨리면 ‘에이, 또 주인공이 이기겠네’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 흥미를 가질 수 없게 되는 역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부활을 통한 화려한 등장 이벤트는 주인공의 부재. 즉, 존재하지 않는 것마저 이용한 신의 한 수(一手)라고 부를 수 있었다. 주인공의 동료나 히로인 등은 대부분 주인공보다 약하기 마련이다. 주인공은 이길 수 있지만 동료나 히로인은 이길 수 없는 적. 그런 적들과 싸우며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빌어먹을! 주인공만 있었더라면 저런 놈은……!!’

주인공의 부재로 인해 전투에서 지는 동료들. 목숨을 잃을 것 같은 위기의 순간에 멋지게 등장하는 주인공! 그 다음은 더 볼 필요도 없었다. 쓰러진 동료나 히로인의 복수를 갚기 위해 적을 멋지게 두들겨 패며 이기는 게 소년만화의 정석이었으니까.

주인공의 부재마저도 작품을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예시는 누가 뭐래도 드래곤볼의 프리더 편이었지. 기뉴특전대한테 죽기 전에 겨우 손오공이 도착했고 그 후에 일어난 손오공의 무쌍 활약은……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아, 물론 이 경우 손오공은 죽은 상태가 아니었으니 ‘부활 이벤트’로 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이미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거니 부활이란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사이어인이 습격해왔을 때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키기 위해 나메크 성(星)에 간 거였으니까.

부활을 통한 극적인 등장 이벤트는 매우 좋은 것이지만……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너무 만발하면 영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왔다. 부활이라는 건 멋있는 만큼 많은 시간과 여러 가지 제약을 동반해야만 했다.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만화나 창작물에서만 일어나는 거였지만……그러한 창작물 안에서도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은 결코 가벼운 행동이 아니었다. 그만큼 생명의 무게는 무겁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뜻했지.

사람을 마구 부활시키는 드래곤볼은 생명경시(生命輕視) 사상이 있다며 지적이나 비판을 받곤 했었지만……그 드래곤볼에서도 ‘무슨 일이든 드래곤볼에 의지하려 하면 안 된다’라는 취지의 말이나 행동을 자주 드러내곤 했다.

실제로 드래곤볼을 통해 살려낼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번 죽은 사람. 이미 한 번 죽어 부활했거나 자연사(自然死)한 사람은 살려낼 수 없었다. 나메크 성의 드래곤볼은 소원을 세 가지 이루어주는데다 한 번 이상 죽은 사람이라도 살려낼 수 있었다만, 그렇다고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튀어나가는 캐릭터는 아무도 없었다.

부활에 대해 가장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진 것은 역시 금술(禁術)인 예토전생(穢土転生)이겠지. 죽은 사람을 좀비 상태로 되살리는 것도 모자라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기계처럼 묘사한 것으로 인해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았었다.

부활은 아니지만……허세력 배틀로 유명한 【블리치】는 늘 원패턴 전개 때문에 욕을 먹었었다. 초반에는 나름 잘 나갔지만 허세력이 너무 강하고 늘 똑같은 전개 방식이라 욕을 먹었는데 예토전생으로 죽었던 사람들을 모두 살려내 전쟁을 치르는 나루토야 뭐……당연히 욕을 먹었지.

너무 남발(濫發)하면 좋지 않다는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 넘치는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와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것이었다. 부활이라는 것은 모두한테 극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지만, 그만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좋은 교훈을 우리한테 줬었지.

당연한 소리지만 그런 부활은 창작물 안에서만 존재했기에 ‘ㅋㅋㅋ 나도 한 번 뒈진 다음에 부활해야지~’라며 흥얼거리는 미친놈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살던 세상에는. 부활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것일 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부활 같은 것은 창작물 안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멋있을지 모르지만 부활을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했으며, 그 죽음은 결코 안락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기에 ‘음……저렇게 괴로운 걸 경험하며 부활할 바에야 아예 안 죽고 착실하게 살아가자’라고 생각했었지.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부활은 창작물 안에 있는 것일 뿐이라 생각했었고, 아내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내가……이렇게 살아나다니? 심지어 남자의 몸으로? 빼앗긴 게 분명했던 내 육체는 멀쩡했다. 27년을 썼던 몸을 잠시간 빼앗겼던 게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아냐, 그건 확실한 현실이었다. 결코 꿈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게 꿈이 아니라면 이것도 현실이라는 말인데……대체 뭘 어떻게 해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걸까? 내 몸과 갑자기 나타난 탁한 색의 구체를 번갈아 쳐다보던 나는 겨우 말문을 열 수 있었다.

“누, 누구세요……?”

나중에 다시금 생각해보면……참 쪽팔리는 말이었다. 여기가 어디냐,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등. 다양한 것을 물을 수 있었는데 ‘누구세요?’라니.

어, 그래. 누구인지 궁금하긴 했지. 알아야 하기도 했고. 그치만……이거 외에 좀 더 멋진 질문 방식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긴 했다. 이미 지나간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만.

질문도 웃겼지만 질문을 받은 대상도 웃겼다. 탁한 색(色)의 구체라니. 하늘에 둥실둥실 떠있는 둥근 ‘그것’은 주위에 깔린 검은색보다는 훨씬 밝은 색이었지만, 하얀색이나 회색에는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탁한 색이기도 했다.

그리 밝지도, 맑지도 않은 색깔이었지만 주위가 온통 검은색뿐이라 상대적으로 맑으면서도 밝은 색으로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걸 보색(補色)효과라고 해야 하나? 중2때 옆 반의 담임선생이 미술 선생님이긴 했지만 썩 친절하거나 멋진 사람은 아니었기에 미술은 싫어하게 됐지.

“우리는 ‘우리’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잘 알아듣지를 못했기에 다시 한 번 누구냐고 물었다.

“우리는 ‘우리’다. 너는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한테 패배했지만 우리는 창조주의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그 대답을 들은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내가 실제로 부활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제쳐두고, 저 대답을 이해한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그 구체를 봐야만 했다. 저 구체는 내가 이해를 못할까봐 부가 설명까지 친절하게 곁들였고, 난 그 설명을 듣자마자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설마……설마!? 침을 꿀떡 삼킨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 말씀은……혹시, 어……예전에 이곳에 소환되셨다가……?”

“죽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엄청난 공포 앞에서 비명을 꾹 참는 사람들의 기분이 이해가 갔다. 마음속에서는 슬픔과 놀라움이 서로 어우러지며 내 발성 기관을 자극하고 있었지만 최대한 소리가 안 나도록 꾹 참아야만 했다. 비명을 지르는 건 실례되는 일이었으니까.

틀림없다. 난 그 구체가 자신들 ‘우리’라고 칭하는 것. 동시에 ‘창조주의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는 말을 근거로 하여 그 구체가……자신을 ‘우리’라고 칭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단박에 추리해낼 수 있었다.

“그, 어……그쪽 분들은……이 세상에 소환됐다가 목숨을 잃으신 분들인가요?”

“그렇다.”

마치 AI(Artificial Intelligence ; 인공지능)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자기들이 죽었다는 것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말하다니? 죽었다는 사실을 아무런 미련 없이 저렇게 말할 수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만……지금은 감정의 유무(有無)에 대해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질문은 산더미처럼 많았으니까.

“어, 어……왜, 제가 여기 있는 거죠? 주, 죽어서 그런 건가요?”

난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을 생각해냈다. 미동(微動)도 없이 날 찌르고 베던 아내들. 그걸 보며 즐거워하던 유린의 얼굴.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났기에 내 몸을 한 번 더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그래. 난 죽었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 상황은 절대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설령 살아남았다 치더라도 남은 것은 고통과 파멸의 미래뿐. 도망칠 수도 없는 세상, 거역할 수도 없는 절대자.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에 괴로워하다 죽는 게 또 다른 미래였겠지. 절망적일 정도로 시궁창밖에 보이지 않는 미래(이제는 소용없는 것이 됐다만)를 생각하니 또 한숨이 나왔다.

“너는 죽었다. 육체와 영혼을 빼앗긴 상태에서 정신마저 변질됐기에 원래부터 죽음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생명 활동이 정지됨으로써 확실히 죽음에 이르게 됐다.”

거 참 자세한 설명이네. 설명충의 자질이 보였지만 그 말을 들으니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어, 그럼 전……지금 죽은 상태라는 건가요?”

이상했다. 죽은 상태라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야 정상이어야 했다. 영혼한테 감각이 있을 리가 없잖아. 죽어서 몸이 없는 상태니까 감각은 없어야 정상인데……나는 발성(發聲)도 했고, 베개의 부드러운 감촉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대체 뭔데?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죽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우리와 만날 수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건 대답이 아니잖아. 난 ‘내가 죽은 상태냐’라고 물었지 ‘어떻게 너희랑 만날 수 있게 된 거냐’라는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고. 구체에는 입이나 눈이 없었지만 내 감정이나 가벼운 제스처를 본 것인지 그들은 계속해서 말했다.

“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알 수 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소망과 원망이 담긴 것이자 너한테 있어 새로운 미래를 얻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잘 들어라.”

정말 자기 할 말만 담담히 말하는 타입이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야기를 끊지는 않았다. 내 질문부터 시작해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경위나 이유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고……무엇보다 ‘나한테 있어 새로운 미래를 얻을 기회일지도 모른다’라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두근거렸으니까.

새로운 미래? 그 말인즉슨……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건가? 다시 아내들과 만날 수 있다는 건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침을 삼킨 후 구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렇게 부른다. 자기들을 ‘우리’라고 했으니까)은 내 마음의 준비가 끝나기까지 잠시 기다려준 것 같았고, 그런 배려를 보자 내가 그들을 너무 AI처럼 생각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틀린 생각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이 형태를 띠게 된 것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우리는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다.”

“어, 아니……죄송해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에요.”

진심으로 사과했다. 내가 한 무례한 생각을 나무라지는 못할망정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라고 인정하는 그들을 보니 내가 더 미안하고 무안했다. 이런……또 바보 같은 생각과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니가 앞으로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 그리고 그 후에 니가 할 일이니까.”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 후에 내가 할 일이라니? 좀처럼 알 수 없는 소리만 들어서 그런지 좀 확실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만……지금은 그들이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우리는 이 세상에 와서 목숨을 잃었다. 너와 달리 창조주한테 가까이 가지 못했으며, 이러한 세상을 만든 것부터 시작해 사람의 존재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절대자가 있다는 사실은 죽은 후에 깨닫게 됐다.”

죽은 후에 깨닫게 됐다고? 사람은 죽으면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 육체 활동이 정지되면 생물학적으로 ‘죽은 상태’가 되며 그 후부터는 눈을 깜빡이기는커녕 숨조차 쉴 수 없게 되는데 어떻게 그런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거지?

“육체는 죽었지만 영혼은 빼앗기지 않은 상태였다. 원래 세상이었다면 달랐겠지만 이곳에서는 저승으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없었기에 구천(九泉)을 떠도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난 참지 못하고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구천을 떠돌다니. 흔히 귀신 이야기에서 나오는 말이었지만 이렇게 들으니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저 문장만 들어도 촉이 왔다. 그렇다면 그들의 정체는……?

“니가 생각한 대로다. 우리는 목숨을 잃은 자들의 영혼과 정신이 합쳐진 상태다. 현재 우리의 상태를 굳이 표현한다면 정신체(精神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니가 만났던 이 세상의 창조주가 한 말이지만 현재 우리를 일컫기에는 가장 근접한 단어다.”

정신체……나는 예전을 떠올렸다. 유린은 정신과 영혼은 가지고 있었지만 육체는 가질 수도, 만들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의 영혼과 자기 육체를 만들 수 없었던 유린은 그걸 다른 사람한테 받기로 결심했고, 자기한테 육체를 바칠 사람들을 내가 살던 세상에서 끌어왔었지.

정신적인 사고(思考)는 가능하지만 육체의 그릇이 없는 상태. 그들이 유린과 같은 정신체라고 생각하던 나는 곧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정신체였던 유린은 내 육체를 얻은 상태다. 그는 더 이상 정신체가 아니라 한 명의 존재(存在)였기에 안 그래도 우울한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이곳을 떠도는 운명이 된 우리는 시간이 지날 때마다 소환되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누군가 이 세상을 없애주기를……누군가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절대자를 쓰러뜨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우리가 원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이제는 더 이상 나올 수도 없게 됐다. 너는 그 이유를 알 것이다.”

그 말을 듣자 무거웠던 가슴이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린은 이 세상의 신(神)이다. 신을 쓰러뜨릴 방법도 없었다만……이미 육체를 얻은 유린은 다른 시공차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자기가 만든 세상을 없앤 후 자기의 힘으로 쓸 생각이었기에 놈을 쓰러뜨릴 사람도 없었지만 설령 그런 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곳을 구원할 수는 없었다.

곧 사라질 세상. 사라진 후의 세상을 대체 무슨 수로 구할 수 있겠는가? 이미 끝난 상황, 일어나버린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장기 같은 게임에서는 ‘무르기’를 하면 되겠지만……다들 알잖아. 이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

“가장 우리의 소원에 근접했던 너마저 영혼과 육체를 빼앗겨 희롱 당하던 걸 본 우리는 니가 목숨을 잃자마자 너와 접촉을 시도했다. 접촉은 성공적이었다. 우리와 니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고 서로를 인지할 수 있었으니까.”

다 좋은데……그 ‘목숨을 잃었다’라는 부분은 좀 언급을 삼가주면 안 될까? 나 죽었거든요? 그걸 말 들먹이면서 말해도 기분 좋아질 부분은 하나도 없거든요? 허파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푹 쉰 나는 입을 열었다.

“어……결과적으로는 죽었다는 거네요. 저.”

그들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니 대답할 의무가 없다는 건가? 하아……. 오락실이나 컴퓨터 게임에서 게임 오버 화면을 볼 때마다 ‘에이, 기분 잡쳤네. 다시 해야지……’라고 생각했던 적은 많았다. 동전이나 버튼만 누르면 부활해서 다시 게임을 진행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생각지도 못한 사고나 사건으로 인해 목숨을 잃으면 인생 끝. 컨티뉴도, 부활도 불가능했기에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금방 알 수 있었지. 그런 소중한 목숨을 잃은 채 이런 곳으로 오게 되다니. 내 팔자도 참 험난한 거구나……응?

“어, 저기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아무런 대답이 없는 구체한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말했다.

“제가 죽은 상태인지 어떤지에 대해 물었잖아요. 제가 죽었다는 건 잘 알겠는데……새로운 미래라뇨? 거기에 대해서는 잘 듣지 못한 거 같은데요?”

조금 전에 내 마음을 부풀게 했던 부분에 대해 질문하자 그들은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둔 후 말문을 열었다.

“너는 육체적인 면에서 봤을 때는 확실히 죽었다. 그러나 보다시피 우리와 함께 있기에 완전하게 죽음을 겪은 상태가 아니다. 육체적으로는 사망에 이르렀지만 그 정신은 무사했기에 우리가 접촉을 시도할 수 있었다. 만약 이러한 접촉이 실패했다면 더 이상 새로운 미래도,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한테도, 너한테도…….”

감정을 담지 않고 과거나 사실만을 말하던 그들이었지만 그 말을 할 때만큼은 아련하다 싶을 정도의 감정이 느껴졌다. 마치 그 기회가 아니었더라면 영영 자신들의 소망은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는 아쉬움과 안타까움도 있었지만……그들의 말로 추측하건데, 나를 만났으니 그 ‘새로운 미래’를 얻을 찬스는 아직 남아있다는 희망이 느껴졌다.

“너는 우리를 보고 AI 같다고 생각했겠지만……그건 당연한 것이다. 10년도 전에 소환된 사람의 영혼부터 시작해 수많은 사람의 영혼이 하나가 된 덕분에 우리는 대화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게 됐다. 대화를 나누더라도 아무런 희망도, 발전도 없는……다람쥐 챗바퀴 돌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대화였으니까.”

내 실례되는 생각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객관적인 사실과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만 말하던 그들이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대화를 나누어봤자 이득이나 의미. 그들의 현재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들은 서로 간의 대화나 소통을 더 이상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열을 띠며 토론을 한다고 한들 세상이 바뀌지는 않으니까.

“대화를 위한 기능이나 감정적인 부분은 거의 배제(排除)되었다. 영혼이 뭉치고 뭉친 상태라고는 하지만 감정적인 부분으로 치자면 아마 너보다는 못할 것이다. 우리가 죽은 이후로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났고 인간이었던 우리는 그런 시간의 흐름 때문에 미치지 않도록 스스로의 감정을 봉인하는 길을 선택했다.”

아무리 못해도 최소 10년. 이 세상의 신인 유린조차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른 시공차원으로 갈 수 있는 육체를 원한다’라는 목적을 가지고 버틸 수 있었다. 유린과는 다른 목적이지만 그 목적을 이룰 힘도, 능력도 없었던 그들은 내가 상상도 못 할 정도의 간절함을 가진 채 기다려왔겠지. 자기들의 소망을 이뤄줄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사람을 소환하는 데에는 반년(半年) 정도의 힘이 든다고 했었다. 여자를 매번 소환한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소환한 사람들이 괴물 때문에 죽는 걸 본 유린은 괴물의 파워나 배치 등을 고려해야만 했다. 자기가 소환한 사람들이 갑자기 죽지 않도록……자기가 원하는 육체를 갖출 수 있도록 이것저것을 생각해야만 했으니까.

유린 입장에서는 ‘소환된 사람들이 쉽게 죽지 않도록 파워 밸런스 조절을 잘 해야지~☆ 어? 금방 죽었네? 어휴, 안 되겠다. 세세한 부분까지 모조리 손 좀 봐야겠당★’이라 지껄이며 나름대로의 배려를 베푼 것 같았지만……그거 다 쓸모없었거든? 그딴 배려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니, 그 이전에! 그게 배려(配慮)긴 배려냐? 그딴 배려를 베풀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소환 자체를 안 했어야지! 그 병신짓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이 저승에도 못 가서 이렇게 변해버렸는데 배려가 무슨 소용이고 그딴 짓이 다 무슨 소용이야!? 처음부터 다른 사람한테 피해주는 짓은 하지 말라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세상이 점차 변하는 걸 보며 우린 생각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 세상을 바꿀 정도로 창조주는 다급하다는 사실을. 우리도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정신체가 되어버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남은 길이라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조금 전에 말했지만 아직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 ‘새로운 미래’에 관한 거겠지. 응? 그런데……정신체라고?

“자, 잠깐만요. 유린은 여러분에 대해 모르시나요? 걔는 육체도 얻고 싶어 했지만 영혼도 엄청 탐냈던 걸로 기억나는데요.”

내 영혼을 가졌다며 좋아하던 유린을 생각하니 의아했다. 걔가 왜 이 사람들의 영혼(영혼과 영혼이 뭉친 상태니 그냥 영혼이라 칭했다)을 눈치 채거나 탐하려 하지 않은 걸까?

“영혼이란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양도(讓渡)받는 것이 그나마 쉬운 방법 중 하나였다. 우리처럼 놈한테 협력의 의사가 일절 없을뿐더러 이미 죽었기에 존재조차 모르는 영혼은 놈의 관심 대상 밖이었다. 아마 그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슬픈 이야기군. 유린은 자기가 소환한 사람들이 죽었다며 아쉬워했지만 정작 괴물한테 살해당한 사람들은 이곳에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게 됐다는 거군. 이미 죽은 사람을 소생시켜 대화를 하거나 영혼의 양도를 꾀할 수도 없었거니와, 이런 존재가 됐다는 것도 알 리 없었을 테니…….

생각지 못한 슬픈 이야기였지만……어떤 면으로는 ‘유린이 절대 모르는 지식’ 중 하나였다. 유린이 만약 이것을 알았다면 나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들한테도 접근했을 테니까. 이런 언급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유린한테 알려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가 이 세상의 신을 처리해주길 바랐지만 우리의 생각대로 신을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물론 너의 능력이 높고 낮음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만한 일은 아니었다만……이 세상이 파멸하기 전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니가 영혼과 육체를 빼앗기며 희롱당하는 걸 보던 우리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수단이라는 말에 어렴풋이 감이 잡히긴 했지만 함부로 입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이건 내 생각 이상으로 잔혹하고 슬픈 것이었으니까. 아무리 내가 바보라지만 그들의 모습과 성질, 감정으로 추측컨대……그들이 행할 법한 최후의 수단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는 너한테 모든 걸 맡기기로 결심했다. 지금까지 모아온 힘과 지식, 영혼을……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너한테 맡기기로 했다. 우리가 속한 영혼의 구원과 해방.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든 신에 대한 복수. 그리고……너 자신과 니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여인들을 위해서…….”

============================ 작품 후기 ============================

현실은 소설보다 기묘하다고들 하는데 지금 보니 진짜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살면서 통수를 이렇게 많이 맞아볼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착한 사람은 호구 취급 당하고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는 세상. 그런 삶을 살다보니 이 세상이 소설보다 더 막장이구나 하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마 다른 분들도 힘든 일을 겪으시며 살아오셨겠죠.

근데 비단 힘든 일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닌 거 같습니다. 김관진 전 국방장관부터 시작해 2MB의 병크, 죄수번호 503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등. 실로 상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다보니 이젠 어지간한 일로는 안 놀라게 됐습니다. 아,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안 놀란다는 건 아니구요. 상대적으로 말입니다.

자기들 권력과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힘없는 사람들 가지고 놀고 모욕하고 죽이고. 그런 삶을 반복하면서도 반성이나 회개, 참회 따위는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런 놈들이 대한민국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며 권력이나 챙길 거 모조리 챙겨왔다고 생각하니……참, 여기가 창작물 속인지 현실인지 모르겠더군요. 용케 지금까지 한국이 안 망했구나 싶었습니다.

막장이라 하니 일본도 예외는 아니죠. 트럼프 방문 때 '진주만을 기억하자'라고 하니 엄청난 비난이 일었습니다. 진주만 때 선전포고도 안 하고(실제로는 했지만 공습 후에 발령된 것이기에 사실상 의미없음) 선수친 건 당연하지만 그 후 미국의 핵폭탄 공격은 인륜을 져버린 행위라며 비난하니 말입니다. 여전히 일본인의 역사의식(특히 2차세계대전 + 일제강점기 등)은 엉망이구나 싶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막장이니 판타지나 SF라는 장르가 나올 수밖에 없구나 싶네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판타지나 SF를 포함한 모든 창작가들은 좋든 싫든 세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개인이 좋은 것만 골라서 가질 수가 없는데다 태어난 환경이나 가정사에 따라 또 달라지니 복불복 요소까지 첨가됐네요. 진짜 판타지와 SF를 아득히 뛰어넘은 세상이라 생각합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고양이새벽님, 늘 즐겁게 봐주실 뿐만 아니라 코멘트도 꾸준히 달아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로리콤MK님, 와, 와타시는……쓰레기? 와타시는 뀨(18)작가……?

데, 데프프프……!? (정신붕괴)

sckgjjjDrthcjfjdj님, 즐겁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보는 아이디이니 첫 댓글을 남겨주신 것 같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상입니다. 초기 구상 플롯과 점점 달라집니다만 결말은 이미 정해놓았으므로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이제 2017년도 얼마 안 남았네요. 부디 2018년은 행복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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