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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211화 (211/235)

00208 「21-7 : 지옥(地獄) (7)」 =========================

단란한 가족의 즐거운 식사시간. 원래 세상에 있었을 때부터 늘 원하던 것이었지만……나는 그러한 시간을 맞이하지 못했었다.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집안 사정상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할 기회는 좀처럼 없었으니까.

있었다 하더라도 TV를 틀어놓은 채 밥을 먹는 게 보통이었다. TV채널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욕을 하면서 다른 채널을 트는 아버지. 정치문제가 나오면 시민들이나 지식인들을 욕하며 옛날이 좋았다며 뭐라고 하는 어머니.

둘 다 내 생각이나 이상, 사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분들이었기에 단란한 대화를 할 수도 없었고 하려는 마음조차 사라지게 만들었다.

입을 열었다간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불안했고, 혹시나 그것 때문에 또 싸움으로 이어졌다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았기에……결국 ‘화목한 집안의 오붓한 식사시간’은 겪은 적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즐거운 식사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건 아니었다. 나름 좋은 주제나 즐거운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식사를 했던 적도 있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시간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을 텐데’라고 여러 번 생각했었지.

그러나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는 더럽게 안 지나가지만, 즐겁고 아름다웠던 시간이나 경험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간다는 사실을. 아주 가끔씩 겪는 즐거운 시간 외에는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경우도 드물었고, 함께 밥을 먹는다 하더라도 예전 같은 분위기는 나오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빚을 준 것도 모자라 내가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자신의 모든 능력을 100% 발휘하는 것도 모자라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불세출(不世出)의 승진 신화를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양 쳐다보는 엄마를 볼 때마다 죽고 싶은 심정이 들었었다.

자기들이 만든 현실을 떠맡긴 후 잘 처리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라니. 그럼 나는? 내 인생은? 단란한 가족, 즐거운 식사 시간.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 겨우 그런 걸 바랐을 뿐인데……그런 것조차 얻지 못한 채 원하지 않는 일을 떠맡고, 원하지 않는 인생을 걸어야만 한다니!

하렘 어드벤처에 소환되기 전까지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했었기에 이곳에 적응했었던 나는 이곳을 너무나 사랑했었다.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내 평생의 행운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 세상을, 아내들을. 모든 것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힘들고 어려운 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일? 상관없었다. 현실에서는 원하지도 않는 일을 맡아 해야만 했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 한 몸 바쳐 일하다니. 나한테 이런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가 있었는가 싶어 내가 더 놀라워했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평화는 이어질 거라 생각했지만……그건 내 착각이었다. 유린이라는 이름의 신. 이 세상의 절대자이자 창조주인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을 뿐이었으며, 그로 인해 나는 모든 것을 잃게 됐다. 내 소중한 사람들과 제2의 고향. 내가 일구어낸 모든 것들을…….

내가 스스로 골랐다고 생각한 아내들은 모두 유린이 준비한 것에 불과했으며, 내가 일구었다고 생각한 것들은 나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발판이었을 뿐.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고 누군가 말하지만 이 경우에는 무슨 짓을 한들 유린의 손바닥 위에서 일어나는……짜고 치는 고스톱에 불과했다.

나는 절망했다. 빼앗긴 것도 억울했지만……난 현실에서 결국 도망치던 사람일 뿐이었다. 좀 더 정확하고 엄밀하게 말하자면……도망조차 제대로 치지 못했다고 표현해야만 했다. 현실에서도 부모님 때문에 엿을 먹었었는데, 이 ‘하렘 어드벤처’에 와서도 그 업(業)을 계속해서 짊어져야만 했었으니까.

더 이상 빚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늘 원하지 않는 사건에 휘말려 머리를 아프게 만들 일은 없다고? 27년 동안 꿈꾸던 악몽이 드디어 끝났다고? 하핫, 누가 그런 개소리를 하디?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었다. 악몽이 끝났다니? 현재완료 진행형으로 계속 되고 있잖아(I've been having nightmares).

착각도 유분수지. 악몽이 끝났다고? 이 하렘 어드벤처에는 악몽보다 더 끔찍한 존재. 악마 같은 신이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빌어먹을 신이 바라면 시련과 고난은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었고, 나는 거기에 휘말리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머리가 나빠 아무것도 모르면 차라리 행복했을 것을. 쓸데없이 의심과 고민이 많은 게 이런 식으로 적용될 줄 누가 알았겠냐.

이 세상이 소멸할 거라 직감(直感)한 나는 더 이상 유린의 유흥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었다. ‘자지의 맹세’로 날 조종한다면 또 모를까, 그 전까지는 최대한 저항하고 반항할 생각이었다. 내 몸의 자지를 또 나한테 들이댄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깨물어줄 거라 결심했으니까.

내 몸을 차지했다는 건 그만큼 고통이나 충격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내 입이나 보지에 힘껏 찔러대던 자지. 여성을 찌르는 이미지 때문에 매우 강하게 보이지만……사실 자지는 매우 연약한 신체기관(身體器官)이었다.

국부(局部)라고 불릴 정도로 연약한 이 기관은 아무리 서로가 격하게 싸운다 치더라도 함부로 치는 곳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국부를 치면 모두 다 움직임을 멈춘 채 멍하게 바라볼 정도였으니까.

스포츠나 경기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K1이나 UFC 같은 이종 격투기에서조차 급소에 대한 공격은 해서는 안 되는 행위 중 하나였다. 살짝이라도 스치면 국부 주위를 잡은 채 팔을 내밀거나 쓰러졌고 그 순간부터 경기는 일시적으로 중지될 정도였다. 그 정도로 국부는 연약한 기관 중 하나였다.

그런 기관을 다시 입에 넣으려 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입으로 찢어 발겨 주리라. 그렇게 결심하고 맹세한 나였지만……그러한 결심은 끝끝내 지킬 수가 없었다. 그의 달콤한 말 한 마디에 나는 전의(戰意)를 상실한 채 그의 명령에 가까운 거래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들과 나. 이 세상의 존망(存亡)과 미래를 위해서는 말이다.

† † † † † † † † † †

“읍, 쮸읍……푸핫! 헤헤……유린님, 어때요? 세린의 펠라치오, 기분 좋나요? 네?”

원래의 내가 들었다면 구역질이 나올 정도의 교미(嬌媚). 남자 입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었고 나도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절대 없었지만……더 이상은 체면이나 자존심을 차릴 때가 아니었다.

모든 아내들이 경멸과 비웃음을 띤 눈으로 날 보고 있었지만 신경 쓸 수는 없었다. 아니, 신경 써서는 안 됐다. 내 목적은 유린을 즐겁게 만드는 것뿐이었으니까.

“오, 오옷……크윽! 아, 앗……정말 좋아, 세린. 후후, 그래.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나왔으면 서로 좋았잖아?”

건방진 표정을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 당장에라도 물어뜯고 싶었지만……그래서는 안 됐다. 이미 모든 것을 버려서 그런 걸까? 난 놈의 자지에 얼굴을 비벼대며 교태(嬌態)어린 목소리로 아양을 마구 떨었다.

“히히♥ 세린은 유린님 전용 육노예니까 마음껏 써주세요. 네? 음, 쮸팝……음쯉……!!”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빨자 유린은 테이블을 잡은 채 몸을 움찔댔다. 내 생각대로였다. 20년 동안 몸을 얻은 적이 없었던 유린은 나와 마찬가지로 남성이 느끼는 쾌감이나 충격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약간의 승리감을 얻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승리가 아니라 【유린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이었다. 힘껏 빨아댈 때마다 자지는 뿔룩거렸고 머지않아 하얀색의 끈적끈적한 액체를 입안에 마구 쏴댄다.

내가 절정을 맞이했을 때처럼 유린은 몸을 움찔거렸다. 부들부들 떨던 몸은 곧 멎었지만 나는 여전히 절정을 맞이해야만 했다. 여성이 됨과 동시에 내가 이전에 느끼던 절정의 감각이나 수준이 꽤 달라졌기에 상당한 고생이었다.

입 안에 가득 들어온 정액은 상상 이상으로 내 뇌와 몸을 자극했다. 하반신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황금색의 액체는 깨끗한 식사실 바닥을 더럽혔고, 주변의 아내들은 노골적으로 욕을 하며 유린한테 저년을 내쫓아 달라고 했다.

남자였을 때와 달리 몸의 컨트롤이 제대로 듣지 않아 일어나는 것은 이외에도 많았다. 소변이나 대변을 누는 것부터 시작해 여성의 모성애(母性愛)가 강하게 작용했기에 아기를 빌미로 한 협박에서는 얌전히 다리를 벌려줄 수밖에 없었던 게 대표적인 예였지.

방법이 어찌 됐든 간에 난 그를 만족시켰다. 만족과 승리감을 느끼며 유린의 하반신을 깨끗하게 핥자 주위에서는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비난이 날아온다. 원래라면 ‘아냐, 여기에는 사정이 있어!’라며 말을 해야 했지만……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행위는……내 아내들과 나.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시련이었으니까.

† † † † † † † † † †

“지금……뭐라고 했어?”

믿을 수가 없기에 한 번 더 물었다. 유린은 킥킥대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너와 니 아내들을 위해 이 세상을 남겨줄 수 있다고. 오직 너희만을 위해……아주 깔끔하게 말이지.”

난 믿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저으며 뺨을 꼬집었다. 아프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저놈은 나와 내 아내들을 위해 이 세상을 남겨주겠다고 한 거다. 저 빌어먹을 놈이 말이다.

“그러니까……디스(Dis)좀 하지 말라니까? 나도 양심이 있는 놈이고 어느 정도 일이 해결됐으니 이런 말을 꺼내는 거라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 넌 내 은인(恩人)이라고.”

원래라면 ‘되고 싶어서 된 은인 아니거든? 내 몸 강제로 빼앗아놓고 뭐가 은인이야 개새끼야!’라며 화를 내야 했지만……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난 바보 같이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정말로……정말로 이 세상을 남겨줄 거야? 정말? 진짜로?”

유린은 지금까지 보여준 적이 없는 순수한 표정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조금 전까지 욕하며 죽으라고 외쳤던 나한테 이런 짓을 하다니. 아, 미리 말해두지만 이런 이벤트 일어났다고 이놈한테 홀딱 빠지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다. 이건 BL 아니라고! 그런 건 다른 소설 보라고!

“응. 원래 이 말을 하러 온 거지만……니가 조금 전까지 생각하던 것들에 대한 답변도 같이 하려고 온 거거든. 오자마자 죽으라며 공격한 게 좀 그렇긴 하지만…….”

“그건 니 탓이거든?”

이 와중에도 나는 지지 않겠다는 양 반격을 했고 유린은 한숨을 쉬며 ‘너는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다’며 중얼거렸다. 내가 똑똑한지 멍청한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얘가 절대 선(善)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너도 이미 알겠지만……이 세상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 거야. 정확히는 내가 예전처럼 돌릴 생각이 없다고 해야겠지. 이유는 알지?”

이유는 알지만 확실하지는 않았기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보다는 유린이 했던 말이 더 중요했다. 이 세상을 남겨준다고……?

“20년 동안 계속 이곳을 벗어날 생각만 했었지만……그, 뭐라고 해야 하지? 미운 정? 아, 그래. 그거겠네. 미운 정이 들었다고 해야겠지? 원래라면 소멸시켜도 속이 시원찮은 시공차원이다만, 그래도 명색이 내가 만든 거고 지금까지 경험한 곳이니……완전히 없애기도 좀 그렇더라고.”

고운 정 미운 정 다 들었다고 하는 말은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니었군. 20년 동안 이곳을 벗어날 생각만 하던 유린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니 나도 좀 놀라웠다. 역시 시간이 약이긴 약인가 보다. 그토록 혐오하고 벗어나고 싶어 하던 곳마저 남겨두자고 마음먹게 만드는 거 보면.

“머리를 너무 굴려 대서 읽는 내가 좀 안쓰러워졌을 정도니까……일단 알려줄게. 내가 다른 시공차원으로 넘어가면 이 시공차원은 소멸할 거야.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는데 거길 남겨놓을 필요는 없잖아?”

역시……내 생각대로였다. 이놈이 이곳을 벗어나면 하렘 어드벤처는 소멸하는 거군. 가설 중 하나가 또 맞긴 했지만 기쁨보다는 슬픔과 걱정, 분노가 앞섰다. 나나 아내들한테 좋은 소식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아름다운 사람은 떠난 자리도 아름답다는데 그냥 놔두면 안 돼?”

화장실에서 읽었던 문구를 들이대자 유린은 킥킥대며 손을 휘저었다.

“떠난 자리가 아름다우면 보기 좋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건 아니잖아? 게다가……아름다운 사람들 중 일부는 자기가 떠나는 자리를 어지럽히고 가는 사람들이라고. 아름답지 않은 사람들만 자리를 어지럽히는 줄 알아?”

망할.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두 뒤처리를 깨끗하게 하고 나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럽다며 뒤처리를 적당히 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외모에 관계없이 자기가 떠나는 자리를 최대한 깨끗하게 정리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마을이고 사람들이고 모조리 찢어발기고 싶은 마음이지만……미운 정이 든 것도 있고, 내 은인(恩人)인 니가 그렇게 이 세상을 사랑했다니 남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 그런 거 있잖아? 측은한 사람 보면 도와주고 싶은 거.”

“……내가 측은해진 대부분의 원인은 니 탓이라고 생각하는데.”

유린은 그것도 맞는 말이라며 담백하게 인정했다. 장난 빠냐?

“내가 이곳을 소멸시킨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시 내 힘이 될 거야. 이 세상을 만드는 데에 썼던 힘들이 모두 나한테 돌아올 테니 지금 이상으로 강해지겠지.”

안 그래도 강한 놈이 더 강해진다고? 진짜 답이 없군. 이미 이길 수 있고 없고의 문제에서 벗어난 놈이지만 이보다 더 강해진다니. 인정하긴 싫었지만 유린은 틀림없는 신(神)이었다.

“이 시공차원계를 벗어나는 일은 기대도 되는 일이지만……솔직히 불안한 게 더 많아.”

불안해? 저렇게 센 놈이? 안 그래도 너무 강해서 저항할 마음도, 생각도 사라지게 만드는 놈이 불안하다니. 믿겨지지가 않았다.

“이봐, 나도 감정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해봐. 니가 제2의 고향으로 삼았던 프레그넌트를 떠나 다른 마을로 가게 된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 거라 생각해?”

“……불안하겠지.”

현재 그의 기분과 똑같을 것이라 말하자 유린은 기뻐하며 내 곁으로 더 다가왔다. 아, 저리 가라고!

“이미 몸까지 나눈 사이끼리 왜 그래? 뭐, 됐고. 니 말대로야. 내가 아무리 신이고 강하다지만 시공차원계는 절대 만만하게 볼 곳이 아냐. 이상한 곳에 가서 험한 꼴 보는 건 나도 싫으니까. 너도 나 때문에 여러 가지로 험한 꼴 못 볼꼴을 당해왔으니 알 거 아냐?”

지 입으로 저런 걸 말하다니. 한 방 갈겨주고 싶었지만 부질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고개를 저으며 그 의견에 찬성했다.

“여기에 계속 있는다는 선택지는 없어? 이 세상을 원래대로 만들어 함께 산다거나.”

부질없는 설득에 가까운 선택지에 유린은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거 같았으면 애초에 소환도 안 했겠지. 말했잖아? 내 육체를 만들 수 없고 이 세상 모든 존재들한테 영혼도 만들어줄 수 없었다고. 스스로 행동할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는 세상. 오직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기 위한 세상에서만 살아야 한다니.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말라고.”

미운 정이 들긴 했지만 그만큼 증오도 컸기에 유린은 싸늘한 목소리로 이 세상을 부정했다. 하긴……아무리 잘 만들어도 다른 사람들 좋은 경험만 시켜주는 세상이라면 나도 관리하기 싫겠다. 떡고물이 없는데 뭐 하러 노력을 하고 싶겠어?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들 하지. 준비를 충분히 해놓으면 어떠한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어느 정도의 대처는 가능해. 어느 시공차원에 가든 간에 내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도록 손을 써두는 게 현명한 판단이기도 하고. 이제 알겠지? 내가 왜 이 세상을 막장으로 만든 건지?”

“엉망으로 만들든 막장으로 만들든 간에 소멸시켜 니 힘으로 삼을 테니까.”

유린은 정답이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빌어먹을, 그거 하지 말라니까. 쓰다듬어질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유린이 원래 쓰던 이 몸은 내 생각 이상으로 민감한 것이었기에 최대한 접촉을 삼가려고 했지만 저놈이 대놓고 쓰다듬으니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니가 수도로 오기 위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 몸의 전투력은 더 강해지니까. 지속적인 전투가 가능하도록 만든 것도 있었지만……짜증나던 고깃덩어리들이 괴물이 되는 걸 보니 꽤 즐겁기도 했어. 애지중지 키워온 세상이 단 한 순간에 지옥으로 바뀌니 좀 놀랍기도 했고. 공든 탑이 무너지냐고 하지만……무너지는 게 아니라 무너트리는 사람이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잖아?”

원래 미친놈이었지만 새디스트 기질도 추가해야겠군. 내 무례한 생각에 관계없이 유린은 계속 입을 열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얘도 친구나 친한 사람이 없긴 없나 보다. 그러니까 자기 계획이나 생각을 줄줄이 읊어대는 거겠지.

“너도 그렇지만 내가 소환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친구가 없었거든. 자기는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 그만두지? 어, 음……아 맞다. 공든 탑. 거기까지 이야기했었지. 내가 지금까지 관리하던 세상을 부수고 망가뜨리는 건 의외로 즐거웠어. 거기에 휘말리는 너를 보는 것도 즐거웠고. 더 이상 관리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편해지더라.”

그 마음은 안다. 수능 끝난 후에는 수능 치기 전까지 열심히 풀던 문제집을 찢어버리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더 이상 자기가 노력할 필요가 없게 된다면 그 전까지 가지고 있던 물건 등을 박살내는 사람은 꽤 많았기에 유린의 말에 공감했다.

날 가지고 놀았다는 것에 대해 분노하지 않냐고? 분노는 하는데 더 이상 분노해봤자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보다는 이 하렘 어드벤처를 남겨둘 수 있다는 말에 더 흥미가 있었다.

“이제 관리할 필요도 없고 되돌릴 필요도 없는 세상이지만……이대로 가자니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더군. 과정이 어찌 됐든 여자가 되어 아기까지 가지게 됐으니까……이봐. 그렇게 꼴아보지 말라고. 나도 내 나름대로 죄책감과 미안함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말 하는 거니까.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지. 가기 전에 아주 조금. 이 하렘 어드벤처의 일부만을 남기고 다른 시공차원으로 가는 건 어떨까 하고.”

일부? 이 세상의 일부라고 하니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세상 일부를 잘라낸다는 건가? 마치 커다란 피자 한 판에서 피자 조각을 잘라내듯이?

“이미지는 비슷해. 너도 알겠지만 이 세상은 니가 살던 지구처럼 커다란 곳이 아냐. 마을이나 수도. 야만족이 살던 숲을 합쳐도 8개 정도밖에 안 되는 구역이지. 8개 정도 되는 구역 중 한 곳만 남기고 나머지를 소멸시켜도 내가 얻는 힘은 굉장할 거야.”

이 세상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던 사람들에 대해 ‘왜 이 사람들은 기존의 마을이나 수도 외에 다른 곳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라고 생각했었는데……그게 당연한 거였다. 정말 기존의 수도나 마을, 숲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쟤 입으로 방금 말했으니까.

“마을과 수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니 새로운 땅에 대한 동경이나 모험심도 없었던 거지. 자기 집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아는 사람이 집을 돌아다닌다고 모험심을 불태우거나 하지는 않잖아? 내가 그렇게 만들긴 했지만 꽤 괜찮은 생각이었어. 쓸데없는 모험이나 행동 때문에 곤란해지는 건 딱 질색이었으니까.”

“곤란한 일이 뭐가 있어? 이 세상의 사람들은 니 명령을 안 어기잖아.”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묻자 유린은 살짝 비웃음을 띠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말이지. 내가 소환한 사람들 잊었어? 12명이나 죽었어. 그것도 마을에도 도착 못 한 채. 고작 숲이나 황야에서 목숨을 잃을 정도인데 하렘 어드벤처가 지금보다 더 넓었다면? 쓸데없는 모험심이나 미지(未知)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면? 기껏 소환한 용사가 그런 거 때문에 죽으면 넌 기분이 어떻겠어?”

좆같겠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존나 공들여 소환했는데 이상한 모험심이나 행동 때문에 죽으면 말짱 황이잖아. 생각만 해도 짜증났기에 표정을 찡그렸고 유린은 내가 공감(共感)한 것이 기뻤는지 더 빠르게 말을 해댔다.

“그래, 기분 나쁘지? 그래서 최대한 배제했어. 내 생각이나 상상을 벗어나는 일. 사고가 일어날 만한 요소를 최대한 배제(排除)해둔 덕분에 겨우 여기까지 왔다고. 내가 아무리 신이라지만 모든 일을 다 컨트롤하기는 좀 그러니 말이지.”

내가 성장하는 걸 일일이 체크하고 따지는 유린을 생각하니……웃겼다. 확실히 맞는 말이지. 내가 어린 아이도 아닌데 ‘앗, 오늘은 근접 전투에서 활약했구나! 그럼 근력을 좀 더 키우게 근접 전투형 괴물을 더 보내야 하나?’ 같은 생각을 하며 관리하는 건 좀 아니었으니까.

“참 웃긴 일이란 말이지. 내가 만든 세상을 증오할 정도로 싫어하는 것도 그렇지만……그런 주제에 없애자니 안타깝다고 느끼다니. 내가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너희 덕분이라고 생각해.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테니 말이야.”

저렇게 말해주니 기쁜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줬으면 좋겠네 싶었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의 존망(存亡)이었으니까.

“그래서 특별히 이 세상의 일부를 남겨두기로 했어. 너희를 위해 아예 괴물도 없는……니가 예전에 나한테 빌며 말했던 공간. 니가 그토록 원하던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세상. 진정한 ‘하렘 어드벤처’를 말이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정말로? 정말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아내들과 다시 가족으로서 지낼 수 있단 말인가? 더 빨리 두근거리던 가슴을 잠시 멈추게 만든 건 유린의 한 마디였다.

“단, 조건이 있어.”

개새끼. 맨입으로 들어줄 거 같다는 생각은 안 했다만 끝까지 이딴 식으로 나오는군. 기쁨에 가득 찬 마음이 다시 분노로 채워지는 감정이 얼마나 더러운지 아냐?

“알아. 근데 야. 생각을 해봐. 난 말이지. 내 목숨과 존재를 위해 필요한 힘의 일부를 떼어 놓고 가려는 거야. 다른 시공차원에 가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더 강한 힘이 있어도 안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에 너희를 위해 서비스를 하려는 거라고. 조건 정도는 내거는 게 당연한 처사 아니겠어?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서.”

“상식적으로 생각을 하자면 니가 나나 아내들을 위해 배려해야 하는 게 상식 아냐? 넌 니가 원하는 걸 모조리 챙기고 얻었지만 우리는 대부분 다 잃고 이 지경이 됐잖……윽!”

갑자기 머리끄덩이를 잡아챈 유린은 살의(殺意)를 담은 웃음을 지은 채 내 말을 끊었다.

“난 지금 존나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넌 모르지? 시공차원계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내가 괴물이라고? 거긴 나 이상으로 미친놈들이 득시글대는 곳이야.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곳이라고. 내가 이곳이 싫어서 나가긴 하지만 어쩌면 여기 있는 게 행복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미친 우주에 발을 내딛는데……너희를 위해 서비스하는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아직도 모르는구나?”

“으, 큭……모르지. 너 같은 병신 마음까지 이해해, 윽! 아앗! 아기! 아기잇!”

가볍게 주먹으로 쳤을 뿐이지만 배 안에까지 전해져 오는 충격에 난 비명을 질러댔다. 아기를 보호하려는 모성애(母性愛)는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나를 보며 유린은 킥킥대며 손가락질을 한다.

“하핫! 알겠지? 넌 고작해야 그 정도인 존재야. 배에 주먹 한 대 맞았다고 아기 걱정이나 하는 병신을 위해 내가 여기까지 신경을 써주는데 감사히 여길 줄은 모르고 저항이나 바락바락 해대다니……퉷!”

놈의 침이 내 정수리 부근에 닿았지만 그걸 닦을 생각마저 나지 않았다. 입에서 침이 흐르는 내 얼굴을 부여잡은 유린은 악마 같은 표정으로 속삭인다.

우리를 위한 공간. 하렘 어드벤처의 일부를 남겨줄 수 있는 조건을 들은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 절대 겪고 싶지 않은 일에 스스로 뛰어들 수밖에 없다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놈의 말을 철썩 같이 믿을 수는 없었지만……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었다. 유린은 직접 인정했다. 이 세상을 없앨 거라고. 그렇다면 하다못해 나나 아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 하렘 어드벤처의 극히 일부분이라도 좋으니 생존이 가능한 곳을 확보해야만 했다.

놈이 내건 조건. 그것은……모두를 성적(性的)으로 만족시켜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모두라는 그 말에는 유린뿐만 아니라 내 아내들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고, 난 그 말을 들은 후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이미 나를 증오하고 저주하는 모두를 위해 내 몸을 바쳐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 작품 후기 ============================

문서작업은 늘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하는데 노트북을 1년 이상 가지고 다니다보니 너무 무겁고 불편하더군요. 단순히 글만 작성하는 거라면 태블릿과 블루투스 키보드만 가지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충전기도 마이크로 5핀이니 핸드폰이랑 겸용으로 충전 및 사용할 수 있고, 노트북에 비해 크기나 무게가 훨씬 더 줄어드니 부담도 줄어드니 말입니다.

근데 이놈의 빌어먹을 습성은 '태블릿으로 문서작업이 되겠냐 임마? 당연히 노트북을 써야쥐~!! 그러니까 존나 무거운 거 들고 얼른 걸으라고 병신 새꺄 ^^'라며 디스와 욕설을 던집니다.

혹시나 표지 작성이나 복잡한 작업할 때 컴퓨터 쓸 수 있으니 가져가라는 말. 좋게 말해 유비무환이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언제 쓸지 모르는 기능을 위해 늘 무거운 걸 가지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죠. 안 그래도 지금 쓰는 노트북은 중고고 A/S 받는 것만 해도 돈이 더럽게 깨지는데 이걸 또 몇 년이나 써야 할지……여러 모로 난감한 상황입니다.

예? 본편이 미쳐돌아가는데 왜 후기는 이상한 것만 적냐고요?

본편이 미쳐돌아가는데 후기까지 미쳐돌아가면 좀 그렇잖아요.

평소에 '웃우우우────웃!'도 약 빨고 막 적는 거 아니냐고요?

그거는 너무 자주 적어서 주말 행사처럼 변해버렸습니다.

독자분들도 '이 작가 또 이러네 ㅋㅋㅋ'라고 받아들이실 겁니다.

사람은 어느 환경에든 적응하기 마련이고

독자는 약빤 후기라도 적응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건강한 정신을 멀리 하고 약을 자주 빨도록 합시다.

자주 빨면 빨 수록 내성과 SAN 수치가 팍팍 늘어날 겁니다.

이아! 이아! 크툴루! 파타간!

잡담은 이 정도로 하고, 드디어 다음 편부터 클라이맥스로 급강하하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문맥을 보시면 그게 무슨 뜻인지, 대부분의 독자분들은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떡밥도 실컷 던졌지만 지금까지 제 정신나간 글을 봐주신 분들이니 말입니다.

작가가 무슨 약을 빨았길래 이렇게 정신줄을 놓은 건가 싶을 정도의 글만 써왔습니다. 이제 와서 제가 무슨 전개를 보여드릴지는 다들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내일부터 업로드될 테니까요.

많이 모자란 제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심(약 빨고 '히힛, 이 소설은 똥이야! 이 소설을 쓴 작가도 똥이라고! 오줌 발싸!)을 잃지 않도록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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