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4 「21-3 : 지옥(地獄) (3)」 =========================
TS라는 단어가 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단어지만 그 뜻을 풀어보면 의외로 간단한 뜻을 지닌 단어였다. TS란 Trans-Sexual. 한자로 치자면 성전환(性轉換). 쉽게 말해……성별이 변화한다는 뜻이었다. 성반전(性反轉)이라는 단어도 있지만 이것과 성전환은 꽤 차이가 있는 단어였다. 모르는 사람은 두 개 다가 똑같아 보이겠지만…….
성전환(性轉換)이라는 것은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이나 소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한 번 정도는 볼 법한 테마 중 하나였다. 남성이 여성으로, 여성이 남성으로 변한 후 겪게 되는 일상생활이나 곤란함 등은 보통 사람들한테 꽤 신선한 충격과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남자가 여자 학교에 가서 생활하거나 여자가 남학교에서 볼 꼴, 못 볼꼴을 보며 당황하는 장면은 꽤 많은 즐거움과 당황스러움을 선사했기에 사람들은 ‘아, 저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이벤트는 일시적인 성전환에 의한 것이며 평생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서로 다시 원래의 몸. 이 경우에는 원래 자신의 성별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게 된다. 그게 현실적이며 독자들이나 본인들한테 좋은 엔딩이니까.
하지만……성전환을 당해 겪는 이벤트는 늘 즐거운 일만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작품. 흔히 말하는 ‘전체연령가’에서는 좀처럼 안 보여주는 것이지만……성전환을 하게 된 상태에서 이런 생각을 한 번 이상은 해볼 수 있다.
【만약 남자가 여자로 바뀌게 된다면 섹스는 어떻게 하는 거지? 여자가 되면 임신할 수 있는 걸까?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체적으로는 임신이 가능한 걸까? 그걸 느끼게 되는 여자는 과연 남자의 정신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와 같은……꽤나 맛이 간 생각을 말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내가 살던 세상에 성전환(性轉換)은 수술을 통한 방법밖에 없었다. 성전환을 한 다음에도 관련된 호르몬을 맞거나 하는 등의 제약이 있었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가볍게 손을 댈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만…….
하지만 ‘남자였다가 힘이 없는 여자로 변해버려 남자들한테 강간 & 윤간당한다’라는 컨셉은 꽤나 꼴릿꼴릿하고 자극적인 것이었기에 자주 딸감으로 쓰고는 했었다. 이와 같은 컨셉의 내용을 주로 다루는 19금 동인지나 상업지 또한 존재했었고, 유명한 동인지 작가가 그린 내용은 19금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었었다.
건강한 남자가 순식간에 좆물과 자지를 원하는 여자로 전락한다. 여자들이 보면 얼굴을 찌푸릴 내용이었지만 남자들한테 있어서는 ‘힘 있고 잘난 남자가 앙탈 부리는 여자로 변해 하반신을 흔들어댄다’라는 내용으로 다가왔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딸감이 되었다. 취향 타는 사람들은 아예 안 보는 경향도 있었지만……나는 꽤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눈치가 좋은 사람이라면 아마 벌써 눈치 챘을 것이다. 나는 꽤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라고 적은 부분을. 과거형(過去形)이라는 것 자체가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라는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나는 몸과 영혼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여자의 몸에 들어가게 됐다. 27년 간 남자로서 지냈던 내 정신은 순식간에 여자처럼 변했고, 유린은 그런 나를 강제로 범했다. 몸이 바뀐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한 강간은 상상 이상의 고통과 충격을 나한테 주었고, 나는 그로 인해 극심한 공포와 절망을 맛봐야만 했다.
유린한테 강간당할 때의 내 상태는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은근히 남자의 물건을 원하는 것부터 시작해 온갖 아양을 떨며 교태를 부리는 그 상태는 도저히 27년 간 남자였던 놈이 보일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점에 의문을 품은 나는 두 가지 가정(假定)을 생각했다.
강간을 당한 후에 이런 생각이나 하는 나도 참 미친놈……아, 아니군. 여자가 되어 버렸으니 미친년이라 해야 하나. 임신을 당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이런 가정을 한들 아무런 소용도 없겠지만……나 자신의 변화는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인 것이었기에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답을 찾아야만 속이 시원해질 거 같았다.
1) 정신 상태에 손을 댔다.
- 내 육체와 영혼을 얻은 유린은 더 이상 나한테 무언가를 지키거나 할 의무가 없다. 내 정신 상태를 여자와 같은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면 내가 여자처럼 행동하거나 말했던 게 납득이 간다.
2) 육체에 의해 점점 정신 상태가 달라진다.
- 여자가 된지 하루도 안 됐는데 이렇게까지 변한 것은 유린이 준 육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세상에서 여자는 어디까지나 남자를 위한 존재. 아기를 낳는 것, 임신하는 것을 무엇보다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육체를 받았으니 그 영향이 나오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아무리 남자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지만 임신과 아기, 쾌락에 굴복하는 몸(하드웨어)을 가지고 있다면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소용없는 짓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몸이 남자(유린)를 바라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이나 거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몸도 강제로 받게 된 건데.
난 2번이 1번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 정신을 건드렸다면 이런 생각 자체를 아예 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내가 신세린임을 자각할 수 있으며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 왜 그런 태도를 취했는가 등을 사고(思考)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 자체가 아직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나름 납득할 수 있는 답을 발견한 것은 좋았지만……결코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내 몸은 여전히 예전의 유린이 쓰던 몸이었고, 가정 2번대로 ‘육체 때문에 정신 상태가 점점 변한다’라는 건……이런 생각을 하며 위화감을 느끼거나 의심하게 되는 사고능력 자체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놈의 식사가 차려진 식탁 위에 올라가 스스로 엉덩이를 내밀며 자지를 요구하던 그 당시를 생각하니 지금도 몸이 벌벌 떨렸다. 그래, 똑같았다. 몸을 지배당할 때와 무엇 하나 다를 바가 없었다. 내 의지나 의식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이는 몸. 내가 아무리 거부한다고 한들 지배당하고 조종당한다면 아무런 말도,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내 상태가 나빠질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실제로 겪은 강간과 질내사정. 임신은 절대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다. 19금 동인지나 상업지에서는 ‘여자로서 겪는 쾌감이 이렇게 좋은 것이라니……나, 앞으로도 걸레 창녀 노릇 계속할 거야♡ 해피해피♥’라며 남자의 자지를 서게 하는 대사를 지껄이곤 했었다.
내가 남자였다면 그 대사를 기억하는 것만으로 자지가 불끈거렸겠지. 하지만……현실은 달랐다. 전희(前戱)조차 없이 박힌 내 자지는 뜨겁고 끔찍한 것이었으며,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한테 강간당했다는 사실은 지금도 내 정신 상태를 망가트릴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원래라면 내 음문(陰門)에 자기 물건을 박은 채 식사까지 해야 했지만 난생 처음 겪은 섹스(정확히는 강간이다만) 때문에 씹창이 된 나를 던진 유린은 나를 침실로 데려가라 했다. 아마 놈은 기껏 얻은 내 몸으로 아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망할 자식…….
생각 같아서는 벌떡 일어나 놈한테 한 방 먹여주러 달려가고 싶었지만……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다리 사이의 소중한 무언가가 뚫렸을 뿐만 아니라 정기적인 피스톤 운동까지 당해서 그런 걸까? 걸으려 할 때마다 하반신이 아팠다. 아픔이 조금 가자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하반신에 무언가가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기에 불쾌감과 짜증만이 더해져 간다.
아내들한테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겨우 한 번. 그것도 완전히 당한 것도 아니고 섹스만을 한 것뿐인데도 이렇게 녹초가 되어버리다니. 동인지나 상업지 같았으면 ‘쎾쓰 걩쟝햬에에~평생 육노예로 살레에엣!’이라며 아헤가오 더블피스를 했겠지만……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현실과 창작물은 다른 거야.”
그래. 다르다. 이 세상에 오면서 느꼈지만 내가 여자가 되어 강제로 범해지는 경험까지 하게 되니 더욱 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살던 현실이나 이 ‘하렘 어드벤처’는 동인지나 상업지에 나오는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동인지나 상업지에 그려져 있는 것들은 결국 ‘창작물(創作物)’에 지나지 않았다. 우습군. 그런 당연한 것을 이제 와서 깨닫다니.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늘 ‘현실과 창작물은 다른 거다’라고 생각했는데……설마 이런 식으로 또 깨닫게 될 줄이야. 자기의 순결(처녀막)까지 잃어가며 배운 게 이미 알고 있었던 거라니. 한숨을 쉬며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내가 임신해버리다니……너무나 어처구니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흔히 과부나 미혼모(未婚母) 등의 단어를 말하곤 하지만 안에 내포된 의미나 사정, 배경은 꽤 다른 것이었다. 과부(寡婦)는 남편이 죽어 혼자 사는 여자라는 뜻이었다. 오래된 말로 ‘홀어미’ 또는 ‘미망인(未亡人)’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다.
미혼모는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아기를 낳거나 입양하는 여성을 뜻했다. 임신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기를 가져 낳게 된 경우에도 해당됐기에 꽤 뜻이 넓은 단어였지. 설마 내가 여자도 모자라 미혼모까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것도 몸이 바뀐 지 하루도 채 안 지났는데.
“으, 읏……. 아기야…….”
스스로를 남자라고 생각했고 여전히 이 몸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내 육체는 뱃속의 아기를 부르며 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점점 더 여성스러운 모습과 태도, 사고방식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마저 모를 정도로 변한 나를 보니 또 눈물이 왈칵 나와 버렸다. 망할…….
아기를 가지게 된 것도 문제였지만 그거 외에도 문제는 잔뜩 남아 있었다. 출산이나 양육 같은 건 둘째 치더라도……이 아기의 아버지가 유린. 육체적으로는 내 정액에 의해 착상된 아기라는 점이었다. 자기 몸에서 나온 정액 때문에 임신하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TS부터 시작해 온갖 판타지가 난무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옷조차 없어 침대 시트로 몸을 가린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도망? 어디로 도망을 가야 한단 말인가? 이 왕궁 밖으로 나가면 괴물이 득실거리는데?
자살? 알고 있잖아. 이 지경이 됐는데도 ‘살고 싶다’라고 강하게 소망하는 마음을. 여자가 됐든 임신이 됐든 간에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고 싶다’라는 마음 때문에 자살조차 선택할 수 없게 됐다.
예전의 조상이나 여자들은 정조를 빼앗겨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게 될 경우 목숨을 끊고는 했었지만……그런 용기는 차마 들지 않았다. 희망은 이미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지만 목숨만큼은. 이 목숨만큼은 어떻게든 부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목숨마저 잃어버리면 정말 모든 것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럼……목숨 외에 내가 가지고 있는 건 뭐지?’
희망도, 미래도. 모조리 다 빼앗기고 부서졌다. 심지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영혼까지 빼앗겼는데 뭘 어떻게 저항을 해야 잘 했다고 소문이 날까? 끝까지 맞서 싸웠다고 칭찬을 들을 수 있을까? 바보 같은 생각에 킥킥 댔지만 기분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약간 웃는 걸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은…….
무서웠다. 나한테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이 ‘예전에는 결코 겪을 리 없었던 일들’로만 이루어졌다는 것도 무서웠고, 내 뱃속에 있는 아기의 미래도 걱정됐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주제에 걱정할 것, 무서워할 것이 이토록 많다니. 걱정할 거리는 절대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고 농담 삼아 말했었지만 그게 실제로 이루어질 줄이야.
그래, 예전에도 걱정할 거리는 가득 있었지. 그치만 몸을 빼앗기거나, 강간당하거나, 아기를 가지게 되는 일. 남자로서 겪을 리 없던 일들을 당했던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희망을 가지고 어떻게든 싸워갈 수 있었지. 지금 생각하면 추억이자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긴 하다만.
아내들의 상태 또한 걱정됐다. 아무리 내가 그녀들한테 잘못했다지만 아내들의 상태는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나에 대한 증오나 실망. 다양한 감정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고깃덩이’ 같은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당연하다는 듯 섹스를 요구하는 그 모습은……아무리 봐도 지배당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육체와 정신밖에 없는 것도 모자라 하반신에 물건을 박아대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좋다며 비웃던 유린. 내 몸을 지배하고 있는 게 나든 유린이든 간에 온갖 아양을 부리며 사랑을 갈구하는 그 모습은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예전에 보던 아내들은 그나마 이성이라도 있었지만……지금의 그녀들한테는 이성의 조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유린은 내가 그녀들을 욕하며 저주했던 것을 다 보여줬다고 했었다. 그녀들도 나한테 실망하며 우유부단함을 비난하고, 욕하고, 저주했겠지. 그 건에 대해서는 미안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었다. 누가 뭐라든 간에 내가 한 짓이었으니까.
억울하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그 모양 그 꼴로 살 수 있냐고 욕할 수 있겠지만……나도 사람이니까. 힘에 겨우면 화를 내기도 하고 욕을 내뱉기도 했다. 하물며 아내들이 나를 버린 채 유린(당시에는 카인. 이름이 헷갈려서 지금은 유린으로 부르고 있다만)한테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부을 수밖에 없었지.
내가 눈앞에서 범해지고 있는데도 킥킥대던 아내들을 생각하니 더 우울해진다.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걸까? 이미 모든 걸 빼앗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들을 위로할 수도 없거니와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내가 한다고 한들 지금 상태로는 받아주지도 않을 거다.
백 보 양보해 받아준다고 치자. 그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타개책(打開策)이 되냐고 묻는다면……그것도 아니었다. 존나 운이 좋아 아내들이 모두 제 정신을 찾아 함께 저항한다 치더라도 상황은 타개할 수 없었다. 이미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까지 와버린 거다.
“……내가 신(神)이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바보 같은 소리를 읊조렸다. 유린은 내 생각을 읽고 있을 테니 분명 엄청 비웃고 있겠지. 신(神)이라니. 그것이야말로 불가능한 일 중 하나였다. 자그만치 20년 동안 혼자 있었던 유린마저 저렇게 미쳐 날뛸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졌다. 나 같이 유리멘탈에 툭하면 눈물을 흘리는 놈이 신이라니. 어불성설(語不成說)도 정도가 있는 거다.
왜 나는 이런 곳에 와버린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야, 이건 너무한 거 아냐? 보통은 자기를 소환한 자가 나쁜 마음이나 계획을 가지고 있으면 ‘날 소환해준 건 고맙게 생각한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그 사악한 계획과 야망을 진행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라며 대치하거나 대립하기 마련이잖아.
근데 왜 나는 몸과 영혼을 빼앗긴 채 강간을 당한 것도 모자라 임신까지 당하는 추태(醜態)를 보여야만 하는 걸까?
대립? 신과의 대결? 말 그대로 영혼까지 탈탈 털렸는데 대결은 무슨 얼어죽을. 그 빌어먹을 놈의 아기를 뱃속에 가지게 되는 굴욕까지 당해버렸는데 뭐가 대결이고 뭐가 주인공이란 말인가? 너희는 주인공이 TS당해 임신까지 당하는 거 봤냐?
19금 동인지나 상업지에서는 이런 시궁창 같은 상황이 꽤 자주 묘사되곤 했다. 희망으로 가득 부푼 여자 용사나 엘프가 비참한 꼴을 당하며 점차 나락으로 떨어지는 묘사가 일품이었지. 그걸로 몇 번 딸을 쳤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다. 점점 타락하는 여자를 보며 자지를 불끈 세웠던 게 엊그제 같은데……이런 꼴이 될 줄이야.
뭐? 지금 여자가 되어 임신까지 했는데 그딴 걸 생각할 마음이 드냐고? 어……응. 든다. 나 일단 남자거든요? 몸이 이렇게 됐지만 정신은 27년 간 남자로 살아왔고 약 9~10개월 간 온갖 향락(享樂)을 누려왔는데 갑자기 여자가 되어버리다니! 너희 같으면 이걸 ‘아, 그렇군요! 전 앞으로 여자로 살아가겠어요!’라며 단번에 받아들일 수 있겠냐?
한 때 야인시대(野人時代)에 나와 2016년 현재까지도 유행하고 있는 심영 선생. 그분이 ‘내가, 고자라고? 성불구자라니……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고자라니……? 내가 고자라니……!?’라며 소리를 쳤던 게 기억난다. 총알이 영 좋지 못한 곳을 스쳐 지나가 그렇게 됐었다만……내 상황은 그것 이상으로 심각한 것이었다.
‘여자라니.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여자라니……? 내가, 여자라고? 27년 간 남자로서 살아왔던 내가……여자가 됐다고? 그, 그럼……앞으로 여자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남자로서 온갖 여자들의 자궁에 자지 밀크를 듬뿍 뿌려줬던 옛날로는 돌아갈 수 없단 말인가? 으, 으아아아……내가, 내가 여자라니……내가 여자라니잇────!?’
“……야, 약간 재미있다 이거…….”
어이구, 화상아! 혜린이가 날 향해 욕하며 매몰찬 표정을 짓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런 말을 했다면 틀림없이 ‘넌 대체 뭘 먹고 살아 왔길래 사람이 그러냐?’라며 온갖 핀잔을 줬겠지. 농담 삼아 저렇게 말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에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며 온갖 욕을 했을 것이다.
원래의 나였다면 그런 혜린이의 핀잔에 적당히 대응하며 그녀와 다시 사랑을 나누었겠지만……더 이상은 그런 짓도 할 수 없었다. 여자가 된 것은 둘째 치더라도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대체 뭘 한단 말인가? 레즈비언 섹스? 으음……이런 몸이 됐지만 그건 한 번 해보고 싶네. 이왕 여자가 됐으니 즐겨보고 싶은 건 즐겨봐야 덜 손해라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이런 소리를 들었으면 또 노답 새끼, 씹변태 병신 새끼라며 온갖 욕을 날렸겠지만 더 이상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드니 바보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차라리 욕이나 핀잔을 듣는 게 몇 배는 낫겠지. 기분이 나쁘고 사이도 별로 안 좋아지겠지만……지금 내가 있는 상황보다는 몇 십 배 나을 테니까.
유린은 이제부터 뭘 할 생각일까? 이 모든 일의 원흉을 생각하니 가슴이 무거워진다. 조금 전까지 장난삼아 말했던 것들이 모조리 어둠에 침식되는 느낌이 들었다.
겨우 그놈의 이름과 모습 한 번 생각했다고 기분이 이렇게 다운되다니. 그 정도로 유린이라는 존재는 거대했다. 신(神)이라는 위치와 권위는 더 이상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레벨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놈의 목적은 이제 무엇일까? 유린은 이미 자기가 원하는 것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놈이 바라던 대로 좆 빠지게 좆뺑이를 돌던 내 몸은 놈의 것이 됐다. 영혼까지 얻었으니 틀림없이 좋아 죽겠지.
자기는 좋아 죽겠지만 나는 모든 것을 빼앗겨 죽고 싶은 심정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유린의 목적……대부분의 것은 이루었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중얼거렸다.
“다른 시공차원계로 간다……?”
유린은 이곳이 싫다고 말했다. 자기가 만든 곳이지만 정작 자기가 원하는 것. 다른 시공차원계로 갈 수 있는 육체를 만들거나 할 수는 없었고, 이 ‘하렘 어드벤처’에서 20년을 자기 혼자 살았기에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싫어한다는 반응을 보였었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육체는 얻었지만 아직 다른 시공차원계로 넘어갈 수는 없다고 했었다. 나한테서 빼앗은 몸으로 뭘 할 수 있고, 그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를 테스트한다 했지. 나를 상대로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느끼지 못했던 여자의 슬픔과 공포, 고통. 쾌감까지 알려준다며 지랄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짜증이 물씬 솟아오른다.
내 몸을 써서 다른 시공차원계로 튀어버리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지만……그 몸을 써서 쾌락을 마음껏 누린다는 것도 문제였다. 지금까지 지겹다고 생각했던 세상. 스스로 가치를 찾을 수 없었던 세상을 내 몸으로 마음껏 누릴 거라 생각하니 아주 신이 났겠지.
내 몸이나 영혼을 제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받을 걸 다 받은 나를 마음껏 범한다고 했으니 앞으로도 나를 계속 범하겠지.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실컷 행동할 거고, 어느 정도 테스트가 끝나면 다른 시공차원계로 넘어갈 것이다.
저 말을 한지 하루도 안 돼서 나를 범했으니 일단 목적 중 하나를 달성하긴 했지만……불안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유린이 이 하렘 어드벤처를 벗어난 후의 일’이었다. 이곳의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유린이 이 세상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간다면……이곳은 어떻게 되는 걸까?
유린이 이동하면 그 ‘시공차원’이라는 곳과 하나가 되는 걸까? 그럴 리는 없겠지. 자기의 육체를 만들 수 없었기에 나 같은 놈을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나나 다른 사람들. 이 세상에 있어 유린은 신일지 모르지만 다른 시공차원에 가서도 그런 지위나 권력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세상을 가만히 놔둘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를 여자로 만든 것부터 시작해 수도나 다른 마을의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괴물로 만든 것. 청록색 촉수괴물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이 ‘하렘 어드벤처’의 붕괴는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정확했다.
이 세상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데도 유린은 그걸 돌보지 않았고 수습하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욕망과 사리사욕만을 위해 이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자기 목적을 이룬 후에도 이곳을 향한 그의 시선은 ‘이용가치가 있는 도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마을은 폐허가 되고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다. 이런 시궁창 같은 현실을 전지전능한 신이 굽어 살펴야 하겠지만 정작 그 신인 유린은 이곳에서 벗어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시간 동안 나나 아내들을 써서 온갖 쾌락을 누릴 생각밖에 없어보였다. 이는 즉…….
“……이 세상은 머지않아 멸망하는 거겠지…….”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후회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곳까지 와버린 세상. 그 세상을 장난감처럼 여기는 신. 지금은 그나마 그 세상을 즐기려 하지만……곧 싫증난 어린애처럼 이 세상을 소멸시킬 미래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신(神)이시여. 만약 계신다면……정말 존재한다면……제발 우리를 도와주세요.’
난 기도했다. 원래 종교나 그런 것이 싫었고 무언가를 바라거나 기도한다는 행위 자체도 싫어했지만……이 판국에 오니 기도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유린이라는 이름의 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망했다. 유린 이외의 신한테. 적어도 유린보다는 더 나은 신이 있기를 바라며 조용히 기도를 올리며 다시금 소망했다.
나와 아내. 멸망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이 세상을 제발 구원해달라고…….
============================ 작품 후기 ============================
아,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11월부터 더 추워진다고? 10월인 지금도 콧물이 줄줄 흘러 미치겠는데……더 추워져서 내 코가 씹창이 된다, 이 말인가?
아, 아니……이게 무슨 소리야……비염이라니……축농증이라니……부비동염이라니……비중격 만곡증이라니……!! 앍흐앍흐!
그, 그래……약을 먹으면 나을 거야……응? 뭐야 이거……비싼 돈 주고 산 약인데 왜 먹었는지 2시간 넘도록 효과가 없는 거야?
이런 썅! 난 그냥 행보카고 싶을 뿐인데……아무도 날 이해 못 해! 으아니 차!
날 방해하는 이 세상을 없애버리는 뎃샤아아아아아────앗!
……예?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요? 방금 빤 약이 잘 듣나 어떻나를 시험해본 겁니다. 잘 되는 거 같네요.
안녕하세요, 신세린(메리사)입니다. 날씨는 존나 추워지는데 감기약빨은 더럽게 안 듣네요. 콧물 줄줄 흘러서 미칠 거 같습니다. 제 개인 사정은 됐고, 코멘트에 대한 답변부터 들어가겠습니다.
로리콤MK님, 어허! 그런 것에 빠지시면 안 됩니다! 무릇 혼돈쎾쓰붕가는 혼돈+섹크스+붕가붕가가 결합한 카오스의 집합체입니다. 원래부터 혼돈스러웠던 것들을 세 개씩이나 끼얹었는데 제대로 된 이해와 고찰이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저와 로리콤MK님을 포함한 남자분들은 저런 혼돈 덩어리를 멀리 하고 로리캐릭터를 가까이 해야만 합니다.
로리, 다이스키이이이이────잇!
흐음, 흥! 킁카킁카!
후후, 하반신이 불끈거리는구만!!
예? 경찰 부를 거라고요? 에이, 독자님들도 참! 농담과 진담을 구분 못하시다니! 그래서야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시겠습니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흐르는 물처럼 과거일을 흘려보내고……저 긴따로,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근데 긴따로는 뭐 하는 새끼지……?
고양이새벽님, 기뻐하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런 고양이새벽님의 텐션을 보다 올리기 위해 굳이 한 마디 덧붙인다면…….
'아직 내 배틀페이즈(라 쓰고 세린 괴롭히기라 읽는다)는 종료되지 않았다! 속공 마법 발동! 버서커 소울! 손패를 모조리 버려서 효과 발동! 이 카드는 덱 위의 카드를 넘겨……(이하 생략)'
아직 진정한 절망은 남아있는 데샤아아아아────!
이상입니다. 나중에 최종후기에서 말씀드릴 생각입니다만 앞서 말씀드리자면……불펌 사건으로 인해 당초 생각하던 예정과 전개가 상당히 크게 달라지게 됐습니다. 적당히 시간을 두고 적을 생각이었습니다만 불펌의 범위와 속도가 너무 엄청나 도저히 300편까지는 적을 수가 없더군요.
습작도 생각해봤지만 첫 연재작품이기도 하고 즐겁게 읽어주셨던 분들을 생각하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연재에 임하기로 했습니다. 변명이라고 욕을 하실 수도 있겠지만 첫 연재고 사회 생활도 해야 하다보니 소설에만 올인을 할 수가 없는 처지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자연히 알게 되실 거니 우선은 글을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