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0 「20-9 : 데드 엔드 (10)」 =========================
“괴물은……음, 그래. 니 말 맞아. 인정해. 좆같았어. 계획을 짜긴 했고 그 계획에 필요하긴 했는데……방해가 되기도 했어. 아니, 괴물은 둘째 치고. 원래 니가 살던 세상의 사람들이 너무 약했던 것도 문제였지. 마법이나 판타지의 개념이 거의 없는 세상이라니. 나도 놀랐다니까?”
자기가 있던 곳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인 걸까? 웃음을 터뜨리며 문화적 차이를 말하는 유린은 아무리 봐도 평범한 여자 같았다. 이제 와서 그녀를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오직 혼자 무언가에 몰두해야만 했다니. 나라면 이미 미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나처럼 계획을 짰겠지. 내가 그들을 소환하며 얻은 것은 단순한 희망만이 아니었어. 다른 세상의 존재와 문화, 지식이었지! 세상에……하나 같이 머리에 마법이나 판타지에 관련된 건 존재하지도 않았어! 회사나 학교, 공부! 세상 살기가 너무 어렵다는 생각뿐이었지! 그런 사람들만을 소환해야 했던 나도 참 불쌍하고 딱했어. 꽝만 뽑았잖아? 지금이야 뭐 잭팟 터졌지만.”
내 존재는 어느새 인간쓰레기에서 잭팟으로 상승되어 있었다. 여전히 도구라는 점이 좀 그렇지만 인간쓰레기보다는 낫군.
“괴물이 거슬리는데도 넣은 이유? 간단해. 괴물이나 모험 같은 요소는 육체와 정신을 성장시켜주니까. 정확히는……육체와 사고능력이라 해야 하나? 정신은 성장하든 뒤지든 간에 나랑 상관없지만 육체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장을 해야 했거든. 살아남은 너는 알지? 성장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늘 너를 덮쳐왔었지.”
그랬다. 맨 처음 괴물을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 프레그넌트의 숲에 있던 괴물들의 토벌. 레벨 10이 되자 이벤트처럼 만나게 된 아이나. 아이나의 동생을 데려오기 위한 여행의 시작. 그 모든 것이 마치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이벤트처럼 느껴졌었으니까.
오래 전에 그렇게 느꼈던 게 사실은 계획된 거였다고 생각하니 내 감(感)도 그렇게 쓸모없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감과 경험, 훈련을 통해 많은 것을 이루어 냈지만……어찌 보면 그렇게 알아차리도록 의도적 & 노골적으로 보여준 유린 덕분이기도 했다. 작정 하고 감추었다면 아예 눈치도 못 챘을 테니까.
“힘든 장애와 요소를 극복하면 극복할수록 강인한 신체와 정신을 가지게 되지. 내가 손대중을 하긴 했지만 그 고난을 모두 헤쳐 나온 몸이어야 차지할 가치가 있지 않겠어?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병신들의 몸 따위를 얻고자 했으면 진작에 얻었어. 나한테 필요한 건 나한테 어울리는 육체였지. 니 몸처럼 말이지…….”
그 개고생을 해서 얻은 게……아, 아니군. 잃은 게 내 몸이라니. 저 미친년한테 몸 하나 바치자고 그 병신짓을 했다 이거지? 한숨이 푹푹 나온다. 영혼을 잃은 후에도 한숨만 쉬다니. 난 진짜 인생이 왜 이럴까?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마. 내가 니 몸을 차지했다는 건 그만큼 니 노력이 가상했다는 거니까. 내가 만든 이 세상에서 벗어난다면 내 힘이 얼마나 통할지 몰라. 어쩌면 안 통할지도 모르지. 이 세상 외에는 가본 적이 없으니까. 그럼 그런 때를 대비해 최대한 강인한 육체를 얻어두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어?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도 하잖아.”
그래, 철저하게 준비한 사람한테는 걱정할 것이 없겠지. 하지만 그 준비란 게 내가 노력한 몸, 다른 사람의 피와 땀의 결정체라니. 남이 노력한 것 빼앗아 자기 것처럼 자랑한다고 한들 누가 ‘오오, 너 노력 많이 했구나! 다른 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던 걸 이렇게 빼앗다니! 니가 자랑스러워!’라고 말하겠어? 도둑놈이라고 비난하겠지.
“모르면 장땡이지. 넌 니가 도둑질한 물건을 도둑질했다고 자랑하겠어? 숨기면서 니 것처럼 쓰겠지. 너도 이 세상에서 내가 만들었던 걸 마음껏 누렸잖아? 내가 도둑놈이라면 너는 범죄자야. 강간, 살인 등. 내가 만든 세상에서 벌였던 일을 모두 내 탓으로 돌리지 마.”
책임전가(責任轉嫁)에 관해서는 나나 유린이나 꽤 민감했다. 그 말을 듣는 동안 어쩐지 그녀가 말했던 ‘너(신세린)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라는 말의 정답에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지만……그 느낌은 그녀의 계속된 말에 의해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내 능력이 안 통하면 유사시(有事時)를 대비해 신체 능력이라도 좋아야 살아남을 거 아냐? 널 비롯해 내가 소환한 남자들을 성장시키려 했던 것은 육체가 내가 쓰기에 적합한 정도로 성장할 때까지 도와준 거지, 절대 널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야. 뭐……나름 심심풀이는 됐지만.”
다른 여자가 ‘따, 딱히 오해하지 마! 널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라고 하면 츤데레 같지만 쟤가 말하니 정말 싫어한다는 느낌이 팍팍 전해졌다. 시발, 사람 차별하냐? 남이 노력해서 얻은 육체와 영혼을 빼앗아가면서 더럽게 유세 부리네.
지금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굳이 죽음을 서두를 필요는 없었기에 한숨만 쉬었다. 이걸로 몇 번째 쉬는 한숨이지?
“28번은 넘었을 걸? 참고로 마리아의 침실에서 쉬던 한숨은 카운트 안 했어. 지금까지 28번이나 한숨을 쉬다니. 고민도 참 많다.”
“누구 때문일까요?”
나도 비아냥을 담아 묻자 그녀는 꿈쩍도 않고 대답했다.
“그야 너랑 나 때문이지. 너 기억력 나빠? 말했잖아. 전부 다 내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너는 그나마 즐기기나 했지. 소환된 남자들은 마을에도 못 가고 죽었잖아. 살아남은 건 우연과 운이 겹쳐졌지만 지금까지 니가 즐겼던 모든 엔터테인먼트는 내가 만든 거였지. 적어도 니 육체를 받아갈 정도로 엄청난 쾌락과 즐거움을 줬다고는 생각하는데?”
“쾌락과 즐거움을 줬다고 남의 몸을 가져가지는 않지. 창조주가 피조물(被造物)을 죽이며 극적으로 등장하지도 않고.”
프레그넌트의 주민들을 죽이며 나타난 것에 대해 비난하자 이번에는 그쪽으로 비난하냐며 유린은 재빨리 대답했다.
“사랑하는 아내들을 내버려두고 하반신을 여기 저기 박아대는 니가 할 말은 아니지? 성욕과 쾌락만을 위해 다른 여자들한테 자지를 내밀었던 니가 정의를 부르짖어? 하하,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까 넘어가줄게. 그런 말하다가 예전에 나한테 털렸던 거 기억 안 나?”
기억난다. 그래서 더 기분이 더럽지. 내가 면상을 찌푸리든 말든 신경도 안 쓰겠지.
“처음에 소환했을 때는 얄짤 없이 죽었어. 괴물이 너무 센가 싶어 파워도 조절하고 분포도 좀 생각해서 여기 저기 배치시켰는데……어떻게 된 게 살아남을 줄을 모르더라? 반년 동안 쓸 수 있는 힘을 단번에 써서 소환한 남자가 끽 소리도 못 하고 죽을 때마다 내가 더 죽고 싶었어. 그래서 얼마 안 가 이 세상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조정을 가해야 했지. 하아……죽은 놈들의 육신도 필요 없지만 부활도 시킬 수는 없었어. 그놈들을 부활시킬 수 없으니 계속해서 대신할 다음 남자를 소환해야 했지. 이 세상에서 온갖 쾌락을 누릴 용사로서 말이지.”
날 용사라고 불렀던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군. 용사는 최종보스와 맞서기 마련이다. 이 경우……최종보스인 유린과 만나 육체와 영혼. 덤으로 정신을 바치게 될 테니 그녀한테는 용사나 다름없었겠지. 이 세상에 갇힌 자기를 구해줄 구세주였으니까.
“아주 정확한 지적이야. 시간을 되돌릴 수도, 사람을 소생시킬 수도 없는 이상한 전지전능(全知全能)의 능력. 제한도 많고 제약도 있는 이 능력을 써서 내가 원하는 미래를 만드느라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후우. 아, 여자는 얼마 소환한 적이 별로 없었다고 했지? 어차피 남자의 성욕을 자극시키기 위한 애피타이저 역할이었으니까. 걔들도 얼마 안 가 뒈졌다만…….”
날 향해 쓰레기라며 욕했지만……유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다니. 내가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여자들을 강간한 쓰레기였다면 그녀는 절대적인 힘을 통해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을 가지고 놀았던 쓰레기였다. 인간쓰레기가 아니라 신(神)쓰레기. 영원히 진정한 신이 될 수 없는 가짜 신. 그게 바로 유린이었다.
“그리고 넌 그런 가짜 신한테 영혼과 육체를 빼앗긴 거지. 마음대로 지껄여. 내가 원하던 걸 드디어 손에 넣었는데 그런 패배자의 투정 하나 못 받아주겠어? 어, 어디까지 했더라? 남자들만 불러서 겨우 니가 왔다는 건 말 안 해도 되고……. 응? 왜 그래?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내가 불만과 질문을 합쳤다는 걸 눈치 챘는지 발언권을 나한테 양보했다.
“육체를 니 입맛대로 개조할 수는 없었냐? 그럼 사람을 많이 소환할 필요도 없었잖아. 원하는 육체를 얻은 후에 개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렇게 됐더라면 내가 이곳에 올 수는 없었겠지만……그것과는 별개로 알고 싶은 내용이었다. 이 세상과 생명을 창조할 정도니 육체 개조 정도야 쉬운 일 아닌가 싶었다.
“못 한다니까? 이쯤 되면 눈치 챘어야지. 왜 내가 널 비롯한 남자들의 성장을 도모(圖謀)했다고 생각해? 난 육체를 만들 수가 없었어. 얻은 육체를 개조할 수도 없었고. 내가 가진 것, 만든 것에는 관여할 수 있지만 외부에서 온 것들에는 일절 관여할 수 없는 이 빌어먹을 제약 때문에 엿 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니까? 그랬으면 죽은 사람까지 살려낼 수 있었겠지! 이런 건 말 안 해도 척하면 척 알아먹어야지!?”
멍청해서 미안하다, 시발. 날 향한 디스에 속으로 욕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외부에서 온 사람에 대한 관여 및 개조는 일절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았다. 잠시간 육체나 정신을 지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완전 지배나 개조는 할 수 없었으니 엿을 그렇게 먹였겠지.
그걸 깨달으니 왜 나를 처음부터 지배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금방 풀렸다. 여행뿐만 아니라 카미유에 멋대로 나를 소환시켜 개고생 & 똥개훈련을 하게 했던 이유? 내 육체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그런 거였겠지. 지배를 안 한 게 아니라 못 했으니 최대한 내가 성장할 있도록 좆뺑이를 돌렸다는 거고. 덕분에 좆뺑이 존나 쳤다, 시발.
“그럼 날 보고 ‘변해라’라고 했던 건……?”
이해는 대강 가지만 그 뜻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유린은 능글맞은 웃음을 보이며 선생님이 학생한테 좋은 지식을 가르쳐 준다는 투로 주둥아리를 열었다.
“둘 다였지. 육체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그 더러운 성욕을 마음껏 살려 인간성을 타락시키라는 거였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인간성을 잃으면 잃을수록 나야 좋으니까. 육체적으로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나한테 돌아오는 이득은 더 커지니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잖아?”
끝까지 자기만을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년이군. 이런 년이 좋다고 난리를 치는 아내들한테 더욱 동정과 연민이 생긴다. 카인이라는 이름으로 남자가 됐을 때 자기들은 카인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단순한 정신지배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카인이었던 유린은 그녀들을 고깃덩어리로만 취급하고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모르는 게 약이다’였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건 너한테도 포함되는 말이지. 정말로 그 여자들이 니 선택에 의해 아내가 됐다고 생각했어? 니 힘으로 모든 신붓감을 찾았다고 생각한 거야? 와, 졸 어이없네? 대~박! 아하하핫!”
내가 살던 세상의 유행어와 비속어를 쓰며 날 놀렸지만……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선택에 의해 아내가 된 게 아냐? 내 힘으로 찾은 신붓감이 아니라고? 지금까지 내 선택이나 의지에 따르며 행동해왔는데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헛소리라니? 널 위해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들 중 니 마음에 쏙 드는 여자들만 픽업(Pick Up)해 왔는데 섭하구만! 넌 신붓감을 잘 골랐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그게 다 내가 골라놓은 애들이었거든? 니 심리와 정신 상태를 파악해서 거기에 딱 맞는 고깃덩어리들만 고르느라 꽤 고생했다고? 없으면 아예 만들기도 했었고. 나한테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망정 헛소리라니. 너도 꽤나 배은망덕한 놈이구나?”
이미 주저앉은 상태였지만 난 두 손으로 간신히 땅을 짚은 채 후들거리고 있었다. 뭐야 그럼……? 그럼, 로라나 메이도? 아이나도? 모두 다 쟤가 정해준 여자들이었다고? 내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여자들은……내 선택이나 의지에 관계없이 쟤가 정해준 단순한 ‘이벤트성 캐릭터’였다고?
“그러어~엄! 야, 너희 세상의 지식이나 문명 중에 그, 뭐지? 오타쿠? 그런 덕후 냄새 나는 것들까지 모조리 참고해서 만든 것들이야. 괴물의 힘이나 분포도 문제였지만 너 같이 오타쿠 냄새 풀풀 나는 병신 새끼들 취향 맞추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 어휴……마리아랑 아테나를 보내기 전에 혹시나 전의(戰意)를 상실할까봐 현실 세상에서 두 명이나 조달하느라 꽤 고생했었지 참. 어때? 이 정도면 칭찬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
그럼……희진이와 은채는? 마리아와 아테나가 오기 전까지 프레그넌트 숲의 토벌을 위해? 오직 그것만을 위해 소환을 했단 말인가!?
나 또한 유린의 목적에 의해 소환된 것이었지만 그 두 명은 나보다 더 어이없는 이유로 소환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뭘 이제 와서 놀라는 척이야? 지켜준다는 명목 아래 강간을 했던 주제에 착한 척 좀 하지 말라고. 짜증나니까. 너를 사랑하고 필요로 여기는 여자들이 나한테 선택받았다는 게 그렇게 충격적이야? 그럼 어떻게 하냐……지금부터 말할 건 그거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일 텐데.”
“……무슨 소리야?”
지금도 충격 때문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이보다 더 충격적인 거라고? 생각 같아서는 듣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상황은 시궁창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빌어먹을 호기심은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그저 돌진하라고만 했고 이성은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칠 수 없으니 듣기나 하자며 나를 재촉한다. 망할!
지금까지 쭉 웃고 있었던 유린이지만……이번에는 정말 즐거운 것을 공개한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는지 미친 듯이 큭큭 댔다. 눈물까지 찔끔 흘려대며 웃을 때마다 머릿속에서는 작은 절망이 점점 커지며 정신을 좀먹어댔다. 찔리는 게 있으니 이런 절망을 느끼는 거겠지. 설마……설마!
“그 애들 말이야……다 봤어.”
‘설마, 아니겠지’라며 바랐던 소망은…….
“니가 그 애들을 욕하고 저주하던 거. 전부 다~!! 모조리! 몽땅! 황야와 초원, 니 생각에서 욕하던 것까지! 전부 다아! 으, 으흑! 크흐흑……! 그거 보여줬을 때 니 아내들의 표정……지인~짜 끝내줬어! 레알! 구라 안 까고! 와아, 그거 보여줄 때 니가 말하는 거보다 걔들 표정이랑 반응이 더 재미있었다니까!? 꺄하하하핫!”
절대자의 한 마디, 몸동작 하나로 모조리 부서졌다.
형체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무참하게…….
“……아, 아아아앗! 아아아아아아────────ㅅ!!”
난 소리쳤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고장 난 라디오처럼.
내가 황야와 초원에서 그토록 뱉어내던 욕과 저주.
아내들을 향한 잘못된 원망과 더러운 모습을…….
모조리 다 보여줬다고? 내 아내들한테?
그녀들을 욕하는 내 더러운 모습을?
“아냐! 안 돼! 아니라고! 거짓말이야! 응? 거짓말이지! 제발! 아니야! 그런 거 안 돼! 안 된다고! 어, 어떻게……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는 건데!? 어떻게……니가 어떻게!?”
난 투명한 네글리제에 손을 뻗어 마구 울며 소리쳤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이미 일어나버리다니! 내가 후회했던 일들, 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때늦게 한탄했던 일들을 모조리! 전부 다 아내들한테 보여주다니!? 이건 악몽이야……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다들 울던데? 니가 그렇게 싫어하던 노오오오오력과 의지드립! 너를 사랑하는 마음과 의지로 왜 나를 구하러 오지 않냐고! 쓸모없고 병신 같은 년들이라고 침을 튀기며 욕할 때마다 표정이 바뀌었었지! 아아……진짜 최고였어! 너 때문에 새로운 취미에 눈 뜨는 게 아닌가 싶었다니까?”
나를 내치지도 않은 채 홍조(紅潮)까지 띠며 말하는 유린의 모습은……악마였다. 누군가의 고통과 슬픔, 후회만을 양식으로 삼으며 살아가는……이 세상에는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니가 사랑하는 아내들은 모두 울더라? 사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 같은 놈을 믿었던 우리가 병신이었다며 저주까지 하던 사람도 있었고! 니가 욕하고 더러운 상상과 생각을 할 때마다 얼마나 즐거웠는지 알아? 그걸 그대로 니 아내들한테 보여줄 때의 그 쾌감이란!! 크으~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 한 번 더 하고 싶었을 정도라니까? 끝내줬어!”
“이 씨발년이……컥!”
내 주먹은 완전히 휘둘러지지도 못했다. 그녀의 무릎차기 카운터에 맞은 나는 알몸인 채 뒤로 나동그라졌다. 충격 때문에 서지도 못한 채 머리와 몸을 떠는 그 모습은 전형적인 패배자. 야만족의 숲에서 도망쳤을 때 ‘패잔병’이라고 표현했던 때보다 훨씬 더 처참한 모습이었다.
“좋은 모습이라면 몰라도 니 같잖은 모습, 아내들을 실망시킬 행동은 확실히 보여줄 생각이었거든! 야아~덕분에 나도 엄청 즐거웠어! 나도 그걸 보며 욕했다니까? 너랑 아내들, 둘 다! 나한테는 너희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존재지만……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껏 까보자는 생각이 들었지 뭐야? 뒤늦게 반성하고 사과했던 부분은 보여주지 않았지만……괜찮지? 이제 와서 그거 보여준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어?”
난 노려봤다. 누군가를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만 있다면 그 능력을 쓰고도 남을 정도로 분노와 증오를 담아 유린을 봤지만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모른 척했다.
“걔들도 너를 욕했어. 자지의 맹세에 대해서는 혜린이 외에는 아무도 몰랐으니까. 진실된 감정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마법만 걸어서 사용하는 더러운 근성과 마음. 믿음이 없는 것도 욕했었지만……나에 대한 걸 아무한테도 이야기 안 하고 혼자 고민하다 일을 여기까지 만든 니 우유부단(優柔不斷)함도 욕하더라? 뭐……맞는 말이긴 했어. 나도 동의했거든.”
억울했다. 뭐가 억울하냐고? 백발(白髮)의 여자. 지금은 ‘유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것은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녀들한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말 안 한 것도 있었다! 내 나름대로의 배려와 생각을 그렇게 욕하다니……!!
“원래 세상에서 니가 어떤 놈인지도 다 가르쳐줬지! 이야~진짜 실망 많이 하더라? 너 같은 새끼한테 몸과 마음을 허락한 자신들을 저주하고 싶다며 눈물까지 흘렸었다니까? 아무런 말도 안 했으면서 모든 걸 알아주길 바라다니! 그 오만함과 어리석은 모습 덕분에 쟤들 정신 상태도 꽤 많이 무너졌거든!”
아내들의 정신이 무너졌다는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정신이 무너졌다고? 그럼……어떻게 되는 거지?
“카인이라는 이름으로 있을 때도 그랬지만……나한테 있어서 이 세상의 여자들은 고깃덩어리. 아니면 발정 난 원숭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내가 원하는 몸과 미래를 얻기 위해 쓰는……그, 장기 말? 이용도구? 그 정도지. 그 정도 가치밖에 없는데도 정신이 무너지는 걸 보니 꽤 마음이 아프더라? 니 덕분에 인간적인 면모를 배웠다고 해야 하나? 아하하!”
“무너지면……어떻게 돼?”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겨우 한 마디를 쥐어짜냈다. 유린이 ‘뭐라고?’라는 표정으로 날 봤기에 크게 소리쳤다.
“정신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냐고!?”
유린은 귀를 막는 제스처를 취하며 나를 약 올렸다. 그렇게 시끄럽지도 않은 내 외침에 귀까지 막는 동작을 보여준 건 틀림없이 나를 도발시키기 위한 거겠지. 끝까지 비겁하고 더러운 근성을 보여주는 년이었기에 분노가 더욱 치밀어 올랐지만……그 분노는 유린이 꺼낸 다음 말로 인해 한계 수치를 넘어서게 됐다.
“어떻게 되기는……문자 그대로 고깃덩어리가 되지.”
더 이상 ‘뭐?’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내 리액션이 줄어든 게 실망이었는지 투덜대는 말투로 나머지 말을 지껄여댄다.
“정신이 무너지면 그냥 고깃덩어리라고. 생각해봐. 내가 데려온 여자 세 명도 위험한데 정신 상태가 무너지거나 오염되면 걔들이 무사할 거 같냐? 니 아내들이? 영혼도 없는 그 고깃덩어리들이? 한계치를 넘어서면 말 그대로 고깃덩어리가 되는 거지. 왜, 그런 애들이라도 줄까? 뭐……섹스할 때는 나름 즐거운 인형 놀이도 가능할 거야.”
말이 마치기도 전에 난 놈을 향해 뛰어가 주먹을 내질렀다. 이길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 안 맞을 거라는 사실은 진작에 깨달은 상태였지만……차마 때리지 않고는 있을 수가 없었다.
유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공격을 피했다. 피할 가치도 없는 공격을 피했다는 점에서 그녀가 얼마나 나를 쓰레기로 여기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휘두른 주먹은 허공만을 갈랐고 내가 그녀를 찾으려 하기도 전에 내 배와 옆구리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고통이 느껴지는 부분을 손으로 감싸며 비명을 질러댔다.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는 상태에서 들어간 유린의 타격(打擊)은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기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통증으로 인한 눈물도 있었지만……갈 곳 없이 내 안에서만 맴도는 분노와 증오, 억울함 또한 눈물샘을 터지게 한 원인 중 하나였다.
나나 아내들. 모든 것을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밖에 쓰지 않는……이런 더러운 놈한테 이용 받은 것도 모자라 끝내는 정신까지 무너지게 되다니! 비록 그 원인이 나 때문이라고는 해도 아무도 알 수 없었던 마음속까지 속속들이! 꼼꼼하게! 은밀한 마음까지 모조리 보여준 저 새끼가 아니었더라면 일이 이렇게는 흘러가지 않았을 텐데!!
주먹으로 검은 땅을 내려치며 마구 울부짖었다. 너무나 억울하고 슬펐다. 이용당한 것도 모자라 놈의 웃음을 위한 광대가 되어버리다니! 이런 수모와 모욕을 받으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처맞고 나가떨어져 우는 것뿐이라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슬픈 현실만을 받아들여야 한다니! 너무나 억울하고 슬펐지만……더욱 더 두려운 것이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사람을 자신의 꿈과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삼는 가짜 신. 미친년이나 다름없는 유린의 이야기가……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하핫! 진짜 기분 좋다! 야, 추리 소설이나 만화에서 왜 범인이 자기 계획이나 과거를 나불대는지 이제야 알겠어! 와아, 기분 존나 쩔어! 내 생각이나 계획을 말하는 게 이렇게 속 시원한 거였다면 진작에 해볼걸! 으으, 이런 쾌감을 깨달은 것도 다 니 덕분이야! 아하하, 정말 고마워! 답례로 남은 이야기를 더 해줄게! 아, 걱정 마!”
악마마저 뛰어넘은 간계(奸計)를 털어놓은 유린은 쓰러진 나를 향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가능하면 듣고 싶지 않았고 듣지 않는 게 좋았겠지만……그녀는 그런 현실도피를 인정하지도, 용납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울려 퍼진 말은 나를 더욱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아직 절망할 일은 더 남았거든.”
============================ 작품 후기 ============================
자기 흑역사를 다른 사람이 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장담컨대 기분 좆같을 겁니다. 본인한테는 잊고 싶은 기억인데 다른 사람한테는 즐거운 엔터테인먼트로 기억될 테니 말입니다. 세린이 아내들을 욕하며 자기를 정당화시키려 했던 것도 마찬가지겠죠. 아내들이 모두 다 봤다고 하니 사실상 '본격_대놓고_몰래카메라.avi'라고 할 수 있겠죠. 물론 찍히는 본인은 찍힌다는 걸 상상도 못 하는 상태고요.
세린의 입맛에 맞게 여자들을 픽업하고 골라놨다는 유린. 작가인 제가 생각했던 걸 유린의 입으로 말하니 기분 묘하더군요. 황야와 초원에서 아내들을 디스하며 잡생각을 하던 세린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싶었는데……어떻긴 어떻겠습니까. 꼴불견이겠죠. 그걸 실시간 리얼타임으로 보였다고 생각하니 진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실컷 구르는구나 싶습니다. 굴렁쇠가 ‘어이쿠, 형님. 오늘도 많이 굴렀수?’하고 인사하지 않을까요.
모든 것은 자기의 육체와 욕망을 위한 계획. 세린을 강하게 만든 것도, 즐겁게 만든 것도. 결국 이런 결말로 이어져버렸네요. 악당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성공하니 악당도 그냥 놀고먹으면서 하는 게 아니구나 싶습니다. 본인 계획은 완벽할지 몰라도 세상은 계획대로 착착 흘러가주는 게 아니잖아요.
누구든 간에 본인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세상일인데 그런 걸 감안하며 13번씩이나 시행착오를 하며 여기까지 오다니. 유린도 꽤 근성 있는 놈(년)이구나 싶습니다. 물론 행동이나 사상은 칭찬받지 못할 것이지만요.
어찌 됐든, 드디어 내일로 200화입니다. 9월의 마지막 평일이자 200화를 달성하는 날이네요. 시원섭섭한 느낌입니다. 직장 업로드가 봉인된 것도 억울한데 회의와 쓸데없는 일이 엄청나게 늘어나버렸습니다. 200화 이후의 글을 적는 것도 문제네요.
허나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200화 후기에 여러 가지를 쓰겠지만……저한테도, 독자분들한테도. 여러 모로 반갑지 않은 소식이 있습니다. 200화는 어쩌면 정오나 저녁에 업로드할지도 모르겠네요.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고양이새벽님, zxc54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올리면서 보니 200회라고 되어 있더군요. 프롤로그를 1화분으로 쳤기에 사실상 프롤로그 + 199화 = 200화라고 인식하게 된 거겠죠. 본의 아니게 200화를 달성해버렸습니다. 기쁘면서도 살짝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했습니다.
안 그래도 회사 생활이 좆같은데 그나마 기분이 좀 나아지는 소설 작성도, 업로드도. 내일을 기점으로 당분간 쉬어야 할 거 같네요. 힘들어도 좋으니 소설 쓰는 시간이 충분히 보장되면 좋겠습니다. 하루에 한 편 쓰면 용할 정도에요.
아, 덧붙여 이번 주에 들어서는 할 일이 워낙 많아 한 편 조차 아직 다 못 썼습니다. 월요일 기준으로 목요일까지. 4일이나 있었는데 말입니다. 조만간 이 좆같은 회사도 때려쳐야 할 거 같네요.
좋든 싫든 마침내 200화. 올리는 시간대는 점심이 될 수도 있고 저녁이 될 수도 있지만 끝까지 노력하는 자세만큼은 지키겠습니다. 여러분도 즐거운 추석 보내시기를 바라며 글을 줄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