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200화 (200/235)

00197 「20-6 : 데드 엔드 (7)」 =========================

무엇부터 물어야 할까.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질문이었기에 적절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발기가 된 물건을 건드리는 유린의 모습은 상당히 고혹적(蠱惑的)이었기에……한 번 정도 더 빼주면 좋겠다 싶었다.

“널 개박살낸 여자한테서 사까시를 받고 싶어 하다니……너무 은근히 별난 놈이란 거, 잘 알고 있지?”

“그래……으윽.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내 물건을 만지던 유린은 손가락 사이의 액체를 핥아가며 날 봤다. 젠장……빨리 질문이나 하자. 언제까지고 이 짓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무슨 질문을 하면 좋을지 모르는 거 같으니 나부터 질문할게. 괜찮지? 어차피 말하면 질문이 들어올 테니까.”

이미 설명을 한다고는 했지만 그녀도 어디서부터 말을 하면 좋은지 감을 못 잡았던 모양이다. ‘설명’보다 ‘질문’을 하겠다는 걸 보니 어지간히 긴 이야기가 되겠구나 싶었다. 12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내 인생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짧으면 그건 그거대로 분노하겠지만.

“그래……넌 니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해?”

이건 무슨 뜬금없는 질문이니? ‘유린’이라는 이름을 얻은 그녀가 이상한 질문을 날리고는 했었지만 이건 이거대로 웃긴 질문이었다. 내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 존재냐고? 쉽게 답변할 수 있지.

“대단한 존재가 이렇게 잡혀서 펠라치오를 받을 거라 생각해?”

질문에 질문으로 받아치는 건 배워먹은 놈이 할 짓이 아니지만……그래도 답변으로는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유린은 킥킥대며 ‘그건 그렇지’라고 했으니까. 내가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그리 높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좋은 예시였다. 실제로……대단했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럼 좀 바꿔서 질문을 해볼까? 나한테 있어서 니 존재 가치는 얼마나 대단할 거라 생각해?”

유린한테 있어서? 이건 좀 이상한 질문이었다. 이런 걸 물을 필요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픽업(Pick Up)할 수 없기에 생각을 한다면 모를까, 답변할 가치도 없는 질문을 던질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 답변도 쉬웠기에 바로 답할 수 있었다.

“어, 쓰레기. 장난감. 살아있는 해부용 생물체. 뭐 이 정도?”

사람의 존엄성이 순식간에 쓰레기나 장난감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지만……이것도 잘 쳐준 거겠지. 신(神)을 쓰러뜨리겠다며 흑역사를 만들지 않나, 자기가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며 발버둥치질 않나. 유린한테 있어서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개그나 코미디로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라니까?

웃으면서 긍정할 거라 생각했지만……유린은 전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웃는 건 그대로였지만 고개를 흔들며 내 대답을 부정한다.

“아냐, 아냐. 정말 아냐……세린. 우선 그 잘못된 인식부터 고쳐줄게.”

잘못된 인식? 내가 내 가치를 너무 높게 잡았나? 이왕이면 박테리아나 아메바 수준으로 말할 걸 그랬군. 그럼 서로 다시 말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이야기가 더 빨리 진행됐을 테니까. 이런 생각을 하던 내 귀에 들린 건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넌 말이야……정말 소중한 존재야. 나한테 있어서는 아주 소중한 존재라고. 얼마나 소중하냐고 묻는다면……이 세상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여자들을 죽이더라도 너 하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둘 정도야. 알겠어?”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내 귀가 잘못됐나? 청력(聽力)에 벌써부터 이상이 온 건가 싶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어서 그게 무슨 내용인지 인식을 할 수가 없게 된 거 아닌가 싶었다. 유린은 내 마음을 알았는지 한 번 더 말해줬다.

“이해 못 하겠어? 소중하다니까? 넌 너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아주 낮게 봤지만……천만에! 천만의 말씀이야! 니가 지금까지 활약해서 여기까지 와주다니!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 감격 그 자체였어! 아아~정말이지!! 최고였다니까? 니가 왔을 때 내가 왜 아스카를 찌르고 있었는지 알아?”

칼에 찔리던 아스카가 생각나자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유린은 그런 것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내 존재가치에는 즐거움과 소중함이 한껏 묻어 있었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미친 건가 쟤가 미친 건가 하는 불안함이 솟아난다.

“쓸모가 없었거든! 비단 아스카만 그런 줄 알아? 아냐, 아냐! 절대 아니지! 전부 다야! 세린, 잘 들어? 이 세상에 너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어! 이 ‘하렘 어드벤처’의 모든 사람과 괴물, 마을을 합쳐도 너 한 명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 모르지? 모를 거야! 모르니까 너 자신에 대해 그렇게 형편없이 말할 수 있는 거지!”

의자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오던 유린의 동공은 풀린 듯한 느낌이 났다. 얼마나 즐거웠으면 그 입술은 내 입술과 포개어졌고, 갑작스런 키스에 다시 내 물건이 움찔거렸다. 망할……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 여자? 하는 짓과 행동이 완전 미친년이잖아?

“으, 으흐흣……그래! 미쳤지! 미치지 않고서야 배기겠어? 13명 째의 용사가 이렇게 우수할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었거든! 너무 우수해서 계획을 변경해야 할 정도였다니까?”

내가 욕을 할 필요도 없었다. 미친 거 아니냐는 욕에 그렇다며 대답까지 하는 유린을 보니……단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세상은 넓고 미친놈(년)은 많다】

와, 설마 나 이상으로 미친놈을 보게 될 줄은 몰랐지. 아니……사람들을 괴물로 만들거나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걸 보고 미친놈이라고 욕은 했지만……설마 이렇게까지 정신 상태가 4차원일 줄은 몰랐다니까? 내가 정상인으로 보일 정도면 대체 얘는 뭐 어떻게 하면서 살아온 건지가 궁금하다. 이것도 질문 리스트에 들어가겠군.

“세린……우리 세린. 위대한 용사 세린. 너는 니가 멍청하다고 생각하겠지만……그거 알아? 넌 의외로 많은 해답을 찾아냈어. 그 해답이 완전한 정답은 아니지만 정답에 다가갈 단서나 근거 정도는 됐지. 그 중 하나를 꺼내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하거든. 넌 내가 뭐라고 생각해?”

의자를 당겨 내 가까이 온 그녀는 귀두에 정성 어린 키스를 퍼부었다. 내 아내와 업적, 미래를 빼앗아간 여자의 귀두(龜頭) 키스를 받으며 몸을 배배 꼬다니. 내 꼬라지도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만……이미 이렇게 된 것은 어쩔 수가 없었기에 육체적 쾌감을 즐기며 대답을 했다.

“후, 후우……우리 귀여운 유린은……이 세상의 신이잖아……?”

미친놈. 귀여운 유린? 유린이 니 아내라고 생각하냐? 이런 말은 ‘자지의 맹세’에 걸린 아내들한테나 통하는 말이었다. 유린은 손가락으로 내 귀두를 가볍게 튕겨댔고 그럴 때마다 이질적인 충격과 쾌감에 ‘윽’이나 ‘읏’ 같은 짧은 비명을 질러댔다.

“정말로 내가 신이라고 생각해? 진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텐데?”

묘하게 자신을 까는 듯한 말투는 내 기억의 바다에 잠든 단어 중 하나를 바로 끄집어냈다. 예전에 생각했었던 ‘그것’. 그 당시에는 카인한테 물어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스스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린이 있었기에 바로 입에 담을 수가 있었다.

“전지전능(全知全能)에 가깝지만 전지전능(全知全能)은 아니다……?”

유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생각난다. 그랬지. 그 당시의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왜 전지전능한 카인(당시에는 남자였다)이 12명이나 되는 남자를 소환시킨 후 죽게 내버려둔 걸까? 왜 자기가 만든 세상을 즐기지 않고 사람들을 소환한 건지 궁금해 했지.

난 그 대답으로 ‘바라는 게 있으니까. 자기 힘으로 못 하는 무언가를 다른 사람한테서 얻으려고 한다’라고 생각했었다. 나한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그나마 떠오르는 거라면 ‘변해라’라는 말밖에 없었기에 왜 그런 말을 했나 싶었지.

내가 변하는 걸 바란다니……웃긴 말이었다. 자기가 아니라 내가 왜 변해야 하는 걸까? 전지전능에 가까운 존재가 왜 나한테 그런 것을 바랐는지에 대해서는 끝끝내 알 수 없었다. 그나마 깨달은 건 ‘자기가 못 하니까 남한테 해주길 바란다’ 였지.

그렇지만 그건 웃긴 대답이었다. 전지전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거기에 가깝긴 한 존재. 신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존재가 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 걸까 싶었지. 그때는 답을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 답을 평가해줄 사람이 내 눈앞에 있었기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잘 아네……. 나 놀랐다니까?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거기까지 가다니……상으로……쪽♥”

사정(射精)시킬 생각은 없으면서 은근히 귀두나 남근(男根)을 자극하는 유린의 행동은 매우 매력적이면서도 괴로운 것이었기에 정신이 몽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살짝 무리수를 던져볼까…….

“하하……그렇게 상을 주고 싶으면 이걸 풀어주면 안 될까? 그, 좀……피곤하거든. 어차피 반항해봤자 못 이긴다는 것도 알았으니까…….”

자기 존재까지 낮추며 한 아부가 효과가 있었던 걸까? 유린은 너무나 쾌활하게 좋다고 했다. 내 몸을 묶고 있던 사슬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난 바닥에 주저앉은 채 유린을 올려다본다. 투명한 네글리제 사이로 보이는 몸이 더욱 내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후후……아내를 빼앗다 못해 소중한 사람들까지 죽게 만든 나한테 발정하다니……완전 씹변태 새끼잖아?”

그녀의 비난과 매도는 생각 이상으로 짜릿했다. 귀여운 발가락으로 내 물건을 찔러댈 때마다 나는 저항조차 못한 채 웃으며 그 쾌락을 받아들였다. 너무나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내 분노나 증오 따위는 쓰레기만도 못하다는 걸 깨달아서 그런 걸까?

“좆물 쌀 거 같지? 후후……안 돼♪ 아직 이야기는 시작했을 뿐이니까. 전지전능하지 않은 내가 너나 이전에 소환된 사람들한테 무얼 바랐을 거라 생각해?”

“하아……하아……그건, 잘……모르겠는데……후우……. 난 아직도 니가 ‘변해라’라고 한 말의 의미를 잘 모르겠거든.”

흥분을 가라앉히며 간신히 대답했다. 완전히 발정 난 느낌이군. 두근거리는 심장을 조금씩 진정시키며 나도 의자에 앉았다. 침대 위에 있는 얇은 이불을 담요 삼으니 그나마 좀 낫군. 언제까지고 알몸으로 있는 건 좀 그러니까.

“뭘 바랐는지는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음……너를 포함해 총 13명이나 되는 남자들을 소환했던 이유는 대강 알 거야. 내가 할 수 없으니 너희한테 대신 해주길 바라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 문제라면……너 이외의 남자들은 그야말로 병신이었다는 거지. 얼마나 병신이었냐고? 말했지? 마을에 도착조차 못한 채 죽었다고. 12명. 전부 다 말이야.”

당시에는 그 말에 분노했지만……이상했다. 지금은 별로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그런 사람들이 있었군. 안타깝다’라고 느끼는 정도? 희망을 가지고 유린(카인)한테 덤볐을 때와 달리 이미 패배와 죽음이 확정된 상태였기에 이렇게 변하지 않았나 싶었다.

“넌 이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내가 만든 ‘하렘 어드벤처’라는 세상에 대해서.”

“그야……환상적이지.”

난 내 생각 이상으로 비겁하고 더러운 놈이었다. 나한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유린……내 모든 것을 빼앗아간 원수한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자 급속도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녀의 심기에 거스르지 않도록 대답하거나 행동하는 배경에는 ‘어쩌면 나를 살려줄지도 몰라’라는 마음과 속셈이 들어 있었다. 정말 더럽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죽어 마땅한 놈이라며 카인(유린)을 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녀를 칭찬하며 비위를 맞추려 하다니. 이런 은밀한 마음을 욕하면서도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었다. 이 대답은 비위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느낀 것들이 많았기에 그만큼 말이 많아졌다.

“여자들만 있는 세상이라니. 나는……현실 세상에서 여자를 사귀본 적도 없었어. 늘 딸감을 써서 자위만 해댔지. 그런 내가 한국 최고의 섹시 가수 중 한 명이었던 혜린이와 함께 떨어져 결혼도 하고, 섹스도 할 수 있었으니……정말 환상적이었어.”

이건 진심이자 사실이었다. 아부가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한 소리였지.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환상적이었다. 딸감으로만 삼던 여자들을 내 하반신 밑에 둘 수 있다니. 내 아랫도리에 개처럼 매달린 채 빨아대는 그 모습!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결코 볼 수도, 얻을 수도 없는 모습이었기에 감동은 더욱 대단했었다.

“혜린이도 그랬지만……여긴 나한테 정말 멋진 곳이었어. 로라나 메이, 아이나. 이곳이 아니었다면 그런 매력적인 아내들을 얻을 수는 없었을 거야. 난……난 정말로 여기가 좋아. 진심이야. 사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야.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것들을 여기에서는 전부 다 얻을 수 있었어! 정말로……정말로 멋진 세상이야. 여긴.”

속이 후련했다. 그래. 아부도 아니었고 빈말도 아니었다. 여긴 나한테 파라다이스 그 자체였다. 혜린이나 희진이, 은채처럼 현실에서 내가 원했지만 결코 손이 닿을 수 없었을 뿐더러 만날 일조차 요원했던 여자들과 결혼까지 할 수 있었다니……이걸 ‘최고’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럼……세린은 이 세상을 아주 좋아한다는 거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물론이야! 난……너한테는 안 좋은 감정이 있을지 몰라도 이 세상은 별개야. 정말로……정말로 여기만큼 내 스스로 노력하고 무언가를 시도했던 적은 없었어. 원래 있던 세상에 돌아갈 수 없게 됐지만 오히려 여기 온 게 차라리 나았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나한테는 아내들과 아기, 이 세상만 있으면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어!”

프레그넌트의 숲에 있던 괴물들을 토벌했던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내가 노력할 때마다 그들은 나를 필요로 했고, 좋아해줬고, 사랑해줬다. 그런 나날이 계속될 때마다 나 또한 ‘더 노력하자, 모두가 나를 사랑하도록. 모두가 나를 더 필요로 하도록 노력하자’라며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시궁창 같았던 현실 세상과 집안 사정. 평화나 안전, 안락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던 나날로부터 벗어나 내 스스로 많은 것을 이루다니!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부터 시작해 결혼, 아기, 딸, 생활. 현실에서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돈과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 것들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전부 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니, 오직 그것들만을 위해 제작된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나를 원하는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었다.

“생명의 씨앗을 없앤 이유는 모르겠지만……그로 인해 나라는 인간. 내 정액과 정자, 좆물을 필요로 하는 여자들을 봤을 때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하하……최고였어! 현실 세상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을 그렇게 연속으로 겪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다름 아닌 나한테!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던 나한테 말이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서는 흔히 【지킬 것이 있으면 강해진다】 혹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이야말로 최강·최고의 힘】이라는 문구가 나오곤 한다. 너무 자주 나와서 이젠 듣고 해석하는 것조차 귀찮을 정도지만……그 말이 틀렸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내 소중한 아내들이었던 혜린이나 로라, 메이. 그들과 함께 괴물과 싸우거나 모험을 할 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녀들의 안전이었다. 그녀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면 아예 그런 선택지를 생각에서 제외시키기도 했었다. 그녀들이 위험에 처할 바에야 내가 위험에 처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다.

미카 때만 하더라도 그랬지 않았던가? 부카케에 가서 파란색 촉수괴물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 미카는 내 아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사람들이라 생각되는 존재들을 구하기 위해 내 생각 이상으로 열심히 싸웠던 것을 감안한다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울 때 사람은 강해진다’라는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야만족들은 또 어떻고? 비록 날 납치하긴 했지만……결론적으로는 정자를 원해서 그런 거였잖아? 그 결과는 나를 강간하는 거였고! 아, 음……남자가 강간당했다고 하니까 좀 우스운데……그래도!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를 원했어! 지금 또 당해보라고 하면 당연히 싫다고 하겠지만……적어도 그 뜻이 나를. 인간 신세린을 원했다는 사실만큼은 기뻤어…….”

야만족. 엄밀히 말해 안즈가 나를 납치했을 때부터 이미 카인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만……그녀들이 바라는 ‘아기 씨앗’은 내가 아니면 얻을 수가 없었다. 그녀들도, 나도. 본의 아니게 나와 내가 지닌 정자(精子)를 원했었다. 죽어버린 대부분의 야만족을 생각하면 기분이 좀 우울해진다만…….

유린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권력자한테 온갖 아부를 떠는 느낌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그녀한테 온갖 사탕발린 말이나 아부를 해대는 느낌은 여전했지만……더 이상 나한테는 지킬 자존심 같은 건 없었다. 그런 건 언제 부서졌는지도 모르겠고 알아봤자 헛수고일 뿐. 나한테 필요한 것은……이 세상에서의 생활과 아내들. 그거밖에 없었다.

유린의 속마음은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내 비굴함과 처절함은 이미 동맹을 맺은 지 오래였다. 나한테 보여주는 호의적인 태도와 언행. 내 좆을 빨고 힘껏 빨아댔던 유린을 생각한다면……그녀 또한 나한테 적지 않은 호감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 유린……. 그, 말했지? 난 너한테 아주 소중한 존재라고.”

“응. 맞아. 근데 왜?”

제발……제발! 이미 마음이 읽히고 있을 테니 내가 무얼 할지는 말을 안 해도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웃는 걸 보니 내가 말 안 하면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는 거겠지. 어차피 비굴하고 병신 같은 모습을 듬뿍 보여준 후였기에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하반신이 보이든 말든 상관없이 바닥에 몸을 꿇었다. 마리아의 방답게 부드러운 카펫이었기에 다치거나 더러워지는 일은 없었다만……중요한 것은 위생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나는 그녀한테 큰절이나 다름없는 짓을 하며 크게 외쳤다.

“부탁이야……나, 나랑 아내들을……이 세상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줘!!”

쓰레기. 이미 인간쓰레기였던 나한테서 자긍심이나 자부심, 인간으로서 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까지 모조리 나가버린 느낌이었다. 날 비웃은 것도 모자라 모든 것을 빼앗아간 사람한테 절까지 올리며 예전으로 세상을 되돌려달라고 부탁하다니……. 치욕의 극치나 진배없었다.

하지만……너무나 간절했다. 이미 이 세상의 신이 누구인지 알았고 그한테 대들면 얼마나 뼈저리게 지옥을 맛보는지도 경험했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차라리 유린한테 거스르지 않고 복종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한테 나는 소중하다고 했지? 그럼 그걸 믿고 부탁할게! 제발! 아니, 부탁드립니다! 제발 아내들을……제가 야만족한테 납치당하기 전까지 누리던 현실을 다시 돌려주세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비굴하고 더러운 놈. 왜 사냐?

어딘가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

왜 사냐고?

살고 싶으니까!

죽기 싫으니까!

이 세상의 절대자. 좀 나쁘게 말하자면……유일한 권력자인 유린한테 빌붙으려는 게 대체 어디가 나쁘단 말인가?

현실에서 내가 하지 못했던 일! 강한 권력자를 친구로 두는 것! 그 친구한테 은혜를 입으며 사는 것! 하고 싶었지만 내 주위에는 항상 쓰레기뿐이라 실현시키지 못했었다. 현실에서 하지 못했던 일을 이곳에서 하려는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죽을죄가 된단 말인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도 한병태는 엄석대의 달콤한 유혹과 권력의 맛에 심취되지 않았던가!? 아직 고등학생도 되지 못했던 아이가……초등학교 5~6학년밖에 되지 않았던 아이마저 매혹시켰을 정도의 힘! 강력한 권력! 그 권위와 힘에 내가 기대려는 것뿐인데 대체 이 행동의 어디가 비난받아야 마땅하단 말인가?

“흐응~? 그럼 세린은……나한테 절대적인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는 거야?”

마치 하늘에서 신이 ‘나를 모실 것이냐?’라고 묻는 거 같았다.

“맹세할게요! 충성이든 복종이든 뭐든지 할 테니까……제발! 제발 예전의 그 생활을 돌려주세요!”

가슴이 뛴다! 돌아올지도 몰라……돌아올지도 모른다고! 그 생활이! 내 아내와 딸들!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던 평화로운 일상! 프레그넌트에서 보내던 행복한 나날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다른 건 필요 없다! 그 생활……내 힘으로 일구어낸 그 ‘행복’만 있으면 다른 것들은 아무런 필요도 없었다!

“나 같은 절대자가 만들어낸 거짓된 현실인데도~?”

가짜로 만들어진 현실이라도 얻고 싶냐는 그 조소(嘲笑) 담긴 말에 난 고개를 조아렸다. 바닥에 몇 번이고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이마를 찧어대며 외쳐댔다.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고 저 또한 신경 쓰지 않습니다! 혜린이도, 로라도, 메이도! 다른 아내들은 유린님의 존재조차 모릅니다!”

점점 신세린이라는 인간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이 버려서는 안 되는 것까지 내던져가며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라니! 절대자의 힘에 매달려 달콤한 환상이라도 좋으니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비굴함과 비참함! 예전의 내가 본다면 졸도를 하고도 남았을 광경이었다.

하지만……예전의 너(신세린)도 알고 있잖아? 현실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행복한 나날. 너무도 소중한 아내들과 여생(餘生)을 얻을 수 있다면……뭐든지 다 할 거라는 마음가짐! 그런 사고방식!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니 누구보다 더 잘 알잖아……나한테만 뭐라고 하지 말란 말이다!

이 현실이 아니면 더 이상 어딘가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는데 왜 나한테만 늘 희생과 싸움을 강요하는 건데? 왜 매일 카인한테 맞서 싸우지만 쳐발리고 패배하는 현실만을 걸어야 하는데?

싫다! 그런 건 싫단 말이다! 이젠 다 싫다! 환상이든 거짓이든 간에 그 삶으로!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었던 행복한 삶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이었다! 그게 설령 유린한테 아부를 떨며 재롱을 부리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헤헤……그래? 뭐든지 다 하겠다, 이거지?”

“그, 그렇습니다! 제발……제발! 부탁합니다! 이젠 유린님밖에 믿을 존재가 없습니다! 현실 세상의 신은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지만 늘 시련과 힘든 현실만을 부여했습니다! 더 이상 힘들고 괴로운 삶은 싫습니다! 제발……자비를……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어설픈 종교자의 흉내까지 내며 눈물을 흘리다니. 이런 짓을 하면서까지 간절히 바라는 게 ‘모두와의 행복한 나날’이라니. 내가 얼마나 시궁창 같은 현실을 살아왔는지 여지없이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들어줄까? 나도 말이지……우수한 용사를 이대로 잃어버리긴 싫거든.”

“저, 정말입니까? 고,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비굴하다 못해 정말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비참하게 인사를 했다. 아니, 상관없어……비참하든 비굴하든 간에 이젠 다 질색이다! 더 이상 슬프고 힘든 현실에 있기는 싫다! 그럴 바에야 얼마든지 비굴한 인간이 되어주마! 더럽고 치사하고 졸렬한 짓이라도 즐겁게 해주마! 나는 내가 바라는 현실만 찾으면 된다!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

“대신 있잖아……나한테 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줄래?”

유린의 말을 들은 순간 잠시 멈칫했다. 설마……목숨?

“아하핫, 설마! 너도 참……목숨을 가져갈 리가 없잖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고. 목숨을 가져가면 더 이상 니가 원하는 행복을 누릴 수가 없게 되잖아?”

“그, 그렇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다. 진짜 목숨을 빼앗기는 게 아닐까 싶었으니까.

“으음, 말을 좀 잘못한 거 같은데……정확히는 ‘해줬으면 하는 일’이야. 내가 말했잖아? 너희한테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소환했다고. 아주 간단해. 바로……모든 걸 나한테 바치는 거지. 충성이나 복종을 포함해 인간성이라 불리는 것들. 쉽게 말해…….”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가 입에 걸려 있었지만……그 입에서 나온 말은 얼음보다 차디 찬 단어였다. 결코 웃으며 꺼낼 말이 아니었지만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꺼낸 단어는 바로…….

“영혼(靈魂)……이라고 해야 하나?”

============================ 작품 후기 ============================

이번 편은 쓰면서 진짜 안타깝고도 슬펐습니다. 이유야 말할 필요도 없겠죠. 카인(유린)과 싸우려던 세린이 어느새 존댓말과 충성의 맹세를 바치는 병신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죠.

아무리 주인공 굴리며 웃우우웃! 하며 좋아하는 저라지만 이 부분만큼은 한숨을 쉬며 적어야 했습니다. 까놓고 말해, 찌질한 거 알고 좆병신인 거 알면서도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세린한테 숨겨진 힘이 있었고 그 힘으로 유린을 무찔렀다!……는 전개는 도저히 적을 수가 없었거든요.

세린을 좀 실드치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여러분한테 여쭙고 싶네요.

여러분이 세린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실 건가요?

저야 이 글을 적은 작가니 세린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힘든 현실 피해 여자만 가득한 이상향으로 왔는데 알고 보니 미친놈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상황. 이말년 작가님이 자주 쓰듯이 멘탈이 와장창! 하고 부서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는 없겠죠. 그치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합니다.

덤빈다 치자.

이길 수는 있냐?

코멘트에 대한 답변에도 그랬습니다만, 이 글은 전반적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초자연적·초월적 존재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유린은 그 초자연적·초월적 존재에 확실히 들어가는 존재입니다. 세린은 아무것도 못 하는 인간이구요.

여러분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은 평범합니다. 유린 같은 신에 가까운 존재 앞에서는 뭘 하든 소용이 없겠죠.

그런 걸 모두 다 알면서도 세린한테 ‘끝까지 용감하게 싸워라! 죽어도 포기하지 마라!’라고 말하는 건……매우 무책임하면서도 잔인한 처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본인이 그러한 입장에 처하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설령 말할 수 있다 치더라도 세린이나 제 사고방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무슨 대답이 올지 잘 아실 겁니다.

그럼 혼자 그렇게 살든가!

왜 니 인생을 남한테 강요하는데!?

용감하게 싸우며 죽을 때까지 저항할 수 있든 없든 간에 그건 개인의 자유입니다. 남한테 그렇게 살라며 강요할 수는 없겠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존댓말까지 쓰며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세린의 모습은 안타까우면서도 현실적입니다.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데 죽이라며 저항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막말로 죽고 싶은 것도 아니고.

강력한 권력자를 친구로 둔 적도 없고 그런 사람들 덕 본 적도 없기에 더욱 더 살고 싶은 마음, 머리를 조아리면서까지 예전의 행복을 되찾고 싶다는 소망은 간절합니다. 이 부분만큼은 아마 대부분 이해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검사, 판사, 변호사, 의사 등. 뒤에 사(士)자 붙는 사람들이랑 친구 먹고 그 덕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잖아요.

안 그래도 이 소설 배경이 박근혜 정권 시절이니 한국은 헬조선 상태. 그런 곳에서 열정페이 강요받으며 빚 갚는 인생만을 살아야 한다니. 저라도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모처럼 손에 넣게 된 연인이나 육욕(肉慾)의 기회를 놓치기도 싫을 거구요.

인간의 한계와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 그게 세린을 저렇게 만든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저런 세린의 모습에 실망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개인적으로는 찌질하나마 저렇게 저자세로 나가는 게 소시민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세린은 원래 세상에서도, 하렘 어드벤처에서도. 결국 힘없는 한 명의 인간이었네요. 분명 세린이 이걸 안다면 ‘시발, 그딴 건 현실이랑 여기랑 일치 안 시켜도 된다고!’라며 화를 냈겠죠. 물론 작가인 저는 그런 거 무시하고 ‘닥치고 내 말 들어! 레드썬!’을 시전할 겁니다.

아! 물론 자기 아내들을 범한 유린(카인)한테 사까시를 받으며 자지를 발딱 세우는 건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만……이 부분을 통해 더욱 더 인간쓰레기 같은 면모를 부각시킬 수 있어 즐겁기도 했습니다. 비굴해져서 억울한데 이런 부분에서나마 득을 봐야 좀 괜찮겠지 싶어서요.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고양이새벽님, zxc54님.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드디어 이번 주가 마지막이네요. 200화 달성까지 성실히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상입니다. 이번 주로 200회 달성이네요. 200회 달성 때 개인적으로 드릴 말씀도 있으니 독자분들도 이번 주를 잘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만 지나면 추석이니까…….

웃우우우웃!

플로듀서!

추석이에요 추석!

이 줫 같은 회사생활로부터 10일이나 빠져나갈 수 있다구요!

그러니까 이번 주는 최대한 꿀을 빨며 생활해요!

웃우우우우우우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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