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5 「20-4 : 데드 엔드 (5)」 =========================
포박(捕縛)이나 구속(拘束). 들어보면 좀 야한 느낌이 들지만……움직임을 봉인 당한다는 느낌은 실제로 겪어보면 매우 좆같은 느낌이었다. 자유로워야 하는 몸이 묶여져 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
군대만 해도 그렇잖아. 자유로워야 하는 신분을 국가한테 저당 잡혔는데 기분이 좋겠냐? 날아갈 것만 같이 기쁘겠냐? 기쁘면 말뚝 박아라. 난 아니다.
눈을 뜬 곳은 넓은 침실이었다. 난 그 침실이 마리아의 침실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왕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침실. 멋진 침대를 보니 하반신이 불끈거렸다. 하아……나도 진짜 노답 미친 새끼다. 묶인 상태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데 옛날의 섹스를 떠올리며 발기하다니……존나 병신 새끼다.
카인이 나한테 욕하는 건 싫었지만 이렇게 되니 정말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름 심한 욕이 병신이라 그렇게 표현하고는 했지만……나 진짜 문제 있는 거 아니냐? 아니, 진짜. 레알. 심각하게 말하는 건데……나 존나 미친놈이잖아?
당장 ‘여, 여기는……크윽! 잡혔나! 이곳에서 탈출해야 해! 모두를……내 소중한 사람들을 구해야 해……!’라며 주인공 같은 대사를 쳐도 모자랄 판에 ‘ㅋㅋㅋ 여기서 마리아하고 섹스했었지! 아아, 좋다! 하반신이 불끈거린다앗! 가, 가버렷! 옛날 추억으로……좆물 싸버렷! 발기해버렷! 내가 나 자신이 아니게 되어버렷!(이하생략)’이라니. 난 진짜 왜 이러냐?
내가 병신이라는 것은 주지(周知)의 사실이었지만 알고 보니 그 이상으로 미친 또라이 새끼였다니. 인생 마지막의 마지막, 막장의 끄트머리에 와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내 입은 킥킥대며 웃음을 토해냈지만……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진다. 있는 힘을 다해 여기서 벗어나려 해도 모자랄 판국에 힘을 쭉 뺀 채 자연체가 되다니. 누가 보면 ‘있잖아. 너 여기 있으면 죽을 텐데……여기서 나가려고 발버둥 쳐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마음씨 따뜻한 충고를 해줄 수도 있겠지. 나도 그 생각 했거든. 그치만……생각만 했을 뿐이다. 더 이상 실행을 할 마음도, 필요도 없었다.
이유야 간단하지.
순식간에 개처발렸으니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굉장하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진 것을 믿을 수가 없냐고? 어, 그건 아니다. 난 원래부터 질 거라 생각하고 여기 온 거였다.
지든 말든, 죽든 말든. 카인의 그 도도한 얼굴에 탄알을 존나 카와이하게 박아주고 싶다고 생각해서 온 거였지. 패배할 거라는 건 원래부터 깔고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뭘 못 믿겠냐고?
전부 다.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의식을 잃기 전에 일어났던 일. 그토록 많은 시간 동안 노력해오며 얻었던 것들, 손에 넣은 노력의 결과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다니. 카인의 손짓 발짓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소유하던 모든 것들이 날아갈 때의 그 기분을 생각하니 다시금 비참한 기분을 느낀다.
내가 질 것을 아예 전제(前提)로 깔아두고 싸웠다지만……어, 솔직히 말할게. 그렇게 아무런 저항도 못 해본 채 진 것도 납득이 가지는 않았다. 내가 쿨해지려고 노력하긴 하지만……있잖아. 이건 아니지 않냐? 야,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지면 납득이라도 가지. 이게 대체 뭔데? 전부 다 엉망진창이잖아! 놈과의 싸움을 요약해보자.
【아스카가 카인의 칼에 찔리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던 내가 총을 쐈지만 막혔다. 투영마술을 썼는데도 막혔다. 총을 들고 힘껏 내리쳤는데도 막혔다. 내 무기랑 방어구를 비롯한 모든 소유물이 사라졌고, 난 이루이한테 마법 처맞고 기절했다. 설명 끝.】
……장난 빠냐? 이게 다야? 진짜 이게 다냐고!? 시발 2주 동안 그 새끼랑 붙기 위해 카미유, 루인을 돌아다니며 그 개지랄 염병을 떨었는데 고작 세 줄로 요약이 된다고? 아래아 한글 글자 10pt 크기로 세 줄 요약이라니? 뭐? 이거보다 더 요약 가능하다고? 해봐!
【세린의 공격은 헛수고, 헛지랄, 무다무다(無駄無駄)! 카인한테 처발려쪄염 뿌우☆ \^0^/】
“장난 빠나, 씨발!”
난 결국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아니, 이게 뭔데? 대체 이게 뭐냐고? 한 줄로 요약되다니? 야, 카인은 명목상(名目上) 최종보스다! 파이널 보스라고! 끝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놈이랑 싸웠는데 한 줄 요약이라니? 이게 말이나 돼? 이걸 대체 어떻게 납득하란 말인데?
말이 나와서 말인데, 파이널 보스! 최종보스 혹은 끝판이라고 불리는 상대와의 대결은 늘 장엄(莊嚴)하거나 무게 있게 묘사되기 마련이잖아! 서로 만난 뒤 의미 있는 대사를 나불거리며 서로의 정의, 신념, 실력을 확인하는……뭐 그런 거잖아! 다들 그런 걸 기대하며 이 소설을 봤을 테고!
근데 이게 뭔데? 장엄? 무게? 총, 마법, 격투. 다 안 통하고 제대로 된 공격도 못한 채 기절했는데 대체 이거의 어디가 마지막 싸움이란 건데? 내가 겪은 한심한 경험의 어디가 장엄하고 멋지냔 말이다?
그뿐이냐? 순식간에 개처발리고 털린 것도 모자라 내가 가진 것들마저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이 세상에 왔을 때부터 날 보호해주던 M16A1. 레벨 업과 함께 얻게 된 K2 소총. 비싼 돈을 들여 얻은 아처(Archer / アーチャー) 코스튬까지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덕분에 난 지금 알몸으로 묶여있지!
미리 말해두지만 남자가 알몸으로 묶인 건 엄청 창피한 일이다. 절대 즐거운 일 아니다! 여자라면 ‘아, 아흣……이, 이런 모습! 누구한테 보여주면 큰일이야!’라며 허둥대면 귀엽기나 하지! 나 같이 ‘ㅋㅋㅋ 마리아와의 섹스! 쎅스!’라며 발기나 하고 앉았는데 누가 이걸 보고 즐거워하겠어? 내가 진짜 미친놈이라고 위에서 적어 놓은 이유를 이제 알겠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야, 이건 진짜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 가지고 있던 옷이 사라져서 본의 아니게 누드쇼를 펼친 것도 그렇다만……무기랑 아이템이 모조리 삭제되는 걸 실시간 리얼타임으로 지켜봐야만 했다니! 대체 이건 뭔데? 정신적 고문이나 공격? 그런 생각으로 한 거라면 존나 잘 통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도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장엄하지도 않고 멋있지도 않았던 것도 모자라 성대하게 처발리고 개털린 싸움. 소중한 무기나 아이템이 사라진 것을 생각하니 더욱 더 화가 난다. 사라진 것 자체에도 화가 나지만 그보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건……바로 묘사와 길이었다.
이거 보고 있는 사람들은 ‘이 새끼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임?’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지. 어, 내 말은……길이와 묘사. 한 마디로 ‘묘사가 너무 짧다’라는 거였다.
지금까지 내 목숨을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늘 함께 하던 무기. 비싼 돈을 주고 산 덕분에 위기의 순간에도 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코스튬. 그런 무기나 아이템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몇 페이지는 때워먹을 수 있는데! 에피소드 하나 정도는 얼렁뚱땅 넘길 수 있었는데! 그걸 몇 줄로 적고 끝내버리다니! 진짜 무슨 생각이냐?
카인이랑 만나서 ‘지금까지 왜 이런 짓을 한 거냐’라며 여러 질문을 던졌다면 그것도 좋았을 텐데! 에피소드 하나 정도는 무기랑 방어구가 사라진 것을 보며 과거를 떠올린 것 + 질의응답으로 때울 수 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 판결을 내려버리다니……작가의 능력은 여기까지가 한계라는 걸 나타내는 좋은 예시였다.
뭐? 그럴 수 있었는데 독자들이 지겨워 할까봐 고속으로 처리했다고? 어허! 자기 능력이 부족한 걸 독자를 위한다는 변명으로 무마(撫摩)하려 하다니! 남자면 남자답게 자기 능력이 부족한 것을 인정해라! 나는 인정하잖아! 인정했으니 지금까지 똘끼 충만한 미친 짓을 했던 거지!
하아……. 온갖 괴상한 것을 생각하던 나는 한숨을 쉬며 이 쓸모없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래, 작가가 인정하든 말든 이 소설이 미친 작품이든 어떻든 간에……중요한 건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
알몸으로 묶인 것도 모자라 스테이터스조차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은 홀로그램 윈도우를 조작할 수 없게 된 건가……? 신기하지도 않았다. 내 공격이 모조리 통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내 눈앞에서 모든 아이템(무기와 코스튬, 다른 도구들까지 모조리)이 소멸됐는데 이제 와서 그걸 조작할 수 있게 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설령 다시 무기와 방어구를 포함한 아이템을 되찾고 홀로그램 윈도우를 조작할 수 있게 된다 치더라도……더 이상은 싸울 수도 없었다. 아무런 공격도 통하지 않을뿐더러 자기 마음대로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신한테 어떻게 이기란 말이냐?
꿈속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처발렸기에 난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카인이라는 이름. 남자의 모습을 가진 백발(白髮)의 여자한테는 ‘덤빈다’라는 행위 자체가 너무나 의미가 없다는 짓이라는 걸 말이다. 벌레가 아무리 덤벼든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겠냐?
물론 바퀴벌레나 말벌 같은 벌레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다르게 말하자면, 나는 바퀴벌레나 말벌 같은 벌레보다도 못하다는 소리겠지. 지금까지 자기가 준비한 세상에서 자기 뜻대로 움직여준 바보. 자기 자신을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 생각하는 머저리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게 아주 틀린 게 아니라는 게 또 열 받는 거다만…….
온갖 푸념을 다 생각하고 나니 이제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되살아난다. 난 진짜 사람이 왜 이러니? 보통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어디 갔지? 무사한 건가?’라는 말을 하는데 왜 나는 일어나자마자 발기부터 하고 온갖 화낼 거 빡칠 거 다 따진 다음에 다른 사람 걱정을 할까? 인간이 진짜 왜 그러니?
내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지에 대해 킥킥대던 나는 진심으로 진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내가 쓰러지게 된 이유부터. 내 모든 아이템이 사라진 것에 전의(戰意)를 상실했었지. 그런 내 의식을 끊은 것은 다름 아닌 이루이였다. 카인의 부름을 받은 그녀는 내가 완전히 돌아보기도 전에 날 기절시켰었다.
아내들을 빼앗긴 것도 그랬다만 카인과 몸을 나누지도 않았던 이루이가 단숨에 지배당하다니. 나나 미카가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한 거겠지. 누가 카인을 거부할 수 있을까? 이 ‘하렘 어드벤처’에서는 그 누구도 그를 거부할 수 없었고 저항할 수도 없었다. 신에 대한 저항과 거부라니. 어리석은 행동이지. 그 결과가 바로 나잖아.
이루이에 대한 걱정 다음은 아스카였다. 몬스터 테이밍의 효과가 풀린 후 어떻게 됐는지는 둘째 치더라도……칼에 찔리고 있던 그 모습은 내 걱정을 다시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저 멀리서 얼핏 봤던 아내들은 배가 매우 커져 있었지만 아스카의 배는 매우 날씬해진 상태였기에 더욱 더 불안함을 증가시킨다.
상처와 괴물의 생산. 그 두 개의 걱정을 접어둔 채 다음 걱정으로 마음을 옮겼다. 자기들의 동료이자 친구인 아스카가 칼에 찔리고 있는데도 그걸 보며 킥킥 대던 아내들의 모습은 정말 기억해내기 싫었지만……기억해내기 싫다고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회상을 시작한다.
그녀들은 더 이상 내가 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마리아와 아테나, 헬레나는 자신들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다른 아내들은 투명한 네글리제(Negligee)를 입고 있었던 걸로 기억난다. 살결이 거의 다 비치고 있었으니 투명한 거겠지. 나랑 있을 때도 그런 건 입지 않았었는데……한숨 쉴 일이 하나 더 늘었군.
나를 사랑하고 신뢰해주던 아내들은 카인에 의해 육체와 정신을 지배당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나는 그들의 남편이자 아버지인 신세린이 아니라 ‘살든 죽든 간에 관심 없는 인간’이었다. 내 코스튬이 사라지며 알몸이 되자 그걸 보며 폭소를 터뜨렸던 걸 생각하면 나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은 완전히 사라진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맨 처음에 만났을 때는 그나마 나한테 죄책감이나 감정을 가진 듯이 보였지만……안즈와 이곳에서 지내며 점차 그녀들과는 만날 수가 없게 됐다. 잠시간 대화를 나누었던 헬레나는 나와 안즈한테 모욕에 가까운 처사(處事)를 보여줬었다. 그녀를 아내로 삼아줬던 임금, 신세린의 기억이나 의미 따위는 이미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였다.
약 1주 정도 함께 여행을 했던 이루이도 웃으며 날 공격했으니 다른 아내들은 나한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즉……그녀들을 구하러 왔지만 아내들은 나한테 그런 기대나 감정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봐야 했다.
나 혼자 병신 헛짓을 한 거지. 내가 그런 짓을 한두 번 했던 게 아니니 이제 와서 슬퍼할 건 아니다만…….
그런 걱정 와중에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느꼈던 것은……날 비웃던 아내들 중 안즈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2주 전, 카인에 의해 죽음의 마을이 된 카미유로 강제 텔레포트를 당한 게 나뿐이었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기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나 같이 개고생을 당하지 않아도 괜찮았으니까.
카인한테 지배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아마 무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막연한 희망이라도 품고 있어야 불안함이 진정될 거 같은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만……그녀만큼은 무사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배가 능력의 사용을 그친 이후부터는 그녀와 섹스를 할 때마다 최대한 많은 정액을 주입시켰었다. 왕궁에서 보호 받고 있으니 더 이상 배가 능력으로 아기를 죽음에 이르게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다못해 이곳에 계속 있으면서 어머니가 되는 기쁨을 누려주길 바랐다.
아마 개월(個月)로만 따지자면 1개월도 채 안 됐을 테니 움직이거나 도망치는 데에 무리는 없었겠지. 괴물이 언제부터 마을에 득실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안즈는 괴물의 낌새에 민감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 이곳에서 도망치거나 싸우는 길을 택했겠지.
성격 같아서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야만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여러 이유를 품고 싸웠겠지만……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던 안즈다. 부디 그녀 한 명만이라도 이곳에서 무사히 도망쳤으면 하는 소망이 마구 치솟는다.
그녀가 정신지배(세뇌)를 당하지 않고 무사하다는 근거는 바로 MP의 수치였다. 5,800이라는 MP의 수치는 기본 레벨 38에 의한 마력 3,800 + 보너스 2,000 포인트에 의해 만들어진 거였으니까. 날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으면 ‘사랑과 신뢰의 반지’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기에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거였다.
도망쳐라. 살아남아라 안즈. 어느 쪽이든 좋으니 나처럼은 되지 마라.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밖은 괴물로 가득하지만 프레그넌트 쪽으로 간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어쩌면……다른 자멘, 부카케, 어보션. 세 곳 중 한 곳이라도 무사한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만 도착한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난 이미 나 자신이 살아남을 가능성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생각해봤자 무의미한 것이었다. 생각은 내가 하지만 실행은 카인이 하니까. 내가 아무리 김칫국을 마시면 뭐 하나? 그런다고 내 소망이나 바람이 이루어지냐? 그럴 턱이 없지.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부터 이미 내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내 아내 중 유일하게 정신을 지배당하지 않은 안즈라도 살아남기를 바랐다.
더 이상 안즈의 목소리를 듣거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누군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가 싸워 온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하핫, 그럴 리가 없잖아?”
내 간절한 소망을 발로 짓밟는 목소리가 들렸다. 침실 밖에서부터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말 안 해도 알 것이리라. 카인이지. 문 밖에서 이미 저 지랄을 하는 거 보니 내 생각을 읽은 모양이군. 부지런하기도 한 새끼.
“읏, 안……돼……이런 모습, 세린한테……응, 앗! 하지 마앗!”
“……어?”
문 밖에서 들린 목소리는 카인의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 말라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무언가를 호소하는 누군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 목소리……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아니, 들어본 적이 있는 정도가 아냐. 조금 전까지 생각하던 ‘그녀’의 목소리였는데……그게 왜 문 밖에서 나는 거야? 내 질문에 대답하려는 듯 쾌활한 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아, 안즈! 과거의 서방님께 인사드려야지?”
문이 열린다. 두근거리는 가슴. 그럴 리 없다며 현실을 거부하려는 이성과 달리 육체는 이 현실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문이 열리며 나타난 모습은…….
“응, 끄응! 아, 앗! 카인, 카이이인! 카인의 자지 너무 조오아아앗! 응큿, 허끅! 아앗!”
……카인의 자지에 박힌 채 허리를 마구 찧어대는 안즈의 음탕한 모습이었다.
† † † † † † † † † †
내 시신경(視神經)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당장 시신경을 뜯어버리고 싶었다. 이 빌어먹을 현실을 꼭 내 시야에 넣어야 했냐며 울부짖고 싶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난 그녀의 이름만을 조심스럽게 불러야 했다.
“……안, 즈……?”
안즈. 틀림없는 안즈였다. 내가 줬던 하얀색 초보자용 비키니 아머는 어디에 뒀는지 그녀는 투명한 네글리제를 입은 채 카인한테 안긴 상태였다. 내가 이루이의 보지에 자지를 박은 채 걸어왔듯이, 카인의 물건을 자기 다리 사이에 받아들인 안즈는 그의 몸에 팔을 휘감은 채 스스로 허리를 찧어대고 있었다.
“하아, 하아……미, 미안해 세린! 그치만……세린의 쬐그만 좆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기분 죠아! 허, 끅! 아, 앗! 미안해요, 카인! 카인님의 꼬추, 굉장히 커요! 세린의 이쑤시개 같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늠름하고 우람하고 굵어, 하끅! 아, 앗! 아기가! 아기가 발로 찼어요! 아, 응♡”
내 물건을 작다며 욕하는 이루이의 모습은……내 뇌를 하얗게 만들기 충분했다. 안즈가……아내들뿐만 아니라 나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카인이 수상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안즈가……내 사랑스러운 아내 중 한 명이 카인의 하반신에 열락(悅樂)을 띠며 저토록 좋아하다니……스스로 보지를 눌러대며 사랑을 갈구하다니……!?
“아하핫, 세린의 저 표정! 카인님이 말씀한대로 바보 같은 표정이에요! 응, 하아……카인님의 자지가 박힐 때마다 아기가 죠아해요! 음, 츕♥ 쮸읍……푸핫! 하, 하윽! 세, 세린 앞에서 카인님과 섹스했으니 오늘밤은 듬뿍 사랑해주시는 거죠? 저를 윤간(輪姦)해주시는 거죠? 네?”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했던 것은 단 한 순간. 예전과 달리 존댓말과 경칭(敬稱)까지 써가며 카인의 사랑과 정액을 얻으려 하는 그 모습은 내가 알던 야만족의 늠름한 전사, 안즈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쾌락에 미친 걸레 같은 창녀일 뿐…….
“응, 끅……어? 아, 아하하핫! 카인님! 저거 봐요! 세린의 꼬추……쪼그마한 꼬추가 막 섰어요! 하윽! 아, 하아! 하아! 보이시죠? 네? 저를 빼앗겨서 분한가 봐요……후훗……”
내 하반신은 서있었다.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안즈를 빼앗긴 순간 나도 모르는 NTR 속성에 눈을 뜬 걸까? 아니면 카인한테 육체를 지배당해 이러는 걸까? 어느 쪽이든 더 이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안즈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달라진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날 보라며 즐거워하던 안즈의 배는 다른 아내들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정도로 부푼 상태였다. 카인한테 거의 달라붙다시피 매달렸기에 스스로 카인을 끌어안을 때마다 아기가 짓눌리는 게 보였다.
내가 카미유로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안즈의 배는 전혀 부풀어 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의 배가 부풀어 오른 이유는 단 한 가지겠지. 여성의 임신 상태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고속성장’ 마법을 썼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면……안즈의 몸이 위험하다!
“그, 그만해! 안즈, 멈춰! 고속성장을 당한 니 몸은 예전처럼 건강한 게 아냐!”
거두절미하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부터 말해서 그런 걸까? 안즈는 처음에 ‘미안해’라고 말했던 자신을 완전히 까먹은 건지 커다랗게 비웃으며 더 허리를 찧어댔다.
“아하핫, 카인님~♪ 저거 봐요! 카인님한테 저를 빼앗기니 이상한 걸 지껄이며 그만두라고 말해요! 헤헤♥ 카인님의 자지와 제 자궁이 키스할 때마다……윽! 아, 앗……머, 머리가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데……흑끅……이, 이 느낌이 위험한 느낌일 리가……없, 억! 앗! 아앗! 아, 아기……내 아기이잇!!”
저 바보! 자궁과 귀두가 키스를 한다는 것은 표현적으로 보았을 때는 미사여구(美辭麗句)일지 몰라도 생물학적인 부분에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저렇게까지 급속한 성장을 이룬 아기를 피스톤 운동을 하며 찌르는 거다! 아기가 다치거나 난산(難産)의 위험이 있단 말이다!
임신 상태가 안정기(安定期)에 접어든다면 이야기는 또 다르겠지만……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위험했다! 내가 텔레포트를 당한 2주 전부터 했다 치더라도 겨우 2주다! 2주 만에 9~10개월에 도달하는 임신 상태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저 빌어먹을 자식……설마 이것까지 계산하고 안즈한테 ‘고속성장’ 마법을 사용한 건가!?
“개새끼야! 멈춰! 멈추라고! 더 이상 그 짓 하지 말란 말이야, 개새끼……컥!”
가슴에 파고드는 강력한 타격(打擊). 난 말을 잇지 못한 채 고통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내 가슴에 마력탄을 날린 것은 지금도 아기가 죽을 것 같다며 스스로 하반신을 움직여대는 모순적인 존재. 내 전(前) 아내이자 현재 카인의 아내인……안즈였다.
“방해하지 마아앗! 아기, 죽엇! 하윽! 아앙! 카인님과의 섹스를 방해하는 애새끼 따위! 에잇♥ 얍♡ 응, 하, 읏! 그, 그래! 죽어! 너만 죽으면 더 카인님께 사랑받을 수 이쪄! 죽엿! 죽어엇!”
……미쳤어. 마력탄을 맞아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내가 느낀 것은 단 세 글자. ‘미쳤어’라는 감상뿐이었다. 로라나 다른 아내들도 가끔 아기를 죽이면서까지 섹스를 즐기려 했지만……안즈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배가 능력에 의해 아기가 죽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아기에 대한 집착이나 소중함이 매우 강한 여자였다.
그런 안즈가……언젠가 아기와 함께 다시 야만족의 숲을 만들고 싶다며 부끄럽게 꿈을 말하던 안즈가……아기를 죽이면서까지 카인과의 섹스를 즐기려 하다니……. 내 하반신은 절망적인 안즈의 변모(變貌)에 놀란 것인지 더욱 더 빳빳하게 서있었다. 마치 내 아내를 빼앗기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변태가 된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아, 안즈! 새로운 서방님이 주는 첫 사정(射精)이야! 세린한테 잘 보여주자!”
날 대놓고 조롱하는 카인의 말에 안즈는 기쁨 어린 비명을 지르며 아양을 떨었다. 어찌나 좋았는지 눈물까지 살짝 흘리며 안즈는 정성 어린 목소리로 카인의 행동과 곧 들어올 자지를 찬양해댔다. 전(前) 남편인 내 앞에서…….
“싸아! 싸요! 빨리! 아기한테 이 세상의 주인인 카인님의 자짓물을 듬뿍 맛보여, 응! 허윽! 아, 앗! 가만히 좀 있어! 카인님의 좆물! 맛볼꼬야! 내가 맛볼꼬야! 애새끼한테 줄 자지밀크는 업쪄! 좆물우유 자지밀크 듬뿍 드러와! 아, 끅……아아아앗! 드러와쪄! 뜨겁고 달콤하고 마싰는 정자(精子) 스프가 드러와아, 윽! 아아아──────앗!!”
온갖 수식어로 카인의 정액을 찬양하던 안즈는 그렇게 실신해버렸다. 카인을 휘감고 있던 팔과 다리는 전원이 나간 장난감처럼 축 늘어져버렸고, 이상한 효과음과 함께 정액은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카, 인님……헤헷……쯉♥ 쮸릅……!! 어큭!?”
“안즈!”
저 개새끼! 더 이상 목이나 허리를 휘감을 힘이 없어진 안즈는 카인의 입을 탐하려다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배가 있는 부분부터 떨어진 게 아니라 천만다행이었지만……자기 아내를! 자신을 사랑한다며 저토록 기뻐하던 여자를 바닥에 내던지다니! 저 씨발새끼가!!
“후우……이래서 쓰레기는 안 된다니까? 조금만 잘 해주면 금방 좆물이나 요구하고. 걸레 같은 병신년들……퉷!”
카인은 지금까지 보여줬던 호의적인 모습과는 달리 안즈를 욕하며 침을 뱉었다. 모욕과 함께 떨어진 침. 정상적인 사고회로를 지닌 여자라면 당장에 울거나 고함을 질러도 모자랄 처사였지만…….
“헤, 헤헷……카인님의 침……쬬릅, 할짝……하우, 맛있어요……천하일미(天下一味)에요…….”
더 이상은 안즈를 볼 수조차 없었다. 눈물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도 있었지만……그 늠름하고 씩씩했던 안즈가 저토록 변해버린 모습을 차마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쯧. 꼴 보기도 싫은 실패작들. 꺼져라.”
카인이 손을 한 번 휘두르자 안즈의 모습이 사라졌다. 강제로 그녀를 텔레포트 시킨 건가……. 나도 저렇게 텔레포트를 당했을 거라 생각하니 너무나 슬프기 그지없었다. 정말 손짓 발짓 하나면 뭐든 다 되는군. 카인은 날 향해 지금까지 보여준 적이 없는 웃음. 늘 보여주던 미소에는 없었던 ‘비열함’을 듬뿍 담은 채 입을 연다.
“자……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13번째 용사, 신세린님. 우리 서로 이야기 나눌 게 많겠지?”
악마 같은 신……. 신이라는 칭호를 가진 악마와의 대화가 마침내 시작됐다.
============================ 작품 후기 ============================
다 쓴 에피소드를 업로드하느라 다시 보게 됩니다만, 지금 봐도 제정신이 아니네요. 허무하게 끝난 배틀을 독자를 위한 배려라고 하지를 않나, 갑자기 무다무다 드립을 치지를 않나. 이거 진짜 내가 쓴 거 맞나 싶을 정도의 막장성을 보여줍니다.
세린의 잡생각만 이러면 또 모를까, 상황 자체도 막장으로 치달아 갑니다. 원래부터 막장이었다고요? 어허, 이 사람들이! 그런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말하지 맙시다! 막장에 막장을 곱해봤자 막장밖에 더 되겠습니까? 마이너스 x 마이너스 = 플러스지만 막장 x 막장 = 정상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특히 이 소설에 한해서는 말입니다!
무사하길 바랐던 안즈는 불룩 부풀어 오른 배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섹스만을 바라는 암캐가 되어버렸습니다. 도망쳐서 혼자라도 행복하기를 바랐던 히로인을 대놓고 NTR하며 나타나다니. 어찌 보면 카인은 세린과 비슷한 인물일지도 모르겠네요. 위치는 정반대지만 말입니다.
안즈의 행방을 물으셨던 독자분이 계셨습니다만 자세히 답변해드릴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대놓고 ‘ㅎㅎㅎ 안즈 지금 박히고 있음’ 같은 대답을 드릴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토리를 까발리는 것도 그렇지만 단적으로 적어버리면 소설을 적는 의미가 없어져니까요.
잡혀버린 세린과 빼앗겨버린 아내.
13번째 용사라며 세린한테 다가오는 카인.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아, 참고로 BL은 아닙니다.
BL 전개를 바라신 분들.
이 글을 잘 보세요…….
……레드썬!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vdfs님, 마무리에 대해서는 일단 생각해놓은 게 있습니다. 처녀작이다 보니 너무 많은 것을 집어넣었다는 후회가 좀 듭니다. 그것까지 감안한다면 ‘이 작품다운 엔딩’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v대상인v님, 엔딩은 항상 해피엔딩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단지 해피 엔딩이긴 하지만 그 엔딩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편하지 않다……는 게 제 개인적인 지론(持論)입니다.
이상입니다. 다음 주 5일을 연재하면 드디어 200편 달성이네요. 감개무량합니다. 지금까지 봐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재연재를 포함해 두 번째 노블레스를 점차 준비 중입니다만, 과연 잘 될지 걱정만 앞섭니다. 독자분들께 다시금 감사를 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P.S - 알몸으로 묶인 세린과 카인의 붕가★붕가를 생각하신 분들. 반성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