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197화 (197/235)

00194 「20-3 : 데드 엔드 (4)」 =========================

꿈에 그리고 그리던 왕궁으로 들어온 건 좋았지만……현실은 꿈처럼 달콤한 게 아니었다. 내가 망상벽이 좀 있다 보니 여러 가지를 생각했었거든. 괴물을 멋지게 쓰러뜨리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오는 모습을 상상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거기 아재! 그런 눈으로 보지 좀 맙시다! 왜 있잖아!? 자기가 보는 영화나 애니에 ‘아아, 내가 저기 나오는 주인공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단숨에 약점을 파악해서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데!’ 같은 상상! 그런 상상은 누구나 하잖아?

비단 이때뿐만이 아니었다. 현실에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게임 등을 즐기는 사람들은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이런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내가 저런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라면……내가 저런 주인공 같은 삶을 살았더라면…….’하고 말이다.

간악(奸惡)한 카인한테서 아내들을 구하기 위한 대사나 계획 등을 생각하긴 했지만……실제로는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광장을 헤쳐 나오는 것만으로도 기진맥진이었다. 지금도 엄청나게 힘들고 졸렸다. 수마(睡魔)에 사로잡혀 바로 정신을 잃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지.

피가 흘러 잘 볼 수 없었던 왼쪽 눈 두덩이를 적당히 닦았다. 으음, 왼쪽 눈을 직접 맞은 건 아니지만……오른쪽 옆구리에 양 다리. 크고 작은 상처를 합치면 차마 이 상태로는 카인한테 갈 수가 없었다. 조금만 정비를 하다 가야겠군.

“이루이, 괜찮아?”

묻는 내가 바보였다. 이루이는 나 같은 성격이 아니었기에 ‘안 괜찮아요’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으니까. 은색 비키니 아머에는 핏자국이 약간씩 묻어 있었다. 날 치료해주느라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은 이루이를 여기 두고 갈 수는 없다. 좀 쉬어야지……. 어차피 이 상태로는 전투도 못 한다.

이루이의 머리를 살짝 거칠게 어루만지며 잘 했다고 칭찬했다. 마을에서 혼자 살아남았던 아이─실제로 아이는 아니다만 어쩐지 하는 행동이나 그녀의 모습이 아이처럼 느껴진다─가 여기까지 오다니. 대견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벽에 기댄 채 스테이터스를 간략하게 확인했다. 으음, 역시 HP와 MP가 걸레짝이 됐군. HP는 1,000을 넘지 못하고 있었고 MP는 800 정도를 나타냈다. 우리가 달리는 길을 가로막거나 공격하는 놈들한테 자동사격을 퍼부었으니 이 정도의 MP가 남은 것만 해도 용한 것이었다.

“세린님……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지친 목소리로 그렇게 물으니 뭐라 대답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할 거냐고? 일단은 이곳에서 쉬어야 한다고 했다. HP와 MP의 회복부터 시작해 피로를 조금이라도 풀어야 하니까. 괴물들은 왕궁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기에 이곳은 일종의 안전지대나 마찬가지였다.

왕궁 안에도 괴물이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적어도 밖보다는 여기가 훨씬 더 안전했다. 만약 여기에 괴물이 있었다면 들어오자마자 만났을 테니까. 아니면 괴물들이 왕궁으로 들어오게 허락했겠지. 어느 쪽이든 ‘이 부근에는 괴물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쉬라고 말한 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 이루이는 새근거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빠르구만. 말은 안 했어도 역시 지치긴 지쳤었나보다. 아이템 인벤토리에서 덮는 이불을 꺼내 살며시 덮어줬다.

포션이 없는 이 세상에서는 잘 먹고 잘 쉬는 것 정도밖에 HP & MP의 회복수단이 없었다. 지금은 만들 수 없게 된 좆물캡슐의 경우 두 개 전부를 회복시켜줬으니 혁신적인 아이템이었다만……모든 마법은 카인이 준 것이었기에 이미 회수당한지 오래다. 있었으면 이미 이루이한테 먹였겠지.

내 눈도 감겼다. 좀 잘까……. 괴물들이 득실대는 곳에서 잠을 청하는 나나 이루이도 참 미친 것 같지만……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장 한 대라도 맞으면 죽을 것 같은 몸을 이끌고 가서 죽을 바에야 휴식이나 취하고 죽어야지. 승산이 없다면 몸이 편안하기라도 해야 할 거 아니냐. 이불을 꺼내 덮은 채 생각에 잠긴다. 잠들려면 생각에 잠기는 게 좋다.

드디어……드디어 그렇게 고대하던 왕궁에 왔다. 2주라는 시간 만에 온 레이프는 괴물로 붐비는 지옥이 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그런 괴물들을 제치고 겨우 온 왕궁이다. 틀림없이 카인과 아내들이 있을 것이다.

무사히 있을 거라는 보장은 할 수 없지만 날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카인이 아내들을 괴물로 만들었을 리는 없었다. 그 건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걱정이 되는 건 아스카와 프레그넌트의 주민들이었다.

원래부터 괴물이었던 아스카는 초록색 촉수괴물을 만들 수 있었다. 예전에 쓰던 마법, ‘몬스터 테이밍’에 의해 주민들에 대한 공격이나 괴물의 생산 등을 금지시키긴 했지만……그 마법은 이미 풀린 지 오래였다.

몬스터 테이밍에서 벗어난 아스카를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카인밖에 없었다. 그런 카인이 아스카한테 초록색 촉수괴물을 만들라고 시켰다면? 지금까지 함께 지내던 아스카는 프레그넌트의 숲에서 사람들을 죽이던 괴물 아스카로 돌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스카만 해도 신경이 쓰여 미치겠는데 프레그넌트의 주민들도 내 머릿속을 마구 휘저어놓았다. 밖에 있던 괴물들 중 좀비 타입이 꽤 많았지만 난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그러다가 죽으면 나나 이루이만 손해였으니까.

레이프의 주민들이나 경비대원들이 그런 모습으로 변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그 좀비 타입 중 프레그넌트의 주민들이 섞여 있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맨 처음 좀비 타입을 봤을 때부터 어렴풋이 생각나던 불안함이 이제야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모든 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다니. 내가 무능하고 무력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좋아서 깨달은 사실도 아니었건만 이걸 몇 번이나 나한테 각인시키게 만들다니. 잠을 자야 하는데 한숨이 또 나온다.

아내들이 저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도 되냐고? 어……응.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못할 이유는 또 뭔데? 이미 일이 벌어졌고 이 일은 일분이나 한 시간 일찍 간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니까?

난 지금 카인이랑 싸우러 가는 거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이길 수 있는 확률을 높여도 모자랄 판에 HP와 MP, 몸과 정신이 걸레씹창이 된 상태로 카인이랑 싸우러 가라고? 자살을 하고 싶으면 왕궁 밖으로 나가면 되는데 내가 왜 그 짓을 해야 하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진다. 예전에는 향락(享樂)을 누리던 왕궁에 도망치듯이 들어와야 한다니. 잃은 것과 빼앗긴 것들을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았다. 내가 무슨 왕이고 임금이야? 괴물들한테 쫓기며 헐레벌떡 도망쳐서 온 곳이 여기인데…….

눈이 더욱 감긴다. 이미 감긴 눈이지만 생각마저도 귀찮다는 양 억지로 생각을 셧다운 시켰다. 더 이상은 생각도, 후회도.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며 나를 강제로 어둠 속에 다이빙시켰다. 생각과 후회는 싫어도 곧 하게 될 거라는 말과 함께…….

† † † † † † † † † †

하기도 싫은 공무원 공부. 갚아야 하는 많은 빚.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했다. 도서관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정수기 물을 세 잔 정도 마시며 생각한다. 정말로 공무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걸까? 우리 부모님은?

【공무원이 된다 = 빚 바로 다 갚는다 = 행복한 미래가 펼쳐진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원래부터 대단한 인간들이었지만 더욱 더 대단하게 보인다. 이 ‘대단하다’라는 말이 정말 위대하고 대단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비꼬려고 하는 말이라는 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자기들이 빚을 만들고 그걸 나한테 떠넘긴 것도 모자라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니. 그게 쉬운 일이냐? 주둥아리로 말만 하는 거라면 세계정복은 간단했다. 세계정복만 하겠냐? 우주정복도 가능한데. 말로만 하는 거라면 누구든 간에 자기 능력 이상의 결과물을 마구 뱉어낼 수 있었다. 말과 현실은 다르니까.

한숨을 쉬던 나는 공무원 공부 책을 주섬주섬 챙긴 뒤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가자. 집에 가서 일단 저녁이라도 먹고 좀 쉬자. 어차피 하지도 않는 공부지만 어쩔 수 없이 하게 됐으니 조금이라도 봐야지. 그 전에 애니도 좀 보고 게임도 하겠지만……뭐 어때.

아무도 없는 도서관을 나가니 사람 한 명 없는 텅 빈 대학 거리가 날 반긴다. 이상하다……왜 아무도 없지? 저녁이니까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학생들이 한 팀 이상은 있어야 하는 건데? 이번 주는 대학 시험 기간도 아닌데 왜 아무도 없는 걸까?

위화감을 느끼며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평소에는 모든 걸 나한테 떠넘긴 좆같은 부모였지만 이렇게 불안한 때에는 아예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있다’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졌으니까.

“다녀왔습니다……응?”

집의 분위기는 매우 밝았다. 엄마와 아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때로는 ‘아이구, 우리 장한 아들!’이라며 듣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의 칭찬이 들려왔다. 뭐지? 내가 부모님한테 칭찬 들을 짓을 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다녀왔습니다……. 아빠, 엄마.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숨이 막힌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함께 밥을 먹곤 했던 상에는 통닭이나 피자가 있었다만……그건 딱히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배달 음식을 먹는 게 우리 집만 있는 건 아니었잖아.

정말 중요한 것. 절대 있을 수 없는 현실. 내 숨을 막히게 만들다 못해 내가 미친 게 아닌가 의심까지 하게 만들 광경.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화창한 표정으로 웃고 있던 아빠와 엄마. 그 두 명 사이에서 웃으며 음식을 먹고 있는……카인이었다.

“……너, 너. 어떻게 여기에……!?”

어?

어!?

왜? 어째서? 어떻게?

왜 저 새끼가 우리 집에 있는 거지?

어떻게 ‘하렘 어드벤처’가 아니라 이 현실 세상에 카인이 있는 거지?

있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카인이 현실 세상에? 우리 집에 들어와서 부모님이랑 같이 밥을 먹고 있다고? 대체……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온몸이 떨린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을 먼저 깨트린 것은……아빠였다.

“뭐, 뭐야 너!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온 거야!?”

나보고 뭐냐니? 우리 집에 어떻게 들어온 거냐니?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게 아들한테 할 말인가? 엄마 또한 나보고 ‘당신 뭐예요!?’라며 기겁을 하기에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가 싶었다.

“아, 아빠. 엄마. 왜 이러세요? 저 세린이에요……지금 막 도서관에서 돌아 왔다구요.”

“아빠? 내가 왜 당신 아빠야!? 우리 아들은 여기 있는 카인이라고!”

아빠, 미쳤어요? 아빠는 한국인이잖아요. 카인이라는 이름의 외국인 아들내미가 있을 턱이 없잖아요. 그런 생각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혹시 아빠가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 그래. 빚을 만든 후 나한테 떠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사과도 없는 걸 보니 미치긴 미친 인간들인데……이거랑 그거랑은 좀 다른 부류, 다른 방향으로 미친 거였다. 적어도 아들인 나를 몰라볼 정도로 실성하지는 않았단 말이야. 근데 이게 대체 뭔데?

“어, 엄마. 엄마는 저 아시죠? 엄마 아들 신세린이잖아요. 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보는 아빠를 무시하고 이번에는 엄마한테 말을 걸었다. 다름 아닌 엄마다. 배 아파하며 날 낳은 엄마가 자식인 나를 몰라볼 리가 없잖아? 그렇죠, 엄마?

“하, 학생 누구에요? 왜 우리 집에 있어요? 얼른 나가요! 아, 안 나가면 경찰 부를 거예요!!”

“……엄마.”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뭐라고 했지? 내가 누구냐고? 왜 우리 집에 있냐고? 안 나가면 경찰을 부를 거라고? 이게……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게 아들한테 할 법한 말인가? 너무나 어이가 없었기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아빠. 엄마. 진짜 왜 그러세요? 저 세린이라니까요? 엄마 아빠 아들……어큭!”

말을 하던 나는 뒤로 나자빠졌다. 그리 강하게 밀친 건 아니었지만……갑작스럽게 가슴을 밀친 아빠는 나자빠진 나한테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 사람 아주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만! 우리는 너 같은 사람 몰라! 우리 집에는 나랑 내 아내! 그리고 아들인 카인! 세 명밖에 없다고!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여보, 경찰! 경찰 불러! 빨리!”

경찰을 부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움찔대기 마련이지만……웃겼다. 난 전혀 그런 것이 들리지 않았다. 신경을 쓸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날 향해 소리치는 아빠. 우리 아들은 여기 있다며 옆에 있는 사람을 신경 쓰는 엄마. 지금까지 내 부모님이었던 그들은 아들인 나를 미친 사람 보듯이 취급하며 나가라고 했고, 그런 나를 보며 카인은……웃고 있었다.

아주 즐겁다는 표정을 지으며…….

† † † † † † † † † †

“헉! 우, 콜록! 어, 흑! 하, 하아……!”

악몽이나 다름없는 꿈에서 일어난 나는 눈을 뜨자마자 기침부터 했다. 꿈에서 쓰러지며 경험했던 고통을 현실에서 뱉어내는 느낌이 들었기에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세린님, 괜찮아요!?”

이미 일어나 있었던 건지 이루이는 괜찮냐며 내 등을 가볍게 두들겨 줬다. 얼마 안 가 기침이 멎었기에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이루이는 감사의 표시보다는 내 몸과 건강에 더 신경을 썼다. 그냥 이상한 꿈을 꿨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내 뇌는 조금 전의 광경을 다시 리플레이하고 있었다.

방금……내가 뭘 본 거지? 현실? 내가 원래 있던 그 세상 맞지? 그래, 맞아. 도서관도, 정수기도. 이 ‘하렘 어드벤처’에 없는 현대 문명이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던 그 세상 맞아. 아무렴, 알아보지. 내가 27년을 거기서 살았는데 몰라볼 리가 없잖아?

근데 왜 집에 카인이 있었던 거지? 카인은 이 세상의 신(神)이잖아? 애초에……왜 아빠랑 엄마랑 같이 있었지? 왜 엄마랑 아빠는 그놈을 아들이라고 했을까? 진짜 아들인 나를 대체 왜 못 알아봤지?

영문과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개꿈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하고 두려운 꿈이었다. 마치 현실 같은 꿈이었기에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랜만에 본 현실 세상과 부모님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이야……!! 시발!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람?

어떻게든 가슴과 마음을 진정시키며 스테이터스를 보았다. HP와 MP는 모두 다 찬 상태였다. 평소라면 너무 빨리 회복된 거 아닌가 걱정했겠지만 이젠 그런 걱정도 안 들었다. 내가 지금 걱정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내 아내들이나 프레그넌트의 주민들. 다른 사람들의 안위(安危)와 미래였으니까.

이루이의 상태도 괜찮아진 것 같았다. 몸이 개운하다며 짓는 그 미소는 거짓된 웃음이 아니었으니까.

먹을 걸 간단하게 먹은 우리는 그곳에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카인이 있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그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있을 곳은 감이 잡혔다. 마리아와 함께 앉는 왕좌(王座).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왜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 같냐고? 어……게임의 보스가 마을 헛간이나 창고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폼이 안 나잖아. 카인이 폼 같은 걸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놈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놈이 마을 헛간에서 ‘후후,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지껄이면……분노보다는 동정심과 연민이 일어날 거 같았다. 그 빌어먹을 카인한테 말이다.

익숙한 길을 걸으며 왕과 여왕이 있어야 할 집무실(執務室)로 향한다. 집무실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큰 곳이었지만 그곳에서 민생이나 치안에 대한 보고를 들으니 집무실이라고 칭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문제라면 거기 앉아 있을 개자식이지.

집무실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 아내들……무사하겠지? 그렇겠지? 제발 무사하게 있어다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곳까지 온 의미가 없잖아……!!

저 멀리 보이는 집무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젠장! 당장에라도 심장이 터져 죽어버릴 것만 같다! 아직 카인과 싸우기는커녕 이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이 지랄이라니! 내가 어쩌다 이런 새가슴이 되었을까?

이 문 뒤에 카인이 있을 거라는 내 말에 이루이의 표정은 급격히 변했다. 공포와 분노가 서린 저 표정을 보니 이루이 또한 적지 않은 증오를 가지고 있겠지. 소중한 터전과 사람들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이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다.

크게 심호흡(深呼吸)을 했다. 한숨이 아니라 심호흡이라니. 이게 얼마만일까.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매사(每事)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어서 늘 한숨만 뱉었었는데 이렇게 심호흡을 하게 되다니. 끝에 와서 겨우 나도 조금은 달라졌다는 걸까? 그랬으면 좋을 텐데.

문에 손을 대고 천천히 연다. 두 문은 어렵지 않게 열렸으며 그 문 너머로 보인 광경은……상상하지도 못한 광경이었다.

† † † † † † † † † †

“아앗, 안 되느니라! 내 소중한 아기를 더 이상 찌르지 말거라, 카인! 카이인! 응, 흥걋!?”

찔리고 있다. 남자의 물건으로 여성의 질을 찌르고 있다는 묘사가 아니었다. 진짜 검으로. 경비대원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제식용 아밍 소드가 아스카의 배, 옆구리를 베고 있었다. 베일 때마다 검은색 피가 바닥에 떨어졌으며, 이미 꽤 여러 번 베였는지 밑에는 검은색 웅덩이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사슬한테 포박당한 것처럼 양손과 양발을 봉인당한 아스카는 옆구리와 둔부, 다리 사이를 활짝 드러낸 채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저 멀리서 그걸 지켜보며 웃거나 키득거리는 여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누구인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가는 금방 알 수 있었지만 너무 충격적인 것을 봐서 그런 걸까? 내 눈으로 인식한 정보를 믿을 수도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나 외에 누구라도 그렇겠지. 아스카를 제외한 다른 아내들이……피를 흘리고 있는 아스카를 보며 키득대고 있는 장면을 본다면 말이다.

“……아스카?”

아스카의 이름을 불렀다. 아스카 옆에서는 검은 피가 묻어 더러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검을 아스카의 배 부분에 갖다 대는 개새끼가 서있었다. 성스럽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한 하얀색의 옷은 검은 피가 군데군데 묻어 이제는 섬뜩한 느낌을 주는 옷이 되어버렸다.

“이제야 왔어? 오래 기다렸잖아.”

예전에는 친절하게 존댓말을 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없었다. 애초에……그 깔끔하고 정중했던 모습 자체가 사기였으니까. 사기꾼이 깨끗한 척하는 모습을 벗어던지고 이제 와서 본색을 드러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식(假飾)을 벗어던진 진짜 모습은 신(神)이었으니 어느 쪽이든 나한테는 불리한 모습이다만……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칼 치워.”

“뭐?”

내 말이 잘 들리지 않았던 거 같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나는 힘껏 외쳤다. 지금까지 외쳤던 것 중 가장 크게 외친 것이 아닌가 싶었을 정도로.

“아스카한테서 그 좆같은 칼 치우라고, 개씨발 새끼야!!”

내가 어리석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난 M16A1으로 놈을 조준했다. 나도 참 병신이지. 저 새끼한테 칼을 치우라고 쟤가 치우겠냐? 그럼 애초에 시작도 안 했겠지! 칼로 찌르는 것부터 시작해 온갖 방법으로 날 엿 먹인 놈이 그만두라는 말 듣고 그만둘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러니까……죽여야지!

소총에서 나간 탄알은 놈의 미간을 향해 날아간다. 예전에는 텔레포트와 비슷한 방법으로 피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놈의 앞에 나타난 검은색 무언가에 닿자마자 탄알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치 유리를 검은색으로 코팅한 것 같은 그 방어막은 척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넌 정말 단순하구나? 하긴……내가 준 힘으로 그렇게 날뛰었는데 그것밖에 모르겠지. 힘도 없고 지혜도 없으니 이런 거라도 휘둘러야 속이 풀리지 않겠어?”

멋대로 지껄여라. 난 총을 든 상태 그대로 투영마술을 발동시켰다. 오리지널 무기라고 하기에는 부끄럽지만 확실히 내가 만든 투영물. 철로 만들어진 덩어리가 놈을 향해 날아갔다. 총알이 안 통하면 다른 걸 쓰면 그만이니까.

“그러니까……안 통한다니까?”

카인은 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탄알과 달리 저 검은색 유리 같은 방어막을 꿰뚫을 거라 믿었던 철 덩어리는 아예 허공에서 사라져버렸다. 탄알은 단순히 바닥에 떨어졌지만 투영물은 아예 사라져버리다니. 두 공격에서 느끼는 위험성(危險性)이 달라서 그런 걸까?

“그런 거 아닌데? 총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너 같은 병신이 만든 게 내 눈앞에 있으면 거슬리거든. 생긴 것도 병신, 하는 짓도 머저리. 병신 머저리가 하는 짓만 봐도 짜증인데 주제에 능력 있다고 이상한 걸 만들어 던지는데 그걸 보고 싶겠어? 그런 건 줘도 안 가져.”

오만(傲慢), 거만(倨慢). 온갖 수식어를 붙여도 아마 저 더러운 입과 사고방식은 확실하게 묘사할 수 없겠지. 나라는 인간, 신세린이라는 이름의 존재 자체를 아예 오물처럼 취급하는 걸 보니 내가 정말 저 개새끼랑 싸우고 있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그 빌어먹을 여행과 모험 끝에 만난 게 이딴 놈이라니. 내 인생은 현실에서나 여기에서나 둘 다 시궁창이었군. 망할.

“니 인생이 시궁창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잖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할 필요 있어?”

“남이사, 시발아!”

욕을 하며 달려간다. 총알이 안 먹혀? 투영마술이 안 통해?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럼 후려패면 그만이지! 개머리판을 잡고 힘껏 놈한테 휘둘렀다. 혼신의 힘을 다한 풀 스윙이 놈의 도도한 웃음과 엿 같은 면상을 속 시원하게 부숴줄 거라 믿었지만…….

“윽, 큭!”

유리처럼 생긴 주제에 터무니없이 단단한 저 방어막! 검은색이 은은하게 빛나는 저 좆같은 방어막은 내 공격을 완벽하게 막았을 뿐만 아니라 튕겨내기까지 했고, 갈 곳을 잃어 내 손에 머무르고 있는 충격과 반동 때문에 난 손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망할……총을 쥐고 있을 수가 없어……!!

“안 쥐어도 돼. 이제 못 쓸 테니까. 얍☆”

세게 내려쳤지만 방어막 때문에 손에서 놓아버린 소총. 지금까지 나와 함께 온갖 전투에 참여했던 M16A1이 바닥에서 사라졌다. 밝은 빛 알갱이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는 그 모습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빛과 함께 사라진 M16A1. 내 소총이 놓여 있던 자리에는……허공만이 맴돌고 있었다.

“……아, 앗.”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도 않았다. 사라졌다. 내 목숨을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내가 힘들 때나 슬플 때나 함께 있던 무기. 아내들의 사랑과 신뢰, 마력, 마법 등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늘 내 아이템 인벤토리에 남아있던 M16A1이……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지다니……!?

“지금은 그 무기 사라진 거에 슬퍼할 때가 아닐 텐데?”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사람처럼 즐거움이 묻어난 카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눈앞에 아이템 인벤토리가 펼쳐졌다. 내가 펼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난 아이템 인벤토리 안에는 침구류가 과일, K2 소총 등이 있었고……그것들은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멈춰! 큭! 씨발, 멈추란 말이야!”

아이템 인벤토리를 조작하려 했지만……불가능하다! 더 이상 인벤토리를 비롯한 홀로그램 윈도우는 내 컨트롤을 듣지 않았다! 마치 원격으로 누군가 내 컴퓨터를 조작하듯, 지금까지 수족(手足)처럼 다루던 홀로그램 윈도우들은 내 명령과 조작으로부터 벗어난 채 소중한 물건들이나 무기를 지우고 있었다!

“읏!!”

몸이 시원해졌다. 이런……하나밖에 없던 코스튬마저 사라졌어! 속옷마저 사라진 나는 완전히 알몸 상태가 됐고, 아내들은 이런 내 모습이 재미있는지 폭소를 터뜨렸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이토록 쉽게 빼앗기다니……!?

공격이 안 먹힐 거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이토록 압도적으로……아니, 장난감처럼 취급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기에 절망감이 더욱 커졌다. 카미유에서 주웠던 제식용 아밍 소드마저 사라지고 소멸된 지금……무기, 코스튬을 비롯한 모든 아이템들은 내 인벤토리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아주 깔끔하게…….

머리가 새하얘진다. 모든 게 사라지면 몸으로라도 덤벼야 한다고 생각했었지만……도저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것들. 내 힘으로 일구어낸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눈앞에서 본 탓일까? 눈물이 펑펑 흘러내렸다.

“뭐야, 벌써 끝났어? 하긴……재주가 있어야 뭘 보여주겠지. 너무 흥분하면 곤란하니까 잠 좀 자는 게 좋을 거야. 부탁할게. 이루이.”

저 더러운 놈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단어. 내 아내의 이름이 불린 순간 난 뒤를 돌아봤다. 전기계열 마법을 쓴 것인지 찌릿거리는 이질적인 통증이 온몸을 자극했고 난 그 자극에 저항도 못한 채 정신을 잃어야만 했다. 정신을 잃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날 향해 웃고 있는 이루이의 미소였다.

============================ 작품 후기 ============================

기껏 들어왔더니 보게 된 것은 말도 안 되는 환상, 칼로 찔리고 있는 아내, 함께 모험을 해오던 동료의 배신(통수). 부모님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을 아들이라 부르질 않나, 아내는 칼로 찔리고 있지를 않나. 마지막에 가서는 마지막 아내이자 동료이던 이루이한테 전기계열 마법으로 통☆수! 진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네요. 이 정도면 미쳐도 충분히 이해가 갈 거 같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성. 근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무기는 사라지고(애초에 통하지도 않았습니다만) 동료는 배신하고. 그 죽을 뻔한 모험을 겪으며 왔는데 한 편만에 이렇게 정리되다니.

허탈하신 독자분들도 있으시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허무하게 제압당하는 게 평범한 사람의 운명. 더 나아가 ‘보통 사람들이 겪을 법한 일’이라 생각되네요. 까놓고 말해 카인은 신이니까요.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적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세린은 끝까지 저항한 인간이 되겠네요. 신을 쓰러뜨려 모두를 구하겠다는 숭고한 사상이나 정신을 지닌 건 아닙니다만.

막장을 뛰어넘은 초★막★장! 과연 어떻게 일이 굴러갈까요.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세발문어님, 미숙한 글을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코멘트가 적어서 대답도, 후기를 차지하는 부분도 적네요. 이럴 때는 고생해도 좋으니 코멘트가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독자분들 모두, 코멘트를 달아달라규! 느그타게 이쯔라규!

느읏?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코멘! 코메엔트! 코메에엔(퍽!) 느삣!

느피, 느삐이……코멘트를 달아달라규!

느긋하게 있으라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