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2 「20-1 : 데드 엔드 (2)」 =========================
레이프의 모습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생지옥(生地獄), 헬 게이트(Hell Gate), 아비규환(阿鼻叫喚). 아무리 많은 수식어나 형용사를 붙여도 이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런 생각이 머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웅장한 건물부터 시작해 나름 신식 건물을 자랑하던 도시는 상당히 파괴된 상황이었다. 카미유나 루인처럼 완벽하게 부서진 건물이 오히려 보기 드물었기에 신기한 느낌을 받았지만……지금은 한가하게 구경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싸우거나 도망쳐야지.
들어가자마자 저 멀리서 어슬렁거리는 붉은색 촉수괴물을 보자마자 나와 이루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놈들 보고 기뻐하는 새끼가 있다면 그 새끼는 인간이 아니거나 미친놈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 두 개의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놈을 알고 있었다. 바로 카인이지. 미친놈이지만 이 세상의 신이니까. 이게 인간이 할 법한 짓이냐?
주변에 괴물이 없다는 걸 확인한 나는 이루이를 데리고 재빨리 건물 벽에 최대한 몸을 밀착시켰다. 젠장! 혹시나 원래 세상에 돌아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메탈 기어 솔리드 시리즈를 플레이하고 말 테다! 골판지 상자도 가지고 올 거라고!
마음속으로 들리지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놈들의 수와 행동 경로를 확인하던 나는 ‘헉!’이라는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어디에선가 소리가 들렸다는 걸 깨달은 괴물들이 내 쪽을 보기도 전에 어떻게든 몸을 숨기긴 했지만……난 총을 부여잡은 채 숨을 들이마셔야만 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다! 놈들한테 우리가 있다는 걸 들킬 뻔했을 뿐만 아니라 소리까지 저지르는 우(愚)를 범했지만 내가 본 것은 틀림없는 ‘그것’이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내밀었다간 들킬 수도 있었지만 내가 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런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놈들은 내 쪽을 주시하고 있지 않았다. 내 입에서 나온 단말마에 그리 큰 신경을 쓰지는 않은 거 같아 다행이었다만……난 놈들의 거동보다 내가 본 ‘그것’이 더욱 더 신경 쓰였다. 다시 고개를 내밀어 확실히 ‘그것’을 확인한 순간 난 곧바로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세상에……세상에!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초록색 촉수괴물이 저기 있지……!?”
그 말을 들은 이루이는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럴 수밖에……. 초록색 촉수괴물은 이루이가 살던 루인 주변에도 있었던 괴물이니까. 원래 루인 주변에는 있던 괴물은 서큐버스였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력을 빼앗는 괴물이었기에 그리 큰 경계대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레이 시리즈를 테이밍했던 나도 서큐버스에 대해서는 약간 알고 있었기에 ‘그럼 꽤 평화로운 마을이겠네’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 생각은 곧 빗나가게 됐다. 루인 주변에는 서큐버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초록색 촉수괴물 또한 그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고 했다.
괴물끼리는 공존(共存)을 할 수 없기에 그들의 영역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싸움 중 하나였다. 듣자 하니 서큐버스는 자신들에 대한 공격을 할 경우 반응이 두 부류로 나뉜다고 한다. 하나는 주변의 인간을 매혹 마법으로 쓰거나 혼란(混亂)마법으로 내분을 일으키거나.
내 경우에는 레이 시리즈를 포획할 때 난폭한 짓이나 공격을 하지 않았기에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던 게 다행이었다. 나를 매혹하려다 내 ‘몬스터 테이밍’에 매료됐으니 일종의 역관광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
서큐버스와 초록색 촉수괴물의 영역 싸움은 촉수괴물의 승리로 끝났다. 서큐버스는 그 부근에서 없어지게 됐으며 루인의 경비대원들은 귀찮게 됐다며 꽤 투덜거렸다고 한다. 함께 여행을 하는 동안 이루이가 자세히 설명해줬었지. 다른 마을의 역사나 특성을 듣는 건 꽤 즐거웠기에 나도 많은 걸 배웠었고.
하지만……여긴 루인이 아니었다. 심지어 프레그넌트도 아니었다. 수도인 레이프다. 그런 레이프 주변에 청록색 촉수괴물이나 다른 괴물이 출몰한다면 모를까, 초록색 촉수괴물이 있다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청록색 촉수괴물 때문에 놈들은 이 부근에 존재하지 않아야 했는데?
더욱 더 알 수 없는 것은……초록색 촉수괴물들은 붉은색 촉수괴물들과 함께 있다는 점이었다. 뭐야, 너희? 왜 공존(共存)이 가능한 건데? 괴물은 공존이 불가능하니까 영역 싸움을 하는 거 아니었어? 근데 왜 마을을 함께 점령하고 있는 건데? 동맹이라도 맺었냐?
바보 같은 생각을 했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자기 구역을 차지하고 싶다는 본능마저 지배하는 힘. 모든 피조물의 몸과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카인한테 있어서 ‘괴물끼리 싸우지 마라’라는 명령을 내리는 건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겠지. 그 덕분에 종(種)이 다른 두 괴물이 하나의 도시를 점령할 수 있었던 거고.
괴물끼리 함께 있는 모습은 어떤 의미로는 대단했다. 싸우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는 좋은 예시였으니까. 문제는……그거 때문에 나와 이루이가 엿을 먹고 있다는 거다. 존나 큰 빅(Big) 엿을 두 종류로 먹게 되니 웃음밖에 안 나왔다. 개 같은 새끼.
이루이는 카인에 대해 자세히 모르므로 ‘두 종류의 괴물이 함께 있다’라는 사실밖에 받아들이지 못했다. 충격적이겠지. 나도 충격을 먹었는데 얘야 오죽할까? 앞날이 깜깜하게 느껴지는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내 인생이 좆망이었는데 이 이상으로 새카매진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마는…….
스타크래프트의 배틀넷처럼 저놈들 중 한 부류가 갑자기 동맹을 파기해 피 튀기는 괴물 배틀이 벌어질 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능하면 그것도 보고 싶었지만……지금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초록색 촉수괴물과 붉은색 촉수괴물. 정확히는 레이프의 주민들이 시체로 부활하게 된 것과 동맹을 맺게 된 건 상관없었다. 그건 내 잘못도 아니었고 이루이의 잘못도 아니었으니까. 마지막 여행의 끝. 그 끝에까지 엿을 먹이려는 카인의 정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긴 했지만 지금 나한테 있어서는 카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 괴물들이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질문을 한 순간 내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아스카’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왜 갑자기 아스카가 생각났을까 하고 생각하던 나는 아주 소름끼치는 것. 지금까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 중 하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자지의 맹세’를 비롯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즉……자지의 맹세에 지배되고 있던 아내들은 내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아스카나 레이 시리즈가 자지의 맹세의 몬스터 버전인 ‘몬스터 테이밍’에서 벗어났다는 것 또한 의미했다. 그렇다면…….
【내가 아스카와 레이 시리즈한테 걸었던 제약(制約)은 어떻게 됐을까?】
그냥 여기서 자살할까? 그런 생각이 무럭무럭 들었다. 두 눈을 감은 채 총을 쥔 손을 부르르 떨던 나는 이루이가 괜찮냐고 묻자 ‘안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무례한 대답이지만……어쩌겠냐? 정말 안 괜찮은데. 고개를 떨어뜨린 채 아스카와 레이 시리즈한테 걸었던 제약을 떠올렸다.
【아스카】
1) 마을 사람들에 대한 공격은 절대 금지(자기 보호는 가능)
2) 괴물의 출산 또한 절대 금지(명령 여부에 따라 가능)
3) 괴물 출산의 경우 지금까지 낳던 남성형 촉수 괴물은 절대 출산 금지. 출산을 하더라도 여성형에 해당하며, 출산한 괴물에도 1~3번까지의 명령은 자동으로 적용된다.
【서큐버스】
1) 마을 사람들 및 파티 인원에 대한 공격은 절대 금지(자기 보호는 가능)
2) 마을 사람들 및 파티 인원의 무차별적(無差別的)인 MP 흡수 금지
제약은 대부분 프레그넌트의 주민들. 마을 사람들로 인식되는 사람들한테 공격 및 MP흡수를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아스카의 경우 초록색 촉수괴물의 여왕이었기에 출산 및 남성형 촉수괴물의 출산마저 금지시켰었다.
맨 처음에는 낙태를 시켰었고 그 다음에는 로라한테 아기를 살해당했었다. 그 때문일까? 나와 함께 만든 아기에 대해 유달리 많은 사랑과 관심을 보였던 아스카……. 그런 아스카를 옥죄던 ‘몬스터 테이밍’이 파괴됐다는 것은……이전처럼 괴물을 마음껏 만들어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녀의 배에는 내 아기가 자라고 있었지만……지금은 도저히 확인할 길이 없었다. 초록색 촉수괴물을 보자마자 아스카가 떠오른 것은 아마 머릿속 어딘가에서 이런 가능성을 제시해서 그런 거겠지. 몬스터 테이밍이 풀림으로써 아스카는 괴물을 만들 수 있게 됐고, 그 괴물이 레이프를 무참히 파괴하는 데에 일조(一助)했다는 가능성을 말이다.
장난삼아 ‘나의 아스카는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그런 생각을 하자 ‘아니, 너의 아스카는 원래 그랬어’라는 대답이 생각났다. 이 대답은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에 관련된 것이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쓰이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작가가 노린 건가?
아스카는 원래 프레그넌트의 숲을 점령하던 괴물이었다. 괴물들을 계속해서 낳아 우리를 괴롭히던 괴물의 우두머리였다. 그런 괴물을 ‘몬스터 테이밍’으로 길들이는 데에 성공했었지만……지금은 그 몬스터 테이밍이 해제된 상태. 아스카가 예전처럼 돌아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나 아내들, 프레그넌트의 주민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으니 그럴 일은 없다고 희망에 가득 찬 반론(反論)을 하고 싶었지만……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아스카는 종족 자체가 우리와 달랐으니까. 현실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괴물(怪物)이라는 이름의 종(種)을 내 희망과 감정만으로 정의내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용케 참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내가 납치된 것부터 생각하면 지금까지 대략 4주 이상이 지나갔다. 그 사이 동안 용케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참아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아스카가 기특하게만 느껴진다.
어쩌면……진짜 어쩌면 말이다. 몬스터 테이밍이 풀린 후에도 아스카는 스스로 ‘모두와 함께 공존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함께 만든 아기부터 시작해 모두와 함께 지냈던 시간은 그녀한테 있어서 결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결코 무의미한 시간이었을 리가 없었다. 그녀 또한 나와 마을 사람들을 걱정해줬었으니까…….
만약 스스로 그런 삶을 선택했다면……. 저 괴물들이 아스카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면……. 그런 생각을 하니 더욱 더 가슴이 미어진다.
바보 같은 아스카.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바보 같은 행동도 자주 했지만……그 안에 감추어진 착한 마음과 천성을 누구보다 순수했다. 그런 아스카가 카인 곁에 있을 거라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루이한테 이제 간다는 말을 전했다. 최대한 피해가다가 안 되겠다 싶을 경우에는 총을 쏜 후 왕궁으로 돌진하며 적을 쓰러뜨린다. 이게 그나마 세운 작전이었다. 이걸 작전이라 부를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둘째 치더라도……하늘을 날아가거나 텔레포트를 할 수 없는 이상, 믿을 만한 것은 튼튼한 두 다리밖에 없었으니까.
익숙하지 않은 잠입 행동으로 어떻게든 지나갈 수 있었던 건 건물 세 채 정도였다. 나와 이루이를 향해 괴성을 지른 초록색 촉수괴물을 시작으로 주변의 괴물놈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두 부류의 괴물들이 모두 그리 빠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릴 향해 소리를 지른 초록색 촉수괴물한테 철 찌꺼기를 몇 개 던져주니 팔이나 촉수 부분이 갈리며 더러운 검은색 피를 내뿜었다. 이곳에서 총을 쓰긴 아직 이르다. 놈의 치명상을 확인하자마자 나와 이루이는 달렸다. 달리는 건 물론 내가 선두(先頭)였다.
대로(大路)는 이미 괴물 천지였기에 도저히 뚫고 갈 수가 없었다. 샛길을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파란색 촉수괴물이었다. 아, 쒸바! 설마 부카케 주변에서 퇴치한 후 좀처럼 보지 못했던 저 새끼까지 여기 있을 줄이야! 여기가 무슨 컬러틱 촉수괴물 페스티벌이냐? 시리즈별로 모아두게!?
[케르윽! 쥬악! 쥬웍!]
괴성을 지른 놈은 날 향해 힘껏 도약했다. 난 뒤로 넘어지듯이 구르며 놈의 공격을 피했다. 다리 사이의 날카로운 촉수는 아무리 봐도 익숙해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도약 공격을 피한 나한테 괴성을 지르는 걸 보니 짜증이 났다. 그럼, 내가 맞아주리? 너한테?
파란색 촉수괴물은 다리 사이에 있는 촉수로 여자를 강간 및 살해했다. 저 날카로운 촉수로 여성의 부드러운 질과 자궁을 베고 찌른다니.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저 새끼들이 미카를 강간하듯이 죽이려 했던 게 떠오르자 더욱 더 기분이 더러워졌다. 즉시 투영마술을 발동했다.
하늘에 둥둥 뜬 철 찌꺼기를 먹이라고 생각했는지 힘껏 점프한다. 미친 새끼……이걸 먹고 싶으면 소원대로 먹여주마. 니 빌어먹을 자지 촉수에다 말이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철 찌꺼기는 놈의 날카로운 자지 촉수부터 시작해 다리가 연결되는 부위를 모조리 찢어발겼다. 검은 피와 살점이 찢겨나가며 놈의 상반신은 멋지게 처박힌다. 괴성을 지르기 전에 놈의 대가리에 한 발 더 철 찌꺼기를 쏘자 더러운 뇌수와 살점이 주변으로 마구 튀었다. 씁, 살짝 묻었잖아 개새끼야!
남자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물건을 자른 것이지만 별 동정심이나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죽을 만하니 뒈졌다. 그것뿐. 그러게 누가 사람보고 덤비래? 안 덤비면 죽지는 않았을 것을……. 원망하려거든 너의 어리석음을 원망하려무나.
놈의 더러운 시체를 넘어 샛길에서 빠져나가니 다시 대로(大路)가 나왔다. 베라먹을! 더 이상은 샛길로만 다닐 수가 없다! 왕궁으로 가는 길은 샛길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여왕인 마리아와 공주인 아테나의 안전을 위해 왕궁 주변은 완전히 오픈된 곳이 되어 있었다. 즉, 왕궁의 일정 거리부터는 집이나 건물이 일절 없는 오픈 스페이스가 펼쳐진다는 뜻이었다. 이 말인즉슨……건물을 이용해 싸우거나 엄폐물에 숨는 행동 자체가 완전히 불가능하게 된다는 소리였다.
어떻게든 오픈 스페이스까지 왔지만 산 넘어 산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참으로 그 말이 옳았다. 붉은색과 초록색, 파란색 촉수괴물들이 어슬렁거리며 촉수를 휘둘러대는 그 모습은 조폭들의 모임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루이는 평소 보던 초록색 촉수괴물과 루인에서 봤던 붉은색 촉수괴물만 하더라도 트라우마를 유발시키고도 남을 텐데, 파란색 촉수괴물까지 나오니 당장에라도 실신할 거 같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거겠지……. 괴물의 공존이 불가능한 것부터 시작해 전혀 못 보던 괴물까지 막 나오는데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놈이 이상한 거다.
내 경우에서는 이미 한 번 이상은 싸워본 놈들이었고 여기서 망설인다고 해결되는 일이 없으니 싸울 뿐이지, 전혀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당황스러움과 무서움이 느껴졌지만 그걸 안은 채 싸우는 것일 뿐. 대단한 것도, 위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거야…….”
현재의 마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정말 답이 없군. 여기서부터 왕궁까지는 1km 이상은 떨어져 있다. 1km는 1,000m. 걷는다면 또 모를까 단숨에 뛰어서 돌파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나는 신체능력이 그리 뛰어난 놈이 아니다. 하물며 이루이는 나보다 훨씬 더 약한 여자다.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가야만 하는 길’을 보니 절망감이 미친 듯이 솟아오른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여기서 포기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도망쳐서 루인으로 돌아가 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현실도피도 선택지로 나타난다.
선택하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
대체 나한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현실만 강요하는 걸까?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루인으로 도망가는 것도 선택지겠지. 하지만……다시 한숨을 쉰 나는 왕궁을 바라보았다.
이곳으로 오며 생각한 것 중 하나지만……마리아는 이 나라의 여왕이자 최강의 마법사다. 마리아의 딸인 아테나는 공주이면서 여왕기사단의 단장. 최강의 검사라는 칭찬까지 받는 여성이었다. 헬레나 또한 두 명만큼은 아니지만 여왕기사단의 부단장인 만큼 상당한 검술과 마법을 가진 여성이었다.
최강의 마법사인 여왕 마리아. 최고의 검사인 공주 아테나. 그 두 명을 보좌하는 여왕기사단의 부단장 헬레나와 여왕기사단 단원들. 최강급의 파티를 짜고도 남을 인물들이 어째서 마을이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둔 걸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를 않았다.
그녀들의 탓이 아니었지만 마리아는 ‘생명의 씨앗’을 만들 수 없게 된 후로 많은 심적(心的)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생명의 씨앗을 대체할 수 있는 내 소문을 들은 후 아테나와 단 둘이서 찾아올 정도로 백성들을 생각하는 좋은 여왕이자 여성이었다.
그런 마리아가 자기가 사는 도시. 많은 백성들이 있는 이곳을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뒀다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지금까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서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좀 뻘쭘하긴 하지만……그래도 장담은 할 수 있었다. 마리아는 절대 이런 일을 간과(看過)할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마리아가 가만히 있는다 치더라도 아테나와 헬레나는? 지금 내 눈앞에서 저렇게 우글우글 거리는 붉은색 촉수괴물들은 모두 레이프의 주민들이었다. 아무런 죄도 없는 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모자라 괴물로 변해 농락당하는데 그걸 내버려뒀다고? 그것도 말이 안 되잖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면 늘 카인이 나왔지만 더 이상 카인은 답이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결론적인 이야기, 결과론적인 해답일 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결과와 과정이었다. 왜 일이 이렇게 됐냐고 물으면 늘 결과만을 보여주는 현실에 질려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 과정에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들어 있었기에 더욱 더 초조했다.
“세린님…….”
이루이의 간절함 부름이 내 마음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래, 생각은 나중이다. 생각은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지금은 눈앞의 현실에 집중해야 한다. 저 개떼 같은 괴물들을 단숨에 없앨 방법은 나한테는 없었다. 도망갈 수도 없고 몰살시킬 수도 없다면……저놈들을 최대한 빨리 죽이며 나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이루이야. 난 지금부터 저놈들을 죽이며 최대한 앞으로 갈 생각이야.”
그렇게 불안한 표정 짓지 마렴. 나도 불안하단다. 이 와중에도 이상한 개그나 드립을 치는 내 뇌 덕분일까? 의외로 편안한 웃음이 나왔다. 이루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나는 계속 할 말을 했다.
“지금부터 나는 저기로 갈 건데……너는 어떻게 할래? 만약 도저히 따라올 수 없다면 이 부근에 숨어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데리고 왔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성벽에 내버려둔 채 혼자 왔다간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살해당할 것만 같았기에 데리고는 왔다. 근데……솔직히 저 개떼 같은 놈들을 죽이며 달려가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루이까지 보호할 자신은 전혀 없었다. 차라리 안전한 건물에 숨어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솔직히……나도 저길 통과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어. 아마 통과 못 할 거 같아. 통과할 수 있어도 절대 몸 성하게는 못 갈 거 같고. 진짜 팔이나 다리 한 쪽은 떨어질 거 같다니까? 하하핫.”
전혀 웃을 수 없는 농담이었다. 이루이는 모르겠지만 이 말은 진담이었다. 난 팔이나 다리를 잃는 한이 있어도 저곳에 가야만 했다. 카인을 죽이기 위해서도, 아내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말이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모든 사태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이루이는 아니었다. 그녀는 보호를 받아야 마땅한 여자다. 내 아내기도 하고. 내 아내를 사지(死地)로 몰고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그녀한테 은신(隱身)을 요구했다. 몸을 숨긴 채 어딘가에 숨으면 그나마 좀 생존율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내가 미쳤다고 얘한테 같이 가자고 권하겠어?
“세린님은……저기 꼭 가셔야 하는 거죠?”
눈물이 글썽거리는 얼굴로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제일 솔직하게 대답하자.
“가기 존나 싫은데 안 가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 같아서.”
그래. 난 이런 놈이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도 싫었지만……그렇다고 안 해버리면 그것 때문에 생길 불이익이나 피해를 더 싫어했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도 자기가 해야 하는 일에서 도망칠 수 없었던 불쌍한 남자. 그게 바로 나, 신세린이었다.
“내가 안 가면 여기 있는 사람들부터 시작해……카미유나 루인. 다른 곳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이 의미 없이 죽은 게 될 거 같거든. 좆같은 카인 새끼한테 한 방이라도 먹여야 죽어도 속이 시원할 거 같아서.”
이 말도 맞는 말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가서 한 방 먹여줘야 속이 시원해질 거다. 그 새끼한테 물어볼 거, 들어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내 사랑하는 아내들이 저기서 날 기다리고 있거든. 그래서 가려는 거야. 남편이 돼가지고 아내들을 버려야 쓰겠냐?”
이게 제일 중요한 거겠지. 가장 본심에 가까운 말이기도 하고. 그 말을 들은 이루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그런 이루이의 머리와 뺨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건물에 숨은 상태라지만 저 많은 괴물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다니. 우리도 참 웃기는 짬뽕이라니까? 실컷 웃은 이루이는 웃으며 내 권유에 대답했다.
“그럼……저도 같이 갈게요.”
생각 외의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어, 이게 아닌데. 보통은 ‘낭군님의 승리를 기원하겠어요’라며 리타이어하는 게 정상 아닌가? 난 이루이까지 지키며 갈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한심하게 보이겠지만 이루이를 죽게 내버려두는 것보다야 백 배는 나았으니까. 그런 내 말을 들은 이루이는 부드럽게 웃었다.
“저도……솔직히 저기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그치만……세린님을 저런 곳에 보내놓고 혼자 살아남기는 싫어요. 저한테는 이제 세린님밖에 없으니까요.”
이런……내가 또 실수를 해버렸군. 가족과 삶의 터전을 모두 잃은 사람한테 있어 ‘죽음’은 충분히 무서운 것이었다. 그치만 죽음이 무섭다고 해서 자기 소중한 사람들이 또 사라지는 것 또한 반길만한 일은 아니었다. 자기가 죽는 것도 무섭지만 남편인 나를 잃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린다고 치자. 내가 나올 수 있을까? 저 왕궁에서? 아내들을 데리고 개선장군(凱旋將軍)처럼?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사실상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이루이한테 혼자 숨어서 기다리라고 하다니……어떤 의미로는 최악의 선택 중 하나였다. 날 기다린다고 내가 나올 거라는 보장도 없으면서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이루이의 안전을 위해서?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 한 생각이었다. 이루이한테 있어서는 혼자 죽는 것도, 날 잃은 채 홀로 남겨지는 것도. 둘 다 싫었을 것이다. 다시 홀로 남겨질 바에야 나와 같이 가는 걸 선택한 거겠지. 두렵고 힘든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르다니…….
“……어쩌면 니가 나보다 강할 거 같다.”
그 말을 들은 이루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휴, 됐다. 이건 나중에 설명할 수 있으니까. 공격용 마법 중 쓸 수 있는 게 있냐고 물으니 화염 계열 마법을 한두 개 정도 알고 있다고 했다.
쓸 수 있는 마법이 적은 데다 청록색 촉수괴물은 마법내성을 가지고 있으니 지금까지 쓰지 말라고 했지만……지금만큼은 가진 마법과 도구를 모두 써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는 길이었으니까.
마법을 준비해달라고 한 후 남은 MP와 HP를 확인했다. 레벨 업이 간당간당한 수준이군. 어떻게든 쓰러뜨리다 보면 레벨업을 할 테니 MP를 거리낌 없이 쓰자.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작전을 짠 후 이루이를 보니 활활 타오르는 화염을 손에 모으고 있었다.
“……가자.”
이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이루이와 함께 하는 전투가 조용하게 시작됐다.
============================ 작품 후기 ============================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거랑
안 해도 되는데 그러면 존나 후회할 거 같은 거
두 개는 비슷하지만 꽤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비슷하다는 걸로만 치자면 ‘하기 싫은 것’이겠죠. 이런 건 저희 주변에 즐비하게 놓여 있습니다. 숙제, 출근, 군 복무 등. 사람마다 하기 싫은 게 여러 가지 있으니 다 세면 어마어마한 숫자로 기록되겠죠.
그치만 ‘하기 싫어서 안 해도 된다만, 그러면 나중에 존나 후회하는 거’는 좀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본인 선택이나 사정에 따라 안 해도 됩니다만 나중에 가서는 ‘아, 그때 하면 좋았을 텐데’라며 후회하는 거죠. 매우 알기 쉬운 예를 들자면 공부나 인간관계 등이 아닐까 싶네요.
학생 때는 공부하기 존나 싫고(물론 어른이 되어도 싫습니다) 귀찮습니다만, 사회에 나와 버리면 성적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립니다. 학생 때 노력 안 해 나쁜 성적을 얻게 되어 차별받거나 취업을 못 하게 되면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아, 시발. 그때 귀찮아도 노력했으면 지금보다는 더 나을 텐데…….’
때늦은 후회, 뒤늦은 반성이지만 어쩔 수 없죠. 그나마 저런 반성을 할 수 있다면 나은 겁니다. 진짜 어리석은 사람은 ‘시발!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라며 도리어 화를 내겠죠. 그 기분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세린이 해야 하는 일은 둘 다에 해당되는 겁니다. 안 하면 죽을 거고, 안 하면 (죽는 건 예외라 치더라도) 평생을 후회하게 되겠죠. 그치만 직접 하자니 목숨도 걸어야 하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같이 있는 이루이도 위험에 노출시키는 거니까 참 좆같을 겁니다. 그야말로 해도 지랄 안 해도 지랄. 최고·최악의 선택이겠죠.
여러분은 부디 이런 처지에 빠지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만……사람이 살다보면 누구나 저런 경험을 할 수밖에 없겠죠. 이런 글을 적는 저도 두 개에 해당되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세상일은 자기 좋다고 막 저지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나이 되어 알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고양이새벽님, 혹시 대학생이신가요? 과제라고 하시길래 대학생이신가 싶었거든요. 후기에서도 적었지만 혹시나 대학생이시라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학창시절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전 집안사정이 어려워 집↔학교 다니며 공부밖에 안 했거든요. 집안 도와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지만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네요. 청춘을 즐긴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부디 후회 없는 학창시절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나락이되고파님, 개인적으로 유열(愉悅)이라고 하면 바로 코토미네 키레이가 떠오릅니다. Fate/Zero의 유열 이미지가 워낙 컸죠. 여담이지만 4차·5차 성배전쟁에 나오는 세이버는 솔직히 영 안 좋아합니다. 너무 강직하고 원칙주의적인 이미지가 강해요. 이 험한 세상, 미쳤다고 기사도 같은 걸 지키겠습니까? 그러나 목숨 잃으면 본전도 못 찾는데.
정정당당한 건 좋지만 그것도 시대에 따라 적절히 받아들이거나 자를 줄 알아야지, 21세기에 기사도를 운운하며 정의만 앞세우려 하다니. 저 같으면 ‘시발, 그렇게 잘났는데 나라가 왜 그 꼴 난 거임? 너님이 그딴 말 할 자격 있음 시발아?’라며 쏘아붙였을 겁니다.
zxc54님, 근무하느라 수고 많으십니다. 아침에 강릉 화재로 인해 소방관 2분이 사망하셨다는 뉴스를 보니 뭐라 할 말이 없더군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화재나 사고가 이토록 많은데 소방관에 대한 예우나 취급이 그토록 개판이었다니.
이명박근혜 정부를 비롯해 새누리당(자유한국당+2017년판 새누리당 등)과 매국노가 얼마나 개판을 쳤으면 목숨 걸고 일하시는 분들에 대한 예우가 이 따위일까요. 여러 모로 기분이 착잡한 아침이었습니다. zxc54님도 늘 건강과 환경에 주의하시며 근무하시길 바랍니다. 생존자에 대한 것은 후반부로 가면 나올 테니 조금만 참아주시면 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좆같은 회사 때문에 출근 업로드가 불가능하게 됐네요. 이번 달 이내로 200화까지 업로드가 끝나면 당분간은 소설 집필에 몰두해야겠네요. 곧 추석이 다가오니 여러분도 휴일을 만끽하시며 편히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남은 2주, 서로 힘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