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1 「19-10 : 데드 엔드 (1)」 =========================
수도(首都)인 레이프는 매우 커다란 도시였다. 다른 여섯 개의 마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으며 그나마 거기에 근접하는 게 어보션이었다. 그 어보션조차 레이프의 1/2 정도였으니 얼마나 레이프가 커다란 도시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아내들을 되찾는 건 무리라고 하더라도 카인한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탄알과 투영마술을 처먹여주고 싶었다. 그 일념(一念) 하나로 수도로 향하던 나와 이루이는 수도에 도착한 후 무얼 할까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리 복수라지만 만전(萬全)의 준비를 기하지 않으면 싸울 수가 없었으니까.
무기를 쓸 수 없게 되면 맨몸으로라도 덤벼들어야 하지만……맨몸으로는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카미유에서 주운 아밍 소드부터 시작해 다양한 무기를 가져야만 했다. 코스튬의 투영마술부터 시작해 쓸 수 있는 건 모조리 쓸 생각이었다. 내 마지막 발버둥이다. 더 이상 아낄 필요도, 머뭇거릴 필요도 없다.
있는 모든 걸 다 써도 패배가 눈에 아른거리는데 아낀다고? 그놈을 상대로? 웃음이 나왔다. 난 지금 이 세상의 신(神)한테 도전하는 거다. 아무리 노력하고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가진 것도 없는 내가 물자나 마력을 아껴가며 싸운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멍청한 짓이라 느꼈다.
쓸 수 있는 물건은 모조리 쓰되 필요 없는 물건 등은 모두 이루이한테 줄 생각이었다. 수도에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그녀를 왕궁으로 데려다주기만 하면 내 할 일은 끝나니까.
원래 같았으면 당장 왕궁에 데려다 줘야 했지만 그녀와 나는 일단 결혼한 사이였고,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가서 맛있는 거나 먹으며 천천히 왕궁에 갈 생각이었지만……더 이상은 그럴 수도 없게 됐다. 힘겨웠던 여행을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숙박시설로 위로하려던 우리의 환상과 목표는 형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박살나버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활기가 넘치는 장사꾼들. 괴물들이 주변에 있다지만 수도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경비대원들. 그들한테 보호받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수도는……붉은색 촉수괴물로 가득한 지옥으로 변해버렸으니까…….
† † † † † † † † † †
나와 이루이는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게 미친 새끼였다.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나조차도 이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세상에……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꿈. 이건 악몽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이건 꿈이 아니었다. 늘 힘든 상황, 보기 싫은 현실을 접할 때마다 그게 악몽이길 바랐지만……그것들이 모두 악몽이었다면 이런 시궁창 같은 상황에 도달하지는 않았겠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세상이 잔인하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잖아? 알기 싫어도 알게 되듯이 말이다.
수도의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루이를 깨웠다. 몸가짐을 바르게 한 후에 수도에 들어가려는 것도 있었지만 내 하반신도 거의 한계 상태였다. 이루이와 함께 여관에 들어가 휴식을 취한 후에 행동을 개시할 생각이었기에 괜한 말썽이나 소란은 피하고 싶었다.
몸가짐을 고친 우리는 성벽을 향해 걸어갔다. 걸을 때마다 나와 이루이의 마음은 두근거렸을 것이다. 힘들고 고달픈 여행은 끝났다. 저곳에 들어가게 된다면 카인과 싸우게 되겠지만……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 휴식을 취하며 조금이라도 즐거운 추억이나 만들고 싶었다.
수도에 있는 맛있는 음식을 이루이와 함께 먹을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군침이 돌았다. 저녁 시간은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식량이 남아 있긴 했지만 조금 전까지 내 품에 안겨 있던 이루이를 깨우기도 뭐했고, 들어가서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었기에 굳이 식량으로 저녁을 때울 필요는 없었다. 나도 맛있는 걸 먹고 싶었거든.
어둑해지긴 했지만 저 멀리 있는 성벽을 못 볼 정도로 캄캄한 건 아니었기에 우리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섹스 때문에 질척해진 몸을 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즐거운 마음이 마구 솟아올랐다. 먹거리, 숙박시설, 목욕. 모두 다 오랫동안 겪어보지 못했기에 군침이 절로 돌았다.
“……어?”
함께 걷던 이루이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녀의 조그마한 한 마디에 나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혹시 화장실이 마려운 거라면 주변에서 해결하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피 냄새가 나요.”
피 냄새? 난 코를 킁킁거렸다. 우리한테 나는 거라면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가 좋아서 피 냄새를 배게 만든 건 아니었으니까. 괴물로 변한 시체들과 싸웠는데 피 냄새가 안 배는 게 더 이상하잖아. 이런 건 들어가서 씻으면 된다고 했지만 이루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고쳤다.
“저희가 아니라……저, 저기. 수도에서부터 피 냄새가 나요……아주 많이……!!”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아, 혹시 그건가? 괴물의 습격 때문에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리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었다. 내가 없어진 동안 괴물이 저기를 단 한 번도 습격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으니까. 그 습격 때문에 누군가 죽었다면 피 냄새가 진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자 이루이는 말하고 싶지 않지만 말할 수밖에 없다는 표정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입에 담았다.
“이 냄새는……저희 고향에서 나던 냄새랑 똑같아요. 피와 시체 냄새가 여기까지 풍겨 와요…….”
그 말을 듣고 이해하기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방금 이루이가 뭐라고 한 거지? 피 냄새? 어, 그래. 그건 들었어. 그 다음에 한 말이 중요했다.
이루이의 고향에서 나던 냄새랑 같다고? 피와 시체 냄새? 루인에서 내 코를 역겹게 만들다 못해 아예 마비까지 시켜버렸던 그 냄새 말인가? 그 냄새가 레이프에서 나온다고?
나와 이루이는 걸음을 멈춘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서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이루이까지! 피와 시체 냄새가 난다고 말한 본인! 당사자조차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니!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피 냄새가 난다며 걸음을 멈춘 이루이. 거기에 맞춰 움직임을 멈춘 나. 우리 둘 다 조금 전에 나눈 대화가 ‘없었던 것’이길 바랐다. 가능하다면 조금 전에 나눈 대화 기록 및 기억을 기억의 바다에서 완전히 삭제시키고 싶었다. 컴퓨터의 삭제(Delete)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말이다.
근데……다들 알잖아? 사람의 기억이란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정작 잊고 싶어 하는 기억은 영원히 간다는 거. 행복하고 좋았던 순간에 대해서는 금방 잊어버리지만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때.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때는 마치 영원처럼 남아 사람을 괴롭힌다. 그게 바로 【사람의 기억】이었다.
나와 이루이는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가 마법을 건 것도 아닌데 행동을 멈춘 채 서로의 눈만을 쳐다봤다. 내심 속으로는 그녀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그럴 리가 없지.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이루이는 자기가 살던 마을, 루인을 잃어버렸다. 마을뿐만 아니라 아는 사람들이나 엄마가 모두 괴물로 변해 목숨까지 위협받은 경험이 있다. 그런 이루이가 장난삼아 그런 말을 했다고? 고향에서 맡았던 피와 시체 냄새가 난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즉, 그녀가 말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는 소리가 된다.
몸이 조금씩 떨린다. 지진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다. 이 하렘 어드벤처에 비라면 모를까 지진 같은 무지막지한 자연재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몸을 떠는 이유는 믿을 수 없다는 마음.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포 때문이었다. 수도에서 그 시체와 피 냄새가 풀풀 풍겨 나온다는 것은…….
“수도가……괴물 투성이가 됐다고……?”
내 입에서 나온 간결한 말에 이루이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단말마와 비명을 간신히 참았지만 입과 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겪었던 그 악몽 같은 현실이 그녀의 몸과 마음을 무참히 짓밟고 있으리라. 나도 정상은 아니었다. 숨을 가쁘게 들이마시며 손으로 이마와 머리를 잡았다.
어, 그래. 잠깐만. 잠깐만. 이건 말이 안 된다. 말이 안 된다고.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현실도피를 하고 싶었지만 피와 시체 냄새가 풍겨 온다는 수도가 눈앞에 있었고, 우리한테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장난 빠냐? 우린 그 지옥 같은 마을! 모든 사람들이 죽어 괴물로 변해버린 곳에서 도망치기 위해 수도로 왔는데……그 수도도 괴물 투성이가 됐다고? 시체와 피 냄새가 풀풀 풍기는 생지옥으로 변했다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뚫린 입에서 뭐든 나오면 말이라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이루이야. 우선은……우선은 가보자.”
겁에 질리다 못해 공포가 물든 목소리가 이루이한테 전해진다. 이게 내 목소리라고? 남자 새끼 목소리가 왜 이렇게 떨리냐? 이루이를 안심시켜도 모자랄 판에 나까지 덜덜 떨면 아내인 이루이는 누구를 믿어야 할까. 나 자신이 더욱 더 한심하게 느껴졌다.
“일단은……가서 확인하는 거야. 어쩌면 청록색 촉수괴물의 피 냄새일 수도 있잖아?”
다르다. 청록색 촉수괴물은 피 색깔이나 냄새가 인간과는 확연히 달랐다. 설령 죽었다 하더라도 이루이가 그걸 착각할 리는 없었다. 1주일 넘게 괴물들이 넘쳐흐르는 마을에서 살아남은 그녀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감각을 극대화시켜야 했던 이루이가 착각해서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건 순전히 나 자신의 망상이자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았다.
어린애도 속지 않을 말이었지만 이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내 의견에 동의를 한 것은 그녀도 바라고 있다는 거겠지. 자기가 착각했다고. 이건 다른 냄새라고. 수도는 결코 생지옥으로 변해있지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나와 이루이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성벽을 향해 걷던 그 모습은 조금 전까지와 비슷했지만……우리의 발걸음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거워진 상태였다. 피 냄새가 난다는 걸 말하기 전까지는 희망과 반가움으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공포와 불안, 헛된 희망만이 남은 상태였다.
부질없는 희망과 발버둥이 우리의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움직일 수밖에 없는 사람 기분을 아냐?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상황이 좆나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지만 ‘괜찮아, 이건 내 착각이야. 분명 심각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거야’라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과 진배없는 행동이었다.
성벽이 점점 커진다. 성벽이 우리한테 다가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성벽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무서웠다. 마치 성벽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우리를 잡아먹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살아있지도 않은 무기물(無機物)한테서 공포를 느끼다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이루이는 가슴팍에 손을 댄 채 힘들게 숨을 쉬고 있었다. 제기랄……충격 때문에 과다호흡 상태가 일어날 수도 있겠군. 이루이의 손을 잡으며 진정하라고 말했다. 어떻게든 호흡은 줄어들었지만……이루이를 안으로 보낼 수는 없겠군.
성벽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성벽의 입구에는 초병(哨兵)이 없었다! 이런 미친! 말도 안 되는! 최고의 치안과 경비태세를 자랑하던 수도, 레이프의 성벽 입구에 경비대원이 없다고? 너희 뭐 잘못 먹었냐? 아니면 내가 뭘 잘못 먹은 거냐? 아, 그거냐? 내 눈이 미친 건가? 혹시나 싶어 눈을 비볐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이런 시발!
이루이도 내 시선과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텅 빈 입구를 보던 그녀는 ‘아, 앗……없어……!!’라며 내 마음을 대변해줬다. 헛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나왔다. 이건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직 성벽 안. 도시를 본 것도 아닌데 풍경이 저절로 눈에 그려지는 느낌이 든다.
카미유와 루인. 예전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카인의 농간으로 인해 떨어진 두 마을은 괴물 천지였다. 마을 주민이었던 사람들은 카인에게 범해진 후 사망해버렸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인 것도 천인공노할 일이었지만……카인한테 범해진 사람들은 배가 찢기며 ‘붉은색 촉수괴물’로 다시금 부활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터전을 스스로 부수고 녹였다. 혹시나 살아남은 사람을 발견하면 쳐죽인 후 자신들의 동료로 만들었다. 좀비가 다름없는 그 행동에 의해 두 마을은 괴물이 된 시체만이 우글거리는 지옥으로 변한지 오래였다.
카미유에서 루인으로 온 나는 그곳에서 이루이를 발견한 후 곧바로 수도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유야 말할 필요가 없지. 괴물로 득실거리는 곳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었기에 왕궁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프레그넌트가 박살나 주민들이 왕궁으로 왔듯이 그녀 또한 왕궁으로 가야만 했다.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생존자이기도 했지만 카인이 저지른 짓을 입증할 증인이기도 했기에 그녀는 반드시 살아야만 했다.
물론 카인이 했던 짓을 말한다고 해서 크게 상황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모든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데 그거 말한다고 카인을 잡으려 할까? 오히려 우리가 안 잡히면 용하겠지. 이루이를 ‘카인을 잡을 증인’으로만 쓰는 것도 싫었기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별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생존자로서 왕궁에 들어가 보호를 받는다면 그녀의 육체와 정신은 틀림없이 치유될 것이다. 내가 죽든 말든 간에 살 터전을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정액과 격렬한 섹스뿐만 아니라 이곳에 데려와 그녀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이 이루이한테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안전한 보호를 받기 위해 레이프로 왔는데 레이프가 괴물 소굴로 변했다고? 좆 to the 망이 됐다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나와 같은 심정인 이루이도 성벽과 입구를 보며 울먹이고 있었다만……이 빌어먹을 【내면의 목소리】는 잔혹한 현실을 들이댔다. 너무나 즐거워하며…….
‘으햐햐햐햣! 이거 어쩌냐? 목숨 걸어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레이프가 망해버렸네? 야, 레이프(Rape). [강간하다]라는 의미잖아? 근데 레이프가 강간당했네? 역강간을 당했어! 으하하핫! 야, 이거 존나 재미있지 않냐? 수도가 함락됐다는 것도 웃기지만 강간이라는 단어가 강간당해버리다니! 푸하하핫!’
닥쳐라. 넌 아가리 싸물고 얌전히 있어라.
‘어이구, 갑자기 왜 센 척을 하시나염? 이루이 앞이라고 그래, 우리 세린? 우쮸쮸 우쮸쮸! 야, 딱해서 어떻게 하냐? 진짜 좆망이라니까? 이제 어떻게 하려고? 응? 내가 대신 말해줘? 여기 대신 돌아갈 곳도 없고.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미친 척하고 들어갈 수도 없고! 진짜 환장할 노릇이지? 응? 그렇지?’
개새끼. 욕을 했지만 참으로 맞는 말이었다. 퇴로(退路)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프레그넌트와 야만족의 숲은 이미 멸망한 거나 다름없다. 카미유와 루인? 내가 거기서 이루이 데리고 도망친 거 기억 안 나냐? 거기로 돌아갈 바에야 차라리 죽고 말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부카케, 자멘, 어보션. 예전에 들렀던 마을이 기억났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췄다. 안 된다. 카인이 몇 번이고 왕궁에서 벗어났던 것은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런 카인이 마을 세 개를 고스란히 남겨뒀을까? 어리석은 질문은 작작 좀 하자. 생각하는 시간과 뇌세포가 아까우니까.
야만족의 숲을 비롯해 여섯 개의 마을. 심지어 수도까지. 모조리 다 괴물 투성이가 됐다고 생각하니 발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주저앉고 싶어 했지만 이루이 앞에서 주저앉기는 싫었기에 성벽에 몸을 기댄 채 겨우 숨을 들이마셨다.
안즈한테 납치를 당한 후부터 계속 도망치기만 했다. 괴물한테서 도망쳤고, 현실에서 도망쳤고,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던 프레그넌트에서도 도망치듯이 떠났다. 카미유에서도, 루인에서도. 모두 다 마찬가지였다. 도망치고 도망쳤었지. 살기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그 결과가 이거냐?
내 아내들이 있던 수도까지 망했다고?
그 괴물들로 즐비하게 됐단 말이냐?
눈앞이 멍해진다. 눈물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너무나 기가 막혀서 그런 것도 있었다. 정말 끝내준다. 도망칠 길뿐만 아니라 도망칠 곳까지 완전히 박살낸 거나 다름없었다.
예전에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지. 비단 바이오하자드 시리즈뿐만 아니라 공포 게임 시리즈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과 똑같았다. 앞으로 가면 좀비나 유령을 포함해 온갖 괴물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뒤로 갈 수도 없거니와 뒤로 가면 더 무시무시한 적이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우리를 봐라. 야만족의 숲과 프레그넌트는 이미 안즈와 함께 탈출했으니 논외(論外). 카미유와 루인을 돌아보고 왔으니 거기는 말할 가치도 없지. 나머지 세 곳도 이와 비슷한데 내 아내들과 프레그넌트의 주민들을 보호하던 레이프가 『좆☆망』 상태가 됐다. 이걸 좆망이라고 하지 않으면 대체 무얼 좆망이라 칭해야 한단 말인가?
여기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이루이를 안고 오며 괴물과 전투를 벌이지 않았던 나는 왜 주변에 괴물이 없을까 생각했었다. 카인이 나를 위해 괴물을 물리는 짓을 했을 리가 없는데 왜 주변에 괴물이 없는가 싶었더니……답은 간단했다.
수도에 들어가면 싫어도 싸워야 했으니까!!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지! 입구 주변에 경비대원이 없는 걸 보고 쫄았는데 이 안에 들어가면 얼마나 막장 같은 상황이 펼쳐질까? 얼마나 무서운 아비규환(阿鼻叫喚)이 우리를 맞이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들어가기 싫다! 정말 싫었다! 생각 같아서는 모든 걸 포기하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바다처럼 몰려온다! 한숨과 눈물의 콜라보레이션이 펼쳐졌고 난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껴야만 했다. 주저앉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창피했으니까.
이루이도 나와 다를 바 없었다. 지금까지 목표로 삼던 곳이 도망친 고향과 똑같이 됐다는 걸 깨닫자 눈물을 흘리며 오열(嗚咽)했다. 끅끅대며 큰 소리로 우는 걸 참는 그 모습은 너무나 애틋했기에 나는 그녀를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도망을 치고 싶어도 도망칠 곳이 없고 싸우자니 말도 안 될 정도로 처참한 상황.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게 나 한 명이었으니 그야말로 【레이프의 주민들 vs 나 + 이루이】나 다름없었다. 들어가서 향해야 하는 곳은 왕궁이었지만 왕궁 주변에 발이나 딛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이럴 때 갑자기 안에서 경비대원이 나오더니 ‘아, 밥 먹느라 교대 시간이 늦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초병 근무하는 사람은 식사 빨리하는 거 아시잖아요!?’라는 말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나와 이루이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는 뻘쭘한 등장인물 A, B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그걸로 이 악몽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지만……그럴 리가 없죠? 오히려 안에서는 케륵거리는 괴물의 신음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누가 환상이나 망상 보고 있을까봐 사운드까지 더해주는 서비스 보소. 당장 들어가 조금 전에 케륵 거린 놈을 죽이고 싶었지만……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레이프의 주민들이 모두 다 괴물로 변했다면 그 수는 장난이 아닐 테니까. 게다가 내가 가진 무기는 총성이 장난이 아니다. 총을 쏜 순간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달려야만 할 정도로 단점이 부각되는 무기였다.
루인 때처럼 사격 포인트를 잡고 싸울 수는 없냐고? 그럴 수도 없었다. 적이 좀 많아야지. 시체가 쌓이면 쌓일수록 놈들은 동료의 시체를 방패삼아 기습을 호시탐탐 노리곤 했었다. 괜히 놈들한테 좋은 일을 해줄 바에야 들어가자마자 달리며 싸우는 게 몇 배는 나았다.
“세린님……. 저희 어떻게 하죠?”
이루이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긴. 나도 불안해 죽겠는데 얘한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라니. 무리한 주문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이런 생각을 하자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 여행이 이렇게 좆같이 끝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래도……따뜻한 침대랑 목욕은 물 건너간 거 같네.”
내 엉뚱한 말에 이루이는 조금 당황한 거 같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도 이상한 말 한 거 아니까. 이런 상황에서 나까지 당황하면 정말 죽도 밥도 안 되잖냐. 그럴 바에야 내가 이상한 말, 웃긴 말 해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게 몇 배는 낫지.
이루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니 조금은 진정이 된다. 음……역시 좋다. 이 부드러운 느낌. 아이나나 메이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가 생각나네. 아내들을 생각하자 안 그래도 무거운 마음이 더욱 더 무거워졌다. 망할. 설마 아내들까지 이렇게 된 것은 아니겠지?
이루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춘다. 내가 멈춘 거긴 하지만 좋아서 멈춘 건 아니었다. 아내들을 생각하자마자 몸은 바이러스에 걸린 컴퓨터처럼 멈춰버렸다. 설마……설마 아내들까지? 혜린이랑 다른 애들까지 저렇게 변했을 리가……없지? 응? 없는 거겠지?
왕궁으로 가는 도중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 지름길은 어딘가 등을 생각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사로잡히다니! 싸우기 전에 정신을 가다듬고 행동해야 피해를 입지 않고 싸울 수 있는데……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설마 내 아내들이 저 괴물 투성이 도시 안에 있단 말인가? 곧 태어날 아기를 뱃속에 둔 채?
이런 씨팔! 우라질!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만 계속해서 떠오르다니! 이것도 재주가 아닐까 싶었다. 쓸데없이 걱정하는 재주! 그 쓸데없는 걱정, 불길한 예감이 연이어 현실이 되어 엿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또 이 지랄을 하게 되다니!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내 자신이 싫어졌지만 한 번 시작된 생각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이제 곧 출산 시기가 다가온 아내들이 배가 찢겨진 채 괴물처럼, 짐승처럼 두 손과 발로 기어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자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입을 막은 채 참긴 했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뜨뜻미지근한 음식물의 맛과 온도가 그토록 역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래, 그럴 리가 없고말고! 카인은 내 아내들을 빼앗아갔다. 아무리 카인이라지만 내 아내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괴물로 만드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한테 더 큰 절망과 슬픔, 고통을 주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하게 살려두겠지!
늘 나를 엿 먹이고 물 먹이던 카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놈의 더러운 인격이 고맙게 느껴졌다. 적어도 ‘내 아내들을 괴물로 만들지 않았다’라고 확신하게 만들어줬으니까. 그거 외에는 전부 다 나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기에 금방 고마워하는 마음은 사라졌지만……희망(希望)만큼은 아직 남아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이루이한테 들어간다고 했다. 이루이를 데리고 들어가는 건 힘들지만 그렇다고 놓고 갈 수도 없다. 나와 함께 있으면 ‘죽을지도 모른다’지만 내가 없는 상태에서는 ‘죽는다’였으니까.
입구로 들어간 후 왕궁으로 가는 최단 루트, 지름길, 샛길 등을 최대한 기억해냈다. 안즈와 함께 있으면서 마을을 돌아볼 기회는 많았기에 어느 정도 외워두길 잘 했었지. 진행 루트를 정한 나는 스테이터스를 확인했다. 무기, 코스튬. 전부 다 이상 없다.
“……잘 따라 와야 한다.”
이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허둥대거나 망설이다간 곧바로 THE END. 무료 효도 저승 관광 편도행 티켓을 끊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다. 그게 바로 최대의 목표이자 지향점이었다.
침을 꿀꺽 삼킨다. 목이 마르군. 이 일이 끝나면 물을 마시기로 하자. 괜히 수분 섭취해서 몸이 무거워졌다가 죽기는 좀 그러니까. 괴물과 별로 싸우지 않은 덕분에 마력은 그나마 남아 있었지만 얼마나 많이 몰려올지 몰랐기에 그저 불안하기만 했다.
피와 시체 냄새. 괴물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수도, 레이프를 향해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바이오하자드(영화)를 비롯해 좀비 영화에서는 엄청난 양의 좀비 떼거리가 나오곤 합니다. 이건 굳이 ‘좀비영화니까 좀비를 많이 보여줘야지!’라는 이유만으로 나온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시청자한테 이런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요.
‘야, 야. 저 좀비 떼 보이지? 존나 많지? 쟤들 그냥 멀리서 보기만 하는데도 존나 무섭잖아. 가까이에서 봤다간 오줌 질질 흘릴지도 몰라. 근데 있잖아……니가 사는 곳이 저렇게 되면 어떨 거 같냐? 존나 무섭겠지? 영화 보면서 한 번 상상해봐. 니가 사는 곳이 저렇게 좀비 투성이로 변하고 너희 가족이 저렇게 좀비로 되살아나면 어떨지.’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존나 무서울 겁니다. 진짜 ‘이건 꿈이야 이건 환상이야’ 같은 말을 막 중얼거리며 멘탈붕괴하지 않을까 싶네요. 병신 같다고요? 그야 당연하죠. 전 인간이니까요.
생강 먹고 생각을 해봅시다. 자기 평생을 함께 살아온 가족이 좀비가 됐는데 용맹하게 후려패 죽인다고요? 좀비도 위험하지만 그런 사람도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건 저 혼자뿐일까요?
물론 가족이 평소 학대를 하거나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집안.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앗, 가족이 좀비 됐네! 빨랑 숨통을 끊어줘야지~☆’라며 무기를 휘두른다니.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비한테 애정을 보내라는 말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힘들긴 하겠지만 아무것도 못 느끼게 된다면 그건 그거대로 엄청 슬플 겁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나락이되고파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로 19챕터도 끝났네요. 남은 20챕터도 즐겁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업로드는 결국 다시 출근 전 업로드로 돌아와 버렸네요. 빌어먹을 회사 때문에 끝까지 고생입니다. 자영업이나 혼자 하는 업무를 찾아봐야 하나……. 좋은 직업 있으면 누가 코멘트로 좀 달아주세요. 불쌍한 작가 한 명 구한다 셈 치고요.
예? 지금 하는 일은 뭐냐고요?
그냥 계약직입니다. 좆같은 거.
여러분은 이런 거 하지 마세요.
꿀 빠는 직업 찾으시기 바랍니다.
안 그러면 진짜 두고두고 후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