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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189화 (189/235)

00186 「19-5 : 종언의 카운트다운 (16)」 =========================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신비하면서도 멋진 단어다. 이 단어만 들어가면 아무리 어설픈 것이라도 일종의 ‘분위기’나 ‘멋’을 가지게 된다.

흔히 말하는 3류나 B급 영화라도 ‘마지막 싸움이 시작된다!’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붙으면 ‘오오, 멋있는데? 한 번 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듯이 말이다.

앞서 말한 예시처럼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일종의 ‘간지’가 살아나므로 많은 사람들이 저 단어를 쓰고는 한다.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이나 소설, 영화나 드라마. 인쇄나 영상 매체에 관계없이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써서 독자나 시청자들의 몰입도(沒入度)를 더욱 가속시키고는 했다.

우리의 마지막 싸움이 시작됐다, 이게 인류의 운명을 건 마지막 싸움이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나 등. 맨 마지막의 경우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냐?’라며 주인공한테 깝죽대다 반격당해 죽는 게 일반적이라 좀 그렇긴 하다만……여하튼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매우 뜻 깊고 의미 있는 단어였다.

작품뿐만 아니라 개인한테 있어서도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과 맞먹는 거라면 ‘처음’이겠지. ‘첫경험’이나 ‘첫키스’가 풋풋함과 상쾌함을 주는 단어라면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유종지미(有終之美). 풀어서 말하자면 ‘유종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유종지미란 ‘유종의 미’라고도 표현하며 뜻은 ‘끝을 잘 맺는 아름다움’이었다. 어떤 일을 시작해서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해서 결과가 좋다는 의미의 말이 나올 만큼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비중은 매우 컸다.

이 소설도 그렇지만 세상에 나온 소설이나 만화 등이 전부 다 유종의 미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내용의 문제나 개인사정으로 인해 연재중지가 된 소설부터 시작해 저작권이나 판권 문제로 나올 수 없게 된 영화. 성우나 작가의 사망으로 인해 진행이 어렵게 된 라이트노벨 등. 본의 아니게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게 된 사례는 수도 없이 많았다.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닌 만큼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게 된 때도 많았기에 ‘마지막’이라는 말을 쓰기 위해서는 큰 문제나 사고 없이. 혹은 그런 문제나 사고가 있었어도 어떻게든 마지막 작품을 제작하는 단계까지 온 사람만 쓸 수 있는 게 가능했다. 그 정도로 ‘마지막’이라는 단어나 형용사가 가지는 의미는 컸다.

나한테 있어서도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꽤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짓이 뭐냐고 묻는다면……도서관에서 공무원 공부 교재 꺼내놓고 놀다가 잤던 거지.

누가 들으면 ‘마지막으로 한 일이 고작 그거냐?’라고 묻겠지만 나한테 있어서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직 못 본 애니도 폰에 많이 저장해 놨었건만, 그 중요한 스마트폰이 원래 세상에 덩그러니 남게 될 줄이야. 그거 약정 좀 남았는데……. 뭐, 보급형 폰이니까 그리 비싸지는 않았다만.

이곳에 와서 많은 일을 겪었지만 지금처럼 다급하고 힘든 사태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야만족한테 납치됐을 때부터 이미 모든 일은 뒤틀리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카인은 괴물들을 소환해 프레그넌트나 야만족의 숲을 유린하며 이 ‘하렘 어드벤처’의 무대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온갖 것들을 빼앗긴 나는 카미유나 루인에서 살아남으며 겨우 여기에 다다랐다. 루인에서 간신히 발견한 생존자. 지금은 나의 아내가 된 이루이와 함께 수도를 향한 마지막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여행을 ‘마지막 여행’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가 있냐고 묻는다면……이유가 있다고 해야 할지, 이유를 만들 거니까 그렇게 부를 수 있다고 해야 할지 좀 헷갈렸다.

이유가 있다는 면에서 보자면……더 이상 그놈한테 휘둘려 마음에 안 드는 여행을 하기 싫었으니까. 이 여행을 마지막으로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

이유를 만들 거니까 ‘마지막 여행’이라 부를 수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잘 못 알아먹겠지. 쉽게 말해서……가자마자 카인한테 총을 쏠 생각이었으니까. 현재 왕인 카인한테 총을 쏘면 나는 왕족시해죄(王族弑害罪)의 죄목을 가지게 된다. 미수 같은 어설픈 게 아니라 진짜 시해죄가 되므로 사형은 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았다. 현재 나한테 있어 사형은 이미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카인이 나를 가지고 놀 때부터 사형선고는 내려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내가 사형이 두려워서 카인을 안 쏜다고? 머리에 총 맞았냐? 그럴 바에야 그 새끼 쏘고 뒈지는 게 백배는 났지, 시팔!

당연한 소리지만 내가 쏜다고 걔가 맞아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내가 총을 겨눈다고 ‘자, 쏴라! 난 사실 존나 허약해서 한 방만 맞아도 죽는다!’라는 말을 하며 팔을 쫙 벌리지는 않을 테니까.

……좀 불안해서 그런데. 혹시 내가 카인을 죽인다고 ‘흥, 놈은 이 세상을 관리하는 4천왕 중 제일 약한 놈이었지. 그런 놈을 죽였다고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하다니. 어리석은 놈……. 너의 진정한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같은 전개가 일어나지는 않겠지?

카인만 해도 엿 같은데 걔 같은 놈이 세 명 더. 거기에 마왕 같은 게 더해지면……아, 씨발! 안 해! 그때는 진짜 다 좆이 되든 엿이 되든 간에 막 죽일 거다! 장난 하냐? 아니 4천왕이면 처음부터 네 명 다 나와서 한꺼번에 싸우든가!? 왜 제일 약한 놈을 일빠! 첫 빠따로 내는 건데?

아, 맞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너흰 대체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4천왕이라니? 대체 몇 년……아, 아니다. 몇 십 년 전에 쓰던 건데? 왜 그렇게 낡아빠진 개념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건데? 안 쪽팔리니?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가르침을 계승할 생각으로 그런 거니, 아니면 뭔가 멋있다 싶어서 갖다 붙인 거니?

4천왕이라니! 생각만 해도 얼굴이 빨개지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요즘 세상에 4천왕? 너무하잖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둘 다 쪽팔리게 해서 죽이려는 생각이냐? 만약 그럴 생각으로 4천왕을 집어넣은 거라면 목적은 확실하게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4천왕’ 같은 걸 넣으면……으윽! 졸라 쪽팔려!

따지고 들어갈 곳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예전 같았으면 ‘뭐, 뭐라고!? 암흑사천왕이라고!?’라며 주인공을 겁먹게 하는 요소가 됐겠지만……야,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 그냥 예시를 위해 적은 거지만 ‘암흑사천왕’이라니!? 너희 작명 센스 존나 개막장인 거 알기는 아니? 4천왕이면 4천왕이지 암흑사천왕은 또 뭔데?

무협이나 판타지 등을 거슬러 올라가면 참 많은 적이 나온다. 개성적인 적부터 시작해 끈질긴 놈, 변태, 이상한 정의(正義)를 가진 놈들. 그런 놈들이 적으로 나오면 대부분 1회성 캐릭터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4천왕이라는 개념은 엄밀히 말해 불교(佛敎)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사대천왕(四大天王)이라고도 부르는 개념은 동서남북, 4방향에 걸쳐 거기에 걸맞은 천왕(天王)을 배치시킨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자세히 파고들면 여러 모로 귀찮아지니 대략 그렇게 설명할 수 있지만…….

이 사천왕이라는 개념이 멋있으면서도 대단한 의미를 지니기도 했지만, 실제로 일을 잘 하거나 중요한 요직에 있는 네 명을 가리키는 말도 될 수 있었기에 예전부터 자주 쓰이고는 했다. 창작물에서 사천왕이라는 단어가 마구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있어 보이잖아.

그뿐일까? 사천왕이라고 하니 주인공 파티를 습격하거나 할 때 한 명씩 나가는 친절함까지 보여줬다. 사천왕이 모두 나가면 주인공이나 히로인이 모두 죽으니 스토리 진행을 위해서 한 명씩 나가는 친절함까지 보여주다니. 내가 주인공이라면 아주 반할 정도로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좋은 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천왕이나 있으니 한 명 쓰러뜨리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도 있었다. 즉, 소설이든 만화든 간에 연재기간이 엄청 늘어난다는 장점(長點)을 가지고 있다는 거였다. 연재기간이 늘어나면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쓸 수 있으니 작가나 독자 입장에서는 이토록 고마운 존재가 따로 없었다.

그러다 스토리가 좀 막힌다 치면 ‘사천왕을 쓰러뜨렸다고 우쭐대다 큰 코 다치는 주인공’같은 걸 넣을 수도 있었고. 아아……정말 대단한 놈들 아닌가? 적이나 아군, 작가나 독자. 누구한테나 장기연재 & 즐거움을 주는……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칭찬을 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이렇게 기특하기 그지없는데 아직도 칭찬할 점이 남았다는 건 참으로 무섭기 짝이 없었다. 바로 배신(背信) 혹은 주인공 팀(파티)으로 합류하는 이벤트가 있었다는 거다.

세상에……!! 원래 세상이었다면 배신자에 대한 취급이나 태도는 쌀쌀맞기 그지없지만, 사천왕 중 한 명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명색이 사천왕이니 입지나 파워, 능력. 무엇 하나 부족할 게 없지 않은가? 그런 사천왕이 주인공 팀에 합류하다니! 이거야말로 파워밸런스 파괴의 현장이 아니던가? 금상첨화(錦上添花)도 이 정도면 두려울 정도지!

뭐? 사천왕이든 최종보스든 간에 주인공 파티에 합류하면 자동적으로 약체화(弱體化 ; 다운 그레이드)가 된다고? 으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어쩔 수 없는 거냐고 묻는다면……시장에서 한 개 2천원에 파는 반찬을 세 개 사면 5천원으로 해주는 것과 동급이었다. 이것을 불문율(不文律)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을 불문율이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약체화. 한자로 썼지만 쉽게 풀이하자면 ‘약해진 상태로 변하다’다. ‘주인공 파티 vs 사천왕’으로 싸울 때의 스펙을 그대로 가지고 오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영어로 치자면 다운 그레이드가 되어 주인공 파티에 합류하는 거였지.

사천왕뿐만이 아니라 적을 설득해 우리 편으로 삼는 대표적인 사례(事例)는 ‘슈퍼로봇대전’이 있었다. 거기에서도 특정 캐릭터 및 조건을 충족(充足)시킨 후 ‘설득’ 커맨드를 쓰면 우리 편으로 삼을 수 있었다. 스펙의 다운은 어쩔 수 없다 치지만 마음에 드는 기체나 캐릭터를 얻기 위해서는 필수 이벤트 중 하나였지.

가끔 제작진이 약을 먹고 게임을 만든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적일 때의 스펙. 강력한 기술과 엄청난 HP 수치를 그대로 들고 오는 경우도 있긴 있었다. 그 경우 게임의 난이도는 급격히 하락했으며 전략이나 성장, 배치 등을 생각해야 하는 슈퍼로봇대전이 ‘슈퍼학살대전’으로 바뀌기도 했다.

동방선생님, 고마워요! 동방불패─마스터 아시아─ 선생님 덕분에 슈퍼로봇대전A는 정말 재미있게 플레이했어요!

……흐, 흠! 크흠! 어, 여하튼. 그런 거다. 적일 때의 강력한 스펙을 그대로 들고 오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매우 소수였고, 대부분의 경우는 다운 그레이드된 스펙을 가지고 합류했다. 물론 스펙이 떨어지긴 했지만 명색이 사천왕이었기에 파워는 어느 정도 있었으며, 지식이나 적의 습성 등을 알려주기도 했기에 큰 도움이 되는 게 클리셰지.

사천왕이라는 단어. 그 컨텐츠 하나만으로 이토록 많은 클리셰나 이벤트가 나오다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사천왕이라는 단어는 ‘아니! 아직 멀었다! 사천왕으로 우려먹을 수 있는 이벤트는 아직 더 있어!’라며 내 손을 움직인다. 키보드를 두드린다. 무서운 놈들……!

소드 아트 온라인 팬픽도 아직 다 못 쓴 작가의 손가락을 이렇게 피아니스트처럼 움직이게 하다니! 작가의 분노가 느껴지긴 했지만 ‘주인공 파티로 합류한 사천왕’의 경우 두 가지의 이벤트가 존재했다.

첫 번째로는 ‘주인공 파티와의 불화(不和)’였다. 아무리 주인공 편으로 합류했다지만 예전에 전투를 하거나 사천왕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은 ‘흥, 난 널 믿지 않아! 넌 우리의 적이었어! 우리 파티로 합류했다고 헤헤거리며 너랑 친하게 지낼 거 같아? 꿈도 꾸지 마!’라며 그를 매도하거나 거부한다.

이에 대해 주인공이 나름 중재(仲裁)를 맡으려 하지만 사천왕은 ‘아니, 저 말이 옳아. 내 죄는 씻을 수 없어. 저렇게 말하거나 행동하는 게 당연한 반응이야. 오히려 나를 믿어준 니(이 경우 주인공)가 특이한 경우지’라며 웃곤 한다.

말은 이렇게 해도 함께 여행을 하며 정을 쌓게 되고, 자기한테 험한 말을 퍼부은 주인공 파티 멤버와 친하게 되곤 했기에 누구나 훈훈하게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했다. 실제로 ‘적이었던 사람과 나누는 우정’ 이라는 소재를 매우 잘 다루었기에 읽는 사람, 캐릭터, 작가. 모두가 만족할 만한 스토리를 뽑을 수 있는 훌륭한 소재 중 하나였다.

개중에는 ‘시발, 그렇게 될 거 같았으면 처음부터 반기던가!’라며 욕할 수도 있겠지만……사람이란 게 고운 정 미운 정 들어가며 성장하는 거니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해야 하나? 서로 충돌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런 사건(이벤트)을 겪어가며 성장하는 거라 치면 사람의 인생이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였기에 딱히 나무랄 부분은 아니었다.

츤데레 같은 파티 멤버와 사천왕의 성별(性別)이 다르면 연애 플래그로도 적용할 수 있으니 참으로 대단하면서도 무서운 것 중 하나였다. 그 경우 츤데레와 사천왕의 연애가 진행되므로 이건 이거대로 즐거웠다.

두 번째로는 ‘마왕 혹은 대마왕. 최종보스와의 대면(對面)’이었다. 주인공 파티로 합류한 이상 그들이 목표로 하는 최후의 적. 예전에는 상사였던 마왕이나 대마왕과 싸워야만 하는 입장이 됐다. 보스뿐만 아니라 예전의 동료와 싸우며 매도나 비판, 질타(叱咤)를 받는 것 또한 매우 써먹기 좋은 이벤트 중 하나였다.

예전의 동료일 경우 그의 부하 혹은 동료인 사천왕들과 싸우게 된다. 전투가 벌어지면 ‘우리한테 등을 돌린 더러운 배신자’라는 말부터 시작해 온갖 매도, 비판, 질타, 비난이 날아온다. 듣는 사람이 ‘워우, 워우. 오우야, 너무 심한 거 아님?’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정신적인 매도에 약해진 전(前) 사천왕이 위기에 처할 때 도와주는 게 바로 틱틱대며 그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던 캐릭터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전(前) 사천왕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면 게임 끝! 분노로 각성한 전(前) 사천왕이 자신의 동료를 무찌르며 ‘나는 예전과 다르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다’ 등의 대사를 지껄인다.

평소 내 성격 같았으면 ‘시발, 피해를 입기 전에 각성하라고! 초사이어인처럼 각성해서 빨리 적을 처바르라고! 안 그랬으니까 파티 멤버가 몸 던지면서까지 널 구한 거잖아!’라며 욕을 하겠지만……이 경우 ‘정신적으로 벼랑에 몰린 전(前) 사천왕 멤버를 몸 던져 구함으로써 정신적 제약을 뛰어넘게 했다’라고 평가하는 게 옳았다.

주인공의 각성은 보기에는 멋있지만 실제로는 그만한 훈련이나 경험, 희생을 필요로 했다. 가장 유명한 [드래곤 볼]의 주인공, 손오공도 예외는 아니었다. 죽마고우인 크리링이 프리더의 공격에 의해 시체도 없이 산산조각이 되자 얄짤없이 초사이어인으로 변했다. 그 후에 프리더를 박살내는 건 너무나 유명하기에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다.

전(前) 사천왕이 보스를 만날 경우, 보스는 그를 다시 회유(懷柔)하려 한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과 군세를 주겠다. 우리를 배신했듯이 주인공 파티를 배신하기만 하면 된다. 아무도 너를 비난할 수 없다 등 온갖 감언이설(甘言利說)로 그를 돌아오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예전의 사천왕 멤버였던 캐릭터는 당연히 그걸 거부한다. 주인공 파티와 함께 모험을 함으로써 얻게 된 정신적인 유대감, 만족감. 예전에는 얻을 수 없었던 감정과 사람의 따스함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며 마왕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로서 마침내 【전(前) 사천왕】에서 【진정한 주인공의 동료】로 변하게 되는 것이기에 독자와 작가, 모두 다 캐릭터의 정신적 성장에 기쁨을 느끼게 된다. 예전에 나쁜 길에 빠졌던 청소년이 올바른 길을 걸어가기로 마음먹은 것과 동급의 감동을 준다고 해야겠지.

보스와의 마지막 전투가 끝난 후에는 사람들한테 속죄하는 삶을 살며 살아가는 게 일반적인 엔딩이다. 죽는 엔딩도 있겠지만 그건 뒷맛이 영 안 좋으니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이나 반성(反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밖에 없잖냐. 착한 사람은 가능하면 살리는 게 낫지. 해피 엔딩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

모두가 기뻐하며 엔딩을 맞이하는 것으로 전(前) 사천왕이었던 캐릭터는 ‘정의를 위해 싸운 주인공 파티의 멤버 중 한 명’이 된다. 깔끔하면서도 만족스러운 엔딩. 정의뿐만 아니라 잘못된 길에 들어선 사람도 올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의미하기에 어떤 의미로는 주인공 이상으로 뜻 깊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사천왕이라는 쪽팔리기 그지없는 주제로 이렇게까지 심도 있는 스토리를 풀어나갈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열심히 연구하고 궁리하다 보면 모두를 놀라게 만들 아이디어나 캐릭터를 구상할 수 있다는 좋은 예시가 되겠지. 하나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카인은 사천왕이 아닙니다……. 그 새끼 같은 놈이 세 명이나 더 있으면 나 죽습니다…….”

자고 있는 이루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하지만 불만과 피곤함을 담아 중얼거렸다. 루인에서 출발한 첫날이지만 청록색 촉수괴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기에 단 한 번의 전투 없이 여행을 진행할 수 있었다.

붉은색 촉수괴물 덕분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붉은색 촉수괴물이 있는 부근에서는 청록색 촉수괴물을 보기 힘들었다. 괴물끼리는 공존(共存)할 수 없기에 같은 구역에 있다간 내분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한 카인이 아예 청록색 촉수괴물을 주변에서 배제시킨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

만약 내 가정이 옳다면 오늘은 매우 운이 좋은 거였다. 마을에서 이미 충분히 멀어졌으니 청록색 촉수괴물이 어슬렁거려도 이상한 점이나 문제는 없었을 테니까. 우리도 괴물을 거의 보지 못했지만 놈들도 우리를 보지 못했을 거다. 만약 봤다면 절대 가만히 안 있었겠지. 걔들은 인정사정도 안 봐주고 덤벼드는 놈들이니까…….

이루이는 간단한 회복 마법을 비롯해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마법들을 배운 정도였기에 전투에 함부로 참여시킬 수는 없었다. 공격 마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마법내성을 지닌 괴물한테 괜히 잘못 공격했다간 공격대상으로 인식될 테니까. 내가 싸우는 건 싫지만 이루이한테 대신 싸우라고 할 정도로 인간쓰레기는 아니라니까?

오늘은 운이 좋아 거의 만나지 않았지만 내일부터는……좀 험하게 말해, 지금 당장 괴물들이 우리한테 돌격해 와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이렇게 무사히 쉴 수 있는 건 괴물이 주변에 없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카인이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 수도 있겠지.

나 좋으라고 한 일이 아니라 장난감이 빨리 부서지면 곤란하니 그런 것일 거다. 몸을 뒤척이는 이루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은 수많은 별이 수를 놓고 있었으며 달빛은 낭만적으로 대지를 비추고 있다.

‘……곧 이 광경도 못 보게 되겠군.’

이 말은 마음속으로 했다. 이루이가 들었다간 또 슬퍼하거나 화를 낼 테니까. 내 운명은 이제 거의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신통력이나 미래를 보는 힘은 없었지만 내 운명이 어떻게 되고 있나를 모를 정도로 병신은 아니었거든.

카인한테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거의 안 들었다. 내가 그놈한테 총을 겨눌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내가 가진 소총, 입고 있는 코스튬의 투영마술. 모두 다 그놈이 만든 거니까. 혹시 안 되면 주먹질이라도 해야겠다 싶었다만……주먹질로 걔를 죽일 수 있을까?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질문할 가치도, 대답할 가치도 없었다. 생각 그 자체로 뇌세포를 낭비하는 어리석은 질문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는 풍경이 무엇이 될지 너무나 궁금하고 두려웠다. 조금 전까지 사천왕에 대해 침을 튀기며 설명했다만……진정한 주제는 사천왕이 아니라 ‘마지막’이었다는 걸 다시금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잠시간이지만 ‘포기하는 삶’을 살며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었는데……설마 그 마지막이 이렇게 찾아올 줄이야.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웃었다.

그래, 마지막이다. 포기하는 삶을 살려고 했을 때는 아직 가망이나 있었지. 이젠 가망조차 없었다. 나의 죽음과 파멸은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도망? 갈 수 없다. 이 하렘 어드벤처에 소환됐을 때부터 내 운명에서 ‘도망’이라는 선택지는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놈과 맞서 싸우라고? 싸우긴 싸울 거다. 결과는 처참하겠지만……내가 언제 결과를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우위(優位)를 점한 적이 있었냐? 늘 이렇게 살았었지.

마지막. 정말 마지막이다. 이 여행이 내 인생의 종착점이 될지 갈림길이 될지는 안 봐도 뻔하다만……그래도 나도 인간인지라 희망은 가지고 싶었다. 말이 안 되는 말이긴 하지만 ‘내가 카인을 쓰러뜨리고 모든 것은 평화와 있을 자리를 되찾았다’라는 엔딩을 꿈꾸고 있긴 했다.

“멍청하긴…….”

나 스스로를 욕했다. 멍청했다. 참으로 멍청한 짓이자 생각이었다. 내가 꿈꾼다고 그게 이루어지냐? Dream comes true? 그건 될 법한 일에나 쓰는 말이지. 당장 내 목숨을 없앨 수도 있는 인물을 상대로 해피엔딩? 모든 게 다 잘 됐다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한숨만 푹푹 쉰다.

불안하다. 괴물과 만나는 것도 불안했지만 수도에 있는 안즈도 걱정이 됐다. 싫다, 증오한다, 죽어버리라며 온갖 저주를 날렸던 아내들 또한 머릿속에 자연히 떠올랐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출산 시기인데 카인이 무리하게 섹스를 강요했다간……아기들이 유산(流産)될 가능성도 있었다.

아기를 가졌다며 기뻐하던 그녀들한테서 아기를……내 정자(精子)로 만들어진 아기들을 모조리 빼앗아갈 거라 생각하니 더욱 더 기분이 침울해진다. 망할 자식……그놈 때문에 나나 아내들, 아기들. 모두가 불행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가망이 영 없는 바람이긴 했지만……최대한 괴물과의 조우(遭遇)나 전투 없이 수도로 향하길 바랐다. 아내들도, 안즈도. 모두가 걱정이 된다. 수도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청록색 촉수괴물들도 신경 쓰였고. 이미 텔레포트를 당한지 1주일이 넘었으니 걱정을 할만도 했다.

배가 차가워지지 않도록 이루이의 배를 담요로 확실히 덮어준 나는 다시 하늘을 본다. 저 하늘도, 이 대지도. 사랑하는 아내와 안즈, 이루이. 모두를 계속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게 내 인생과 여행의 ‘마지막’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진심을 담아 기도했다.

평소라면 신을 믿지 않기에 기도 같은 걸 하지 않았지만……지금은 그런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 미칠 것만 같았다. 물론 기도는 신(神)이라는 존재한테 올리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의 신. 카인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미쳤냐? 그 새끼한테 기도하게?

신이여……. 카인 같은 병신 말고 정말 신(神)이라는 존재가 있다면……부디 저와 아내들. 카인으로 인해 불행해진 모든 사람들을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짤막하면서도 바라는 것을 모두 담은 기도. 그걸 올리자 기분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젠장. 종교를 싫어하던 내가 이렇게 무언가를 바랄 정도로 다급해지다니……. 정말 가증스럽군. 신의 존재에 대해 경외심도 없었던 주제에 다급하니 신을 찾는 그 모습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기에 더욱 더 웃음이 튀어나왔다.

신이라……정말 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도 들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더욱 더 이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신이라고는 하지만 딱히 하느님이나 부처님 같은 존재를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런 신이 이 ‘하렘 어드벤처’에까지 신경 쓸 위인으로 보이지도 않았거니와 그럴 능력이 있는지나 의문이었으니까.

난 그저……내가 처한 현실. 신이라는 이름 아래 무슨 짓이든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카인을 막아줄 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막을 수 없다면 누군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작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도, 어떻게 카인을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게 좀 거시기하다만……다른 건 몰라도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더 이상 카인을 자기 멋대로 설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zxc54님, 안즈에 관한 건 수도에 도착하면 알게 됩니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안즈를 찾을 정도로 세린과 함께 시간을 보낸 안즈입니다만 어떻게 됐을지는……상상에 맡기겠습니다.

v대상인v님, 고양이새벽님.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모자란 처녀작(장편 연재)이지만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노력해보겠습니다.

elekdl66님, 시라누이 마이나 게임 or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는 나오지 않습니다. 코스튬을 통해 간접적으로 캐릭터를 재현하거나 하는 정도입니다. 코스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입는 사람 등이 달라집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은 이상입니다.

계약직이라 그런지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십니다. 그치만 어쩌겠습니까. 누구나 대기업의 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취직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안 좋은 대우랑 박봉 알면서 어쩔 수 없이 계약직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정규직만 기다리며 허송세월하다가 진짜 아무것도 못 이룬 채 나이만 먹을 수 있으니까.

중소기업에 가면 되지 않냐고 하시는 분들. 중소기업 가서 한 달도 못 하고 그만 둔 놈이 접니다만, 중소기업도 좋은 곳 가야죠. 가르쳐주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경력 같은 신입사원 원하는 블랙기업 가보세요.

누가 죽어 나가냐고요?

거기 간 댁이 죽어 나갑니다.

중소기업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 가르쳐주는 건 없으면서 훔쳐 배우길 바라는 미친놈들 소굴이죠. 중소기업이 초밥집입니까? 기술이나 지식을 훔쳐서 배우게? 가르쳐줄 생각은 없지만 신입이 다 해줘서 꿀 빨고 싶다, 이겁니다. 얼마나 좆같은지 이해가 가십니까?

대기업? 대기업에 가면 좋겠죠. 헌데 거기 못 가서 이러고 있는 거죠. 스펙을 따지지 않는다지만 솔직히 그 말 믿고 입사지원한 사람들 중 피똥 싸신 분들, 틀림없이 계실 겁니다. 그리고 알게 되겠죠. 스펙을 중점으로 보지는 않지만 아무런 스펙 없는 사람을 고용할 정도로 대기업이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라는 사실을.

중소기업은 좆같아, 대기업은 들어가기 힘들어.

그럼 어떻게 하냐고요?

공무원이라 대답하신 분들.

공무원 공부에 올인했다가 망하면 진짜 좆 됩니다.

막말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고시낭인이죠.

한국사? 한국사 잘 쳐주는 회사 지금까지 못 봤습니다.

영어? 영문학과 나온 사람 쓰지, 공무원 영어 공부한 사람 쓰겠습니까?

중소기업, 대기업, 공무원.

겨우 세 개의 길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안타까운 현실이 나옵니다만, 더 안타까운 현실이 뭔지 아세요?

이게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거요.

……현재 정부가 모든 걸 해결해줄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적어도 이 좆같은 실업 환경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네요. 저를 포함한 모든 구직자들이 조금이나마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주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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