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3 「19-2 : 종언의 카운트다운 (13)」 =========================
내 인생에는 많은 흑역사가 있다. 원래 살던 세상에서는 여자 친구는커녕 친구여자……아니, 친구라는 존재조차 없이 살았으니까.
내가 소통장애라거나 사람이 다가오는 걸 꺼릴 정도로 이상한 짓을 했던 건 아니었지만 친한 친구는 별로 없었기에 학교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친구라는 존재는 점점 사라져만 갔다.
솔직하게 말해서……친구라는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슬펐지만 어른이 되고 난 후에는 전혀 슬프지 않았다. 늘 내 옆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인간관계를 위해 돈과 시간을 쏟아 부어야만 하는 현실도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친구가 없었다는 것도 흑역사긴 하지만 이곳에 와서도 많은 흑역사를 창조해냈다. 아내들을 만들며 던졌던 작업 멘트부터 시작해 온갖 미친짓을 생각하면 ‘내가 그땐 대체 왜 그랬을까?’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 세상의 신인 카인(백발의 여자)을 죽이겠다고 깝치던 것도 흑역사지. 뒤늦은 중2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진짜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것인지 모르겠다. 실제로 만났지만 공격은커녕 무기조차 꺼내지 못한 채 말빨로 쳐발렸던 것도 흑역사다.
기독교 노래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는데……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는 ‘당신은 흑역사 창조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가사를 불러야 옳을 거 같았다. 흑역사만 줄창 만들어내는 것도 어찌 보면 능력이었다. 원해서 얻은 건 아니었다만…….
이전에 신 살해(神 殺害)에 대해 언급했던 적이 있다. 다들 알겠지만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망상에 불과했다. 내가 얻었던 모든 힘……정확히는 마법, 마력, 코스튬의 능력 등.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사실 카인이 잠시 빌려준 것에 불과했기에 놈을 쓰러뜨릴 방법은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육체적 능력? 원하지 않는 모험을 하며 체술이나 검술 대신 배우게 된 생존 스킬이 있긴 하지만 그것 또한 무의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몸과 정신을 지배하면 그만인데 내 주먹질이나 발길질이 먹힐 리가 없지 않은가? 그야말로 아무런 쓸모도 없는 헛수고나 진배없었다.
이루이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자를 모으는 동안 계속해서 생각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마음 같아서는 당장 수도로 달려가 놈의 미간(眉間)에 총알을 카와이하게 박아주고 싶다만……그게 가능했다면 훨씬 전에 했을 거다.
놈이 로라와 잠자리를 가지려는 순간 힘차게 방문을 열고 들어갔었던 때를 기억했다. 조정간을 ‘자동’으로 맞추고 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발도 맞지 않았었지. 이해가 갈 거다. 놈을 죽이긴 커녕 상처 입히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모든 여자들을 괴물로 바꿔버린 놈한테 이기라니……현실 세상의 빚을 갚는 게 훨씬 더 쉽지 않을까 싶었다. 그건 못 갚는다고 목숨을 빼앗으러 오지는 않잖냐. 내가 무슨 사채업자한테서 돈을 빌린 것도 아닌데.
처참하게 파괴된 마을. 괴물로 변해 죽은 마을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루이는 눈물을 터뜨렸다. 그걸 보며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왔다. 답답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죽은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순수하다는 이야기니까. 내가 답답한 것은 그들의 죽음을 포함해 다른 것에 대해 염증(厭症)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내가 카인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이걸 꼭 답해야 할까? 안 그래도 내 현재 상황은 시궁창 같은데 이 이상 더 내가 나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대답할 필요는 있었다.
아니, 못 한다.
나는 카인을 쓰러뜨릴 수 없다.
애초에 상처나 입히면 다행인데 죽인다고?
아직도 중2병에 걸렸냐?
때늦은 중2병에 걸린다면 차라리 낫겠지. 자기 마음대로 이상한 설정을 집어넣어 머릿속으로 그걸 즐기면 그만이니까. 뭣하면 소설이나 만화로 만들어 모두와 즐길 수도 있다. 스트레스를 적절하게 배출할 수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누군가한테 들키지 않는 중2병’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처한 현실은 달랐다. 이건 중2병의 설정이나 망상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처참했다. 처참하다 못해 비참하고 병신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서진 건물과 성벽. 시체들의 살점. 찢어진 옷자락들을 보며 나 자신한테 이렇게 물었다.
‘넌 이런 짓 할 수 있냐?’
사람들을 죽일 수 있냐는 말이 아니었다. 카인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건 카인이 했던 짓과 같은 정도의 짓. 건물을 손쉽게 부수거나 사람들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냐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도 간단했다.
없지, 병신아. 사람들을 죽이고 싶지 않고 죽일 수도 없다. 난 윤리(倫理)와 도덕(道德)을 아는 인간이니까. 그럼 건물은? 그걸 생각하자 한숨이 또 푹푹 나왔다. 건물을 부순다고? 늘 마력으로 만든 탄알과 투영마술 때문에 MP 고갈이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데 건물이나 성벽을 부수라니……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벽을 부수면 괴물이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부터 시작해 부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실제로 실험을 해본 건 아니었으니까. 그치만 괴물들의 공격을 받아내고도 끄떡없는 걸 생각한다면 결코 내구도가 낮은 것은 아니었다.
건물과 성벽을 모래로 만든 성을 부수듯 가볍게 부수는 그 미친 파괴력. 그 엄청난 힘에 대항해야 한다고? 내 눈앞에 있는 죽은 사람들은 그 힘에 저항조차 못한 채 죽어갔다. 죽은 사람들은 미약하나마 마법이나 쓸 수 있었지……난 카인한테 받은 무기 등을 제외하면 마법조차 못 쓰는 무능력자였다. 원래 승산은 없었지만 점점 승산에 대한 생각조차 무의미해져간다.
현재완료진행형으로 계속 흑역사를 갱신하고 있는 걸 보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를 카미유로 보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것만 보더라도 이미 승부의 결말은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저항은 고사하고 난 내가 일어나기 전까지 텔레포트를 당한 줄도 몰랐다.
근데 또 수도로 가야 한다고? 가서 또 이 짓을 시키면? 영원히 똥개 훈련과 비슷한 이 짓을 해야 한다니……!! 내 아내들은 내가 사라진 것에 대해 눈치나 챘을까? 아니겠지. 정신지배를 받고 있다는 핑계로 놈의 자지를 마음껏 빨아대는 걸레년들이다. 더 이상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물자를 다 모은 이루이는 생각 외로 많은 걸 모았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해가 간다. 살아남기 위한 물자(物資)라고 하지만 본질은 죽은 사람들의 물건이니까. 그런 것에 기대면서까지 살아남으려는 우리의 모습은 고결해 보일까, 추해 보일까?
물자를 다 모았지만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이루이는 죽은 시체들을 최대한 많이 확인하며 혹시나 놓친 것은 없는지 다른 곳을 둘러보고 싶어 했다. 그게 엄마를 찾는 딸의 심정이라는 걸 금방 파악한 나는 무기를 든 채 마을 입구 주변으로 함께 향했다.
입구 주변에서 자리를 잡고 미친 듯이 총을 쐈던 덕분일까? 대부분의 괴물들은 여전히 입구로 가는 도중 고꾸라진 채 죽어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기에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이루이를 본다. 이루이는 내 마음 씀씀이가 고마운 건지 빨리 찾겠다고 했지만……결코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발견이 되면 죽었다는 뜻. 그건 ‘나한테 덤비다 죽었다’라는 뜻이 된다. 본의 아니게 그녀의 어머니를 살해하게 됐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반대로 발견을 할 수 없다면? 지금도 괴물이 된 채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뜻이니 그건 그거대로 지랄 같았다.
가능하면 내일 이곳을 출발할 생각이지만 그 전에 남은 괴물들이 총 공격을 가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이유나 상황이 어찌 됐든 간에 ‘열세(劣勢)에 처한 생존자’라는 우리의 포지션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 앗!! 어, 엄마……!”
썩을. 생각하자마자 이거냐? 괴물로 변했을 뿐만 아니라 얼굴이나 몸이 피칠갑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이는 쉽게 어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괴물이 됐기에 그 미모가 조금 빛바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만……이루이는 그 시체에 조심성 없이 달려갔다. 다행스럽게도 갑자기 일어나 이루이한테 덤벼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엄, 마……흐, 흐윽……!! 흐아아앙……!!”
조금씩 흘리던 눈물과 달리 단숨에 마음의 응어리와 슬픔을 풀어낸 이루이는 목 놓아 울었다. 기껏 발견한 엄마가 괴물이 된 것도 모자라 시체로 발견되다니. 사실상 두 번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 슬픔은 더욱 더 배가(倍加)됐다.
본의 아니게 그녀의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찔렀지만……난 ‘어쩔 수가 없었다’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난 신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을 죽여야만 했고, 그들을 원래대로 되돌릴 능력도 없었다. 애초에 이런 일을 시작한 건 카인이다. 내 탓이 아니라고.
왜 내가 남이 저지른 끔찍한 짓의 책임만을 부여받아야 하는 걸까? 그건 옳지 않았다. 싫기도 했고. 이루이 또한 이런 사태가 발생한 이유가 카인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의 진정한 정체는 알 길이 없었다.
10분 정도를 울던 이루이는 가냘픈 손으로 어머니의 시체를 들려고 했다. 그치만 들 수가 없었다. 힘이 없어서 그런 건지 괴물이 되면서 체중이 늘어난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괴물을 만지긴 싫었지만 그녀를 돕고 싶었기에 나도 그녀를 도와 시체를 들었다만……엄청 무거웠다.
본래라면 한 사람이라도 무덤을 만들어줘야 했지만 이런 상태에서는 무덤조차 만들 수가 없었다. 옮기는 것도 힘든데 주변의 건물 파편이나 조각으로 무덤을 만들 수는 없었다. 흙이 있는 양지 바른 곳에 묻어야지, 괴물 시체가 즐비한 곳에 무덤을 만든다고? 꿈자리 사나워지고 싶어 환장했냐?
이루이는 넋을 놓은 채 어머니의 시체를 바라볼 뿐이었다. 소중한 어머니를 ‘옮기는 것’조차 할 수 없다니. 그녀가 느끼는 무능함과 슬픔은 나 또한 겪어본 적이 있었다. 뼈저릴 정도로 말이다.
무덤을 만들 수는 없지만 주변의 깨끗한 곳으로 옮겨 알아보기 쉽게 만들자는 내 의견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와 여자가 괴물을 든 채 끙끙대는 모습은 틀림없이 꼴불견으로 보였겠지만……어차피 이 주변에 살아남은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아이템 인벤토리에 있던 침구류 중 하나를 꺼낸 나는 그 위에 이루이의 어머니를 내려놓았다. 고인(故人)을 감싸듯이 조심스럽게 감싼 후 깨끗한 땅에 두니 ‘그나마 어떻게든 했다’라는 달성감이 들었다.
무덤을 만든 것도 아니고 깨끗한 장례식을 치룬 것도 아니었지만……이루이의 어머니. 괴물이 되어 이런 죽음을 맞이한 그녀를 저런 시체의 산에 둔 채 쉬러 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뒷맛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를 죽인 꼴이 됐으니 거기에 대해 조금이나마 속죄(贖罪)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깨끗한 침구류로 감싸 그리 지저분하지 않은 곳에 두자 이루이는 정말 고맙다며 감사를 표했다. 괜찮다고 대답은 했다만……솔직히 말해. 미칠 것만 같았다. 살아남기 위해 죽인 괴물이 이루이의 어머니였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
카인 이 개새끼는 다른 건 몰라도 사람 엿 먹이는 건 정말 최고로 잘 하는구나 하는 감탄이 들었다. 일은 그놈이 저지르지만 뒤처리, 수습, 책임 등 온갖 것들은 내가 떠맡아야만 했으니까! 살의(殺意)는 치솟아 오르지만……현실은 죽은 괴물이 살아나지 않을까 덜덜 떨어야만 했다. 정말 비참하다…….
5시 정도가 되어 집에 돌아온 우리는 가져온 물자로 저녁을 먹었다. 맛있는 식사는 아니었지만 죽은 어머니를 제대로 돌봐주는 일조차 할 수 없었기에 입맛은 더욱 더 없었다. 그저 먹어야 하니까 먹는 것일 뿐.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저녁을 다 먹었지만 자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상태였다. 하아……망할. 원래라면 이루이를 안을 생각이었지만 이런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녀를 손대는 것도 그랬다만……애초에 저렇게 순수한 아이를 강제로 범하는 것도 좀 그랬으니까.
남 좋은 일은 다 해주고 혼자 한숨이나 푹푹 쉬어야 하는 신세라니……. 그런데도 나오는 건 한숨밖에 없었기에 더욱 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루이는 피곤했던지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비록 초췌한 모습이긴 했지만……너무나 오랜만에 여자와 단 둘인 상황이었기에 하반신은 은근히 그녀를 범하는 것에 대해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걸 빌미로 섹스를 요구할 수도 없었다. 그녀를 구한 대신 그녀의 어머니를 죽여 버렸으니까.
막말로……섹스를 할 수 없는 것도 모자라 전투에 참여조차 할 수 없는 짐 덩어리가 하나 늘어난 것뿐이었다. 놓고 갈 수도 없지만 데려가면 틀림없이 개고생을 하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금까지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나약한 마음이 입으로 나와 버렸다.
“……이대로 도망칠까?”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연인들이나 할 법한 말이었지만……나는 아니었다. 나는 아내도, 사랑도. 모든 걸 다 빼앗겨버렸다. 괴물들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목숨 걸고 해야 하는 내가 카인과 한 판 뜬다고? 이 세상의 신과 싸워야 한다고? 퍽이나…….
도망치면 안 된다고? 그런 당연한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한테 남은 선택지는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카인과 싸우는 것. 지금까지 싸워도 봤고 당해도 봤기에 승산은 제로나 마찬가지였다.
승산 제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너무나 적은 싸움에 굳이 스스로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젠 모든 것이 다 싫증났다. 너무나 힘들고 슬픈 현실에 오래 노출되어서 그런 건지 도망치고 싶다는 선택지가 점점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로 도망칠 거냐고? 어디든 간에! 적어도 더 이상 카인과 접점을 가지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누군가와 함께……주변에 여자가 있다면 강간이라도 좋으니 마음껏 범하며 살고 싶었다. 그 여자의 개인사정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내 좆물과 자지에 황홀해하는 누군가. 내 사랑을 갈구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강간(强姦)이라는 범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내 모습과 정신은 이미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었지만……그럼 좀 어때!? 지금까지 목숨 걸고 노력해서 얻은 아내들은 카인한테 빼앗긴지 오래다. 노력의 결과가 이 따위인데 나보고 다시 노력해서 아내들을 되찾으라고? 승산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라고? 제발…….
모든 것이 다 짜증났다. 생각하는 것도, 절망하는 것도 지쳤다. 그녀를 강제로 범하고 싶다는 생각이 미친 듯이 들었지만……겨우 발견한 그녀가 나한테서 멀어지는 것은 싫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어서 그런 걸까? 만난지 하루도 안 된 이루이가 나한테서 멀어지는 걸 싫다고 느끼다니……얼마나 멘탈이 두부인 거냐, 나는?
하나뿐이긴 했지만 커다란 침대였기에 나는 이루이의 옆에 누웠다. 빌어먹을……자지가 발딱 선 채 움찔거릴 때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이루이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고, 그럴 때마다 엉덩이나 허벅지가 눈에 들어와 정말 죽을 맛이었다.
딸이라도 치고 잘까 싶었지만……자위를 하면 무조건 느껴야만 하는 그 허무함. 흔히 말하는 ‘현자 타임’을 느끼는 건 더 비참했기에 그냥 잠을 청하기로 했다. 비참한 건 현재만으로 충분하다. 이 이상 비참해지는 건 사양이다.
“……이루이야.”
혼잣말로 이루이를 불렀다. 맑은 거울색의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풀어헤쳐져 있었고 15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 몸은 끌어안으면 부서질 것만 같았기에 그저 부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미안하다.”
사과를 들어야 하는 본인은 자고 있는데 그 사이에 사과를 하다니. 사과할 마음은 있니, 세린아? 이딴 쫄보짓이나 하니 카인이 너를 좆으로 보는 거 아닐까? 물론 이런 짓 안 해도 카인은 너를 좆으로 보고 물로 볼 테니 아무런 상관도, 의미도 없겠지만!
내 내면의 목소리는 나를 마음껏 디스하며 거침없는 비난과 비판을 퍼부었다.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마음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한들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 사실상 모든 것이 다 끝난 거나 다름없는데. 모든 걸 빼앗겨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있을 뿐인데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에 대한 일은……유감이야. 정말 미안해. 나도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었어.”
변명, 핑계. 자기가 저지른 짓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순수한 이루이한테 용서받고 싶어서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혼잣말이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어차피 섹스도 못 하고 잠을 자고 있으니 마음에 숨겨 놓았던 말이나 하자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니가 이 마을에 살아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 그저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도망치다보니 너를 만나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나는……절대 강한 놈도, 잘난 놈도 아냐. 그냥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 대는 병신이야…….”
그게 내 진실된 마음이자 확실한 평가였다. 내 사정을 전혀 모르는 아이한테 모든 걸 말한다고 생각하니 묘한 배덕감(背德感)과 수치심(羞恥心)이 들었다. 살짝 흥분되는 걸 느끼며 ‘나도 참 막장 새끼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만……어차피 막장이 된 거, 고해성사나 하자 싶었다.
“다 빼앗겼어. 왕의 자리도, 아내도. 사랑하고 아끼던 모든 것들. 전부 다. 몸뚱아리랑 옷, 무기 외에는 믿을 사람도, 갈 곳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 막말로 거지가 된 거지. 순식간에 용병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한 거지. 하하, 믿겨져? 나도 안 믿어지는데……현실이 이렇더라.”
눈물이 나온다. 이루이 앞에서는 감추고 있었지만 내 신세를 한탄하기 시작하니 눈물이 멈추지가 않았다. 대체 누가 누구 걱정을 한단 말인가? 모든 걸 잃어버린 내가 터전과 가족밖에 잃지 않은 이루이를 걱정한다고? 배려한다고? 뇌는 옵션으로 달았냐, 머저리 새끼야? 지금 다른 사람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어머니를 그, 뭐라 해야 하지? 담요로 감싸서 다른 곳에 놔뒀을 때……너무 미안했어. 넌 나한테 고맙다고 했지만……킥. 솔직히 말해서, 죽고 싶었어. 살아남기 위해 니 어머니를 죽여 놓고 이제 와서 시체 꺼내는 걸 돕다니. 그러면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들으니까……비참하더라. 내 신세도, 마음도. 모조리 비참해지는 거 있지?”
선의(善意)가 항상 좋은 결과만을 내는 것은 아니다. 어설픈 선의는 다른 사람한테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한테 주는 보조금이나 반찬 등은 보통 사람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해줘야 하는 일일지 모르겠지만,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가증스러운 값싼 동정(同情)으로 보일 테니까…….
“미안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라지만 너희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계속 생각하던 건데……니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면 난 거기에 대해 억울하면서도 슬프다고밖에 말을 못 할 거 같아. 나도 목숨을 건져야 했으니까 말이지. 날 향해 달려오는 사람들이 누구누구의 엄마나 동생이라는 걸 깨달을 수도 없지만……깨닫는다고 해서 순순히 죽어줄 수는 없었거든. 이것만큼은 너도 이해할 거라 믿어.”
카미유에서 처음으로 괴물을 쐈을 때……나는 내가 살인을 했다고 생각했다. 이미 죽은 사람이 괴물이 된 거니까 엄밀히 말해 살인(殺人)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지만……사람마다 느낌이나 생각이 다르듯이 내가 느끼는 ‘살인의 범주’ 또한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그치만 그렇다고 목숨을 내놓을 수도 없었다. 카인을 죽일 수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도망을 칠 수 있는지 어떤지에 대한 장담도 못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장담을 할 수 없다 = 죽어야 한다’라는 것은 성립할 수가 없었다.
“난 너를 수도로 데려갈 생각이야. 널 만나서 같이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눈 후부터 생각한 거지만……어머니를 보니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너를 안 데리고 가면 분명히 너희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 날 죽이려 드시겠지.”
착각인가? 이루이가 살짝 움찔한 거 같은데……설마 이야기를 듣고 있을 리는 없겠지. 그녀의 호흡은 규칙적이었으며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몸이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자고 있는 사람 상대로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좀 그거였다만……덕분에 마음은 좀 편안해진 느낌이었다.
“여기에서도 살아남느라 고생 많았겠지만……수도로 가는 길은 아마 더 힘들 거라 생각해. 청록색 촉수괴물이 엄청 많거든. 예전에는 어떻게든 싸우기도 하고 도망도 쳐가며 수도에 도착했었지만, 이번에는 거의 도망만 치며 가야 할 거 같아. 너를 지키면서 싸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거든.”
누가 보면 이루이한테 너무 부담을 주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럴 마음은 별로 없었다. 배가 능력을 쓰던 안즈마저도 부담스러워 했던 놈들이다. 일반 경비대원들은 쉽사리 죽일 수 있고 수많은 야만족들을 멸망시킨 놈들을 상대로 이루이를 지키며 싸우라고? 미쳤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카미유도. 이 루인이라는 마을도. 거기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물이 된 상태였거든. 우리 마을에 있는 사람들도 많이 죽었어. 여기나 카미유에 비하면 그나마 양반이지만……죽은 사람들은 절대 돌아올 수 없으니까.”
사람의 목숨은 존엄(尊嚴)한 것이다. 한 번 죽으면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되돌아올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수없이 이룩했다 치더라도. 사람의 목숨은 절대 돌아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게 바로 모든 세상에 적용되는 법칙 중 하나였다.
빛과 어둠이 있듯이 동전에는 앞면과 뒷면이 있으며 게임에는 승리와 패배가 존재한다. 너무나 많은 것들에 대비되는 것들이 있듯이 생과 사는 오래 전부터 인류를 속박해 온 빛과 어둠 중 하나였다.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다는 명언이 나왔듯이 다른 건 몰라도 죽음만큼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죽음’만큼은 피할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이걸 피할 수 있는 건 아마 신 정도가 아닐까? 카인처럼 말이지.
그 카인이 왜 나를 불러내 이런 짓까지 시킨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문이다만……더 이상 생각해봤자 무의미한 일이었다. 놈과 싸우면 내 사망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내가 답도 안 나오는 질문으로 머리를 괴롭게 해야 하냐?
설령 이긴다 치더라도 해결되는 건 없었다. 보고 싶었던 안즈의 얼굴마저 지금은 흐릿하게 기억이 난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 더 이상 소중한 것을 만들고 싶지도, 잃고 싶지도 않았다. 점점 더 겁쟁이가 되어 가는 나 자신을 보니 눈물이 또 앞을 가렸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것도 슬프지만……빼앗기는 것도 절대 기분 좋은 일은 아냐. 함께 오랜 시간을 지내 온 소중한 사람들을 누군가한테 빼앗기는 그 슬픔과 아픔은……절대. 절대 만만한 게 아냐. 살아있다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 시선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하기만 한다면……너무 비참한 기분이 들거든.”
비참했다. 어떤 의미로는 죽음 이상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목숨까지 걸며 행복하게 만든 아내들이 나를 버린 채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다니. 외간 남자의 자지를 빨아대며 황홀해하는 표정을 짓는 걸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왜 내가 이런 비참한 처지가 된 채 신세 한탄이나 해야 하는지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일구어 놓은 모든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이런 짓을 저지르게 되다니. 이루이의 어머니를 죽이게 되다니……. 예전 삶에서는 겪어본 적도 없는 원망까지 받게 됐으니 기구하다 못해 등신 같은 팔자였다. 이런 삶을 버리지도 못한 채 끌어안은 나를 보니 웃음밖에 안 나왔다.
울면서 웃으니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혹시나 이루이가 일어났다간 왜 울면서 웃냐고 묻겠지.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내 인생이 기구하고 병신 같아서? 희망이 없는 좆망 인생이라서? 죄책감 때문에 힘든데 더 힘든 미래가 펼쳐져서? 뭘 말하든 간에 정답이긴 했다.
이건 너무한 거 아닐까? 유연한 사고방식을 위해 주관식의 답은 하나에만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치만 내가 말했던 것들은 정말 가관이었다. 전부 다 엿 먹고, 물 먹고, 소중한 걸 빼앗기며 도망친 인생에서 파생된 결과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스팸 메일처럼 듬뿍 얹어 준 것들 덕분에 이 모양 요 꼬라지가 됐다. 씨발 개새끼…….
“……미안하다.”
몇 번을 해도 모자랄 사과를 하며 난 눈을 감았다. 여행을 위해서는 빨리 자야 했다. 사과를 했지만 여전히 그녀한테는 직접 말한 것이 아니었기에 찜찜했다만……마음에 숨겨둔 것들을 토해낸 덕분일까? 조금은 기분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 작품 후기 ============================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군대의 가장 좆같은 점 중 하나는 집에 가고 싶어도 못 간다는 것입니다. 군 상근은 출퇴근하며 부대에 오는데 현역은 뭐가 문제라서 먼 타향에서 근무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더군요. 군 상근과 현역의 대우가 너무 다른 것도 저를 분노케 만든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세상이 살기 힘들다 보니 늘 평등주의를 적용시킬 수만은 없습니다만, 현역은 존나 빡세게. 하지만 군 상근은 존나 헐렁하게 관리하는 걸 보니 절로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왜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 아니라 간부'라고 하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물론 군 상근이나 공익근무를 하시는 분들도 사정은 있습니다. 집안사정이나 개인사정으로 인해 출퇴근 근무를 할 수밖에 없죠. 오해의 여지가 있어 말씀드리지만, 저는 개인사정이나 집안사정을 뭐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 사정은 개인에 의해 생긴 게 아닌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간부나 통제에 관해서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지내는 현역은 개처럼 굴리면서 출퇴근하는……아, 아니네요. 솔직히 말할게요. 군 상근 부모들이 지역에서 힘 있는 사람이고 깡패나 불량패 출신도 많아 문제 일으키기 싫어서 존나 대접해줬었죠.
어디 서러워서 현역 해먹겠습니까? 진짜 뒤늦게 적는 겁니다만, 제발 이딴 짓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뭡니까? 들어올 때는 대한의 자식이라 하더니 현역 가서는 차별받고 노예취급 받고. 그러다 다치면 당연히 이상한 돌팔이 병원 가서 고치고. 하는 짓이나 사고방식이 지긋지긋합니다.
여러분, 가능하다면 군대(현역)는 피하세요.
그게 상책입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zxc54님, 정말 죄송합니다만……아마 다른 여성 캐릭터 시점에서 글을 적는 건 어려울 거 같네요. 거의 막바지로 들어가는 무렵이고 세린 시점에서 글을 적는 게 가장 스피디하고 편합니다. 무엇보다, 사건의 주인공이자 피해자가 세린이다 보니 감정이입도 하기 쉽구요.
여성이 아니라 여성 시점을 적기 힘든 것도 있습니다만, 최대한 빨리 적어 후속작을 생각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이 소설이 끝나면 다음 작품도 연재해야 합니다만, 아직 명확한 기준이나 틀을 잡지 못해 적기가 어렵더군요.
처음으로 적는 장편 소설입니다만, 이런 걸 여러 번 반복해야 인지도도 올라가고 필력도 상승할 테니 말입니다. 시점 변경은 상당히 어려울 거라 생각합니다. 만족스런 대답을 드리지 못해 다시금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상입니다. 제가 후기에서 몇 번이고 적었습니다만, 한국 군대는 진짜 썩었어요. 이번 정부를 통해 똥별들 걸러내고 세금이나 국방비 불법 사용에 관한 걸 확실히 파헤치지 않으면 영원히 이 짓을 할 겁니다.
군대에 다녀온 걸 긍지로 여길 생각은 없습니다만, 하다 못해 '평등한 취급을 받았다'라고 생각케 만들 정도로는 좀 나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요.
군대. 더 나아가 세상이 보다 나은 형태로 변하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