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2 「19-1 : 종언의 카운트다운 (12)」 =========================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게임에 대해 아는가? 예전에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라 불리던 끝 무렵 때 나왔던 격투 게임이다. ‘스트리트 파이터2’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1990년대를 기점으로 다양한 대전격투 게임이 나오기 시작했다.
스트리트 파이터 외에도 KOF, 철권 등의 쟁쟁한 격투 게임이 나오곤 했지만 가장 오래 됐으면서 재미있는 시리즈를 꼽으라면 역시 스트리트 파이터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현재도 돌아가고 있을 정도로 수명이 긴 것은 그만큼 게임의 파고들 요소, 재미 등이 많다는 뜻이니까.
스트리트 파이터를 개발한 캡콤(CAPCOM)은 그것 외에도 다양한 명작 게임을 만들어냈다. 록맨, 바이오 하자드(레지던트 이블) 시리즈 등……. 그러나 그것도 2000년대 초반까지였다.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는 신작 게임의 완성도는 별로였으며 흥행 또한 그리 좋지 않았다.
자기들을 먹여 살려준 록맨이나 바이오 하자드 시리즈의 신작 개발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 것부터 시작해 예전의 그래픽 돌려쓰기, 원작과 팬을 무시한 졸작 만들기, 유료 컨텐츠 구매를 강요하는 것 등. 그들의 치졸하고 졸렬한 태도에 많은 게이머들은 등을 돌렸다.
바이오 하자드 시리즈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다양한 호러 게임이 나오는데 스토리 진전은 없으면서 시간이나 질질 끄는 게임에 진심으로 열광하는 사람은 적었다. 하물며 바이오 하자드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미카미 신지는 캡콤의 제멋대로식 운영 및 간섭에 난색을 표했으며 결국 퇴사를 하고 말았다.
캡콤이라는 회사의 이미지는 최근에 들어 매우 떨어졌다만……이 이야기는 게임 제작사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이 부분은 넘어가자. 말하고 싶은 것은 ‘바이오 하자드’ 시리즈였다. 좀비가 나타나 이를 제거하며 어딘가에서 탈출한다는 식의 아이디어는 이곳에서 크게 정립(定立)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좀비한테 물리거나 상처를 입으면 감염된다……라는 건 새벽의 저주나 좀비 시리즈에서도 나왔지만, 게임으로 자세하게 표현되어 사람들한테 큰 충격을 준 것은 바이오 하자드가 대표적일 것이다. 나 또한 그랬듯이 말이다. 바이오 하자드 1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모두가 손꼽는 ‘그 장면’일 것이다.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이끌고 소리가 나는 어딘가로 향하면 거기에는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피를 흘린 채 누워있고 한 명은 누운 사람을 향해 무언가 씹어대는 소리를 낸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씹어대는 그 사람이 뒤를 도는데……얼굴색이 창백하다 못해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움직이는 시체’. 그게 바로 게임에서 최초로 목격하게 되는 좀비였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장면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시체인 좀비의 등장까지. 마치 영화 같은 표현을 보여주며 플레이어를 겁먹게 하는 이 장면은 너나 할 것 없이 가장 인상적인 연출로 떠올랐으며, 이는 캡콤 퇴사 후 미카미 신지가 만든 더 이블 위딘(The Evil within)에서도 오마쥬된다.
요즘 들어서는 총 맞고 칼 맞고 픽픽 죽어나가는 좀비다만, 예전까지만 해도 좀비는 매우 공포스러운 존재 중 하나였다. 죽은 사람을 먹다가 뒤를 돌아보는 연출 덕분에 ‘산 사람 죽은 사람 안 가리고 먹으려는 시체’라는 공포감을 줄 수 있었지.
판타지 게임에서도 좀비나 구울 같은 언데드(Undead)계열의 몬스터가 나오긴 하지만, 실제 세상에는 좀비가 존재하지 않기에 서양이나 동양, 현대나 판타지의 좀비는 꽤 다른 이미지로 묘사된다.
하렘 어드벤처의 세상에 와서 지금까지 좀비를 본 적은 없었다만 ‘카미유’라는 마을에 소환된 후 본의 아니게 그들과 전투를 벌이게 됐다. 사람이 죽은 후 배를 찢으며 나오는 촉수는 지금도 뇌리에 생생했기에 살짝 구역질이 나오려 한다.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좀비 같은 괴물의 탄생을 똑똑히 목격하게 됐다.
사람이 죽어서 괴물이 됐을 뿐만 아니라 예전의 지능이나 경험, 추억 등을 활용해 살아 있는 사람(주로 나나 이루이)을 공격하는 그 모습은 어딜 보더라도 좀비였다. 나는 ‘붉은색 촉수괴물’이라 부르지만 ‘좀비 촉수괴물’이라 불러도 큰 손색은 없었다.
움직임이 느리고, 입에서 산성액을 뿌려대고. 몸 일부분이 찢겼는데도 다가오는 그 모습을 보니 ‘좀비’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 그렇다고 좀비가 ‘조옴~비~’라며 다가온다는 말은 아니고. 걔들이나 붉은색 촉수괴물이나 할 수 있는 말은 신음밖에 없었다.
괴물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봤을 뿐만 아니라 눈앞에서 마을 사람이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 거기에 ‘죽었을 터인 사람’이 괴물로 변하는 장면까지 본 이루이는 진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괴물이 된 사람들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죽은 후에 저런 끔찍한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진실을 말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외에도 몇 명 보긴 했지만 모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고, 맨 처음 봤던 사람처럼 다수(多數)의 습격을 받아 살해됐다. 죽은 그녀들의 배가 찢어지며 촉수가 나왔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걸 듣자 슬픔이 밴 한숨이 푹푹 나온다.
귀소본능(歸巢本能)이라고 했지만……그건 너무 낭만적으로 표현한 거였다.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이루이의 엄마와 마을 사람들. 그런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잠을 청한 다음날, 집을 나오자마자 만난 엄마(정확히는 ‘이루이의 엄마였던 괴물’이라 표현해야겠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 괴물한테 살해당한 후 괴물로 변하는 장면을 통해 ‘괴물이 탄생하는 이유’까지 모조리 보게 된 이루이를 보니 참으로 내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생각 외에 든 것은……하아. 다들 알 것이다.
시발, 전부 다 카인이 꾸민 짓이다! 다 그 새끼 짓이라고! 농간(弄奸)을 부릴 거면 나한테 부리는 걸로 충분하지, 대체 왜 아무런 죄 없는 아이한테! 아무런 관계도 없는 마을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어버렸단 말인가!?
문을 열자마자 괴물로 변해버린 엄마를 만나게 한 것도! 생존자가 살해당한 후 괴물이 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도! 전부 다 그 놈 짓이란 말이다!
뭐? 자고 일어나자마자 만난 괴물이 엄마였고 도망치다보니 괴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게 됐다고? 이게 무슨 게임이냐? 영화냐? 존나 전개가 딱딱 맞잖아! 이걸 보면 이미 견적 나오지 않았냐?
견적이 나오는 걸 볼 필요도 없었지만 그 전에 일어난 일만 하더라도 이미 정답은 나온 상태였다. 카인이 분신술을 써서 마을 사람들을 범했다는 시점에서 이미 아웃(Out)이지 않은가?
카미유 때도 그랬고, 이 ‘루인’이라는 마을도 그렇고! 아내들을 내버려둔 채 어딘가로 사라지곤 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으며, 모든 이야기는 하나로 귀결(歸結)됐다.
【전부 카인 탓이다.】
전부 그 새끼 탓이었다. 아내를 빼앗긴 것들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조차 없었다. 내가 일어나자마자 카미유로 소환된 것도. 마을 사람들을 좀비 같은 괴물로 만든 것도. 이루이가 살던 터전, 그녀와 함께 지내던 사람들을 저 꼬라지로 만든 것도. 모조리, 전부 다! 모두 다 그 빌어처먹을 놈의 짓이었다!
한숨을 크게 쉬며 고개를 젓던 도중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를 다 들었지만 아귀가 맞지 않았다. 그럼 성벽은? 성벽은 왜 그렇게 녹아있던 거지? 청록색 촉수괴물이 쳐들어오지 않았냐고 물으니 기가 막힌 대답이 돌아왔다.
청록색 촉수괴물이 성벽을 녹이며 들어오긴 했지만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마을 사람들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괴물들끼리 싸워봤자 이루이나 나 같은 생존자한테 유리할 테니 괴물끼리 싸우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밖과 안. 양쪽을 입에서 나오는 빔으로 녹이고 부순 그들은 이미 붉은색 촉수괴물들이 부순 건물을 한 번 더 부수기 시작했다. 뼈대가 앙상하게 남은 건물의 존재마저 용서하지 않겠다는 양 철저하게 부수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파괴에 미친 괴물들이었다.
이미 부서진 마을을 철저하게 파괴한 그들은 마치 마법을 쓴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죽여야 하는 사람이 없으니 마을의 파괴라도 도와주겠다는 것처럼 쑥대밭을 만든 그들이 사라지는 걸 본 이루이는 ‘괴물들도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됐다.
입에서 나오는 고열의 빛에 대해서도 들은 적이 없었지만 고위마법인 ‘텔레포트’를 쓴 것처럼 사라지는 괴물을 보니 도무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외곽에 있는 집은 그나마 무사했지만 그곳까지 갈 용기는 없었다. 건물이 대부분 없어져서 허허벌판이 된 마을을 돌아다니다간 바로 목격될 것이 뻔했으니까…….
부서진 건물 파편에 묻혀 있던 식량 등을 조금씩 모으며 괴물이 들어오기 어려운 파편 사이에 몸을 숨긴 이루이는 최소한의 식량과 수분으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만약 그걸 다 먹었다면 나 없이 집으로 올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나마 내가 도와준 게 다행이었군…….
필사적으로 살아남은 이루이를 생각하니 다행이긴 했지만……이상했다. 이건 아귀가 맞지 않았다. 난 잠시 생각을 좀 한다고 말한 후 과거를 떠올렸다. 비록 아내들을 빼앗기긴 했지만 다양한 정보를 들었던 나한테 있어 가장 이질적이었던 것은 청록색 촉수괴물의 등장 시기와 피해 보고였다.
청록색 촉수 괴물 때문에 100명 이상이 죽었다는 내용을 들었을 때의 내용을 떠올리자. 외곽 지역에는 서큐버스 같은, 전투력이 약한 괴물밖에 없다고 들었었지. 이루이의 말을 들으니 이 부근에는 초록색 촉수괴물이 있었던 것 같지만……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서큐버스가 여기 없다면 카미유 주변에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성벽이 그리 높지 않고 경비대의 전투력 또한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런 곳에 청록색 촉수괴물이 여러 마리 나타난 것 때문에 루인은 100명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만이 남은 상태라고 했었다.
프레그넌트와 야만족의 숲을 제외한 지역에 동시다발적(同時多發的)으로 나타난 청록색 촉수괴물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했었지만 지금 이루이한테서 들은 이야기는 너무나 달랐다. 뭐야 이게? 청록색 촉수괴물은 그저 마을을 부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소리잖아?
혹시나 청록색 촉수괴물이 그 이전에 나타난 적이 있냐고 물으니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아주 잠깐 본 것뿐이지만 입에서 나오는 그 고열의 빛. 내가 ‘빔 공격’이라 부르는 그 힘은 순식간에 성벽을 녹여버릴 정도로 강했다. 그런 무서운 괴물이 있었다면 진작에 마을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을 거라 했다.
이루이는 그런 괴물이 존재했다는 것조차 몰랐다고 했다. 삶의 터전과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이루이가 나한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금 예전에 했던 생각을 꺼내야만 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대체 그 새끼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건데?
내가 아내들한테 들었던 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컸다. 붉은색 촉수괴물의 정체는 카미유로 소환된 이후 처음 깨달았다. 야만족의 숲에서 수도까지 약 2주가 걸렸다. 왕궁에서도 1~2주 정도의 시간을 보냈고 그 사이에 청록색 촉수괴물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 여러 마을을 습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근데 이게 뭐야? 마을 사람들은 청록색 촉수괴물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걔들은 쩌리로 나온 것뿐이었다! 카인에 의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됐는데 내가 들은 이야기에는 카인에 대한 언급은 단 하나도!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을 내부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은 사실상 카인에 의해 ‘사망 → 괴물로 부활’이라는 수순을 거쳤다고 봐야 타당했다. 청록색 촉수괴물한테는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능력 따위는 없었고 설령 그런 게 있다고 한들 이루이한테 들은 바에 의하자면 그들은 마을을 부수고 갔을 뿐. 괴물을 만드는 일에는 아예 참여조차 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뭐지? 내가 카미유에 소환되기 전날 밤에 아내들과 나누었던 대화는……그 대화는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건가? 그렇지만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진심이 담긴 대화였었다.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거짓말로 말할 가치가 있을까? 아니, 그렇진 않았다.
진심이 담긴 대화를 나누었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상세히 이야기해줬다. 그 덕분에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도출해낼 수 있는 답은 지리멸렬(支離滅裂)한 가정밖에 없었다.
【그들은 기억과 지식마저 조작 당했다.】
그 답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청록색 촉수괴물의 정체는커녕 존재조차 몰랐던 이루이. 평화로웠던 마을에 찾아와 모두한테 정액을 주입한 카인. 아내들을 놔두고 사라지곤 했다는 카인의 행동과 이루이가 겪은 일. 그 결과가 이 마을의 참상(慘狀)이라면 아내들이 말했던 것은 조작된 기억이나 정보라고밖에 해명할 길이 없었다.
카인에 의해 육체나 정신이 지배를 받는데 지식이나 기억 조작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자기가 하는 일을 가르쳐줬을 리도 없었다. 그는 내 아내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전혀 믿지 않았다. 자기의 꼭두각시, 피조물이나 다름없는 존재를 믿을 정도로 카인이 착하다면 이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내들과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청록색 촉수괴물이 여러 지역에 동시에 출몰했다는 이야기 외에도 밤중에 어딘가로 나간다는 이야기가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내들과의 재회, 청록색 촉수괴물의 잦은 출몰에 정신이 팔려 그의 행적(行蹟)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신출귀몰하게 나타나는 것뿐만 아니라 용의주도하게 일을 꾸미는 그를 어떻게 막을 방법도, 쓰러뜨릴 수단도 없었으니까. 무적이나 다름없는 이 세상의 신(神)을 상대하는 것도 노답(No答 - 답이 없다는 뜻)이었지만 그놈이 온갖 활개를 치며 모두를 희생시키는 짓 또한 노답이긴 했다.
처음에는 목숨 부지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지금 생각해보면 카미유로 나를 소환시킨 타이밍도 기가 막혔다. 내가 아내들과 만나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이야기, 겪었던 일을 모두 다 듣고 있는 동안 카인은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사람들까지 괴물로 만든 상태였다.
사형 전에 ‘최후의 만찬’을 주듯이 괴물이 된 주민밖에 존재하지 않는 마을에 나를 처넣기 전,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던 아내들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 배려 같지 않은 배려에는 감사를 해야 하나 싶었다. 덕분에 아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카미유와 루인의 처참한 상태를 생각하면 절대 감사를 표할 수는 없었다. 마을 사람의 반수(半數) 이상이 카인에 의해 죽게 되다니……! 대체 그 새끼는 이 세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자기가 만든 피조물로 가득 찬 장난감 세상? 대체 너란 놈은……다른 사람의 의식을 지배하면서까지 이 짓을 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는 건데?
떠오른 의문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초조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이루이를 보니 또 하나의 문제 또한 나를 괴롭히려는 듯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왜 이루이는 의식을 지배당하지 않았을까?】
모든 걸 빼앗긴 것도 모자라 죽음의 마을에 던져진 나. 모두가 죽어 나갈 때 간신히 살아남아 내가 오기 전까지 버티던 이루이. 나와 그녀의 만남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운명적인 만남이었겠지만, 카인과 이 세상의 실체를 아는 나한테는 작위적인 조작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카인의 물건에 자신의 몸을 비벼대며 열락 띤 섹스를 나누고 있을 때 왜 이루이만 그걸 거부했을까? 이루이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그녀가 카인의 정신지배를 받지 않을 정도로 강한 인물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내가 괴물들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당장에 괴물들한테 습격당해 죽었을 이루이다. 그녀가 ‘사실은 이 세상에서 카인한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라는 일은 절대 없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잖냐. 그런 생각을 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응, 이건 아냐. 진짜 이건 아니라고.
카인이 만약 내 생각을 읽고 있다면 걔도 날 비웃고 있겠지. 지금 건 참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이루이가 카인한테 대항할 수 있다니. 대체 나란 놈은 얼마나 ‘내 입맛에 딱 맞는 현실’만 찾으려 하는 인간일까?
내가 원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그런 편의주의적(便宜主義的)인 현실이 있었다면 원래 현실 세상에서의 내 인생이 그렇게 씹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토록 비관적으로 내 인생을 저주했을 리도 없었을 거고.
아무리 무언가를 바란다고 한들 그걸 이루는 것은 사람의 힘과 행동이었다. 운이나 우연, 기적 같은 요소가 아주 가끔 있곤 했지만……내 인생에서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힘을 합쳐 도와주는 이벤트 따위는 일어난 적도 없었다.
이루이가 정신지배를 당하지 않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어찌 됐든 간에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그녀를 이곳에 놔둔 채 갈 수는 없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전투를 치르긴 했지만 청록색 촉수괴물이 다시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청록색 촉수괴물이 없다 치더라도 아직 마을 외곽이나 샛길 같은 곳에 괴물이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만……. 솔직히 말해서, 괴물의 유무(有無) 이전에 매우 중요한 문제가 존재했다. 그녀를 이곳에 남긴 채 갈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을 건데?】
봐라. 이 문제 하나로 이미 끝났잖냐. 답이 없었다. 카인도 답이 없었다만 이 문제에 대한 답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걸레가 되다 못해 씹창이 되어버린 이 마을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나한테 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리적 이점과 코스튬의 힘, 무기의 능력까지 최대한 살려 싸운 나조차도 이곳에서 그냥 필요한 물자 얻고 잠시 쉬고 가는 건데 여기서 살아남으라고? 이루이 혼자? 제정신이 박힌 이상 그런 생각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생각할 가치나 있는지 모르겠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건물은 박살났다. 농사 등을 짓지는 않지만 언제 괴물이 나올지 모르는 이런 곳에 혼자 살다니. 나 같아도 사양이다. 그럼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미 말했지만……이루이를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얘를 이곳에 두고 가는 건 살인방조죄(殺人幇助罪)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정신지배를 받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해도 되고 답이 안 나와도 상관없다. 그거 외에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은 산더미처럼 쌓였으니까. 그 빌어먹을 질문 리스트에 이루이에 대한 것이 한두 개 올라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중요한 건 카인 대가리에 총알을 박는 것. 그것만 하면 그만이었다.
지금의 나한테 있어서 ‘카인을 죽인다’는 목적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일이 전부 목적이나 이유를 가진 채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목적이나 이유를 알 수 없이 일어나는 행동이나 사건 또한 많았으며, 내가 하려는 행동도 그와 비슷했다.
모든 악의 축인 그놈을 죽이면 그걸로 끝이다. 그 후에 일어날 일 따위 내 알 바냐? 이유도, 목적도 알 수 없어 산더미처럼 쌓인 질문은 그놈을 죽인 이후에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놈만 죽이면 의미를 잃게 될 것들이지만 죽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생각해주지. 이유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붙여줄 생각이었다.
카인만 죽이면 된다. 그게 현재 내 삶의 목적이자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수도로 향해야 했고, 의도치 않게 이루이를 여행의 길동무로 삼게 됐다만……그녀한테는 그걸 거부할 힘이 없었다. 이곳에 남는다는 선택지는 나뿐만 아니라 그녀한테도 없었으니까.
카인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는 말은 결국 그녀한테도 할 수 없었다. 아내들한테도 말 못 했던 것을 얘한테 말한다고 한들 믿어줄 리도 없고……말한다고 치자.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결국 놈한테 있어 우리는 장난감, 피조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텐데.
분노를 더할 뿐이라면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게 나았다. 나는 이루이한테 함께 수도로 가자고 권유했다. 내가 비록 왕의 자리를 빼앗기긴 했지만 이 행동은 왕이나 임금의 해야 할 일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그저 이루이를 돕고 싶었을 뿐이었다.
삶의 터전이 이 지경이 됐으니 더 이상 이곳에서는 살 수가 없었고, 설령 남는다 치더라도 이루이를 기다리는 결말은 죽음뿐이었다. 수도의 왕궁에 가면 틀림없이 이루이는 왕궁 및 경비대원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명 정도 늘어난다고 달라질 일은 없으니까.
이루이는 탐탁치 않아하는 표정이었고 난 그걸 나무라지 않았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금까지 살던 마을을 버린 채 수도로 피신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누가 ‘예, 그럴게요!’라며 웃음을 지을까? 어느 바보가 살던 마을을 헌신짝처럼 버리며 수도로 가려고 할까? 가는 길의 평화와 안전이 완전히 보장된 것도 아닌데?
마을을 버린 채 피난을 간다는 것도 힘든 결정이었지만 앞으로 펼쳐질 여행길도 절대 쉬운 길은 아니었다. 또 그 빌어먹을 청록색 촉수괴물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게다가……이루이는 안즈와 달리 전투의 경험이 없기에 지켜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안즈와 함께 수도를 향했을 때는 2 vs 1. 우리가 두 명이었으며 적은 아무리 많아도 2마리어야 했다. 설령 두 마리라 해도 한 마리를 방어 태세로 돌린 후 협공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나도 괴물 세 마리를 동시에 상대해 쓰러뜨린 적이 있긴 있었다. 총 네 마리 중 한 마리를 안즈가 맡고 내가 세 마리를 맡았었지. 정확히 표현하자면 ‘원하지 않는데 세 마리랑 맞닥뜨리게 됐다’라고 해야겠지만…….
놈들의 위치와 특성을 이용해 어떻게든 쓰러뜨리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안즈가 한 마리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4:1이라니. 예전에도 불가능했고 지금도 불가능한 일에 도전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머리에 총 맞았냐? 비싼 밥 먹고 자살 행위를 하게?
전투 능력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루이를 데리고 수도로 간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전투 행위를 포기하고 오직 도망, 도주, 은신(隱身)만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거기에 ‘들키더라도 내가 이루이를 보호하며 싸울 수 있는 적과 만나야 한다’라는 전제조건도 붙여야 했지.
내가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세 마리 이상과 다시 붙으라 하면 죽기 살기로 덤벼야 하는데……괴물이 나를 노리겠니, 야들야들한 살결을 가졌으면서 저항도 못 하는 이루이를 노릴까? 이게 질문할 가치나 있는지 의문이었다. 당연히 이루이를 노리겠지! 내 같아도 그러겠다, 시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나간 후에도 문제지만 아직 나가지 않은 지금도 문제였다. 수도로 가기 위해서는 식량이 필요하니 이곳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모아야만 했다. 이곳 지리에는 훤한 이루이가 있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여전히 괴물은 남아 있을 테니 놈들도 퇴치해야만 했다.
권유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은 이루이였지만 이미 그녀를 데리고 간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의사(意思)는 사실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얘 놔두고 혼자 갔다간 평생 후회하겠지. 그럴 바에 욕먹어도 데리고 가는 게 몇 십 배는 나았다. 더 이상 누군가 죽는 것도, 죽게 내버려 두는 것도 싫었으니까.
해야 할 일과 생각할 일. 아직 하지도 않았고 할 수밖에 없는 행동. 벌써부터 눈에 아련하게 보이는 시련에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루이의 표정 또한 결코 좋지만은 않았다.
……아직 수도를 향한 여행은 시작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 작품 후기 ============================
날씨가 참 뭣 같습니다. 밤~아침까지는 쌀쌀하지만 점심쯤 되면 덥습니다. 따스하거나 따뜻한 게 아니라 더워요. 가을이 다가왔으니 이제 좀 시원하겠지 싶었는데 실제로 움직이면 꽤 덥습니다. 땀도 금방 나구요.
에어컨 틀자니 춥고, 안 틀자니 덥고. 온도를 조절해서 틀어도 시간이 지나면 쌀쌀해져서 끕니다. 어찌 됐든 간에 온도 조절을 하다 보니 ‘내가 대체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이제는 온도까지 조절하며 살아야 하나?
에어컨 키자니 춥고 안 틀자니 덥고. 뭘 하든 간에 불평불만이 생기는 계절처럼 세린의 입장도 진퇴양난인 듯합니다. 카인을 없애자니 힘이 모자라고. 그렇다고 포기하자니 포기하는 걸로 어떻게 해결될 상황이 아니고. 애초에 포기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좀 확대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세린의 모습은 현재 삶을 사는 분들의 입장이 아닐까 싶네요. 일을 진행하자니 여러 모로 걸리는 게 많고. 그렇다고 안 하자니 현 상황에 만족하거나 안주할 수도 없고. 어떤 행동이든 간에 행하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와 책임이 따라와 버립니다.
게다가 이루이는 전투 경험이 없는 평범한 여성. 까놓고 말해 마을 여성A에 준하는 스펙을 지니겠죠. 마을 여성A가 몬스터를 때려잡을 수는 없듯이, 전투 경험이 없는 이루이가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세린이 미치고 팔짝 뛸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요.
세린도 그렇습니다만, 현실을 살아가시는 모든 분들의 걱정거리가 최대한 빨리 없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i운수i대통i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에 인간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린을 통해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조금이나마 구현화시켜보려 합니다.
고양이새벽님, 개강이시라면 아마 대학생이신 거 같네요.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최대한 하며 학생생활을 만끽하시는 게 좋습니다. 저는 항상 학교-집 왕래. 하는 일도 공부나 집안일, 게임 정도였기에 후회만 가득 남았네요.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꼰대들이 할 법한 말은 절대로 안 할 생각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결과가 쓰고 버리는 계약직 & 파견직 양산이었으니 말입니다. 공부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어떻게 될 정도로 헬조선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입니다만, 현 정부가 노력한다 치더라도 계약직이나 파견직을 없앨 수는 없을 겁니다. 잘 해봤자 대우 개선 + 임금 인상이겠죠. 대학생활을 하시며 구직을 하시는 것도 좋지만, 후회가 남지 않을 학생 생활을 보내시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부디, 즐거우면서도 기억에 남을 학교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zxc54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하신 거 같아 정말 다행입니다. 군대 다녀오며 깨달았지만 군대에서 다치는 것만큼 서러운 일은 없습니다. 입대할 때는 대한의 자식이지만 다쳤을 때는 남의 자식 취급하는 개시발 좆같은 한국군대. 다시 생각해도 열불이 오르네요.
소방서 배치라면 여러 모로 힘드시겠네요. 문재인 정권이 내걸었던 공약 중 하나가 소방수에 대한 처우개선이었죠. 목숨 걸고 일하시는 분들이니 거기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 합니다만, 그런 걸 공약으로 걸어야 할 정도로 이명박근혜 정부는 썩어 있었습니다. 이딴 연놈들을 정부에 밀어줬다 생각하면 진짜 정치에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토리에 관해서는……솔직히 말씀드리자면, zxc54님께는 정말 여러 번 감탄을 드릴 수밖에 없네요. 말씀하신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핵심에는 닿았지만 정답은 아닙니다】겠네요. zxc54님을 포함해 조아라에 계시는 독자분들한테는 늘 놀랄 따름입니다.
안즈나 다른 여성들의 시점에서 보는 세린의 변화 or 스토리 진행은 좀 어렵지 않을까 싶네요. 외전으로 낸다 치더라도 완결을 낸 후에야 적을 수 있을 것 같고, 카인을 만나게 되면 정신지배를 받게 될 테니……사실상 전개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정신지배를 받고 있는 여성들도 [카인을 만남-정신이 몽롱해짐-카인의 자지로 Happy☆Happy!]라는 테크트리를 타게 될 테니, 이 부분을 감안해도 적기는 어려울 거 같네요.
늘 봐주셔서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일도 좋지만 늘 건강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오랜만에 후기가 길어졌네요. 제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새롭게 맞이한 9월도 무사평탄하게 보내면 좋겠습니다.
P.S - 잠 잘 시간이 필요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