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9 「18-8 : 종언의 카운트다운 (9)」 =========================
왜소한 몸집에 커다란 가슴. 평소에는 보기 힘든 조합의 신체 유형. 하물며 괴물로 변한 사람들의 시체로 가득한 곳에서 여자를 보게 되다니……. 그녀를 보니 키리가 생각난다. 그녀도 150cm 정도의 몸집이었지.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었던 키리를 생각하니 하반신이 부풀어 올랐다. 로리 거유라……내 아내들 중에는 보기 힘든 타입이었으니까.
원래라면 목 부분이 날아가 버린 키리를 생각하며 추모나 애도의 뜻을 표해야 했지만……더 이상 나한테는 그럴 생각도, 마음도 없었다. 내가 왜? 뒤진 건 운이 없거나 실력이 없어서. 둘 중 하나겠지. 나도 죽을 위험 많이 헤쳐 왔으니 말하는 건데……모든 죽음이 나 때문은 아니잖아?
안즈와 나는 살았고 키리나 다른 애들은 죽었다. 야만족의 죽음은 궁극적으로 말해 그녀들의 탓. 더 이상 책임감을 느낄 생각도 없었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 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보다는……나름 풍만했던 키리의 가슴을 연상시키는 여자.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나온 그녀가 훨씬 더 박음직스럽게 보인다구.
괴물의 습격 탓인지 도망치다 찢긴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옷은 참으로 엉망이었다. 드레스 같아 보이던 옷은 치마 부분이 거의 다 찢겨나가 둔부(臀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고 오른쪽 가슴의 유두는 아예 대놓고 나온 상태였다.
15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여자가 온몸을 가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 모습은……정말 오랜만에 여자를 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니 단숨에 발기가 됐다. 내 하반신을 본 그녀는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아, 앗! 오지 마요! 그, 그건……자지죠? 시, 싫어……그거에 박히면 나도, 나도 엄마나 친구들처럼 되어버릴 거야……!!”
“……뭐?”
지금 얘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싶었지만……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예전에 봤던 게 생각났다. 카미유의 성벽에서 봤던 그것. 은색 비키니 아머에서 떨어졌던 정액. 괴물로 변하기 전 여자가 했던 말. 그리고……내 눈앞에 있는 여자가 한 말. 설마……?
“이봐, 진정해! 진정하라고!”
“아, 앗! 살려줘요! 제, 제발……뭐든지 할 테니까 목숨만큼은……아, 하으읏……!!”
미치겠군. 말을 걸어도 살려달라고만 할 뿐. 안쓰러울 정돌 벌벌 떠는 그녀를 보니 정신적인 충격을 꽤 많이 받은 것 같았다. 대화가 불가능하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다. 강경수단을 쓰는 수밖에.
그녀한테는 맞지 않는 방향. 하지만 무너진 건물 쪽에 총알을 몇 발 쐈다. 굉음(轟音)과 함께 탄착(彈着)이 끝나자 건물이 ‘파샥’ 소리를 내며 부서졌고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움츠렸다. 귀엽군……. 몇 발 더 쏘자 그녀는 귀를 막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야.”
내가 부르자 그녀는 벌벌 떨며 고개를 들었다. 하아……당장에라도 하반신에 내 물건을 박아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질문이 우선이었다. 질문뿐만 아니라 식량이나 식수, 쉴 곳의 확보.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여기서 많은 시간을 잡아먹을 수는 없다니까…….
“내가 너를 죽일 거 같았으면 이미 죽였어. 알겠냐?”
흘리던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일 때마다 상반신이 움직였고 오랜만에 보는 커다란 가슴이 상하로 움직였다. 미치겠군. 오늘 밤은 이년으로 결정이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에 더욱 더 하반신이 불끈거렸고 그녀는 겁먹은 표정으로 내 물건을 보았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건 좀 위험할 거 같은데. 안전한 곳 알고 있냐? 숨도 좀 돌릴 수 있고, 밥 먹고 쉴 수도 있는 곳 말이야.”
참으로 교묘한 발언이었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휴식, 식사, 수면. 모든 걸 취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을 찾다니. 목숨을 살려준 나를 위해서도 그렇겠지만 자기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장소를 찾을 수밖에 없겠지. 그녀를 이용해 잠시 휴식을 취할 곳을 찾으려는 내 모습은 더 이상 예전의 어리숙한 신세린이 아니었다.
좋든 싫든 쉴 곳을 찾을 수밖에 없는 그녀는 내 마음을 전혀 모르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목숨이 달려 있는데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세상은 호락호락하지가 않거든.
“그럼 거기로 좀 안내해줄래? 괴물을 죽이긴 했는데 혹시나 숨어 있는 놈들이 있으면……서로 곤란하잖아?”
웃으며 말했지만 효과는 직빵이었다. 살려달라며 벌벌 떨 때처럼 그녀의 눈이 커졌다. 늘 달려들기만 하던 괴물을 이렇게 이용하는 데에 써먹게 될 줄이야. 사람의 인생이란 진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니까? 설마 생각이나 했겠냐? 여자 협박하는 데에 괴물을 쓰게 될지!
그녀는 몸을 여전히 가린 채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꾹 참아야 했다. 괜히 감정을 건드려서 좋을 일 하나 없으니 참자고. 즐거운 일은 오늘 밤일 테니까…….
길을 걷던 그녀는 시체의 산이 된 괴물 대군을 본 체 눈물을 흘렸다. 아는 사람들이 죽은 것도 괴로울 텐데 괴물이 되어 저런 꼴이 된 걸 보게 된다면……나라도 눈물이 나오겠지. 그치만 지금은 별로 슬프지 않았다. 아는 사람들은 무사했고, 현재의 나한테 있어 그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사람들’로 변한 상태였으니까.
오히려 죽은 사람들보다는 우연히 발견한 이 여자를 어떻게 범할까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반신이 불끈거릴 때마다 ‘참아라, 오래 기다렸으니 오늘 밤에 풀자꾸나’라는 생각만 들더군. 우는 그녀를 적당히 다그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은 성벽 근처. 마을의 끝자락에 위치하는 집이었다. 다른 곳들은 무너지거나 부서졌는데 그녀가 도착한 곳은 지붕 부분이 좀 날아갔을 뿐. 멀쩡한 것으로만 치자면 거의 A~A+급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무사할 수 있었던 거지?
“여, 여기에요…….”
울먹거리던 눈을 비비며 그녀가 말했지만 지금만큼은 집에 눈이 가있는 상태였다. 날아간 지붕 부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꽤 넓기도 했기에 휴식처로 삼기에는 정말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은 왜 이렇게 멀쩡한 건지 물어보니 그녀는 슬픈 얼굴로 입을 열었다.
“괴, 괴물이 되기 전에 다른 분들이 가르쳐 주셨어요. 괴물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오기 때문에 건물 안에 있으면 빠져나가기 힘들다고……. 부서지지 않은 곳보다는 부서져서 들어가기 힘든 곳에 있는 게 오히려 더 안전하다고…….”
오오, 그렇군. 생각지도 못한 걸 들으니 나 또한 ‘이건 몰랐는데’라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일리 있는 말이군. 사람이 있다면 집이 멀쩡하든 아니든 간에 박살을 내려는 경향이 있는 괴물들. 그럼 아예 부서져서 함부로 손대기도 어렵고 비집고 들어가기도 힘든 곳에 숨어 있는 게 생존에는 더 낫다는 건가?
“그럼 식량이나 그런 건? 괴물이 안 와도 먹을 거나 마실 게 없으면 못 버티잖아.”
사람은 약한 생명체다. 먹을 것의 경우는 그렇다 치더라도 마실 것이 없다면 단숨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약하다. 그런 사람이 먹이사슬의 정점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지식과 문명, 도구를 쓸 수 있는 힘 덕분이었다.
아무리 강한 괴물이라도 마법이나 총알 앞에서는 힘도 못 쓴 채 죽어버린다. 마찬가지로 강한 짐승이 나타나도 총이나 포획 도구 앞에서는 결국 잡혀버리는 것이 짐승들의 운명이었다. 그들은 힘은 강했을지 몰라도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알 수 없었을 거다.
인간들마저 치를 떨 정도로 살기 힘든 세상인데 하물며 아무런 생각도 없는 금수 새끼야 잡히는 게 숙명이겠지. 짐승이 발생하게 된 원인도 궁금했지만 짐승보다 더 위험한 괴물을 상대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가 더 궁금했다. 이 아가씨, 혹시 베어 그릴스랑 친척인가?
“물은 부서진 집에서 구하곤 했어요. 그……괴물이 너무 많았을 때는 마법으로 만들기도 했구요.”
부서진 집에서 구하곤 했다는 말을 들으니 당연하면서도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이 되어버린 주민들은 물이나 식량을 입에 대지 않으니 당연히 예전의 식재료들은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치만……괴물의 습격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집에 들어가다니. 정말 급박하긴 급박했던 거 같다.
물을 마법으로 만들 수 있긴 했지만 프레그넌트를 비롯해 대부분의 주민들은 마법을 그리 자주 쓰지 않는다.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적어서 그런 것도 있었고 오직 마법에만 의지하다간 여차할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니까.
무엇보다 마법을 써서 만든 물로 목을 축이는 건 좋지만, 마법을 써서 그만큼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면 본말전도나 다름없었다. 피곤한 걸 느끼지 않기 위해 물을 마셨는데 그만큼 마력을 썼으니 피곤하게 되겠지. 미봉책(彌縫策)이란 바로 그런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다른 집에 들어가 물이나 식료품을 구한 것에 대해 뭐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긴급한 상황이었고 더 이상 식량이나 물을 섭취하지 않게 된 사람들한테서 가져온 건데 뭐가 나쁘단 말인가?
양심은 양심이고 목숨은 목숨이었다. 내가 살기 위해 카미유의 주민들을 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미쳤다고 비난을 하겠는가? 자기 얼굴에 침 뱉기나 다름없는데?
집 안은 부서진 지붕 파편을 제외하면 매우 깨끗했다. 푹신한 침대를 보니 드디어 노숙 생활과도 이별이구나 하는 심정이 들었다. 화장실에 있는 샤워 시설을 보니 더욱 더 현재 상황이 좀비 아포칼립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괴물이 우글거리던 마을에서 샤워라니. 웃기는 일이다.
“여기……너희 집이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거의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의 집이라고 했다. 묻기는 싫었지만 혹시나 생각지 못한 상황이 발생할지도 몰랐기에 잔혹한 질문을 던진다.
“그……이 집안의 가족이나 니 가족은?”
나도 묻기는 싫었다. 결과를 아는 질문을 해서 얻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이런 질문을 해야 했던 이유라면……살아남은 사람이 와서 우리를 괴물로 오인해 공격하거나 하는 사태를 미연(未然)에 방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자기 집에 듣도 보도 못한 남자가 와있는데 좋게 봐줄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은 휴식할 수 있는 공간에 들어와 숨을 돌리고는 있지만 그녀가 내 하반신을 보며 했던 말. 섹스를 하게 되면 괴물로 변해버린다는 말 또한 물어봐야만 했다.
나는 괴물들과 싸우느라 지친 상태도 그녀는 그런 괴물들로부터 몸을 숨기느라 육체적·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당장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먼저 식사 및 휴식을 하게 됐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과 집안에 있던 식재료를 꺼내니 나름 식탁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과일 같이 조리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먹거리가 많다는 게 좀 그렇긴 했지만, 아무것도 없이 쫄쫄 굶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기에 아무 말 없이 입과 손을 움직였다.
그녀도 대화나 질문보다는 식사가 더 급했는지 빠른 속도로 음식을 먹어대기 시작했다. 웃긴 광경이었다. 꾀죄죄한 남녀 둘이 아무 말 없이 먹을 것을 입으로 옮겨대는 풍경은……. 안즈와 여행을 할 때도 이렇게까지 무미건조한 식사를 한 적은 별로 없었는데.
먹을 걸 다 먹은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크게 한숨을 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해서 그런 걸까? 눈물이 절로 나왔다. 여자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인가 싶어 얼른 눈물을 닦고 그녀를 보니……그녀 또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이유? 당연히 흘릴 수밖에. 언제 괴물이 습격해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것도 모자라 이렇게 식사까지 했는데 안 기쁠 리가 있겠냐? 나는 둘째 치더라도 그녀는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최소한의 식량만을 먹으며 연명(延命)을 했을 테니 눈물이 당연히 나왔겠지.
살아남았다는 기쁨은 사람의 감정이나 이성을 훨씬 뛰어넘는다. 눈물이 흐르는 이유를 알면서도 그걸 멈출 수는 없었고, 그건 남자든 여자든 간에 마찬가지였다. 나야 이런 상황이 자주 있었으니 조금 울고 말았다만 그녀는 흐느낌을 억누르지 못한 채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때만큼은 아무리 나라도 놔둘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녀의 기분을 아니까.
괴물한테서 살아남았다는 기쁨과 슬픔을 보니 이 세상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는군. 그때는 정말 쥐뿔도 몰랐었지. 상상이나 했을까? 아내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이렇게 통수 맞고 여행이나 하는 신세가 될 줄은……. 한심한 내 광경을 보니 설령 상상했다 치더라도 ‘난 절대 그렇게 안 될 거야’라고 생각했었겠지. 근데 그거 아냐?
니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현실이 그 방향으로 절대 안 가는 건 아니거든요? 과거의 나를 보면 정말 힘차게 비웃어주고 싶었다. 바보 아니냐? 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내 의견은 없다시피 했었잖아. 이 세상에 온 것 자체가 카인한테 장난감으로 선택받았다는 거나 다름없는데 뭐? 나는 그렇게 안 될 거라고?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인생은 한 방이며 실전이다. 생각지도 못 한 한 방에 훅 갈 수 있으며 그러다 다치는 건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연습은 없고 오직 실전. 흔히 말하는 인실좆─인생은 실전이야 좆만아─이란 단어가 괜히 생겨난 게 아니라니까?
나는 다치고 잃을 것도 잃어가며 이런 상태가 된 거지만 그녀는 달랐다. 난생 처음으로 가족이나 친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이 괴물이 되는 걸 지켜봐야만 했겠지. 대체 어느 누가 그런 광경을 보고 좋아한단 말인가?
그녀가 느꼈을 정신적 충격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쉬어야 했지만……혹시나 괴물들의 습격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 전에 물어야 할 걸 물어봐야 했다. 육체와 정신이 모두 지친 그녀를 꼭 지금 다그쳐야겠냐고? 어……응.
너희 내가 카미유에서 겪은 일 못 봤니? 신음을 내던 여자가 카인에 대한 실마리를 주고는 바로 괴물로 변해버렸잖아!
이 마을에 와서 미친 듯이 싸운 후 겨우 발견한 사람인데 지금 쉬게 한다 치자. 자는 사이에 괴물한테 습격해 죽어버리면? 그럼 난 또 닭 쫓던 개가 되는 건데? 한 번 엿 먹었으면 충분하지 두 번 엿 먹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이젠 좀 괜찮아?”
점차 울음이 그치던 그녀는 황급하게 눈물을 닦으며 괜찮다고 했다. 미안, 내가 말하긴 했는데……전혀 안 괜찮아 보인다. 아무리 밥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지만 금방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애한테 이것저것 물어야 한다니. 난 왜 매일 이딴 역할만 맡게 될까?
“그……죄송해요. 인사가 너무 늦었네요. 저를 구해주셔서……정말 감사했습니다.”
공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까지 하는 그녀를 보니 더 묻기가 싫어진다. 아니, 그……내가 오늘 밤이 즐겁겠다고 말은 했지만 이렇게 공손하게 행동하니 좀 미안해지잖냐. 총 쏘면서 다그친 것도 그렇고. 미안할 거 같았으면 왜 그런 짓 했냐고? 안 그랬으면 계속 겁먹은 채 거기 있었어야 했으니까.
“제 이름은 ‘이루이’에요. 제 목숨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어, 아니……그건 괜찮은데. 있잖아……허, 크흠! 허엄!”
그녀의 공손한 인사에도 불구하고 난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럴 때마다 찢겨진 옷 사이로 보이는 살갗이 더 많아졌기에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옷부터 갈아입고 이야기하자.”
이런 말까지 하고 나서야 그녀 또한 자기가 지금 공손하게 인사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눈치 챈 거 같았다. 유두와 둔부가 보이던 옷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식사에 몰두했던 건가. 이해는 간다. 나도 프레그넌트에 혜린이랑 처음으로 도착했을 때는 정말 걸신들린 듯이 밥을 먹었었으니까…….
젠장. 대체 내가 왜 이럴까? 지금까지는 바보 같이 모두 다 내 탓, 능력 부족이라며 나를 탓했었지. 그게 싫어서 아내들을 모욕하고 조롱했건만 이루이라는 저 여자를 볼 때마다 과거의 내가 생각났다. 순수하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지만 지금처럼 잘 되면 내 덕, 못 되면 남 탓을 하는 병신은 아니었건만……. 어쩌다 이렇게 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정말 시원하게 할 수 있었다.
⓵ 내 탓 아니다
⓶ 카인 탓이다
이 세상에 소환된 것부터가 이미 카인의 탓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라고? 아내들이 날 버린 것도 전부? 그건 싫었다. 내면의 목소리를 받아들인 때부터 변하기 시작했는데 이제 와서 과거의 나를 그리워하다니. 정말 좆병신이군…….
그런 시점에서 보자면 저 ‘이루이’라는 여자는 참으로 신기한 여자였다. 벌벌 떨던 그 모습부터 시작해 허둥지둥 행동하는 것. 모두 다 예전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행동이었기에 처음 느꼈던 욕정은 어디론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찢겨진 드레스 대신 입고 나온 것은 상큼한 평상복이었다. 허벅지가 다 보이는 짧은 바지에 긴 소매라니. 언밸런스하면서도 은근히 하반신으로 눈을 가게 만드는 조합이었기에 내심 그녀의 패션 센스가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가 살짝 부풀어 오른 걸 보니 새삼스럽게 그녀 또한 임신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150cm의 머리카락도 그랬지만 키리보다 약간 더 깨끗한 거울색의 머리카락을 보니 안즈가 떠오른다. 안즈가 얘를 본다면 분명 키리를 떠올리겠지. 함께 지냈던 날이 짧은 나마저도 키리를 떠올렸는데 안즈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키가 짧다는 것을 지적받기 싫은 걸까? 다리가 길게 보이는 짧은 바지는 그녀의 키를 그나마 좀 키워주는 느낌이 들었다. 포니테일로 묶었던 머리는 어깨까지 오도록 풀어헤쳤기에 살짝 아쉬웠다.
“그, 고마워요. 워낙 많은 일을 겪다보니 몸가짐이 좀 흐트러져서…….”
더 흐트러져도 괜찮아. 나야 땡스베리감사지. 차마 말로 할 수는 없었기에 괜찮다며 다시 대화로 돌아갔다. 내 이름을 말하려는 찰나 이루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어……혹시, ‘신세린’님이신가요?”
심장이 덜컥했다. 이상하다. 이루이 같이 예쁜 여자애가 내 이름을 알면 ‘ㅋㅋㅋ 너님 어떻게 내 이름 알았음? 나한테 관심 있음?’이라며 헛소리를 지껄여야 하는데 나는 지레 겁부터 먹은 상태였다. 내가 상상 이상으로 쫄보라서 그런……건 아니라고! 그렇게 쫄보 아니거든?
갑자기 내 이름을 불러댄 것도 놀라웠지만 혹시나 그녀 또한 카인한테 조종 받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조금 전까지 함께 밥 먹은 여자애랑 싸우라는 건 아니겠지……제발 그건 좀 봐다오. 죽었다가 살아난 괴물이라면 또 모를까, 살아있는 사람을 쏘는 건 사양이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혹시나 습격할 낌새가 보이면 당장 M16A1을 소환할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물으니……어, 어? 잠깐만, 얘 왜 또 울어? 함박웃음을 지은 채 눈물을 흘리는 이루이는 ‘역시!’라며 두 손을 모으며 나한테 다가왔다. 아, 아니. 야! 무섭다고! 오지 말라고!
원래라면 ‘이 요망한 것! 나를 홀려 죽이려는 심산이냐! 그런 얄팍한 수, 나한테는 통하지 않는다!’라며 이상한 말을 지껄여야 했지만……. 이루이가 너무나 기뻐하는 표정으로 다가오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아, 오지 좀 말라고! 부담 된다고! 근데 이걸 진짜 말하면 상처받을 거 같아서 말 못 한단 말이야, 썩을!
“우, 우리 마을을 구하러 와주신 거죠? 네? 세린님은 임금님이시잖아요!?”
“어, 어……?”
잠깐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질문을 해야 하는 건 내 쪽이었는데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됐다. 진의(眞義)는 알 수 없지만 나한테 많은 것을 바라는 저 부담스러운 눈빛 때문에 차마 ‘아니다, 이 악마야!’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저, 저기. 있잖아. 그……어떻게 나를 알아?”
우선은 이 질문부터 해야 했다. 내가 더 이상 왕이 아니라는 건 나중에 말해도 된다. 궁금한 건 이거 외에도 많았지만 우선은 이거부터 묻고 싶었다. 이루이는 그 질문에 웃으며 입을 열었다.
“루인이나 카미유에 ‘좆물캡슐’이 대량으로 배분됐을 때 수도의 경비대원분들이 말씀해주셨어요! 인자하고 자애로운 임금님 덕분에 생명의 씨앗을 대체할 캡슐이 무료로 배분됐다구요! 그때 존함(尊啣)을 들었어요!”
어우, 야……무슨 ‘존함’씩이나. 내 이름이 그렇게 높여 부를 정도로 위대한 이름은 아니거든요? 그렇게 태클을 걸고 싶었다만 저렇게 눈동자를 빛내며 말하니 듣는 내가 무안했다. 캡슐의 분배가 완료됐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내 이름까지 거론됐다는 건 들은 적이 없는데……. 마리아나 아테나의 지시인가? 본의 아니게 은혜를 입게 됐군.
“저희 마을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에도 ‘생명의 씨앗’이 없어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캡슐을 무상으로 배분해주시다니! 저나 친구들은 정말 멋진 분이라며 기뻐했어요! 헤헤……이 아기도 캡슐로 얻은 거예요.”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좀처럼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던 조금 전과 달리 이루이는 매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메이나 니나 또래처럼 다양한 주제로 떠들곤 했지만 배를 어루만지는 그녀의 표정은……틀림없는 한 명의 ‘어머니’였다. 하반신이 다시금 불끈거린다.
“게다가……조금 전에 다리 사이에 보였던 그거. ‘자지’나 ‘좆’이라고 부르는 생식기(生殖器) 맞죠?”
젠자아아아앙! 이제 내 하반신은 미친 듯이 발기를 해대고 있었다. 아, 어떻게 이런 황당한 상황에 서냐? 야, 내 분신아. 그렇게 고개를 벌떡 들어서야 일상생활 가능하니? 뭐? 가능하니까 이 지경까지 왔다고? 아오, 말은 존나 잘해요! 이 새끼를 확 잘라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아, 대체 왜 이럴까? 엿은 카인이나 괴물한테만 먹어도 충분한데 내 하반신의 존슨마저 이 지랄을 하며 나한테 엿을 먹이다니! 너무나 당돌한 태도였기에 오히려 내가 더 부끄러웠고, 이 와중에도 하반신은 좋다며 딱딱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으윽, 어떻게든 주제를 돌리자.
“그, 그럼 조금 전에는 왜 그렇게 겁을 낸 거야? 뒤로 물러서며 말했었잖아. 이 ‘자지’에 박히면 너도 엄마나 친구들처럼 될 거라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아아아악! 빌어먹을! 다른 주제로 넘어가려고 그녀가 말했던 걸 묻자 이루이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 아니라고! 노리고 한 짓 아니라고! 너흰 어떻게 된 게 내가 잘 한 일은 쏙 빼버리고 이상한 짓, 바보짓만 그렇게 매의 눈처럼 집어 내냐? 너무한 거 아냐!?
내가 무슨 일을 잘 하면 ‘그건 당연히 니가 잘 해야 할 일이지!’라며 평가절하(平價切下), 무시하면서 내가 이상한 짓이나 바보짓만 했다 하면 ‘허이구, 그럴 줄 알았다. 하긴, 바보가 어디 가냐?’라며 온갖 무시를 다 해댔지. 어느 장단에 춤을 맞추란 말이냐? 사람이 평생 실수를 안 하고 살아갈 수는 없잖아!
이런 내 구차한 변명과 생각에 관계없이 이루이는 슬픈 한숨을 토했다. 으음, 겨우 한 번이라니. 난 오늘 내쉰 한숨만 해도 50번을 넘는데 그걸로 되겠니? 20번 정도는 더 해도 된단다.
“마을이 이렇게 된 것도……친구들이나 엄마가 이상하게 변한 것도. 모두……모두 그 사람 탓이에요.”
겨우 시작된 이야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나 외에 성기(性器)를 가진 남자. 카미유에서 봤던 정액. 그리고……‘자지에 박히면 괴물이 된다’라는 발언. 이곳에 오기 전까지 생각했던 내 가설이 점차 현실로 되어가는 것에 묘한 희열을 느끼며 귀를 기울였다.
“세린님을 임금님이라 불렀지만……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한 남자(男子)가 저희 마을을 찾아왔었어요. 머리카락이 하얗고 눈동자가 붉은……지금 생각하면 좀 무서운 인상의 남자였어요.”
지금까지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단숨에 날아간다. 그래, 일이 그렇게 됐다고는 이미 생각했었지. 하지만 실제로 들으니 기분이 더 더럽군. 설마 다른 사람의 입을 빌어 너와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단다…….
“그 남자는 자기 이름이 ‘카인’이라고 했어요.”
먼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의 입을 빌어 다시 만나게 된 카인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장담컨대……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았다.
============================ 작품 후기 ============================
새롭게 만난 등장인물과의 만남 및 대화를 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바이오하자드나 사일런트 힐에 나오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좀비나 화학병기로 인한 돌연변이가 판을 치는 마을. 그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친 듯이 싸워야 했던 캐릭터들을 생각하니 좀비 아포칼립스는 진짜 생지옥이겠구나 싶더군요.
사일런트 힐은 좀비나 돌연변이와는 좀 다르지만, 인간의 원한이나 나쁜 감정이 실체화한 거니 절대 좋은 현상이라고는 볼 수 없겠죠.
가족이나 친구가 모조리 괴물로 변한 상태에서 싸울 수도 없고 설득할 수도 없는 상태. 도망칠 것인가, 죽일 것인가, 함께 동료가 될 것인가.
어느 것을 선택하든 후회는 틀림없이 남을 거라 생각합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고양이새벽님, 이루이는 샌드백……이라기보다는, 조력자에 가까운 포지션입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를 발설하면 스포일러가 되므로 자세하게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함께 활동하므로 샌드백이랑은 많이 다르다고 생각되네요.
스트레스나 울분을 풀기 위한 샌드백은 괴물들이 될 거라 생각하니 전투씬이 늘어날 거 같습니다. 으으……전투씬, 으으……분량이……!!
이상입니다. 진짜 가을이 온 거 같네요. 아침부터 졸 추웠습니다. 이 온도가 더욱 낮아질 거라 생각하니……고개가 절로 좌우로 저어지네요. 여러분도 감기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 물론 저는 이미 코감기 걸렸습니다.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