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181화 (181/235)

00178 「18-7 : 종언의 카운트다운 (8)」 =========================

사막 한 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의 마음은 어떠할까? 단언컨대 그 누구보다 행복한 기분을 맛보겠지. 물이라고는 찾아볼 수조차 없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니……. 사막에 가보지 않은 내가 생각해도 정말 기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상상이나 기쁨과는 다르게 오아시스는 1급수가 아닌 이상 절대 함부로 마셔서는 안 된다고 했다. 1급수가 아닌 오아시스에는 다양한 기생충들이 살고 있으며 이를 함부로 마셨다가는……굳이 이 다음을 말할 필요가 있을까?

사막 같이 사람이 살기 최악인 것도 모자라 의료 시설이나 기구가 없는 곳에서 기생충을 먹었다간……으음. Death!

꿈과 같은 오아시스지만 그 오아시스마저 깨끗함이나 안전함을 갖추지 못하면 그저 단순한 물웅덩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나한테 큰 충격을 주었다. 사람이나 물건, 마을 등 겉모습을 지닌 것의 외관에 눈을 빼앗기지 말고 본질을 보라는 메시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내 안목이 가히 쓰레기 급이라는 것부터 시작해 괜히 겉모습으로 판단했다가 나중에 좆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잘 알 거라 믿는다. 내가 지금까지 개고생 한 것의 일부는 바로 그 안목! 외관에 눈을 빼앗겨 본질을 보지 못한 어리석음에 기인(起因)한 것이니까!

6개월 이상 그녀들을 돌보던 나였지만 설마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나를 사랑한다, 좋아한다며 앙탈을 부리던 그녀들이 정신지배라는 이름 아래 숨기던 마음을 마음껏 펼쳐 내 통수를 존나 세게 때릴 줄 누가 알았을까?

내 안목이 쓰레기인 건 인정한다만 안목과 미래를 볼 수 있는 힘은 별개의 것이라 생각됐다. 흔히 말하는 미래시(未來視 ; 미래를 보는 눈─능력─)나 통찰안(洞察眼)에 의해 미래를 볼 수 있는 거라면 모를까, 안목 하나만으로 먼 미래의 일까지 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물론 이렇게 거창하게 말한들 의미는 없었다. 나한테는 미래시나 통찰안은커녕 안목(眼目)조차 없는데, 나한테 없는 걸 말한다고 없던 게 생기지는 않으니까. 설령 생긴다 치더라도 나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 앞에서는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능력이란 그런 것이다. 없으면 더 가지고 싶지만 가지게 되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는 것. 사람의 욕심에는 한계가 없다는 걸 알려주는 좋은 예시였다. 나도 ‘아, 나한테 저런 능력이 있으면 좋을 텐데’라며 바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

이런 저런 투정을 부려도 결국은 자기가 가진 능력을 믿은 채 갈고 닦아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게 사람의 삶이며, 인생이었고, 길이었으니까. 자기한테 없는 걸 불평 말고 있는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깨닫는 것도 어려운 것 중 하나다. 나는 그걸 어떻게든 해내긴 해냈다.

잡설이 길었다만……안목이나 미래 등을 운운한 이유는 간단했다. 저 멀리에 꼼짝 않고 있는 마을이 있기 때문이지. 흔히 왜 학교 가는 줄 아냐는 질문에 ‘가야 하니까’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질문을 한 사람은 웃으며 그건 틀렸다고 한다. 그럼 답이 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겠지.

‘학교가 우리한테 못 오니까!’

썰렁개그라고 팰 수도 있겠지만 난 그 대답이 실로 진리에 가깝다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됐다. 그야 그럴 수밖에. 저기 있는 저 마을이 좀비 같은 붉은색 촉수괴물의 소굴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마을인지. 그걸 나한테 못 보여주니까 내가 보러 가야 하잖냐 시발!

물론 멀쩡한 사람들은 ‘우리 마을에는 촉수 괴물이 돌아다녀요’라는 표지판 따위를 설치하지는 않는다. 촉수괴물이 돌아다니는 마을이라니. 미쳤냐? 다들 목숨 바치고 싶어 환장한 마을이냐? 응?

아, 그래. 프레그넌트에서도 촉수괴물이나 서큐버스가 돌아다니고는 했었지. 그러나 그 경우에는 ‘몬스터 테이밍’. ‘자지의 맹세’의 몬스터 버전 마법 덕분에 테이밍이 가능했기에 공존(共存)이 가능했다. 지성도 없고 대화도 불가능한 괴물을 마을에 들여놓는 병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젠장.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걷고 걸어서 도착한 곳이 마을인 것은 좋았지만 거기가 어디인지는 구분이 안 갔다. 적어도 내가 아는 마을이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 지금까지 가보지 못한 마을 중 한 곳은 이미 들른 상태니……여기만 들르게 되면 모든 마을을 둘러보게 되는군.

누가 상을 주는 건 아니었지만 저 마을만 들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을을 방문하게 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그치만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아무리 봐도 저 마을에도 있을 거 같단 말이지……붉은색 촉수괴물이 말이다.

없기를 바랐지만 카인이나 내 삶의 과정을 생각하자면 절대 그런 일은 없겠지. 오히려 ‘ㅎㅎㅎ왔어? 니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어.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으니 선물로 괴물을 줄게. 가라, 괴물군단! 너로 정했다!’라며 날 엿 먹일 생각으로 가득하겠지. 내가 그런 거 한두 번 당해본 줄 아냐? 이젠 진절머리가 날 정도다.

아아, 싫다! 정말 싫다! 지금까지 나한테 일어난 일 대부분이 싫은 거였지만 이것도 싫었다! 왜 날 기다리고 있는 게 함정, 지뢰투성이라는 걸 알면서도 걸어가야 하는 걸까? 어째서 사람은 미래에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걸까?

누군가는 ‘그런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며 사람은 성장하는 거야……’라며 개소리를 지껄이겠지.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금수저는 이런 고난과 시련, 겪지 않는다. 퉷!

침을 맞았다며 호들갑을 떠는 사람─시련과 고난 + 성장 드립을 치던 병신이다. 침을 맞아도 싸지─을 내버려둔 채 다시금 곰곰이 생각한다. 왜 저기로 가야 할까? 그냥 수도로 가면 안 될까? 수도로 가서 카인의 곱상한 얼굴에 5.56mm 탄알을 존나 갈겨주고 싶은데 왜 저기로 가야 할까?

한숨을 쉬며 아이템 인벤토리 윈도우를 열었다. 망할……왜긴 왜야? 식량이 다 떨어졌으니까 들러야지. 식량 없이 일주일 동안 걸을 수 있겠냐? 당장 배고프고 힘든데 저길 들르지 않고 가다니. 그거야말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만 푹푹 쉬던 나는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무기를 든 채 다가갈 때마다 마치 성벽이 나를 먹으려고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들어가기 싫다……이거 완전 ‘ㅋㅋㅋ안에 괴물 있으니까 조심하세요’라고 말하는 거잖아! 그거랑 대체 뭐가 다른데!?

가까이 가다보니 표지판이 보였다. 루인(Ruin)이라……. 그렇군. 여기가 200명 중 100명 이상이 괴물한테 죽었다는 마을이군. 딱한 사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온다. 괴물한테 죽은 사람들이 많다는 건 절대 기뻐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성벽의 상태는……우와아. 존나 심각해……. 입에서 ‘헐’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수도에서 갑자기 습격한 괴물들이랑 붙었을 때 성벽이 녹아내리곤 했는데 여긴 그거보다 심했다. 아예 괴물마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처참하게 파괴된 성벽을 보니 100명 이상이 죽었다는 게 납득이 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주변에 청록색 촉수괴물이 없는 것은 싸우면서 쓰러뜨렸거나, 더 이상 이곳에 먹을 사람이 없어 물러갔거나. 둘 중 하나겠지. 아니면 카인이 의도적으로 사라지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안 하는 게 없고 못 하는 게 없는 창조주이자 절대자, 카인 덕분에 난 모든 걸 잃어버렸다. 아내들부터 시작해 온갖 크고 작은 것들을 빼앗겼지만 목숨만큼은 어떻게든 남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기쁘진 않았다만……이 마을을 보니 목숨만이라도 붙어 있어 다행이라는 느낌이 조금 든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가족이나 친구, 친척을 잃었겠지. 소중한 삶의 터전이 무참하게 파괴당하는 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그저 짐승 같은 괴물들이 날뛰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니. 다시금 괴물들이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내가 있던 곳은 ‘카미유’겠군. 평소라면 ‘섹스……야메나이카! 섹스!’라며 드립을 쳤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안 들었다. 녹아내리고 부서진 성벽을 보니 정말 치열하게 싸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격이 심했던 만큼 저항도 심했을 테니까. 장난 아니게 많이 죽었겠군.

루인의 입구를 통해 들어가니 정말 개판이 따로 없었다. 부서진 건물 파편이 입구에서부터 구르고 있으니 말 다했지……. 그야말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다름없었다. 옷이나 식기, 가구 등이 완전히 부서진 채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저 멀리에는 잘려나간 사람들의 신체 일부도 보이곤 했다.

저 멀리서 움찔거리는 것이 무엇인가 싶어 자세히 살펴봤더니……점점 나한테 다가오는군. 역시 여기에도 있었다. 붉은색 촉수괴물. 아니……괴물이 되어버린 루인의 주민들이.

찢겨진 배 부분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 촉수 덩어리. 얼굴이 뒤집힌 채 다가오는 그들의 모습은 어딜 봐도 좀비에 가까웠고, 오랜만에 보는 그들의 모습에 적잖게 소름이 돋아온다.

“그래, 와라 개새끼들아…….”

총을 쥔 나는 입구 근처를 둘러본 후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입구라면 위급할 때 바로 도망칠 수 있을 뿐 아니라 뒤에서의 습격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설령 청록색 촉수괴물이 뒤에서 오더라도 곧바로 눈치 챌 수 있으니 딱이지.

전투의 시작을 알린 건 저 멀리서 오던 놈들이 아니라 입구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놈들이었다. 성문 주위에 있던 놈들이 어느새 냄새를 맡았는지 갑작스럽게 얼굴을 내밀었고 난 다급한 비명과 함께 총알을 갈겨댔다. 놈들이 죽음과 동시에 총알소리가 울려 퍼지자 새로운 식사가 온 줄 알았는지 놈들이 개떼 같이 뛰어온다.

“그래, 와라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것들아! 죽은 후에도 카인 같은 새끼한테 이용당할 바에야 나한테 죽는 게 백 배 천 배는 더 나을 거다!”

진심으로 그렇게 외쳤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죽은 자는 죽은 것으로 끝이다. 망자(亡者)는 편히 잠들어야 하건만……. 망자가 지닐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길. 안식마저 망쳐놓다니. 그걸 생각하니 더욱 더 욕이 튀어나왔다.

조정간을 반자동으로 설정한 후 침착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놈들을 향해 총을 쐈다. 평균 속도는 느리지만 저런 놈들이 동료를 고기 방패삼아 달려오기 시작하면 막을 수가 없었다. 먼저 오는 놈들의 얼굴이나 팔, 발 등을 집중적으로 쏘기 시작했다.

이동 속도가 줄어들거나 이동 수단을 잃은 놈들은 나중에 원거리에서 죽일 수 있지만, 촉수를 먼저 없애버리면 고통으로 인해 마구 날뛸 수도 있었기에 제1 겨냥 순위는 그들의 얼굴이나 팔, 발이었다. 가까이 오지도 못하는 촉수는 위협의 축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이동 수단을 잃은 놈들은 괴성을 지르며 촉수를 마구 흔들어댔다. 그런다고 닿겠냐, 바보들아……. 이동속도가 느리다지만 어디까지나 평균. 초록색이나 청록색 촉수괴물에 비해 느리다는 거지 결코 굼벵이가 다가오는 속도는 아니었다. 놈들이 점점 다가올 때마다 초조함이 늘어났고,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자마자 바로 벌떡 일어섰다.

원래라면 ‘엎드려 쏴’ 자세로 쏴야겠지만……그러다 뒤에서 적이 나타났다간 일어서지도 못하고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놈들은 괴물이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예전처럼 성벽을 타서 입구 위에서 내려올 가능성도 있었기에 언제든지 도망 및 이동이 용이한 자세로 사격을 해야 했다.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쏘던 나는 곧바로 투영마술을 사용했다. 검의 형태조차 갖추지 못한 철 찌꺼기들이 허공에 나타난다. 내가 하는 일에는 일절,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이 다가오는 괴물들을 보니 흐뭇하다.

“스스로 뒈지러 와줘서 고맙다, 바보들아!”

투영이 끝난 철 찌꺼기가 놈들을 향해 날아간다. 청록색 촉수괴물한테도 강력한 타격을 주던 철 찌꺼기다. 스쳐도 중상, 맞으면 사망이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시체나 다름없던 붉은색 촉수괴물한테 있어 철 찌꺼기는 그야말로 최악의 궁합(宮合)이었다.

맞자마자 신체 일부를 자르며 날아가는 건 예삿일이었다. 철 찌꺼기가 푹 소리와 함께 박히자마자 꿈틀대다 죽은 놈, 촉수가 다 잘려 괴성을 지르다 죽은 놈 등. 다양한 반응과 함께 괴물들은 목숨을 잃어갔다.

예전의 나는 그녀들을 차마 쏘고 싶지 않았지만 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과 싸워야 했으며, 괴물이든 마을 주민이었든 간에 내 적이 된 이상 살려둘 수는 없었으니까. 어설픈 동정심 때문에 내 목숨을 잃어야 한다면 아예 처음부터 동정심을 안 가지는 게 훨씬 나았다.

이 마을에 살던 주민들? 불쌍하다. 죽은 것도 불쌍하지만 죽은 후에 카인한테 이용당하는 것도. 저항조차 못한 채 괴물로 살아야 하는 것도. 모두 다 불쌍했다. 생각 같아서는 모두의 묘지라도 만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 근데…….

“나도 존나 불쌍한 놈이거든?”

그래. 그게 정답이었다. 다른 사람 힘들고 불쌍한 거? 안다. 한국에서도 그랬고 여기서도 그랬다. 나보다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 나보다 불쌍한 처지에 놓인 사람. 많이 있었고 흔하게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너희가 나보다 힘들고 불쌍하다고 해서 내가 힘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

그 한 마디로 모든 걸 정리할 수 있었다. 당장 그녀들을 불쌍하게 여겨 죽이지 않는다고 치자. 그럼 나는? 식량도 없이 굶어 죽으라고? 싫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다. 산 사람인 내가 살아남아도 모자랄 판에 죽은 주민들을 걱정하라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지랄!

지금 그녀들을 죽이는 것은 오히려 그녀들을 안락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괴물로 이용 받을 필요도,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날뛸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녀들을 죽임으로써 나는 마을을 둘러보는 활동이나 휴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지고 그녀들 또한 괴물로 살 필요가 없어진다. Win-Win. 그야말로 모두가 행복한 일 아니겠는가?

예전에 사람들을 향해 총 쏘는 걸 싫어하던 세린은 어디 갔냐고?

“그 새끼 뒈졌다.”

오오, 명중. 미간에 깨끗하게 총알을 맞은 괴물은 끽 소리조차 못 낸 채 푹 쓰러져버렸다. 나이스 샷.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아, 그래. 예전의 그 신세린은 뒈졌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뉴(New) 신세린’이라는 말은 아니고. 뉴는 무슨 얼어 죽을 뉴야. 쪽팔리게시리.

농담 같았지만 사실이었다. 내면의 목소리를 인정하며 그녀들을 원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예전의 신세린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신세린은 끝까지 아내들을 믿으려 했었지. 그 신세린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생각하니 참으로 웃겼다. 지금도 그녀들을 믿으려 하는 주제에 뭐가 ‘뉴 신세린’이야…….

여중생이나 여고생이 감성을 소중하게 여기듯이 예전의 신세린 또한 사랑과 믿음(신뢰)을 소중히 여겼었다. 아, 혹시나 싶어 말해두지만 사랑이나 신뢰를 전혀 소중하게 여기고 있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지금도 소중하게 여기고는 있다. 단지 예전만큼은 아니라는 뜻이지.

그녀들을 원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내면이나 생각이 확 바뀐 느낌이 들었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건 카인이지만 그걸 빌미로 날 버린 아내들을 욕하니 점점 나 자신이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상쾌했다. 신났다. 더 이상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하늘을 날 것 같이 기뻤다.

저 사람들 또한 소중한 생명이자 존재라는 생각? 아, 든다. 그치만 그것뿐이다. 생각이나 마음만으로는 누구 하나 구할 수 없었다. 당장 수도까지 가기 위해 저 괴물들을 쏴죽여도 모자랄 판에 마음이나 생각이 날 구해주지 않는다면……당연히 버려야 하지 않겠어? 있어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감상적인 생각은 그냥 개나 줘버려라. 나는…….

“살아남을 거다……!!”

철 찌꺼기, 쪼가리가 미친 듯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른다고 그들한테 소리치긴 했지만……정말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군.

철 찌꺼기가 앞으로 나갈 때마다 앞으로 튀어나오는 그들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빨리 처맞아서 저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쌓여가는 동료의 시체를 밟고 점프할 정도로 신체능력이 높지는 않았기에 비좁은 시체의 틈. 혹은 시체 더미를 돌아오는 놈들은 더 죽이기 간단했다. 안 그래도 속도가 낮은데 바보 같이 낑낑대며 죽으러 오다니. 너희 바보지? 응?

사격과 투영마술 덕분에 1,300 정도의 MP를 소모했다. 아직 3,000 정도의 MP가 남아 있었지만 움직이는 적은 거의 없었다. 30분 정도 지났나?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언제 어디서 습격할지 모르는 적의 습격에 극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기에 피로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물을 마신 나는 천천히……하지만 습격 받지 않도록 주의하며 마을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시체가 된 놈들한테는 혹시 몰라 총알을 한두 발씩 박아줬기에 갑자기 일어나 습격하는 짓은 불가능했다. 내가 이런 쪽으로는 철두철미하거든.

손과 발이 관통당해 촉수만 휘적거리던 놈들은 여전히 그 짓을 반복하고 있었으며, 죽은 후에도 안식을 얻지 못해 가엾다고 생각하며 총알을 박아줬다. 불쌍하다고 내 목숨 바쳐야 할 이유는 없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쓰러진 놈들 중 신음을 하는 놈, 꿈틀거리는 놈, 날 보며 입맛을 다시는 놈들한테도 확인사살 겸 공격을 넣어줬다. 신음하는 놈이나 꿈틀거리는 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내 목숨을 노리는 놈을 살려둘 정도로 난 착한 놈이 아니거든. 남 목숨 노리려 했으니 죽어도 할 말은 없을 거다.

날 보며 입맛을 다시는 놈은……으음. 촉수 없고 정상적인. 그 있잖아, 서큐버스 같은. 만약 얘가 그런 타입이었고 나한테 ‘몬스터 테이밍’ 마법이 있었다면야 이야기는 달라졌겠지만……역사나 현실에 IF는 없거든. 그러니까 죽어라.

한 때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 불렸던 독재자 대통령. 민주화를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그 독재자를 쐈던 것처럼 나도 총을 쏴줬다. 탕탕탕! 으하핫, 거 봐라. 독재자든 반신반인이든 간에 총알이랑 죽창이면 한 방이라니까?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죽창! 아아, 좋다. 이 세상에 ‘죽창’이라는 무기는 없나? 있으면 하나 정도는 가지고 싶은데…….

비록 나를 향해 달려들던 괴물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들은 원래 사람이었다. 이 마을의 주민이었지. 로라나 메이처럼 경비대에 관련된 사람도 있었을 거고, 아이나처럼 이 마을의 촌장이었던 사람 또한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모녀(母女)나 자매(姉妹)가 모두 괴물이 되었을 수도. 혹은 친했던 누군가한테 잡혀 먹혔을 가능성이 다분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봐도 정말 그 당시의 나. 지금 마을을 돌아다니며 확인사살을 해대는 신세린은 정말 미친놈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면의 목소리를 받아들이라 했지 인간성을 버리라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지금 내 모습을 봐라. 그야말로 미친놈이 따로 없지 않은가? 콧노래까지 부르며 확인 사살을 해대는 내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미친놈이었다. 미친놈이 괴물을 잡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니. 카오스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인간성이나 죽은 사람들을 위한 애도(哀悼)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거 같았다. 그 당시의 나. 이야기의 기준으로 치자면 ‘현재의 신세린’한테는 말이다. 자기를 보는 눈이 건방지다며 총을 쏴대는 그 모습에서는 예전의 착실함이나 인간성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본인인 내가 봐도 말이다.

“흥↗♪ 흥↘♪ 흥↗♪ 흥↗♪ 후레데리카↗ 자, 이제 대강 다 죽인 거 같은데……? 한 바탕 싸워서 배도 고프겠다, 먹을 거나 찾으러 가보실까? 제발 더러운 피나 살점만 안 묻어있으면 좋겠는데…….”

식량을 챙겨야 했지만 굳이 그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애도보다는 당장의 배고픔을 더 중요하게 여기다니……. 아내들이 이런 내 모습을 봤다면 과연 뭐라고 할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이딴 짓을 해놓고 내가 인간이냐고?

“당근 빠따쥐~. 그럼, 너네는 인간이냐? 너희를 위해 노력한 날 버린 주제에? 나랑 섹스할 때는 영혼이라도 줄 것 같이 앙앙 대던 년들이……카인 자지랑 자짓물 본 다음부터는 아주 좋아 죽었지? 더러운 년들……퉷!”

괴물의 시체에 침을 뱉었다. 누군가의 시체를 뒤지거나 확인사살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인간성의 유무(有無)를 의심해야 했지만……더 이상 ‘저 새끼가 진짜 인간인가?’하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다. 더러운 놈. 어딘가에서 그렇게 나를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

“괴물이면 좀 어때? 어차피 내가 괴물이든 사람이든 간에 너희는 하반신에 뭐가 박히기만 하면 좋아하는 창녀들 주제에…….”

울고 싶었다. 어쩌다가? 내가 어쩌다가 이토록 변해버렸을까? 이게 정말 나인가? 여기 왔을 때부터 【내면의 목소리】를 인정하기 전까지 노력하던 인간 신세린이란 말인가? 내가 이토록 짐승 같이 변할 수 있었던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변모할 수 있었던 요소가 있었던가? 아니……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정말 신세린인지 어떤지조차 의심될 정도였다.

그러나 괴로워하는 정신과 달리 몸은 매우 상쾌하게 앞을 향하고 있었다. 엔돌핀과 아드레날린이 마구마구 뿜어져 나왔으며 가벼운 트랜스(흥분) 상태까지 적용된 거 같았다. 콧노래와 함께 추임새를 넣는 나를 보니 역겨웠다. 그와 동시에……슬펐다.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들을 모욕하고 조롱하면서까지 자기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떨어져 버리다니. 나도, 아내들도. 누구 하나 잘못한 것은 없는데 창조주이자 절대자의 유희(遊戱) 때문에 서로 이토록 틀어져 버리다니.

잘못은 카인이 했는데 싸우고 헤어지게 된 건 나와 아내들. 피해를 본 건 아무런 죄도 없던 사람들. 지옥이나 다름없어진 세상 속에서 정신줄을 놓은 채 자기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려 하는 나를 보니 참으로 불쌍했다. 이게 내 인생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손을 내밀었을 거다. 이런 건 옳지 않다고. 다른 방향으로 변해 가야 한다고 말이다.

웃긴 건……현실 세상이든 여기든 간에 그렇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거다.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딴 식으로 행동하고 살아가는 거겠지. 옛날도 없었고 현재도 없는데 미래에는 있을까?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가능성에 희망을 걸 생각은 없었다.

“……훌쩍, 흐윽……!”

“……응?”

먹을 걸 찾기 위해 어디부터 둘러봐야 하나 고민하던 중 무언가가 들려왔다. 희미해서 듣기 어려웠지만 조금씩 그 소리가 들려왔고 그게 곧 울음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울고 있는 건 아니니 틀림없이 나 외의 다른 사람이 울고 있다는 건데……?

괴물은 울긴 울었지만 ‘그어어어’ 같은 괴성 등을 냈지, 사람처럼 울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괴물들을 죽이는데 마음의 상처나 망설임 없이 총을 쏠 수 있었지. 그건 카인한테 고맙다고 생각해야 할까? 에이, 관두자. 나한테 제일 고마운 건 그놈이 죽는 거니까.

혹시나 싶어 총을 든 채 전후좌우(前後左右)를 확인하며 천천히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내가 다가오는 걸 깨달았는지 더욱 더 울음소리가 커졌고 그 덕분에 사람이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람이라니……이 지옥 같은 곳에서 사람이 살아남았단 말인가?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일어났지만 이내 그것을 죽였다. 혹시나 감염자라면 변이(變異)가 일어나기 전에 죽여야 했다. 동정심? 너희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 보긴 봤니? 동정심은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니까? 내 몸을 지켜주는 건 오직 나와 내 무기뿐이다.

“거기 있는 거 아니까 나와.”

명령조로 말하다니. 미친 새끼. 예전이라면 ‘혹시 거기 누구 있어요?’라고 물었겠지만 이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명령부터 했다. 아내들이 나를 본다면 어떻게 말할지 궁금했다. 울음소리는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나는 모른 척할 생각이 없었다.

“난 괴물도 아니고 너를 해칠 생각도 없어. 다시 한 번 말한다. 나와.”

거짓말은 존나 잘 해요. 해칠 생각이 없다고? 감염자면 바로 쏴죽일 놈이 어느 주둥아리로 그딴 말을 하시나? 내 육체와 행동을 격렬하게 비난했지만 몸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안 나오면 저 괴물들이랑 똑같은 걸로 간주하고 쏜다. 5초 내로 나와라. 5, 4……”

“사, 살려주세요! 아, 아니에요! 전 괴물이 아니에요!”

어때? 확실하지? 그렇게 【변해버린 내면의 목소리】는 나한테 동의를 구하며 자랑을 했다. 말을 안 들으면 매가 약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그 꼬라지는……차마 봐줄 수가 없었다. 변해버린 의식과 행동을 비난하지만 이런 나(정신)조차 언제까지 정의로움을 가지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너진 건물 사이는 매우 좁았지만 그곳에서 가까스로 나오는 여자는……상당히 왜소(矮小)했다. 150cm 정도였지만 가슴은 컸기에 예전에 죽은 키리를 연상시켰다. 오랜만에 여자를 보니 하반신이 불끈거린다. 그래, 이런 이벤트도 괜찮겠지…….

더러운 상상과 눈빛을 조금은 눈치 챈 건지 그녀는 찢어진 옷가지 사이로 보이는 살갗을 가린다. 그녀밖에 없는 건가……뭐, 좋다. 현 시점에서 이곳에는 우리 둘뿐이고, 시간은 넘쳐흐르니까 말이지…….

이미 예전의 신세린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나였지만……그런 ‘신세린’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 그녀의 운명은……결코 평탄하지는 않을 거 같았다. 그건 예감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고, 그 확신은 머지않아 현실이 된다는 것을……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새로운 마을과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입니다. 아내들과 현실을 저주하던 세린이 마침내 미친 거 같네요. 온갖 드립이 마구 나옵니다. 프레데리카까지 나오는 거 보니 확실히 예전과는 달라졌구나 싶네요.

극단적인 환경에 있으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도태될 것인가, 그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며 살아남을 것인가. 얼마 없는 MP를 아껴가며 전투를 벌이는 세린의 모습은 어떻게 보더라도 후자네요.

여러 가지 드립이 나오긴 했는데 이걸 쓰면서도 '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드립을 쓴 걸까?'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아, 프레데리카는 그냥 '특이한 아이돌이네'라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시마무라 우즈키도 귀엽긴 한데 뭔가 무개성 느낌이 나서…….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dsaxcw2님, 세린의 ㅂㄷㅂㄷ은 내면의 변화와 앞으로의 활약을 위한 희생입니다.

희생당한 겁니다. 세린은……독백에 의한 희생, 희생에 의한 희생……그, 희생물로 말입니다. (어둠의 다크 삘나게)

새로운 캐릭터도 만났고 해야 할 일도 늘었으니 예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겁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고양이새벽님,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했으니 세린한테도 약간의 안식이 주어지지 않을까 싶네요. 사람이 너무 혼자 있으면 위험한 방향으로 엇나갈 수도 있으니 일종의 브레이크 역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19금 합체! 애들은 가라! 표현도 있겠죠.

이상입니다. 좆같은 회사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든데 오늘은 일도 있고 해서 빠르게 업로드했습니다. 내일부터는 다시 직장 업로드를 할 생각이니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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