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7 「18-6 : 종언의 카운트다운 (7)」 =========================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원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라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다. 계시(啓示) 혹은 알려지지 않은 것의 폭로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에서 유래된 이 단어는 쉽게 말해 ‘종말(終末)’을 뜻했다.
예를 들어 ‘핵폭발이 있은 후에 사람은 어떻게 살아남을까?’라는 걸 주제로 삼는다면 뉴클리어 아포칼립스(Nuclaer-Apocalypse)가 되겠지. 핵폭발 이후에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게 될 것인가 등을 다루게 되므로 이러한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열띤 토론의 장을 갖게 하는 테마 중 하나다.
단어에 따라 다르겠지만 포스트가 ‘~이후’를 나타내는 접두사이기도 하므로 ‘계시 혹은 종말 이후의 이야기’라고 직역(直譯)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어나 외국어에 약한 나한테 자세한 것을 묻는다고 한들 정확히는 모르고 찾아낼 방법도 없으므로 너무 따지지는 말자.
좀비 아포칼립스는 말 그대로 좀비 사건이나 발생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군이다. 새벽의 저주, 좀비, 바탈리언, REC 등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장르 및 작품으로 나왔기에 한 번 정도는 본 적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없어도 상관없다. 쉽게 말해 ‘좀비 발생 → 우린 좆됐어’ 정도로 해석하면 되니까.
좀비 아포칼립스가 발생하게 된다면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좀비 및 감염의 우려가 있는 것들과의 접촉을 피해야만 한다. 잘못 스쳤다간 그걸로 좆☆망! 머지않아 좀비가 되어버리게 될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목숨만큼 소중한 것은 없기 마련인데 그 목숨 자체가 서서히 다른 생명체(괴물)로 변하게 된다니. 이런 호러가 어디 있겠는가?
좀비만 해도 버거운데 좀비 및 사람을 사냥하는 사람 사냥꾼부터 시작해 미친놈, 이상한 놈, 정상이 아닌 놈들 등 온갖 사람들도 등장한다.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는 말이 나온 이유를 바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물리적인 힘을 지니지 않은 귀신은 사람을 건드릴 수 없다. 응? 물리적인 힘을 지니지 않았는데 사람 죽이는 건 뭐냐고? 그거야 나도 모르지! 사후세계(死後世界)를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너님이 한 번 죽어볼텨?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귀신과 달리 형체도 있고 물리적인 힘도 가할 수 있다. 거기에 악의(惡意)나 살의(殺意)까지 더해지면? 귀신보다 무서운 사람의 탄생이지.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었다. 귀신은 마음먹으면 사람을 죽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은 마음가짐에 관계없이 사람을 해(害)할 수 있으니까.
이야기가 좀 벗어났다만……좀비뿐만 아니라 감염, 사람. 모두 다 피해야 하는 것이 좀비 아포칼립스였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룬 작품, 그곳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매우 흥미진진한 것들이지만 지금은 ‘하렘 어드벤처’를 다루는 시간이기에 자세한 것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자.
좀비나 다름없는 변모(變貌)를 본 나는 그 지옥 같은 마을에서 탈출했다. 안개는 사라졌지만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는 팔자였기에 그저 바보 같이 걷기만 했다. 너무 걷다 보니 물집이 생겨 이러다 최장거리 행군 기록 세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괴물과의 전투는 다 합쳐도 10번도 되지 않았다. 괴물과 싸우는 것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대부분 한 마리. 많아도 두 마리 정도였다. 전투를 벌일 때는 최대한 투영마술을 사용해 소음발생을 막았기에 놈들의 응원군이 오는 일도 없었다.
레벨 37이 되었기에 HP와 MP가 상승했으며,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은 높아졌다는 걸 깨달으니 마음도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걸 기뻐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좀 에러다만.
걸어가는 동안 생각하던 것은 좀비 아포칼립스를 연상시키던 마을의 모습이었다. 괴물로 변한 사람. 내장이나 장기가 촉수가 된 듯한 붉은색 촉수괴물. 성벽 위에 있던 정액으로 추론해볼 때……매우 난잡하면서도 엉성한 해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내들을 놔둔 채 어딘가로 자주 사라지고는 했다던 카인. 아마 그가 향했던 곳은 내가 탈출한 마을이었을 거다. 그곳에서 왕이나 임금이라는 칭호 아래 섹스 파티를 벌인 거겠지. 놈과 관계를 맺은 여자들은 카인에 의해 죽은 후. 혹은 죽기 전에 괴상한 조짐을 보이며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난잡하고 근거도 없고 이유도 볼 수 없는 생각이었기에 ‘내 창의력이 겨우 이 정도인가’하는 생각이 들더군. 그치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정보는 너무나 부족했고 이제 와서 놈의 목적이나 행동에 대해 생각한들 뭐가 달라지겠어?
벗겨진 은색 비키니 아머에서 떨어진 정액. 카인이 밤마다 나갔던 시간과 이유. 그런 것들을 조합하니 이상하다만 그런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틀렸다고 감점(減點)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만……그걸 생각하니 불안함이 물씬 풍겨온다.
설마……내 아내들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니겠지? 왕궁에 있는 내 아내들도 그런 모습으로 변해버리는 건 아니겠지!?
그녀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나타낸 나였지만……역시나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없었다. 카인의 자지를 빨며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을 그녀들을 증오하고 저주하면서도 혹시나 그녀들이 좀비 같이 변하지 않을까 걱정하다니. 등처먹기 쉬운 호구 병신. 그게 바로 나였다.
혹시나 내 아내들이 그렇게 변하지 않을까? 마을에 있는 여자들한테 했던 것처럼 내 아내들한테도 이상한 정액을 주입한 건 아닐까?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기는? 아기는 무사한 걸까? 이제 곧 8개월로 접어드는데……!!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녀들은 이제 곧 임신 8개월로 접어든다. 조금만 더 있으면 9~10개월이 되므로 언제 아기가 태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절대적 안정을 취해도 모자랄 판에 그녀들을 좀비나 괴물로 만들지도 모르는 놈과 함께 있게 하다니……난 대체 뭐하는 놈이냐? 이래도 남편이냐?
‘이봐, 이봐. 아니지……그 잘난 아내들이 카인과 있는 걸 선택한 거잖아? 왜 너를 핍박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던 아내들을 걱정하는 건데? 좀비가 되든 괴물이 되든 그건 그녀들의 선택이니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봐주자고…….’
아냐……그녀들은 모른다. 카인에 대해서도, 하얀 머리의 여자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들은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선택을 강요받은 것이다. 정신지배와 세뇌에 의해……. 그런 아내들한테 모든 죄나 책임을 떠넘길 수는…….
“……있지.”
내 입에서는 싸늘하디 싸늘한 말이 나왔다. 말이 온도를 가진 것도 아닌데 주변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평생의 사랑을 약속한 년들이 자기들 위해 희생한 아버지나 남편은 나 몰라라 하고 다른 남자의 자지나 빨고 있다니……개 같은 년들…….”
그녀들이 들었으면 분명 충격과 상처를 받을 말이 마구 튀어나왔다. 그녀들을 감싸려고 하던 사고방식은 단숨에 날아가 버렸으며, 아내들에 대한 매도를 지껄인 입은 너무나 즐겁게 웃고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고? 그럼 나는? 나는 뭐 알고 싶어서 이런 걸 알았을까? 카인부터 시작해 이 세상의 진실에 대해 죽고 싶을 정도로 알고 싶어 했냐고?
전혀. 몰랐으면 몰랐지 딱히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어느 바보가 소중한 섹스 라이프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딴 진실을 알고 싶어 하겠어?
알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깨닫게 되었고, 희생과 고통을 강요받게 됐다.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 꿈같은 세상으로 왔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현실 세상이 사회와 부조리, 불합리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세상이라면 여기는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미친 연놈들한테 지배받는 곳이었다.
현실 세상에서 그나마 존재하던 인권(人權)은 이곳에서는 아무 소용도, 쓸모도 없었다. 몸과 정신을 원하지도 않는데 지배당하는데 인권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인권을 부르짖는다고 한들 카인이나 머리 하얀 미친년이 ‘미안해’라고 말할까? 그런 생각이나 할까? 그런 생각을 할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아예 아무 짓도 안 했겠지! 왜 흔히들 말하잖아.
‘사과로 끝날 거 같으면 경찰은 뭐 하러 있냐? 법대로 해결하자!’라고. 사과할 거 같았으면 처음부터 아예 안 했어야지. 사람과 짐승의 가장 다른 점은 누가 뭐라 해도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없는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지려 한다. 그게 인간이자 사람, 사회인이자 어른의 태도니까.
그치만 카인이나 그 시발년은 전혀! 아예 그런 생각이 없었다. 이곳에 소환한 사람한테 소환 허가를 받지 않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죽든 말든 뒈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런 주제에 살아남는다 치자면 강한 괴물이나 여행 이벤트를 제공함으로써 더욱 더 짜증을 나게 만들었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없는 세상이었기에 그런 걸 바라며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긴 하네’라고 생각했었지만……설마 그 시궁창 같았던 현실 세상에 손을 들게 될 줄이야. 그 빌어먹을 세상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당사자인 나도 몰랐었는데 그걸 알았다면 점쟁이겠지.
혹시나 독자들 중 이렇게 될 거라 예상했던 사람이 있다면……돗자리 깔아라. 내가 첫 손님이 되어주마. 이왕 점보는 거 연애운, 재물운 등 여러 가지 좀 알아보자. 내 사랑스럽디 사랑스러운 아내들은 이미 내 곁을 떠났으니 새로운 연애를 찾아야지. 이번에 찾거든 기가 약한 아내를 찾아야겠다. 안즈처럼 기가 세면…….
“……안즈야.”
최근에 혼잣말이 늘어났지만 그 중 일부는 아내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가장 많이 부르게 된 것은 놀랍게도 안즈였다. 최근까지 함께 여행을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카인한테 정신지배를 받지 않아 그런 걸까? 어느 쪽이든 간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빈도가 많은 건 사실이었다.
왜 수도로 돌아가려 하냐고 묻는다면……카인을 죽여야 했으니까. 죽이고 싶었으니까. 상황을 이 지경까지 몰고 간 그를 죽여야 한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안즈가 걱정돼서 가려는 것도 없지는 않았다. 내 아내들 중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여자였으니까.
그를 죽여야 한다는 목적은 있었지만 우습게도 카인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압도적으로 쳐발리기까지 했던 내가 이제 와서 그를 죽일 수 있다고? 내 아내들과 마력, 마법, 아이템을 모조리 빼앗기기까지 했는데? 이런 상태에서 카인을 죽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병신이었다.
사람은 여러 종류로 나눌 수 있지만 ‘병신’이라는 카테고리는 두 개의 카테고리가 존재했다. 자기 능력을 알고 있기에 책임을 질 수 없는 일, 하기 힘든 일에는 손을 안 대는 병신. 자기 능력도 모르고 한계도 뻔한데 ‘괜찮아, 어떻게든 될 거야’라며 온갖 짓을 다 벌여놓는 병신.
내가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부끄럽지만 전자(前者)라고 생각했다. 왜 부끄럽냐고? 병신이라는 것 자체가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 거니까. 잘난 병신이든 못난 병신이든 간에 병신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간 것 자체가 부끄러이 여겨야 할 일이었다.
내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이건 할 수 있는 일, 저건 할 수 없는 일 등을 구분하고 분간해 왔다. 그런 것조차 못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기에 어떻게든 현실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 세상에 와서도 살아남는 것만큼은 어찌 어찌 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하핫, 전설의 용사가 된 신세린! 이곳에 등장! 이 못된 괴물들! 모두 다 쓸어주마!’라며 주제도 모르고 겁도 없이 덤벼들었다간……이렇게 186편까지 진행할 수도 없었겠지. 바로 죽어나가지 않았을까?
살아남은 것도 엄밀히 말해 M16A1의 자동사격 모드 덕분이었으니 까놓고 말해 몸을 사리며 도망칠 줄 알아서 살아남았지, 능력이 뛰어나서 살아남은 것은 아니었다. 뭐……내가 가진 능력을 아예 발휘하지 않은 채 살아온 건 아니었으니 아주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만.
어느 쪽이든 간에 카인을 죽일 정도의 능력은 없었기에 지금도 카인을 죽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불안을 품고 있었지만……그것뿐이었다. 이미 죽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싸워본(정확히는 처발려본) 적이 있었기에 남은 건 도전뿐이었다. 막말로……그럼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걸까?
도망치라고? 어디로? 어떻게? 이 ‘하렘 어드벤처’ 자체가 놈이 만든 세상인데 이곳의 어디로 도망을 가란 말인가? 도망을 가게 놔주기나 할까? 당장 잠들면 꿈에 놈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퍽이나 도망을 갈 수 있겠다.
자살? 내가 자살할 거 같았으면 그 마을에 있거나 왕궁에서 뛰어내렸겠지! 죽는 건 싫지만 스스로 죽는 것도 싫었다. 못 하는 것도 있었고 안 하는 것도 있었다만……자살도 결국 도망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죽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싫다. 그럼 남은 선택지는 하나잖아.
“싸우는 거지…….”
오늘로 거의 6일째 걷고 있어서 그런지 혼잣말이 계속 나왔다. 말벗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생각하던 걸 그대로 입에 담으니 가끔은 내가 말을 한 건지 귀신이 말을 한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망할. 나한테 욕해도 좋으니 안즈라도 곁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걱정되는 것은 안즈의 신변(身邊)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겪고 있는 최악의 사태 이상으로 더 나쁜 최악은 없었기에 내 뇌는 평소 하지 않았던 불길한 생각을 마구 뿜어대고 있었다. 가끔은 카인조차 탄복할 정도의 사태를 예상하기도 했기에 혹시 나한테 정신병자의 기질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 말은……정신병자. 있잖아, 완전히 실성한 사람. 정신병을 앓는 일반인 말고, 완전히 미쳐서 사물이나 상황의 판단을 할 수 없게 된 사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니까?
내가 소환됐다고 해서 안즈도 다른 곳에 소환됐다는 법칙은 없었다. 나만 이상한 마을로 소환되고 안즈는 그 좁고 허름한 침실에 남은 채 내가 없는 아침을 맞이했을 수도 있겠지. 이쯤 말하면 내가 뭘 말하고 싶은지도 알 거라 생각하는데? 지금까지 온갖 최악의 사태를 맞이했으니 이 정도 말하면 바로 견적이 나와야했다.
……안즈마저 카인의 손에 넘어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랑과 신뢰의 반지’는 여전히 나한테 1,000 포인트의 MP를 공급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안즈가 아직 놈한테 지배받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은근히 편하면서도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아이템이었지만……그걸 보니 다시금 슬픔이 밀려온다. 안즈가 무사하긴 하지만 언제까지고 무사할 거란 보장은 없었다. 카인은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는 거다. 안즈의 정신이나 몸 따위 언제든지 지배할 수 있으면서 안 하는 거란 말이다.
슬픈 게 그거 하나만 있는 줄 아냐? 아내들과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던 밤 또한 슬펐다. 아내들한테 온갖 매도와 모욕을 한 후 계속 걷던 나는 아내들과 나누었던 이야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걸 생각하다보니 참으로 웃기면서도 무서운 걸 알아낼 수 있었다.
왜 이야기를 하던 도중 ‘사랑과 신뢰의 반지’의 효과가 발동하지 않았던 걸까? MP를 얻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내 말은……왜 사랑과 신뢰를 보내지 않았냐는 거였다. 날 소중하게 여긴다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그럼 대체 왜 사랑과 신뢰의 반지는 반응을 하지 않은 걸까?
마력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와서 그게 많다고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아내들한테서 받는 사랑과 신뢰. 진실된 마음이었다. 내가 그녀들을 사랑하는 만큼 그녀들 또한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랐다. 그게 가족이었고, 부부였으며, 연인이었으니까.
근데 이게 뭐야? 그 당시 ‘사랑과 신뢰의 반지’는 반응하지 않았다.
야, 이게 뭐야?
대체 이게 뭐냐고?
너희가 말하는 사랑과 신뢰는 말만 번지르르한 거냐? 그냥 ‘지금은 미안하다, 사랑한다고 말해서 이 상황을 어떻게든 넘기자. 지금만 모면(謀免)하면 나중에는 어떻게든 되겠지’ 정도의 개념이냐? 응?
나를 사랑한다, 미안하다 하면서도 진실된 감정이 오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니 더 무서웠다. 그 원인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아예 그 대화의 자리조차 카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가정(假定)이었다. 나한테 정신적인 타격을 주는 방법을 그렇게 잘 아는 놈도 없겠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사실은 카인에 의해 조종 받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 입으로는 사랑과 사과를 부르짖어도 MP에는 변함이 없었던 거겠지. 지배받고 있는 사람의 정신이 온전할 리가 없잖냐. 그저 입만 벙끗하면 되는데.
이와 반대로 ‘아냐, 아내들은 제정신이었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만약 그랬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었다. 두 번째 원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첫 번째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게 뭐냐고? 바로 ‘제정신으로 돌아왔지만 이제 신세린은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한 거지!!
세상에! 그걸 생각하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었다. 귀신이나 누군가가 나를 째려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말이다! 너무나 무섭지 않겠는가?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 우리를 잃었다고 더럽게 호들갑 떠네……왜 이딴 놈을 좋아했을까?’라고 생각하는 아내들이라니!? 한기(寒氣)가 느껴질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눈물은 여자의 무기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틀린 말 하나 없었다. 날 사랑하지 않지만 변명을 하지 않으면 격한 감정을 보일 테니 아예 죄책감을 갖게 하자는 생각이었겠지. 눈물 좀 짜면서 미안하다고 하면 호구 같은 나는 괜찮다며 웃어넘길 테니까!
그녀들이 조종 받고 있었는지 맨정신이었는지는 모르지만……만약 맨정신. 그야말로 멀쩡한 정신 상태였다면 그것만한 충격은 없었다.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예전처럼 사랑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니.
“그럼 대체 너희한테 있어서 나는 뭐였는데?”
슬프고, 괴롭고, 힘들고, 억울했다. 분노가 저절로 일어난다. 조종 받고 있던 거라면 그나마 면죄부(免罪符)가 생긴다만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니. 그거야말로 최고의 공포이지 않은가?
그럼 대체 나는 그녀들한테 무엇이었을까? 카인을 좋아하게 됐는데 갑자기 들어온 훼방꾼? 불청객? 예전에는 사랑한다는 명목 아래 이용하기 좋은 꼭두각시였지만 멋진 남자와 편안한 생활을 얻은 후에는 상대하기조차 싫은 버러지?
섹스를 할 때는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로 교태와 아양을 떨었던 주제에 이제 와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다니!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인정하란 말인가?
자기가 그녀들 입맛대로 이용당하고, 온갖 힘든 힘이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까지 모조리 다 한 다음에 깔끔하게 버림받았는데……그걸 인정하라고? 깨끗하게 인정하라고? 씨발, 개좆같은 소리하네!
난 싫다! 그렇게 이용당하고 버림받는 게 싫어서 지금까지 노력했었는데! 그녀들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버리지도 않고 이용하지도 않을 거라고……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럼 대체 현실 세상과 여기가 뭐가 다른 건데!?
현실에서는 부모님한테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한 것도 모자라 원하지 않는 빚까지 만들었었지. 그건 싫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하기 힘든 공부, 짜증나는 일을 평생 해야 하는 건 더 싫었지.
근데 이건 또 뭔데? 종 부리듯 하인 부리듯 온갖 일을 다 했더니 그 조그마한 사랑과 신뢰하나 안 보내주다니? 볼 일 다 본 놈한테는 더 이상 볼일 없다 이거냐? 그 어떤 괴물이든 손쉽게 없앨 수 있는 왕 옆에서 자지와 좆물, 사랑만 받을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이거냐?
“난 너희를 믿었어……너희를 믿었다고 개씨발년들아!!”
야만족의 숲에서도 똑같은 소리를 했었지만 차마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똑같은 대사, 똑같은 레퍼토리. 식상하기 그지없는 부르짖음이었지만 지금의 나한테는 그것밖에 분노를 표출할 길이 없었다. 그저 분노를 꾹꾹 담아 두기에는 더 이상 늦었고, 그럴 의미도 없었으니까.
“내가 병신이었지, 내가 병신이었어! 뭐? 남편? 아빠? 사랑해? 개좆같은 년들! 너희는 그저 좆물이랑 자지만 있으면 되지? 목숨 걸고 싸운 나를……너희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나를 이렇게 버리다니! 창자를 뜯어다가 줄넘기를 해도 시원찮을 년들아! 너희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아, 아니네! 아스카는 처음부터 괴물이었으니까!”
아스카가 이 말을 듣는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대체 무슨 말을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니 이번에는 단체가 아니라 개인한테 말하는 식으로 말투가 바뀌었다.
“아스카, 우리 아스카! 괴물이면서도 그토록 귀여웠던 아스카야! 그래, 좋니? 널 죽일 수 있었는데도 구해준 나를 이렇게 엿 먹이니 기분 좋지? 좋았겠지! 아주 좋았겠지? 응? 안 그래?”
아스카는 엄밀히 말해 프레그넌트의 괴물 토벌 때 죽었어야 했다. 그녀를 범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녀를 구한 것은 바로 나였다. 나 외의 사람들은 모두 아스카를 죽이려 했었다. 종종 섹스가 끝난 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며 날 꼭 끌어안던 아스카를 생각하니 눈물이 펑펑 흘렀다.
“배은망덕한 년! 이 더러운 괴물년아! 널 구해줬고 새로운 삶까지 줬는데 이게 최선이냐? 이게 니가 사람한테 은혜를 갚는 형태냐? 엉!? 그래, 안 그래도 안목이 최악이었는데 덕분에 교훈 하나 배웠다! 너 같은 괴물년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번 다시 믿지 말라는 교훈 말이다!”
가슴이 아프다. 날 사랑했고 나 또한 사랑했던 그녀한테 이런 폭언을, 모욕을 날려야 한다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지금까지 느껴왔던 슬픔을 뱉어내니 속이 시원했다.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언제는 안 그랬냐?
“고맙다 고마워! 이제 다 끝이다! 끝! 나를 사랑해주지도 않고 믿어주지도 않는 너희 구하려던 내가 병신이고 등신이고 머저리였지! 퉷! 마리아랑 그렇게 아양을 떨더니 아주 멋지게 통수를 쳤구나! 너희한테 통수 치는 방법은 가르친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배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으하하하핫! 아하하하핫!”
웃겼다. 평소라면 ‘웃겨서 웃는 게 아니다’라고 했겠지만……어. 정말 웃겼다. ‘자지의 맹세’의 효과도 있었지만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아내들한테 이렇게 멋지게 통수를 맞게 되다니. 웃기지 않은가? 그깟 마법 하나 사라졌다고 이렇게 되다니……!!
“으, 흐흑! 그래, 만족하냐? 만족하냐고……이, 쓰레기 년들아……흐윽……!!”
아아, 마법만……. 하다못해 ‘자지의 맹세’만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 마법 하나만 있었더라면 이토록 비참한 상황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텐데! 나를 향한 감정을 바로 확인해 이렇게 뒤늦게 후회할 일도 없었을 텐데!
모든 걸 잃은 후 하는 후회만큼 어리석고 슬픈 건 없었지만 나한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미 잃어버린 마법과 사랑, 신뢰에 대해 슬퍼하며 연거푸 욕을 해야 했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으니까.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에 슬퍼하던 나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눈물을 흘리며 가다간 수분 부족이나 탈수증세를 겪을 것 같았지만……그건 그때 가서 볼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통수를 맞으면 진짜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입니다. 맞아봤냐고요? 안 맞았으면 이런 글은 쓰지도 못 하겠죠. 개인적인 소감입니다만, 이런 글(통수가 얼마나 좆같은가, 통수 맞으면 어떤 기분인가) 안 써도 좋으니 통수는 안 맞고 싶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좆같습니다.
출판 취소도 문제지만 살아오며 경험한 통수가 한두 개가 아니거든요. 가정환경은 안 좋은데 통수까지 처맞으니 이 모양 요 꼬라지가 된 거겠죠.
가정환경이 안 좋아도 노오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요? 누가 한 말인지 몰라도 그 씨발 개새끼 아가리를 찢어버리고 싶네요. 그건 진짜 존~나 극소수. 아주 적은 케이스에 한하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세상은 가정환경과 재능이 대부분의 요소를 차지하거든요.
이번 편의 세린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능이 없었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그리 좋은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지 못했기에 현실을 저주하고 있었습니다. 비단 이런 사람은 세린뿐만이 아니겠죠. 저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이런 사람들을 이해할 수밖에 없구요.
자식 응원해주고 지원해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라지만, 마음만으로 모든 게 다 된다면 세상에 취업난이나 세대갈등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겠죠. 마음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갈등과 싸움이 일어나는 거고, 그게 몇 백 년 동안 반복된 게 현대 세상입니다. 사람 마음 하나로 어떻게 될 정도로 이 세상은 만만한 게 아니에요 시발 ㅋㅋㅋ ^^
현실 세상에서도 힘들게 살아왔는데 ‘하렘 어드벤처’에서도 그렇게 살아가게 되다니. 온갖 여자들과 즐기며 왕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도 잠시. 웨이브를 타듯이 바닥까지 쭉 내려와 시궁창에 처박히게 된 세린의 모습을 보니 인간 만사는 어딜 가도 마찬가지구나 싶습니다. 세린에 한해서는 카인의 농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결과가 똑같으니 다르다 하기도 뭐하네요.
그러니 여러분, 통수는 치지도 말고 맞지도 맙시다. 물론 어느 쪽이든 살아가며 경험할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가능한 한 통수(배신)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도록 하세요. 그게 제가 여러분한테 드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충고겠네요.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고양이새벽님, 늘 코멘트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리콤MK님이나 고양이새벽님처럼 자주 달아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추천도 좋고 선작도 좋지만 코멘트처럼 독자분들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거든요. 앞으로도 노력하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대해원님, 가면라이더는 헤이세이 시리즈를 좀 보다가 디케이드에서 끊었습니다. 극장판을 보다보니 드라이브나 가이무 등을 약간씩 접하게 됐습니다만, 진지하게 본편과 극장판까지 모조리 다 본 건 디케이드까지입니다. 사실상 그 이후에는 헤이세이 라이더 2기라고 칭하는 게 맞겠죠.
포제 때도 그랬지만 주인공을 연기하신 분들이 안 나오니 스즈무라 켄이치나 카미야 히로시 목소리로 아군적군 모조리 때우는 걸 보니 ‘아, 이건 뭔가 아닌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진짜 삘이 꽂히면 보겠지만 그런 경우가 좀처럼 없어서…….
게다가 고스트? 그런 부분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던가, 일본 무장이나 일본색이 강한 것들이 많이 나와서 볼 마음이 정말 없어졌습니다. 즐거움도 좋지만 나이가 들다보니 일본색이 강한 것들은 조금씩 멀리 하게 되더군요.
일본혐오는 아니지만 너무 강한 일본색은 역사적 지식이나 사건을 흐릿하게 만들 거 같다는 걱정도 한 몫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해, 디케이드 이후에는 극장판 약간 외에는 거의 접하지 않았습니다. 라이더 계열의 지식이 얕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상입니다. 드디어 9월로 접어드네요. 점점 쌀쌀해지는 가을입니다. 여러분도 몸조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