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6 「18-5 : 종언의 카운트다운 (6)」 =========================
“흐, 읏……개 같은 년들……!!”
아내들과 사랑을 나눌 때 과격한 말을 뱉고는 했지만……더 이상 내 곁에 그녀들은 없었다. 현실 세상에 있을 때는 섹스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에 오직 자위(自慰)행위만을 했었지만 이곳에서는 정반대였다. 늘 섹스를 했기에 자위를 할 기회가 오히려 매우 적었었지. 할 필요성도 못 느꼈었고.
아무도 곁에 없는 여행길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무언가를 부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짓 때문에 체력이나 마력을 소비할 수도 없었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데 정처 없이 걷기만 해야 한다니. 목적지 없는 행군이 딱 이런 느낌이랴 싶었지.
괴물과 싸우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초감각(Hyper-Sense)을 가지고 있다고 확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괴물의 기척이나 낌새뿐만 아니라 도시 혹은 사람들의 어수선함도 알 수 있었던 안즈가 없었기에 여행길은 도주, 은폐, 숨을 죽인 채 걷는 도망의 연속이었다.
청록색 촉수괴물은 여전히 황야나 초원에 있었고 난 그들을 피해 다녀야만 했다. 빠져나온 마을 주변은 안개가 끼어 전후좌우 및 시간의 확인이 불가능했지만 반나절 정도 걸으니 사라지게 됐다. 마을 주변에 자욱하게 끼어있던 안개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었다.
붉은색 촉수괴물이 떼거지로 오지 않는 건 좋았지만 그렇다고 청록색 촉수괴물과 다시 싸워야만 하는 현실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당연하잖냐……. 마을 사람들이 괴물로 변했다지만 좀비에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던 붉은색 촉수괴물은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인해전술을 살린 물량전과 끈질김. 그게 그들의 장점이었지만 동시에 약점이기도 했다. 충분한 수가 없으면 바로 각개격파(各個擊破)당해야만 했으니까. 다구리랑 쪽수 앞에 장사 없다고 하지만 그런 전제조건을 부숴버리면 그리 힘든 상대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 이놈의 청록색 촉수괴물은……정말 괴물이었다. 프레그넌트 주변에서 보던 초록색 촉수괴물. 부카케 주변에서 보던 파란색 촉수괴물과 달리 청록색은 그야말로 한 마리 한 마리가 중간보스급의 파워를 지니고 있었다.
투영마술과 소총을 가지고 있다지만 소총은 발사 시 소음이 너무 컸다. 마을 안에서 소총의 사용을 괜히 꺼린 줄 아냐? 그거 때문에 엿 먹은 적이 한두 번이어야지……. 소총에 소음기라도 달 수 있다면 모를까 이 세상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활이나 창도 가끔씩 보는 거지. 대부분은 백병전(白兵戰)을 위한 검이 메인이었으며, 경비대원들의 무기는 대부분 제식용(制式用) 아밍 소드(Arming Sword)였다. 경비대원들도 마법을 쓸 수 있으니 원거리 무기를 굳이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겠지.
이러한 점은 결국 그들한테는 단점으로 적용되고 말았다. 물리적인 충격에 강할 뿐 아니라 마법내성을 지닌 놈들한테 있어 경비대원은 ‘쉽사리 먹을 수 없는 사냥감’ 정도로 인식됐으니까. 나나 야만족, 경비대원들이 놈들한테 엿 먹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주절주절 잡소리를 떠들었지만……결론은 ‘그런 위험한 놈들이랑은 정면승부 안 합니다’였다. 그저 도망쳤다. 더 이상 자존심이고 뭐고 차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내 사랑스러운 아내들은 내가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카인의 자지를 빨며 행복해하겠지. 개 같은 년들…….
“은혜도 모르는 년들……아, 앗……메이야……!!”
나도 정말 웃기는 짬뽕이었다. 그녀들을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년들, 개 같은 년들이라 욕하면서도 딸감으로는 이용하고 있었으니까. 사랑하든 미워하든 간에 하나만 해도 모자랄 판에 욕은 하면서 딸감으로는 쓰고 있다니. 이게 대체 뭘까?
“으윽, 흐윽!”
찌익.
오랜만에 싸는 정액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섹스 상대가 안즈밖에 없어진 후로는 조금씩 섹스리스(Sexless)의 증세를 느끼고는 했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정신적 충격을 받은 나는 예전에 비해 섹스의 횟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안즈와 사랑을 나눌 때마다 카인한테 범해지고 있는 아내들이 떠올랐으니까.
정신적 충격과 아내들의 걱정. 더군다나 분신술이나 다른 마법들이 사라졌기에 더 이상 예전 같은 쾌감을 맛볼 수 없게 된 것도 문제 중 하나였다. 예전처럼 여자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됐고 나 자신도 만족할 수 없게 된 섹스에 더 이상 몰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치만……웃긴 일이었다. 점점 섹스에 흥미를 잃게 된 내가 다시금 성욕을 되찾게 된 계기가 자위라니. 누가 들으면 배가 아플 정도로 웃어댈 거 같았다. 그걸 깨달은 나도 킥킥댔었으니까.
세상에……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손을 뻗으면 나한테 다리를 벌려줄 여자가 이토록 많은 세상에서 자위라니! 자위로 인해 섹스리스를 극복하다니!? 내가 이렇게 한심한 병신이었을 줄은 차마 몰랐기에 결국 대폭소를 터뜨리고 말았지…….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이곳에 온 후 내 신체 상태나 능력은 상당히 개선(改善)된 상태였다. 아무리 많아도 세 발 정도면 한계였던 사정(射精)의 횟수 등이 몰라볼 정도로 향상된 상태였으니까.
군대를 갔다 오긴 했지만 내 체력이나 신체능력이 매우 뛰어난 건 아니었다. 여기 와서도 몰라보게 신체능력이 향상된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변한 게 있다면 정력(精力)이었다. 현실의 세 배 이상의 정력을 보유하게 된 건 아마 카인에 의한 거겠지. 결국 모두를 잃어버려 딸이나 치게 됐으니 감사할 마음은 없다만.
세 배 이상의 정력은 ‘회복의 반지’ 등에 의해 다시금 회복됐기에 몇 번이고 간에 여성들을 만족시켜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 다 아련한 추억이군. 더 이상 프레그넌트로……그 당시의 프레그넌트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고 마을은 개박살. 아내들도 빼앗겨버린 이 마당에 프레그넌트로 가서 뭐하겠는가? 추억 감상? 그 이전에……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바보냐?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서 할 일도 없었다.
자위를 끝낸 나는 주변의 나무에 몸을 기댔다. 엄청 걸어왔으니 좀 쉬어도 되겠지. 다른 건 몰라도 걷는 것만큼은 정말 원 없이 걸었다. 행군조차 이것에 비하면 귀여운 짓이었다. 아, 물론 단독군장으로. 총이랑 방독면 등 최소한의 장비만 갖추었다면 모를까, 군장 안에 모포나 그런 거 넣은 상태는 함부로 비교할 수가 없지. 난 맨몸이니까.
행군을 할 때는 쉴 때도 있었고 음식 같은 걸 제공해줄 때도 있었지만……이곳에서는 그런 걸 모조리 내가 챙겨야 했다. 쉬는 시간, 적의 상태, 걸어갈 길, 먹을 것 등. 뜻하지 않게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됐다고 해야 할까? 물론 기쁘지는 않았다. 전혀.
나무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쉬었다. 군장이라……. 옛날에 단독군장이랑 완전군장. 두 개 때문에 엿 먹었지. 특히 완전군장 할 때는 혹시나 사단장이나 높은 사람들 올까봐 적당히 하지도 못했지. 안타깝군. 너무 열심히 해서 손해 봤던 게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도 포함이라니.
이런 말을 하면서도 그 당시 겪은 불이익과 현재 겪는 고생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힘들지만 말이다. 어느 쪽이 힘드냐고? 당연히 지금이다. 군대에 다시 가는 건 죽을 정도로 싫지만 거기서 목숨 걸고 괴물이랑 싸우지는 않으니까.
여기? 매일 매일이 목숨 걸고 싸우는 판타지 월드지. 기껏 노력해서 괴물 토벌했더니 카인 덕분에 중간보스 급의 파워를 지닌 괴물과 원 없이 싸우게 됐다. 내가 일구어놓은 평화나 안전, 행복은 이미 개박살난지 오래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 ‘응? 모두와 함께 일구어낸 평화 아닌가요?’라며 반문(反問)하는 사람도 있겠지. 모두? 그 모두가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걸까.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아아, 그래. 아내들. 아내들 말이지? 내 소중하디 소중한 아내 분들……하핫, 웃긴 이야기다. 뭐가 웃기냐고?
목숨 걸고 여행하고 괴물 쓰러뜨리는 것도 모자라 모두를 위해 일했건만……내가 이룩한 평화나 행복은 모조리 누린 후 카인한테 가버렸으니까. 지금쯤 새로운 왕이자 임금인 카인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비벼대며 쾌감을 잔뜩 맛보고 있을 거다.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들을 내가……남편이자 아버지였던 내가 이토록 격하게 깎아내리다니. 내가 봐도 섬뜩했다. 이게 정말 어떻게 해서든 간에 아내들을 구하려고 노력하던 나 자신인지……신세린인지 분간을 못 할 정도였다.
그녀들에 대한 비난과 질타(叱咤)는 옳지 않아.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알아. 예전이었다면 그 목소리를 들은 후 반성하며 ‘그녀들한테는 잘못이 없다. 모든 건 카인 탓이다’라며 실드를 쳐줬겠지. 하지만……이젠 아니었다. 정확히는 【내면의 목소리】를 인정한 후부터였지.
더러운 마음이 목소리가 된 느낌을 주던 내면의 목소리. 그 말은 예전에도 들리곤 했지만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아내들이 나를 떠나간 것은 괴물의 습격과 카인의 사주. 나나 그녀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요소들 때문이었으니까. 그걸 모두 아내들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예전까지는 말이지.”
더 이상 예전처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육성(肉聲)으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나한테 잔혹한 현실이 모두 내 탓이냐고, 카인 탓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할 터였지만……더 이상은 그럴 수 없었다.
정신 지배? 세뇌? 조종?
도대체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랫동안 카인한테 지배당해 왔으면서 그걸 풀려는 노력이나 의지조차 보이지 않은 쓰레기 같은 년들……. 대체 너흰 지금까지 뭘 한 거냐? 할 줄 아는 게 밥 처먹고 똥 싸고 다리 벌리는 것밖에 없냐? 한심한 년들…….
기분이 고양(高揚)된다. 맨정신으로는 결코 날릴 수 없었던 모욕. 절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질타와 비난을 하니 몸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온갖 일을 겪느라 걸레가 되고 씹창이 된 정신이 치료되는 것 같았기에 더욱 더 웃음이 나왔다.
예전의 나라면 감히 생각조차 못 했을 말들. 소중한 아내들한테 결코 날릴 생각도 없었고, 날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폭언을! 섹스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마구 날리니 속이 시원했다. 모욕의 주인공인 그녀들은 지금쯤 왕궁에 있겠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녀들을 깎아내리고 모욕하는 거였다.
정신지배? 몸과 마음이 지배당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지랄 염병을 하십니다……. 카인한테서 일정 거리 및 시간을 두면 정신지배가 풀린다는 걸 알게 됐으면서 왜 실행은 안 했을까? 그 힘든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으면서 왜 움직이지 않았을까?
그 죽음의 마을로 소환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너무나 기뻤다. 비록 카인한테 몸을 허락하긴 했지만……그래도 그녀들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여전히 아내들은 나를 배려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 느꼈던 기쁨과 벅찬 감정마저 지금은 증오와 배신감을 더해주는 조미료에 지나지 않았다. 나를 위해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걸 생각하면 오히려 짜증과 분노가 물씬 솟아오른다.
“야. 있잖아. 정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중얼거리던 혼잣말은 어느새 누군가 대화하듯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었다. 예전의 내가 아니게 됐다는 건 새삼 말할 필요도, 느낄 필요도 없었다. 얼마든지 변하라고 그래라. 변하면 좀 어때? 카인도 말했잖아? 변하라고.
내가 카인의 말을 충실히 이행하는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전혀 없다만……변하라는 게 이렇게 변하라는 거였다면 그놈한테도 미래를 볼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놈 명령을 따른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사람이 변했으니 말이다.
“너흰 대체 뭐냐?”
질문을 하던 나는 결국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있잖아.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는 경우. 그게 딱 지금 상황이었다. 듣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사람들은 설령 내 앞에 있다 하더라도 절대 대답을 할 수 없겠지. 아니, 너희의 대답 따위는 인정할 수조차 없다. 개 같은 년들.
“너흰 대체 뭐냐고.”
나한테 ‘그녀들을 원망한다는 걸 인정해라’라며 속삭이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내가 인정해서 그런 걸까? 그녀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내들은 내 생각만큼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아무렴 어떤가. 이젠 나도 지쳤는데.
“너흰 시발, 하는 게 대체 뭔데?”
욕으로 시작된 푸념은 내면의 목소리가 말했던 것. 내가 그녀들을 비호(庇護)하며 위로하려 했던 것들을 모조리 쏟아내기 시작했다.
“야, 너희 너무한 거 아니냐? 시발 3주 넘게 지배당했으면서 거기서 빠져나올 생각을 못 했다고? 카인한테서 벗어나려고 시도는 했니?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그 지식으로 빠져나오려고 시도는 해봤냐고.”
카인과 일정 거리 및 시간을 두게 된다면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 그 지식은 마리한테서 전해 들었다. 즉, 아내들은 내가 모르는 정신지배의 파훼법(破毁法)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미안한 짓을 했으면서 왜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안 하는데? 너희 정말 미안은 하니? 미안(未安)하다는 말의 뜻은 아니? 응?”
미안하다라는 말은 사과의 말이지만 그 ‘미안(未安)’의 뜻은 ‘마음이 편하지 못하고 거북함’ 혹은 ‘남한테 부끄럽고 겸연쩍음’ 이었다. 난 늘 내 능력이 모자라 그녀들을 불편하고 힘들게 만든다고 생각했었다. 내 능력이 부족해 아내들을 빼앗겼다고 생각했었지.
그 마음은 내면의 목소리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계속됐었다. 나한테 더 많은 능력이 있었더라면……나한테 더 큰 힘이 있었더라면 아내들을 빼앗기지 않았을 텐데 하며 후회만을 반복했었지.
근데 신기하게도……이젠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하, 응!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내가 그렇게까지 노력했던 것과 상반되는 아내들의 행동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누가 물을 준 것도 아닌데 머리에서 이상한 식물이 피어날 정도로 혈기가 돌았다.
“너희가 정말 미안하면 그 상황에서 너희 힘으로 어떻게 했었어야지……그게 그렇게 힘들었냐? 일정 시간 동안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냐고? 그럼 나는? 상관도 없는 사람들 구하느라 싸우던 나는? 나는 뭐 병신이냐? 자원봉사자냐? 응?”
예전부터 생각만 해왔을 뿐, 실제로는 뱉지 못했던 말까지 하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하하, 왜 사람들이 폭언, 막말을 하는지 이제야 알겠네. 말하는 것만으로 속이 이렇게 시원해지는데 지금까지 꾹 참고 있었다니……내가 병신이었지 병신이었어!
“아, 그래. 정신지배? 하아……야. 제발 그 ‘정신지배’나 ‘세뇌’ 핑계 대는 것 좀 그만해라. 지겹지도 않냐? 시발, 왜? 아주 살인까지 저지르지? 살인이랑 방화, 범죄 저지른 다음에 ‘정신지배 때문에 그래쪄요~’라며 울먹거리지 그래? 응? 미친 시발년들이…….”
미친놈. 그나마 남아있는 양심이 나 자신을 욕했다. 그녀들이 지배를 받는 것은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카인 때문이었다. 그녀들한테 잘못은 단 한 점도 없었다. 늘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조금이나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이미 고삐 풀린 망아지로 변모(變貌)한 나는 그 양심에마저 이빨을 들이댔다.
“야, 카인 탓? 그래 좋아! 카인 탓 맞아! 그치만 정신지배나 세뇌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해야 하는 건 너희 몫 아냐? 시도나 노력을 해서 실패하면 또 몰라 나랑 만나기 전까지 얻은 지식이 고작 그거였냐? 그냥 멀리 떨어진 채 시간 지나면 정신지배가 풀린다는……그 되도 않은 거 꼴랑 하나가 전부였냐고!? 너흰 대체 대가리를 왜 달고 사냐? 응? 패션이냐?”
역겨운 새끼……. 아내들 앞에서……아니, 카인 앞에서도 제대로 말을 못 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아내들한테 이토록 심한 욕설을 퍼붓다니. 침이 튀어나올 정도로 매도하는 그 꼬라지는 아무리 봐도 인간쓰레기의 모습이었다. 이게 내 모습이라고? 응?
“인간쓰레기? 하핫, 아무렴! 쓰레기고말고! 아내들 위해 목숨 걸고 싸웠는데 아내라는 년들은 지금까지 입은 은혜도 모르고 남의 자지나 빨아대는 개년들인데 어련하겠어? 내가 쓰레기고 내가 병신이지! 암, 그래야겠지? 응? 하핫, 으하하하핫!”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이런 말을 하게 된 상황도. 이런 상황을 만든 카인도. 전부 다 그저 원망스러웠다. 생각 같아서는 내가 뱉은 말을 깊게 반성하며 아내들한테 사과를 전하고 싶었지만……더 이상은 무리였다.
“너희 의지는 고작 그 따위냐? 지금까지 사례도, 보답도 바라지 않은 채 모두를 위해 일해 왔던 나를……남편이자 아버지인 신세린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작 그 따위냐고. 그렇게까지 사랑했으면 너희의 마음이나 의지로 정신지배를 풀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 노력이든 의지든 뭐든 좋으니까 한 년이라도 나를 위해 정신지배에서 벗어났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끝났다. 마음속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사라져버리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역겨운 쓰레기 자식. 뭐? 의지? 노력? 신세린 이 미친 새끼야! 현실에서 그토록 노오오오오력과 의지드립을 싫어하던 니가 뭐?
너를 위한 마음이나 의지로 정신지배를 풀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노력이든 의지든 뭐든 좋으니까 한 년─‘한 명’이라는 인칭대명사(人稱代名詞)조차 쓸 수 없을 정도로 아내들을 증오하게 되어버리다니……─이라도 나를 위해 정신지배에서 벗어났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니가 인간이냐? 현실에서는 노오오오오력과 의지드립을 그토록 증오하던 니가 감히 그딴 말을 입에 올려? 그걸 입에 올린 것도 병신 같지만 뭐? 그걸 아내들한테 강요해? 니가 그러고도 남자냐? 너야말로 좆은 왜 달았냐? 패션이냐? 없으면 허전해서 단 거냐? 응?
“그래, 남자다 시발! 난 남자라고! 너흰 원래 다 내 거였다고!”
자신을 비난하던 목소리라는 이름의 양심에 대해 난 결국 더러운 말을 무더기로 쏟아내고 말았다. 괴물도 없고 말리는 사람도 없는데 대체 왜 내가 착한 사람 코스프레, 잘못도 없는데 모든 걸 자기 탓으로 여기는 짓을 해야 하나 의문이었다.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넘쳤다. 지금까지 온갖 궂은 일, 힘든 일, 내 잘못도 아닌 일을 오로지! 모조리 내 탓으로만 돌릴 수밖에 없었던 일에 대한 억울함과 원통함이 모조리 눈물로 변해 나오는 거 같았다.
“너흰 나랑 결혼한 거 아니었냐? 서로 사랑하는 사이 아니었냐고!? 나는 너희를 사랑해서 끝까지 노력하다 이 지경이 됐건만, 너희는 그놈한테서 벗어나려는 노력조차 안 했잖아! 대체 이유가 뭔데? 왕궁에서 보내는 생활이 그토록 편해서? 그놈과 함께 있으면 뇌가 녹아내릴 정도로 편해서? 응? 무슨 말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주변에 있던 돌이나 잡초를 뽑아 힘껏 던지며 소리쳤다. 누구도 일어서라 하지 않았는데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주변을 향해 마구 외쳐댄다.
“시발, 너희한테 있어 남편이란 개념은 고작 그거냐!? 좆물이랑 자지만 있으면 나든 카인이든 상관없다 이거냐? 너희는 그 힘든 상황에서도 온갖 쾌락을 누리며 즐길 거 다 즐겨놓고는, 모든 책임과 수습은 나한테 하라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시도도 안 하는 주제에 뒷일을 나한테 어떻게든 해달라고!? 너희가 그러고도 너희가 인간이냐 이 시발년들아!? 응!? 그래놓고도 너희가 아내냐고, 걸레 같은 창녀년들────앗!!”
소중하다며 그토록 칭송하고 찬양하던 아내들은 어느새 걸레가 되어 있었다. 내 것이어야 했던……내 소유물이어야 했던 그녀들은 이미 내 손에서 벗어나 다른 남자의 것이 된 상태였고, 난 그걸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너흰 내 거였어……내 아내들이었다고! ‘자지의 맹세’ 덕분에 나도, 너희도! 모두 즐겁고 행복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배신하다니! 날 사랑해? 미안하다고? 너희한테 온갖 은혜를 베풀었던 때만 고맙고 미안했던 거겠지!? 카인의 자지를 빨며 진실된 아내, 사랑하는 남편, 위대한 임금님이라 칭송할 때 내 생각은 쥐뿔도! 좆찌꺼기만큼도 생각 안 했겠지? 안 했으니까 그딴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더러운 년들!”
내가 과연 인간일까? 난 사실 괴물이 아닐까? 신세린이라는 정신을 괴물의 몸에 옮겼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을 뿐, 사실은 괴물이 된 거 아닐까?
나 자신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질 정도로 나는 타락해버렸다. 내 거? 왜 아내들이 내 거냐? 이 세상에 와서 죽음이나 괴물과의 사투를 겪은 후부터 그토록 인권(人權)과 행복, 평화를 주장하던 주제에 뭐? 내 거였다고? 아내들이 언제부터 내 소유물(所有物)이 됐는데?
다른 사람의 행복과 평화를 누릴 권리. 인권을 그토록 부르짖었던 주제에 이제 와서 아내들을 소유물 취급하다니……. 결론 났군. 지금까지 모두를 위해, 행복을 위해 노력하던 신세린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침을 튀겨가며 아내들을 모욕하는 신세린은……죽은 신세린의 시체만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새롭게 태어난 신세린인 것인지. 아무도 몰랐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말마따나……아내들은 지금도 카인과 즐겁고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니까…….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지금까지 생각하던 신념이나 정의를 모조리 엎어버리다니. 카인이 왜 나를 쓰레기 취급했는지 알 거 같았다.
그럼, 훌륭한 쓰레기지. 카인이 쓰레기라고? 그러는 나는? 나한테 불리하다 힘들다 싶으면 지금까지 취하던 태도와 가지고 있던 정의, 신념을 모조리 뒤엎어버리는데? 그런 내가 대체 쓰레기로 안 보이면 무엇으로 보인단 말인가?
그토록 증오하던 ‘노오오오력’과 의지드립으로 소중하디 소중한 아내들을 모욕하던 나는 결국 무릎을 꿇은 채 땅을 힘껏 두들겼다. 스스로가 달라졌다는 걸 알고 그게 얼마나 쓰레기 같은 것인지 알면서도 이런 짓밖에 할 수 없게 되다니……!!
“그래, 만족하냐……?”
나는 웃으며 비꼬았다. 아이러니하게도……이 말을 전해주고 싶은 사람은 카인과 아내들. 모두였다.
“내가 이렇게 꼴사납게 변했는데……. 너희가 바라는 대로 또 이렇게 호구 짓을 하는데 만족하냐고……?”
더 이상 내가 하는 짓은 ‘아내들을 되찾기 위한 여행’이 아니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카인만 죽일 수 있다면……. 그나마 나를 생각해주는 안즈와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누가 대답 좀……대답 좀 하란 말이야……흐, 흐윽! 끄흑……! 흐어어엉……!!”
아내들의 사랑과 신뢰.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정의와 신념을 모조리 뒤엎은 채 꼴사나운 남 탓, 모욕, 책임전가만을 일삼던 나는 대지에 쓰러진 채 오열(嗚咽)했다. 원래부터 곁에 아무도 없었지만……누군가 이 말을 듣고 반론해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됐다고 지적해주길 바랐다.
누군가 ‘너는 잘못됐어’라고 말해준다면……누군가 ‘너를 이해해’라고 말하며 용서해줬더라면……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겠지. 만약 그랬다면 이 시점에서 ‘포기하는 삶’을 살려 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운 흑역사로 끝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원래 ‘신세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도.
날 용서해주는 사람도.
누구 하나 내 곁에는 없었으니까.
아무도 없는 을씨년스러운 대지.
차디찬 바람만이 나와 대지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웃우우우웃────!
플로듀서, 찌질이에요 찌질이!
자기가 원래 세상에 살 때는 증오했던 의지드립을 아내들한테 써먹다니!
남이 하면 불륜이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 내로남불 정신이 쩔어줘요!
엑에에에에엑────!
플로듀서, 흐콰(웃음)이에요, 흐콰!
진정한 흑화와는 달리 약간 모자란 것 같은 타락!
흐콰(웃음)를 하며 세린이 더욱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어요!
음……오랜만에 하니까 잘 안 되네요. 웃우우우 드립도 생각을 좀 많이 해보고 적어야 할 거 같네요. 어쨌든, 점점 더 상황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주변에 없는 아내들을 원망하며 자위를 하는 모습을 보니 측은하네요.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뭐라고 해도 카인한테 정신지배를 받고 있으니 통하지도 않고.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이렇게 답답한 걸 적은 건 저지만 저라고 해서 웃우우웃! 하며 늘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그 점은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저런 식으로 아내들한테 책임 전가를 하는 세린이지만 내면에서는 '의지드립을 싫어하던 니가 그딴 소리를 하다니. 그럴 자격이나 있냐? 니 필요할 때는 의지드립을 쓰지만 불리하다 싶으면 의지드립은 나쁜 거라며 언플하는 건가염? 존나 쓰레기네여 ㅋㅋㅋ'라는 비난이 들려오고 있겠죠.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울분을 풀기 위해, 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소중한 아내들을 욕하며 얼마 남지 않은 멘탈을 지키려 하는 세린의 모습을 보니 아주 잘 했다고도, 아주 잘못됐다고도 말하기 힘드네요.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잘못된 쪽이라고 하겠지만.
그치만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죠. 세린은 결국 평범한 인간입니다. 소환돼서 여러 일을 겪었다곤 하지만 결국 본체는 마법 같은 것도 못 쓰는 노멀 타입 인간. 너무나도 극적인 일을 겪어 저런 식으로 자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겠죠. 툭 까놓고 말해, 카인한테 덤벼봤자 이길 승산이 없으니까요.
현실에서도 승산이 없는 싸움에 눈을 돌리며 '나한테 힘만 있었더라면 저딴 건 한 주먹도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건 비단 세린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 번 정도는 생각하겠죠.
그런 시점에서 본다면 결국 세린은 '하렘 어드벤처'라는 세상에 와서도 약자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게 되겠죠. 이세계에 와서도 요 모양 콘나 꼬라지라니. 진짜 측은하긴 측은합니다.
이번 주는 여러 가지 일이 있어 코멘트를 달기가 어려웠습니다. 앞으로는 가능한 한 코멘트에 성실한 답변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