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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178화 (178/235)

00175 「18-4 : 종언의 카운트다운 (5)」 =========================

여정(旅程)이라는 말은 어쩐지 멋있다. 여행길이라고 해도 좋지만 두 글자라 짧기도 했고 풍취가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군대에서는 늘 행군할 때 ‘이게 집으로 가는 여정이었다면 딱일 텐데……그럼 존나 열심히 갈 수 있는데……’라며 잡생각을 하곤 했었지.

여기 와서 말 그대로 여정. 여행길을 겪긴 했지만 막상 떠올려보니……내 주위에는 늘 나와 함께 있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라를 만나기 위한 여정에 혜린이와 로라, 메이가 따라와 줬었지. 도중에 안나와 니나가 참가했었……아, 아니다. 참가 시켰었지. 그때는 일종의 노예 비슷한 거였으니까.

폐허가 된 프레그넌트에서 수도로 향할 때는 안즈가 함께 있었다. 혼자서 갈 곳도 없었지만 서로 파트너 없이 어딘가에 도착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었지. 그 당시의 정신 상태와 의존도 등을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이 함께 여행을 하게 됐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한 여행길에는 늘 누군가가 함께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하며 여러 가지를 경험했다. 여행과 전투로 지친 아내들과 나누는 섹스는 최고였지. 변변찮은 침대도 없는 곳에서 대지를 침대 삼아 나누던 오픈 섹스는 지금 생각해도 하반신이 불끈거릴 정도였다.

언제 괴물한테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상태. 하물며 전투와 여행으로 지쳐 제대로 몸도 씻지 못하는 그녀들의 자궁에 내 물건을 박을 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탐닉했었지. 영양 만점의 좆물이 그녀들의 자궁에 흡수될 때마다 움찔거리던 감촉은 아직도 내 몸에 남아 있었다.

여행길 추억이 섹스밖에 없냐고? 아니, 그건 아닌데……제일 즐겁고 자극적인 걸 생각해야 그나마 혼자 가는 여행길이 즐거울 거 같았다. 늘 곁에 아내나 누군가가 있었지만 거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으니까.

아내들을 빼앗긴 후에야 내가 그녀들을 내 상상 이상으로 좋아했다는 것을 깨달았듯이, 여행길도 혼자 가게 되니 주변의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함께 하는 여행길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를 깨닫게 됐다. 곁에 아는 이 하나, 사랑하는 이 한 명 없이 여행하는 게 이토록 외로울 줄이야…….

여행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그녀들한테서 모르는 것들을 배우기도 했었지. 혜린이는 여행이 처음이라며 웃었고 로라는 모두와 함께 나오니 위험한 여행길도 즐겁다며 내 품에 안겼었다.

메이? 가족과 함께 첫 여행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천진난만하게 좋아했었지. 에구, 내 딸과 아내들이 이렇게나 나를 지탱해줬다니. 아직도 가슴이 아려온다.

안즈와는 배가 능력부터 시작해 서로의 성욕을 달래기 위해 관계를 가지게 됐었다. 서로가 바란 것도 있었기에 그런 관계가 됐지만……나 없으면 여행길 가다 죽었을 거라며 짓궂게 웃던 그녀가 생각난다. 그녀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혼자서는 어떻게 가면 되는지 몰랐으니까.

나를 믿고 여러 가지를 말해줬던 그녀들을 떠올리니 후회만 가득해진다. 왜 그때 좀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왜 그녀들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준비하지 못했을까 하는……때늦은 후회만이 마음을 마구 때려왔다.

때늦은 후회라고 하니 또 ‘후회는 언제나……(이하 생략)’가 떠오르는군. 진짜 몇 번이나 나타나야 속이 시원할까? 이미 현재완료진행형으로 절찬리 후회중인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그녀들한테 더 잘 해주지 못한 것도 후회가 됐지만 다른 것도 마음에 걸리긴 했다. 바로 카인. 백발(白髮)의 여자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꿈에서 처음으로 봤던 백발의 여자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절대자. 모든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것부터 시작해 마을을 파괴하고 괴물까지 소환한 장본인이었다. 지금은 카인이라는 이름과 모습을 가지고 나타나 나를 이렇게까지 엿 먹이고 있지만……안타깝게도 그 정체와 내막을 아는 건 나밖에 없었다.

왜 그(그녀)에 대해 말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니까. 당장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부터 시작해 온갖 여정을 말해야 하는데 그걸 바로 믿을 수 있었을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나지도 못하는 여자도 웃기지만 다른 세상에서 왔다니. 바로 믿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이 세상에 정신병원은 없지만 내가 살던 세상에서 ‘난 사실 다른 세상에서 왔어!’라는 소리를 했다간……정신병원 중 한 칸을 무료분양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다가왔다. 아, 꺼져! 꺼지라고! 난 정신병자 아니라고!

앗, 이건 아니다! 내가 정신병자가 아니라고 하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지, 절대 정신병을 앓는 사람을 비난 혹은 모욕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해둔다!

난 절대 병을 앓는 사람을 차별하거나 모욕하려는 게 아니었다. 나도 정신병을 가지고 있는데 미쳤다고 그 사람들을 놀리겠는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크고 작은 정신병을 한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다. 내 경우에는 일종의 피해망상(被害妄想)이나 과대망상(誇大妄想)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늘 불안한 일, 안 좋은 일부터 생각하고 보는 게 그 좋은 예시 아니겠는가?

늘 내가 ‘내 안 좋은 예감, 불길한 생각은 100% 맞는다’라고 하는데……나도 그 짓을 안 하고 싶었다. 누군 그런 안 좋은 생각이나 예감만 느끼고 싶어서 느끼겠냐? 나도 ‘에이,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라며 평온한 하루,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싶단 말이다…….

그치만……조금 전 내가 뛰쳐나온 마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겪어 온 일을 생각한다면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라는 생각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한 생각이었다. 우리한테는 ‘설마’겠지만 다른 사람이나 괴물한테는 ‘당연’한 거였으니까.

사고나 사건이 예고하고 터지는 경우가 없듯이, 최악의 사태가 ‘우리가 생각하는 설마’를 피해서 일어날 거라는 보장은 절대 없었다. 실제로 우려하거나 걱정하던 일들이 몇 번이나 일어나니 ‘아, 이게 내 인생이구나’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절로 일어나더군.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라 생각한다. 이런 일은 만국공통이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에 웃는 사람들. 진지하게 말해두마. 웃지 마라. 웃으면서 ‘설마 그렇겠어?’라는 말로 치부하는 설마가 정말 너희를 잡을 수도 있으니까.

인생 한 방에 훅 갈 수도 있는데 그 설마가 ‘인생을 훅 가게 만드는 한 방’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냐? 없으면 한 번 정도는 고민하고 조심해봐라.

안전사고(安全事故)라는 단어는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 ‘설마’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지. 너무 사고나 사건에 주의하는 건 아니냐고 걱정할 수도, 놀릴 수도 있겠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사고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 그런 팔자라는 걸 미리 알았겠냐? 몰랐으니까 그렇게 됐지. 바로 나처럼!

생각해보니 사고나 사건 때문에 힘든 경험을 한 사람들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여기 ‘설마 하던 상황에 휘말리기만 해 인생이 좆망된 남자’가 있지 않은가? 그 훌륭한 견본, 신세린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말이다.

도서관에서 자고 일어났더니 괴물이 나오는 판타지 세상. 여러 종류의 엿을 먹으며 결국 이 상황까지 오게 됐는데……내가 이런 일 일어날 줄 알았겠냐? 알았으면 가만히 있었겠냐? 판타스틱하다 못해 고져스한 엿을 연속으로 먹다 보니 내가 엿 먹기 위해, 당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 정도면 정신병 맞다. 확실히.

당장 이렇게 말하는 나도 정신병에 걸려 이 지랄을 떠는데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모욕하다니. 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자기는 언제나 완벽하며 절대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음, 그 사람도 일종의 정신병에 걸린 거겠지. 안전불감증이라고 해야 하나?

로라 때도 그랬지만 직장, 근무, 업무에 의해 쌓이는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병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로 인해 로라는 자신의 딸인 메이를 무시하고 억압했었지. 지금은 사이가 좋아졌지만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지속적인 멘탈 체크 & 케어가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한국은 너무나 이상한 나라였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아픈 부위에 따라 치과, 이비인후과, 안과, 내과 등을 선택해 가야만 했다. 이 아픈데 내과 간다고 치료가 가능할 리가 없잖냐.

마리아와 아테나가 마을에 왔을 때 정신줄을 놓고 섹스를 했을 때도 정신병에 대해 언급했었지. 업무 스트레스로 힘들었던 건 로라뿐만이 아니었다. 마리아와 아테나.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그들마저 스트레스에 의한 정신병을 지니고 있었다.

사고나 사건이 예고하고 일어나는 게 아니듯이 병도 예고를 하고 걸리는 건 아니었다. 스트레스 및 다양한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정신병은 정신과(精神科)에 다님으로써 예방 및 치료가 가능했다. 이가 아프면 치과에 가듯이 정신이 병들면 정신과 및 정신병원에 가야만 했다.

그치만 만약 정신병원에 가는 것 혹은 정신병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게 들통 난다면? 그 후에 일어날 일은 다음과 같았다.

[정신병원에 간다 → 정신병자로 오인(誤認)받음 → 직장 혹은 학교 등의 커뮤니티에서 소외됨 → 소외된 후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가지지 못해 개인한테 고스란히 피해가 옮 → 선생이나 상사 등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학업이나 업무의 성과 및 능률 저하 → 전학 혹은 이직(移職)을 할 수밖에 없게 됨 → 정신병을 억누르는 힘든 생활의 나날이 계속됨]

무조건 이와 같은 루트가 될 가능성은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정신병원 혹은 정신과에 다니는 것을 지켜봐줄 리도 없었다.

이전에도 말했고 누누이 깠지만……한국은 그런 정(情)의 나라가 아니라니까?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 백의민족(白衣民族)? 제발 좆까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그래라. 언제부터 한국이 그랬다고…….

자기보다 강한 사람한테는 찍 소리도 못하면서 약한 사람은 소름 끼칠 정도로 잘 찾는 게 한국인이었다. 일본인이기도 했고. 정부나 힘을 가진 사람들을 까지는 못했지만 돈 없는 사람, 힘없는 사람, 장애인, 사고 피해자, 정신병이나 힘든 병을 가진 사람들. 이처럼 불의에 맞서기 힘든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모욕, 조롱하는 것만큼은 세계 1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불의에 맞설 줄은 모르지만 자기보다 약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괴롭히는 놈들이 정신과에 다니는 것을 따뜻한 마음으로 봐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틀림없이 그것까지 빌미로 괴롭히거나 친구, 주변 사람들한테 널리 퍼트리겠지. 널리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처럼 말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은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하라는 이념으로 만들어진 말이지, 힘없는 사람 약점이나 빌미를 널리 퍼트리라고 만든 개념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귀를 기울일 리도 없었거니와 그딴 걸 알고 있다 한들 자기보다 약한 사람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쓰레기들이 사람 괴롭히는 걸 그만두겠냐? 계속하지.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처럼 정신이 힘들고 병들었기에 정신과에 가는 것을 사회 부적응자, 구타유발자, 금치산자, 무능력자로 취급하며 괴롭히다니. 그게 바로 한국인의 모습이었다.

동양인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내가 살던 한국은 헬조선이라 불릴 정도의 지옥이었기에 내가 한 말은 전혀 심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약하게 표현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정신병 및 정신과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떠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정신병에 대한 것이 아니라 카인에 대한 것이었다. 설령 믿을 길이 없다고 하더라도 카인에 대해 말했더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상황이 나아졌을 텐데……. 그런 후회가 계속해서 마음을 자극했다.

백발의 여자, 카인. 둘 다 동일인물이며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절대자라는 사실을 말한다면 과연 아내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일단 혜린이와 희진이, 은채는 ‘이 새끼 드디어 미친 거임?’ or ‘그 연놈들이 우리를 이 세상으로 불러온 놈들이구나!’라고 욕을 했겠지.

반응이 극과 극인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한 말을 안 믿는다면 ‘얘가 또 무슨 소리래? 정신 나갔냐? 이 부근에는 정신병원도 없는데 어떻게 하려고 정신병에 걸렸냐?’라며 핀잔을 줬겠지. 믿게 해주고 싶어도 증거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으니 정신병자 취급 받기 딱이군.

이와 반대로 믿는다면 ‘그 연놈이 모든 일의 원흉이군! 죽여 버린다!’라며 화를 냈겠지. 내 말을 믿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믿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생각을 해봐라. 판타지 세상에 끌려온 것뿐만 아니라 괴물이랑 싸우고 마법까지 썼는데 카인이라는 존재를 무조건 부정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게 더 있을 수 없는 반응 같았다.

웃기잖아. 판타지 세상에 끌려온 선별 기준은 지금도 모르겠다만 희진이와 은채는 이 세상에 소환됐다. 바로 백발의 여자이자 카인인 절대적 존재에 의해……. 그 사람들 때문에 온갖 고생을 다 겪었는데 이제 와서 ‘아냐, 그런 존재는 있을 수 없어! 난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참으로 바보 같은 반응이었다.

안 보인다고? 만지거나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고? 그럼 공기, 바람은? 사람의 마음은? 공기나 바람, 사람의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었다. 대화는 당연히 불가능했지. 존재도 안 하지만 말을 할 수 있는 ‘존재(存在)’가 아니었으니까.

아, 그래. 백보 양보해서 공기나 바람은 가능하다 치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존재가 판명됐고 조사가 끝난 것들이니까. 살아가는데 필요하니까. 그럼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마음은 조사조차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있다고 장담을 할 수 있을까? 웃기잖냐.

카인의 존재는 바로 사람의 마음과 같았다. 그가 사람의 마음처럼 소중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자기가 만든 피조물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는 미친놈이지. 모습은 사람의 형태였지만 그는 우리 같은 마음을 지니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난 신이니까 무슨 짓이든 해도 괜찮아’라는 위험한 사상을 가진 존재라고 봐야겠지.

그가 정말로 우리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사람들을 죽일 수 있었을까? 프레그넌트의 파괴? 그건 장난이었다. 이 세상에 괴물이라는 존재 자체를 만든 것부터가 웃긴 일이었다. 아니, 괴물은 왜 만드냐? 괴물이 없다고 이 세상 멸망하는 건 아니잖냐.

괴물이 없다 하더라도 이곳 사람들은 충분히 행복하고 알차게 살아갈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해 요소밖에 되지 않는 괴물을 사람들과 함께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자기 피조물 엿 먹일 생각으로 가득했다는 증거다. 그게 아니면 괴물의 존재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방임주의(放任主義)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너무 후하게 쳐준 것이었다. 방임주의는 어디까지나 돌보거나 간섭하지 않는 것이지, 그러한 태도 때문에 누군가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은 태만(怠慢)이자 나태(懶怠)였다. 자기의 안이한 태도나 행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걸 가만히 놔두다니. 그게 무슨 신이야? 놈팽이 개새끼지.

이런 위험한 존재에 대해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니……. 그 때문에 아내들이 왜 그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왜 그런 놈한테 의식과 행동을 지배당해야 하는가에 대해 끝내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해도 못 믿으니까 안 했다니. 그 이유 때문에 설명하지 못한 거라면 그건 내 책임이었다. 안 믿을 거라는 이유를 빌미 삼아 설득하려는 시도조차 안 한 내가 이런 꼬라지를 겪게 된 건 카인의 탓도 있었지만 내 잘못이나 책임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게 내 마음을 더욱 힘차게 파고들었다.

안 믿는다 치더라도……설령 안 믿는다 치더라도 이야기를 했더라면 무슨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녀들이 현재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나 위기를 눈치 채서 한 명이라도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난 그 가능성을 부수고 말았다. 그런 가능성과 희망을 부순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그게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울었다. 정체불명의 마을에서 벗어나 안전을 확보한 후부터 자주 울기는 했지만……카인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던 것. 그로 인해 그나마 있던 탈출이나 저항의 희망마저 없어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힘들고 안타까웠다. 그런 현실을 만든 게 나라는 사실 또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이 와중에도 내 마음은 비꼬는 투로 나를 위로했다.

‘야, 울 필요 없어. 슬퍼할 필요가 대체 이 세상 어디에 있는데? 니가 말을 했다고 과연 일이 잘 해결됐을까? 마치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것처럼 휘황찬란(輝煌燦爛)한 빛과 함께 세뇌가 풀리며 아내들이 카인을 공격했을 거 같아? 제발……제발! 우리 불쌍한 세린이. 그딴 일이 안 일어날 거라는 사실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만약 그럴 거라면 처음부터 그랬겠지! 응? 안 그래?’

시발, 위로하는 거냐 놀리는 거냐? 위로를 할 거면 위로를 하고 깝싹댈 거면 깝싹댈 거지, 왜 위로하는 척하면서 깝싹대냐? 내 성격이 더러우니까 내면의 마음도 더러워서 그런 건가? 꼭 이렇게 슬플 때 깝쭉대야겠냐?

‘어이쿠, 아니지! 깝쭉대기는? 난 현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니가 좋아하는 현실 말이지! 그렇게 아내들을 걱정하는 건 좋은데……어쩌면 이 상황에는 아내들의 잘못도 있지 않을까? 아아, 그래! 너무 힘드니까 다른 사람 탓하려는 더러운 근성과 태도 때문에 아내들을 탓하는 것도 없지 않아 있지. 인정해! 인정한다고! 그치만 말이야. 이 모든 상황은 100% 니 잘못 아니잖아?’

시발, 쩐다. 은근히 남 탓도 있다며 잘못을 아내들한테 전가(轉嫁)하려 하다니. 역시 내 마음. 성질 더럽고 병신 같은 주인답게 교묘하게 말하는군. 그런 생각은 들었지만 마음의 주인인 나마저 귀를 기울일 정도로 내면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악마의 속삭임이 흡사 이런 것이리라.

‘악마의 속삭임이라니……그저 내면의 목소리지. 아주 솔직한! 생각을 해봐. 정말 아내들이 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세뇌나 정신지배 따위는 단숨에 풀어야 하는 거 아니냐? 왜 있잖아! 주인공이나 히로인의 목소리에 반응해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거! 니가 자주 말하곤 했잖아?’

그래, 말했다. 정신지배나 세뇌에 풀리는 클리셰 중 하나지. 안타깝게도 나한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그치만 그건 어디까지나 클리셰 중 하나다. 현실은 소설보다 기묘한 법인데 그걸 아내들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노, 노(No). 아니지! 야, 그럼 너는? 너는 지금까지 많은 일을 해왔지! 보수나 사례를 바라지는 않았지만……아, 그래. 여자들을 실컷 안고 아내들까지 만들었어! 지금은 아니지만 왕의 자리에까지 올라갔지! 그런데 아내들은? 너한테 해준 게 뭔데? 다리 벌려준 거? 그건 아내들 외에도 많이 해줬잖아? 그건 보수나 사례이기도 했지만 지들 즐기고 싶어서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을 텐데?’

진짜 혓바닥 존나 잘 굴리네. 웃음이 나왔다. 즐기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나도 마찬가지니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우리가 사랑을 나눈 건 육체적인 쾌락과 정신적인 만족감을 위해서 그런 거지, 보상이나 사례라는 개념으로 섹스를 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럼 더 나쁘잖아? 섹스 외에 할 줄 아는 것, 해준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이제 와서 정신지배 때문에 카인한테 다리를 벌린다고? 솔직히 말하자고……그냥 남자면 아무래도 좋은 거잖아? 보지에 쑤컹쑤컹하는 것만 있으면 너든 카인이든 상관없다는 거잖아? 우와, 자지에 미친년들! 자지를 빨고 느낄 힘은 있으면서 정신지배에 저항할 힘은 없다고? 있잖아. 없는 게 아니라……안 하는 거 아냐?’

“그만해라.”

누가 말하는 것도 아니었건만 그만두라 말했다. 육성(肉聲)으로.

‘야, 솔직해지자니까? 웃기잖아? 널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다면 애니나 만화, 게임처럼 단숨에 지배를 풀고 카인을 죽였어야지! 죽이지는 못해도 너를 위해 싸웠어야지! 근데……그랬냐? 정신지배도 못 풀어, 싸우지도 않아. 그런 주제에 섹스는 즐긴다고? 하, 참. 그런데 아내 탓은 하나도 안 한다고? 어이구, 성자 났네 성군 났어! 근데 그걸 아내들도 알아주니? 응?’

“하지 말라고, 씨발놈아.”

욕이 나오자 내면의 목소리는 더욱 날뛰었다. 마치 자기 말이 맞다는 양…….

‘야, 야. 제발! 난 너를 위해 이런 말하는 거라고! 넌 늘 말했잖아? 좋은 일 하고도 너만 나쁜 놈이 된다고. 나도 마찬가지거든. 오직 널 위해 말하는데 매일 욕만 듣고 나쁜 놈 취급 받잖아? 그래도 널 위해 이런 말 하는 거야! 오직 나만이 너를 위해 조언하는 거지! 내 말이 틀리다면 애초에 상대를 안 했어야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욕하며 반응한다는 건……인정한다는 소리잖아?’

“아니. 안 해.”

‘안 하기는! 그럼 원망 안 해? 미운 마음 한 점 없다고 맹세할 수 있어? 못할 걸? 야, 다른 사람 탓으로 하는 건 꼴사나운 짓이지만……인정하자고! 그냥 인정만 하면 편해지잖아? 그 개 같은 걸레년들은 눈앞에 자지만 있으면 너든 누구든 상관 안 할걸? 그걸 빨아대며 진실된 아내, 진정한 사랑, 아기 같은 걸 지껄이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겠지!’

“아니라고, 개새끼야! 내 아내들은 그런 짓 절대 안 해! 날 사랑한다고!”

‘사랑? 허이구……그 사랑이 겨우 요거냐? 니가 위험할 때, 힘들 때 구해주지도 못하면서 밤이 되면 섹스는 부지런히 하는 그거? 야아……최고구만! 멋진 사랑 났다 멋진 사랑 났어! 아주 최고구만? 니가 말하는 사랑은 무슨 SD 메모리 카드냐? 필요할 때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위험하다, 불리하다 싶을 때는 정신지배를 빌미로 아무것도 안 하는……뭐 그런 거?’

난 땅에 주저앉았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여기 주저앉는다고 누가 날 욕하리.

‘인정하자. 응? 내가 뭐 돈 내라 했냐? 싸우라 했어? 인정만 하면 돼. 니가 그토록 구하려고 하는 아내들은 사실 니가 생각하는 정도로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내들은 니가 아니더라도 자지로 박아주는 놈만 있으면 누구든 상관없다는 걸. 정신지배는 못 풀면서 눈앞에 오는 자지는 마다하지 않는 더러운 년들이라는 걸 말이지……!!’

난 결국 땅을 치며 울었다. 인정하냐고? 내 행동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내 탓도 아닌데 난 이렇게 목숨 걸고 노력하고 있다. 이 세상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지만 아내들은? 그 ‘목소리’가 말한 그대로이지 않은가? 진심으로 날 사랑했다면……정신지배나 세뇌 정도는 풀어야 했던 거 아니냐? 하다못해 한 명이라도! 14명의 아내 중 한 명이라도 나를 위해 그런 행동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렇게까지 오열(嗚咽)하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다!

물론 한 명이라도 그런 짓을 했다면 ‘다른 아내들은 나를 그 정도로 사랑하지 않는 건가?’라는 생각을 또 했겠지! 인간의 욕심은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넓다고 하니까! 하지만……그 누구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을 텐데! 그 누구도 세뇌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단 한 명도!

책임전가? 너무나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하하, 웃긴다. 난 그녀들의 무리한 요구를 최대한 많이 들어줬는데……겨우 그거 하나 못 한다고? 아, 그래! 섹스는 해줬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없어졌다고 카인한테 다리를 활짝 벌리는 그 씨발년들을 보니 ‘내가 아니라도 좋다는 건가? 누구든 간에……? 그저 자지만 있으면 되는 거냐?’라는 생각을 했었지. 배신감에 잠을 이룰 수조차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들은 정신과 몸을 지배당하고 있다’라며 상황을 이해하려 했지만……더 이상은 그럴 수가 없었다. 홀로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여행을 하는데도……. 카인이라는 절대자로부터 모두를 구하기 위해 싸우는데도……그 누구 하나 내 사정을 이해해주지도 않았고 도와주지도 못했다. 난 결국 울며 중얼거렸다.

“니 말이, 맞아……흐, 윽! 니, 말 맞다고 시발……!!”

아무도 없는 외로운 여정 속에서…….

나는 아내들을 향한 원망을 시작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라고 합니다. 세린이 겪고 있는 건 바로 그런 현상이겠죠. 워낙 많은 일을 겪다보니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든데 정작 옆에서 지탱해주고 멘탈을 케어해줄 아내들은 카인의 곁에 있다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일 겁니다.

내면의 목소리에 동조하며 아내들한테 책임을 전가하는 세린의 모습이 어찌 보면 찌질해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까지 다 생각하며 적은 거니까요. 이 부분을 적으며 전하고자 한 것은 '그래봤자 결국은 세린도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까놓고 말해, 아무런 힘이나 능력도 없던 사람을 갑자기 이세계에 소환한 겁니다. 도덕이나 윤리적 사상부터 시작해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이 모두 무너지는 가운데, 사람이 과연 깨끗하고 올바르게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대답은 No겠죠. 실제 세상도 아름답고 깨끗하게만 살아갈 수는 없는데 아무런 인연도 없는 이세계에서 정의롭게만 살아간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겠지 싶었습니다. 아내들을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그녀들한테도 책임이 있다며 자기 자신을 정당화시키려는 세린의 모습은 찌질해보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이라 생각합니다.

여담으로, 로라와 메이의 에피소드를 적으면서도 생각했지만 직장 스트레스는 우습게 볼 게 아닙니다. 먹고 살려고 일하는 거고, 일하려고 직장 나가는 건데……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하는 곳에서 스트레스 이빠이 받으며 일해야 한다니. 그게 얼마나 좆같은지는 경험하신 분만 아실 겁니다.

지금 일하고 있는데 가관입니다. 이미 나간 사람들 2~3명 분의 일을 신입인 저한테 시키더군요.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으니 주변 사람뿐만 아니라 퇴사자한테도 물으라고 했습니다. 추가 인원은 없냐고 물으니 없다고 하더군요. 진짜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망설였습니다.

그나마 상사가 있긴 한데 상사도 퇴사자들이 싸지른 똥을 치우느라 가끔 와주는 정도입니다. 사실상 혼자 일을 처리하게 된 상황. 신입한테 2~3명분의 일을 모두 다 맡기다니. 이 씨발 좆같은 회사에 대체 뭐 하러 온 건가 싶은 생각이 간절하더군요. 그렇다고 때려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나마 소설을 적으며 업로드하는 게 몇 안 되는 낙입니다. 여러 모로 힘들지만 조금씩이나마 꿈을 이루고 있다는 걸 실감하면 아주 나쁜 건 아니더군요. 앞으로도 소설은 계속 적을 생각입니다.

코멘트에 대해서는 다음에 답변드릴까 싶습니다. 최근 업무 인수인계(물론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하느라 책이나 이전 문서를 많이 봐야 해서……앞으로도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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