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4 「18-3 : 종언의 카운트다운 (4)」 =========================
프레그넌트가 연상될 정도로 심각하게 파괴된 건물들. 내 몸을 숨기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지만 동시에 누군가가 잠들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누군가가 그 안에서 자고 있다면 내가 발견하기 이전에 괴물들한테 발견되어야 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건물들이 부서진 것은 나한테 있어 매우 유리한 쪽으로 작용되고 있었다. 안에 누군가 있나 없나를 눈으로 쓱 훑어보기만 하면 됐으니까. 부서진 2층 건물의 경우 주의하며 올라가야만 했지만 다 올라간 후에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부서진 건물들의 배치, 괴물의 움직임 등이 매우 잘 보였으니까.
생각지도 못하게 지리적인 이점을 살릴 방법을 찾은 나는 즉시 자세를 낮춘 후 고민에 잠겨야만 했다. 완전히 부서진 집에 누군가 누워있다간 바로 들키므로 그러한 곳은 찾을 가치가 없었다. 2층에서 바라본 주변의 건물들 중 멀쩡한 건물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찾을 수고를 생각지도 못하게 덜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라 마을의 배치 및 괴물들의 이동이 보였기에 내가 가야 하는 길, 조심해야 하는 길목 등을 유심히 관찰했다. 괴물들이 모여 있는 곳은 최대한 피해가거나, 돌아가거나 해야 했다. 마력을 낭비할 수도 없지만 무턱대고 전투를 하는 게 능사(能事)는 아니잖아.
생각 같아서는 이곳에서 저격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아니, 그건 그만두자. 이곳은 2층이다. 내가 놈들을 저격하면 분명 놈들은 내 위치를 알아차리겠지. 이곳에서 헐레벌떡 도망간다 한들 나는 놈들한테 에워싸일 거다. 불리한 전투를 스스로 초래할 필요는 전혀 없는 거다.
살펴야 하는 집들의 위치와 루트를 파악한 나는 지체 없이 그곳을 내려왔다.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혹시나……아주 만약의 이야기다만. 붉은색 촉수괴물이 된 이 마을의 주민들이 좀비와 같은 습성을 보인다면……나는 무조건 이 마을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까치발로 괴물들이 있나 없나를 확인한 후 이동하는 내 모습은 첩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첩보원 같았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진짜 현실 세상에서 메탈 기어 솔리드 시리즈를 플레이 좀 해두는 건데…….
직접 해본 적은 없었지만 매우 유명한 잠입 액션 게임, 메탈 기어 시리즈는 TV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첩보원이 밀정(密偵) 및 잠입(潛入)을 하듯이 적의 아지트에 들어가 활약하는 것도 멋졌지만, 골판지 상자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적의 눈을 속이는 것도 재미있었기에 한 번 정도는 플레이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
……이제 와서는 전부 때늦은 생각이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남은 집들을 확인했다. 전투를 최대한 피하며 안즈가 있나 없나를 확인하는 것은 꽤나 피 말리는 작업이었지만 성과는 확실했다. 지금까지 많은 집을 찾았지만 안즈 혹은 안즈가 있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모든 집을 다 돌아보니 임무를 마친 첩보원의 기분이 이런 것이리라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적한테 발견되는 일 없이 무사히 할 일, 조사할 것을 다 처리했으니까.
발견될 경우 전투까지 치를 거라 각오했지만 실제로 그들과 조우(遭遇)하는 일은 없었다.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는 괴물들이 있는가 하면 홀로 멍하니 있는 괴물들도 있었다.
보통 괴물들이라도 홀로 다니거나 무리를 짓는 건 하지만 나는 그들을 보며 일종의 가설을 하나 세웠다. 지금은 괴물이 된 그들이지만 원래는 인간이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들과 가장 가까운 것은 좀비(Zombie)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의 저주, 좀비 시리즈로 유명해진 좀비는 ‘움직이는 시체’다. 부두교의 주술이나 생체병기 바이러스 등의 설정으로 태어난 좀비들은 작품, 감독, 설정에 따라 다르지만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바로 ‘원래는 사람이었지만 죽은 후 괴물이 되었다’라는 사실이었다.
사람이었지만 괴물이 되어버린 좀비는 대부분 지능이 없는 괴물로 묘사된다. 사람의 고기나 피에 미친 듯이 달려들며,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개떼 같이 몰려오기에 아무리 강한 장벽이 있어도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러한 습성이 저들한테도 있는 게 아닐까 걱정됐다. 움직임은 느리고 신체 일부분이 찢겨졌기에 뛰어난 힘이나 기동성은 없지만……좀비처럼 끈질긴 점이 그들의 특징 아닌 특징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괴물들이 동료를 방패삼아 다가오다니. 생각만 해도 무서웠다. 총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지만 총 하나로 몇 마리나 되는 괴물을 단숨에 죽일 수는 없었다. 옆이나 뒤에서 다가오는 습격에도 대비를 하며 움직여야 했으니까.
혹시나 놈들한테 물리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좀비가 나오는 시리즈에서 좀비와 접촉해 상처 등을 얻게 된다면 거의 100% 감염자가 되곤 했다. 감염자의 최후는 고열을 내며 시름시름 앓다가 좀비로 변하게 되는 거였고, 그런 감염자가 생존자의 마을에 와버리면 전☆멸! 절대 좋은 엔딩은 맞이할 수 없었다.
저들의 입에서는 용해액(溶解液)이 나오기도 했다.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에서 좀비가 용해성 토사물을 뱉고는 했지만 실제로 그걸 보니 살이 덜덜 떨렸다. 놈들의 산성액체에 닿았다간 피부가 타들어가겠지. 감염의 여부는 몰라도 살이 타면 일단 목숨이 위험했기에 그것 또한 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변한 여자한테 촉수로 처맞긴 했지만 몸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마 단순한 접촉 등으로는 감염이 되지 않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마법이고 뭐고 다 사라진 와중에 감염이라도 되면? 진짜 좆망이 따로 없을 테니까.
걱정되는 것은 나 혼자뿐만이 아니었다. 저들한테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감염의 원인이 다른 거라면? 카인이 작정하고 여자들을 저런 식으로 바꾼다면 나한테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어찌 됐든 간에 한 시라도 빨리 놈을 막아야만 했다.
모든 집을 확인한 나는 마지막으로 성벽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성벽에 올라가면 마을과 동시에 밖이 보이므로 도주로(逃走路) 등을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주변에 표지판 정도는 있을 테니 그걸 기준 삼아 걸어가야만 했다.
성벽에 올라가자마자 보인 것은 검이었다. 경비대원들이 쓰는 제식(制式) 아밍 소드(Arming Sword)인가……. 죽은 프레그넌트의 경비대원들이 떠오른다. 레베카, 안느. 그 외에도 많은 여자들이 있었는데……이제는 추억으로밖에 만날 길이 없는 사람들이란 게 아쉬웠다.
제식 아밍 소드가 몇 자루 굴러다니고 있었기에 아이템 인벤토리에 넣은 후 매크로로 등록해 놓았다. 투영마술이 있긴 했지만 마력이 바닥났을 때를 대비해 무기 한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했으니까. 무언가를 자를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말이 그냥 생긴 건 아니잖아? 준비해서 나쁠 건 없을 거다.
아밍 소드를 얻은 건 좋았지만 경비대원의 무기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매우 불길했다.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무기인 아밍 소드는 현대로 치자면 총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무기를 팽개친 채 도망칠 정도로 이 세상의 경비대원들은 연약한 여성들이 아니었다.
승산이 없더라도 괴물을 상대로 용맹하게 싸우는 그 모습은 건강미와 정의를 느끼게 해주었고 그런 모습을 보며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게 만들었다. 그 정도로 고결하고 희생 의식이 강한 그녀들이 무기를 떨어뜨린 채 사라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상했다.
성벽 위에서 바깥을 바라보았지만……헛수고였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전혀 맑지 않았고 바깥에는 안개까지 끼어 있었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에 스스로 나가서 방향을 확인하며 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카인의 짓인가…….
이제 와서 하는 소리지만 무슨 일이든 간에 ‘음, 이것도 카인의 짓인가……!!’라며 분위기를 잡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실제로 대부분의 짓이 카인의 탓이며 그가 저지른 짓이긴 했다만 여기서 좀 더 나가면 우주에 공기가 없는 것도, 내가 현실에서 인기가 없었던 것도. 모조리 카인 탓으로 돌려도 위화감(違和感)이 없을 거 같았다.
뭐? 현실에서 인기가 없었던 건 내가 못 생긴 것 + 자기관리를 안 해서라고? 알지! 누가 모르냐? 그치만……여기 와서 카인 때문에 겪은 일, 엿 먹은 것, 물 먹은 것, 개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모든 걸 그놈 탓으로 돌려도 날 나무랄 사람은 없을 거다. 피해를 입은 사람이 나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성벽을 반 정도 돌던 나는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은색의 물체를 발견했다. 은색 비키니 아머의 하의(下衣)? 그걸 살짝 들자 질척한 무언가가 처덕거리며 떨어졌다. 불쾌감을 억누르며 자세히 보니……정액(精液)이었다.
살점이나 이상한 게 아니라 다행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정액? 정액은 남자의 좆물이다. 정자(精子)가 몇 만 마리나 있는 분비물이 어째서 이런 마을에 있는 거지? 정액을 가진 사람은 나와 카인. 단 두 명뿐이었다.
여자들은 정액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안다 치더라도 만들 능력이 없었다. 이곳에 정액이 있다는 말은 카인이 이곳에서 섹스를 했다는 건데……어째서?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섹스를 원한다면 내 아내들만으로 충분했고 그게 부족하다면 성의 경비대원이나 하녀들도 있었는데……왜 이런 곳에 와서 섹스를 한 거지?
애초에……경비대원들과 이런 곳에서까지 섹스를 해야 할 이유가 있나? 내가 프레그넌트에 있었을 때는 굳이 경비대원들이 있는 곳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막사로 복귀한 대원들을 맞이해 몸을 나누는 거라면 모를까, 근무 중에 사랑을 나눌 정도로 막장은 아니었다고. 괴물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려고?
괴물이라고 하니 또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이상하군……. 청록색 촉수괴물이 주변에 있어야 하는데 전혀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레이프와 달리 성벽은 부서지거나 녹아내린 흔적이 전혀 없었다. 이상하다?
이곳이 만약 루인이라면 200명 중 100명도 되지 않는 인구가 남아 있어야 했다. 그 말은 200명이었던 인구가 단숨에 반 이상 없어질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어야 정상이라는 소리였다.
프레그넌트 때처럼 괴물이 갑자기 소환됐다는 경우도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그건 카인이 자신의 극적인 등장을 위해 준비한 쇼였다. 굳이 그런 쇼를 하지 않더라도 마을을 공격해 함락시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괴물의 낌새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눈을 감은 채 놈들을 감지하려 해도 전혀 낌새를 맡을 수가 없었다. 뭐야 이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완전 이상하잖아.
그래, 가정을 해보자. 내가 가보지 못한 마을 중 이곳이 루인이 아니라면……300명 정도 인구가 있다는 마을. 카미유라고 치자. 카미유에 대해서 들은 적은 없지만 그들 또한 청록색 촉수괴물을 상대로 열심히 싸웠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을 해하려는 괴물이 주변에 있는데 가만히 놔둘 수는 없으니까.
그치만 이상하다. 싸웠다면 그 괴물은 틀림없이 빔 공격을 했을 것이다. 성벽에 손상 하나 없이 이렇게 깨끗하게 싸울 수는 없었다. 갑자기 마을 안에 나타났다고? 프레그넌트처럼? 아냐, 아냐……. 마을 안에 있는 검은 물방울은 틀림없는 산성액에 의한 흔적이었다. 놈들은 그런 귀여운 짓은 하지 않는다.
이상하잖아……그럼 대체 카미유는 왜 이렇게 박살난 거지? 청록색 촉수괴물이 바깥, 안. 아무데도 관련이 없다면 왜 이렇게 마을이 부서졌으며, 대체 이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청록색 촉수괴물은 뭘 하고 앉아 있었단 말인가? 다 같이 단체로 딸이라도 치고 있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저 멀리에서 또 무언가가 빛나는 느낌이 들었기에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또 아밍 소드인가……. 이걸로 몇 자루 째지? 경비대원의 아밍 소드를 줍다 보니 이게 그들의 유품(遺品)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불길한 생각은 원래 하면 안 되는 거지만……붉은색 촉수괴물 중에는 은색 비키니 아머를 입은 여자들도 있었기에 내 생각은 아주 틀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을 본 후 그걸 토대로 한 생각이었지. 내가 여자들의 죽음을 바랄 리가 없잖아…….
딸그랑…….
“응?”
아밍 소드를 줍기 위해 몸을 굽히던 나는 무언가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발밑. 아밍 소드 주변에서 나는 것이었기에 M16A1을 겨냥했다. 좀비 비슷한 괴물까지 나왔는데 성벽을 뚫고 이상한 괴물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다시 한 번 딸그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왜 그 소리가 난 것인지도 알 수 있었다. 철제(鐵製) 아밍 소드가 흔들리며 울려 퍼지는 소리를 낸 거다. 난 일부러 아밍 소드를 줍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유심히 관찰한다. 딸그랑 소리가 울리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어, 그래. 신세린. 니가 수학이랑 과학 존나 못 하는 건 알고 있는데……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는지를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해. 존나 간단해. 생활 과학이잖아? 철제 물건이 웅웅대며 소리를 내는 이유가 뭐라 생각해?
난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M16A1을 꼭 쥔 채 중얼거렸다.
“충격이 가해졌으니까.”
그래, 우리 똘똘한 세린! 잘 맞혔어. 자……이제 왜 온몸의 털이 곤두섰는지. 그리고 니가 당장 뭘 해야 하는지를 말해볼래? 아, 뭣하면 행동으로 보여줘도 괜찮아.
내면의 목소리가 마치자마자 나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밍 소드는 이미 몇 자루 가지고 있었기에 더 이상 줍지 않아도 됐다만……사실은 주울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전속력으로 달리며 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왜 아밍 소드가 저절로 소리를 냈을까? 정답은 간단했다. 대지가 흔들렸으니까. 이 경우 대지(大地)는 성벽을 뜻한다. 밖에서 공격하는 사람이나 괴물은 하나도 없는데 성벽이 흔들린다면 그 이유는…….
“시발 뒤에 몇 십 명이 있는 거야!?”
내 질문에 발소리로 대답하려는 듯 저 멀리에서 쿵쾅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망할! 손과 발로 바닥을 터덕거리는 저 소리! 저 소리가 1초에 몇 개 간격으로 터덕터덕터덕터덕거리며 나며 다가오는 걸 들으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구나! 성벽이 흔들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몇 십 명이나 되는 붉은색 촉수괴물들이 날 향해 단체로 뛰어오고 있었으니까!
설마설마 싶어 달리긴 했지만 진짜로 개떼처럼 몰려올 줄이야! 옛 현인(賢人)들의 지혜에는 진심으로 탄복(歎服)을 금치 못하겠군! 옛말 중 틀린 거 하나 없다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라고 하잖아? 지금이 바로 ‘설마’다! 설마 붉은색 촉수괴물이 된 마을주민들이 개떼로 성벽에 올라올 줄 누가 알았겠냐!?
속도가 느리다지만 뒤에서 미는 괴물들 때문에 좋든 싫든 놈들의 속도는 증가했다. 내가 전속력으로 뛰는 걸 잡을 수는 없다지만 여기서 ‘어멋, 넘어져버렸어……데헷♡’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좆망~!!
좆망~!!
좆망을 알리는 종소리가 머릿속에 화사하게 울려 퍼진다.
아무리 저 사람들이 불쌍하다지만 그들과 함께 운명을 달리 할 수는 없었다. 안즈가 없다는 건 이미 알게 됐지만 혹시나 싶어 성벽에 올라온 거다! 여기서 저 사람들한테 습격 받아 ‘으, 어어……’같은 좀비 사운드 내는 괴물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단 말이다!
이 상황에 태클 거는 독자들! 좀! 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자식! 저 사람들이 불쌍하다면서 도망치다니!’라고 비난하겠지만……불쌍한 사람을 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랑 같은 고통을 맛볼 필요는 없잖아!
재산 탕진한 사람 있다고 그 사람처럼 가진 돈 모조리 탕진한 다음 함께 정신적 교감을 나눌 필요 있냐? 불쌍한 건 불쌍한 것, 개인사정은 개인사정이다! 동정과 연민을 보내는 사람이 고통 받는 사람의 고통까지 모두 겪어야 할 필요는 없단 말이다!
게다가……그래, 내가 저 사람들이 불쌍해서 괴물이 된다 쳐! 그럼 누가 알아 주냐? 저 사람들이 ‘세린님의 친절한 마음에 가, 가버렷! 괴물에서 인간으로 돌아와버렷!’이라며 사람으로 변하냐? 이 모든 상황이 해결되냐고? 아니잖아!!
현재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죽는다고 저 사람들이 원래대로 되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미쳤다고 내 목숨을 내놓냐? 측은지심은 어디까지나 마음일 뿐! 마음과 행동이 늘 일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나처럼!
간신히 성벽의 계단을 타고 내려가던 나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목격했다. 저글링 러쉬를 받을 때처럼 많은 괴물들이 계단 밑에서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올라오고 있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냐?
괴물들이 매복(埋伏)하고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건 단순한 매복의 개념이 아니었다. 설마 했지만 괴물로 변한 주민들이 내가 생각한 최악의 형태로 변하게 될 줄이야…….
최근에는 좀 다르지만 좀비 시리즈 중에는 ‘지능이나 추억을 가진 좀비’들이 존재하고는 했다. 좀비가 됐으면서도 예전에 일하던 일터로 가거나 단순작업 및 활동을 하는 유형이 있었다. 그리 알려진 소재도 아니었지만 ‘사람이었을 때의 추억이나 습관을 가진 좀비’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지능이나 추억을 지닌 좀비가 사람한테 좋은 것으로 작용될 리는 없었다. 사람들의 도주 루트를 파악해 매복하거나 에워싸는 작전으로 퇴로(退路)를 막을 수도 있었고,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인해전술(人海戰術) 또한 실행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도 그것과 비슷했다. 노리고 한 건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노리고 한 짓이었다. 많은 괴물들 중 일부를 성벽으로 보내면 나는 당연히 도망칠 수밖에 없게 된다. 동료를 희생시키며 다가오는 괴물들을 섬멸할 자신 따위는 없으니까.
도망치기 위해 다다른 곳은 성벽의 계단. 마법을 잃은 나한테 ‘성벽을 뛰어내린다’라는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자연히 계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런 나를 맞이하는 건 남은 괴물 대군(大群).
싫다고 위로 올라가도 괴물.
밑으로 내려가려 해도 괴물.
궁극의 양자택일(兩者擇一)이란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괴물.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으니까. 괴물한테 이런 지능까지 가지게 하다니. 날 엿 먹이고 죽이려는 건 좋은데 너무 공들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욕을 내뱉으며 방아쇠를 당긴다. 마음 같아서는 ‘자동’으로 갈겨버리고 싶었지만 매복하고 있는 적의 숫자를 모르는 이상 함부로 마력을 소모할 수는 없었다. 신체 일부가 뜯겨져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놈들을 정성껏 발로 차며 계단을 내려온 나는 바로 마을의 입구로 달려갔다.
2층부터 시작해 성벽에 올라갔을 때부터 도망칠 루트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공무원 공부는 실패하면 그저 지식으로 남을 뿐이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기억한 것들은 달랐다. 언제라고 장담은 못하지만 반드시, 틀림없이 써먹을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지!
도주 루트를 파악한 건지 놈들은 계속해서 나왔다. 샛길, 골목, 커브, 대로(大路). 여기에서 나를 놓치면 영영 먹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건지 더 집요하게 다가왔고, 나는 놈들의 태세에 혀를 차며 싸워야만 했다.
쉬지 않고 보고, 달리고, 멈추고, 싸우고, 생각해야 했다. 그 덕분에 다리는 후들거렸고 지금 당장이라도 토사물을 뱉을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참아야만 했다. 쉬거나 토하면 그 순간은 편하겠지만 공격을 받게 되어 영원히 편안하게 된다.
영원히 편안하게 된다는 말은 죽을 수도,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지금 개고생하는 건 싫지만 죽는 건 더욱 싫었기에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몸은 휴식을 원하고 있지만 논리를 주관하는 뇌는 [휴식이랑 생존, 뭘 택할래?]라며 결과가 뻔한 양자택일을 내밀었다. 당연히 생존이지, 시발!
바라지도 않았건만 졸지에 ‘좀비가 있는 마을에서 도망치는 생존자’ 역할이 된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입구를 보며 마음을 졸였다. 왜 있잖아. 이제 하나만 통과하면 되는데 적이 존나 훼방을 놓는다거나, 생각지도 못한 개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거나 하는 거. 난 그딴 이벤트 싫다고! 니들끼리 하란 말이다!
입구는 이미 열려있었다. 2층과 성벽을 통해 두 번이나 확인했었지만 저것 또한 의문이었지. 마을을 지키는 입구가 왜 뻥 뚫려 있는 걸까. 괴물이 들어왔다고 쳐도 이상했다. 내부, 외부에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성벽. 청록색 촉수괴물이 날뛰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피해 상황.
마을이 부서진 것은 틀림없었지만 그곳에서 청록색 촉수괴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기에 매우 껄끄럽다고 생각하던 나는 입구를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했다. 혹시……마을을 부순 것은 그들이 아닐까? 나를 쫓아오고 있는 저 괴물들. 원래는 주민들이었던 그들이 이 마을을 부순 것은 아닐까 하는…….
이제 와서 아무런 소용이 없는 생각이었지만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정든 고향이 박살난 것도 모자라 아기와 생명을 잃고, 시체까지 괴물로 이용당하는 상황인데……사실은 그 고향을 박살낸 것이 자기 자신들이라니. 시궁창도 이런 시궁창이 있을까?
허나 이러한 생각과 가정이 사실이라면……그들은 어떤 의미로는 나 이상으로 불쌍한 존재들이었다. 나는 내가 할 일을 해내기 위해 살아남으려 하지만, 저들은 살아서 원하는 것을 다 누리지도 못했고 죽어서 편히 쉬지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마을을 배회하는 것은 나 같은 인간을 사냥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어쩌면……정말 어쩌면. 자신들에 의해 파괴된 마을을 고쳐줄 사람을 찾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하는……감상적인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아무런 문제없이 입구를 나오긴 했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여전히 두두두두 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마을을 나왔다고 ‘아앗! 우리는 이 마을에서 나갈 수가 없어요! 저 사람을 잡을 수가 없다구요!’라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난 계속해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 표지판이 없나 살펴봐야 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입구를 나온 네다섯 마리의 괴물을 보니 역시 이동 및 추격에 제한은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한가하게 표지판이나 찾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무작정 달려야만 했다. 식량과 침구류는 가지고 있었으니까 휴식은 나중에 취하면 될 일이고.
무사히 마을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앞길을 방해하는 안개처럼 내 앞날은 깜깜했다. 이곳이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모른 채 무작정 걷고 뛰어야 하는 신세라니. 한숨이 나왔지만 멈출 생각은 없었고 멈추어서도 안 됐다.
카인이 이미 저지른 짓, 그의 목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이제 와서 그걸 궁금해 할 군번도 아니고, 알아차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중요한 건 놈이 목적을 가지고 있듯이 나도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주 심플한 목적. 그놈 대가리에 총알 먹여주는 거.
총알이나 마법이 통하든 안 통하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안 통하면 조금 전에 얻은 제식 아밍 소드라고 휘두를 생각이었으니까. 더 이상 놈이 활개 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이대로 놔두었다간 모든 마을이 폐허가 되고, 마을의 주민들은 괴물로 변하겠지. 그들의 영혼은 구천(九泉)조차 떠돌지 못한 채 이 세상에 남게 될 것이다.
나 자신의 소중한 것이자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서도. 이 세상의 평화와 ‘하렘 어드벤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더 이상 핑계를 대며 도망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놈을 죽여야만 했다.
“내 참, 터무니없는 라스트 미션을 맡게 됐구만…….”
실행 가능성은 낮다.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그게 다른 사람들의 목숨과 평화를 앗아갈 이유는 되지 않았다. 이 세상의 신이라며 자기 멋대로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너는……네놈 새끼만큼은 반드시 지옥으로 떨어뜨려주마.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아는 이도, 사랑하는 이도. 곁에 아무도 없이 홀로 쓸쓸하게 걷는 여행길. 나밖에 없는 마지막 여행길에 외로움을 느끼며 걸음을 재촉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카미유에서 탈출하게 된 세린. 개떼 같은 붉은색 촉수괴물들로부터 목숨만 겨우 건져 도망친 신세가 됐네요. 초중반에 보여줬던 아내들과의 협력 플레이 or 강력한 마법 난사는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비참해졌습니다. 게임으로 치자면 특전이고 고레벨이고 간에 아무것도 없는 초회차 플레이겠죠.
아내들과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상태에서 전부 다 해결하라는 것도 무리한 요구입니다만, 어찌 됐든 현실은 비참합니다. 현실이 비참하다는 것은 굳이 세린의 생각이나 현재를 빌리지 않아도 모두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현실이 행복과 즐거움으로 넘쳐난다면 아무도 창작 따윈 안 했겠죠. 현실주의적인 말이긴 합니다만, 현실은 절대 녹록한 곳이 아닙니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함께 갈 사람도 없는 상태. 세린의 라스트 미션이 부디 성공적으로 끝나길 바랍니다.
업로드 시간에 관해서입니다만, 직장일이 워낙 힘들다보니 오기가 생겨 '그것'을 하게 됐습니다.
예. 바로 '그것'입니다.
별로 한 적 없다는 전설의 '그것'.
직장컴퓨터로 업로드. 약칭 '직장 업로드'!
일은 좆같은데 명령이나 지시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고, 뭘 하면 좋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모든 걸 다 해결해주기 바라는 씨발 좆같은 회사. 대체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걸까 생각하던 도중 삘(Feel)받았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시발, 일이 좆같으면 복지라도 좋아야지……복지는 꽝이지만 일하는 건 알아서 다 하라고? 난 고작해야 계약직인데?'
직책은 계약직인데 하는 짓이나 알아야 하는 지식은 팀장급을 원하니 좆같더군요. 그래서 결국 직장 업로드를 하게 됐습니다. 이 씨발 좆같은 회사, 먹고 살려고 다닐 뿐이지 애착은 전혀 없습니다. 얼른 계약기간이 끝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앞으로 업로드는 아침 9:00~10:00을 기준으로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자정 업로드로 돌아갈 경우도 있으니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푹 자고 싶네요. 언제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가능하면 푹 자고 싶습니다. 8시간을 내리 잤던 게 몇 년 전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