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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174화 (174/235)

00171 「17-10 : 종언의 카운트다운 (1)」 =========================

미쳤어……미쳤다고! 뜨거운 눈물이 마구 흘러넘쳤다.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쉴 새 없이 흐르는 수돗물처럼 내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뒤를 돌아보니 조금 전 총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쫓아오려는 놈들이 보였다. 다급히 뒤를 돌아 확실하게 놈들의 숨통을 끊은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프레그넌트처럼 부서진 집들이 주변에 지천(至賤)으로 깔려 있었기에 만족스럽게 몸을 숨길 곳은 발견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사치스러운 것을 바랄 때가 아니다!

가장 몸을 숨기기 적합한 곳을 발견한 나는 그곳으로 개처럼 달려가 재빨리 들어갔다. 주변에 놈들이 없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억지로 숨을 참는다.

……없다. 놈들은 없다. 그걸 확인하자 그쳤다고 생각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사내 새끼가 왜 이렇게 눈물이 많냐고 묻는다면……슬프니까. 너무나 있을 수 없는 현실을 맛보았기에 울 수밖에 없다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입을 막았지만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본다. 대답할 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난 이렇게 되기 전까지의 과거를 회상했다.

† † † † † † † † † †

춥다. 딱딱하다. 이상하네……? 안즈의 품이 이렇게 차가웠던가?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한기(寒氣)가 온몸을 감쌌기에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밤이 되면 나름 쌀쌀하기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추운 적은 없었는데……?

누운 상태에서 앉은 자세를 만든 나는 눈을 비비며 앞을 보았다. 혹시 침대에서 떨어져서 바닥에 떨어졌나? 그렇다 치더라도 너무 추운데? 어라? 뭐야. 왕궁의 땅이 이렇게 질척했던가? 눈을 뜬 나는 내가 앉은 곳을 살펴보았다. 뭐지? 흙? 왜 침실에 흙이 있지?

“으응? 뭐야 이거……?”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왔다. 단숨에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상하다……? 하늘이 이렇게 어둡다니? 게다가 나, 왜 침실이 아니라 길바닥에 있는 거지?

왕에서 단순한 피난민으로 전락한 나였다만 나름의 대우였는지 좁고 허름한 방을 주긴 했었다. 그 방에서 안즈와 잠을 잤었는데 왜 길바닥에 나앉은 거지처럼 여기서 자고 있던 거지? 안즈는?

“안즈……?”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길바닥이라니. 자고 일어났는데 이 세상에 소환된 것에 비하면 충격이 덜했지만, 그렇다고 물리법칙과 인과가 완전히 무시된 결과에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곁에서 날 끌어안은 채 자던 아내, 안즈를 조심스럽게 불렀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안즈.”

뭔가 이상하다……이상해! 난 주변을 둘러보며 다시 안즈를 불렀다. 이번에는 무언가 홀린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분명히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아침이어야 하는데 하늘이 어두운 것부터 시작해 이 딱딱한 땅……! 그 감촉은 프레그넌트에서 느끼던 땅의 감촉이었다.

농경사회와 중세시대를 합친 듯한 ‘하렘 어드벤처’였다만 마을까지 완전히 자연에 둘러싸인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지나가기 편하도록 땅은 꽤 굳은 상태였으며 그 강도는 흙보다 훨씬 단단했다. 손으로 쥔 후 힘을 주면 사르르 빠져나가는 흙과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았지.

“안즈! 어디 있어!? 안즈!”

이제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잠을 자다가 이 판타지 세상에 소환된 것부터 시작해 납치도 당해봤고 전혀 모르는 곳(여기)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그런 경험들의 공통점은……대부분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는 거였다.

“안즈! 대답해! 어디 간 거야!? 대답을 하란 말이야! 안즈!”

아침이든 밤이든 간에 소리를 지르는 건 결코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만……나한테는 그러한 기본적인 상식을 떠올릴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또 다시 내 곁에서 소중한 아내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 모든 짓의 원흉인 카인이 생각났지만 지금은 그 새끼보다 안즈를 찾는 게 더 급한 일이다!

안즈를 찾으며 난 주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을 옮기자 안즈를 찾기 위해 고함을 치던 나는 자리에 멈춘 채 내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귀신이라도 봤냐고? 음, 귀신은 아닌데. 내가 영감(靈感)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거든. 설령 봤다 치더라도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만큼 쇼킹한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뭘 봤냐고? 간단해.

……부서진 집들과 폐허가 된 마을이지.

“이, 이건 뭐야……?”

중얼거렸다. 듣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없었지만……당연히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 눈에 들어온 풍경은 너무나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것이었다. 부서진 집과 파편들. 찢겨진 옷 쪼가리들. 깨진 접시나 박살난 목제 가구. 이건, 이 모습은……?

“프레그넌트……?”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제2의 고향. 시궁창 같았던 내 인생을 새롭게 시작했던 마을. 그곳의 이름을 중얼거렸다만……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프레그넌트는 아냐. 완전히 개박살이 난 그 모습은 프레그넌트와 흡사했지만 자세히 보니 내가 알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부서진 집들의 모양은 프레그넌트에 있는 건축물과 꽤 달랐다. 지붕이나 창문의 형태부터 시작해, 프레그넌트에서 보기 어려웠던 2층짜리 건물도 가끔 보였다. 이곳이 프레그넌트일 리는 없지. 어느 바보가 폐허가 된 마을에 2층짜리 건물을 짓는단 말인가?

프레그넌트는 아니었다만 그곳과 비교될 정도로 황폐하게 변해버린 이 마을에 신축 건물을 짓다니. 그런 사람이 있다면 두 부류겠지. 바보거나, 창작욕구에 불타는 바보거나. 어느 쪽이든 바보라는 점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바보잖냐. 괴물이 날뛴 것인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척 봐도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게 되어버린 마을이다. 이런 곳에서 새로운 건물을 짓는다고? 건물을 짓기 위한 자재나 도구는? 짓는 목적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곳에 건물을 지을 리가 없지 않은가?

곁에서 없어져버린 안즈를 부르던 나는 천천히, 하지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라진 안즈도 신경이 쓰였지만 처참하게 박살이 난 마을. 잠에서 깨어난 곳이 듣도 보도 못한 마을이라는 점이 너무나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부서진 이곳을 ‘폐허’라고 불러야 할지 ‘마을’이라 불러야 할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만……이내 마을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곳은 틀림없는 마을이었다. 단지 대부분의 건물들이 부서진 것뿐이지. 이곳을 폐허라고 말하는 것은 내 고향인 프레그넌트 또한 폐허라고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부서진 집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으며 모습을 관찰한다. 검게 탄 흔적이 보이자 소스라치게 놀라야만 했다. 부서진 집에 검게 탄 흔적이라니. 이미 견적이 다 나왔잖아! 이걸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난 병신이 아니었다.

그 청록색 촉수 괴물들!

그놈들이 여기를 개박살냈다고!?

입을 막은 채 주위를 살폈지만……이상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괴물의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이상한데……뭐가 어떻게 된 거야? 괴물이 없나 살피던 나는 다시금 건물을 자세히 살폈다. 아침일 텐데도 어두워 잘 보이지 않던 부분을 자세히 보던 나는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거……뭐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세히 보니 검게 탄 자국이었다. 검게 탄 자국이야 지금까지 몇 번이고 본 것이지만……이건 좀 달랐다. 커다란 구멍에 검게 탄 자국이 있으면 그건 놈들의 아가리에서 나온 빔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 그 공격에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마치……물방울 같다. 물에 젖은 손을 벽에 휘저으면 손에 있던 물방울이 벽으로 흩뿌려지고는 했었는데……마치 그것과 같았다. 물방울 자국 같이 검게 탄 흔적이 여러 개 붙어 있는 걸 보니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상하다……? 놈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 이런 흔적은 없었는데? 검은 물방울이 물처럼 흩뿌려진 것이 있는가 하면 물풍선처럼 터져 멀리 퍼진 자국도 보였다. 부서진 집들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검게 탄 자국이 보였기에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건물과 신체 일부를 태우고도 남을 빔에 비하면 우스운 범위였지만 검게 탄 자국들이 물방울처럼 모인 모습은 빈말로도 절대 예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피부에 닿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감마저 들게 만들 정도였다. 이건, 이건 마치…….

“그 괴물놈들이 새끼를 낳았다는 건 아니겠지……?”

……이런 씨발! 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방금 내가 뭐라고 지껄인 거지?

새끼? 괴물 새끼들의 새끼?

말장난이 아니라! 그놈들의 자식이라고!?

마치 비명을 억누르는 여주인공처럼 입을 틀어막은 나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괴물이나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걸 깨달은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내 입을 저주했다.

신세린, 이 미친 새끼야! 말이 씨가 된다는 거 모르냐? 입으로 내뱉은 불길한 것들이 대부분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것 덕분에 니가 좆망 사태에 처해졌다는 걸 아직도 모르냐? 잊었냐? 니가 붕어냐? 기억력 3초냐고! 붕어라도 너보다는 똑똑하겠다!

니가 이전에 말했잖아! 남자는 입 끝, 손 끝(주먹 끝도 포함), 좆 끝! 세 가지 끝을 조심해야 한다고! 온갖 예시를 들며 그걸 말했던 놈이 그딴 불길한 소리를 지껄여? 미친 새끼! 그러다 진짜 괴물 새끼가 튀어나오면 어떻게 할 건데? 응?

스스로 말해놓고 나 자신을 저주하다니……젠장! 저주받아도 싸지! 욕먹어도 싸다! 그 빌어먹을 카인이 ‘어? 괴물 새끼를 보고 싶었던 거야? 진작 말해주지……받아라, 괴물 새끼 창조의 빛!’이라 외치면서 그린랜턴처럼 날 엿 먹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딴 소리를 한 거람!?

이 와중에도 다양한 패턴으로 퍼진 검은 물방울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로로 힘껏 손을 휘두른 것처럼 다닥다닥 붙은 것들이 있는가 하면 다닥다닥 붙어 끔찍한 무언가를 연상시키게 하는 패턴도 보였다.

처음에는 어설픈 패턴도 나중에 가면 꽤나 다양해졌고 그걸 통해 이걸 뿌린 놈들이 점점 검은 물방울을 뿌리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성장을 지켜보는 건 기쁜 일이겠지만……이 검은 물방울. 아무리 봐도 고열에 의해 타오른 흔적이었다.

청록색 촉수 괴물이 이렇게 정교(精巧)하게 빔을 뿜을 수는 없다. 그건 이미 몇 십 번의 전투로 인해 확인된 것이었다. 그놈들이 이렇게 물방울 뿌리듯이 빔을 날릴 수 있다면 이미 나나 안즈는 죽었겠지. 파워뿐만이 아니라 정교함도 갖춘 괴물이라니.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내 곁에 자던 안즈의 행방부터 시작해 내가 왜 이곳에서 깨어났는지도 궁금했지만, 물방울 모앙의 검게 탄 자국은 그러한 의문들을 나중에 생각해도 괜찮은 것들로 만들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장 내 몸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그 이외의 것들은 나중에 생각해도 괜찮았으니까.

어떨 때는 파워풀하게. 어떨 때는 정교하게 뿌려진 물방울 모양의 검은 자국을 보던 나는 청록색 촉수 괴물이 쏘던 빔과의 차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빔은 신체일부든 건물이든 간에 그것을 소멸시킬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섣불리 나섰다간 바로 세상 하직할 정도의 위력과 범위 때문에 속 썩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하지만 이건 많이 달랐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건 빔이 아니었다. 빔이라면 건물 하나 못 뚫을 정도로 약하진 않을 것이다. 부서진 건물들의 파편 또한 마찬가지였다. 강한 힘에 의해 부서진 자국은 있지만 녹아 없어져 떨어진 파편 등은 좀처럼 보기가 어려웠다. 이건…….

“산성(酸性) 같은데……?”

산성은 흔히 산(酸)이라고 불리는 화학물질이었다. 금속을 녹일 정도로 위험한 것이었기에 나 같은 일반인은 함부로 만질 수도, 다룰 수도 없었다. 애초에 그걸 구할 방법조차 없었다만……아무리 봐도 저 검게 탄 자국들은 산성 같은 걸 뿌렸다고밖에 생각할 길이 없었다.

건물을 녹일 정도의 위력을 지닌 산성이다. 왜 저런 게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왜 저런 게 생겼나’가 아니었다. ‘저 무식한 위력의 산성이 나나 안즈한테 맞으면 어떻게 될까?’가 더 중요했지. 목숨에 관련된 일이었고,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는 질문이었으니까.

그 질문을 뇌로 시뮬레이트한 결과는……끔찍했다. 젠장! 차라리 몰랐으면! 못 봤더라면 좋았을 것을! 생각뿐만 아니라 상상한 것마저 후회될 정도로 끔찍했다! 저런 조그마한 물방울 하나하나가 산성에 해당될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니! 한 방울만 맞아도 피부가 타들어간다는 소리잖아!?

위험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한 방울만 맞아도 위험한 걸 이렇게 다닥다닥 뿌리다니! 이런 놈이 한 마리만 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청록색 촉수 괴물 때문에 미칠 지경인데 그런 놈의 마이너 버전이 이 주변에 있다고? 세상에 마상에! 이렇게 끔찍할 수가! 당장 안즈를 찾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부서진 집의 파편 사이로 보이는 물자들을 부지런히 챙기며─사람은 없었고 혹시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챙긴 거다. 도둑놈 아니라고!─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나는 내가 한 행동을 후회해야만 했다.

익숙하지도 않은 마을. 대부분의 집이 무너져 기준으로 삼을 곳조차 없는 길을 아무런 조심성 없이 돌아다니다니……! 내가 어디로 왔는지를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아침일 텐데도 여전히 어두운 하늘은 내 불안함과 짜증을 더욱 증폭시켰다.

생각 같아서는 안즈의 이름을 부르며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혹시나 내 목소리를 들은 놈들이 개떼 같이 몰려온다면? 그날로 【축(祝) 사☆망 & 좆★망 하(賀)】!! 아내들을 카인의 손아귀에서 구한다는 목표를 영원히 이룰 수 없게 될 테니까!

싸우라고? 야, 너희 너무한 거 아니냐? 나 마법 다 사라졌다니까? 그 기본 중의 기본인 ‘자지의 맹세’부터 시작해 온갖 것이 다 사라진 것도 모자라 마력마저 간신히 예전의 1/10을 넘는 수치인데 싸우라고? 몇 마리……아니다. 몇 십 마리 있을지도 모르는 괴물놈들이랑?

아직 이 마을을 완전히 돌아다닌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내가 갔던 마을은 아니다’라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성벽이나 마을을 지키는 기둥이 없었다.

이미 무너진 프레그넌트도 아니었으며 야만족의 숲일 리는 더욱 없었다. 특히 야만족의 숲에서 일어났다면 이런 건물은 있지도 않았겠지. 얄짤 없이 일어나지도 못하고 뒈졌을 거다.

소거법(消去法)으로 생각하자면……프레그넌트도, 야만족의 숲도 아니다. 하물며 부카케, 자멘, 어보션. 내가 원래 있어야 했던 레이프도 아니었다.

그럼 간단했다. 이곳은 루인, 아니면 카미유. 지금까지 내가 가보지 못했던 마을 중 하나였다. 간 적도 없는 마을이면서 그곳이라 확신하다니. 나도 참 웃긴 놈이었지만 이 상황도 참 웃긴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추론하는 게 아니라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근거로 추리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물론 경험한 것들 덕분에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었지만 ‘음, 여긴 와본 적이 없으니 지금까지 가지 못했던 두 마을 중 한 곳이겠군’이라니. 이런 걸 추리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한숨이 나온다.

“……으어…….”

한숨을 쉬던 나는 ‘헉’이라는 소리를 낸 후 주위를 살펴야 했다. 방금……목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다시 한 번 ‘으어어……’라는 소리가 들렸고, 내 가슴은 각성제라도 맞은 양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생존자(生存者)라고?

이 폐허 속에서 살아남았다고?

단단한 걸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생존자라니? 이 폐허가 된 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단 말인가? 당장에라도 확인하러 가고 싶었지만 그 발걸음을 멈춘 채 아주 중요한 것을 생각해야만 했다.

[가서 뭘 하려고?]

누군가는 ‘무슨 소리에요!? 구하러 가야죠! 당장에라도 죽을 거 같은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하는데 그럼, 안 갈 거예요!?’라고 나를 비난할 수도 있겠지.

그래, 그 의견은 옳다. 사람으로서 당연한 행동이지. 도움을 청하는 누군가를 버려둔 채 도망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하지만 말이지.

이 근처에 괴물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냐?

더 이상 괴물은 이 마을에 없다고 단언할 수 있냐고?

아니잖아! 단언 못 하잖아! 당장 괴물이 몇 십 마리나 쏟아질지 모르는 상황에 저 사람 구하러 가자고? 몸이 씹창이 되어 신음하고 있는 건지, 멀쩡한 상태로 도움을 요청하는 건지 모를 사람을?

야, 너무한 거 아니냐?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당장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목숨을 걸고 또 사람을 구하라니!?

정말 골 때리는 상황이었다. 어어 거리는 신음 소리를 더욱 더 주기적으로, 똑똑하게 들려 왔고 주변에서는 사삭거리는……그래. 바닥을 기어 다니는 놈들이 내는 특징적인 소리. 손과 발로 대지를 터덕터덕 밟고 다니는 수상한 소리가 점점 많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발……시발! 씨발!

어떻게 하면 좋냐?

나 어떻게 하면 좋냐고!?

난 나 자신한테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지금 당장 내 목숨부터 시작해 어디 있는지 모를 안즈를 찾아야만 했다! 멀쩡한지 반병신인지 모를 사람을 위해 다가갔다간 안즈는커녕 내 목숨 하나 부지 못한 채 뒈질 수도 있는 팔자다!

문제가 이것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잔넨(残念 ; ざんねん - 일본어로 ‘유감’이라는 뜻.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라이트노벨 등에서 자주 쓰이는 문구로써, 상대방의 예상이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귀엽게 지적할 때 쓴다. 나 같이 다 큰 남자 새끼가 쓰면 배 존나 세게 갈기고 싶어지니 개념 있는 성인 남성은 함부로 쓰지 말자)!! 아직도 문제가 남았답니다!

아니, 시발! 왜 내가 여기 있냐고! 이곳에서 일어났을 때부터 생각하던 의문을 이제야 나타내다니! 나도 참 맛이 갔다니까!? 레이프의 왕궁에서 푹 자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여기로 소환됐을까?

아, 그래. 카인 탓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작가도 알고 독자도 아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말자. 걔도 나한테 까이는 게 지겨울 테고 나도 걔 까는 걸로 분량 잡아먹는 건 싫다. 사람이 똑같은 패턴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지겨워지거든. 주인공인 나도 그런데 최종보스인 걔는 오죽하겠어?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를 놈은 당연히 카인밖에 없었지만 문제는 ‘어째서’였다. 날 엿 먹이려는 건 안다. 하지만 엿을 먹이려면 다른 방법도 있는데 왜 여기로 소환시킨 거지?

루인과 카미유. 둘 중 어느 곳이든 간에 가본 적이 없는 곳이다. 나랑은 인연도, 관계도 없는 마을을 초토화시킨 것도 모자라 이곳에 보내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유가 어찌 됐든 간에 중요한 건 현실과 현재다. 나는 여기서 일어났고 현재는 최악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저 수상한 목소리의 주인을 살펴보러 가느냐, 아니면 여기서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모른 척하고 떠날 것인가.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걸 재빠르게 생각해보자. 아, 씨발! 계속 터덕거리면서 마을 바닥 짚지 좀 마라! 너희 때문에 생각 힘들잖아! M16A1을 손에 쥔 나는 주변에 괴물들이 없나 체크한 후 다시금 생각을 해야 했다. 내가 뭘 생각했더라? 아, 맞아! 나한테 중요한 거!

현재 나한테 중요한 것의 1위는 목숨이었다. 당연한 거 아니냐? 내가 죽으면 말짱 황이라니까? 끝이라고! 내 여행, 모험! 이 소설! 다 끝나는데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하고 귀중한 거 아니냐? 거기,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날 보는 독자들! 너흰 대체 나한테 뭘 바란 거야? 아내들이라고 대답할 거라 생각했냐?

그래, 2위! 아내들! 됐냐? 그 아내들 중 현재 상황에 맞게 나한테 소중한 사람을 고르자면 당연히 안즈겠지! 함께 자던 안즈가 이곳에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게 제일 급한 일 중 하나였다. 이 폐허 어딘가에 안즈가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낸 후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으니까!

안즈는 나보다 훨씬 더 빨리 위기나 위험을 감지(感知)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나와 함께 이곳에 소환됐다면 거의 100% 확률로 나보다 일찍 일어났겠지. 내가 빨리 일어나 여러 가지를 살펴보는 동안 안즈가 퍼질러 자다니. 상상이라면 재미있겠지만 사실이라면 끔찍했다. 그 괴물들이 주변에 있는데 잠이라고? 죽고 싶어 환장했냐?

“으, 어어어……어윽!”

망할! 내가 꼭 딜레마에 빠져 있는데 당장에라도 저 세상으로 갈 거 같은 목소리 내야겠냐? 응? 신음소리를 내는 사람한테 온갖 욕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온 길은 모르지만 그냥 직선으로 쭉 나가면 어디든 간에 마을 외곽이 나올 거다. 그곳을 기준 삼아 돌다보면 마을 입구가 나올 테니 거기로 나가면 끝. 이 마을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 탈출할 때의 이야기다. 아직 안즈도 찾지 못했고 저 신음소리의 주인을 보지도 못했다. 찾아야 하는 것은 안즈였지만 저 목소리의 주인이 계속해서 저런 신음을 내면 괴물들은 더 활개를 치겠지. 내 활동에 있어 방해가 되는 것들을 가만히 놔둘 생각은 없었다.

혹시나 저 목소리가 안즈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긴 들었다. 가능성은 한없이 낮지만 이 세상에 ‘절대’나 ‘반드시’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가능성은 낮지만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은 아니었기에 한 층 더 불안감이 커졌다.

“망할……간다! 가면 되잖아! 만족하냐, 개새끼야!?”

카인한테 욕을 하며 총을 꽉 잡았다. 갈 수밖에 없다. 괴물이 나타나면 어떻게든 도망치거나 해치우며 안즈를 찾아야지. 괴물하고 싸우는 걸 감수해서라도 안즈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없으면 바로 나가겠지만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야 하는 내 아내, 안즈. 그녀가 무사하기를 바라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터덕거리며 바닥을 짚고 밟는 소리가 날 때마다 걸음을 멈추어야 했기에 꼭 잠입 액션 게임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망할……메탈 기어 솔리드 시리즈 중 하나 정도는 플레이해둘 걸 그랬어. 그랬으면 잠입이 지금보다는 쉬웠을 텐데…….

까치발처럼 살금살금.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도 발걸음을 빨리 했고 머지않아 신음 소리가 들리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괴물들의 발소리를 들었지만 그 모습을 보지는 못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들을 볼 수 있다는 건 그들도 나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니까.

신음의 주인은 다행스럽게도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얀색 비키니 아머를 입은 안즈와 달리 그녀는 피로 물든 녹색 옷을 입고 있었다. 드레스 같아 보이는 옷이었지만 소매나 스커트 부분이 찢겨져 더 이상 드레스로서의 활용은 불가능해 보였다.

신음을 내는 그녀의 하반신은 건물 파편에 묻혀 있었으며 등이 하늘을 향해 있는 걸 보니 얼굴이나 가슴이 바닥 쪽에 묻힌 거 같았다. 건물 파편을 어떻게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다친 건가……측은함이 절로 일어난다.

안즈가 아니라 다행이긴 했다만 저 여자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저기 깔린 채 사망. 혹은 괴물들이 와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저 여자를 마음껏 도륙 낼 테니까.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결과는 쉽게 나왔다. 무리다. 구하는 건 어떻게든 내 힘으로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 다음은? 치료 마법도, 도구도 없는 상태에서 그녀를 끌고 다닌다고? 그러다 상처가 벌어지면? 세균에 의한 2차 감염이 일어나면?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저 여자를 구할 수는 있지만……그것뿐이었다. 그 이상의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 여자를 구해 그나마 안전한 집을 골라 쉬게 하는 것뿐. 쉬게 한다는 것도 말이 좋아 쉬게 만든다는 거지……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놔둔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도망칠 수도 있지만 안즈는 찾아야 했다. 저대로 내버려두면 죽음. 내가 구해도 죽는 운명은 피할 수 없겠지. 그럴 바에야 이곳에서 괴물의 주의를 이끄는 미끼로 쓸 수도 있겠지만……고개를 저었다. 망할. 내가 언제부터 이런 인간쓰레기가 됐을까?

힘이 없었을 때는 자기보다 강한 사람한테 찍소리도 못 했던 주제에 힘을 얻은 후에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살아남기 위한 미끼로 쓸려 하다니. 카인이 가지고 놀 만하군. 나는 놈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구해야만 했다.

여전히 괴물로 추정되는 소리가 들렸지만……이제 와서 도망칠 수도 없다. 일단은 저 여자를 구하고 보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주변을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클라이맥스로 향하기 시작했네요. 일어나자마자 본 것은 가본 적도 없는 마을의 폐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지만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 맨 처음 세린이 하렘 어드벤처에 왔을 때와 닮았지만 실제로는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맨 처음 왔을 때는 그나마 어떻게든 희망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카인이라는 존재도 몰랐고 앞으로 펼쳐질 일이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근데 현재는? 아내들은 다 빼앗기고 아이템이나 무기, 마법까지 대부분 잃어버렸습니다.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며 간당간당하게 살아남는 상황. 어딜 보더라도 현재 상태가 더 심각하네요. 잃어버린 건 많은데 되찾을 방법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점점 최종장으로 향하는 하렘 어드벤처, 앞으로도 계속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고양이새벽님, 드디어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로 치달아갑니다. 고양이새벽님을 포함해 대부분의 독자분들이 경악하실 수도 있으니 미리 사과부터 드립니다. 저 '경악하다'라는 뜻이 엄청난 전개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거든요. 앞으로도 열심히 연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ryukiel님,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쿠로의 능력을 보며 '비슷한 능력인가? 같은 능력치고는 열화가 두 번이나 일어나니까 뭔가 불완전하게 카피한 건가?'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처가 다운 그레이드된 무기나 도구를 투영하는 거라면 쿠로는 사실상 그 다운 그레이드된 능력의 마이너 버전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어떤 능력이든 쓰기 나름이라지만 개인적으로는 쿠로라는 캐릭터와 능력, 모두 다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무기들을 많이 투영하면서도 버틸 마력도 중요하겠지만요.

이상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자정 업로드로 전환됩니다. 만약 상황이 괜찮아진다면 회사에서 아침 업로드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일단은 자정 업로드를 기본으로 두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조회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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