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9 「17-8 : 빼앗겨버린 아내들 (18)」 =========================
질문할 것을 모두 질문해서 그런 걸까?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서로한테 있었던 일, 느꼈던 점, 카인에 대한 것 등. 내가 묻고 싶은 것들을 모조리 물었고 나름대로의 성과와 느낀 점도 있었다. 뭐……나한테 있었던 일은 로라가 모두한테 설명을 해줬으니 그만큼 수고를 덜긴 했지.
아주 만족스러운 대답이나 정보는 얻지 못했지만……적어도 내가 생각하던 최악의 사태는 맞이하지 않았기에 그것만으로도 이곳에 온 가치는 있었다고 느낄 수 있었다. 하물며 내 아내들과 이렇게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었으니까 말이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오히려 이 상황이 박살날지도 몰랐기에 만족하자며 웃던 나. 그런 내 생각을 깬 것은 메이와 니나였다.
“저기, 아빠…….”
“응?”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아빠 소리였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타났다. 이런……너무 좋아하는 티를 냈나? 그치만 어떻게 하냐? 우리 귀여운 메이랑 니나가 날 부르는데 기꺼이 대답해줘야지! 딸만 생각하는 바보 같다고? 냅둬라! 얼마 안 되는 즐거움이다!
“아빠……예전에 비해 너무 살이 빠진 거 아냐? 엄청 초췌해보여…….”
메이의 그 말에 나는 내 뺨을 만져봤다. 초췌(憔悴)? 나름 먹을 거 챙겨먹고 맛있는 것도 안즈랑 같이 사먹었던 나랑 가장 인연이 없는 말인데? 몇 주 동안 먹을 걸 못 먹은 사람처럼 뺨이 움푹 패어 들어간 것도 아닌데……?
“아빠, 우리 때문에 그런 거야? 우리 때문에……우리가 아빠도 못 알아보고 카인한테 막 들러붙어서……그거 때문에 힘들고 외로워서 그런 거 아냐?”
으헉!? 야, 야! 메이랑 니나! 니들 갑자기 왜 울어? 돌연 울기 시작한 두 명에 이어 아테나 또한 훌쩍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하품이니!? 니가 하면 남들도 따라 하는 연쇄작용(連鎖作用)이라도 일어난 거야? 응?
꽤 밤이 깊었기에 소리 높여 울 수는 없었는지 흐끅대며 울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로라와 안나. 마리아는 자신의 딸들을 토닥여주며 그녀들을 위로했다. 몇 명의 아내들은 나한테 따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저기, 얘들아.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하자. 눈으로 서로의 마음을 깨닫는 아이 컨택트(Eye Contact)는 좀……아, 응. 알겠어. 내가 나쁜 놈이고 죽일 놈이지? 미안해…….”
굉장해! 사랑과 신뢰는 잃어버렸는데 아이 컨택트! 그것도 나를 까는 내용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어!
이게 굉장하지 않으면 뭐가 굉장하단 말인가?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나를 까는 내용을 눈빛에 실어 보낸 것도 굉장하지만, 그걸 한눈에 파악하여 사과하는 나 또한 굉장했다!
“……아, 아니지! 시발! 생각해보니까 억울하네! 그게 왜 내 탓이야!? 다 카인이랑 그 괴물들 탓이지!”
벌떡 일어서며 말했지만 그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버림받은 남편의 ‘가장으로서의 권위’ 따위는 살포시 씹을 수 있을 정도로 연약한 것이었다. 원래 세상의 양갱이랑 비교한다면 아마 양갱 쪽이 훨씬 더 강인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진짜 왜 이러니 내 인생?
“하아……. 정말 괜찮아.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해진 거 아냐. 오히려 괴물들 상대로 도망치랴 싸우랴 온갖 짓을 다 했다니까? 체술이랑 검술 훈련은 못 했지만 단언컨대 예전보다는 더 건강해졌을 거야. 살아남느라 진짜 진땀 뺐으니까 말이지.”
나름 웃긴 말까지 섞어 말하자 세 명의 딸은 조금씩 킥킥댔다. 그래, 내 딸들은 저렇게 웃어야 귀엽다. 내 걱정을 해주는 건 좋지만 난 이렇게 무사하며 다친 곳도 없었다. 얼굴이 초췌해 보이는 건 아마 걱정거리가 산더미 같아서 그런 거겠지. 그건 예전에도 그랬으니 울 정도로 걱정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어? 자, 잠깐만. 생각해보니……나는 이 세상에 소환되기 전까지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잖아? 대부분이 다른 사람, 원래 살던 세상의 정부나 바보 같은 사람들 때문에 얻은 문제였긴 했지만……그때도 일단 가지고 있던 문제는 많았었지.
근데 이게 뭐야? 이 세상에 온 후에도 계속 문제는 발생했었잖아! 내 탓도 아닌데 발생한 문제들에 말려들어서 미친 듯이 굴러야만 했었고. 그나마 그것들은 악의(惡意)가 없었던 것들이지만 카인은 아예 악의를 가지고 온갖 문제를 만들어 나한테 떠넘기고 있으니 이 지경이 된 거지!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까지 해치게 되다니……정말 말이 아니군. 내가 내 몸 안 좋아지는 것도 느낄 수 없게 되다니. 당사자인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내 몸을 걱정할 정도라니? 현실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내 몸을 잘 챙겨서 그런 것도 있지만……걱정해줄 사람들이 없으니까. 부모님이야 뭐 내가 이상한 거 보면 바로 아시니까.
으아아……갑자기 부모님이 엄청 보고 싶었다. 어, 뭐라고 해야 하지? 빚에 대해서는 둘째 치더라도 역시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영원히 못 보게 된다는 건 힘든 일이군. 아주 존경하는 건 아니다만 카인 같은 놈한테 비웃음 당할 정도로 못나게 살아오신 분들은 아니었다니까? 만약 그랬으면 아예 만나고 싶은 마음조차 없겠지.
“저어……세린.”
“응?”
여러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드니……으헉! 뭐야? 왜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건데!? 내가 벌떡 일어서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죄송해요! 저희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준 세린을 잊고 카인과……전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몸과 사랑을 바쳐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 정말로……아무리 많이 사과를 드려도 모자라겠지만……그래도……!!”
“아, 됐어! 야! 고개 들어! 빨리! 허리 굽히지 말라고!”
난 다짜고짜 고개 들어라, 허리 굽히지 마라며 소리를 질렀고 아내들은 그런 내 부탁─말하는 건 명령 같지만 부탁이긴 했다.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한테 왜 내가 사과를 받아야 하는 건데?─을 받아들인 건지 상체를 올렸다. 몇 명의 눈에는 눈물마저 고인 상태였다.
“그, 정말로……뭐라고 말해도 변명이 되겠지만…….”
“아, 괜찮다니까! 그보다 울지 마! 야, 너희가 그렇게 울면서 사과하면 내가 나쁜 놈이 되잖냐! 아, 울지 말라니까! 화내는 거 아니라고! 아, 응! 화는 내지만 그거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니거든!? 야, 헬레나! 너는 이 상황에서까지 그렇게 날 디스하고 싶냐?”
겨우 어떻게든 그녀들을 진정시켰지만 여전히 내 가슴은 콩닥거리고 있었다. 아니, 왜 다들 나를 놀라게 만들지 못해 안달이지? 카인 때문에 일어난 일을 자기들이 사과할 필요는 없잖아.
일의 원흉인 카인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데 왜 그 새끼가 저지른 병신 헛짓거리를 내 아내들이 허리까지 숙이며 사과해야 하냔 말이다. 이해를 못 하겠다!
난 괜찮다며 몇 번이고 말을 하고 나서야 모두 자리에 다시 앉아 주었다. 두 번 다시 이런 짓 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누구 심장마비 걸리게 할 일 있냐? 놀라는 건 괴물의 습격과 카인의 등장만으로 충분하다. 너희까지 나를 놀라게 만들지는 말아다오. 몰래카메라도 아니잖아.
모두가 자리에 앉았지만……으음. 그렇게 보는 건 좀 그만둬줄래? 엄청 부담스럽거든? 14명이나 되는 아내와 딸들이 나를 보는 건 좀 부담스러웠다. 오랜만의 일이라서 그런 것도 있고, 부끄러워서 그런 것도 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14명의 시선이 나한테만 향한 건 아니었다. 나한테 향하던 시선은 옆에 있는 안즈한테로 옮겨갔고, 안즈는 그 시선이 머쓱했던지 ‘왜?’라며 물었다. 얘도 패기 참 쩐다……. 안즈의 그 말에 자기들도 무안했던지 다른 질문이 쏟아졌다.
“아빠. 그럼……요즘에는 저 ‘안즈’라는 사람이랑 섹스해?”
아, 죽인다. 니나야. 넌 어떻게 된 게 날리는 질문마다 직구니? 그것도 돌직구! 슈퍼 스트라이크! 그렇게 직설적으로 물어야 후련하니?
내심 그게 궁금했던지 아내들의 표정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어허, 그렇게 보지 맙시다. 한숨을 쉬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됐을까?
“그, 뭐냐……서로 닮기도 했고. 여러 일을 겪기도 했으니까. 어쩌다 보니 같이 다니게 됐는데…….”
“닥치고 대답하시지 말입니다.”
헬레나 네 이년! 니년이 정녕 이 나라의 왕이자 임금……이었던! 그런 나한테 그딴 말버릇을 취하다니! 그딴 말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았더냐? 네 이년! 내 비록 왕의 자리에서 떨어진 남자라지만 그 기백과 정력은 여전하다! 너한테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주지! 간다!
“……네. 섹스했습니다.”
비굴하다~욕하지 마~!! 예전에 유행했던 노래를 마음속으로 부르며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아니, 뭘 그렇게 사람 죽일 눈빛으로 절 보십니까 헬레나 씨……. 사람이 이런 일도 겪고 저런 일도 경험하기 마련인데……꼭 그렇게 죽일 듯한 시선으로 봐야 만족하시겠습니까?
뭐? 쫄았냐고? 하핫, 물론……쫄았지! 어우, 씁! 왕의 자리에서 내쳐졌다고 바로 하대(下待)하는 저 인성 보소! 생각 같아서는 극딜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안즈와 몸을 나눈 게 사실이긴 했으니까 말이다.
날 향한 시선은 어떻냐고? 내가 왜 이년들을 위해 노력까지 하고 사과까지 마다했는지 알 수가 없더라! 아니, 힘들고 외로울 때 곁에 있던 여자랑 몸을 나눈 건……으음. 아, 그래! 미안하다 시팔! 나쁜 짓 했다! 아주 죽어 마땅할 짓을 했다고!
쟤들도 카인과 몸을 나누었지만 그건 불가항력(不可抗力)이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막을 수가 없는 일을 쟤들 탓으로 돌릴 생각은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 짓은 내 선택에 의한 결과였기에 부정할 수도 없었고,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어려우니 쉽게 말하라고? 내가 안즈를 안은 것도 모자라 아내로까지 삼았으니 그만큼 욕 처먹어라 이거다. 알기 쉽지? 단 한 문장으로 줄인 것도 모자라 욕 처먹으라는 과격한 표현까지 써넣었으니 눈에 확 들어올 거다. 게다가 내 상황과 일치하기도 하니 간결하면서도 임팩트 있게 현실을 전하는 문장이었다.
가끔이긴 하지만 상황을 간결하면서도 멋지게 전하는 내 국어학 실력에 나 자신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핫, 이 기세를 몰아 소설 같은 걸 써볼까? 마침 내가 있는 곳도 ‘하렘 어드벤처’라는 이름의 판타지 세상이니 이걸 그대로 복사-붙여넣기 식으로 쓰면 딱이잖아? 이름이랑 설정 좀 바꾸고 그러면……크흐흐! 소설도 쓰고 돈도 벌고! 일석이조군!
“또 쓸데없는 거 생각하고 있다…….”
“야, 박은채! 넌 남편에 대한 애정은 있냐? 아오, 널 그냥……아, 아냐! 응! 내가 미안해, 내가 죽일 놈이야. 응, 미안……죄송합니다……두 번 다시 안 깝칠게요…….”
아, 쫌! 이제는 은채한테마저 디스를 당해도 꼬리를 말아야 한다니! 내가 어쩌다 이렇게 비굴한 캐릭터가 됐을까? 한 때는 희진이와 은채를 노예 다루듯이 대했었고 조금 전까지는 진심 어린 사과까지 받았던 내가 도대체 어쩌다 이 모양 요 꼬라지가 됐을까?
이것도 카인 때문이라고 하고 싶지만……으음. 안즈를 안은 것은 결국 내 선택이니 완전히 그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아내로 삼은 것은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내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였기에 그녀들이 저렇게 보는 거겠지.
안 그래도 헬레나를 아내로 삼았을 때 여러 이야기가 많았었는데 그걸 모조리 씹어버리고 또 아내를 만들었으니 저런 눈으로 안 보는 게 이상했다. 그걸 알면서 왜 만들었냐고 묻는다면……그야. 그 당시에는 버림받은 상태였고 내 곁에는 안즈밖에 없었으니까.
“있잖아. 세린이 나를 아내로 삼은 게 그렇게 싫은 거야?”
안즈의 발언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한테로 집중된다. 나까지 포함됐으니 정말 ‘모든 사람’이었다. 너무나 폭발적인 발언이었기에 침이 저절로 꿀꺽 소리를 내며 삼켜진다. 아, 안즈야. 부탁인데 폭탄성 발언은 하지 말아줘. 응? 우린 부부잖아? 받아라, 부부만이 할 수 있다는 텔레파시!
“얘 완전 약해빠졌더라. 나랑 섹스할 때 매일 힘으로 진다니까? 나한테 짓눌릴 때마다 은근히 분해하는 표정 보면 꽤 스릴 있는 거, 알아? 정복감이 느껴진다니까?”
으아아아아!
씨바아아알!
넌 대체 애가 왜 그러니!? 아니, 보냈잖아! 텔레파시로 ‘이상한 말 하지 말아줘’라고 했잖아! 근데 왜 씹니? 텔레파시가 통하지 않았더라도 이 상황에 이상한 말 하면 분위기 개박살난다는 건 알고 있잖아! 일반상식이 부족한 거니, 초능력 게이지가 아직 개발되지 않은 거니!? 응?
“저, 정말요?”
아이나가 묻자 모두의 시선이 아이나한테 집중된다. 그 질문이 부끄러웠던지 아이나는 고개를 숙였고 모두 한숨을 쉰다. 나? 물론 비웃었지!
“으하하, 역시 아이나! 명불허전 똥싸개! 암, 그래야 우리 아이나지! 분위기 파악 못 하는……응컥! 허큭! 허, 억!”
이 미친년이! 왜 내 배에 강력한 발차기를 넣는 건데!? Why!? 숨도 못 쉴 정도로 강력하게 박힌 아이나의 킥은 아무리 봐도 마을 촌장 집무실에서 몰래 낮잠 자던 여자가 가질 만한 위력이 아니잖아!
“우쒸! 이게! 요놈! 요 나쁜 놈!”
“어컥! 야, 배때지에……아윽! 킥을 넣는 미친년이 어디 있어!? 으헉!”
맞으면 죽겠다 싶어 겨우 피한 나는 아픈 배를 감싸쥔 채 스톱(STOP)을 외쳤지만 아이나는 여전히 씩씩대고 있었다.
“남이 걱정하면 미안한 줄 알고 고마운 줄 알아야지! 우리도 우리지만……이 나쁜 놈아! 걱정하던 우리를 놔두고 다른 여자를 안은 것도 모자라 아, 아내로까지 삼다니!”
“그, 그거야 어쩔 수 없었잖아! 너희가 카인한테 지배당하고 있는데 ‘얘를 아내로 삼아도 될까?’라고 물으면, 너희는 뭐라고 대답했겠어!?”
그 질문에 아이나는 잠시간 조용히 있었다. 촌장답게 영특한 그녀는 대답을 떠올렸는지 힘껏 고개를 들며 외쳤다.
“안 돼!”
아, 왜 저런 년이 내 아내일까!? 난 피눈물을 흘릴 기세로 외쳤다.
“야 이 미친 계집애야! 반대지! 더 이상 사랑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 내가 아내를 만들든 말든 상관이 없어야 정상이잖아!”
나름 논리를 갖춘 내 대답은 모두의 대답을 끄덕이게 만들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겠지만 좋아하다의 반대말은 싫어하다가 아니라 ‘무관심’이었으니까. 카인한테 온갖 사랑을 바치던 그녀들은 나를 증오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살아 있었는지 어땠는지 관심도 없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아했다. 그야말로 무관심(無關心)의 표본이었지.
내 멋진 대답에 아이나도 수긍하는 거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역시 나다! 맞기 싫으니 머리가 저절로 논리를 쥐어짜는군! 하핫, 맞기 싫어하는 건 나나 뇌나 마찬가지였군! 고맙다 브레인! 니가 준 논리는 단숨에 똥싸개 아이나를 얌전하게 만들었어!
“……근데 뭐 어쩌라고 시발!”
헛수고였습니다아아아앗! 게다가 악화된 건지 평소 쓰지도 않는 욕까지 말하며 화를 냈어! 아니,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냐? 설명했으면 말을 알아먹어야지! 너 프레그넌트의 촌장 아니냐? 마을이 망했으면 확실히 촌장의 위치도 사라지겠지! 근데 그거랑 남편 패는 거랑은 하등 관련 없잖아!?
“하아……그만해. 얘도 너희 걱정 엄청 많이 했으니까.”
분노한 아이나를 조용하게 만든 것은 내 영혼의 외침─논리까지 갖춘 지적이었건만 그걸 ‘근데 뭐 어쩌라고 시발!’이라며 뭉갠 아이나. 얘가 어쩌다가 이렇게 변했을까? 말투는 아무리 봐도 내 탓 같다만……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실제이긴 하나보다─이 아니라 안즈의 제지(制止)였다.
상대적으로 깝죽대고 깝싹대다 처맞은 나한테 오던 시선은 안즈한테로 간다. 안즈는 내 주변으로 오더니 괜찮냐며 배를 문질러줬다. 오오, 얘가 배를 문질러주니 엄청 기분 좋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아이나의 노기(怒氣)와 놀라움이 섞인 질문에 안즈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입만 움직였다. 여전히 그녀의 팔은 내 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뭐하기는……맞은 곳의 근육이 놀랐을 테니까 그걸 풀어줘야지. 안 그래도 너희 걱정하느라 잠도 잘 못 자던 애를 때리면 어떻게 해……야, 괜찮냐?”
뭐니, 얘? 갑자기 우리 안즈가 왜 이렇게 멋있게 보이지? 마치 소녀만화에 나오는 남자처럼 자상하게 날 걱정해주는 안즈를 보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통증은 매우 빠르게 사라졌고 배도 그리 아프지 않게 됐다.
“으응, 고마워. 이젠 괜찮……히약!?”
아내들은 모두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야 그렇겠지. 안즈가 내 등과 무릎 쪽에 팔을 넣은 채 들었으니까. 흔히 말하는 ‘공주님 안기’로. 갑자기 안즈한테 들리자 나는 여자 같은 비명을 질렀다. 으윽! 쪽팔린다!
안즈는 능숙하게 나를 자리에 앉힌 후 곧바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우, 우와아……안즈 엄청 멋있었어……. 그리고……쪽팔려어어어엇! 이게 무슨 개쪽이야? 깝싹대다가 아이나한테 맞은 걸 안즈가 구해주다니! 보통 반대 아냐? 내가 상상하던 건 이런 건데…….
† † † † † † † † † †
아이나 : 세린을 꼬시다니, 용서 못 해! 받아라 정실(正室)의 빛!
안즈 : 크흑! 그만둬! 우린 모두 같은 세린의 아내야!
아이나 : 흥! 같은 아내 좋아하네! 너와 나는 클래스! 클.라.쓰가 달라!
안즈를 죽이려는 아이나. 그러나, 그 사이에 들어가 안즈를 구하는 남자! 영웅 같은 사내! 신세린의 모습이 보인다.
나 : 그만둬. 내 아내한테 무슨 짓이야!?
아이나 : 미, 미안……난 그냥……!
안즈 : 세, 세린……!!
나 : 둘 다 나한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내라고……서로 싸우지 마. 너희가 싸우는 걸 보면 내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
세린은 버터 바른 아가리를 멋지게 굴려 두 명을 회유한다. 두 명은 세린의 인품과 마음에 감동해 그 날, 함께 세린의 밤 시중을 모시게 된다.
† † † † † † † † † †
이래야지! 스토리가 흘러가도 이렇게 흘러가야지!
어쩌다 내가 처맞아서 안즈가 구해주게 됐을까!?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어, 음. 똥싸개라고 부른 건 좀 심했을지도……모르겠네.
응, 그거 때문에 화난 게 틀림없는 거 같았다.
비웃어서 그런 것도 있겠고.
분위기 파악 못 한다고 해서 화난 것도 있겠고…….
……생각해보니 말한 거 전부가 화나게 만드는 거네?
“……미안하다, 아이나”
사과를 하자 아이나는 ‘아니……나도 미안. 꽤 힘을 줘서 발차기를 했거든……많이 아팠어?’라며 물었다. 저 똥싸개가! 하늘같다 못해 목숨 걸고 마을의 미래를 구하고 여동생까지 데려온 나를 발로 까다니! 그것도 존나 세게! 으흐흑……이래서 목숨 걸고 일해도 부질없다니까? 지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저렇게 발로 까니까!
생각 같아서는 소리를 지르며 항의하고 싶었지만……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늦은 밤에 괜히 소란을 피워서 좋을 것도 없었고, 아이나가 또 화를 내면 더 귀찮은 일이 될 테니까.
“그, 그거보다……세린이 우리를 많이 걱정했어요?”
어떻게 보더라도 ‘이 안 좋은 분위기를 바꿔보자’라는 느낌이 팍팍 묻어나는 말이 안즈한테 날아갔다. 그치만 좋은 질문이긴 했다. 본인인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사람이 내 반응이나 몸 상태를 보는 건 꽤 궁금한 거였으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어떻게 보였는지, 어떻게 설명되는지 기대되기도 했고. 질문을 들은 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얘가 밤중에 너희 이름을 부르며 잠꼬대하는 건 기본이었다니까? 오죽하면 내 보지에 자지를 박아댈 때마다 너희 이름을 막 불렀다니까?”
“아아아아아앗! 아아아아아아악!”
겨우 한 마디. 겨우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난 마구 소리를 질렀다. 모두 나를 미친놈 보듯이 쳐다봤지만 중요한 건 시선이 아니라 말이다. 안즈가 방금 뭘 지껄인 거지!?
“야. 밤중에 소리 지르다 누가 일어나면 어떻게 해?”
너무나 당연한 걸 말하는 안즈였다만……지금 내가 남의 사정 생각하게 생겼냐!?
“아, 아니! 야! 넌 대체 뭘 말하는 건데!?”
온갖 답답함과 분노를 담아 물었지만 안즈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뭘 말하기는? 쟤들이 궁금해 하는 거 대답하잖아. 너 생각 안 나냐?”
생각이 안 나지! 났으면 너한테 말하라고 시켰겠니? 내용 그대로 말하라고 시켰겠어!? 으아아아, 빌어먹을! 누가 내 가슴에 쌓인 분노와 답답함을 좀 가져가면 좋겠다! 그래야만 이 가슴이 좀 시원하고 상쾌할 거 같으니까!
“……메이야.”
“네, 엄마. 에잇!”
로라와 메이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황금색의 무언가가 내 몸을 묶었다! 뭐, 뭐야 이거? 바인드(Bind)잖아? 왜 구속(拘束) 마법이 나한테 걸린 건데!? 로라와 메이를 쳐다보니 모두 ‘잘 했어’라며 칭찬하고 있었다.
“세린. 저희를 걱정해준 마음을 듣는데 너무 시끄럽잖아요? 조금만 조용히 있죠. 네?”
씨발! 로라도 미친년이었어! 이야기 하나 듣자고 남편인 나한테 바인드를 걸라고 명령하다니! 왜 내 아내들은 다 미친 거지? 아, 그래! 물론 알지! 내가 예전에 내 안목이 영 별로라고 말했었지! ‘에피소드 9-6’을 보면 처음부터 안목 이야기를 할 거야! 내 안목은 옛날부터 별로 안 좋았다는 사실은 새삼 다시 말할 것도 없지!
근데 이게 뭐야? 풀 파워로 남편의 배를 까는 아내부터 시작해 이야기 듣는 데에 거슬린다고 바인드 마법까지 거는 아내라니! 세상에 이런 아내가 어디 있어?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다시 고함을 빽 지르고 싶었지만 그러다간 입에도 바인드를 거는 게 아닌가 싶어 그냥 입 닥치고 있기로 했다.
……내 인생 진짜 왜 이럴까?
“음, 그래.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그래. 사정(射精)할 때 내 이름을 부르기도 했지만 너희 이름을 부르기도 했었지 참! 야, 오죽하면 예전에 프레그넌트에서 하루도 채 못 만난 너희 이름을 다 외웠다니까? 그때 못 만난 사람들 이름까지 다 외웠는데, 웃긴 게 뭔지 알아? 이름은 아는데 얼굴은 모른다는 거! 와, 그거 때문에 나 너희 알아보는 데에 고생했다니까?”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지껄여대는 안즈. 그 내용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내 정신이 얼마나 황폐하고 피폐해진 것인지 확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세상에. 내가 저딴 걸 지껄였다고? 안즈랑 몸을 나누면서?
아내들은 ‘어머, 어머! 어머!’라며 입을 막은 채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가끔 이름이 나오면 서로 소근대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고, 가끔은 ‘꺄악!’이라며 짧은 비명까지 질렀다.
좋냐? 남편 팬 것도 모자라 구속 마법까지 걸어놓고 씹창이 된 정신상태가 지껄여대던 헛소리를 들으니 기분 좋냔 말이다…….
차마 그렇게 묻지는 못했지만 아내들은 좋아하는 거 같았다. 마치 여자들끼리 수학여행 와서 사랑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마구 비명과 소리를 질러대며 기뻐했으니까.
최근에 와서는 아내들 때문에 섹스의 횟수까지 줄었다는 소리까지 나왔고 그걸 들은 아내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인한테 아내들을 빼앗긴 이후에는 안즈를 안을 때마다 아내들이 생각났기에 횟수가 자연히 줄어들었는데 설마 그 이야기까지 하게 되다니! 그것도 내가 아닌 안즈를 통해서!
아내들은 연민과 감동의 눈으로 나와 안즈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부터 시작해 자신들을 끔찍하게 생각해줘서 고맙다, 감동했다는 등 다양한 소리가 나왔지만……솔직히 말하마. 존나 쪽팔렸다. 설마 정신상태가 씹창이 된 내가 그런 소리까지 지껄였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정신이 미치면 자기가 한 일을 기억 못 한다는데……맞는 말이다. 내가 했는지 어떤지도 모를 미친 짓이 안즈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데 행동을 저지른 나는 기억조차 안 났으니 말이다. 본의 아니게 흑역사를 만든 것도 모자라 아내들한테 모조리 까발려진 나는 오랜만에 이 말을 입에 담았다. 웃음과 허탈함을 담은 채…….
“이게 내 인생 퀄리티죠, 씨발…….”
============================ 작품 후기 ============================
심각한 대화의 끝은 개그로 끝내자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든 스토리가 흘러가주니 다행이네요.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개인사정으로 인해 이번 주 수, 목을 포함해 다음 주부터는 자정 업로드로 바뀌게 됩니다. 이 점 양해바랍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로리콤MK님, 최근에는 아예 여성 성인 캐릭터 외에 로리 캐릭터도 만드는 추세니 로리콘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법. 성인 남성들한테도 어필할 수 있는 로리 캐릭터를 만들기도 하니까요.
물론 어디까지나 캐릭터일 뿐. 실제로 건드리면 철컹★철컹!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니 YES 로리 NO 터치의 정신을 지키도록 합시다.
고양이새벽님, 질문은 많이 하셔도 됩니다만 답변드릴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앞으로의 전개나 카인의 속내 등, 스토리에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답변드리기 어려우니 이 점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계속 비가 내리네요.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이제 수, 목, 금만 남았으니 어떻게든 버텨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