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7 「17-6 : 빼앗겨버린 아내들 (16)」 =========================
밤이 되면 자주 나간다고는 하는 카인의 행동 때문에 뜻하지 않은 이득을 얻게 되다니. 그가 함정을 판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언제나 내 생각과 상상, 최악의 예상만을 현실로 만들어낸 그였기에 방심은 금물이었다.
이렇게 보니 내가 하는 짓이 꼭 삼국지의 원소(袁紹) 같군. 삼국지에 나오는 원소 본초(本初)는 조조와 싸워 패망한 인물이지만 결코 얕볼 사람은 아니었다.
사세삼공(四世三公)이라 불리는 명문 출신의 원소는 사망할 쯤에 매우 감정적인 모습을 보여 그리 뛰어나지 않은 인물로 표현되고는 했으나 그 전까지는 그 유명한 조조마저 두려워 할 정도의 거물이었다.
미리 말해둘 생각이며 이미 독자들 또한 알겠지만……내가 원소처럼 엄청난 집안에서 태어난 능력치 만렙의 괴물이라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내가 흙수저 빚쟁이 자식이라는 걸 몇 번 말하게 하면 속이 시원하겠니? 나 빚쟁이라니까? 우리 부모가 만든 거긴 하지만 자식이 이어 받았으니 빚쟁이지, 망할.
내가 원소 같다고 말한 것은 사망쯤에 보여준 그의 감정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자기한테 간언(諫言)을 올리는 충신(忠臣)들을 마다하고 간신(奸臣)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들. 그런 행동이 쌓이고 쌓여 패착(敗着)이 되는 부분을 보니 저도 모르게 안타까움이 들더라.
내가 비록 원소처럼 엄청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부터 시작해 간신 같이 쓸모없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는 것. 그로 인해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걸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뭐……간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부터 시작해 그런 사람들을 책사로 기용했다는 것 자체가 본인의 잘못이긴 하지만…….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조조를 지나치게 경계하는 것 또한 내가 카인을 경계하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 조조가 아무런 의미 없이 하는 행동에까지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려 하는 원소의 모습이 딱 내 모습이었겠지 하고 생각하니……어, 원소처럼 죽는 엔딩이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닐까 싶더군. 왜 사망 플래그랑 배드 엔딩밖에 생각이 나지 않을까?
이유야 어찌 됐든 내가 원소처럼 현재의 적인 카인을 너무 경계하고 의심한다는 느낌이 들지만……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겠지, 별 다른 일 없겠지, 저런 일에 가치가 있겠어 라고 생각하다 단숨에 뒤통수를 처맞으면 죽는 건 나였으니까. 이 와중에 정신줄 놓고 헤벌레 하고 싶겠냐?
너무 많은 것을 의심하다 보니 가끔은 인간불신 증상까지 오는 게 아닐까 걱정까지 될 정도다. 나를 이렇게 괴롭게 만든 놈은 지금 밖에 나가서 하하 대며 어딘가에서 쳐놀고 계시겠지. 이가 갈리는 상황이다. 한숨을 쉬며 다른 질문을 했다.
카인이 어디에 있느냐, 어떻게 카인이 나간 걸 아느냐는 건 확인했다. 그녀들이 왜 나를 부른 것인지, 이렇게 모여 있어도 괜찮냐고 질문하자 혜린이의 눈초리가 살짝 올라갔다.
“당연히 괜찮지! 그럼, 지금까지 제대로 만나지도 못한 남편이 혼자 쓸쓸해하는데 그걸 놔둬!?”
어……왜 화를 내는 거지? 나는 혹시나 이것 때문에 카인한테 험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돼서 물어본 건데……. 내가 아무 말도 못하자 니나가 입을 열었다.
“아빠. 우리는 카인한테 무슨 짓을 당할 건지에 대해서는 전혀 겁 안나. 오히려 카인이랑 있는 것 때문에 아빠한테 심한 말, 상처 입히는 말을 할 거 같아 더 겁이 나는걸? 정말로 두려웠으면 이런 자리 같은 건 만들지도 않았을 거야.”
맞는 말이었다. 정말로 무서웠다면 이런 자리 자체를 아예 안 열었겠지. 정신지배가 풀린 후에도 카인을 걱정하거나 자기들끼리 시간을 때웠을 것이다. 모두 함께 이 자리에 모여 나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 것이 나한테는 용기 있는 행동으로 보였지만 그녀들한테는 당연한 선택이었다는 점이 좀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이런 걸로 고맙다고 하다니.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멘탈이 약해졌군.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잡념(雜念)을 뿌리친다. 다른 질문을 하자. 제한된 시간 내에 최대한의 정보를 모으는 거야……!! 조금 전에 질문했던 ‘왜 나를 부른 것인가?’를 다시 물었다.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 부른 것도 있지만 전해줄 말도 있어서요. 원래라면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지만……세린도 알 거예요. 이미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모를 턱이 있겠냐? 난 한숨을 쉰 후 현재의 상황을 천천히, 하지만 알아듣기 간결하게 요약했다.
“내가 납치된 사이 괴물이 나타나서 프레그넌트를 박살내는데 그 빌어먹을 카인이 나타나 사람들을 구했지. 내가 안즈랑 같이 목숨 걸고 희대의 탈출극을 찍는데 그놈은 너희를 데려다가 오붓한 시간을 보냈고. 기껏 돌아온 고향은 폐허가 되어 있었는데 그놈은 왕이자 임금이 되어 너희의 몸을 주물럭댔고, 괴물 없애며 겨우 왕궁에 도착하니 아내들이 그 새끼랑 단란한 식사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
난 간결하게 말한다고 했지 아내들을 배려한다고는 말 안 했다? 분위기는 완전히 다운됐지만 그래도 읊을 것은 읊어야만 했다.
배려? 배려를 한 결과가 이거다. 내가 나름대로 그녀들을 배려해주고 챙겨줬지만 그녀들은 결국 정신지배를 당한 채 오늘날까지 가만히 있었다.
정신지배를 자력으로 풀라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 아니냐고? 그래, 안다. 그건 내 억지지. 그치만 이런 식으로라도 확실하게 말을 해두지 않는다면 애매모호한 태도와 분위기는 계속 유지될 것이다. 내가 그녀들한테 당한 수모와 치욕을 그대로 돌려줄 생각은 없다. 그건 그녀들의 탓이 아니니까.
하지만 현실이 이렇게 되는 데에 그녀들이 일조(一助)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는 없었다. 책임은 없을지 몰라도 행동은 함께 했으며, 그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카인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면 그걸로 그만이었으니까. 벗어날 방법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은 건 나태(懶怠)였으며, 난 그 나태함까지 위로할 생각은 없었다.
“왕에서 단숨에 피난민으로 떨어진 것도 모자라 제대로 이야기조차 할 수 없는 상황. 로라와 카인이 관계를 가지기 전에 쳐들어가지 않았다면 난 아무것도 모른 채 이런 시간이 오는 걸 더 오래 기다려야 했겠지. 어쩌면 아예 안 왔을 수도 있어. 그 정도로 지금 상황은 심각한 거야. 맞지, 마리아?”
마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한 또 다른 이유는 현재 상황이 마리아가 생각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했기 때문이다. 두 손으로 눈 부분을 감싼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걸 천천히 말했다.
“마리아. 마리아랑 아테나는 마법과 검술로 유명하지?”
그녀는 ‘예’라고 말했다. 최고의 마법사인 마리아. 최강의 검술사인 아테나. 여왕과 공주인 이 두 명의 미모와 자애로움은 예전부터 많이 들었지. 아이라가 엄청 좋아하는 이야기였으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해줘. 카인처럼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의식이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거야? 너무나 자연스럽게?”
참 웃긴 일이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는 이미 알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문제는……대답이 나오는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거지.
“……아뇨, 불가능해요.”
거 봐. 불가능하다, 못 한다 같은 대답이 나왔잖아. 그런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이었다고. 그 대답을 알 수 있었던 배경은 내가 카인……백발의 여자와 이미 몇 번이고 만나봤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거지만, 아내들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정신지배 같은 마법은 상당한 마력을 필요로 해요. 하물며 성공한다 치더라도 완벽하게 지배나 조종을 하는 건 어려워요. 조종당하는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이죠.”
갑작스런 마법 공부 교실이 시작됐지만 반론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법을 쓰는 로라나 메이, 안나 등의 아내들은 마리아를 본 채 경청하고 있었다. 뛰어난 마법사가 하는 강의니 이 참에 잘 듣고 배우겠다는 뜻인가. 교육열이 높은 건 좋군. 그치만 너무 높아서 한국처럼 사교육 천국이 되어버렸다간 큰일이다.
“사람의 마음이나 정신은 그렇게 간단히 지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지속적으로 정신지배 마법을 쓴다 해도 저항은 없어지지 않겠죠. 정신지배를 걸기 위해서는 막대한 준비 시간과 마력이 필요해요. 그런 걸 준비 한다 쳐도 대상의 정신력이나 저항력이 높으면 걸기 힘든데 ‘함께 있는 것’만으로 정신을 지배한다니……이런 말을 하는 저도 무서워요.”
로라도 그런 말을 했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의식이 녹아들어 가는데 정작 그 정신과 의식의 주인인 로라. 그리고 로라의 육체는 카인의 뜻대로 조종당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자기 몸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그게 불안하지 않을 리가 있겠냐?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육체가 지배당해 정신이 필요 없게 되다니. 완전 호러잖냐…….
“단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모두를 지배할 수 있다면……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 이상의 마법사나 다름없어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지금은 놀랄 때가 아니라 방법을 생각할 때네요. 여왕인 제가 지배당한다면 저로 하여금 폭정(暴政)을 저지를 수도 있고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릴 수도 있으니까요.”
문제는 마리아뿐만이 아니라 모든 아내들이 이미 그놈한테 정신지배를 당했다는 거지……. 때늦은 후회란 바로 마리아의 현재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겠지. 그 정신지배 때문에 나를 모르는 사람, 없는 인간, 존재하지 않는 이 취급을 했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한들 저지른 일이 사라지겠냐? 더 짜증나는 건…….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거겠지…….”
내 한숨 섞인 투정에 모두가 날 쳐다봤다. 왜?
“어, 세린……어떻게 제가 생각하던 걸 아셨어요?”
마리아가 마음이라도 읽었냐는 식으로 물었다. 아, 그렇지. 얘들은 백발(白髮)의 여자에 대해 전혀 모른다. 지금 알려주자니 너무나 긴 이야기였고, 그걸 이야기하면 ‘자지의 맹세’부터 시작해 온갖 것을 말해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가진 시간은 너무나 모자랐다.
하물며……백발의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믿을지 어떨지도 의심스럽다만, 말한다 치자. 그 여자가 카인이라는 물적 증거가 있냐?
상황적 증거만으로 누군가를 범인으로 모는 건 쉽지만……물적 증거가 없는 이상 범인이라는 이야기는 성립할 수가 없었다. 상대방이 카인이어서는 물적 증거를 얻을 수 있을 리도 없었고. 그놈이 증거를 남길 놈으로 보이냐?
이 세상의 신이나 다름없는 놈이 작정하고 필드에 올라왔는데 우리 같은 캐릭터는 지배당할 수밖에 없겠지. 그게 가장 단순하게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하지만……이 설명은 나 같이 놈의 정체를 아는 사람한테만 유용한 방법이다. 카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아내들한테는 내가 박수무당 같이 보이겠지. 어떻게 둘러대야 할까…….
“그게……마리아 같이 대단한 마법사도 어떻게 할 수단이나 방법이 없었잖아. 마법을 쓰는 사람들 중에는 제일 강한 마리아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사실상 마리아보다 마법에 통달하지 못한 사람이나 마법을 못 쓰는 사람은 그냥 당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
단순한 변명이지만 결코 잘못된 말은 아니었다. 마법사 중 최강이나 다름없는 마리아가 아무런 반항도, 저항도 못 한 채 정신지배를 당한 거다. 마리아보다 뛰어나지 못한 마법사들은 그냥 입 닥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조차 미카와 관계를 나누며 몸을 빼앗긴 적이 있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말할 것도 없지.
언제든지 이용당할 수 있고 조종당할 수 있지만 저항 따윈 결코 할 수도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꼭두각시 인형! 그게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존재 이유였다. 그걸 생각하자 가슴이 아파온다.
이 빌어먹을 자식. 대체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장난감? 아니지, 장난감은 망가지면 고칠 수나 있으니까. 이놈은 죽은 사람도 안 살려주는 개자식이다.
“……죽은 사람……?”
내 입에서 나온 것은 굉장히 불길한 말이었다. 그걸 말한 나조차 입을 막은 채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건가 싶었으니까. 하지만……조금 전의 그 생각은 틀림없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야 하는 것들 중 하나에 속하는 듯한……그런 중요한 개념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뭐였지?
“세린, 괜찮느냐……?”
“……어, 으응. 응. 미안.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아스카.”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거라. 우리는 니 편이니라.”
고마운 말이다만……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지금은 내 편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카인 편이 된다. 그건 개인의 의지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마저 지배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알아차릴 수 없었는데 하물며 의식까지 지배당하는 아내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
“그럼……우린 당할 수밖에 없다는 거야? 세린?”
슬퍼하는 느낌이 묻어난 안나의 물음에 난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없다. 그야말로 가드 불능의 기술이지 않은가?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그나마 지속 시간 및 발동 조건을 깨달은 게 큰 의미라고 할 정도로 대책 없는 마법이었다. 신이라서 그런지 마법도 사기급이군. 이딴 놈을 어떻게 이기냐…….
분위기는 더욱 더 다운됐다. 내가 노린 건 아니지만 사실과 진실을 조합한 결과 ‘정신지배 마법을 피하거나 벗어날 방법은 없다’라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지. 사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유익한 정보다만 감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냐 급이다. 인정할 수 없는 힘든 현실에 모두 표정이 어두워졌다.
거듭 말하지만 내 탓이 아닌 것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아내들까지 힘들어 하는 것은 결코 볼 수가 없었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화제를 돌리는 수밖에. 희망적인 것을 조금이라도 말해서 아내들의 불안을 없애는 거다!
“일단……정신지배는 가까이, 오래 있어야 발동하는 거야. 가능하면 멀리 있거나 몸이 아프다고 해서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게 좋을 거 같아. 아니면 종이 같은 곳에 ‘카인과 함께 있는 걸 피하자’라는 걸 적어 눈에 들어오는 곳에 놔둔다거나……. 여하튼, 놈과 거리를 벌려두는 게 나을 거야. 지금은 그런 방법밖에 없는 거 같아.”
소심하고 수상쩍은 방법. 심지어 효능마저 완전하지 않은 걸 희망이라고 떠들 수밖에 없다니. 참 한심하군……. 내가 한심하다고는 느꼈지만 이렇게 도움도 안 되는 쓸모없는 놈이라고 느끼기는 참 오랜만이다. 내가 처리하기 힘든 상황이나 사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걸 자주 느끼고는 했지. 별로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만…….
방법을 듣긴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기에 모두 미덥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나를 원망하는 감정은 없었다만, 남자라는 게……상황이 나빠지면 자주 자기 탓을 하는 동물이거든. 심지어 나는 아빠이자 남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느끼는 책임감은 통상의 14배 이상이란 말이다!
응? 왜 14배냐고? 아내 한 사람 당 1배씩이니까. 안즈는 지금까지 정신지배를 당한 적이 없었기에 이 이야기에 포함이 되지 않았다. 그녀도 이야기를 듣고 있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들을 뿐. 늘 나와 함께 있는 그녀는 오히려 관찰자에 가까운 입장이겠지.
“어, 그나저나……너희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프레그넌트에서 이곳으로 이동한 후의 이야기는 좀처럼 못 들었거든. 로라한테 듣기는 했지만 모두랑 이야기하는 건 이게 처음이라서……궁금하네.”
어설픈 화제 바꾸기라고? 나도 알거든요!? 이거라도 해야지 분위기가 좀 살아나지!
태클을 거는 사람들한테 마구 소리를 지르며 힘차게 변명을 해댔다만……아주 완전한 변명은 아니었다. 궁금하긴 궁금했다. 프레그넌트가 폐허로 변한 후 그녀들이 어떻게 지냈는가, 어떤 걸 느꼈는가. 그리고……카인과 어떻게 지냈는가 등. 카인과 지냈던 기억은 좀처럼 없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조금은 기억한다’는 거니까.
그놈의 습성, 습관, 태도, 행동 패턴 등. 뭐든지 좋으니 알아내야만 했다. 그놈을 곱게 살려둘 생각은 없지만 현재 내 전투력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언제 나를 가볍게 죽일지 모르는 살인마 새끼다.
아아……존나 열 받는다! 왜 나는 매일 이딴 놈만 상대해야 하는 걸까? 아니, 가끔씩은 이지 모드(Easy Mode)에서 싸워도 되잖아! 현실이 헬조선이었는데 왜 여기는 나이트메어 모드냐? 난이도가 좀 내려가야 살 만하지, 이렇게 난이도를 미친 듯이 올려버리면 나 보고 어쩌라고?
“우리는 큰 불편 없이 잘 지냈어. 프레그넌트에서 온 주민들도……마을이 부서진 거랑 친했던 이웃들이 죽은 걸 제외하면 크게 다치거나 한 건 없어. 문제라면……몸은 멀쩡해도 당시 겪었던 충격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거지.”
아이라가 그렇게 말한 후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한숨 쉬기는 내 전매특허(專賣特許)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만도 않았군. 늘 한숨 그만 좀 쉬라며 핀잔주던 아내들이 한숨 쉬는 걸 보니 신기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다. 늘 웃음만 지으면 충분했던 그녀들이 한숨까지 쉴 정도니……마음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겠지.
“괴물이 나타났다는 소리만 들어도 많이 슬퍼해. 아마……죽은 사람들을 잊지 못하는 거겠지. 어찌 보면 당연해……같이 살던 사람들이 그렇게 무참하게 살해당했는데……그걸 쉽게 잊을 수 있다면 그게 더 신기한 거겠지.”
아이나도 한숨을 쉬며 슬픔을 토로했다. 그녀들이 약한 소리를 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지친 모습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말하는 건 꽤나 드문 일이었다.
“힘든 건 그것뿐만이 아냐. 로라한테 들었지만……저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수도 주변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에도 얼쩡거린다는 보고를 받았어. 우리야 성벽에 경비대원, 세린까지 있으니 그나마 안심이지만……다른 마을은 우리처럼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 의문이야…….”
아테나의 그 말을 들은 나와 안즈는 깜짝 놀랐다. 안즈는 표정을 구기며 그 말에 분노를 표했고 나는 거꾸로 질문을 하게 됐다.
“자, 잠깐만. 프레그넌트랑 수도 주변. 수도로 오는 길 외에도 괴물이 있다고? 그 괴물들이 다른 마을 주변에도 있단 말이야!?”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미카가 입을 열었다.
“세린은 잘 몰랐겠구나. 우리는 보호를 받는 것뿐만 아니라 경비대 일을 도와주며 그런 정보를 듣곤 했거든. 마리아나 아테나는 왕가 사람이니 마을이나 긴급한 일에 대한 정보를 보고 받으니까. 지금 다른 마을들은 난리도 아냐. 청록색 촉수 괴물이 다른 마을 주변에 있는 괴물들을 모조리 죽이고 있다는 보고도 들어왔어.”
괴물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느 지역에 두 부류의 괴물이 있으면 서로를 죽여대곤 한다. 공존을 인정할 수 없으니 한쪽은 죽어야 한다는 간단한 논리가 성립되니까.
문제라면……청록색 촉수 괴물은 어지간한 괴물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레벨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 강한 촉수와 빔 공격. 마법내성까지 갖춘 괴물 새끼를 이기기 위해서는 배가 능력이나 강력한 마법을 써야만 한다. 통상의 괴물들이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었다.
청록색 촉수 괴물이 마을 주변의 괴물을 모조리 전멸시킨 후 마을을 노린다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저항하는 괴물들도 먹었겠다 괴물보다 더 야들야들한 살과 내장을 지닌 사람들이 잔뜩 모인 마을. 아니, 마을이라는 이름의 무제한 뷔페 파티가 눈앞에 있으니 아주 환장하겠지.
이미 괴물의 습격이 일어난 곳도 있었다. 괴물의 공격을 방어하는 기둥으로 마을을 감싼 부카케는 벌써 두세 번의 기습을 받았다고 한다. 기둥의 손상이 워낙 심해 최근에는 부카케의 주민들까지 이곳으로 불러와야 하지 않은가 하는 주제로 토론이 일어났다고 할 정도니……말 다 했지.
성벽을 지니고 있지만 내부 기강(紀綱)이 해이해진 자멘은 인명의 손실이 더 심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성벽만을 믿고 안에서부터 부패하던 자멘이었다만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보고를 들으니 결코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 안에는 무고(無故)한 사람들도 있었을 테니까…….
어보션은 마법사 양성소부터 시작해 수도 다음으로 견고한 곳이었기에 피해는 적었고, 부카케나 자멘의 피난민들이 너무 많을 경우 어보션을 두 번째 피난민들의 집합소로 사용할 예정이라 한다. 수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경우 방어도 어렵지만……혹시나 방어에 실패할 경우 발생할 인명 피해가 장난이 아니라고 예상됐기 때문이란다.
루인과 카미유가 제일 처참했다. 200명 정도밖에 없었던 루인은 현재 100명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만이 남은 상태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처참하게 당한 이유는 간단했다. 원래부터 외곽 지역에 있던 그들 주변에는 서큐버스 같은, 전투력이 약한 괴물밖에 없다고 했다.
성벽이 있긴 했지만 조그마한 마을을 둘러싸는 성벽이었기에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았으며 경비대의 전투력 또한 아주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 루인에 괴물들이 습격을 개시했다는 소리를 들은 나는 결국 의문을 제기해야만 했다.
“자, 잠깐만……. 그럼, 그 괴물들이 동시에 나타났다고? 프레그넌트랑 야만족의 숲을 제외한 모든 곳에? 동시다발적으로?”
서로 눈빛을 교환하던 아내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만……난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게 말이나 될 법한 말이냐? 안즈한테 바로 물었다.
“안즈. 청록색 촉수 괴물들이……?”
“없었어.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야…….”
내 질문을 이미 파악한 안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중에 안즈만큼 그 괴물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행동 패턴이나 약점, 파훼법(破毁法)을 내가 좀 알지만……그런 나조차 안즈만큼 오랫동안 그 괴물을 관찰하지는 못했었으니까.
“그 괴물들은 항상 우리 야만족의 숲에 있었어. 어떤 마을을 가더라도 그런 괴물이 없었기에 훨씬 더 증오하게 됐거든. 왜 이런 강력한 괴물이 우리 숲에만 있는 걸까 하고……. 그치만, 이건 말도 안 돼. 야만족의 숲에 있던 놈들이 다른 마을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다니…….”
고개를 저으며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죽은 동료들과 잃어버린 고향(숲)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까지 그놈들의 마수가 뻗치다니.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동족들과 마찬가지로 무참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게다가 예전에 ‘왜 우리 숲에만 이딴 놈들이 있는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 푸념이자 불만이었던 것이 현실로 일어나자 그 죄가 ‘혹시 내가 불길한 생각을 해서 이렇게 된 것 아닐까……?’라는 불안함과 죄책감을 느낀 거겠지. 이대로 놔두면 또 정신 상태가 불안해질 거 같았기에 안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괴물이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이유는 모르겠지만……적어도 니 탓은 아니니까 그렇게 슬퍼하지 마.”
안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중얼거리던 걸 멈추었기에 정신 상태가 이 이상 나빠질 일은 없겠다며 안도를 했다만……지금 안도할 때가 아니지!
이런 썩을! 그 괴물들이 그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그런 짓을 저지른 놈은 알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머리에 이미 이름 두 글자가 지나가지 않았냐? 카인이라는 이름의 개새끼가 말이다. 애초에 그놈 외에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 존재할지나 의문이었다. 원리는 알 수 없지만 방법은 프레그넌트에 괴물들을 풀어놓았을 때와 동일하겠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따위는 모르지만 그놈이 아니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짓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그놈 외에 이런 짓을 할 놈.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놈이 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코즈믹 호러(Cosmic Horror)를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세계가 펼쳐지겠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죽음에 몰아넣다니……!! 이가 갈리고 피가 들끓었지만……이내 나는 진정할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마디로 현실을 압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내가 나 자신한테 던지는 물음이자…….
절대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 작품 후기 ============================
힘든 월요일의 시작이지만 내일이 광복절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네요. 휴가가 없는 대신 이런 공휴일이라도 잘 챙겨야 이득이겠죠. 아침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는 걸 보니 가을이 오고 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여러분도 늘 건강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으로 들어가서, 프레그넌트 외의 마을에서도 피해가 발생했다는 게 대화를 통해 나왔습니다. 피해를 입은 지역은 프레그넌트나 야만족의 숲 외에도 많았다는 거겠죠. 피해를 입은 지역 중에는 세린 일행이 거친 곳도 있고 이름만 들어본 곳도 있습니다. 즉, 세린 일행과 관련이 있든 없든 간에 무차별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겁니다.
자연재해나 무차별 테러에 가까운 피해입니다만, 실제로 겪게 된다면 육체적·정신적 충격이 대단할 겁니다. 몸을 다치지 않았다 치더라도 재해나 피해로 인해 삶의 터전 등을 잃게 된다면……까놓고 말해 절대 기분 좋을 리는 없습니다.
피해는 점점 늘어나는데 원흉인 카인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 승산이 없는 싸움에서 발버둥을 치면서까지 소중한 걸 되찾으려는 세린. 과연 세린의 운명은……?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로리콤MK님, 가끔씩은 로리콤님도 제 맛간 글과 후기 때문에 변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초기에는 ‘로리, 다이스키이이잇!’을 외치던 저희입니다만……옛날이든 지금이든 간에 공공연하게 보여줄 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거 같습니다.
지금 당장은 카인한테 이길 수 없기에 계속해서 현상유지 or 개선을 노리는 구도로 갈 겁니다. 갑작스런 파워업은 글의 재미를 떨어뜨리며 개연성 또한 망가트리는 원인이거든요.
예? 계속 어두운 전개는 싫다고요?
……
…………
………………
싫어요! → 짙어요! → (행복한 느낌이 짙을 정도로) 좋아요!
크흐흐! 두음법칙상으로 완벽한 호응 대답을 해주시다니! 앞으로도 열심히 적겠습니다!
네? 두음법칙상으로는 그런 대답이 될 리도 없고 이런 전개도 싫다고요?
레드썬!!
고양이새벽님, 계속해서 굴러가는 세린. 굴렁쇠가 ‘형님, 오랜만에 뵙수!’라며 인사할 정도로 구르고 있습니다만, 이 이상 더 구를 거라 생각하니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고생하는 세린한테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원래 주인공이라는 게 늘 꿀 빠는 역할만 할 수는 없잖습니까.
명색이 ‘하렘 어드벤처’라는 제목이라지만 후반부 가니 하렘은 아니고 (서바이벌) 어드벤처 장르로 변해버렸습니다. 하렘 + 어드벤처인데 하렘 요소는 싹 사라지고 강제적인 서바이벌 어드벤처만 하게 되다니. PROFIT!!
그렇다 쳐도 이제 와서 작품하차도 못 하겠죠. 유희왕 아크 파이브와 철혈의 오펀스를 보세요. 좆같은데 주인공이 ‘나, 주인공 야메루!’라며 작품 하차한 적은 없잖습니까.
아! 물론 그렇다고 아크 파이브와 오펀스가 훌륭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고요. 둘 다 똥입니다. 이딴 걸 보실 바에야 케모노 프렌즈나 다른 작품을 보세요. 막말로 요즘 나오는 양산형 야애니 쪽이 훨씬 더 유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야애니에 우익이나 전쟁 요소가 나오는 일은 잘 없잖아요.
어느 쪽이든 간에 드래곤볼 슈퍼, 유희왕 아크 파이브, 철혈의 오펀스는 안 보시는 쪽을 추천합니다. 저요? 오펀스는 다 봤고 아크 파이브는 몇몇 편만 봤습니다. 오펀스는 왜 봤나 싶을 정도로 후회하는 중입니다.
이상입니다. 월요일이라 움직이기 싫으시겠지만 내일이 광복절이니 오늘 하루만 좀 더 힘냅시다. 8월이 끝나면 가을이 올 거고 그럼 지금보다야 활동하기 편하겠죠. 겨울이 오는 건 영 마음에 안 들지만 언제까지고 여름을 겪는 것보다는 번갈아 겪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P.S - 비가 오니 갑자기 쌀쌀해지네요. 진짜 가을이 다가온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