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6 「17-5 : 빼앗겨버린 아내들 (15)」 =========================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평소에 필요 없다고 생각하던 물건이라도 잃어버리면 허전하며, 없어진 후에야 그 물건이 나한테 꽤 소중한 것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이벤트를.
물건을 다시 찾게 되면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어, 이게 여기 있었네?’라는 것부터 시작해 ‘다시 안 사도 되니까 돈 굳었네’라거나, ‘이게 찾으니까 마음이 좀 편안해지네’라든가. 어찌 됐든 간에 잃어버린 물건을 다시 되찾은 거다. 기분이 나쁠 일은 좀처럼 없겠지.
단순한 물건만 하더라도 그런 마음을 지니게 되는데 하물며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물건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걱정하고, 후회하고, 슬퍼할 것이다. 소중한 사람이 자기 곁에서 멀어지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게 되겠지. 바로 나처럼 말이다.
몇 번이고 언급했다만 다시금 언급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명언. 이쯤 되니 독자들도 ‘아, 이 말 또 나왔네’라고 생각할 그 말. 그 문구를 다시금 언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한숨과 슬픔을 느끼며 ‘그 말’을 생각한다.
『후회는 언제나 늦게 하기 마련이며, 대가는 항상 큰 법이다』
지겹도록 튀어나온 말이라서 이제 슬슬 안 쓰고 싶지만……내 상황을 생각하면 아직도 후회 중이었다. 후회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내가 만든 건 아닌데 피해와 후회는 고스란히 내 몫이었고, 커다란 대가도 다 내가 지불해야만 하는 거였다. 생각해보니 존나 열 받네…….
카인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 전부터……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이 세상에 소환한 때부터 열심히 물 먹이고, 엿 먹이고, 골탕 먹인 여자. 그 여자 때문에 모든 일이 이렇게 됐는데 그게 내 탓이냐? 그 여자 탓이지!
더 짜증나는 게 뭔지 아냐? 나한테 엿을 먹이는 걸 좋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만……그래, 그건 좋다 치자. 그 타겟이 나 한 명. 오직 나만을 엿 먹이려고 하는 거라면 그냥 ‘아, 시발. 그 여자 때문에 또 엿 먹었네……어휴, 내 인생이 이렇지……’라며 투덜거리며 넘기면 될 일이었으니까. 나 외에 피해 본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카인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때부터 죄 없는 프레그넌트의 주민들을 대량으로 죽인 것도 모자라 내 아내들마저 빼앗아 가버렸다.
자신의 멋진 등장과 활약만을 위해 괴물을 풀어놓은 것도 용서 못 할 짓인데 거기에 아무런 관계도 없는 주민들까지 죽게 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분노가 끓어오른다!
죽은 사람들을 소생시킬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내들과 남은 주민들이 무사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려고 했다. 일종의 정신승리이기도 했지만 죽은 사람들한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추억과 애도 외에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죽은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내 아내들은 그를 마치 남편처럼 여기고 섬겼으며, 나에 대한 것을 거의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신세린’은 2주 만에 ‘살아 있었는지 어떤지도 모르는 남자’로 변해 있었다는 거다. 고작 2주도 안 되는 시간 만에 말이다.
대화를 하려 했지만 그녀들은 나와 대화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함께 있을 수도 없었고. 늘 카인을 따라다니며 자신들의 열렬한 사랑을 나타내는 걸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나와 함께 사랑을 나누던 아내들이 저런 개 같은 새끼 밑에 깔려 좆물을 원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당장에라도 총알을 박아주고 싶었다.
살인 욕구가 빵빵했다만 실제로 살인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살인 자체는 별로 겁이 안 났다. 지금까지 몇 백 마리나 되는 괴물을 죽여 왔는데 내 인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놈 하나 못 죽일까? 저놈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죽어 마땅한 놈이었다.
사람은 자고로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함무라비 법전부터 시작해 사람의 죄를 벌하고 다스리려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그것들은 시대를 통해 ‘법’으로 발전해왔다. 법률을 위반하는 죄를 범하면 법률에 있는 대로 처벌을 받아야만 했고, 그건 어느 나라든 간에 마찬가지였다.
물론 금수저나 상위 계층은 법의 적용이 어렵다. 하지만 그 말은 법의 적용이 어려운 것뿐이지 아예 법률상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걸 뜻했다. 사람인 인상 법률에 따를 수밖에 없었으며 사람이 아니라면 법의 보호를 받지는 못 했으니까. 의무와 혜택이 함께 있다는 뜻이지.
근데 카인은? 카인은 이 세상의 신(神)이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이 세상을 창조하고 지 꼴리는 대로 사건을 만들어왔다. 사람이 죽든 말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왔으며, 남의 소중한 목숨이나 사람들을 빼앗아 가지고 놀고 있다. 이런 놈한테 어떻게 법을 적용시킨단 말인가? 카인 자체가 이 세상의 법이자 규칙인데!? 이것도 심각한데 진짜 심각한 건 따로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가 뭐냐고?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조종당하고 있다는 건 물론이거니와 카인의 존재 자체도 모른다는 거다! 자기들부터 시작해 이 세상을 만든 사람! 창조주이자 절대주인 카인에 대해서 쥐뿔도 모른다는 거지! 자기가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 카인이 아무리 횡포를 부려도 그걸 입 닥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의 존재를 알면서도 터무니없는 횡포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버린 사람에 속했다. 더 이상 아내들과는 예전의 그 모습으로……함께 웃음과 사랑을 나누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카인이 존재하는 한은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안즈를 아내로 삼기 전의 마지막 아내. 여왕기사단의 부단장인 헬레나가 나한테 말을 하고 가버렸다. 여왕인 마리아의 명령이라며 오늘 밤 마리아의 침실로 오라는 말을 하고는 말이다. 거부권은 없다는 말까지 하고 가버렸으니 그냥 지 할 말만 하고 가버린 거였다.
그게 함정이든 마리아의 진심이든 간에 나한테는 간다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고착(固着)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HP와 MP. 무기와 코스튬 & 아이템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안즈와 함께 방을 나섰다.
놈한테 무기가 안 통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손가락 쪽쪽 빨며 ‘헤헤……아내들이 빼앗기는 모습을 보며 딸칠래……’라고 지껄일 생각은 조금도! 추호도! 박테리아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딴 놈이 될 바에야 뒈지는 게 낫지.
마리아의 침실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린다. 설마 최악의 상황이 이미 완성된 건 아니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지금까지 엿 먹어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을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더욱 더 확실하게 내 뒤통수를 강타했기에 이제는 뭐가 일어나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마리아의 침실로 온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들어오세요’라는 마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오랜만에 들어본 목소리였기에 조금 긴장이 됐지만……도망갈 수도 없잖냐. 문을 천천히 열자 그곳에는……내 사랑스러운 아내들이 모두 다 모여 있었다.
† † † † † † † † † †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내들이었다. 혜린이부터 시작해 내 곁을 떠났던 아내들이 모두 다소곳이 앉은 채 밝은 얼굴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꿈 아닐까? 혹시나 싶어 뒷목을 긁어 보았다. 뺨을 꼬집는 것은 고전적이었고 아픈 것도 싫었기에 다른 걸로 대체했지. 긁으니 느낌이 난다. 꿈도 아니라는 건데. 헛것도 꿈도 아니라면……환상?
“빨리 들어오시죠.”
“으헉!?”
문 주위에 서있던 헬레나가 내 손을 잡아당겼고 나는 볼품없는 모습과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요즘 환상은 사람의 감각까지 속일 정도로 진보한 걸까? 그 정도로 진보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세린……괜찮은가요?”
마리아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마치 내 눈치를 살피는 느낌이었기에 빨리 대답 안 하면 더 걱정시킬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네? 아, 어……괜찮은 거, 같은데요?”
몇 명이 한숨을 쉬었다. 너희 뒤질래? 내가 바보 같은 대답을 한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디스해도 된다는 말은 한 적이 없거든? 내가 바보짓 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낙담하냐?
열이 받아서 그런지 마음이 바싹바싹 타들어간다. 아내들과 그나마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던 건 내가 2주 만에 이곳으로 왔을 때. 카인과 모두가 식사를 나누던 때 쳐들어간 때였다. 그때 외에는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었다.
나와 담소를 나누던 아내들이 나를 거부하는 것도 모자라 무서워하며 다른 남자한테 달라붙는 모습이라니……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 믿음직한 남편에서 단숨에 수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내 심정을 알기나 아냐?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누군가한테 버림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말이다.
한숨을 쉰 아내들도 다시금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안즈까지 포함해 16명이 있지만 그 누구도 말문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말문을 잘 열었다고 칭찬 받고 소문이 날까? 대화의 장을 열기 위한 적절한 말들을 대가리 속에서 검색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밥은 먹고 다니냐?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여러 가지 말이 떠올랐지만 ‘이거다!’ 싶은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저 말만으로 충분하지 않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지금까지 같이 있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어쩐지 생판 남이 오랜만에 만나 안부를 묻는 느낌이 들었기에 묻고 싶지 않았다.
비록 먼 발치에서 보긴 했지만 카인과 함께 있던 아내들의 모습은 행복 그 자체였으니까. 마치 나와 있었을 때처럼 웃으며 즐거워하던 모습을 볼 때마다 카인이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 사람은 본래 나였다면서 비참한 기분을 맛보고는 했었지만……이런 식으로 다시금 아내들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바라는 것은 많으면서 막상 그걸 손에 얻게 되면 뭘 하면 좋은지 모르는 사람과 같았다. 다시 함께 있고 싶었던 아내들이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만나게 되니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트리고 대화를 원활하게 진행시킬 수 있을까?
“다들 벙어리야? 왜 말을 안 해?”
안즈가 대신 이 분위기를 박살내줬다! 오 ^0^/
여기까지 함께 왔지만 정작 소개할 틈도 없었거니와 헬레나 때문에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기에 안즈는 여전히 저기압이었다. 이렇게 멋지게 분위기를 박살내주니 나도 더 이상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그게. 막상 만나니 무슨 말을 하면 좋은지 몰라서 그래.”
나름 친절한 설명이었지만 안즈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날 본다. 뒤질래?
“아내들한테 버림받았다며 질질 짤고 울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긴장을 타는 건데?”
“부흡!”
빵 터진 것을 간신히 참으려 하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 목소리인지는 안 봐도 알겠군. 메이다. 내 딸이 어느새 날 비웃는 걸 즐기는 변태 같은 여자가 된 걸까? 으음……로라와 결혼한 날 밤에 내 자지에 키스를 했던 걸 생각하면 원래부터 변태 끼가 있었던 것 같으니 이 말은 적절하지가 않군.
메이가 변태냐 아니냐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노리고 한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분위기를 단숨에 박살낸 안즈 때문에 아내들의 표정은 꽤 느슨해져 있었다. 마치 당장에라도 웃음보를 터뜨릴 느낌이 들었지만……그 대상이 나라는 것이 좀 마음에 걸린다.
“음, 안즈. 있잖아. 내가 그랬긴 했는데……아무리 그래도 그걸 여기서 말하는 건 좀…….”
나도 창피한 걸 아는 놈이거든? 수치심이란 걸 가진 인간이거든요? 아내들한테 온갖 욕을 하며 온몸으로 슬픔을 표현했지만 지금 와서는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놈인데 그 소재를 그대로 말하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제 사회적인 위치와 지위도 생각을 해 주셔야죠…….
“아내 빼앗겼다고 울었던 게 하루 이틀 일이야? 어제도 밤중에 훌쩍댔잖아!”
“픕큭!?”
끝났다 ^0^/
부끄러운 비밀 대☆폭☆발 \^0^/
에누리도 없이 터지는 내 비밀스러운 기록에 몇 명은 곧바로 웃음을 토해냈다. 너 아주 나를 엿 먹이려고 작정했구나? 너 사실 카인한테 조종당하고 있는 거지? ‘아내들과의 재회(再會)’라는 성스럽고 거룩한 만남의 장을 개그로 박살내라는 명령을 받은 거지? 응?
아니면 뭐야?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나 엿 먹이려고 그런 거냐? ‘세린이 밤중에 질질 짰쪄요! 애새끼처럼 부들대며 울어쪄요! 우리 세린의 부끄러웠던 장면, 대공개!’냐?
난 지금 카인 하나도 벅찬데 너까지 관리를 해야 해? 온갖 쌍욕이 나올 것 같았지만 혹시나 그런 짓을 했다가 아내들의 태도가 달라질까 싶어 함부로 욕도 할 수 없었다. 망할.
“너 진짜 울었냐?”
은채의 말에 나는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응이라고 말하면 부끄럽고, 아니라고 말하면 거짓말이 되니까.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이미 다른 사람의 입에서 사실이 나왔는데 내가 아무리 부정하면 뭐하나? 하등 쓸모없는 발버둥이지. 한숨을 푹 쉬니 한숨 적당히 쉬라는 핀잔이 왔다.
“이게 나오고 싶어서 나오는 게 아니거든……. 어, 음. 다들 괜찮아?”
화제를 돌리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여전히 불안함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혹시 내 아내들이 돌변(突變)하지 않을까? 갑자기 칼이나 무기를 꺼내며 ‘헤헷, 사랑하는 카인님을 위해……죽어줘야겠다, 신세린!’같은 말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온몸을 감싼다.
영화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고? 내 인생이 영화 이상의 판타스틱한 경험의 연속이었다는 건 너희도 잘 알 텐데?
“그렇게 서있지 말고 여기 앉아.”
희진이가 손을 뻗어 의자를 가리켰다. 아내들은 마치 무언가를 둘러싸듯이 원형으로 자리를 세팅한 상태였고, 나는 안즈와 함께 의자에 앉았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니 부담스럽다. 아! 물론 기쁜 것도 없지 않아 있지. 두 번 다시 이런 시선을 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으니까.
앉은 후 모두를 둘러본다. 지금까지 이야기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아내들. 누군가가 하는 말을 훔쳐 들는 것으로밖에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아내들이……나를 위해 한 자리에 있다니. 가슴이 벅찼기에 눈물이 절로 나왔고 주변에서 괜찮냐는 걱정이 들려왔다.
“으응, 괜찮……흐윽! 응! 괜찮, 아! 나, 정말 괜찮아……!!”
안 괜찮은 거 같다. 아니, ‘같다’가 아니라 확실히 안 괜찮았다. 너무 기쁘고 슬퍼서 눈물이 절로 나왔다. 안 기쁠 수가 있겠는가? 2주 만에 만났지만 다른 남자를 남편, 아버지, 왕이라 부르던 아내들이……나와는 대화는커녕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싫어하던 아내들이 나를 위해……나 같은 놈을 위해 한 자리에 모여준 건데……슬프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누구인지 모를 가슴이 내 얼굴을 안아줬지만 난 결국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내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눈을 뜨고 그게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울어댔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후에야 대화를 진행할 수 있었다.
“세린은 울보군요.”
“아, 남이사! 그래, 울보다! 많이 울다 못해 소문까지 났고 광고까지 났다! 후련하냐!? 어이구……!!”
헬레나의 말에 소리를 지르자 모두 킥킥대며 웃었다. 비록 나를 비웃는 거지만……이러한 분위기마저 너무나 오랜만이었기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 안즈. 너는 비웃지 마라. 니가 이상한 말해서 이렇게 된 거잖냐. 애초에 납치범 주제에 왜 잘난 척 하는 건데 너님은!?
“건강한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세린.”
마리아의 그 말에 나는 한숨을 쉰다. 한숨 좀 그만 쉬고 싶은데……한숨밖에 안 나온다.
“건강하고 싶어서 건강한 거 아냐. 그 빌어먹을 놈 때문에 죽으면 안 되니까 건강한 거지.”
빌어먹을 놈이 카인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좋은 분위기였지만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단숨에 분위기가 싸해진다. 분위기 다운될 거 알면서 왜 이름을 거론했냐고?
반대로 물어보자. 카인 이름을 거론 안 할 거 같았으면 뭐 하러 아내들이 나를 불렀을까? 다과회(茶菓會)라도 나누기 위해 부른 거라고 생각했다면 어리석은 거지.
주위를 몇 번이고 둘러봤지만 카인은 없었다. 카인이 없으니 그녀들이 나를 신경 써주는 거지. 카인이 곁에 있었다면 아내들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겠냐? 애초에 이러한 만남의 자리마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카인의 함정과 마리아의 초대. 어느 쪽일까 불안했지만 아무래도 후자(後者)같았다. 혹시나 싶어 질문한다.
“카인은? 혹시 이 성 안에 있어?”
젠장. 내가 바람피우는 것도 아닌데 왜 그 새끼 행방을 신경 써야 할까? 분노가 들끓지만……어쩔 수가 없었다. 힘이 없으면 조심이라도 해야 하니까. 내가 가진 모든 힘은 그놈이 준 거였으니 함부로 설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은 없어요. 덕분에 세린을 부를 수가 있었구요.”
마리아가 초대한 것이긴 하지만 거기에는 ‘카린의 부재(不在)’라는 조건 또한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군. 카인이 없으면 정신지배가 풀릴 수도 있군. 강제로 거리를 두게 한 적이 없어서 몰랐지만…….
지금까지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정신지배(세뇌)였지만, 이것뿐만 아니라 로라와 함께 있었던 걸 생각한다면…… ‘함께 있어야 한다’라는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지배나 세뇌가 풀리는 거 같았다. 그래서 아내들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을 피했던 건가? 내가 카인을 공격해서 그가 도망가 버리면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지고, 이로 인해 세뇌가 풀리는 걸 무서워해서?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로라 때도 그랬잖아. 관계를 나누려는 방에 들어가 소총을 갈겨댔지. 소중한 아내를 두고 간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지만 그 덕분에 로라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물론 다음날은 얄짤 없이 원래 상태로 돌아갔었지만…….
“아, 그러고 보니……로라. 다른 사람들한테 말씀하셨어요? 제가 말씀드렸던 거…….”
로라는 이미 모두한테 말했다고 했다. 그건 다행이군. 같은 이야기를 또 해야 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사람이 이렇게 많아서야 이야기하다 끊기고, 이야기하다 질문 받아야 했을 테니까. 이미 나에 대한 것들은 잘 알 테니 이번에는 내가 궁금한 걸 묻기로 하자.
“너희는 괜찮아? 그, 카인 때문에…….”
말을 줄이긴 했지만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은 입에 담기 싫은 것들이었다. 그녀들의 자궁에 허락도 없이 들어간 더러운 자지. 그 자지에 온갖 미사여구를 붙이며 좋아했을 아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프다. 그녀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희는 괜찮아요. 그……미안해요, 세린. 저희가 그만……세린한테 큰 상처를 주고 말았네요.”
가슴을 후벼 파는 이 느낌은 나 혼자만 느끼는 게 아닐 텐데도 마리아는 나를 먼저 신경 쓰고 있었다. 하아……왜 카인이 저지른 짓을 내가 수습해야 하는 걸까?
“아니. 나는 괜찮아. 미안……그, 거북한 이야기 거리를 꺼내서 내가 더 미안하지.”
우리 모두 그와 몸을 나눈 것을 주제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정신이 힘든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정신이 무너졌다간 더욱 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힘들 테니 다른 주제로 넘어 가야만 했다.
“그런데……카인은 어디로 간 거야? 왜 나를 부른 거고? 너희는 이렇게 모여 있어도 괜찮아?”
이야기를 급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나는 두서없이 질문을 던졌고 아내들은 날 보며 싱긋 웃었다.
“궁금한 게 많을 테니 모두 답변해드릴게요. 아마 오늘 밤은 안 올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구요.”
그런 말을 들으니 조금은 안심이군.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도 질문 목록에 올리자. 이렇게 만난 것도 기쁘지만 궁금한 걸 물어두지 않으면 나중에는 대답조차 들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런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도 지금은 물어야 할 것들을 다 물어놓아야 했다.
“우선 카인이 어디에 갔는지에 대해 말씀드릴 생각인데……음. 세린. 미리 말해두지만……이건 장난삼아 대답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주세요.”
갑자기 알 수 없는 말을 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와중에 장난삼아 대답할 리가 없지 않은가? 마리아는 자세를 가다듬고는 대답했다.
“아시다시피……카인은 현재 레이프의 왕이에요. 예전에 세린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구요.”
그 말을 듣자 또 가슴이 아파 온다. 이미 지나간 일에 상처를 받을 필요는 없지만……슬픈 건 슬픈 거다. 그 자리에 앉아 아내들을 자기 물건처럼 만졌을 걸 생각하면 열 받기도 하고.
“그런데 최근 들어……그가 우리를 놔둔 채 어디론가 사라지는 일이 많아졌어요. 궁금해서 어디로 가냐고 물었지만 그는 알 필요가 없다는 말만을 했어요. 그와 함께 있는 동안은 그런 말을 들어도 어디로 가는지 의심할 줄도 몰랐고 의심할 필요조차 못 느꼈죠.”
왕이나 되는 놈이 혼자 어디론가 간다는데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가다니.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났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그 덕분에 아내들의 정신지배가 풀렸다는 말인가……어라? 뭔가 이상한데?
“분신을 남기려고는 안 했어?”
분신이 본체와 같은 효과(함께 있는 것만으로 정신지배)를 가지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만약 내가 카인이었다면 정신지배를 보다 견고히 하기 위해 분신을 놔두려고 했을 텐데…….
“예.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는데……꽤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분신을 만드는 것도 꺼리더군요. 짧으면 1~2시간이지만 길면 밤에 나간 후 다음날 아침에 오고는 했어요. 그가 외출할 때마다 저희는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구요.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건 다 로라와 세린의 이야기 덕분이었어요.”
“아뇨, 여왕님의 강인한 의지와 마음 때문이죠. 저는 그저 이야기를 했을 뿐인걸요…….”
겸손하게 말하는 로라였지만 그녀한테는 정말 많은 것을 고마워해야만 했다. 로라가 아니었다면 내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카인과 함께 있는 아내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겠냐? 날 벌레 보듯이 쳐다보며 피하느라 여념이 없을 텐데?
“행선지를 말하지 않은 건 안타깝지만 돌아올 시간에 대해서는 말을 했었거든요. 그게 좀 의아하다고 생각했지만……괜히 티를 내면 안 되니 그냥 고분고분하게 대답을 했어요. 내일 아침쯤에 돌아온다고 했으니 오늘은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예요. 그래서 세린을 위해 모두 모인 거구요.”
기쁜 말이었지만 궁금한 것 리스트에는 ‘카인의 행선지’도 추가되어야만 했다. 아내들을 놔두고 사라진다고? 어디로? 여기를 제외한 곳이라면 프레그넌트 같은 마을들이다. 프레그넌트는 부서졌으니 거기 갈 필요가 없을 테고, 다른 마을에 간다고 한들……거기서 뭐하게? 쥐불놀이라도 할 거냐?
또 시간이랑 분신도 문제였다. 자기가 돌아올 시간을 예고하고 나간다는 건 그만큼 시간이 걸릴 거라는 계산을 미리 해뒀다는 건데……뭘 하느라 10시간 이상을 쓰는 거지? 게다가 분신을 만들지 않고 가야 할 정도로 집중해야 할 일이라……. 도무지 짐작이 안 간다.
대화의 기회가 생긴 건 기뻤지만 알 수 없는 문제들만이 늘어나고 있었기에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태였다. 우선은 카인에 좀 더 묻고 그걸 다 들은 후에 아내들에 대해 물을 생각이었다. 카인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주의하는 거 아니냐고? 설마. 카인한테 한해서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오히려 아내들을 놔두고 어디론가 가버리는 게 나한테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함정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할 정도였으니까. 의심도 이 정도면 병이라지만 나한테는 조심하고 주의하고 의심하는 것 외에는 그를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의 손아귀에 있는 미련한 인간.
그는 아무리 여유를 부려도 승리가 확정된 이 세상의 신.
……어느 쪽이 유리한지 비교할 필요가 있을까?
============================ 작품 후기 ============================
즐겁게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소설이 많이 읽히는 건 참 좋은 일인데……집안 사정은 최악입니다. 어떻게 된 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2016년 11월 말부터 지금까지, 집안 사정이 악화만 될 수 있는 걸까요. 현실은 소설보다 기묘하다는 말이 그냥 장난삼아 나온 말이 아닙니다. 진짜로.
마침내 아내들과 만난 세린. 이야기를 나누며 카인의 행적과 수상한 무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어떻게든 현실을 타파하려고 궁리를 하는 것으로 이번 편이 끝났네요. 카인과의 싸움이 얼마나 불리한지 이해가 잘 안 가시는 분들. 쉽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게임 운영자 vs 플레이어. 존나 쉽죠? 그와 동시에 이해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절대 못 이기는 싸움이라는 걸요.
운영자는 실력이 좋아 운영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게임 전반을 두루 관리하는 사람이죠. 그런 사람이니 당연히 접속하는 게임 캐릭터는 특수한 성질을 띠게 됩니다. 초라하게 레벨1짜리 헐벗은 캐릭터로 돌아다닐 리는 없겠죠.
원하면 캐릭터를 강퇴 시킬 수도, 처벌할 수도 있는 게임 운영자(카인) VS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고 아내들이고 뭐고 다 빼앗긴 평범남(세린). 얼마나 막막한지 이해가 가실 거라 생각합니다. 과연 세린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싸우게 될까요.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로리콤MK님, 마리아는 당연히 여왕이므로 카인과 딱 달라붙어 다니는 심복 중 한 명입니다. 명색이 왕이니 여왕을 동반할 테고, 카인 옆에 딱 달라붙어 있으니 정신지배 등이 매우 원활하게 이루어집니다. 사실상 최고의 피해자 중 한 명이죠.
그 외의 아내들도 비슷한 상황이긴 합니다만, 레이프의 여왕이라는 명목 아래 왕(카인)과 여러 가지를 논의하고 해야 하니……진짜 엄청난 피해자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계속 같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 사람한테 아양을 떨며 다리를 벌려줘야 한다니. 생각하니 오싹하네요. 같이 있었는데 왜 좋아하는지, 왜 함께 있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 채 무조건적인 사랑만 주려 하다니. 여러 모로 안 좋은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고양이새벽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듯이 시련이 힘들면 얻는 것도 대단해지기 마련입니다. 문제라면 ‘세린이 그 시련을 뛰어넘을 수 있느냐’ 여부죠.
지금부터 펼쳐질 세린의 진정한 시련이 과연 어떤 것일지. 그리고 그 시련에서 세린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그 시련 끝에서 세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지. 즐겁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업로드해야 하니 수면 시간도 점점 줄어듭니다. 집안 사정은 안 좋은데 일은 힘들고, 수면시간은 줄어드는데 제대로 잠 잘 시간이나 상황도 없고. 막장 오브 막장이네요.
독자분들의 조회, 추천, 코멘트 등에 늘 감동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모자라지만 노력하는 작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 이 좋은 상황에 ‘레드썬 언제 쓰나염?’이라고 물으시는 분. 반성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