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5 「17-4 : 빼앗겨버린 아내들 (14)」 =========================
오밤중에 여자가 남자를 부른다면 우리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말 그대로 여자가 남자한테 ‘밤중에 내 방으로 찾아와’라고 말한다면 말이다. 십중팔구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밤중에 찾아오라고? 그 말은 다시 말해……크흐흐, 당돌한 계집애! 남자를 밤중에! 그것도 자기 방에 부르다니! 하반신이 외로웠나보군……지금까지 외로웠던 밤, 확실하게 달구어주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 물론 개중에는 ‘쟤가 왜 오밤중에 날 부르지? 혹시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오히려 후자(後者)쪽을 고르겠지. 여자가 아무 이유 없이 남자를 자기 방에. 그것도 밤중에 부르지는 않을 테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현실 세상에서는 여자와 완전 무관(無關)한 삶을 살았었다. 남녀공학이 아니라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애초에 여자가 주변에 있어도 말할 이유도, 만날 건덕지도 없었다.
그런 주제에 혹시나 여자한테 보이지 않을까 싶어 외모에 신경을 쓰려고도 했지만……그런 짓을 한다고 나한테 ‘여자와의 만남’이라는 이벤트가 떴겠냐? 당연히 안 떴지.
여자한테 ‘오늘 밤에 내 방으로 와……’라는 감미로운 속삭임을 들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숨길 일도 아니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까놓고 말해서, 저런 말을 듣는 남자는 어떤 남자라고 생각하냐? 당연히 인기 많고, 잘 생기고, 돈 많은 남자겠지.
인기가 많은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잘 생기거나, 돈 많거나, 싸움 잘 하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잘 생긴 건 거의 필수 조건이겠지. 못 생긴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어떠한 특별한 이유 혹은 이벤트가 발생해서 그런 거겠지만, 잘 생긴 남자는 그런 이유나 이벤트 없이도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받을 수 있으니까.
돈? 오오, 그래. 돈. 금전적(金錢的)인 면도 중요하지! 아무리 잘 생겼어도 집이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개털이면 여자들이 상대를 안 해주니까. 요즘은 결혼이 아니라 연애 때부터 돈이 많이 들어간다고 한다.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가꾸어야 하는데 미용, 건강, 운동에 들어가는 돈만 하더라도 결코 무시 못 할 액수가 되니까.
결혼할 때 결혼식 비용, 혼수비용 등도 문제지만 그 전부터도 많은 돈이 들어간다니. 인기가 없는 나 같은 남자한테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였다.
응? 사랑만 있으면 돈은 아무래도 좋지 않냐고? 하핫, 순진하군. 어떻게 그런 순진한 상태로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왔는지 궁금하다.
사랑이 전부라는 말은 옛날 옛적의 말이다. 금전적으로 부족한 남자를 받아들이기에는 요즘 여자들의 눈은 너무나 높아졌으니까. 이는 비단 여자들만의 탓은 아니다. 여자들을 상품처럼 고르는 경향이 있었던 남자들의 태도에 반발하고 싶었지만 여자의 권리나 위치는 옛날부터 매우 낮은 축에 속해 있었다.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됐으며 그들의 위치 또한 높아졌다. 경제적인 면에서라면 이미 남자를 앞섰던 여자들도 있었지만 사회에서 인정을 받거나 하는 부분에서는 우위를 점하지 못했기에 남자에 대한 반발심은 더욱 더 커져만 갔지.
세계화와 여성 인권의 신장(伸張)으로 인해 여자들이 사회발전의 인물들로 인정받은 후에는 정 반대의 사태가 일어났다. 여자들을 상품처럼 고르던 남자들이 이번에는 여자들한테 선택받는 위치에 처해진 것이다. 생긴 것, 성격, 경제적 수준 등을 따져가며 남자들을 고르게 된 사태에 대해 불만을 가진 남자들도 많겠지만……그렇게 된 것에는 남자들의 잘못도 존재했다.
돈만 있으면 다인 줄 아냐고? 물론이다. 또래 청년과 나이 많은 삼촌뻘 남자. 두 명과 사귄 여자는 나이가 많은 삼촌뻘 남자를 선택했다고 한다. 어째서 또래 청년이 아니라 나이가 많은 남자를 선택했냐고 물으니 이와 같이 대답했다.
‘예전의 남자(나이 많은 삼촌뻘)는 자동차를 가지고 있어서 좋았는데……또래 중에서는 차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 있어도 소형차라서……좀 그렇잖아요. 어쩔 수 없이 다시 예전 남자를 찾게 되더군요.’
이것만으로 이미 끝이었다. 돈. 돈이 최고다. 돈이 짱이다. 돈만 있으면 젊은 여자든 인기 있는 여자든 간에 단숨에 꼬여드니까. 성형수술로 얼굴을 고칠 수도 있으니 어찌 보면 잘 생긴 것조차 능가하는 최고의 요소 중 하나였다. 이런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인기가 없을 리가 없지.
부자의 돈을 노리고 결혼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그 경우에는 본인이 그런 길을 선택한 거니까 딱히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금전적인 이익을 얻게 되지만 그 이익을 빌미로 남자가 바람을 피거나 하면 힘든 건 여자 쪽이었으니까.
금전적인 자유로움을 얻는 대신 마음고생을 하게 되는 사례도 있었기에 부자와의 결혼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었다.
돈이나 잘 생긴 건 이해가 가는데 싸움을 잘 하는 건 왜 나왔냐고? 음……싸움을 잘 한다는 것은 물리적·육체적인 면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다는 소리다. 실생활에서는 느끼기 힘들지만 싸움 등의 해프닝이 벌어졌을 때 단숨에 그러한 해프닝을 정리할 수 있는 스펙을 가졌다면 좋든 싫든 인기를 얻게 된다.
예전에 유행했던 ‘나쁜 남자 스타일’에 싸움을 잘하는 요소까지 붙이면 금상첨화지. 그 육체적인 스펙을 발휘해 체육계(體育界)에 들어가서 돈을 벌 수도 있으니까.
이종 격투기나 야구, 축구 같은 스포츠 방면에서 활약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스펙은 필수불가결이다. 몸 하나로 엄청난 돈을 번 사람이니 인기가 없을 리가 없잖냐.
그렇게 따지자면 ‘싸움을 잘 하는 게 아니라 육체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인기가 많은 거 아닌가요?’라고 물을 수도 있다. 그 말 또한 틀린 게 아니다. 단지 인기가 많은 걸로 치자면 자극적이며 금방 결판이 나는 싸움 쪽이 훨씬 더 부각된다는 소리지. 싸움을 긍정할 생각은 별로 없다.
외모, 돈, 육체적인 스펙 등.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세상 살기가 쉬우며 인기 얻기도 용이하다. 두 개 있으면 인생이 꽃밭이며 모두 다 갖추었다면? 축하한다. 이런 표현은 별로겠지만 여자를 대형마트에서 과자 고르듯이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여자들은 부족한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한 남자를 받아들일 경우 자신이 육체적·정신적·금전적으로 괴로워질 거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사정이 나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행복한 인생을 만들 수 있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면? 곧바로 대쉬. 일본어로는 어택(Attack ; 작업 건다는 뜻이 된다)에 들어간다.
어찌 보면 너무나 속물적(俗物的)인 모습이기도 하지만……어쩔 수가 없다. 이 세상에 고를 수 있는 남자는 적으며, 자기가 바라는 조건을 갖춘 남자는 그것보다 더 적다. 자신의 인생과 미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앞에 있는데 찔러보지도 않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이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인기 있는 여자한테 한 번쯤 대쉬하는 사람도 있잖아.
나는 인기 있는 남자는 아니었기에 여자들의 대쉬 따위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기보다는……애초에 여자랑 접점 자체가 없었기에 만화나 영화, 드라마 따위를 통해 ‘아, 여자들이 저렇게 남자한테 대쉬하는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물론 ‘나한테 저런 이벤트 따위는 발생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던 건 덤이다.
아내들을 빼앗긴 이후로는 상심(傷心)하여 성행위도 잘 하지 않았다.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얼마나 여자를 밝혀댔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충격을 받겠지. 그토록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즐기던 내가 여자를 잘 안지 않다니 말이다.
안즈와의 성행위가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와 관계를 가지곤 했지만 예전처럼 격한 섹스는 하지 않았다. 두세 번 정도 절정에 도달한 후에는 나 자신도 모르게 기운이 빠지고는 했으니까. 관계를 가질 때마다 빼앗긴 아내들이 생각나는데 진심으로 그녀들을 잊고 섹스에 빠져들 수 있었다면 차라리 좋았겠지만……그럴 수는 없었다.
아내들이 카인의 아랫도리에 좋다며 환희(歡喜)의 비명을 질러댈 걸 생각하면……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다는 게 이렇게까지 커다란 영향을 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었다. 지금까지 사랑하던 이를 빼앗긴 적도 없었지만……애초에 현실 세상에서 여자를 만든 적도 없었으니까.
그런 나한테 있어 헬레나의 방문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좁고 허름한 방에 헬레나 홀로 들어왔기에 나와 안즈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쌀쌀맞게 마리아의 명령만을 하달하던 헬레나가 왜 우리 방에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막 점심을 먹고 쉬던 중 헬레나는 갑작스럽게 들어왔다. 나는 놀라서 ‘무, 무슨 일로 온 거야?’라고 물었다. 헬레나는 ‘여왕님의 명령이다. 오늘 밤 8시까지 여왕님의 침실로 오도록. 거부권은 없다. 전할 것은 이게 다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다시 나가버렸다.
귀여운 여자가 유혹하는 듯한 말투로 ‘오늘밤에 내 방으로 와……♥’라고 말했다면 오죽 좋았을까? 예전의 아내들은 ‘오늘은 저랑 잘 거죠? 네?’라며 재촉도 하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만 그렇게 은근하게 말을 하지는 않았다. 분신술을 쓸 수 있었기에 굳이 그런 말(밤에 자기 방으로 오라는 내용)을 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치만 이건 좀 쇼크였다. 갑자기 들어와서 ‘오늘 밤 8시까지 와라. 너한테 거부권 없음. 나 할 말 다했음. 간다. ㅂ2’라고 하고 가다니. 여기서 ‘ㅂ2’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 ‘ㅂ’은 [바]라는 걸 의미하며 ‘2’는 발음 이(二)를 나타낸다. 둘 다 합쳐서 ‘바이=Bye’. 작별 인사를 뜻하는 말이 되지.
……이거 꼭 지금 설명해야 하는 걸까? 으음, 이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잖아. 중요한 건 헬레나가 저런 말을 남기고 나가버렸다는 거였다.
헬레나가? 안즈를 아내로 맞이하기 전의 마지막 아내이자 여왕기사단의 부단장인 헬레나가? 이전에 안즈를 촌년이라며 마구 폄하(貶下)하던 헬레나가 왜 저런 메시지를 전한 거지?
더군다나 마리아의 침실로 오라고? 어디 있는지는 당연히 알지. 내가 마리아랑 함께 잤던 곳이니까. 하지만……오밤중에 오라니? 고작 몇 마디의 말이었지만 나는 구조조정 때 해고 통보를 받은 사람처럼 그 말을 계속해서 곱씹어야만 했다. 바보냐고? 그래, 바보가 되어버렸다. 겨우 말 몇 마디 때문에 말이다.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나와 안즈를 그토록 싫어했던……아, 아니다. 카인 때문에 ‘싫어하게 됐던’ 헬레나가 다짜고짜 들어와 오늘 밤에 마리아의 침실로 오라고 하다니. 더군다나 그 말은 마리아의 명령이라 했다. 즉, 여왕의 권위로 내린 명령이라는 뜻이다.
전한 헬레나도 문제였지만 그런 말을 한 마리아도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녀들의 사랑과 신뢰를 잃어버린 나는 더 이상 왕이 아니다. 임금이 아니게 된 덕분에 이 좁고 허름한 곳에서 숙박(宿泊)을 해결하고 있는데 왜 나를 지금 와서 부르는 거지? 혹시……함정인가?
전혀 이해 못 할 상황이었지만 이 상황을 이해시킬 수 있는 가정(假定)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카인이 함정이었다. 카인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소환을 한 나까지 조종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라면 마리아의 육체를 조종해 명령을 내리는 것쯤 누워서 떡 먹기일 것이다.
카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면 육체가 조종당한다고는 생각도 못 할 것이며, 설령 생각한다 치더라도 여왕인 마리아의 명령을 멋대로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마리아와 아테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키려고 하는 헬레나 입장에서는 어떤 명령이든 간에 최선을 다해 따르려 하겠지.
그런 면에서 보자면 카인의 인선(人選)은 참으로 훌륭했다. 훌륭하다 못해 짜증을 유발시킨다만……명령에 충실하게 따를 뿐만 아니라 명령을 내리는 이를 절대적으로 지키려 하는 인물. 헬레나를 일종의 행동 대장으로 사용함으로써 내가 아내들과 만나거나 하는 일을 미연(未然)에 방지(防止)할 수 있었으니까.
카인에 대해서는 늘 분노와 짜증밖에 갖지 않는 나였지만 예전에 카인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이후로는 그를 보는 시선이나 생각을 조금씩 바꿔가기 시작했다. 전지전능에 가깝지만 전지전능하지는 않은 존재. 그런 카인의 생각을 읽지 못한다면 그를 죽일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참 웃긴 일이었다. 날 조종할 수 있는 주제에 왜 마리아의 명령으로 하여금 헬레나를 움직이게 했을까? 고작 그 한 마디 전하자고? 그럴 리는 없었다. 상대방이 하는 행동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상대는 카인이다. 지금까지 나를 엿 먹인 하얀 머리의 여자라고. 방심은 금물이었다.
카인이 나를 불러서 할 일은……솔직히 말해서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가장 생각하기도 싫고 보고 싶지 않은 사태.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웠지만 이미 실제로 일어난 일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그게 뭐냐고? 내 눈앞에서 아내들과 질펀한 섹스를 보여주는 거지, 시발.
NTR 작품에서는 아내를 빼앗긴 남편 앞에서 성관계를 나누는 장면이 흔하게 나왔었다. 아내나 연인을 빼앗기는 걸 비디오 같은 영상물을 통해 보는 작품도 있었다만, 어느 쪽이든 간에 소중한 존재를 다른 남자한테 빼앗겼다는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이미 카인과 관계를 나눈 아내들을 생각하니 늘 가슴이 아파왔는데……설마 그걸 내 눈앞에서 보여주려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긴장감이 가슴을 마구 찔러왔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먹히든 안 먹히든 간에 총알을 갈겨 줄 생각이었다.
총알과 투영마술이 작동 안 되면? 맨몸으로라도 막아야지! 내 소중한 아내들이 강간당한다는데 그걸 멍하니 보면 내가 남자 새끼냐? 병신 머저리지!
자기한테 있어서 소중한 것을 빼앗기고도 헤실헤실 웃으며 넘긴다면 그건 사람이 존나 좋거나, 병신이거나. 둘 중 하나다. 나? 나는 병신이긴 하지만 웃으면서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 나는 100원만 잃어버려도 짜증을 내는 사람이다. 내가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고도 ‘어쩔 수 없지……’라며 넘어갈 놈으로 보이냐?
하물며 빼앗긴 것은 물건이 아니라 아내들이다. 이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얻은 것들. 연인, 아내, 결혼, 섹스, 아기, 추억 등. 여기 와서 겪은 대부분의 것들이 그녀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사실상 이곳에서 얻은 것들 중 알파이자 오메가, 시초이자 종점인 그녀들을 빼앗기다니! 지금 와서 생각해도 속이 끓어오르는데 그냥 두자고? 포기하자고? 좆 까라 그래라.
현재 진행형으로도 나를 엿 먹이고 있는데 내 정신을 끝장내기 위해 나를 부른 거라면……좋다. 어차피 나도 많은 걸 생각한 끝에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까. 카인과의 정면승부는 절대 피할 수 없으리란 결론에 말이다.
나한테 뭘 바라는 건지는 아직도 찾아내지 못했다. 지금까지 죽어간 12명의 남자와 다른 여자들에 대해 모르기에 그들과 내가 가진 공통점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자료로 생각해낼 수 있었던 것은……소환된 남자의 수가 여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사실 정도였다.
바라는 게 있어서 소환했지만 왜 많은 남자들을 죽게 내버려뒀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부탁할 게 있으면 안전하게 소환해야지, 나처럼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소환하면 어떻게 해? 내 경우에도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거였지. 운이 나쁘거나 자동사격 모드가 없었다면 얄짤 없이 뒈졌다.
자동사격 모드는 HP가 30% 이하일 때 발동되는 방어형 스킬이다. 하지만 HP는 단계적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다. 에너지가 40% 정도 남았는데 급소를 맞아 절명(絶命)할 수도 있었고, 그런 경우에는 자동사격 모드의 발동 없이 바로 죽을 수도 있었다. 새삼 운이 좋았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지.
생존부터 시작해 너무 많은 것을 운에 의존하는 느낌이 드는데……이런 운이 없다면 살아남기조차 어려운 남자들한테 대체 뭘 바랐던 걸까? 카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했지만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는 내가 레벨 10이 되자마자 마력증폭 + 모험 이벤트까지 곁들여 줬었잖냐.
옛날에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을 플레이해본 적이 있었지. 그걸 플레이한 사람은 RPG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 거라 생각한다. 레벨 1의 주인공. 주인공의 동료들을 한데 모아 열심히 레벨업도 시키고, 무기나 방어구도 바꿔주고. 아이템이랑 마법도 써가며 점점 성장하는 게 RPG의 묘미 아니던가?
레벨 10이 되자 촌장인 아이나와의 만남이 주선되도록 한 걸 생각하면 ‘나를 강하게 만들 생각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레벨 업이 어려운 것을 감안해 레벨 업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여행에 참여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
그치만 그 여행도 도중에는 이상하게 변했다. 밤중에 괴물의 습격이 있지를 않나, 납치를 당하지 않나. 나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그런 이벤트는 전혀 필요가 없는데 어째서 그런 걸 경험하게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 캐릭터를 일부러 위험에 처하게 하는 플레이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를 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만……강하게 만들려면 처음부터 존나 강한 마법이나 신체 스펙을 주면 될 일을,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나와 카인의 차이를 보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은가? 카인한테 이길 수 없는 건 레벨 1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럼 대체 여행을 뭐 하러 시킨 거야?
카인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지만……지금은 마리아가 나를 부른 이유를 생각할 때다. 카인에 의해 조종당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두 번째 가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성은 좀처럼 없지만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두 번째 가정. 그건 바로 「마리아가 정신지배(세뇌)를 스스로 해제했다」라는 것이었다.
스스로 정신지배를 해제한 마리아가 밤에 나를 불러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이다……. 만약 스스로 정신지배를 해제한 거라면 그런 일이 펼쳐지겠지. 가능성은 적지만 아주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카인과 키스를 하던 로라를 구해낸 후 그녀와 이야기를 하며 깨달았다. 카인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의식을 조종당할 수 있지만, 카인이 주변에 없거나 나와 함께 시간을 나누는 것으로써 그녀들의 기억과 정신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종(某種)의 이유로 인해 정신을 되찾은 마리아가 나를 부른다면 내용은 아마……카인에 대한 것이겠지. 자신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프레그넌트 주민들에 대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마리아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아내들을 빼앗긴 이후로는 제대로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상태였다. 무슨 말이든 간에 우선 대화를 하는 게 중요했지만 늘 카인 곁에 있던 그녀들을 강제적으로 헤어지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괜한 소동을 일으키면 쫓겨나서 그걸로 영원히 이별.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아내들과 카인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지켜볼 수도 없었기에 늘 피눈물 흘리는 심정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는데……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카인의 함정이든 마리아의 의지든 간에 이번 기회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카인의 함정이라면 대판 싸우는 거고 마리아의 의지라면 마리아부터 시작해 내 아내들과 다시 만나 카인한테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었으니까.
자기들이 조종당하고 있는 사실마저 모르겠지만……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원상태로 그녀들을 돌려놓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자신은 없지만, 이런 것마저 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안 되니까. 아무것도 돌려놓을 수도, 되찾을 수도 없었으니까.
안즈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고 나는 갈 거라 말했다. 백발의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안즈한테도 말을 못 했다. 단지 ‘카인에 의해 정신지배를 받고 있어서 그렇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긴 했었지. 자세하게 말한다고 한들 내 말을 믿어줄 지나 의문이었으니까.
내가 꿈부터 시작해 백발의 여자, 카인에 대해 이야기해도 ‘이 새끼 정신 나갔음?’이라는 눈으로 볼 거 같아 말을 안 한 것도 있었지만……솔직하게 말했다간 안즈는 나 이상으로 미쳐 날뛸 거 같았거든.
청록색 촉수 괴물을 본격적으로 이 세상에 풀어 놓은 것도. 입에서 강력한 빔을 발사하도록 조작한 것도. 모두 카인이었으니까. 그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아귀가 안 맞아 떨어지거든.
카인한테 함부로 손을 못 대는 이유는 예전에 말했듯이 [소동을 일으켰다가 추방당한다 → 영원히 아내들을 못 만나게 된다 → 좆망테크트리]라는 결말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내들을 설득 혹은 카인을 쓰러뜨리는 것을 위해 지금까지 참아왔는데……나보다 더 다혈질인 안즈가 카인에 대해 알게 된다면? 야만족을 전멸시킨 장본인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우야.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당장 달려가 카인을 조지려고 할 걸? 장담컨대 안즈는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야만족의 숲에 있던 괴물들과는 다르지만 같은 동족인 청록색 촉수 괴물을 보는 것만으로 평정(平靜)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데 만약 야만족을 모두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카인이 상쾌하게 웃으며 깝죽댄다면? 동족 다 죽어서 불쌍하다며 깝싹댄다면?
청록색 촉수 괴물을 죽였을 때처럼 엄청나게 날뛰겠지. 왕궁 중 일부가 날아가는 건 예삿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날뛰어도 카인을 죽일 수는 없지만……말썽과 소동을 동시에 일으킨 것도 모자라 현재의 왕이자 임금인 카인을 살해하려 했으니 왕족 시해죄까지 덤으로 얹어주겠지. 왕족 시해죄는 가차 없이 바로 사형(死刑)이다.
프레그넌트의 주민 중 한 명인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야만족인 안즈는 이곳에 있을 이유나 자격이 없었다. 내 아내라고 말하니 가족으로 취급되어 함께 있게 됐지만 여전히 취급은 영 아니올시다였지. 이런 상태에서 왕족 시해죄가 발생한다면 에누리 없이, 얄짤 없이 바로 사형이다. 나도 공범(共犯)으로 취급받아 사형을 받겠지.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카인에 대한 것은 비밀로 부쳐야 했다. 내가 사고를 일으키는 것도 곤란하지만 안즈가 말썽을 일으키는 것도 곤란하니까.
하아……정말 짜증이다. 사고를 친 놈은 내 아내들과 노닥거리고 있는데, 남이 일으킨 사고 때문에 목숨 걸고 도망쳐온 나는 모든 걸 빼앗긴 것도 모자라 이곳에서 쫓겨나지 않도록 숨죽인 채 있어야 한다니……뭐가 권선징악(勸善懲惡)이야 시발! 그런 건 애들 동화나 애니메이션 속에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깊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낡은 천장이었지만 저것도 계속 보다 보니 적응이 되는군. 마리아가 정신지배를 풀어 나를 초대한 거라면 좋겠는데……. 그래야 카인 같은 방해꾼 없이 대화를 진행할 수 있을 테니까.
오늘 밤에 있을 대화에 부디 방해꾼이 없기를 바라며 나는 잠에 들었다. 어차피 저녁을 먹기 전에 일어날 거였으니까. 카인이 조종한 거라면 오늘로 최종결전이 벌어질 테니 잠이나 실컷 자두자.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 작품 후기 ============================
또 뭣 같은 집안사정 때문에 아침 업로드를 하게 됐습니다. 1화부터 제 후기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고 제 다른 소설(아스라이를 포함한 다른 것들)을 읽으신 분들도 잘 아시겠지만……제 집안사정, 절대 좋지는 않습니다. 좋아서 아침 업로드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내들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네요. 이 와중에 프린세스 메이커까지 떠올려가며 온갖 생각을 다 하는 걸 보니 용케 이런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구나 싶습니다.
덧붙여 프린세스 메이커에서는 ‘무사수행’이라는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딸을 무사수행시키다니. 지금 같았으면 생각도 못 할 일이죠. 인권 문제부터 시작해 다치거나 아동성범죄 등. 당시의 게임 제작사는 정말 대단했구나 싶습니다.
예? 프린세스 메이커 엔딩에서 딸이 뭘로 됐냐고요? 어, 농부, 윤락업소녀,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하는 엔딩 등. 여왕 엔딩은 한 번도 못 봤네요.
왜 그딴 엔딩밖에 못 만들었냐고요? 아르바이트 시키고 능력치 올리는 것에만 신경 쓰다 보니 왕자랑 만나는 이벤트 많이 넘겼습니다 ㅋㅋㅋ 으아아아아ㅏ아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v대상인v님, NTR요소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못 드리겠네요. 지금까지 뭣 모르고 하반신을 여기저기 박아댄 것부터 시작해 질펀한 섹스파티 등. 현실에서는 절대 즐길 수 없는 향락에 빠졌던 것부터 시작해 하렘 어드벤처가 어떤 곳인지 적극적으로 알아보려 하지 않은 여파가 NTR & 카인이라는 요소로 등장하게 됐습니다.
세린의 모습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기껏 현실에서 동떨어진 하렘 어드벤처로 왔는데 그 세상이 어떤 곳이며, 이 세상이 누구에 의해 창조된 건가 등을 적극적으로 알아보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저라도 자세히 알아보고 싶지는 않겠네요. 너무 자세히 알려고 하다간 다치는 경우가 많거든요.
뿐만 아니라 자세히 알려고 하다간 하렘 어드벤처라는 꿈의 세계(드림 월드)를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겁도 났을 겁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저라도 아마 세린과 비슷했을 겁니다. 낼 돈도 없지만 억만금을 낸다 쳐도 얻을 수 없는 이상향입니다. 누가 잃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런 삶에 빠져 백발의 여자의 정체, 하렘 어드벤처의 진실 등에 적극적으로 알아보지 않은 결과……이렇게 되어버렸네요.
물론 적극적으로 알아봤더라도 결과는 똑같았겠지만, 지금보다는 육체적·정신적 데미지를 덜 받았을 겁니다. 카인에 대한 대항책 or 그가 생각하는 목적 등을 좀 더 빨리 깨달았을 수도 있구요. 이 상황으로부터 얼른 벗어날 세린을 기대합니다.
아, 물론 아직 절망할 것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예? 절망이 곧 끝날 거 같이 적었으면서 왜 이걸 맨 마지막에 알리냐고요?
……레드썬!
고양이새벽님, 이것이 유열인가(꼬레가 유에쯔까) 모드-!!
코토미네 키레이가 참 변태 같지? 나도 좋아해.
아이원츄! 섹시코만도! 러브! 미! 두!
예? 갑자기 웬 유열 드립이냐고요? 테에에……주인공이 구르는 걸 좋아하는 새디스트가 아니었던 테츄까? 테아아아아……!!
드립은 이쯤 치고, 현재 상황을 그래프로 치자면 ‘아직도 내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끝 안 났고 진정한 의미로서의 절망은 시작도 안 한 상황입니다. 지금도 절망적이긴 하지만 진짜 절망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의 절망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우리의 만족도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만☆족할 수밖에 없어!
역시 키류 형이야! 팀 새티스팩션의 리더야!
그★만★둬
유희왕GX에서도 나오지 않습니까. 바닥에는 바닥이 있다는 사실. 지금도 절망적이지만 진짜 절망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만큼 세린의 반격과 활약도 눈부시겠지만……아직은 카인의 턴! 전속전진이다!!
이상입니다. 아침부터 이상한 걸 적느라 정신이 헤롱헤롱하네요. 이 힘든 정신, 약 빨고 열심히 후속편 적는 데에 쏟아 붓겠습니다. 여러분도 남은 평일 힘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