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4 「17-3 : 빼앗겨버린 아내들 (13)」 =========================
희망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아무리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보이기만 하면 그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희망이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이미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 알려준다. 일이 잘 해결되고 고민이 술술 풀리면 희망을 찾을 필요가 없으니까.
기적과 희망이라는 말 중에 그나마 친숙한 것은 희망 쪽이다.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奇蹟). 보통 사람들한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니까.
좀처럼 일어나지도 않는 기적에 모든 걸 걸기보다는 최대한 일을 성사시킬 수 있도록 희망을 가지는 게 훨씬 더 미래지향적이다. 적어도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은 했다는 뜻이잖아.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했지만 일을 못 이루었을 경우 나머지는 운이나 하늘, 세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故事成語).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이라는 말을 누구나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거라 생각한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현재 내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납치당한 것도 모자라 목숨 걸고 돌아온 고향, 프레그넌트는 괴물에 의해 박살이 나있었다.
마법과 마력, 코스튬 등이 사라진 가운데 기본적인 무기와 고가(高價)의 코스튬에 의지한 채 겨우 당도한 수도. 내 아내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왕궁으로 갔지만……그곳에는 카인이라는 남자한테 몸과 마음을 지배당하는 아내들밖에 없었다.
아내들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았으며 예전에 내가 지니고 있던 왕(임금)의 자격은 이미 박탈당한지 오래다. 본래대로라면 아내들을 되찾기 위해 카인과 싸워야 했으나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카인(백발의 여자)한테는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꿈에서 처음 봤던 하얀 머리의 여자. 그녀는 이 세상의 창조부터 시작해 나나 다른 여자들을 현실 세상에서 소환한 장본인이었다. 나한테 ‘더 변해라’ 같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늘 나한테 시련을 부여했다. 그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여행, 납치, 전투 등을 모조리 경험하게 됐지.
여행과 납치, 전투 덕분에 아내들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감사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을 멋대로 불러들여 가지고 놀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세상에 소환된 것은 내가 13번째. 그 전에 소환된 12명의 남자 + 여자들은 모조리 몰살당했다고 봐야겠지.
하얀 머리카락에 붉은색 눈동자. 척 봐도 하얀 머리의 여자와 똑같은 분위기였기에 카인이 그 여자라는 것은 단번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오히려 눈치 챌 수 있도록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지.
늘 꿈이나 뒤에서 흑막(黑幕)짓을 하던 년이 갑자기 ‘하렘 어드벤처’의 무대. 이 세상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니 왜 그런 짓을 하나 싶었다. 보통은 부하들을 시키거나 더 힘든 시련을 줘서 나를 괴롭힐 수도 있는데 왜 번거롭게 직접 나서나 싶었지.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어……정확히 말하자면 ‘싫어도 알 수밖에 없다’라고 표현해야겠지. 자기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가며 싸워왔던 나, 신세린은 모두의 남편이었다. 14명이나 되는 아내들은 나를 사랑하고 신뢰했고 나 또한 그들을 믿고 있었다. 우리는 부부였으니까.
그러나 이제 와서는 그것도 옛날이야기다. 2주 만에 발견한 아내들은 카인을 남편처럼 여기며 섬기고 있었다.
내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는 카인이 있었으며 나는 더 이상 남편도, 왕도 아니었다.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을 모조리 빼앗기게 됐는데 왜 카인이 나타났나는 이유를 모르면 그게 병신이었다.
그는 빼앗은 거였다. 내가 지금까지 일구어놓은 모든 것을 단숨에……. 아내들뿐만이 아니라 그녀들과 맺었던 사랑과 신뢰, 업적.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얻었던 왕의 지위와 권력까지 송두리째 빼앗겼고……나는 순식간에 버림받은 남편이 되어버렸다.
카인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의식이 흐릿해지며 그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로라의 말을 들었을 때는……절망적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게 된다.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카인한테 빠져들게 되며, 나와 함께 간직한 추억 따위는 단숨에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소중했던 남편이 단숨에 아무래도 좋은 사람, 뒈지든 말든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니. 그야말로 최악의 사태가 아니겠는가? 무슨 모함을 하는 것도 아냐 스스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빼앗을 수 있다니……. 그야말로 신(神)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러나……이미 몸과 마음을 빼앗겼다고 해서 내 아내들을 고분고분히 바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내 아내들을 돌려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아내들과 대화의 장을 가져 보려고도 했고 카인한테서 아내들을 되찾기 위한 방법도 생각했다. 결국 방법은 찾지 못했다만…….
앞서 말했듯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한 다음 나머지는 하늘이나 운에 맡겨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거니와, 대화를 가지려고 해도 스스로 거부했기에 억지로 할 수도 없었다만…….
카인을 죽일 수도 없지만 괜한 소동을 일으켜서 ‘너, 수도에서 추방!’이라는 결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만 했다. 곁에 있는 건 아니지만 그나마 같은 왕궁에 있으며 그녀들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서 쫓겨나 버리면……그걸로 끝. 아내들의 목소리는커녕 모습조차 영원히 볼 수 없는 참혹한 엔딩을 맞이하겠지.
아무리 힘들고 더러워도 아내들을 버린 채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기적과 희망 중 그나마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건 희망이지만, 그 희망도 최소한의 조건을 갖춘 후에 바랄 수 있는 거니까. 아무것도 안 한 채 기적만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잖냐…….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는 고사성어 또한 맞아떨어졌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있다는 뜻이며, 이는 위에서 말한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과 비슷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러니 나머지는 하늘과 운에 맡길 수밖에 없지.
……어, 잠깐만. 이 ‘하렘 어드벤처’에는 기독교나 불교, 천주교의 신에 해당하는 존재들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들의 교리를 따르고 포교(布敎)하는 종교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 말은 다시 말해……내가 앞서 말한 ‘하늘 = 신’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백발의 여자.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그녀한테 ‘내가 하는 일이 잘 되도록 힘 좀 써주세요’라고 부탁한다는 뜻이 되는데…….
……시발, 어지간히도 잘 들어주겠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한숨을 쉬며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바보짓도 이런 바보짓이 없지. 나를 여기까지 엿 먹인 상대한테 희망을 달라고 바라다니. 내가 카인이라도 안 주겠다 망할! 베라먹을!
내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다시금 큰 한숨을 쉰다. 프레그넌트는 폐허가 되었기에 그곳에는 더 이상 사람들이 살 수 없었다. 왕궁에 온 프레그넌트의 주민들은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피난민으로서 이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록 왕의 자리에서 강제적으로 내려간 사람이지만 본질은 프레그넌트의 주민이었기에 이곳에 머무를 권리가 있었다. 원래라면 아내들과 함께 있어야 했지만 모든 자리를 빼앗긴 지금, 내가 있을 곳은 허름하고 좁은 침실밖에 없었다.
프레그넌트의 주민들은 단체로 생활을 하니 그거보다는 낫다만……그렇다고 해서 내가 빼앗긴 것들에 대해 만족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그 개고생을 하며 일구어낸 걸 모조리 빼앗겼는데 이런 허름한 침실 얻었다며 자위나 하라고? 장난 빠냐?
그렇다고 이곳을 걷어차고 나갈 수도 없는 게 내 처량함을 더욱 더 부각시켰다. 이곳에서 나가버리면 정말로 아내들을 되찾을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니까. 푸대접을 받는 건 싫었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영영 못 보게 되는 것과 비교한다면 귀여운 수준이지.
자……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 오기 전부터 계속해서 생각하던 질문을 다시금 생각한다. 카인을 죽일 수도 없고 아내들과 대화의 장을 가질 수도 없다. 이대로 계속 여기 있을 수도 없고. 무언가를 하긴 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니. 이건 좀 심한데…….
그치만 그것들을 못 하는 이유는 내가 무능(無能)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정말 무능했더라면 아예 아무것도 일구어내지 못했을 테니까. 이 경우에는 상대가 너무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카인은 그저 손가락질 하나만으로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다. 나를 소환했던 것부터 시작해 아내들의 몸과 마음을 조종하는 것 따위는 일도 아니다. 지금 이렇게 내가 생각하고 쉴 수 있는 것 또한 그가 간섭을 안 해서 그런 거지. 그가 내 몸을 지배한다 치더라도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조차 않았다. 그는 이 세상의 신이니까.
앞서 말했지만……나는 카인이 나한테 무슨 짓을 안 한다고 해서 감사히 여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제 멋대로 사람을 소환해 죽이는 것부터 시작해 모든 사람들의 몸과 마음, 정신을 지배하며 가지고 노는데 그를 어째서 찬양해야 하는 걸까?
사람은 목숨과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의지(自由意志 ; Free will) 또한 가지고 있다. 그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자연스럽게 인권(人權)을 가지게 된다. 그 누구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인생이나 삶을 가지고 놀 권리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건 내가 살던 세상에서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카인은……이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소환당해 죽은 사람들부터 시작해 내 아내들, 괴물한테 죽은 사람들 등.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인생을 농락(籠絡)당했다. 이 세상의 신인 백발(白髮)의 여자. 카인 때문에 말이다.
말로는 자유의지, 인권 따위를 씨부리지만 실제로 절대자의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나약하디 나약한 생명체. 그게 바로 인간이었다. 그리고 나와 내 아내들……괴물들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카인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사람들)이었다.
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말일까? 무엇이든지 가능한 신이 ‘하렘 어드벤처’라는 무대에 올라와 온갖 미친 짓을 해도 난 막을 방법이 없었다. 오히려 저항하다 내 소중한 것들을 모조리 빼앗겨 이 좁고 허름하다 못해 더러운 방에 내려오게 됐지. 좌천(左遷)당한 느낌이 딱 이럴 것이리라…….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대로 영원히 카인의 주위를 맴돌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못한 채 영원히 이곳에 머무르다간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넌다 치더라도 무언가 하고 건너야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적이나 희망만을 기다리다간……절망만이 나를 찾아오겠지.
나를 조급하게 만드는 것은 아내들 때문이었지만……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들 중 하나는 그녀들의 임신과 출산 시기였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7개월로 접어 들어가는 아내들의 배. 임신 시기를 동일하게 6개월로 맞추어 놓았기에 모두 동시에 7개월로 접어 들어간다.
임신 시기가 9~10개월에 도달하면 슬슬 출산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 나와 아내들의 소중한 아기. 사랑의 결실이 저 새끼의 손에 넘어간다고?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아내들을 빼앗겼는데 아기들까지 모조리 바치게 됐는데 안 미칠 리가 있겠는가?
농담 삼아 영양 만점 자지 밀크나 좆물 우유라는 말을 하고는 했지만……내 소중한 아기들이 저놈의 자지에서 나온 정액을 맛있게 먹었다고 생각하니 분노로 몸이 덜덜 떨렸다. 아내들뿐만이 아니라 머지않아 태어날 아기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카인은 죽여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치만 어떻게? 방법이 문제였다. 예전에 그 시커먼 공간에 끌려가 말빨만으로 처발린 경험이 있는 나다. 어떻게 죽이느냐가 문제지. 내가 가진 M16A1과 K2 소총은 쓸 수 없었다. 불러내도 나오지 않았지.
애초에……신인 카인이 소총에 죽을 거라는 생각도 안 들지만, 자기가 만든 무기를 자기한테 겨누도록 놔둘 놈도 아니었다. 은근히 속 좁은 건 나랑 같군.
카인과 공통된 점은 속 좁은 것과 남자라는 점. 그 정도밖에 없었다. 그놈은 현재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앉아 모두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고, 나는 바라지도 않는 일에 휘말려 여기까지 떨어져버렸다. 그놈과 공통점을 가졌다고 해서 그걸 소중하게 여길 생각도, 기쁘게 느낄 마음도 없었다.
……분하다. 너무나 분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모든 걸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니! 그저 입 닥치고 아내들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다니! 너무나 분해서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안 하니 사람들은 ‘ㅋㅋㅋ 저 새끼(날 가리킴) 완전 병신이잖아? 쪼다 아냐? 존나 찌질하네! 지 아내랑 권력 다 빼앗겼는데 가만히 있다니! 으이구, 그러니까 그런 일을 당하는 거지! 남자답게 싸울 생각은 없냐? 자지는 달려 있냐? 뭐 하러 달고 있냐? 확 잘라버리고 여자나 되지 그러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
근데 그거 아냐?
가장 분하고 슬픈 건 바로 나다! 보고 있는 사람들마저 그렇게 비웃을 정도인데 당사자인 나는? 개고생했지, 목숨 걸고 싸웠지, 원하지 않는 일에 휘말렸지! 그래도 아내들을 생각하며 모든 일을 함께 해결했는데 그 결과가 요 모양 요 꼬라지라니! 모든 걸 빼앗겨 이런 곳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다니! 이 분한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절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카인 죽이라고? 못 죽인다! 총을 쏴도 피하고 맞지도 않는 놈을 어떻게!?
아내들을 구하라고? 대화를 나누려 하면 스스로 피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하라고? 방법 좀 가르쳐다오, 실행이나 좀 해보게!
안 되잖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도 실패라는 결과밖에 나오지 않는데 나보고 뭘 어떻게 하란 말이냐!? 실패하고 죽으라고? 저 빌어먹을 놈의 손이 내 아내들을 어루만지고, 놈의 다리 사이에 달린 자지가 아내들의 꽃잎을 유린(蹂躪)하는 걸 지켜본 채 뒈지라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분노와 허탈함. 증오와 답답함이 다시금 눈물로 모습을 바꿔 눈에서 흘러내린다. 너무 울어대서 요즘에는 눈물샘이 고장 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눈물을 흘려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지만……반대로 말하자면 안 운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마음껏 울기로 결정했었지. 눈물을 흘리며 생각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대체 왜?
대체 왜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백발의 여자였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은 여전히 미스테리였다.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나한테 ‘더 변해라’라고 한 적이 있었지. 시커먼 공간에서는 ‘언제나 내(신세린)가 거기에 있었다’라고 말했다. 하는 행동도 의문이었지만 내뱉는 말도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할까? 나를 소환해서 마법이나 안을 수 있는 여자를 잔뜩 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모든 걸 빼앗아가지?
아니, 이런 짓을 할 거 같았으면 애초에 소환 자체를 하지 말았어야지! 언제는 세상 모든 것을 줄 것 마냥 행동하더니 그걸 모조리! 전부 다 빼앗아 가는 건데?
궁금한 게 이것만 있는 줄 아냐? 이거 외에도 많거든? 그녀가 한 짓은 너무나 이상했다! 레벨 10 때 아이라를 만나기 위한 여행을 주선했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쳐. 프레그넌트의 숲에 있던 초록색 촉수 괴물은 당시의 나한테는 더 이상 짭짤한 경험치를 주지 못했었으니까. 여행으로 인해 레벨 업을 하게 됐으니 그 자체는 좋다 쳐.
그치만 왜? 늘 뒤에서 누군가를 조종하거나 사주하던 그녀가 ‘카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순간, 이미 게임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영웅과 같은 등장과 활약. 아내들은 그한테 홀딱 빠졌고 나는 순식간에 모든 걸 다 잃었지. 빼앗겼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온갖 개고생을 하며 얻은 것을 한 방에 빼앗아갈 생각이었다면 대체 왜 처음부터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자기가 직접 나와서 괴물을 모조리 도륙(屠戮)내버리고 영웅이 되면 그만일 것을, 왜 내가 일구어 놓은 것들을 모조리 다 빼앗은 거지? 왜?
빼앗긴 것은 억울하고 분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야, 카인은 명색이 신이잖아.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카인이 대체 왜 사람들을 부른 거지? 단순히 가지고 놀고 싶어서? 나처럼 존나 개고생시킨 후에 그 성과를 가지고 싶어서 사람들을 소환한 걸까?
왜 처음부터 스스로 나서지 않은 거지? 고생할 필요도 없잖아! 그냥 괴물들 죽으라 하면 죽을 거고, 자기한테 다리를 벌리라고 하면 모든 여자들이 다리를 활짝 벌릴 텐데? 전지전능(全知全能)에 가까운 능력을 지닌 그가 도대체 왜 대부분의 일이 끝난 후에 나온 걸까?
“……전지전능에 가깝다?”
난 조금 전에 내가 했던 생각을 그대로 읊었다. 생각 자체는 별 특이한 부분이 없는 것이었다. 맞잖아. 이 세상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멋대로 모두 다 지배할 수 있는 놈을 전지전능하다고 불러야지, 그 외에 뭐라고 불러? 속 좁고 시커먼 음흉한 놈? 음, 그것도 맞긴 맞는 말이군.
같은 말을 몇 번이나 읊조리던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괴물들이 성벽에 공격을 가하기 직전까지 생각하던 것. 뇌리를 스쳐 지나갔던 무언가와 매우 비슷한 성질의 것을 생각해냈기 때문이었다.
“전지전능에 가깝지만……?”
가깝다. 한없이 가깝다. 이 세상을 창조한 능력! 절대자로서 군림하는 그한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없겠지! 하지만…….
“전지전능하지는 않다……?”
스스로 낸 결론이었지만 머리를 감싸던 손은 어느새 입을 감싸고 있었다. 세상에……방금 내가 뭐라고 말한 거지? 내가 말해놓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웠지만 어떻게든 기억의 바다에 들어간 나는 깊은 곳까지 헤엄치며 온갖 정보를 끌어 모았다. 괴물들의 습격 전에 느꼈던 ‘그것’.
내가 지금 처한 상황부터 시작해 ‘내가 왜 그놈(그년)한테 소환 당했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그것’. 그것을 다시금 중얼거렸다.
“전지전능에 가깝지만 전지전능하지는 않다……?”
바로 그거였다!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쉽게 멈추지 않았다. 망할! 침대에 다시금 앉은 나는 부들대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다시금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 전지전능하지 않다. 그는 전지전능하지 않는 존재였다.
이야기가 좀 엇나가지만……초등학생들은 유치하면서도 단순했다. 누군가 나쁜 욕이나 험담을 하면 ‘반사!’ 혹은 ‘무지개 반사!’라며 그걸 받아치기도 했다. 그뿐일까. 숫자 중에 제일 큰 9를 가장 큰 가치로 여기기도 했지.
누군가 기준을 정하면 ‘나는 그것보다 9999배 더 큰 XX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는 등 과장이 섞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9배나 99배라니. 너무 초등학생 같은 대답이지 않은가? 실제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도 궁금했지만, 9배라니. 그게 초등학생의 한계가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높은 것이라도 9. 즉, 한 자리 수 중 가장 높은 숫자를 가장 높은 가치로 책정할 수밖에 없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