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3 「17-2 : 빼앗겨버린 아내들 (12)」 =========================
아침만 하더라도 하녀들한테 남은 밥을 부탁해 해결했었는데……점심이 되니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나와 안즈는 현재 경비대원들이나 왕궁 관련 종사자들이 밥을 먹는 식당에 있었다. 식단은 빵과 스프 외에 고기도 있었지만……식단의 업그레이드보다는 ‘왜 이렇게 됐지?’라는 것에 더 신경이 쓰였다.
여섯 마리의 괴물을 쓰러뜨렸지만 나는 그 사실에 대해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내 목숨을 걱정하며 피신한 안즈 때문이었다.
모든 아내들을 빼앗겼는데 돈이나 지위에 연연할 리가 없잖냐. 내가 왕에서 단숨에 불청객, 방해되는 놈으로 전락할 걸 보면 모르냐? 인생 한 방이라니? 그 한 방이 좋은 쪽, 나쁜 쪽으로 다 쓰일 수 있다는 게 문제지만…….
왕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괴물의 습격에서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왕궁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왕궁은 커다란 궁궐이었지만 동시에 피난처(避難處)의 역할도 하고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그곳에 모인 걸 보니 괜히 걱정이 된다. 혹시……안즈가 다치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이런 불길한 생각은 안 하는 게 제일 좋지만……사람이 걱정을 안 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냐? 당장 내 눈앞에 있는 미래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 걱정하며 살아야지. 인생이 자기 마음 먹은 대로 술술 풀리면 누가 인생이 생각대로 잘 안 풀린다며 술을 마시겠냐?
게다가 걱정을 안 할래 야 안 할 수가 없는 판국이었다. 내가 야만족한테 잡혀 있을 때만 해도 그랬잖아. 아내들이 나를 버렸다는 사실부터 시작해 괴물들의 파워 업. 마법과 코스튬의 소멸 등. 생각지도 못한 엿 먹이기 이벤트가 그렇게 다양하게 일어났는데 걱정을 하지 말라니.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안즈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피신을 위해 왕궁 안에까지 들어간 사람들과 달리 안즈는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하얀 비키니 아머를 입고 있던 안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빠르게 뛰어왔다. 영화 같은 곳에서는 내 품에 뛰어 들어와야 했지만 당시 내 상태는 꽤 지친 상태였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괜찮냐며 물으니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놈들의 공격을 피하느라 이리 저리 뒹군 것도 있었지만 그건 내가 한 행동으로 인한 결과였으니까. 놈들의 촉수에 맞지도 않았고 그 빔에 닿지도 않았다. 닿으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냐?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울먹거리는 안즈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원래대로라면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며 화를 내야 할 대목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무 말도 없이 내가 머리 쓰다듬는 것을 받아들여줬다. 만약 죽었더라면 이런 것도 불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점심때가 되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싶었다. 또 하녀들이 있는 곳에 가 밥을 사정해야 하나?
마리아와 아테나가 있는 식사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건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밥을 무조건 얻어먹어야 한다는 법칙은 없었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돈도 있었지만 요 근래의 여행과 전투를 통해 돈이 제법 두둑히 쌓인 상태였으니까.
계속되는 여행과 불안으로 힘들어 하던 안즈를 보니 맛있는 걸 사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즈의 육체 상태는 건강해 보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야만족의 죽음과 전멸로 인해 그녀의 정신 상태는 피폐 그 자체였다.
정신이 멀쩡하면 몸이 다치더라도 희망을 가진 채 살아갈 수 있지만, 정신이 망가지면 몸도 정신에 따라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한다. 이미 나한테 있어 소중한 사람이 된 안즈를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에 간만에 외식을 할까 생각했다. 안즈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물어봐야지. 안즈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물어보려는 찰나였다.
“신세린.”
귀에 익은 목소리이기도 했지만……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기에 바로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이미 빼앗긴 아내들 중 마지막 아내. 헬레나가 여왕기사단의 단원을 동반한 채 서 있었다.
“헤, 헬레나……!”
숨이 탁 막힌다. 내 아내들이 나한테 말을 걸다니! 내 이름을 불러주다니……!
로라와 대화한 후로는 늘 카인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던 아내들이었기에 제대로 대화조차 할 수 없었는데 설마 그녀들 쪽에서 먼저 대화를 걸어줄 줄이야! 너무나 감격스러웠기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가 나를 부른 이유는 모르겠지만……중요한 것은 내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지만……헬레나의 눈은 결코 호의적인 시선을 띠고 있지 않았다.
나름 기뻐했지만 그 시선을 보자 다시금 흥분이 가라앉는다. 싸늘한 시선. 내가 맨 처음 왕궁에 왔을 때 헬레나는 나한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사모하던 마리아와 아테나를 나 같은 놈팽이가 가로 챘었기 때문이었지. 뭐……내가 놈팽이라는 사실에는 별 거부감이 없었다. 맞긴 맞는 말이었거든.
대련을 핑계 삼아 나를 팰 정도로 싫어하긴 했지만……지금 헬레나가 보내는 시선은 그것보다 훨씬 더 심한 것이었다. 증오를 넘은 혐오감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바퀴벌레 같은 해충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기에 마음이 아파온다. 내 곁에 있던 소중한 아내가 어쩌다 저런 눈으로 나를 보게 되었을까?
……어쩌다는 무슨 어쩌다야? 전부 다 카인 때문이지! 원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처리할 수 없는 상태라니! 진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군. 카인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왜 불렀냐?”
이제 와서 존댓말을 쓸 생각은 없었다. 존댓말 쓴다고 좋게 봐주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저런 눈빛을 받는데 존댓말을 쓰면 괜히 기세등등해질 거 같았거든.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한 것도 억울한데 미쳤다고 쟤네들 기분 좋게 만들어 주냐?
헬레나는 내 반말에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속이 넓어서 그렇다기보다는 ‘못 배워먹은 놈이 하는 짓이라고 해봤자 그 정도겠지’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
그래 못 배워먹어서 이렇습니다 빌어먹을 년아. 니가 누구 덕분에 마리아와 아테나한테 마음을 고백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냐? 내 덕분이잖아 망할 년아!
이런 상황이 되니 웃긴 게 생각났다. 세뇌·지배·조종·조작 등. 원래는 동료 혹은 연인이었던 사람들이 누군가의 농간에 의해 서로 싸우게 된 상황은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써먹는 클리셰다. 이건 이전에도 말한 적이 있었지.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주인공과의 전투에 의해 패배한 후 원래 정신으로 되돌아온다. 이건 게임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벤트였다. 동료나 친구가 조종당하고 있다면 그 원인이 되는 기계, 장신구 등을 파괴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런 기계가 없다 치더라도 때려눕히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걸 보고 무지 웃었지. 왜냐고?
야, 생각을 해봐.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되돌아오지 않지만 주인공이 때려눕히면 원 상태로 돌아오도록 세팅을 해놓다니. 이거 노벨상감 아니냐? 주인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때리거나, 아예 주인공이 죽여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장치를 하냐?
아, 그래.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주인공의 진심과 사랑이 담긴 공격에 의해 제정신을 되찾았습니다’라는 게 제일 일반적이지.
그치만 말이다. 소중한 사람이라면서 죽일 기세로 패면 그 자체에서 이미 아웃이잖냐. 구하기 위해 때리는 건 좋지만 그러다 죽여 버리면 살인자가 되는데? 보고 있는 내가 ‘어, 옛날 동료한테 저런 거 써도 됨?’이라며 놀랄 정도니 어련하겠냐?
두 번째는 ‘본인의 의지로 세뇌나 조작에서 벗어난다’였다. 주인공을 쓰러뜨리거나 하면 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한다.
‘제발 그만해! 기억해내! 우린 동료야! 친구였다고! 우리끼리 싸울 필요는 세상 어디에도 없단 말이야! 우리가 함께 지냈던 시간! 함께 만들었던 추억! 그 모든 것들을 정말 잊어버린 거야? 정말 잊은 거냐고!?’
원래라면 ‘응ㅋㅋㅋ 잊었음’이라며 쿨하게 죽여야 하지만……그러면 작품 진행이 안 되잖냐. 그런 식으로 만들었다간 바로 독자들한테 몰매를 맞을 거다.
주인공이 죽는 작품이라니. 어지간해서는 그런 작품이 잘 안 나온단 말이다……. 그런 부류의 작품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마. 지금은 세뇌 및 정신조작을 푸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이니까.
소설 진행은 안 하고 뭘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씨부리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이 소설을 비롯해 대부분의 작품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클리셰로 다 해석할 수 있다. 쉬운 이해와 몰입감을 위해서 이렇게 진행하는 것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소, 소설?
쉬운 이해?
몰입감? 난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아앗, 머, 머리가……데, 데프프!
그래, 맞아. 주인공이 하소연하는 부분까지 말했었지? 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을 할 때쯤이면 대부분의 주인공은 동료한테 처발린 이후다. 안 그런 경우도 있겠다만.
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며 정에 호소하면 세뇌나 조종을 받는 동료는 과거 회상을 하며 당황해하기 시작한다. 세뇌에 의해 조작된 기억이나 추억은 함께 겪었던 경험들과 서로 충돌하게 되며, 동료는 ‘나, 나는……나는……!’ 이라는 말과 함께 불안한 정신 상태와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비록 주인공의 호소가 있긴 했지만 주인공이 직접 때리거나 한 게 아니라 말로 인해 스스로 고민하고 세뇌와 싸우게 되는 것이니 ‘본인의 의지로 세뇌나 조종에서 벗어난다’라는 말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결국 그렇게 고민하다가 진실된 기억을 본 후 스스로 세뇌를 깨부수는 것도 멋진 클리셰 중 하나지.
마지막 방법은 ‘제3자에 의한 강제적인 세뇌 및 조종 해제’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2번에서 말한 것처럼 주인공이 호소하면 대부분의 동료는 ‘나, 나는……이놈을 없애야 해……!’와 같은 말을 하며 허둥댄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목숨을 앗아갈 수 없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지.
그때 세뇌나 조종을 하고 있는 사람이 와서는 ‘쓸모없는 놈……죽어라!’ 같은 말을 지껄이며 팀킬을 해댄다. 자기의 부하나 다름없는 사람한테 ‘쓸모없다’, ‘죽어라’, ‘너 같은 놈은 주인공을 쓰러뜨리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등 온갖 막말과 폭언을 퍼붓는 건 덤이다.
세뇌하고 있던 사람의 육체적·정신적 공격에 의해 엉망진창이 된 동료. 주인공은 동료의 이름을 부르며 곁으로 가고 동료는 그제서야 주인공의 이름과 정체를 기억해내며 눈물을 흘린다.
뒤늦은 참회의 눈물이지만 주인공은 그런 동료를 보며 ‘우린 동료잖아……신경 쓰지 마’같은 말을 한다. 그렇게 세뇌가 풀리며 화해를 하게 되는 게 일반적인 이벤트지.
보스나 다른 놈들. 제3자의 팀킬, 바보짓에 의해 세뇌가 풀리며 주인공과 동료의 우정이 더욱 더 돈독하게 된다. 까놓고 말해 동료의 세뇌를 풀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우정까지 돈독하게 만들었으니 악당 입장에서는 뭐 하나 남는 게 없는 장사나 마찬가지였다.
내 아내들이 카인에 의해 지배받고 있긴 했지만……그래도 한 줄기의 희망을 품긴 했었다. 정신지배나 세뇌를 받고 있는 거라면 푸는 방법은 간단하다. 바로 그런 지배나 세뇌를 하고 있는 사람. 쉽게 말해 술사(術士)를 죽이는 거지.
하지만 카인은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절대자였으며 그러한 존재를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인정하기는 죽기보다 싫었지만……내 힘으로는 아내들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을 죽일 방법 따위는 나한테 없었으니까. 오히려 역관광을 안 당하면 그게 기적이겠지.
그런 곳까지 생각이 미치니 위에서 말했던 ‘세뇌를 푸는 방법’이 저절로 떠올랐다. 내가 풀 수 없고 카인이 풀어주지 않는다면……아내들이 스스로 풀 수는 없을까 싶었다. 그녀들과 내가 보낸 사랑과 시간, 추억, 기억 등은 매우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그녀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거의 없었지만……그래도 믿고 있었고, 믿고 싶었다. 나와 보냈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며 세뇌나 정신지배 및 조작에서 풀리기를 진심으로 바랐지만…….
그 결과가 바로 저 싸늘한 시선이다. 풀리기는 개뿔. 이전보다 더 심해진 시선을 받으니 한탄이 나온다. 아니 씨발, 내가 온갖 좋은 일을 하면 뭐하니? 이런 식으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데. 내가 대체 뭐가 좋다고 헬레나 소원을 들어주고 그랬을까? 후회막심이 따로 없다.
늘 마리아와 아테나를 모시며 그들의 인격과 행동을 흠모하게 된 헬레나. 레즈비언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하곤 했지만……레즈비언이라고 해서 차별이나 탄압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온갖 여인들을 범한 나는 대역죄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혜린이와 희진이, 은채는 강간에 가까웠기에 내가 누굴 보고 뭐라고 할 자격도 없고.
마리아와 아테나를 사모하는 마음을 털어놓아 그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까지 해줬는데……그 결과가 저 싸늘한 시선이라니. 시선도 참을 수 없었지만 더욱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아내들의 상태였다.
아니, 내가 그렇게 많은 일을 해줬는데……너희도 한 번 정도는 나를 위해 힘써주면 안 되냐? 자기의 기억이나 추억을 되짚어보며 신세린이라는 존재에 대한 감정과 마음을 좀 떠올려보면 안 되냔 말이다.
무리한 걸 요구한다고? 내 아내들도 나한테 무리한 걸 요구했거든요? 난 지금까지 그녀들이 바라는 대부분의 것을 다 들어주었다. 완벽하게 이루기 힘든 부탁은 그나마 근접하는 수준까지 들어주기도 했고. 보상을 바라서 했던 건 아니었다. 소중한 내 아내들을 위해 이것 하나 못 해줄까 하는 심정으로 부탁을 들어줬었지.
그래도 야……사람이라면 양심이 좀 있어야지! 이런 때에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다시금 원상태로 돌아오면 오죽 좋냐? 나도 좋고 자기들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니던가?
아, 카인 엿 먹일 수도 있으니 일석삼조(一石三鳥)군.
나에 대한 사랑과 추억으로 그 강인한 세뇌를 부순 뒤, 나를 향해 달려오는 아내의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모른다! 실현 가능성은 적었지만 그나마 몇 안 되는 희망 중 하나였기에 더더욱 간절히 바랐고, 조금 전에 내 이름을 불렀을 때는 ‘서, 설마……설마……!!’라며 가슴까지 설렜었지.
물론 현실은 그딴 거 없습니다 오 ^0^/
내 아내들은 일편단심 카인이랍니다 오 \^0^/
……좆망.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현실은 나한테 ‘병신 ㅋㅋㅋ 바랄 걸 바라야지. 니 아내들이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널 기억해낼 거 같냐? 어휴, 오덕 새끼! 덕내(덕후의 냄새. 차별적인 단어니 사용에 주의하자. 상처받는다) 난다, 변태 새꺄!’라며 냉혹한 돌직구만을 던지고 있었다.
자기 의지로 세뇌를 풀어? 카인의 정신지배 및 조작에서 벗어나? 하이고……내가 바보였다. 그게 됐더라면 이미 옛날 옛적에 세뇌를 풀었겠지!
그뿐이랴? 나와 함께 힘을 모아 카인과 싸우며 ‘이 세상의 미래는 우리가 결정한다! 우리의 세상에 너 같이 병신 같은 신은 필요 없다!’라는 말을 내뱉었겠지.
중2병 냄새 난다고? 말 안 해도 잘 안다! 혹시나 세뇌가 풀려 함께 싸우는 이벤트가 일어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말을 해야 멋진 말 했다고 소문이 날까 하는 생각까지 다 했었는데……모조리 쓸모없게 될 줄이야. 끄흑……!!
뭐? 그런 거 생각할 시간에 아내들을 되찾을 방법이나 더 연구해보라고? 연구한 결과가 저거라니까? 이미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한 상태였다. 오히려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이거밖에 안 되는 건가 하고 자기혐오에 빠졌던 적도 있을 정도다!
열심히 노력해서 남 좋은 일은 다 해줬지만, 정작 내가 힘들고 위험할 때는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도 않고 세뇌에서 풀리려는 노력조차 안 하다니. 내 인생 퀄리티가 바닥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하잖냐…….
“경비대원들한테 들었다. 오전에 괴물을 퇴치했다고 말이다.”
내 정신상태가 박살이 나든 가루가 되든 상관없이 헬레나는 말을 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괴물 쓰러뜨렸다고 욕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기만 해봐라. 마을 사람들이 뒤지든 말든 나는 내 할 일만 할 테니까. 이번에는 안즈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안즈. 너는 경비대원들을 도와 백성들의 피신(避身)을 도왔다고 들었다.”
안즈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짓은 아니잖아. 부정할 것도 아니고. 경비대원들한테 들었다는 말을 들으니 오전에 본 그녀들이 생각났다. 걔들 말하는 거겠지? 내가 괴물을 다 물리친 후에 왔던 애들.
그녀들은 경비대원을 대신해 싸운 것뿐만 아니라 괴물들을 여섯 마리나 쓰러뜨린 것에 대해 매우 깊은 감사를 표했다. 내가 쓰러뜨리긴 했지만 인사나 사례를 바란 것은 아니었기에 좀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백성들의 피신을 돕느라 늦은 것이었기에 그녀들을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늦게 와준 덕분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마음껏 싸울 수 있었으니까. 사례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 당시에는 안즈가 걱정이 됐기에 괜찮다며 거절했었다. 사례 받으려고 싸운 거였다면 한 마리 당 얼마씩 돈을 받았겠지. 돈은 충분히 있었으니까.
안즈가 안전한가를 확인한 후에는 맛있는 것을 사 먹일 생각하느라 다른 건 모조리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늦게 온 경비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오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헬레나는 냉정하게 할 말만을 읊어댔다.
“경비대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레이프와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싸웠을 뿐만 아니라 응당 받아야 할 사례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늦게 온 경비대원들은 너희의 활약에 대한 보수 및 사례를 원했고 마리아님 또한 인자함과 자애로움을 베푸시기로 결정하셨다.”
선행(善行)을 베풀면 돌아온다고 했는데……그게 사실이었네. 전혀 예상치도 않은 말에 나와 안즈는 눈을 크게 떴다. 나중에 그 경비대원들한테 고맙다고 해야겠군. 사례가 필요 없다고 한 나를 이렇게까지 챙겨줬으니 말이다.
그들에 대한 고마움이 마음속에서 피어났지만 그보다는 ‘마리아’라는 이름에 더 관심이 쏠렸다. 이렇게 헬레나를 통해 마리아의 말이나 행동을 전해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현 시간부로 너희는 경비대원들이 식사를 하는 곳에서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 너희는 왕궁의 경비대원들과 같은 수준의 대우를 받게 되며, 앞으로도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정진하도록. 이상이다.”
거창하게 말했지만……쉽게 말해 ‘하녀 있는 곳에서 밥 빌어서 먹느라 힘들었지? 앞으로는 경비대원들이 밥 먹는 곳에서 먹어ㅎㅎㅎ 사람들을 구하느라 노력했으니 대원들이랑 같은 대우도 받게 해줄게. 앞으로도 노력해서 이 수도를 지키렴 ㅋㅋㅋ’이었다. 안즈는 그 말이 마치자마자 인상이 험악해졌다.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헬레나의 표독(慓毒)한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안즈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와, 엄청나다……여자들끼리 싸우면 이런 느낌이구나…….
“지금 장난해!? 밥? 고작 우리가 밥 하나 얻어먹자고 사람들을 피난시키고 싸운 줄 알아!?”
안즈의 말은 그야말로 돌직구였다. 경비대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된 것 자체는 좋은 일이다. 하녀들이 일하는 곳에 가서 밥을 빌어먹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사람들을 돕느라 노력한 것에 대한 포상 치고는 너무나 섭섭한 것이었다. 고작 밥 하나 먹으려고 그 고생을 한 건 아니었는데…….
“흥……말귀를 못 알아듣는 계집이로군. 그런 싸구려 갑옷을 입은 촌년한테까지 자상함을 베푸신 마리아님께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감히 대들다니……!!”
“뭐, 뭐야……!?”
그, 그건 좀 심한데……! 아무리 그래도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지. 인신공격(人身攻擊)을 할 것까지는 없잖아……!! 난 속으로 헬레나가 말한 것에 대해 맹렬하게 반발했다.
초보자용 비키니 아머는 하얀색이다. 그만큼 때가 타기 쉬우며 눈에도 잘 띄게 된다. 마력이 많이 부족한 안즈는 옷을 깨끗하게 만드는 곳에까지 마력을 쓸 정도로 여유롭지 못했기에 내가 도와주고는 했지. 조금 전까지 괴물과 싸우느라 안즈의 옷에 신경을 쓰지 못했었는데 하필이면 지금 그걸 지적할 줄이야…….
안즈는 기가 막혔는지 할 말을 잃은 상태였고 헬레나는 그걸 패배한 자의 침묵으로 받아들였는지 계속 입을 열었다.
“프레그넌트의 주민들이 이곳에 온 후부터 식량 분배가 많이 어려워졌다.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고향을 잃은 사람들까지 봐주느라 식사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지. 그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왕님은 너 같은 촌년한테까지 은혜를 베푸셨다! 멍청한 촌년이라면 위대한 여왕님의 결정에 감사하며 따라라!”
그 말에 안즈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으윽! 저러다 폭발하면 진짜 좆 된다! 그런 생각이 들자 어떻게든 이 상황을 넘겨야 한다는 생각이 내 몸을 움직이게 했다.
열 받는 처사이긴 했지만 헬레나의 말은 전혀 틀린 곳이 없었다. 무작정 레이프로 온 프레그넌트의 주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식량과 물자가 들어간다. 많은 사람들의 식사를 챙겨야 하니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을 만들게 되며 질은 당연히 떨어지게 된다.
대량생산을 함에도 불구하고 음식의 질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산업화가 시작된 이후였으니까. 이곳은 아직 중세시대였으며 그 배경 또한 판타지였기에 기계를 통한 산업화 따위는 이루어질 리가 만무했다.
식사의 질도 문제지만 식자재(食資材)의 소비도 결코 우습게 볼 수는 없었다. 70~80명이 사망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300명을 넘는 인구수다. 그만큼의 사람을 먹이려면 식자재 또한 급속하게 소모된다. 그러한 모든 부담을 왕궁에서 맡고 있는 상황.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프레그넌트의 주민들한테 피해가 미칠 거 같았다.
분노를 푸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피해가 끼치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기에 재빨리 안즈의 허리를 손으로 감싸며 추임새를 넣었다.
“하, 하하! 응, 알았어! 경비대 식당에 가서 밥 먹으면 된다 이거지? 정말 고마워! 마리아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야, 야! 놔! 이거 놓으라고! 햐, 햐읏!? 가……가슴 만지지 마 멍청아!”
아, 좀! 제발 좀 가만히 있어라! 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데 자유분방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단 말이다! 헬레나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흥. 왕의 자리를 잃어버린 병신놈이 촌년보다 더 말귀를 잘 알아듣다니. 이거야 원……한 편의 익살극이 따로 없군. 뭐, 좋다. 병사가 먹는 것과 같은 것이라도 여왕님께서 하사하신 것이다. 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도록.”
그 말을 끝으로 헬레나는 뒤를 돌았다. 정말 단 한 순간의 미련조차 보이지 않는 헬레나를 보니 마음이 찡해진다. 망할……왕은 아니어도 좋다. 되기를 바라서 된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남편은……너의 남편이었던 나한테 어떻게 그렇게 차디차게 굴 수 있냐? 왕은 아니어도 너의 남편이고는 싶었건만…….
그 순간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 헬레나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마음에 걸리던 것을 다급히 물었다.
“자, 잠깐만! 다친 사람은!?”
“응?”
헬레나가 뒤를 돌았다. 하아……날 떠난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이렇게 조급하게 행동하다니. 존나 찌질하군……. 그래도 묻고 싶은 것이었기에 이왕 물을 거 헬레나한테 듣자 싶었다.
“피신하다 다치거나 그……죽은 사람들은 없는 거 맞지? 응?”
헬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조차 하기 싫다는 건가……. 하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낭보(朗報)를 들으니 마음이 절로 기뻐진다. 다행이다……죽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 다행이야……!!
“물을 건 그게 다인가? 난 바쁜 몸이다. 그런 건 병사한테 묻도록.”
“아, 그……!!”
문장으로 완성되지도 않은 말을 꺼내자 헬레나는 가만히 선 채 날 본다. 망할……. 내 말주변이 없음을 저주하며 겨우 말 한 마디를 짜냈다.
“그……알려주러 와서 고마워. 오랜만에 이야기 나눠서……즐거웠어.”
헬레나는 코웃음조차 치지 않은 채 냉정하게 뒤를 돌았다. 그녀의 커다란 엉덩이와 둔부가 떠나가는 걸 보니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대답은 둘째 치더라도 코웃음조차 치지 않다니. 헬레나라는 사람한테 있어 신세린이란 존재가 얼마나 가치 없는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반응이었다.
나와 안즈는 경비대원들이 식사를 나누는 곳에 가 점심을 먹었다. 안즈는 화를 냈고 난 그걸 달래주며 너무 화내지 말라고 했다. 하녀들이 먹는 밥보다는 그나마 좀 나았기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마리아가 신경써줬다는 말을 생각하니 조금이지만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이 없다는 것 또한 기쁜 소식이었고.
작지만 기쁜 소식들이 하나씩 쌓이는 느낌이었기에 그날의 밥은 평소보다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탁 까놓고 말해 세뇌 클리셰는 영 안 좋아합니다. 결말이 눈에 뻔히 보이거든요. 세뇌에 가까운 능력을 마법 버전으로 만든 게 '자지의 맹세'지만, 그 자지의 맹세도 현재는 못 쓰는 상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온 게 얼마나 답답한지는 세린의 마음과 행동을 보시면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때려서 돌아올 거 같은 세뇌면 총 한 방 쏴서 인실좆 정신을 실현하고 싶네요. 예? 그러다 죽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요? 좋은 전우였다며 립 서비스를 펑펑 해줘야죠. 군대라면 2계급 특진도 시켜줄 테니까 억울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 물론 제가 세뇌된 상태에서 '미안. 니 세뇌 풀기 힘들어. 그러니까 좀 뒤져야겠다. 이해해줄 거지?'라고 말하면 '시발, 이해 못 한다 개새끼야! 구해라 헤벳!'라며 저항할 겁니다. 목숨은 소중한 겁니다. 특히 자기 목숨은 더욱 더.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로리콤MK님, 이 소설에서 레드썬을 빼면 뭐가 남냐뇨. 엄청 철학적인 질문이네요.
어디 보자……자지의 맹세, 모녀덮밥, 자매덮밥, 낙태마법, 낙태빵, 야간섹스, 공공장소에서 섹스, 켄타우로스 보행, 여자 세 명을 뒤에서 박은 채 동네 한 바퀴 돌기, 세뇌, 납치, NTR 등…….
……
…………
……………… 아니 시발, 뭐 이런 개막장 소설이 다 있답니까!?
제가 쓰고 정리하면서도 '하, 시발. 존나 개막장이다 ㅋㅋㅋ'라고 생각했었는데……이렇게 보니 진짜 개막장이 따로 없네요. 저거 이상의 요소까지 다 담고 있다니.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오늘의 교훈 : 왼손은 거들 뿐. 레드썬도 거들 뿐. 작가도, 작품도, 주인공도. 모두 다 미치광이 약쟁이. 이렇게 소설이 산으로 가버렷! 사공들의 단체 섹스로 산으로 가버렷! 작가가 약 한 사발 쭉 빨고 적어서 스토리도 산으로 가버렷! 독자들도 다른 작품으로 가버렷!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서 망해버렷!
zxc54님, 우선 안타깝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늘 날카롭게 지적을 해주시던 zxc54님께서 4주간 훈련소에 가신다니. 여러 모로 슬프고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역이 아니라 공익이라는 점이네요.
본편과 후기를 보셨으면 알겠지만……대한민국 군대는 진짜 개좆 같은 쓰레기 모임입니다. 진짜 조심하세요. 통수와 통수가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세계,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더러운 곳이 대한민국 국군입니다.
전우애? 어떤 병신이 전우애를 논합니까? 전 제 동기들 대부분과 사이가 나빴고 그 동기놈들도 서로 친해지려는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지 한 몸 챙기기 바빴는데 전우애? 똥구멍에 소총 총구 처박는 소리나 하고 앉아 있습니다, 시발.
최근에는 훈련소에서도 면회가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가족분들과 만나면 편안한 시간 나누시며 푹 쉬세요. 그 좆같은 군대에서는 몸 성히 전역하는 게 최고 & 최선의 목표라 생각하세요. 몸 아프면 바로 말씀하시구요. 참으면 본인만 손해입니다.
진짜 군대 때문에 치를 떨어서 본문, 후기에도 몇 번이고 적었습니다만……zxc54님, 반드시 몸 챙기세요. 본인을 위해서도, 가족분들을 위해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건강만큼은 반드시 챙기셔야 합니다.
공익의 경우 다양한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므로 제가 큰 도움은 못 되어드립니다만, 혹시나 조언이 가능한 경우엔 최대한 상세히 적도록 하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