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1 「16-10 : 빼앗겨버린 아내들 (10)」 =========================
“저 개만도 못한 놈이!!”
성벽에 올라온 상태였지만 놈들의 공격에서 안전한 것만은 아니었다. 촉수가 닿지 않자 바로 빔을 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성벽은 천천히 녹아들어간다.
이런 망할! 맞을 수도 없지만 피하면 피할수록 성벽이 녹아들어간다! 이래서야 어떻게 할 수단이 없잖아……!?
속으로 욕을 하며 다시금 놈들한테 탄알을 발사했다. 성벽이 녹아들어가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만 그렇다고 내 한 몸 바쳐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진짜 죽으니까! 살아남으려고 싸우는 거지, 죽으려고 싸우는 건 아니잖냐! 총을 쏘면서 왜 이 지경이 됐을까 하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로라와 카인이 관계를 나누려는 걸 막긴 했지만……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었다. 내가 한 평생 로라나 아내들을 지켜볼 수도 없었고, 이미 카인을 남편 같이 인식한 그녀들한테 있어 내 존재는 방해가 될 뿐이었다.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나와 있으면 거북해하는 반응을 보였으니까.
예전에는 어깨를 감싸며 손으로 가슴을 주무르고는 했지만……이젠 신체적인 접촉조차 불가능했다. 내 곁으로 다가오려 하지 않는 그녀들의 모습은 아예 나라는 존재 자체를 혐오하는 듯 했고, 카인과 늘 함께였기에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로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그녀 또한 마음이 심란해 보였기에 결국 그녀를 놔둔 채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는 로라를 품에 안는다고 한들 뭐가 나아질까. 내 아내가 누군가한테 범해지는 건 죽기보다 싫었지만, 정신적으로 힘든 틈을 타 범하는 것 또한 하고 싶지는 않은 짓이었다.
자신을 생각해줘서 고맙다며 웃는 로라도 그 다음날이 되니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내가 겪었던 일을 다른 아내들한테도 말해줄 생각이었겠지만……태도와 행동거지를 보건데 말조차 꺼내지 못한 채 원 상태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결론? 진실을 아는 로라는 진실을 말할 수도 없게 됐고 말하고 싶지도 않게 됐다.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였다.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다른 남자한테 아양과 교태를 떠는 것을 보는 것만 해도 고역(苦役)이었지만……힘든 일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한 거였지만……수도로 들어올 때 나는 권력을 썼다. 왕이자 임금인 내가 신분 확인 때문에 많은 시간을 잡아먹을 수는 없었으니까.
한 시라도 빨리 아내들의 안전을 확인해야 하는데 아무런 상관도 없을 뿐만 아니라, 괴물까지 쓰러뜨리며 왔던 나와 안즈가 ‘신분확인’이라는 짜증나는 절차 때문에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니! 분노 때문에 권력을 쓴 것에 대해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반성했지만……이젠 반성할 일도 없었다.
난 더 이상 왕도, 임금도.
아내들의 남편도 아니었으니까.
밤에는 없었던 안즈가 아침에는 옆에 있자 적지 않게 놀랐었다. 밤에 어디 있었냐고 하니 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마음도 정리하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고 말했었지. 내 아내가 되긴 했지만 사실상 원래 내 아내들과 아무런 접점을 가지지 못하는 그녀를 혼자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한 생각해야만 했다.
식사를 위해 왕과 가족들이 모이는 식사실로 갔지만……그곳은 여왕기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왜 아침부터 이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을까? 이유는 금세 생각이 났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순간, 여왕기사단의 서슬 퍼런 칼날이 내 손과 목 앞에서 멈추었다.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알고는 있었다만, 갑작스러운 견제에 난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한 때 몸을 섞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왕비로 삼아 달라며 교태를 부리던 그녀들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칼을 빼들다니!?
무슨 짓이냐고 물으니 나는 식사실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왜 내가 들어갈 수 없냐고 물으니 마리아의 명령이라고 그녀들은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지닌 여왕이다. 그런 마리아가 내 출입을 금지시켰다는 것은……그야말로 확인사살이었다. 더 이상 나는 이 나라의 임금도 아니고, 누군가의 남편도 아닌……불청객(不請客)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실하게 나타내기 위한 확인사살.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다 죽여 버리고 안에 들어가 카인의 이마에 총알을 존나 카와이하게 박아주고 싶었지만……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이들은 마리아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내 아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명령을 수행할 뿐. 그런 사람들을 개인적인 이유로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녀들을 공격할 수 없는 이유로는 ‘개인적인 이유를 빌미로 공격할 수 없다’라는 것도 있었지만……나와 안즈의 목숨을 보장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왕기사단의 단장이자 공주인 아테나. 부단장인 헬레나. 그 두 명이 없다는 것은 카인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있다는 뜻이겠지.
비록 그 두 명이 없긴 했지만 여왕기사단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왕을 지키기 위해 엄선해 뽑은 체술·검술·마법의 달인. 경비대장인 로라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의 전투력을 지닌 그녀들을 상대로 나와 안즈가 이길 확률은 매우 적었다.
카인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그 광경은……생각만 해도 이가 갈렸다. 또 카인한테 먹을 걸 떠주면서 화기애애한 장면을 만들고 있겠지.
그것뿐이랴? 서로 카인 곁에 가 함께 식사를 하고 싶어서 떼를 쓰기도 하겠지. 메이와 니나가 질투를 하겠지만 아테나는 공주라는 위치와 권력으로 그 애들을 곤란하게 만들 거 같아 걱정이 됐다.
……멍청하긴.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냐? 지금 걱정해야 할 것은 아내들이나 카인이 아니었다. 바로 나와 안즈지.
나와 안즈는 하녀들이 있는 곳에 사정해 밥을 얻어먹어야 했다. 기사단은커녕 경비대원보다 못한 취급이라니. 프레그넌트의 경비대원조차 이것보다는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텐데……내 위치는 그것보다 훨씬 아래였다.
빵과 스프를 먹고 있지만 별로 맛을 보지는 않았다. 생각할 게 많아서 그런지 맛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기계적으로 음식을 떠먹으며 생각한 것은……기사단원이 했던 말이었다. 그녀는 ‘마리아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마리아의 명령은 나나 안즈가 들어올 수 없게 막는 것이었다.
누군가 듣는다면 ‘그야 그렇겠지. 카인이랑 밥 먹는데 니가 오면 좋겠냐?’라고 말하겠지만……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바로 그 명령이 ‘마리아의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무슨 소리냐고?
왕이자 임금인 나는 하녀들이 있는 곳에 사정을 해서 밥을 얻어먹을 정도로 시궁창에 떨어졌다. 더 이상 나는 왕이 아니게 된 거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내가 왕의 권력을 마지막으로 썼던 때는 수도로 들어올 때. 신분검사를 빠르게 통과하기 위해 썼던 것을 제외한다면 더 이상 권력을 쓸 수도, 되찾을 수도 없었다.
권력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오묘했다. 원하지도 않게 얻은 권력을 원하지도 않는 사건 때문에 빼앗기게 되다니. 개인의 마음과 자유의지는 지나가던 똥개한테 준 걸까? 엿이라도 바꿔 먹었냐? 얼마 어치나 바꿔 먹었는지 알고 싶네.
쓸데없는 생각을 집어 치우고 다시 생각에 들어갔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명령했다’라는 사실이었다. 근데 웃기다. 마리아가 나를 남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대체 누구를 남편으로 인정할까? 물을 필요도 없이 카인이겠지. 그럼 정말 웃긴 질문이 떠올랐다.
카인과 마리아. 둘 중 누가 더 나를 방해물로 여길까?
마리아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마리아한테 있어 나는 예전의 남편이다. 적어도 현재 받고 있는 대우보다 약간은 나은 대접을 받게 해줄 수 있겠지. 아무리 내가 화를 냈다지만 하루아침에 까먹을 정도로 나를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슬슬 눈치를 챘을 것이다. 여왕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렸지만 그 명령은 카인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사단원이 ‘여왕님의 명령이다’라고 했을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아무리 싫다고 한들 하녀와 똑같은 대접을 할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바로 카인이지.
원래부터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절대자였지만 현재는 이 나라의 왕이자 임금이 된 카인. 그 정도로 위대한 인물이라면 자기 이름으로 명령을 내려도 전혀 문제가 될 게 없었지만, 마리아의 이름으로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끝까지 나를 욕보이겠다는 심산(心算)이었다.
자기 이름으로 그런 명령을 내렸더라면 과연 나는 따랐을까? 마리아의 명령이었고 아내들을 지키는 게 여왕기사단의 단원들이기도 했기에 그들의 말에 따랐지만 ‘카인님의 명령입니다’라는 말을 했다면……아마 볼만했을 거다. 눈에 뵈는 게 없었을 거 같았다.
권력에 미치지 않았다고 했지만 계속 왕이다, 임금이다 같은 말을 들먹이는 자신을 보니……나름대로의 애착과 집착은 있었던 거 같았다. 아마 현실 세상에서 계약직 이상으로 높은 자리에 가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렇게까지 높은 자리에 올라간 적이 없는 인간이 갑자기 왕 같은 걸 맡으니 실감이 안 났겠지.
초연(超然)한 척하고 있지만 나 또한 결국은 한 명의 인간이었다. 권력욕(權力慾)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왕이 된 것에 대해 나름 즐겁게 생각하고 있었는데……그 권력을 단숨에 빼앗기다니.
쿠데타 같은 게 일어났다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들을 수나 있지. 이건 그야말로 대놓고 ‘너 따위는 필요 없다’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 없잖냐……. 대강 이런 느낌이었겠지.
【세린한테 대놓고 말해도 상관없지만 이왕 말할 거 마리아의 이름으로 말하자. 사랑하는 아내였던 마리아가 ‘더 이상 너는 우리가 식사하는 곳에 들어올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아, 기분 나빠서 병사들을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해! 얼마든지 죽여! 어차피 나랑은 관계도 없고 죽는다 한들 나한테는 하등 손해 없는 것들이니까! 물론 깽판을 치면 칠수록 안 좋아지는 것은 너에 대한 여론과 평가라는 거 잘 알아두고! 어때, 기분 좋지?】
그래, 기분 좆같다 개새끼야……. 당장에라도 총을 들고 식사실 안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꾹 참아야만 했다. 카인의 생각대로다. 내가 빡쳐서 미친 짓을 하면 안 좋아지는 건 내 처지와 평가뿐이다. 현재 상태도 결코 좋은 건 아니지만 이 이상 안 좋아졌다간 상상을 초월하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사태가 있냐고 묻는다면……있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상상을 초월하는 사태 = 더 안 좋은 사태’가 뭐냐고 묻는다면……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미 내가 생각한 최악의 사태는 거의 다가 이루어졌다. 이런 사태가 되니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잃은 것이 많지만 더 잃을 걸 생각하니 생각조차 함부로 할 수 없게 되다니……비참하군. 예전에는 사랑하는 아내들과 쉬기 위해 왔던 왕궁이었건만 지금은 만족스럽게 누워 있을 공간마저 제대로 가지지 못하다니. 인간, 진짜 한 방에 훅 가기는 훅 가는구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마리아가 내렸던 명령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카인이 아니라 마리아가 정말로 나를 싫어하다 못해 증오해서 들어오게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을 수도 있지만……그 경우 또한 마리아의 마음을 조종했다고 봐야겠지.
어찌 됐든……그래, 축하한다. 나를 엿 먹이는 데에는 확실히. 아주 확실히 성공했다. 지금까지 성공했고 앞으로도 성공할 거 같은 ‘신세린 엿 먹이기’를 생각하니 한숨밖에 안 나오는군. 다음에는 어떻게 나를 엿 먹일지 이쯤 되니 궁금해지는군.
그런 거 궁금해 하면 바로 엿 먹일 텐데 왜 쓸데없이 호기심을 가지냐고? 언제는 내 신경 쓰면서 엿을 먹인 줄 아냐? 내가 바라든 안 바라든 물 먹이고 엿 먹이며 날 가지고 놀 위인이다. 더 이상 ‘내가 무얼 생각하고 있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최악의 사태에 대해 생각하는 건 무섭다면서 자기가 어떻게 엿 먹는지에 대해서는 호기심을 가지다니. 나도 참 미친놈이다……. 그저 그런 식사를 마친 나와 안즈는 왕궁을 나왔다. 안에 있어봤자 좋은 일은 하나도 없을 테니까.
자, 아침도 먹었겠다……. 가장 큰 문제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자. 문제가 생긴 원인. 현재 생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한다면 좋은 수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안 나오면 어떻게 하냐고?
……그냥 가야지! 인생 뭐 별 거 있냐? 예전에도 말했잖냐. 죽은 사람을 되살리거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신(神)일 거라고.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우리는 일어난 사건, 지나간 시간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과거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며 성장하는 건 누구나 같았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간에 학습(學習)이라는 것을 통해 더 나은 인생,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고자 한다. 그러한 열정과 마음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살아남지 못했겠지.
문학이나 수학, 삶을 위한 과학 등. 분야는 다르지만 서로 열정과 뜨거운 마음. 미래를 향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대단한 사람들은 아니지만……적어도 나한테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마음 정도는 가진 놈이니까.
“……응?”
왕궁을 나간 채 안즈와 걷던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안즈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손을 그녀한테 향했다. 생각할 게 있으니 잠시만 내버려달라는 제스처였다.
방금……나. 엄청난 걸 생각한 거 같은데……뭐지? 아주 엄청난……너무 중요하다 못해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무언가’를 생각해낸 거 같았는데……?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생각해냈지만 너무나 순식간이었기에 그게 무엇인지를 기억해내기 위해 눈을 감은 채 생각에 들어갔다. 조금 전에 내가 했던 생각을 토대로 그 ‘순식간에 지나간 무언가’를 떠올리려 했지만……젠장! 떠올릴 수가 없잖아!
대체 뭐였지? 뭔지는 모르지만……어, 아냐.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어. 아직 그 ‘무언가’는 제대로 된 형태. 하나의 문장이나 단어로 완성되지 않은……일종의 원석(原石)이었다. 그 원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처한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 상황. 내가 지금 처한 상황부터 시작해 ‘내가 왜 이곳(하렘 어드벤처)에 소환된 것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해답을 내줄 수 있는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 흔히 ‘뇌리를 스쳤다’라고 하지만 설마 그런 경험을 내가 할 줄이야…….
놀라운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당장 내 눈앞에 닥친 문제들을 해결하기는커녕 손조차 못 대고 있는 내가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런 걸 생각할 수 있는지 내 자신이 더욱 궁금했다.
하지만……그게 한계였다. 아주 엄청난 생각. 내 평생에 단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천재적인 무언가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그 생각은 다시금 내 머리로 돌아와 주지 않았다.
기억의 바다에 들어가 깊은 곳까지 헤엄을 쳤지만 내가 원하는 기억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결국은 나중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만……아침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왕궁을 나오긴 했지만 사실상 내쫓긴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 나왔으니 내 의지가 들어있기도 했지만, 아내들과 카인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는 마음이 훨씬 더 강하게 작용한 거 같았다. 카인 주변에서 애교를 떠는 아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총을 마구 발사하고 있을 거 같았으니까.
더 이상 나를 왕으로 인정하지도 않고 함께 있고 싶어 하지도 않는 아내들한테 다가가려는 모습이라니……훌륭한 스토커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성 도착증 환자나 스토커로 오인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태였다. 내가 변태 같긴 하지만 스토킹을 할 생각은 별로 없다. 안 좋아하면 안 좋아하는 거지, 스토킹은 뭐 하러 하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내쫓지 않고 있다는 건 꽤나 기분이 묘한 일이었다. 내쫓을 수 있는데도 내쫓지 않는다는 것은……내가 아내들한테 여전히 사랑과 신뢰,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 거겠지.
로라와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태도는 다른 아내들과 같아져 있었다. 밤늦게까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로라. 다음날 아침, 난 그녀한테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아내인 로라와 이야기를 나눈 게 기뻐서 그랬던 것도 있었지만……인사라는 것 자체가 큰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로라는 내 인사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웃으며 받아줄 거라 생각했던 로라는 차디찬 시선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왜 자기한테 인사를 하냐는 표정. 내 인사 따위는 듣고 싶지도, 받고 싶지도 않다는 시선. 한데 어우러진 표정과 시선을 본 순간……싫어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함께 과거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나를 기억하려 노력했던 로라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건만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그렇게 변하다니.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말 안 해도 알 거다. 카인이 기억을 조작했겠지.
날아가 버린 거다. 나와 로라가 함께 보냈던 시간이 단숨에. 마치 컴퓨터로 애써 작업해놓고 ‘저장하기’ 버튼을 누르지 않은 파일이 컴퓨터 오류 때문에 날아가 버린 것처럼…….
내 아내와 나눈 사랑과 신뢰가 사라진 것에 대한 허망함과 슬픔은 컴퓨터 파일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만 가장 비슷한 예시를 든다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지.
이야기를 나눈 로라마저도 그 지경이 됐는데 다른 아내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 날은 결국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다. 만나는 아내들은 나와의 대화나 접촉을 매우 꺼려했고, 놈은 보란 듯이 그녀들과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총을 쏘고 싶었지만 아내들한테 맞을 확률 또한 있었기에 경솔한 짓은 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비참한 상황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나는 여전히 그녀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믿고 있었다. 나한테 지금까지 보여줬던 웃음과 다정함을 다른 남자한테 바치고 있는데 왜 그녀들을 사랑하고 신뢰하느냐고 묻는다면……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사랑하니까.
신뢰하니까.
내 평생 만나보지 못했던 여자다. 이 세상에 와서 아내를 만들며 결혼까지 한 여자들. 내 평생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여자들이 좆같은 놈의 손아귀에 떨어졌는데 헤실거리며 대체 왜 내가 그녀들을 포기해야 하는가? 왜 내가 그 엿 같은 광경을 보며 축복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 안다! 그녀들이 나한테 다시 돌아올 확률은 제로(0)다! 카인 또한 내가 그녀들한테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걸 최대한 이용하려고 나를 내쫓지 않는 거겠지! 내 미련과 마음이 있는 한 얼마든지 나를 가지고 놀 수 있으니까! 마음껏 엿 먹일 수 있으니까!
왕이 되긴 했지만 원래부터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카인한테 있어 나를 내쫓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다! 언제든지 내쫓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추방하지 않는 것은 내 앞에서 애정 어린 행각, 깊은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보다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겠지!
이 힘들고 좆같은 상황이 더욱 더 깊은 나락, 시궁창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 싶으니까! 그걸 보며 즐기고 싶으니까 이런 어중간한 상황을 만든 거겠지! 언제든지 내쫓을 수 있는 내가 꼬리를 내린 채 아내들과 대화하려는 그 광경! 우스꽝스럽다 못해 처절한 그 모습을 보며 비웃을 카인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분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겨서 너무 분하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너무나 슬프다!
좆같다! 아무런 잘못도 안 했는데 이렇게 된 게 매우 좆같다!
하지만……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나한테는 아무런 힘도 없는데?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방법도, 수단도 없다! 힘들고 슬프고 좆같지만 그걸 고칠 수 있는 아이디어도 없고, 힘도 없다!
이런 사태에서 대체 내가 뭘 해야 한단 말인가? 그저 카인의 꼭두각시처럼 ‘미련 많은 버림받은 남자’역할을 수행하는 것 외에 대체 뭐가 가능하단 말인가?
아내들과 여왕기사단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카인한테는 더 이상 다가갈 수조차 없다! 설령 다가간다 치자. 어떻게 하려고? 그를 죽일 수도 없잖아!? 이 세상의 신인 카인이 내 공격 따위에 쓰러질 리가……상처를 입을 리가 없단 말이다!
아내들을 설득해? 하루도 채 안 지났는데 나를 벌레 보듯이 쳐다보는 로라를 보고 그런 말이 나오냐? 다 쓸모없다니까?
6개월 간 함께 했던 시간, 사랑, 여행 추억! 모조리 다 쓸모없는 쓰레기가 됐다!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가 됐는데 대체 무슨 설득을 한다는 건데!?
도망? 싫다! 소중한 아내들을 내버려두고 도망이라니! 패배는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내 소중한 아내들이 그놈의 자지에 처박힌 채 교태 어린 신음을 뱉어내게 둘 수는 없다! 그녀들이 싫어해도 나는 그녀들을 좋아하니까! 내 소중하고 귀여운 아내들이니 지키고 싶단 말이다!
설령 도망을 칠 수 있다 치자. 그걸로 모든 게 해결되냐? 또 이런 일이 일어날걸? 내가 죽기 전까지 계속! 반복해서! 영원토록 일어날 거다! 이 ‘하렘 어드벤처’에 있는 한 카인으로부터, 신한테서 도망갈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
카인을 살해하는 것도.
아내들을 설득하는 것도.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도.
그 무엇 하나 뜻대로 할 수 없는 상태에서……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말이냐……?
결국 나는 다시금 주저앉고 말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보지만……아무렴 어떠냐. 이미 못 보일 꼴은 충분히 보였다. 이제 와서 주저앉은 걸 보여준다고 해서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 애초에……지나가는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나 알까? 관심도 없을 텐데.
날 걱정하는 안즈한테 ‘괜찮다’라고 말했지만……미안, 안즈. 존나 안 괜찮아. 아주 약간이지만 진지하게 자살을 생각하고 있을 정도니까……괜찮지는 않았다. 으응, 역시 관두자. 자살은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냐.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자살이라는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죽는 건 언젠가 맞이할 일이지만……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발버둥을 끝까지 치며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도록 힘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 온 의미가 없을 테니까.
현실에서도 도망만 치던 삶이었다. 이곳에 온 후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자고 생각했었지. 물론 이 사태와 내가 놓인 처지는 내가 좋아해서 만든 것은 아니지만……다시 현실에서처럼 도망가기는 싫었다. 그럴 바에야 싸우지. 눈물을 약간 흘린 나는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그래. 발버둥치자.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됐는데 이제 와서 도망친다고 한들 해결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놈이 내가 도망치게 내버려 둘 위인도 아닌데 미쳤다고 도망을 치냐? 도망치게 내버려 둔다 쳐도 좋은 건 그놈뿐이다. 그놈 좋아할 일 할 바에야 안 하고 말지.
니가 나를 엿 먹인다면 나도 너를 엿 먹여주마. 최대한 물고 늘어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불길한 폭발 소리가 귓가에 들리기 시작했다. 비명과 함께 사람들이 다급하게 뛰기 시작했고 나와 안즈는 서로를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뛰어가는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뛰어간 우리는 입을 벌린 채 굳을 수밖에 없었다. 성벽이……녹아들어갔다? 굳건하게 마을을 지키던 성벽이 시커멓게 타 있었고 이는 어떻게 보더라도 녹아들어간 흔적이었다. 이런 짓을 할 놈들은……그놈들밖에 없다!
“그 괴물 새끼들!!”
안즈가 증오를 담은 채 외쳤고 나 또한 입을 다물었다. 타들어간 성벽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수도의 경비대원들은 응원군을 요청하라며 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숲에서 봤던 검은 연기. 야만족과 숲을 태우며 자신의 존재와 위력을 자랑하려는 듯 나오던 그 불길한 색의 연기를 보자 지금까지 하던 생각과 고민이 단숨에 날아간다. 나와 안즈는 서로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발은 그 어떤 저항감이나 거부감도 없이 연기가 나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군대에서 후임들한테 잔소리도 안 하고 잘 해줬습니다. 먹을 걸 매일 사주지는 않았지만 근무 나가서는 편하게 쉬게 했고 무슨 일이 있으면 들어주려 했습니다. 적어도 나쁜 선임은 아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리갈굼이나 가혹행위는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냐고요? 자기한테 욕하거나 막말하는 선임한테는 아양을 떨면서 저는 개좆병신으로 보더군요. 사회에서도 통수 좀 맞은 적 있지만 군대에서 처맞는 통수는 각별했습니다. 내가 대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싶더군요.
욕하거나 막말하는 사람한테는 마음에 쏙 들게 행동하지만 자기한테 잘 해주고 배려해주는 사람은 개좆병신으로 보다니. 대한민국 국군이 왜 이 따위냐고요? 이 따위라고 불릴 만한 짓을 스스로 하니까 그런 거죠.
세린의 현재 상황은 예전에 겪었던 것을 베이스로 적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 배려해주며 좋은 일 궂은 일 다 했더니 그 결과가 토사구팽. 아무리 카인에 의한 것이라지만 결과가 NTR이니 뭐라고 할 수가 없죠. 결국 세린을 잊은 채 카인이랑 짝짜꿍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 말입니다.
물론 하렘 어드벤처와 군대의 삶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남자끼리 자지를 박아대는 상황 따위는 있지도 않았고 있어서도 안 됐습니다. 제가 미쳤습니까? 남자끼리 하는 BL을 좋아하게? 끔찍한 소리하지 말고 상상도 하지 맙시다. 그건 제 분야가 아닙니다.
그치만 슬프긴 매한가지였습니다. 잘 대해주고 최대한 배려했더니 돌아온 결과가 선임 만만하게 보며 까는 거라니. 뭐하러 후임들한테 잘 대해줬을까 하는 후회만 막심했습니다. 여러분은 가능하면 이런 일 겪지 마세요.
후임을 때릴 마음도 없었지만 말한다고 한들 걔들이 제 말을 듣겠습니까? 성질 더러운 선임은 비위 맞추면서 눈 안에 들려고 하지만 만만한 선임은 우습게 보다니. 잘 대해줘도 지랄, 개 같이 대해도 지랄. 한국군대는 진짜 답 없습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로리콤MK님, 레드썬과 블루문은 ‘록맨 에그제’ 시리즈에서 따온 겁니다. 퍼플스타는 찾아봤는데 해당 검색 결과를 잘 못 찾겠네요 =_=;
대화 및 토론 장면이 끝났고 다시금 전투와 새로운 전개가 이어집니다. 오늘로 금요일이니 이번 주 분량은 모두 업로드했네요. 다음 주 월요일 0시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늘 조회와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zxc54님, 일단 생각한 ‘세린 엿 먹이기 프로젝트’는 많았지만 출산 부분에서는 굉장히 고민 중입니다. 캐릭터들의 외모, 이름도 문제지만……14명이 아기를 낳으면 아내들까지 합쳐서 28명의 인물 묘사를 해야 합니다.
……어, 이게 얼마나 힘든 거냐고 물으신다면 이렇게 대답 드리고 싶습니다.
이 소설이 한 명 한 명 묘사하느라 쓸데없는 편 만들고 아무런 영양가도 없는 잡설만 엄청 길어질 겁니다. 돈 주고 보는데 질질 끌기만 하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편들이 양산될 겁니다.
아기의 출산은 진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구할 수 있는 인원수도 아기와 마찬가지로 복잡해지므로 생각 중입니다.
아, 덧붙여 태어나는 아기들은 모조리 여자입니다. 하렘 어드벤처라는 특성을 고려해서 그런 겁니다. 절대 다리 사이에 자지 달린 남자놈들을 자세하게 묘사하기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못 믿겠다구요? 레드썬의 자매품인 블루문도 있습니다.
말씀하신 희망입니다만, 이번 편을 통해 새로운 전개가 시작됐습니다. 약간의 해프닝을 통해 조금씩이나마 희망이 부여될 겁니다. 가끔은 zxc54님이 제가 쓴 글 보고 미래까지 예측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상입니다. 새로운 전개가 금요일에 시작되어서 다음 주 월요일에 이어진다니. 제가 적었지만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창렬 전개네요. 한 주에 5편씩, 2주에 한 챕터(10편)를 올리기도 했는데 이런 식으로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한 주 고생 많이 하셨고, 토일에 편하게 쉬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P.S - 우즈키(신데마스)가 참 귀엽지? 나도 좋아해.
응? 밀리마스? 러브라이브 선샤인? 나니★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