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161화 (161/235)

00159 「16-8 : 빼앗겨버린 아내들 (8)」 =========================

납치부터 시작해 내가 당한 온갖 수모와 모욕, 고통을 들은 로라는 처음에는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다양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었고 나는 마침내 내 여정을 털어놓았다는 달성감과 허탈함에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다.

지금까지 노력해서 일구어낸 모든 것들이 단숨에 박살나고 소멸된 것도 모자라 내 소중한 사람들까지 나한테서 떠나가 버린 이 상황.

대체 내가 왜 이렇게 힘든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걸까,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은 무엇일까.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그런 생각을 하며 펑펑 울었다.

어린아이처럼 몸을 들썩이며 울던 나를 진정시켜준 것은 이야기를 들은 후 가만히 있던 로라였다. 그녀는 내 이름을 예전처럼 부드럽게 부르며 날 안아주었고, 나는 바보 같이 로라를 쳐다보기만 했다.

갑자기 왜 바보가 됐냐고 묻는다면……어. 삶이 힘들고 고달파서? 그런 것도 있다. 내가 2주 동안 겪은 것들은 스펙터클하다 못해 판타지틱한 경험이었지.

태어나서 당한 두 번째 납치부터 시작해 야만족과 마을 주민들의 죽음. 마을의 폐허화. 거기에 아내들이 나를 버린 것까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만 연속으로 일어나서 이게 꿈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었다.

나에 대해 완전히 잊은 듯한 반응을 보이던 아내들. 그 아내들 중 한 명인 로라가 내 이름을 예전처럼 부드럽게 부르며 끌어안자 덜컥 겁이 났다. 혹시 그녀도 조종당하고 있는 거 아닐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카인에 의해 세뇌된 게 아닐까 하는 공포가 머릿속에 퍼진다.

“미안해요, 세린……세린이 그렇게 힘든 일을 겪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어요. 저뿐만 아니라 모두 주민들이나 대원들의 죽음에 슬퍼할 틈도 없이 이곳으로 피난을 왔지만, 세린은 그 사이에도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주고 있었던 거군요…….”

“풋!?”

너무 갑작스럽게 나온 말이라 이상한 웃음이 나와 버렸다! 로라가 혹시 자기가 무슨 이상한 말을 했냐고 묻자 그런 게 아니라고 바로 답했다.

“아, 아하하……그, 그게 아니라요. 그……뭐라고 해야 하지? 로라가 저를 너무 호인이나 대단한 사람처럼 말해서요.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거든요.”

그 말에 로라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로라의 몸동작이 이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질 줄이야……. 다시금 눈물이 나올 거 같군. 하지만 지금은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라 대화를 할 때다. 모처럼 진행된 소중한 대화의 장이다. 버릴 수는 없다고…….

“세린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행동했을 리가 없잖아요.”

그건 틀린 말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정확한 말을 덧붙여야 했다.

“저는 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숲에서 빠져 나가자고 제안했던 거예요. 마력봉인수갑까지 풀었는데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하면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게다가……숲을 나가자고 한 저와 안즈 외에는 다 죽었어요. 제대로 실행도 못할 제안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 다른 사람들을 모조리 희생시킨 제가 무슨 좋은 사람이에요? 그냥 병신이죠.”

험한 말로 끝을 맺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어쩌면 내가 죽고 안즈 외의 다른 야만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했겠지. 나한테는 탐탁지 않은 가능성이지만 누군가한테는 생존을 위한 실낱같은 희망이었을 것이다. 난 그 희망을 짓밟고 여기까지 온 거다.

“하지만 목적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거잖아요.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저 또한 대원들을 희생시킨 주제에 호화로운 식사를 즐긴 시발년인걸요.”

으음, 입 험한 건 부부가 다 같은 걸까? 내 자조적(自嘲的)인 말에 로라 또한 자신을 몹쓸 인간으로 몰아붙이는 말투로 대답했다. 로라를 몹쓸 인간으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어쩌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까게 됐을까? 이게 무슨 사람 까기 배틀도 아니고 원…….

못된 인간은 되기 싫지만 아내를 인간 말종으로 만들면서까지 내 가치를 빛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뜻의 호인(好人)이 아니라 ‘등쳐먹기 좋은 사람’이라는 뜻의 호인(호구+사람)이 잘 어울릴 거 같았다. 실제로……지금까지 엿 먹고 물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웃었을 때부터 로라는 나를 안고 있던 걸 푼 상태였다. 아내의 체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이 대화에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기에 받아들여야만 했다.

“당시 없었던 세린을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세린이 있기를 바랐었죠. 세린이 있었다면 사망자나 다치는 사람이 조금은 더 줄어들었을 테니까요…….”

거의 3일 만에 몰락한 프레그넌트. 나는 그 프레그넌트에 돌아와 물자를 챙긴 후 수도로 향하며 괴물과 싸웠다. 본격적으로 싸우고 나서야 놈들의 패턴, 약점 등을 파악할 수 있었기에 로라의 기대처럼 멋지게 활약할 수는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난 내가 그렇게 뛰어난 인간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세린이 저희를 원망했듯이……저희 또한 세린을 원망했어요. 왜 그토록 중요한 순간에, 위급한 때에 저희 곁에 있어주지 않았냐면서……. 만약 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만난 지 하루도 채 안 되는 여인을 따라갈 수 있었냐고요.”

“아니, 납치당한 거거든요? 진짜 죽을 뻔했거든요?”

내 다급한 부정에 로라는 키득거렸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니 정말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잃어버렸기에 더욱 더 소중한 것이라 깨닫게 된 모순적인 관계. 서로 사랑하는 이와 보내는 소중한 시간을 마침내 찾았다는 생각이 들자 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우쒸……참아라 눈물샘.

“지금까지 접해본 적 없는 강력한 괴물 때문에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을……프레그넌트의 소중한 주민들을 두 번 다시 못 보게 된 게 너무나 안타까워요. 당시에는 너무나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카인의 제안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됐던 것 같아요.”

텔레포트로 모든 주민들을 옮기자는 그의 의견은 탁 까놓고 말해 옳은 판단이었다. 내가 그 새끼를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마을 주민들을 살린 행동 자체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카인이었다 치더라도 지킬 가능성이 없다면 도망을 치려했을 테니까. 아, 그렇다고 그 새끼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니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수상한 인물의 말에 그대로 따른 것도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행동이었다고 느끼지만……그 당시에는 생각할 수 있는 힘조차 없었던 거 같네요. 메이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어요. 그 충격을 받고서도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웠을 거 같아요.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나와 안즈는 도망쳤었다. 그 지옥 같은 숲에서 모두를 희생양 삼아 도망치는 것에 성공했지만……그녀와 대화를 나눈 것은 프레그넌트 앞에 있는 숲에 간 후였다.

지금도 그들의 죽음에 책임감과 죄책감을 가진 나와 안즈를 생각한다면 ‘남이 뒤지든 말든 상관없다. 내 명령에 따라!’라고 말하는 놈이야말로 미친 새끼겠지.

“그……카인과 키스를 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준 제가 말하자니 변명 같지만……. 세린의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요.”

지금까지 자신의 감정이나 과거만을 말하던 로라가 ‘이상한 점’이라고 말하자 귀가 쫑긋했다. 이상한 점? 나야 카인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처음부터 눈치를 깠다지만 로라가 생각하는 ‘이상한 점’이라니? 호기심이 마구 발생하는군.

카인과 키스뿐만이 아니라 섹스까지 나눈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쓰라리지만……이제 와서 그걸 안타까워한들 변하는 건 없겠지. 그것보다는 로라다. 나 같이 카인의 정체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인간이 느낀 것과 뭐가 다를지 궁금하군.

“세린 같이 늠름하고 믿음직스러운 남편을 둔 채 카인과 그……관계를 맺은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치만……이상해요. 너무나 이상해요.”

“어, 구체적으로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내 말에 로라는 고개를 가볍게 좌우로 저었다. 마치 무언가를 생각하려 시도하지만 좀처럼 떠올릴 수 없는 사람 같았다. 왼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무언가를 생각하던 로라는 다시금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왜 저러지?

“그, 세린. 저를 못 믿으실 수도 있고 이게 변명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변명도 아닐 거고. 조금 다급해하면서도 살짝 떨리는 목소리는 그녀 또한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목소리의 톤과 태도로 볼 때 ‘왜 이런 걸 지금까지 몰랐던 거지?’라는 뉘앙스가 담겨져 있었다.

“그……기억이 좀 이상해요.”

“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뜻밖의 내용이었다. 기억이라니?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이라면……메이나 아이나한테서 들었잖아요. 아, 혹시 제 기억 말인가요?”

“아뇨. 메이와 아이나도 마찬가지지만……제가 말하는 건 저희 모두. 세린의 아내들과 마을 주민들의 기억과 태도를 말하는 거예요.”

눈물샘의 눈물이 확 날아간다. 마치 뜨거운 열에 의해 수증기로 증발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 중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될 거 같았다.

“그, 이런 말하는 건 변명 같지만……. 저는 여전히 세린을 사랑하고 있어요. 세린이 한 이야기를 들은 유일한 아내이기도 하구요. 지금까지는 당연하게 여겼지만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는지. 왜 이렇게 됐는지에 대해 생각해봤는데……저와 모두의 기억, 태도가 너무나 이상해요. 이건 마치……아예 없거나 누군가한테 조작을 당한 느낌이 들어요.”

……세상에. 난 틀림없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을 것이다. 혜린이나 희진이, 은채가 보면 ‘야, 이 세상에 파리는 없지만 그렇게 입을 쫙 벌리고 있으면 보기 좀 그렇지 않냐?’라며 핀잔을 줄 정도로 크게 입을 벌리고 있겠지.

하지만 그게 대수인가? 놀라운 건 놀랍다고 말해야 한다. 표현해야 한다고! 로라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내가 지금까지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고민. 카인이나 백발의 여인과 연결된 주제였다.

“괴물이 습격해온 것과 카인이 도움을 준 것까지는 괜찮은 거 같아요. 하지만……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이상해요. 6개월 간 우리 마을을 위해 노력한 것도 모자라 모두한테 아기의 씨앗을 심어준 세린을……소중한 세린에 대해 2주 동안 단 한 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니. 저나 아내들, 마을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세린을 걱정하거나 신경 쓴 적이 없다는 건……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런 말을 하는 저도 제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굉장해. 입으로는 차마 나오지 않는 감탄의 말이 미친 듯이 뇌내(腦內)에서 폭발해간다.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분노와 증오를 담아 이야기했던 것을 단순한 투정이라 여겨도 상관없었을 텐데 그 말을 토대로 자신의 기억과 태도를 의심하다니…….

자기 기억을 의심하는 게 뭐가 대단하냐고? 그래, 대단할 건 없지.

자기가 조종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다면 말이다!

자기가 조종당하거나 세뇌당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나 기억, 태도에 대해 일절 의심을 하지 않는다. 모든 행동(行動)과 사고(思考)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라는 명확한 신념과 의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라는 달랐다. 로라는 위에서 말한 ‘자기가 한 행동과 사고가 자기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믿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억과 태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카인이나 백발의 여자에 대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기들한테 일어난 문제를 외적(外的)인 부분에서 찾는 게 아니라 내적(內的)인 부분에서 찾다니. 그녀의 말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아내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는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적인 요소에 의해 조작당하고 있다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저런 의심은 [자신들의 기억이나 행동을 조작한 무언가가 있다]라는 전제하(前提下)에 가능한 생각. <자신들을 조종하거나 조작·세뇌할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스스로 도달한 사람만이 가능한 사고방식이었다.

눈물이 절로 나왔다. 벌써 몇 번째 우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이거 때문에 대화가 중단될 수도 있었지만……아무런 말도 없이 스스로 내가 처한 곤란한 상황에 도달한 로라가 너무나도 기특하고 고마웠다. 괜찮냐고 묻는 로라한테 간신히 대답을 하며 눈물을 닦았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들어주마. 그게 바로 내가 여기 온 이유이자 남편의 도리일 테니까! 이야기를 계속해달라고 하자 로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시금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 당시에는 거의 못 느꼈지만 세린과 만나기 시작한 후에……세린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생각하니 너무나 무서워요.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노력한 세린을 걱정하지도 않았고, 메시지 같은 것도 없이 왕궁으로 텔레포트를 하다니……. 하다못해 메시지라도 남기고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러한 행동을 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는 건 틀림없이 무언가 잘못됐던 거 같아요. 우리 모두 다요.”

내 생각이 점점 맞아떨어져 간다. 적어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간단하게 나를 버렸다’라는 현실에는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만든 사람? 말할 필요가 있냐?

“소중한 사람을 버린 채 아무렇지도 않게 지냈던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어요. 이런 말하면 겁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무서워요. 세린을 놔두고 여기서 일주일 이상이나 웃으며 지냈다니. 그것도 만난 지 하루도 채 안 되는 사람과 몸을 섞으며……무, 무서워요. 마치 지금까지 제가 저 자신이 아니었던 거 같아요. 전……저희는 대체……!?”

조금씩 몸을 떠는 로라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하지만 부드럽게 말했다.

“침착해요, 로라. 로라가 한 행동의 대부분은 자기 의지로 한 게 아닐 테니 겁먹지 말아요. 전 로라를 믿어요. 로라가 저한테 해주는 말도 믿고요. 무서워하는 걸 부끄러워 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저도……무섭거든요. 로라가 무서워하는 건 저 또한 오래전부터 공포를 느껴온 거니까요.”

그 백발의 여자가 나타났을 때부터……정확히는 이 세상에 소환됐을 때부터 이미 내 운명은 그녀이자 카인인 인물의 손아귀 안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손아귀 안에서 노는 것일 뿐. 그런 사실을 깨닫고도 멀쩡하게 있을 수 있는 건 크게 두 가지 부류다.

첫 번째 부류는 ‘설령 누군가의 손아귀 위에 있다 해도 내 삶은 내가 개척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려 노력한다면 틀림없이 성과가 있을 것이다’라는 미래지향적 인간.

이런 부류의 경우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거나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괘념(掛念)치 않는다. 자기가 걸어갈 길을 확실하게 알고 있으며 자기 신념과 의지를 지키려는……일종의 ‘주인공 타입’이라 해야 할까.

좋긴 하고 이상적이긴 하지만 이 경우 생각해야 할 것은……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조종·조작·세뇌·지배를 당한다는 것에 대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보 아니냐?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신한테 있어 인간의 의지나 마음 따위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같은 곳에서는 사랑 등의 감정으로 그러한 세뇌나 지배를 부수고는 하지만……현실은 이거다!

로라 같이 강한 신념을 가진 인간이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야 자기 기억이나 태도, 행동에 문제가 있는 거 같다고 간신히 깨닫게 되는 수준이다!

더 심각한 거? 이게 내가 봐온 것들 중 가장 큰 성과라는 거다! 내 말을 안 들었으면 아예 지배당하는 줄도 몰랐다는 소리지!

한때 의지 드립으로 유명했던 걸그룹이 단숨에 망해버린 건 예전에도 이야기했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의 의지라고 해봤자 자기 자신조차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것인데 미래지향적? 내 좆이나 빨라고 그래라 씨발! 미래지향적인 인간이 이 모양인데 나머지 하나는 뭐냐고?

남은 부류는 ‘시발 좆이 되든 쓰레기가 되든 어차피 신한테 대들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내 인생은 좆망인데 조종해서 뭐하게? 인생은 실전이나 좆만아!’다.

이거 보고 내가 예전에 헛짓했던 거 기억나는 사람. 적어도 한 명은 있겠지. 그래. 바로 ‘포기하는 삶’이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맙시다! 이게 얼마나 편한 삶인데? 어, 이런 삶을 살면 삶의 질은 확 떨어지지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 쩔어준다고!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좀 마라! 나도 반성하고 있는 흑역사 중 하나라고!

미래지향적인 인간과 정반대의 부류. 그건 바로 포기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봤자 헛수고라면 아예 아무런 노력 없이 그저 살아가는 사람. 가장 수동적이면서도 조종이나 지배 등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는 타입이었다. 조종해봤자 얻는 이득이 없으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자기가 조종당하는 것에 공포를 가지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자기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까지 조종당할 수 있는데 전혀 두렵지 않다면 그건 미친놈임에 틀림없다. 당장 헤어져라.

나 또한 공포를 드러내며 말하자 로라는 조금씩 진정하며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살갗이 보이는 옷 부분을 조금 올려주며 옷매무새를 다듬자 로라가 살짝 웃었다.

“역시 세린은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그냥 등쳐먹기 쉬운 거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나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이 좋은 평가를 살짝 뒤틀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하고 좋은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는 처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로라는 진정한 가슴을 쓸어내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을 하지 않은 것도 무섭지만……더 무서운 것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었어요. 세린이 총을 겨누다 쓰러졌던 거, 기억나세요?”

기억은 난다. 너무 지친 상태에서 말도 안 되는 일, 충격적인 사건만 받아들이다 보니 뇌가 의식차단을 명령한 거겠지.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로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저도 이상했지만……그, 희진이나 은채. 그 외에 몇 명은……아예 세린에 대해 잊은 거 같은 반응을 보였어요. 그때도 무언가 잘못된 거 같다고 생각했지만, 더 무서운 건……그런 생각마저 잊어버린다는 사실이에요.”

……안 듣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쓰러진 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도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만 아예 나를 잊은 아내들이라니. 그래서야 대체 ‘아내’라고 부르는 의미가 어디 있을까. 그냥 여자지.

“전……너무 무서워요. 우리를 위해 많은 일을 해준 세린을 간단히 잊게 된 것도.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그 감각에 점차 익숙해져 뭐가 이상한지 알 수조차 없게 되는 것도. 제가 점점 저 자신이 아니게 되는 것도 무섭지만……그 공포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게 너무나 무서워요.”

무서운 것이 이렇게 많은데 그 모든 걸 잊어버리게 될 거 같다니.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었다. 무서운 것이 왜 무서운가, 무엇이 이상해서 무서워하는가도 잊게 돼버리다니…….

어떤 의미로는 궁극의 공포였다. 공포의 이유마저 잊게 된 채 모든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니까. 자의(自意)가 아니라 타의(他意)에 의해서 말이다.

메모지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닐까 싶었지만……헛수고겠지. 그런 걸로 거역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쉽게 풀이하자면……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 이상자. 험악하게 말하자면 미친 사람들이라 치자.

그 사람들에 대해 처음에는 공포를 느끼게 되지만 그들과 함께 있다 보니 자기 자신 또한 미친 사람이 되어버리기에 공포를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절대자에 의해 조작당하는 것이니 성질이나 세부 사항이 좀 다르긴 하지만……아주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잃은 채 누군가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살아가게 된다]였다. 젠장. 이렇게 요약하니 호러 영화가 따로 없군.

“이상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세린을 두고 카인과 여기에 있었던 것도 이상하지만……어째서 카인한테 그토록 열렬한 사랑을 보인 건지 저조차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의 말에 의하자면……그를 갈구(渴求)한 건 바로 저였을 텐데 말이죠.”

카인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풀이 죽는 로라를 보니 이건 확실히 심각한 상태라는 느낌이 든다.

카인을 먼저 원한 건 로라. 남편을 두고도 다른 남자를 바라는 창녀라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개소리에 조정간 자동 발사로 답해주긴 했지만, 정작 그를 원하던 로라는 왜 그를 원했던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다니. 아무리 봐도 조종당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전……세린과 함께 했던 시간을 기억하고 있어요. 세린과 함께 처음으로 몸을 나누었던 때. 결혼을 하며 ‘회복의 반지’를 선물로 줬던 것까지. 그렇지만……그럼 도저히 말이 안 돼요. 오래전에 세린과 몸을 나눈 건 기억나지만, 카인과 나누었던 섹스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할 수가 없어요. 애초에 그와 몸을 나눈 건지 어떤지조차 모르겠어요…….”

나도 기억하고 있다. 결혼을 기뻐하는 그녀는 메이를 데리고 함께 여관으로 왔었으며, 혜린이는 내 파혼(破婚)이나 다름없는 선언에 오줌을 싸기까지 했지. 그녀와 나누었던 섹스와 대화는 여전히 내 소중한 추억이었으며, 나 또한 그녀들과 했던 추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말이 안 됐다. 3개월보다 훨씬 더 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으면서 짧으면 1주. 길어도 10~11일 전의 일을 기억할 수 없다니. 하물며 섹스는 로라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자신이 좋아하는 육체적 교감의 시간마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다니. 어떻게 보더라도 무언가가 크게 잘못됐다는 증거였다.

“세린……제가 만약 위험한 순간에 처하거나 하면 저를 구하러 올 거죠?”

“당연하죠! 그걸 질문이라고 해요!?”

화를 내서는 안 됐지만 결국 터지고 말았다. 그녀는 슬픈 웃음을 지은 채 내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세린을 의심한 건 아니에요. 저도 세린을 믿고 있어요. 제가 소중하니 카인과 몸을 나누기 전에 이 방에 들어온 거겠죠. 설령 그러한 일이 아니더라도 전 세린을 믿고 있어요. 마을을 위해, 우리를 위해. 많은 걸 희생하면서까지 저희를 행복하게 만들어줬으니까요.”

내 손을 꼭 쥔 로라의 모습은 틀림없는 내 아내. 누구보다 나를 생각해주던 프레그넌트의 경비대장, 로라의 모습이었다. 겨우 2주 만이었지만 다시금 로라의 원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미어진다.

“세린을 믿는 마음은 지금까지 세린이 한 행동, 보여준 태도 덕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거죠. 하지만……카인은 그렇지 않아요. 지금 생각해보면……그와 있으면서 세린에 대해 잊기 시작했던 거 같아요.”

소중한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 같은 말을 되뇌는 소녀처럼, 로라는 ‘그래, 맞아요. 틀림없어요’라며 중얼거렸다.

“카인은……신기하면서도 무서운 사람이에요. 그와 함께 있으면……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느낌이 들어요. 세린과 함께 있어도 그런 느낌이 들지만 카인은 조금……아니, 많이 달라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제……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함께 있다는 사실만 존재한다면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이상하죠……?”

이상한 것은 카인뿐만이 아니라 자신들도 포함된다는 양 동의를 바랐다. 난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상한 건 카인이지 내 아내들이 아니거든. 오히려 그런 정신간섭 및 조작계열의 성질을 띤 것에 대해 여기까지 저항해냈다고 칭찬을 해도 모자랄 정도였다.

“카인과 함께 있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게 되어버려요. 세린과 함께 있으면 따뜻하고, 기분 좋고, 즐겁지만……카인과 같이 있으면……빠져든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져요. 설명하기가 너무 어렵네요. 지금까지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 되는 그 감각……황홀하면서도 무서워요. 예, 맞아요. 황홀하면서도 그 감각은 무서운 거예요. 소중한 것들이 단숨에 쓸모없게 되니까…….”

표현도 어렵지만 그 무서운 감각을 스스로 더듬어가며 설명해야 한다니. 이것은 일종의 정신고문이었다. 스스로가 견디기 힘든 정신 조작 및 간섭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걸 다시금 생각하며 정리해야 하니까.

“세린과 함께 보냈던 소중한 시간을 떠올리기 어렵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제가 누구를 사랑했는지, 나한테 있어 정말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게 되는 거 같아요. 그렇기에 혜린 씨는 세린한테 살아 있었냐고 물은 거겠죠. 카인과 함께 있다면 세린은…….”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니까요.”

침을 꿀꺽 삼킨 로라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 이번에 말한 ‘대단하군’은 카인을 포함한 미친 연놈들한테 한 말이었다.

내가 6개월 동안 허리 빠져라 고생했던 걸 단숨에 없애버리다니. 그것도 특별한 짓이 아닌 아주 평범한 일.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엄청난 짓을 저지르다니……. 고개가 저절로 좌우로 흔들렸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상황은 심각했고, 지금의 로라 같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카인과의 관계를 끊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과연 그게 가능할까? 방 안에 난 총알의 자국을 다시금 살펴본다.

조정간을 자동으로 맞춘 후 갈긴 것마저 모두 피한 그를……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카인을 내가 막을 수 있을까? 아니, 내 저항이 카인한테 방해나 되기는 하는 걸까? 절망적인 생각과 결과밖에 나오지 않는 머리를 감싼 채 다시금 깨달아야만 했다.

나는 카인을……이 ‘하렘 어드벤처’의 창조주한테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 작품 후기 ============================

점점 진실이 밝혀집니다. 로라와 대화를 함으로써 뭐가 이상한 것인지, 왜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 조금씩이나마 진실에 접근해가는 세린을 보니 그나마 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와 동시에 맨 끝에 결국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창조주인 카인한테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승패가 뻔한 승부에서 불리한 입장을 마음껏 맛보며 싸우다니. 실로 좆같겠죠.

게다가 그 불리한 입장도 원해서 겪는 게 아니라, 창조주인 카인이 ‘ㅎㅎㅎ어디 한 번 좆 돼봐라’라며 끼얹어주는 겁니다. 거부권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이쯤 되면 폭발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을 겁니다. 세린이 보다 나은 상황으로 갈 수 있도록 바랄 수밖에 없죠.

물론 제가 작가긴 하지만 갑자기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게 적을 수는 없습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죠.

‘존나 강해진 세린이 불을 뿜었다. 크아아아! 카인이 죽었다! 평화와 아내들이 되돌아왔다! 합삐합삐 엔딩!’

과연 이걸 독자분들이 납득할까요? 작가인 저조차 ‘나니★코레?’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돈을 내고 보는 독자분들은 ‘시발 장난빠냐 작가 새꺄? 이딴 거 보려고 돈을 주는 줄 아냐?’라며 화를 내시겠죠.

작가도, 독자도. 그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전개와 퀄리티입니다. 아무리 날로 먹는 걸 좋아하는 저라지만 이렇게 적을 수는 없죠. 모든 독자분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정도면 그나마 괜찮겠지’라고 생각할 정도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뒷통수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재는 하렘 어드벤처를 연재하고 있습니다만 후속작이 하렘 어드벤처의 후속작일지 외전일지에 대해서는 장담을 못 드리겠습니다. 50~100편을 기준으로 잠시 쉬며 스토리 정리 & 멘탈 회복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200편 정도까지 가면 또 잠시간 휴식 기간을 가질 거 같습니다.

로리콤MK님, 다시금 좋은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로리콤MK님의 코멘트대로 NTR에 꽤 거부감을 가지신 분은 많았습니다. 문제라면 다짜고짜 욕하며 인신공격성 발언 & 독불장군식 명령을 한 거였죠. 소설 연재하고 있는 조아라도 까는데 갑자기 욕한 악플러 말을 고분고분 받아들일 리가 없죠 =_=;;

줄거리(소개)에 NTR 요소에 대한 주의문을 추가해뒀습니다. 앞으로도 조언을 주시면 최대한 따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zxc54님, 줄거리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린을 포함해 총 13명. 현재 살아있는 세린을 제외하더라도 12명이 하렘 어드벤처의 세상으로 소환됐었습니다. 세린을 제외하면 모조리 다 죽었기에 사실상 ‘12명의 남자들이 희생됐다’ 정도로 이해해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2017년 8월이네요. 남은 2017년도 얼마 안 남았네요. 연재를 시작했던 게 2016년 11월 말이었으니 머지않아 1주년이 될 거 같습니다. 그 전까지는 완결 못 지을 거 같습니다. 해야 할 일이 꽤 많아서…….

앞으로도 독자분들을 위해 노력하는 작가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 많은 분들의 응원에 보답하고자 양을 좀 길게 적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페이스를 유지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양질의 글을 적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