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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158화 (158/235)

00156 「16-5 : 빼앗겨버린 아내들 (5)」 =========================

정신을 차린 곳은 왕궁의 침실이었다. 물론 그 침실은 마리아의 침실도, 아테나의 침실도 아니었다. 예전에 들렀던 침실보다 훨씬 더 좁고 허름한……어지간해서는 손님한테도 권하지 못할 수준의 침실이었다.

예전에 왕궁을 살피며 본 곳 중 하나였긴 했지만 그 사실을 떠올리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첫째 이유로는 넓고 멋진 공간이 많은 왕궁에서 이런 곳까지 세세하게 보고 기억할 정도로 내 기억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 이유로는 내가 막 쓰러졌다 일어나서 그런 것도 있었다.

아내들이 식사하는 곳으로 단숨에 쳐들어가 온갖 이야기를 들으며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듣다 보니 내 뇌가 의식 차단 명령을 내린 듯했다.

일어난 나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눈물을 흘렸다.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게 우는 거라니. 누군가 본다면 비웃을 일이겠군. 근데 난 전혀 웃기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의 뜨거움마저 거짓이었으면 했다.

이게 안 울고 배길 일이냐? 납치된 사이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아내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아내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 = 다른 사람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부터 시작해 몬스터 테이밍으로 사역(使役)했던 레이까지 죽었다. 그뿐만 아니라 제2의 고향이었던 프레그넌트는 초토화 상태가 되어버렸지.

승패는 병사한테 당연한 일이라고? 내가 예전에 승패병가지상사(勝敗兵家之常事)라는 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전쟁이 아니다. 프레그넌트에 사는 사람들은 병사조차도 아닌 일반인. 민간인이나 다름없었던 사람들이었단 말이다. 그들이 괴물한테 습격받아도 좋은 이유 따위는 세상 어디를 찾아봐도 없었다.

비록 단체 섹스 파티 때 몸을 섞는 것으로 시작된 인연이었지만 그들과 나눈 시간이나 대화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괴물 토벌을 하고 오면 수고했다는 인사부터 시작해 가끔 식사를 대접해줄 때도 있었고, 나나 혜린. 아내들한테 고마움을 나타내기도 했었다. 평화를 바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었으니까.

괴물을 토벌하며 금품이나 답례를 요구한 적은 없었지만 너무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좋지는 않다 싶어 그러한 대접을 몇 번 받은 적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프레그넌트에 와서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했었다.

사람들의 평화와 안전, 미소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도 좀 더 노력해보자……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지.

그런 마을 사람들이 품위도 없고 지능도 없는 괴물 새끼들한테 무참히 살해당했다는데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메이와 아이나가 눈물을 흘릴 때 내가 안 울었던 이유는 안 울었던 게 아니라 못 울었던 것이다. 도도한 웃음을 띤 그 개새끼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긴 싫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초인(超人)이 아니다. 피눈물도 없는 냉혈한(冷血漢)은 더더욱 아니고. 오히려 그들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밖에 전해 듣지 못해서, 이런 식으로밖에 애도해줄 수밖에 없어서 더더욱 슬펐다.

함께 살던 이웃들, 나의 연인들이기도 했던 그녀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죽어가다니!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마을이 부서지고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이건만……내 삶의 배우자이자 반려자.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이었던 아내들마저 더 이상 예전의 아내들. 내가 알던……나를 사랑하고 신뢰해주던 여인들이 아니었다.

사랑과 신뢰의 반지의 효과를 받을 수 없게 된 것뿐만 아니라 생사도 알 수 없었던 내가 돌아왔는데 그 카인이란 놈의 안위(安危)를 걱정하다니. 하하, 그야말로 한 편의 코미디였다. 내가 코미디에 나오는 ‘웃긴 놈’. 사람들을 웃기게 만들기 위해 온몸을 던져 연기하는 광대였다. 삐에로가 따로 없군.

잠을 잔 후 일어나면 머리가 개운해진다고 하는데……그거 다 구라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부렁이라고. 잠을 자고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에는 아내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파괴된 고향, 죽은 이웃들,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아내들.

좀 비인간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그래. 고향? 프레그넌트는 철저하게 파괴됐다. 안즈와 이미 가봤고 그곳에서 여행 물자를 충당했으니까. 이미 부서진 것은 마력으로 고칠 수 있으면 좋은 거고 없다 하더라도 당장은 이곳에서 생활하면 되니 부족한 게 없다 치자.

주민들?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는 소생(蘇生)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방법은 없다. 그들은 죽음을 슬퍼하지만 그만큼 아기를 낳으며 살아가므로 새로운 생명으로 그 죽음을 달랠 수밖에 없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들의 죽음은 마을과는 다르게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들은? 아내들은 죽을 정도로 다친 것도 아니었고 마을처럼 파괴되는 성질의 무생물도 아니었다. 살아있는 인간이었으며 아스카 같이 예외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사랑은 지금도 여전하고.

그녀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으며 앞으로도 그 시간이 이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 하얀 시발년이 내 일을 방해하며 목숨을 가져가기 전까지는’이라 해야겠다만. 그런 일이 있었지만 앞으로도 서로를 향한 사랑과 신뢰는 변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다.

그치만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너무 많은 기대를 하다가 결과나 사람한테 배반당하면 믿었던 만큼 실망이나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는다는 뜻이다. 누구나 들어본 적이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말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 시험 결과나 복권 등이 대표적인 예시지.

사정을 모르긴 했지만 납치당한지 5일째 점심때까지. 나는 그녀들이 나를 구하러 올 것이라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물론 그녀들의 등장을 믿으며 숲에서 기다린 나한테 돌아온 것은 야만족의 죽음과 아내들이 날 버렸다는 사실이었지.

지금 생각하면……그래도 나는 ‘그렇지 않아! 직접 사실을 확인해야 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없는 동안 일이 일어났듯이 세상일은 어떤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예고나 광고 하고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그녀들이 생사를 걸고 싸우는 동안 나 또한 야만족들과 목숨을 건 탈출극을 찍어야 했고, 그런 면에서 보자면 ‘거리는 떨어져 있지만 서로 위급한 상황을 겪었다’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아내들은 소중한 주민들과 이웃들을 잃어버렸지만 카인이라는 구원자를 만나 여기(왕궁)까지 올 수 있었다. 나? 몸도 마음도 씹창이 된 상태로 프레그넌트로 오니 폐허만이 날 기다리고 있었지. 서로 힘든 일을 겪은 건 똑같은데 결과는 왜 이 모양일까?

오, 그래. 안즈! 그녀들한테 카인이 있다면 나한테는 안즈가 있었지! 좋아서 얻게 된 아내는 아니지만 사실상 현재 내 첫 번째 아내가 되어버린 안즈를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새롭게 아내를 맞이한 걸 생각하니 혹시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템 창에서 [사랑과 신뢰의 반지]를 꺼내 장착하니……오오, 이럴 수가! 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숲에서 마력봉인수갑을 해제한 이후에도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던 마력과 반지. 하지만 현재 내 마력은 4500을 가리키고 있었다. 겨우 레벨 35를 달성한 내 마력은 원래대로라면 3,500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4,500이 됐다는 것은 1,000 포인트의 마력을 보너스로 받았다면 뜻이었으며, 이 보너스는 [사랑과 신뢰의 반지]의 효과로 얻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안즈는 나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걸 보자 눈물이 다시금 펑펑 쏟아졌다.

있었다……!! 적어도 한 명! 비록 아내들의 사랑과 신뢰가 나를 떠나버렸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를 믿어주는 여자! 예전의 아내들처럼 나를 믿고 따라주는 여자가 한 명은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눈물이 멈추지가 않았다.

콧물까지 질질 흘리며 짜는 모습을 아무도 못 봐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런 모습, 다른 사람한테 들켰다간 변명할 수조차 없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렇게 허름한 침실에 나를 묵게 해준 게 고마웠다. 아무도 안 오는 허름한 곳에서 펑펑 운다고 한들 누가 흉을 보겠냐? 오히려 귀신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도망가는 게 일반적이겠지.

귀신이라……. 늘어난 마력뿐만 아니라 안즈의 사랑과 신뢰에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던 나는 문득 ‘귀신’이라는 말을 되짚어 보게 됐다. 이 세상의 신(神)이라 말한다면 백발의 여자. 지금은 카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를 뜻하게 된다. 신이라는 걸 실제로 접할 줄은 몰랐지만 그런 충격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니 이런 생각도 들게 됐다.

신이 있으면 영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신비한 정도로만 치자면 신은 영혼이나 귀신 같은 개념보다 훨씬 더 상위의 것이다. 그렇다면 상위의 것보다 훨씬 낮은 하위의 개념. 영혼이나 귀신, 혼령 같은 게 존재한다 치더라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신이 있고 마법도 있는데 영혼은 왜 없냐는 생각마저 들었었지.

만약 영혼이 있다면……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과연 어디로 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영혼들이 천국과 지옥에 간다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흔한 사후세계의 개념이다.

좋은 일을 하면 천국 혹은 내세에 좋거나 높은 지위의 생명으로 태어나며,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가거나 윤회(輪廻)에 실패. 혹은 곤충이나 동물 같은 미물(微物)로 태어나게 된다는 건 누구나 한 번 이상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염라대왕이나 저승사자 등의 개념이 동서양에 존재─이미지는 다르다. 우리는 저승사자라 부르며 저승으로 데려갈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책 등을 가지고 다니지만, 서양에서는 사신(死神)이라 불리며 낫 등을 가지고 다니는 이미지다─하지만 그건 넘기자.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바로 영혼의 관리를 맡고 있는 신이 카인이라는 점이지! 저 빌어먹을 새끼가 자기가 만든 세상의 영혼이나 인간을 소중하게 다룰 거라 생각하냐? 난 전혀 안 하는데?

만약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괴물을 불러 사람들을 무참하게 죽였겠냐? 그 죽음 속에서 화려하게 등장해 괴물들을 죽였겠냐고!?

오직 자신의 극적인 등장만을 위해 사람들을 무참히 희생시키다니. 어떻게 사람으로서……아니, 창조주로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도 그렇게 실실 웃고 있었다는 걸 감안한다면……이 세상의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이 만든 세상과 사람마저 그렇게 험하게 대하는데 내 아내들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금까지 잠들어 있던 분노가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내 아내들! 슬픔과 기쁨 등으로 잊고 있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주제가 다시 내 머리에 퍼진다!

얘들아……너희 설마. 정말로……그 새끼랑 한 거냐?

너희 남편은 사선(死線)까지 넘어가며 그 지옥 같은 숲과 괴물들로부터 도망쳤는데……너희는 저 새끼랑 이 왕궁의 푹신한 침대에서 섹스를 나눈 거냐?

그 피비린내 나는 지옥에서 목숨만 건져가며 헐레벌떡 도망치던 날! 납치된 지 5일째 되는 밤쯤에……나와 안즈가 숲에서 고래고래 소리쳐가며 싸우고 있을 때 너희는 그 새끼랑 달콤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냔 말이다!?

그 사실을 상상하자 다시금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람들의 죽음과 마을의 파괴도 슬펐지만……그건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 혹은 ‘나중에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치유할 수 있고 마을은 고치면 되니까.

하지만 아내들의 사랑과 신뢰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첫 번째로……그녀들의 사랑과 신뢰. 쉽게 말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녀들의 감정이다. 그녀들이 가진 감정이나 마음을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는 뒷북이다만……사라진 ‘자지의 맹세’를 쓴다 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법에 의한 것. 진심으로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런 입 발린 사랑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사랑을 받는다고 한들 [사랑과 신뢰의 반지]는 효력을 발휘하지도 않을 테니까.

아이템의 효과 하나마저 발동시킬 수 없는 사랑 따위는 거짓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아내’라는 여인한테서 그런 사랑을 받으려는 것 자체가 이미 넌센스. 말할 가치도 없는 거지. 야, 결혼한 여자한테 거짓된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냐!?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가 걸작인데……그 상대가 카인이었기 때문이다. 카인이라는 이름과 멋진 모습을 가지고 이곳에 나타나긴 했지만 그 정체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절대자다. 그녀들을 꼭두각시처럼 지배할 수 있는 걸 물론이고 감정과 마음까지 모조리 조종할 수 있는 카인한테서 내 아내들을 되찾아야 한다니?

게임으로 치자면 ‘제작자한테 이겨라’였다. 이게 말이 돼? 아니, 최종 보스도 아니고 제작자?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는 아무리 강해봤자 결국 캐릭터일 뿐이다. 제작자를 비롯해 플레이어한테는 아무런 타격조차 줄 수 없는 폴리곤 쪼가리, 그래픽 범벅의 데이터일 뿐이다.

나는 바로 그 폴리곤 쪼가리, 그래픽 범벅의 데이터였다. 어, 아니군. 생각해보니 그 이하다. 도서관에서 그 빌어먹을 카인 연놈들한테 소환당해 이 고생을 한 것도 모자라 지금도 현재완료진행형으로 수난을 당하고 있으니 말이지. 주인공이라는 호칭을 가진 놈들은 이렇게까지 수모와 고난을 겪지는 않거든.

인생 한 방에 훅 간다고 하는데……하하, 진짜네. 군대에서 경험 못 했던 것을 설마 판타지 세상에 와서 경험하게 될 줄이야. 정말 훅 가버린 내 인생과 처지를 생각하니 웃음이 안 나왔다. 안 웃기거든. 오히려 속에서 슬픈 무언가가 목구멍까지 올라왔고 난 오열과 함께 또 울어야만 했다.

야, 혜린아. 혜린이를 비롯한 모든 아내들한테 묻고 싶었다.

너희한테 있어서 대체 난 뭐였냐?

혜린이와 이 세상에 온 후로는 정말 목숨 걸고 싸웠다. 프레그넌트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하루하루가 싸움의 연속, 삶의 투쟁이었다. 프레그넌트에 도착한 후에도 인생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지.

제2의 고향으로 결정한 프레그넌트에서 무상으로 괴물 토벌을 하며 아내들을 만들고, 여행을 떠나게 됐지. 많은 걸 경험하며 아내들을 만들고 평화와 행복, 안전까지 이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주 많은 것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기에 나 자신 또한 은근히 내가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했었다. 6개월 이상 함께 지내며 소중한 아기의 성장을 기다리고 있던 나날은 정말 꿈만 같았지.

그렇게 행복하면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겨우 1주일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정확히는 5일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나를 버리다니?

지금까지 목숨 걸고 괴물 토벌하랴, 동생 데려오랴, 마을 도와주랴 노력하고 싸워왔던 내가 1주일도 안 되는 5일짜리? 5일 만에 버릴 정도로 가치 없는 인형, 꼭두각시, 노예로 전락해 버리다니? 야, 이게 말이 돼?

이걸 생각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울면서 웃으니 좀 웃겼지만……야, 생각을 해봐. 존나 웃기잖아?

6개월이니 단순히 한 달 30일이라 치더라도 180일이다. 5/180이라니. 지금까지 함께 한 시간의 1/36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나는 버림받은 거다. 5일차 점심 지나서 수갑을 풀었으니 ‘5일’이라는 시간마저 완전히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는 거지.

사랑과 신뢰, 목숨, 운명을 함께 하며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겨우 1주일도 안 되는 시간 만에 모든 마음이 바뀌었다고? 나랑 보냈던 모든 시간과 추억이 5일밖에 안 되는 시간 만에 모조리 머릿속에서 날아갔다고?

생선이냐? 생선도 3초는 기억을 하는데 생선보다 몇 천 배 이상 발달한 영장류(靈長類)가 6개월 동안의 추억을 5일도 안 되는 시간 만에 다 까먹었다고? 하하…….

“……지금 장난 빠냐, 시발년들아?”

결국 욕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니……그래도 꾹 참고 있었다. 식사를 하며 그 빌어먹을 새끼와 담소를 나누는 와중에도 대놓고 시발년이라고 하지는 않았었다. 왜냐고? 그래도 끝까지 믿고 있었으니까. 내 아내들이 나를 버린 게 아니라고. 나를 걱정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왔을 거라 믿고 있었거든.

근데 아니더라?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카인이 대신 있었고 마리아와 아테나는 그 새끼한테 음식을 떠먹여주기까지 했다. 예전에 나한테 해주던 그 앙증맞은 행동이 그토록 좆같이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카인을 겨누지 말라, 공격하지 말아 달라 등. 카인, 카인. 너네 너희 남편이 누구인지 기억은 하니? 뇌에 기억 용량이 남아 있기는 하냔 말이다.

사람에 따라 크고 작기도 하며 아예 없기도 하지만……나는 그녀들을 위해 노력했다. 일종의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해도 과언은 아닐 거다.

혜린이한테는 목숨.

로라와 메이한테는 사랑.

아이나한테는 마을의 미래와 사랑, 고민 해결.

그 후에 만난 아내들한테도 크고 작은 사랑과 은혜를 베풀었다.

앞서 말했고 지금도 말하지만……난 딱히 그들한테 금전적인 보상 등을 요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식사나 대접이라면 가벼운 것이었고 성질이 달랐기에 받은 적이 있다만, 대놓고 ‘돈 000을 내놔라!’라고 하지는 않았었지. 그녀들 또한 내 행동에 일종의 감명을 받았기에 나를 좋아하게 됐었는데……지금 와서 이런 꼴이 되니 하나 묻고 싶네.

내가 봉사활동 센터 직원이냐?

목숨 걸고 봉사활동 하는 놈이냐?

이게 대체 다 뭐냐? 왕? 임금? 야, 너희 같으면 왕이나 임금을 ‘자리가 없어요’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허름한 곳에 갖다 넣겠냐? 왕좌(王座)는 오직 왕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다. 왕한테 있어서 공간의 부족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마리아나 아테나의 침실이었다. 그녀들 또한 내가 침실에 오는 것을 좋아했었고, 함께 침실에서 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이런 곳에 홀로 처넣었다고? 장난 빠냐? 왕에서 순식간에 목숨 걸고 봉사활동 하는 호인(好人)으로 전락해버렸다.

분노케 만드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걸로 끝날 거 같으면 시작도 안 했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프레그넌트 사건부터 시작해 오늘날까지 겪은 그녀들의 이야기. 근데 기절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것. 그건 바로 ‘나’였다.

프레그넌트가 부서져서 마을 사람들 데리고 텔레포트?

그래, 좋아! 아주 좋지! 내가 없었다지만 그녀들의 생사결정권은 나한테 있었던 게 아니니까!

사람 살리는 거? 좋다!

마을 사람들을 생각하는 갸륵함? 나쁠 리가 없지?

존나 좋아! 아주 좋다고! 근데…….

그 이야기 속에 내 걱정 있었냐?

그 이야기 안에 내 목숨이나 존재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이 있었냐고.

내가 알기로는 없는데? 설령 있었다 치더라도 아주 조그마한 부분이었겠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어진 세린이 걱정됐지만’이라는 부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설령 있었다 치더라도 그녀들의 태도가 날 걱정하는 사람의 태도였냐?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남기고 간 적도 없는데 편지가 남아 있었던 것도 우스웠지만, 겨우 그 편지 한 장밖에 안 남기고 사라진 내 걱정은 하지도 않았냐? 텔레포트를 한 다음 아무도 없어진 프레그넌트에 내가 오면……나는 어떻게 하라고?

너희가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무슨 수로 알아낸단 말이냐? 내가 무슨 초능력자냐? 점쟁이야? 그걸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단숨에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걸 불친절이라 부르지 않으면 무얼 불친절하다고 불러야 할까? 아무리 편지를 남기고 갔다지만 남편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눈꼽만큼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외간 남자한테 추파를 던지는 꼴이라니. 정말 암캐, 걸레, 시발년들이군. 웃음이 나온다. 이런 년들을 위해 내가 최선을 다해 싸웠다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는 어디로 갔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전혀 언급도 없이 사라져버리다니. 그 후에 내 걱정은 안 했냐? 하다못해 누군가 프레그넌트에 돌아와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었으니 수도로 와라’라는 메시지를 남길 생각을 단 한 명도 못 했냐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못 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안 할 필요가 있냐고? 물론 있고말고. 그 빌어먹을 영웅 나리, 카인님께서 멋지게 행차하셨는데 내가 더 이상 필요했겠냐? 당장 내가 식사를 하는 곳으로 들어갔던 때를 생각해봐라. 뭐? 살아 있었냐고? 하하……2주 간 자리를 비웠던 내가 순식간에 ‘돌아올 리 없었던 고인’으로 변한 순간이었다.

내가 나를 왕이나 임금처럼 떠받들라고 했냐?

내가 나를 하늘처럼 모시고 대하라고 했냐고.

아니잖아!

너희가 원하는 것, 원했던 것, 바라던 것!

모두 다 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지!

힘들어도 분신을 만들어 너희를 만족시켰고, 내가 할 필요가 없는 일까지 모조리 했었다! 가끔은 내가 병신 호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최선을 다했었는데……. 보답이 이거냐? 이 허름한 공간에? 아니지, 이건 아니야. 이건 절대 아니라고…….

얼굴을 좌우로 흔들며 현실을 부정했다. 내가 나쁜 짓을 하긴 했지만 이런 취급이나 대접을 받을 정도로 그녀들한테 잘못하지는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오히려 걱정하며 ‘왜 이제야 온 거냐’, ‘다친 곳은 없느냐’, ‘프레그넌트에 갔다 온 거냐?’라고 물어도 모자랄망정 살아 있었냐니…….

눈물이 끊임없이 흐른다.

슬픔이 하염없이 나온다.

내 안에 이토록 많은 슬픔과 눈물이 있었는지 나 자신도 몰랐기에 오히려 놀라웠다. 동시에……그리웠다. 평소에 식사를 떠먹여주면 곤란해 하면서도 그걸 받아먹던 나. 그걸 좋아하며 계속해서 식사를 떠먹어주던 아내들. 그런 아내들을 보며 질투심을 보이던 다른 아내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납치를 당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너무나 짧은 시간 만에 내가 지금까지 누리던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최악의 사태와 고통이 내 마음과 추억을 마구 헤집고 다녔고, 난 그제서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내 생각 이상으로 내 아내들, 그녀들과 함께 보내던 삶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 문구가 떠올랐다.

『후회는 언제나 늦게 하기 마련이며, 대가는 항상 큰 법이다』

그래.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이렇게 늦어질 줄은 몰랐지. 애초에……이런 사태가 올 거라는 생각조차 못 했었다고. 이런 곳까지 와버리니 내가 잃어버렸던 것들임과 동시에 내가 무엇보다 사랑했던 것들의 가치를 이제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잃어버린……아니, 빼앗겨버린 내 소중한 나날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와 동시에……더 이상은 그것들을 되찾을 수 없을 거라는 절망과 슬픔도 말이다.

눈물을 흘리던 나는 문득 안즈를 찾게 됐다. 안즈는 이곳에 없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꽤 늦은 시각이었기에 그녀를 찾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홀로 자기는 쓸쓸한 것도 없지 않아 있었기에 눈물을 닦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작고 허름한 침실에서 나온 후 안즈가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회사일 힘들다구!

코멘트와 추천, 선작, 쿠폰 등이 도움이 된다구!

느긋하지 못해 미쳐버린 작가가 점점 윳쿠리로 변해간다구!

미친놈 아니랄까봐 내용과 전개가 점점 산으로 가버린다구!

이러다간 언젠가 윳쿠리까지 나올지도 모른다구!

코멘트를 맘껏 적어달라구!

추천도 팍팍 넣어달라구!

쿠폰도 가끔 쏴달라구!

……느그타게 이쯔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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