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4 「16-3 : 빼앗겨버린 아내들 (3)」 =========================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이나 소설, 영화나 드라마. 이와 같은 영상·인쇄 매체에서 【주인공의 극적(劇的)인 등장】은 자주 쓰이는 클리셰다.
다양한 작품군(作品群)이 존재하지만 어느 작품이든 주제가 있기 마련이며, 주인공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주인공 없이 진행되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매우 특이한 거겠지.
주인공(主人公)! 이 얼마나 멋진 단어란 말인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그런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되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된다고 한들 ‘자신이 원하는 주인공’이 되지 못해 자기혐오를 품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작품은 장르에 따라 달라진다. 액션물, 코미디물, 학원물, 공포물 등. 어느 장르든 간에 그곳에는 주인공이 있으며, 주인공을 따르는 여성 주인공─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헤로인’이지만 일본어 발음으로는 ‘히로인’이라는 발음이 되었기에 헤로인, 히로인 등 여러 단어로 쓰이고 있는 실상이다─이 존재한다.
주인공과 히로인이 서로 사랑을 나누거나 하는 것도 나오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니 중요한 본론으로 다시 돌아간다. 주인공이 극적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필요로 한다.
1) 주인공의 부재(不在)
- 당연한 소리지만 주인공이 가만히 있는데 그걸 ‘등장’이나 ‘출현’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파워업을 위한 특훈이나 실종, 재기불능(再起不能) 상태를 딛고 일어나 멋지게 등장해야 ‘극적인 등장’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이벤트를 재기 혹은 각성(覺醒)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재등장 후 존나 강해져 있거나 하지 않으면 각성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2) 동료들의 위기(危機)
- 동료들이나 히로인이 전혀 위험하지 않는데 멋지게 등장한다고 한들 아무짝에도 쓸모도 없고 의미도 없다. 모두 힘들고 괴롭다 못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타나는 주인공이야말로 찬란한 빛을 발하는 법! 그런 위기에 등장해 멋지게 적을 개발살─개박살 아님. 개발살─내면 주인공의 주가 & 인기는 UP!
3) 압도적으로 강력한 적의 공격
- 위에서 설명한 2)와 마찬가지다. 동료들이나 히로인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조무래기, 피라미를 상대라면 극적인 연출의 효과는 사라진다.
동료들을 모두 박살내고 히로인을 죽이려고 하는 찰나 멋지게 나타난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 주인공에 대한 히로인의 사랑이 더욱 깊어질 뿐만 아니라 적한테 ‘뭐, 뭐지!?’라는 정신적 충격 효과를 가할 수도 있다!
적한테는 충격과 동요를!
동료한테는 주인공에 대한 믿음을!
히로인한테는 깊은 사랑과 신뢰를!
적아군 할 것 없이 엄청난 포스와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이벤트!
그게 바로 [주인공의 극적인 등장] 클리셰다!
우리 솔직해지자. 흔히 있잖아? 동료들이 모두 쓰러지고 히로인이 적한테 험한 꼴─이 험한 꼴에는 살인이나 살해, 폭행 등 험악한 것도 들어가지만, 므흣흣한 이벤트도 들어간다. 내가 이 이상 말할 필요가 있을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을 당하기 직전, 혜성 같이 나타나는 의문의 남자!
자신이 하려는 일을 방해당한 적은 ‘누구냐!?’라며 소리 높여 부르며, 이는 히로인의 주의마저 집중시키게 하는 효과를 지닌다!
크으으읏! 그래! 적의 허둥대는 모습이 주인공에 대한 히로인의 사랑과 믿음을 더욱 더 크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웃우우우우웃!
……미안하다. 좀 미쳐봤다. 어흠! 으흠! 여하튼, 그런 위기의 순간!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난 자는 이전에 박살이 나거나 죽었다고 여겨지던 주인공! 그러한 주인공을 본 적은 ‘너, 너는……니가 어떻게! 죽었을 텐데……!?’ 같은, 3류 엑스트라나 지껄일 법한 대사를 내뱉는다.
다들 알 것이다. 사람은 세 가지 끝을 조심해야 한다고. 입 끝, 손(주먹) 끝, 좆 끝. 이놈은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그건 바로 ‘넌 이전에 죽었을 텐데!’같은 사망 플래그지.
왜 있잖아, 적한테 공격을 한 다음 ‘해치웠나?’같은 대사를 하면 좆☆망 ^0^/ 사람이 말을 조심해야 한다니까?
극적으로 나타나는 주인공은 단숨에 적을 처발라버리고 히로인을 위기에서 구해낸다. 만약 주변에 아무도 없거나 히로인을 도우러 오는 사람들이 늦다면 그 사이 진한 키스를 하겠지! 그런 거 한두 번 본 줄 아냐? 영화든 만화든 간에 그런 장면이 나오면 한숨이 나온다. 여자 친구 없어서 그런 거 절대 아니다! 워낙 많이 봐서 그렇지!
위에서 말한 ‘솔직해지자’가 무슨 뜻이냐고? 어, 음……좀 부끄럽다만. 모두 한 번 정도는……한 번 이상은 생각해봤잖아?
극적으로 나타난 주인공의 이미지에 자기 자신을 투영시키는 행동을!
주인공이 아닌 자기가 나타나 불의를 물리치고 히로인을 구하는 상상을!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구하며 끝에는 진한 키스로 사랑을 확인하는 엔딩을!
야, 거기! 쪽팔린다고 이불 차지 마라! 너희는 이불이나 찰 수 있지 나는 이거 설명하랴, 총 들고 겨눈 채 이야기 들으랴, 작가 까랴……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말이다!
이불을 차며 과거를 괴로워하는 건 좋지만 일단 이야기는 듣고 하자! 우리 솔직해지자! 응? 난 솔직한 마음으로! 진솔한 태도로 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거다!
혜성 같이, 섬광 같이 나타나는 주인공은 적보다 훨씬 강하기 마련이며 그 덕분에 히로인을 구할 수 있지! 히로인은 그러한 주인공의 성품과 힘, 활약에 마음을 빼앗기기 마련이고! 누구나 그런 멋진 주인공이 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적어도 한 번 이상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마음 먹어본 적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한 상상을 해봤으니까,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 영웅(히어로)이라는 것에 이끌리게 된다.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초자연적인 일, 벗어날 수 없는 일상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과 감동, 희열을 얻기 위해 창작물의 세상에 뛰어드는 것이니 이는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이다.
‘주인공이 되고 싶다’ 혹은 ‘주인공을 대신해 행동해보고 싶다’라는 욕구는 정말 쉽게 볼 수 있다. 인기 애니메이션을 바탕으로 한 팬픽이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예시 중 하나다. 주인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캐릭터로 만들어 집어넣거나 하는 건 요즘 와서는 너무나 흔하디 흔한 설정 중 하나가 됐다.
이러한 욕구를 가지는 것은 비단 남자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여자들도 그러한 욕구를 가지고는 한다. 남자들이 왕성하게 활동해서 그렇지, 여자들 또한 이러한 욕구를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남자든 여자든 간에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여 인정받고 싶어 할 테고, 이게 여자들의 입장에서 표현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웠다.
미리 말해두지만 BL은 아니다! 카인이라는 남자 캐릭터가 나왔다고 나와 카인이 서로 박아대며 사랑을 고백하는 BL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머리 박아라. 난 이성애자라니까!? 동성애자 아니라고! 왜 내 말을 씹는 건데? 내 말이 껌이냐? 씹게?
아아……지금도 내가 이렇게 호소하는데 나와 카인이 알몸으로 뒹구는 걸 상상하는 사람이 있을 거 같다. 피눈물이 흐를 거 같다…….
하아……관두자. 상상은 자유니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여자들의 경우 주변의 남자들이 자기한테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상황. 흔히 말하는 ‘여성향(女性向) 작품’의 성향을 띠게 된다.
아무런 특징도, 매력도 없는 여자한테 남자들이 달라붙어 사랑에 빠지게 되는 작품 성향을 띠게 되며, 이는 한국이든 외국이든 간에 상관없이 볼 수 있는 설정 중 하나다.
모두한테 인기 있는 매력적인 여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는 누구나 가진 것이기에 이를 욕할 수는 없었다. 남자들이 바라는 마음 또한 성별과 상황이 좀 다를 뿐, 근본적인 것은 같으니까. 한국에서는 ‘귀여니 시리즈’가 대표적이었고 외국에서는 이를 다룬 다양한 작품들이 존재했다.
외국 작품이지만 뱀파이어가 나오는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재미있게 읽었다. 군대에서 읽었었는데 엄청 재미있었지……. 요즘에는 볼 일도 없고 볼 수도 없게 됐지만 그 작품을 보며 ‘오오, 그렇구나. 이게 바로 여자들이 좋아하는 작품 부류구나……’하고 감탄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까지 ‘어쩌다 프레그넌트가 폐허로 변하게 됐는가’에 대해 듣던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이유야 간단했다. 내가 총으로 겨누고 있는 남자이자 아내들을 위기에서 구한 남자. 카인(Kain)이 극적인 등장과 함께 아내들을 위기에서 구했기 때문이다.
아내들을 위기에서 구한 거? 그래, 좋다. 당시의 나는 야만족한테 잡혀 험한 꼴을 당하고 있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내가 아내들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누군가 내 소중한 사람을 지켜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볼 때 카인이 한 행동은 매우 적절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고맙다는 생각은 전혀! 눈꼽만큼도 들지 않았다. 내가 배은망덕한 새끼라서 그렇냐고? 그렇다! 난 사실 배은망덕한 새끼……는 아니고!
내가 속이 좁아도 그 정도로 속이 좁은 놈은 아니거든요? 나는 내가 입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보답하려 하는 놈이다!
전혀 고맙다고 느끼지 않았고 느낄 수도 없었던 이유는……카인이라는 이름을 댄 이 하얀 머리 새끼가 이 세상을 창조하고 관리하는 여자. 나를 포함해 많은 남자와 여자들을 이곳으로 소환한 여자. 모든 일의 원흉이자 사건의 주범인 백발(白髮)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백발의 여자라고는 하지만 작가나 나나 이 여자에 대해 많은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얀 머리 미친년, 시발년, 개 같은 년, 좆같은 년 등 다양한 수식어를 붙여 부르고는 했다. 대부분 욕이었으며 호의적인 형용사를 붙인 적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를 발견했을 때부터 ‘설마 그런 짓을 했겠어?’라고 생각했었지만……불길한 예감은 이번에도! 몇 번이고 적중했듯이 이번에도 확실하게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부서진 폐허를 보며 그녀가 무슨 농간을 부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스스로 관여를 했다는 점에서 이미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짓이 뭐냐고? 뭐긴 뭐야……자작극(自作劇)이지!
저 새끼(년) 혼자 원맨쇼를 벌인 거란 말이다!
다시 프레그넌트로 돌아갔을 때 마을은 가히 씹창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일주일이나 납치되어 있었던 내가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을 리가 만무했기에 내 멋대로 당시의 자료나 흔적을 가지고 ‘무슨 일이 일어났나?’라는 생각을 해야만 했다.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내 멋대로 내린 결론이었으며 신뢰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런 불확실한 추측과 결론을 믿을 수도 없었기에 아내들을 만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설명을 받아야만 했다.
당시에는 마리아나 아테나, 헬레나가 관여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야기를 들은 결과 그들이 관여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유야 뻔할 뻔자 아니겠는가? 내 앞에 있는 이 빌어먹을 새끼가 모든 일의 원흉인데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으니까!
나를 엿 먹이기 위해 나뿐만 아니라 내 소중한 아내들한테까지 괴물을 보내는 미친 짓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스스로 이 ‘하렘 어드벤처’의 극단(劇壇)에 올라오다니! 정말 대단한 연출가이자 각본가였다. 이게 날 엿 먹이는 것만 아니었다면 극찬을 해도 모자를 정도였다.
은인이다, 마을을 구했다는 말을 들으니 그때부터 촉이 왔지만 카인이라는 이름의 이 시발놈이 아내들을 멋지게 구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더 이상은 들어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안 봐도 비디오다. 이런 속 보이는 자작극을 벌이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아이나.”
이야기를 하던 아이나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몰라 곤란해 하는 거 같았다. 자, 어디 한 번 확인해볼까.
“그 이후의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으응. 말해. 알고 있는 거라면 대답할게.”
고맙군. 자, 그럼 단적으로 물어보자. 간단명료하게.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예, 아니오로 대답해줘. 알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나를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자, 가볼까.
“이 카인이라는 놈이 너희와 마을 사람들을 구했다.”
“……맞아.”
예, 자작극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 시발놈아. 좀 빠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마지막 질문이다.
“이 새끼가 모두를 구한 뒤 너희를 수도로 텔레포트 시켰다.”
아이나의 표정은 어떻게 그걸 알았냐는 듯했다. 저 표정을 보니 대답을 안 해도 알 것 같군.
“마, 맞아……. 마리아한테 먼저 양해를 구한 후에 했어. 근데……어떻게 알았어?”
그럼 그렇지. 두 가지 모두 다 ‘예’에 해당하는 대답이 나왔다. 그 대답을 듣자 난 미친 듯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지금까지 아껴둔 웃음보가 단숨에 터진 듯했다. 그를 겨누고 있던 총마저 내린 채 웃을 정도니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쉽게 상상이 가리라.
얼마나 웃겼으면 난 바닥에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미친 듯이 웃어댔다. 식사 중에 들어온 시점부터 이미 매너나 에티켓을 어긴 상태였지만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도를 넘다 못해 지나칠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껄껄 웃어본 게 얼마만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왜 웃냐고? 웃기잖아. 이게 웃지 않고 배길 일인가?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절대자. 모두를 지배하고 세뇌하고 조종할 수 있는 인물이 이렇게 공을 들여 자작극을 만들었는데! ‘카인’이라는 이름의 남자로서 극적인 연출까지 곁들이며 나타났는데 이 어찌 웃지 않고 견딜 수가 있단 말인가?
너무나 웃겼다! 내가 엿을 먹긴 했지만 그 궁극적인 목표가 이 ‘하렘 어드벤처’에 직접 들어오기 위해서라니!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한 것도 모자라 스스로 오글거리는 등장을! 오그리토그리하다 못해 손발이 오그라드는 외모를 자랑하며 나타난 게 고작 이딴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니! 항암제라도 먹어야 하는 거 아닐까?
이미 충분히 웃겼지만 더 웃긴 건……나한테 그게 뽀록났다는 거다! 내가 없던 동안 일어난 일을 메이한테 듣기 전부터! 은채나 다른 아내들이 말한 것, 취하는 태도, 그에 대한 사랑의 감정 등을 통해서 의심은 가정이 됐고 가정은 사실이 됐다!
일을 진행시킬 거면 아무한테 들키지 않도록 은밀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진행시켰어야지! 대체 이게 뭐냐?
스스로 나타난 것도 모자라 나 같은 놈한테 들통 날 정도로 엉성한 계획이라니!? 멋지게 등장해 날 엿 먹이기 위해! 오직 그것만을 위해 마을 사람들부터 시작해 야만족까지 모조리 다 죽였다고? 그 미친 빔 공격까지 선물로 줘가며?
난 천천히 일어난 후 다시금 카인을 조준했다. 주위에서는 내 행동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대부분 내 아내이긴 했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비난이 들려올 때마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장담컨대 지금 내 뇌는 이 세상에 있었던 때 중 가장 맑은 상태일 거다.
이 와중에도 엷게 웃음을 띤 저 면상을 보니 가증스럽다 못해 증오스럽다. 내가 당장 총을 쏘더라도 놈은 죽지 않겠지. 죽을 턱이 있나? 이런 걸로 죽었으면 옛날 옛적에 죽였다. 내가 이렇게 활개 치게 내버려 두는 것도 절대적인 자신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절대 죽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그렇지 않고서야 총부리가 자기 눈앞에 있는데 웃을 수 있을 리가 있겠냐?
“즐거웠냐?”
그는 내 물음에 대답 대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거냐? 빌어먹을 놈. 이 빌어먹을 놈의 ‘화려하고 극적인 등장’을 위해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는지 알기나 아냐? 마을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야만족까지 죽었다. 아무리 적게 세도 100명 이상이 죽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이상하다……? 내가 프레그넌트를 돌아다니는 동안 혈흔(血痕)이나 시체, 살점 따위는 없었다.
그럼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시체를 여기까지 가지고 왔다는 건가? 아이나한테 설명을 요구하니 그녀는 제발 총을 내려 달라고 했다.
아아……이딴 것도 정말 싫다. 왜 있잖아. 지금까지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 한 동료들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개뼈다귀한테 속아 그놈 편 들어주는 거. 일종의 내분(內紛) 비슷한 이벤트라 해야 할까.
내분이라고 하니 귀엽군. 실제로 겪어보니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좆같았다고 표현해도 모자랄 정도네. 지금까지 도와주고 힘든 일, 기쁜 일을 함께 겪었던 아내들이 지낸지 2주도 채 되지 않은 저 새끼 편을 들며 총을 내려 달라 부탁하다니……. 생각 같아서는 여기 있는 사람 모두를 쏴 죽여도 시원찮을 판이다.
총을 내리지 않으면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 거 같았기에 결국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의외로 무르다고? 하핫, 무슨 소리를. 이야기 다 들으면 다시 조준할 건데…….
뭐? 약속?
누가?
누구랑?
언제, 무엇을, 어떻게, 왜?
난 그런 약속 한 적 없는데?
난 총을 내리지 않으면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 거라 했기에 조준을 그만둔 것뿐이다. 이 머리 허연 기생 오래비 같은 놈한테 총을 절대 겨누지 말라 같은 말은 하지도 않았다.
계약하기 전에 계약서 잘 읽어봐야 한다는 말 모르냐? 모르면 잘 됐네.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계약서나 동의서 등을 미리 잘 읽어 놔라. 읽어놔서 손해 볼 것 없다.
비행 마법을 쓴 채 투영마술을 쓴 그 연출은 누가 보더라도 나를 염두(念頭)에 둔 연출이었다. 목숨이 위험한 때에 멋지게 등장해 적을 쓰러뜨렸을 뿐만 아니라 분위기나 공격 방법마저 나랑 비슷하다니. 허, 참……. 내 공격 방법에 특허권을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등장한 그는 아내들 앞에서 어렵지 않게 괴물들을 차례로 죽여 나갔다. 가지고 있는 검과 마법을 이용한 그의 전투 방법은 나와 안즈가 취했던 것과 매우 흡사했다. 투영마술로 적의 머리나 급소를 공격하면 다급하게 방어 상태로 들어서는 괴물의 특성을 이용한 거겠지.
투영마술뿐만 아니라 바인드나 로라가 쓰던 소드 스킬까지 썼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더 짜증이 몰려왔다. 짜증도 짜증이었지만 이번에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허허, 이 새끼 봐라……? 아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마법과 코스튬의 능력까지 다 갖춰서 튀어나왔다 이거지?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카인─그년, 이놈 하다 보니 귀찮아졌다. 그냥 카인이라고 부를 생각이다. 어찌 됐든 이놈이 그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한테 있어서 나를 엿 먹이는 것은 그나마 몇 안 되는 오락일 것이다. 그 오락을 즐기며 자기 또한 이 ‘하렘 어드벤처’의 무대에 올라올 생각을 한 건 솔직히 좀 놀라웠다.
지금까지 어둠 속에서 남 몰래 일을 진행하던 자. 굳이 말하자면 흑막(黑幕). 모든 일의 주모자(主謀者)나 다름없는 그녀가 ‘카인’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등장하다니.
위대하신 몸이 어찌하여 그 귀한 몸을 이끌고 여기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카인이라는 남자로 등장해 한 행동은 어딜 보더라도 ‘진정한 주인공’이 취해야 할 행동이었다.
생각해봐라. 백발에 붉은 눈. 중2병 냄새 풀풀 나는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죽이려 하는 괴물을 단숨에 제압하는 모습이라니!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라면 속된 말로 뻑 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뻑 간다’는 말은 뻑 or 퍽(Fuck) 하러 간다는 뜻이 아니라 한눈에 반한다는 뜻이다.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설명을 첨부한다.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카인한테 있어서 괴물과 싸운다는 건 그야말로 넌센스. 쓸데없는 짓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상을 만들고 모두를 지배할 수 있는 자가 마법과 무기까지 써가며 바리바리 싸우다니! 우리가 있는 무대(舞臺)에 올라온 것뿐만 아니라 그런 수고까지 감안했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누가 이 세상의 신(神) 아니랄까봐 이목구비부터 시작해 전투력까지. 무엇 하나 모자라는 부분이 없었다. 나를 포함해 아내들한테 개입하는 이상 확실히 엿을 먹이며 자기 계획을 수행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이군.
카인의 활약상을 들으니 전투력 부분에서는 원래부터 상대가 안 됐지만 지금도 상대가 되지 않겠구나 하는 절망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과 코스튬의 능력.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힘까지 모조리 갖추었겠지.
원래 신의 위치에 있었지만 사람의 형상을 띤 후에도 최강 클래스인 카인을 이기려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한테 죽은 괴물들은 그의 등장을 위해 희생당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군. 그 괴물들로 사람들을 마음껏 죽이며 등장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따로 없군.
영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악당이 필요하며, 주인공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경쟁자(라이벌)가 필요하다. 이 경우 경쟁자는 나도 포함되겠지만, 자기 앞길을 가로 막는 괴물들도 포함이 됐겠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고 있을 때 허공에서 나타나 그들을 구하는 구도라니……. 구세주, 메시아 등의 단어가 연상됐다. 그 장면을 본 아내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가 여자라도 반했을 거 같은 등장이었으니.
아, 그렇다고 이 새끼를 긍정하는 건 아니고! 사람들의 희생 위에서 피어난 꽃은 그를 가리키는 말이리라.
모든 마법뿐만 아니라 자기가 원하면 어떠한 마법이든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하하, 그렇군. 그랬단 말이지? 날 엿 먹이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그런 짓’을 하다니.
그런 짓이 뭐냐고? 뭐긴 뭐야……내 마법을 모두 없앤 거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신(神)의 타이밍이었다. 내가 납치된 지 3일차 새벽에 나타난 그는 온갖 강력한 마법과 능력, 무기를 쓰며 괴물을 도륙냈다. 실로 ‘영웅의 등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화려한 데뷔였겠지.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 마법은 모조리 사라졌다. 5일차 때 확인하긴 했지만 그 전에 마법이 사라졌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마법이 사라진 타이밍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었다만 그의 등장과 그가 가진 강력한 마법 등을 감안할 때……내가 가진 마법은 방해물. 눈에 거슬리는 장애물이었을 것이다.
이제 짐작이 가겠지……? 그래! 내가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쓸 수 없게 된 마법. 내가 여기 온 후부터 레벨 업과 함께 얻었던 마법들……! ‘자지의 맹세’를 비롯한 모든 마법은 현재 그한테 귀속되어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설마. 그럴 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 그래……. 응, 맞아. 그럴 리가 없지!
암, 그럴 리가 없고 말고……!!
내가 쓰던 마법이 모조리 그한테 소유되어 있다고 생각하자 불길한 느낌이 온몸에 퍼져간다. 설마……너희 설마……?
설마 너희…….
……저 새끼랑 몸을 나눈 건 아니겠지……?
차마 물을 수 없는 질문. 아내들이 날 버린 건 현실이 아닐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한 의심과 절망이 내 마음을 감쌌다. 나를 향한 그녀들의 사랑과 신뢰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짐작을 하고는 했지만 설마 그녀와……카인과 몸을 나누었기에 그렇게 됐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었으니까.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인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입에 띠운 채…….
============================ 작품 후기 ============================
세상일은 힘든데 도와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상황. 제 상황과 세린의 상황이 존나 딱 들어맞아서 섬뜩할 정도입니다. 어쩌다 이런 상황만 경험하게 됐을까요. 참으로 모를 일입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로리콤MK님, 간략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지금까지 실컷 좆 박아대던 세린이 좆됐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세린이 지금부터 실컷 구를 겁니다. 많이.
zxc54님, 어……대답을 드리기 전에 우선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설마 백발의 여자가 말했던 것을 그렇게 세세하게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확실히 아기를 낳고 괴롭힌다고 했지만 그런 부분까지 기억하고 계실 줄이야. 이 졸작에 그만한 관심을 가져주셔서 그저 감사스러울 따름입니다.
아기는 아직 안 낳았습니다만 유산된 것도 아닙니다. 세린을 괴롭히기 위한 떡밥 깔기라고 이해하시면 좋을 겁니다. 쉽게 말해 옆에서 존나 깔짝대면서 ㅎㅎㅎ ㅋㅋㅋ거리는 거죠. 아내들까지 빼앗겼으니 얼마나 기분이 좆같을까요. 그렇게 만든 건 저지만.
시이크으리잇님, 진짜 맞긴 맞는 말입니다. 자기만 아니면 NTR은 꽤 자극적이면서도 즐거운 소재입니다. 괜히 심심해서 아침드라마나 막장드라마에서 유부녀, 불륜이 지속적으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만큼 고전적이면서도 확실한 갈등 관계를 나타낼 수 있어서 그런 거죠.
아침드라마나 막장드라마에서 NTR 등이 나오긴 하지만 NTR 요소는 예전부터 계속 나오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걸 싸구려 드라마의 소재로 삼느냐, 남녀간의 갈등과 치정싸움을 위해 자세하게 묘사하느냐. 그 차이가 두드러졌죠.
저요? 주인공을 육체적·정신적으로 괴롭히기 위해 씁니다. 딱히 이게 고급 소설도 아니거니와 대단한 작품도 아니기잖아요. 게다가 지금까지 손에 넣었던 여성들을 모조리 다 빼앗기다니. 현실에서 이런 일 겪으면 사생결단으로 쳐들어가지 않을까 싶네요.
아, 아니면 전부 다 사이좋게 폭★발! 엔딩을 겪을 수도 있구요. 왜 있잖아요. 내가 가질 수 없는 거라면 부서버리겠다 유형.
예? 전 어느쪽이냐고요?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형 사이코 인간입니다. 제가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정도는 지금까지 소설을 읽어오셨다면 충분히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모르셨다고요? 잘 됐네요. 지금 깨달으셨습니다.
일은 존나 힘든데 도와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예 부서에 저 혼자 외에는 없는 상황. 중소기업조차도 가르쳐주는 사람은 있었는데 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네요.
여러분은 제대로 된 기업에 가세요.
저처럼 이상한 곳 가지 마시고.
괜찮은 곳의 계약직/정규직 or 4대보험 보장해주는 알바. 이게 그나마 괜찮은 선택지입니다. 매일 구직광고하는 이상한 곳에는 가지 마세요. 그만큼 존나 부려먹어서 직원들이 연속적으로 나간다는 뜻입니다.
저는 무슨 직장 다니냐고요?
……이젠 레드썬을 하고 싶지도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