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8 「15-7 : 절망으로 가는 길 (3)」 =========================
역설법(逆說法)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역설법이란 ‘표면적으로는 모순되거나 부조리한 것 같지만 그 표면적인 진술 너머에서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수사법’을 일컫는 말이다. 다들 국어시간이나 문학을 보며 한두 번 정도는 접해본 적이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왜 역설법이란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없겠지. 그게 보통이다. 나처럼 똘끼 충만하게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말은 막 꺼낼 수가 없지. 아, 걱정 마라. 내가 미쳤다는 거 이미 확실히 인식했고, 인정도 했으니까.
역설법은 쉽게 말하자면 ‘말이긴 말인데 말이 안 되는 말’이다. 국어책에서 나오는 소설 중 이러한 문장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만나기 위해 헤어진다’라는 것. 처음 읽을 때는 ‘무슨 소리야?’라고 생각하겠지만 나이가 들고 점차 많은 일을 겪음에 따라 저 말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닫게 된다.
국어책에 나왔던 소설의 내용을 아주 자세히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우리는 만나기 위해 헤어지는 거야’라는 말을 하며 언젠가 다시 만나는 것을 기약한다.
지금 와서는 흔히 나오는 장면이지만 그 당시에는 꽤나 충격적이었겠지. 여하튼, 역설법이라는 것은 알게 모르게 현실 세상에서도 많이 쓰이는 것이었다. 정신승리 등에도 쓰이긴 하지만 말이 안 되는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서도 자주 쓰이는 수사법(修辭法)이라 생각한다.
딱히 국문학적 자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하는 행동도 그야말로 역설적인 것. 역설법을 써서 말하자면……‘마을을 떠나기 위해 둘러본다’였다.
참으로 웃긴 일이지 않은가? 6일 전에는 납치당해 다른 마을에서 일어난 후 ‘프레그넌트로 돌아가고 싶어’라며 질질 짰던 내가 이제는 마을을 떠나려 하다니. 웃기다 못해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는 프레그넌트가 싫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미 괴물의 습격을 받아 초토화가 된 프레그넌트에 있는다고 한들 아내들이 돌아올 가능성은 요원해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계속 있다간 다시 괴물들이 올 가능성도 높았다. 먹잇감이 남아 있는 거 아닌가 하며 어슬렁어슬렁 거리다 맞닥뜨리는 건 사양이다.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즐겁게 돌아다녔던 마을이었건만 이제는 완전 개박살이 난 폐허나 진배없었다. 거짓말 안 보태고……밤에 귀신 나와도 ‘허긴, 그런 곳에 있으면 귀신을 만날 법도 하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 때는 번영과 행복이 가득한 곳이었고, 내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던 곳인데……이렇게 변한 걸 보니 마음이 안타까워진다. 슬프다. 모두와 함께 이룩했던 것이 모조리 박살난 기분이 드는데 즐거울 리가 없지 않은가? 그토록 돌아오고 싶어 했던 프레그넌트를 이렇게 보내버리다니. 이렇게 떠나야 한다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부서진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때마다 추억과 슬픔이 샘솟는다. 으음, 저기서는 여자 네 명을 동시에 범하기도 했고……앗, 저 골목에서는 아이나보다 훨씬 더 촌장에 잘 어울리는 여자라며 입 발린 말을 하기도 했지!
하핫, 저 집 어머니와 딸은 자신들을 여왕과 공주로 만들어줄 거라며 내 자지를 마구 빨아댔었지. 지금 생각하니 하반신이 불끈거리는데?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어, 음. 그래. 슬프지. 슬프긴 한데. 모두와의 추억이 섹스 같은 거밖에 없으니 이런 걸로 추억을 떠올리는 거지. 지금까지 죽은 사람은 못 찾았고 혈흔의 흔적도 찾지 못했으니 이런 걸 생각하는 거다. 시체 찾았으면 이딴 생각 하겠어?
마을을 돌아다니며 본 결과 집이나 건물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지만 정작 중요한 성벽(城壁)은 전혀 손상이 없었다. 그 머리 하얀 개년이 의도적으로 괴물을 투입시켰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성벽을 부수지도 않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통과할 수는 없으니까.
부서진 건물 파편을 들어내며 여행 물자를 챙기자니 참 우스웠다. 아이나의 동생인 아이라를 만나기 위해 어보션으로 떠났던 게 기억난다. 그 당시에는 ‘이번 여행을 끝으로 두 번 다시는 여행 같은 거 안 갈 거야’라고 생각했었지. 정든 제2의 고향을 떠나는 것도,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떠나는 것도. 전부 다 싫었으니까.
근데 지금 내 꼴을 봐라. 정겨웠던 고향은 어디로 가고 건물 파편들의 무덤 투성이가 된 이곳에서 여행 물자를 스스로 챙기는 꼬라지라니. 여행 같은 건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게 웃기기도 했고 불쌍하기도 했다.
괴물들과 최대한 전투 및 접촉을 피하며 수도로 가야 한다는 타의(他意). 아내들을 만나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자의(自意). 두 마음과 여러 요소, 환경, 현실이 뒤섞이고 얽히게 되어 나온 결과가 ‘수도(레이프)로 가서 실상을 확인한다’였다.
왜 수도로 가냐고? 마리아와 아테나, 헬레나한테서 받는 사랑과 신뢰마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이곳에 없었더라면 세 명과는 아무런 연관성을 가지지 않게 된다. 사라져버린 그녀들의 사랑과 신뢰를 생각한다면 이미 접촉을 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설령 그렇지 않다 치더라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아내들을 찾기 위해 무턱대고 움직이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어디 있는지 아는 수도로 가 도움을 요청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내가 박수무당도 아닌데 누가 어디 있는지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원래라면 어디에 있고 상태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자지의 맹세’로 확인해야 했지만……예전에 가지고 있던 마법부터 시작해 뻥튀기된 마력, 코스튬 등 다양한 것들을 잃어버렸다. 이제 와서 그걸 그리워한들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거다.
아무 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행동보다는 지금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게 나한테도, 안즈한테도. 미래를 위해서도 좋을 테니까.
음식 등은 역시 구하기가 어려웠다. 음식마저 아이템으로 취급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식료품을 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숲에서 구한 열매와 예전 여행할 때 남은 음식이 몇 개 있긴 했다만……이런 걸로 1주일을 버티고 싶지는 않았다.
3주가 아니라 1주인 이유는 간단했다. 여섯 개의 마을은 수도를 감싸고 있는 형태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수도였기에 그냥 걸어가기만 하면 됐다. 이전처럼 부카케, 자멘을 거쳐 어보션으로 갈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
가는 동안은 노숙을 해야 했고 이것은 큰 위험이었다. 분신술을 쓸 수 있었던 때와 달리 나는 현재 평범한 남자A. 밤중에 괴물이 살금살금 다가와 ‘어흥! 목따기!’같은 걸 써버리면 그걸로 THE END. 사망 엔딩이 뜨며 스탭롤이 천천히 흘러가겠지. 그딴 건 싫다고!
노숙 부분에서는 안즈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야만족인 안즈는 숲에서 그 괴물들을 상대로 싸워왔기에 괴물의 낌새나 기척,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다고 했으니까. 더군다나 사태가 이렇게 된 모든 원인 중 하나는 그녀 자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종의 속죄(贖罪)라고 해야 할까?
그녀를 제외한 야만족이 모두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내 잘못이 단 1%도 없다고 말하기도 힘들고. 그렇지만 그 결과는 그녀가 초래한 것이다. 나를 데리고 오지 않았더라면. 캡슐을 써서 배가 능력을 쓸 수 있도록 했다면 서로가 이런 파멸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잘못된 선택을 하고는 하지만 그 중 가장 무서운 선택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파멸로 이끄는 선택’이다.
왜, 흔히 말하잖아? 죽으려면 혼자 죽으라고. 그 뜻은 말 그대로의 뜻도 있지만 ‘니가 죽고 싶어 하든 말든 그딴 건 상관없는데, 뒈질 거면 혼자 뒈지지 엄한 남은 왜 끌어 들이냐?’라는 뜻도 있다.
안즈는 부서진 건물 파편에서 내가 무언가를 주울 때마다 눈을 돌렸다. 미안해서 그런 거겠지. 자기의 동족들만 죽은 줄 알았는데 프레그넌트가 이렇게 부서지다니. 사람들이 죽은 건지 다쳤는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사태에 ‘세린을 납치했다’라는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외곽을 돌아다니며 성벽을 확인 후 마치 둥근 미로를 돌아다니듯 마을 중심을 향해 빙글 빙글 돌았다. 미로를 좋아해서 이딴 짓을 하는 게 아니다? 중앙에서부터 다른 구역을 돌아다니면 귀찮으니 처음부터 외곽을 돌아다니며 물자를 줍는 거지.
묘하게 도둑질 하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사람이 없는 이곳에 이러한 물자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물자라고 해봤자 가끔 과일 정도. 나머지는 옷이었다. 더러워진 담요나 베개, 침구품(寢具品)은 이미 확보해뒀고 지금도 꾸준히 모으고 있었기에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자는 일은 없겠구나 싶었지.
의식주(衣食住) 중 주(住). 사는 곳이나 머무르는 곳은 숲이나 황야가 될 것이다. 수도로 가는 동안에 고급 호텔이나 숙박 시설에서 머무를 생각을 했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너님은 군대 훈련할 때 고급 호텔이나 모텔에서 주무셨습니까?’
군대 훈련 때. 특히 혹한기 때 A텐트 치고 그 안에서 잤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피눈물이 날 거 같다. 시발, 존나 추웠었지.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경험이지만……모두 알잖아? 이런 기억일수록 더욱 더 오래 남아 사람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가능하다면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만 이런 것도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하아……한국 군대를 만약 다시 가야 한다면……음. 진짜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낫지 않을까? 병장제대 했는데 또 이등병 놀이를 하라고? 아, 쒸발……. 끔찍한 소리 좀 하지 맙시다. 예?
군대 갔다 온 남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군대 다시 가는 거’다. 꿈이라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나기 마련인데 그걸 또 하라고? 와……장난 아니라 어디 강에 힘껏 몸을 날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레알 그 짓 하기는 싫다. 나도 군대 꿈 꿔봤는데……오싹하더라고. 꿈인데도!
군대 갔다 온 사람한테 ‘군대 한 번 더 가라!’라고 말할 생각이라면 한 대 맞을 각오하고 말하자. 안 그래도 소중한 청춘 1년 10개월(내 경우)을 나라에 바치는 것도 모자라 온갖 욕, 갈굼, 험한 일 등을 경험하고 왔는데 또 가라고? 니가 가라 하와이……가 아니라. 니가 가라 한국군대!
몸서리치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점심은 가지고 있던 열매와 여행 당시 챙겨놓았던 식사로 해결했다. 이 ‘하렘 어드벤처’에는 내구도의 개념이 꽤 희박했다. 옷이 찢기거나 더러워져도 마력으로 해결하면 그만이었으며, 음식은 아이템 창에 넣어둔 이상 썩거나 상하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에서 여행 당시 챙겨두었던 식사를 먹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젠장……옛날 생각나네. 혜린이와 로라, 메이. 힘들었지만 알차고 즐거운 여행이었는데. 도중에 안나와 니나한테 납치당해 험한 꼴을 당하긴 했지만 그 애들도 결국 내 아내(당시는 노예)가 되어 여행을 마쳤었지.
이렇게 보니 여행 중에 식사를 하지 못한 건 아이라뿐이군. 아이라 덕분에 텔레포트 마법으로 단숨에 프레그넌트 주변으로 왔었으니 노숙 및 식사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도 한 몫 했다만. 마법 복사로 기껏 베꼈는데 다 잃어버리다니. 에구, 아까워라…….
아침 일찍 프레그넌트로 들어왔는데 반긴 게 폐허가 된 마을이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꽤나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직접 돌아다니니 더욱 애잔했다. 점심을 먹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니 성한 걸 찾는 작업이 무슨 숨은 그림 찾기처럼 느껴졌다.
누가 숨어 있을까봐 성하다 싶은 집은 모조리 부숴버린 덕분에 아름다웠던 프레그넌트가 엉망진창이 됐다. 하아……그 빌어먹을 짐승 같은 괴물새끼들, 다음에 걸리기만 해봐라. 투영마술과 마법탄알로 꼭 죽여주마.
현재 내 레벨은 33이었다. 오랫동안 30에 머물러 있었는데 야만족의 숲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레벨업을 한 것이었다. 그 지옥 같은 숲을 생각하니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만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 올라간 것만큼은 기쁜 일이었다. 난 예전과 달리 쓸 수 있는 마력도, 마법도. 모두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원래라면 ‘자지의 맹세’로 안즈의 레벨, 마법 등을 알아봐야 했지만 더 이상은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사라진 마법들은 모두 굵직굵직한 것들이었지만 그 중 역시 잃어버려서 가장 안타까운 마법은 ‘자지의 맹세’였다. 그것만 있다면 이렇게 답답하게 있을 리 없겠지. 바로 아내들의 거처(居處)를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움과 원망을 가지고 안즈를 보자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으휴……. 그 자신만만하던 안즈가 내 눈치나 살피며 머뭇거리는 걸 보니 답답한 건 오히려 나였다. 내가 꼭 그녀를 몰아붙이는 개자식이 된 기분이었으니까. 아니, 난 그 정도로 개자식은 아니거든요? 그야 뭐……나쁜 자식은 맞겠지만.
그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프레그넌트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一助)한 거니 죄책감을 안 가지는 게 더 이상하겠지. 나로 인해 죽은 야만족이 90명 이상이라면 그녀는 마을 하나를 박살낸 거니까.
점심을 먹은 후에도 물자 찾기는 계속 됐다. 파편 속에서 물건을 찾는 건 꽤 고된 일이었지만 무언가가 묻혀 있다 싶은 곳은 파편이 이상한 각도로 눕혀져 있었기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거의 5시쯤이 되자 물자 찾기는 종료됐다. 찾아볼 곳을 다 찾아봐서 그런 것도 있었다만 더 이상 찾을 물건이 없었던 것도 이유였다. 침구류와 옷 등 도중에 필요하다 싶은 건 다 건져 놓았다.
아, 옷은 내가 입을 거 아니다? 안즈가 입을 거지. 내가 아무리 변태라지만 여자 옷을 입을 생각은 없다니까?
생각을 해봐. 다리털 나고 좆에 자지털 무성한 내가 드레스나 미니 스커트를 입은 모습을! 발기하면 절대 부풀 리가 없는 곳이 볼록 튀어나오다니……으윽! 시발! 생각만 해도 역겨웠다! 내가 나 자신을 상상하는데도 역겨움을 느끼다니! 이건 가히 안구 & 정신 테러급의 충격이잖냐!? 으윽, 망할! 이상한 거 상상했어!
점심과 비슷한 식단으로 저녁을 해결한 우리는 잘 곳을 찾기로 했다. 저녁이어서 떠나기도 뭐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중에 움직이는 건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거라면 또 모를까 적이 어디 있는지조차 식별할 수 없는 밤에 여행길을 떠나다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게다가 적은 그 청록색 촉수괴물일 것이다. 거의 100% 확률로. 검게 그을린 자국에서 연상할 수 있는 괴물은 그놈들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그 무식한 빔 공격으로 우리를 마구 공격해온다면? 낮이어도 피하기 힘든데 어디에 몇 마리나 있는지 모르는 놈들의 빔 공격을 피하라고? 미쳤냐? 돌았냐? 뇌를 꺼내 박박 씻은 후에 빨랫줄에 걸어놨냐?
주의해야 하는 것은 놈들의 빔 공격─레이저나 빔이나 그 나물의 그 밥. 광학병기(光學兵器)에 대한 명칭은 본질에 따라 다르지만 나는 빔이라고 부른다. 건담 시리즈에서 빔 라이플, 빔 사벨 등 나오는 게 한두 개가 아니거든─뿐만이 아니었다.
그 강력한 촉수에 맞은 곳이 아직도 얼얼한 느낌이었다. 원래라면 아내들한테서 치료 마법을 받아야 했지만 그녀들은 이미 이곳에 없었기에 안즈한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적은 마력을 쥐어짜서 날 치료해주는 그녀를 보니 나나 안즈나 참 기구한 팔자구나 싶더군. 이게 다 뭐 하는 짓이람?
잘 곳을 찾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정도로 어렵냐고 묻는다면……음. 물자를 구하면서 오늘 밤 묵을 곳을 찾아봤지만 괜찮다 싶은 곳을 단 한 곳도 구하지 못한 상태라고 말하면 이해가 갈 거다.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박살낸 걸 보니 끝까지 나를 엿 먹이려고 작정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고맙다 씨발년아.
결국 잠을 자기로 결정한 곳은 지금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던 성벽 위였다. 성루(城樓)를 통해 돌아다닌 적은 있지만 설마 여기에서 자게 될 줄이야. 하하, 진짜 사람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른다니까?
성벽에 올라가니 어두워지는 세상이 보였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멀리에 그 괴물들이 있겠지. 없다면 다행이지만 세상 일. 특히 이 ‘하렘 어드벤처’에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이건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것이었다.
침구류를 까니 성루 위의 하늘이 직방(直放)으로 보였다. 어이쿠, 이건 운치 있어 좋네. 이런 곳에서 아내들과 몸을 나누었다면 분위기 쩔어줬을 텐데. 그 아내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지 단서조차 없고 그나마 남은 것은……안즈인가. 하아.
“한숨 좀 그만 쉬어.”
너 같으면 안 쉬겠니? 한숨을 많이 쉬면 안 좋다는 건 이 세상이나 원래 세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설마 안즈가 날 걱정해줄 줄이야.
오늘 하루 동안 한숨을 몇 번 쉬었는지 기억조차 안 난다. 한숨 쉴 때마다 카운트하는 사람도 없겠다만 그 정도로 오늘 하루는 힘든 일 투성이었다.
아, 이런. 생각해보니 얘한테 옷을 안 줬군. 아이템 창을 열어 오늘 얻은 옷들을 찬찬히 보기 시작했다. 침구류가 있으니 감기 걱정은 없겠지만 피와 흙으로 더러워진 옷이다. 빨리 다른 걸 입히는 게 낫겠지.
오늘 얻은 수확 중 가장 높은 것이라면 침구류와 옷. 그리고 무기 & 코스튬이었다. 옷은 실생활에서 입는 옷이니 둘째 치더라도 얻은 코스튬은 배틀 코스튬이었다. 프레그넌트의 무기점이 부서지며 그 안에 있던 무기나 코스튬을 얻은 건 정말 큰 수확이었지.
지금도 기억난다. 로라와 메이의 옷을 선물해주자 모두 다 기뻐했었지. 혜린이의 첫 번째 배틀 코스튬이자 웨딩드레스인 ‘시라누이 마이’의 코스튬을 산 곳도 바로 이곳이었고. 그걸 생각하자 가슴이 아려온다. 아내들의 코스튬이 왜 내 아이템 인벤토리에서 사라진 것인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무기는 단검이나 기본 무기 등이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개중에는 꽤 무거워 보이는 도끼도 있었기에 야만족이라는 성질의 안즈와 꽤 상성이 좋을 거 같았다.
단, 사실상 ‘초보자가 시작하는 마을’ 같은 곳인데다 한 번 사면 같은 물건은 살 수 없게 된다는 성질이 있었기에 얻은 무기와 코스튬은 그리 많지도 않았고 품질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무기는 도끼, 단검, 장검. 세 개였으며 코스튬은 두 개였다.
없는 것보다야 낫다지만 아쉬움이 남는 수확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지만.
코스튬을 선택한 후 그걸 실체화시켰다. ‘자지의 맹세’를 쓸 경우 자동적으로 내 파티 멤버가 되기에 옷을 입히는 건 아무 문제가 없었다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수동식으로 줘야 한다니. 좀 특이하네.
“……이건 왜?”
내가 옷을 내밀자 날 보며 물었다. 이게 지금 장난하나……?
“왜긴 왜야. 입으라고 주는 거지.”
“……나한테?”
“그럼, 내가 입으리? 내가 이런 옷 입으면 어울릴 거라 생각해?”
안즈는 고개를 저었다. 알면 입어라. 내가 입지도 못할 옷을 챙긴 건 순전히 너 챙겨주려고 그런 거니까. 붕대와 훈도시를 벗자 아름다운 몸이 나타났고 그제서야 다시금 내 하반신이 불끈거렸다. 하아……날 파멸로 몰아간 여자의 몸을 보고도 발기해버리다니. 난 구제불능 좆병신 새끼라는 게 다시금 증명되는 순간이다.
그나저나 얘는 수치심도 없냐? 내 앞에서 옷을 훌러덩 벗어버리다니……. 내가 얘랑 몸을 섞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강간당했던 거지.
하아……300명 이상의 여자들을 범했던 내가 100명이나 되는 여자한테 강간당하다니. 이거 기네스 신기록으로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뭐야, 이거……내가 입던 거랑 별 차이 없네.”
안즈가 입은 것은 치어리더의 복장이었다. 두 개 있는 코스튬 중 하나는 이 치어리더의 코스튬이었다. 특수 능력 따위는 전혀 없는 복장. 나머지 하나는 특수 능력을 갖춘 것이었지만 그걸 주지 않은 이유는……이걸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으니까.
특수 능력을 갖춘 코스튬으로 날 죽일 수도 있었지만 사실 얘 정도의 스펙이라면 코스튬 없이 배가 능력만으로도 날 때려죽일 수 있었기에 특수 능력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남은 코스튬은 내일 아침에 줄 테니 지금은 이걸 입히고 싶었다. 지금 안 보면 언제 보겠냐?
“잘 어울리네.”
발기를 한 상태로 이런 말 한들 아무런 설득력도 없다만 안즈는 고개를 숙였다. 왜 저러냐?
“……넌, 내가 안 미워?”
갑자기 무슨 소리냐.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마을이 이렇게 된 원인이 나인데……왜 날 챙겨주는 건데?”
……듣고 보니 그렇네. 내가 왜 얘한테 옷을 줬을까? 얻을 건덕지가 뭐가 있다고. 실제로 옷을 주니 말하는 게 저거다. 본인도 자각(自覺)을 하고 있긴 했구나. 설령 몰랐다 치더라도 내가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욕하고, 한숨 쉬고, 슬퍼했으니 모르면 그게 병신이지.
“어, 일단 첫 번째 질문부터 대답할게. 미워. 존나게. 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니가 물었으니 솔직하게 대답한 거지. 내가 널 설마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생각한 건 아니지? 야, 야! 시발, 주먹 안 내려? 니가 회복 마법 건 사람을 패려고? 어어? 어어? 야, 야!”
겨우 말렸네, 시발! 그녀는 내 말에 움찔하더니 결국 주먹을 내렸다. 빨리 말이나 하고 잠이나 자자. 치어리더 복장으로 날 때리는 건 제발 하지 마라. 내가 준 옷을 입은 사람한테 맞는 취미는 없거든. 근데 왜 저렇게 화를 내고 난리냐?
“두 번째 질문 말인데. 음, 그래. 니가 원인을 제공하긴 했지. 근데 있잖아. 그거 때문에 널 계속 미워한들 뭐가 달라지는데? 부서진 마을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냐? 아내들이 이곳으로 돌아오냐? 아니잖아. 게다가 너도, 나도. 소중한 걸 잃어버렸는데 그걸 가지고 계속 상처를 후벼 파면 누가 좋아하겠냐? 내가 개새끼긴 한데 그렇게 음흉한 놈은 아니거든.”
안즈는 또 고개를 숙였다. 아, 이 아가씨가 진짜.
“서로 소중한 사람들도 모자라 있을 곳도 잃어버렸잖냐. 이미 서로 치고 박고 싸우고 온갖 쌍욕에 폭언까지 다 뱉었는데 이제 와서 체면 차릴 것도 없어. 너도 너무 그렇게 내 눈치만 보지 마. 이미 일어난 일을 후회한들 돌아오는 게 없으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걱정해야지. 안 그래?”
그제야 안즈는 피식 웃었다. 오오, 그래. 그렇게 웃어야지. 얘가 싸가지 없고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남 눈치 살피며 오들오들 대는 건 역시 못 봐주겠다. 차라리 건방지더라도 이게 낫지.
“우린 내일 수도로 출발할 거야. 길 안내는 니가 해야 할 거고. 문제는 없지? 수도까지 갔다 온 니가 나보다는 훨씬 길을 더 잘 알 테니까.”
안즈는 문제없다고 했다. 좋아. 여행의 준비는 이제 거의 다 갖춰졌다. 남은 건 시간과 운, 노력이군. 노오오오오력 타령을 하는 건 존나 싫어하지만 아무런 노력 없이 뭐든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이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별을 보니 새삼스럽게 아내들이 더욱 보고 싶어진다. 다들 어떻게 지낼까? 밥은 먹고 지낼까? 메이랑 니나는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면 좋을 텐데. 안정적인 삶을 얻은 안나와 니나한테는 안타까운 일이겠군. 촌장인 아이나와 그녀의 동생인 아이라한테 있어서도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을 테고.
아스카는 뭘 하고 있을까? 걔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귀여운 녀석이었지만……다른 곳에 가면 괴물 취급을 받아 슬퍼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망할. 걱정할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설령 그들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고 믿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들을 향한 마음은 꺼질 줄을 몰랐다. 27년 인생에서 함께 지낸지 1년도 안 된 그녀들을 이토록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이걸 ‘사랑’이라는 감정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저 세상으로 보내버린 사람들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안즈는 별을 보다 조금씩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숲이었으니 여기처럼 별이 잘 보였을 테고, 그곳에서 별을 올려다보던 추억을 떠올린 거겠지. 그 추억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 운치 있는 광경이 의도치 않게 현재의 상처를 파고들었군.
으이구, 재수도 존나 없군. 어제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버렸는데 갑자기 추억을 떠올리게 하다니. 너무 잔인하잖아.
들을 리도 없고 설령 듣는다 하더라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하늘은 별과 달만을 우리한테 보여줬다.
============================ 작품 후기 ============================
새로운 한 주가 밝았는데 회사는 좆같습니다. 아마 소설 분위기도 비슷해질 거 같네요. 비축분이 슬슬 떨어지니 어느 정도 진행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할 거 같습니다. 일단 진행할 수 있는 부분까지는 진행할 테니 많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지금 심정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요?
……로리, 다이스키이이이이────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