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6 「15-5 : 절망으로 가는 길 (1)」 =========================
누군가 나한테 ‘국적(國籍)이 어디요?’라고 묻는다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나는 한국인이다. 동방예의지국으로 알려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청년.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내가 외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면……군대 갔다 왔겠냐?
그런 질문을 던질 사람도 없다만……나한테 던진다 치자.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보통 사람이라면 ‘예,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겠지. 하지만 여기에는 한국이 없다. 아니, 내가 살던 지구조차 아니다. 내가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못 알아먹겠지. 그런 생각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왜 나를 한국인이라 여겨야 하는 거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고 ‘아따, 이런 호로 새끼가 있나잉~? 너는 너를 받아준 대한민국을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냐?’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 그럼 나도 묻고 싶다.
대한민국이 나한테 해준 게 뭔데?
날 한국에 있게 해줬다고? 그건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한테 주는 시민권이다. 어려서부터 내가 무슨 대역죄(大逆罪)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니었는데 당연히 주어지는 거 아냐? 한국인인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히 주는 거지.
병역의 의무까지 다 했고 이 세상에 오기 전까지 예비군에 나가기도 했다. 납세의 의무도 나름 마쳤다. 계약직이 끝나자 세금을 낼 필요가 없어졌다만……. 그 외에는? 나한테 뭘 줬지?
돈? 내가 벌었다.
밥? 우리 부모님이 줬지.
옷? 받았을 리가 있겠냐?
집? 너 지금 나 웃기려고 작정했냐?
아주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의식주(衣食住)와 같은 필수 생존 요소가 어떻게든 주어질 수도 있지만……우리 집은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았었다. 그 덕분에 빚을 졌었다만 그건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자.
대한민국은 ‘돈이 있는 사람한테는 살기 쉽고 좋은 나라’였지만 ‘돈이 없는 사람한테는 매우 살기 어려운 나라’였고, 나는 그 ‘돈이 없는 사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빚을 진 것도 모자라 부모의 벌이 또한 시원찮았기에 졸업 전부터 계약직이든 뭐든 구하려고 했었지. 그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온다.
독재당의 집권 이후 점점 물가는 치솟아 오르고 경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서민의 삶 따위는 개나 주로 여자들의 보지, 똥구멍에 자지를 박으며 부자들만을 생각하는 멍청한 정부 덕분에 사람들의 삶은 더욱 더 살기 어려워졌다.
쉬운 해고, 비정규직의 양산, 노년층의 업무 증가 등. 힘든 삶이 보다 가속화되자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옥을 가리키는 영어 Hell과 한국의 예전 명칭인 조선을 합친 단어. ‘헬조센’이라고도 불리었다만 어찌 됐든 뜻은 같았다.
오죽 살기 힘들면 자기들이 사는 나라를 그렇게 부를까? 어떤 사람들은 이보다 더한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헬은 말 그대로 지옥(地獄)을 뜻한다. 하지만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다. 아무런 죄를 짓지도 않는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국은? 가난하고, 힘없고, 집안이 빵빵하지 못하면. 흔히 말하는 금수저 계층이 아니라면 대부분 헬조선의 일원으로서 살아가야만 했다.
돈이나 가족, 직업이 없다는 것이 순식간에 ‘죄(罪)’로 취급되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태어날 곳이나 부모를 선택할 힘이 사람한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대한민국에서는 그랬다. 부잣집이나 금수저층 부모를 두지 않다면. 변변한 직업이나 연줄 등이 없다면 그 자체로 죄인 낙인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 곳에서 살다가 왔다니.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부끄러워해야 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자국(自國)을 이토록 부끄럽게 생각하도록 만든 걸 부끄럽다고 여겨야만 했다.
그러나 몇 번이고 말했듯이……독재당. 아니, 정치를 하는 놈들은 서민이나 국민에 대한 안위(安慰) 따위는 지랄, 염병. 좆에 낀 좆밥만큼도 신경을 안 썼다.
아! 물론 신경 쓰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만……그런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들이 가진 힘이라고 해봤자 미미한 수준. 헬조선은 그런 정도로 바뀔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서로 밥그릇, 이득 싸움에 열중하지만 자기들(대통령, 국회의원, 소속된 당, 정부)의 이익에 관련된 일이 되면 서로 형님 아우님 하며 힘을 합쳤고 거기에서 소외되는 건 그들과 부자, 상위층을 제외한 모두. 힘없는 국민들이었다. 국민의 소리를 듣지도 않았다만 소리를 외쳐도 무의미한 아우성이었다.
대체 내가 왜 이런 나라에서 왔다고 말을 해야 하는 걸까? 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갈 수조차 없는 곳인데. 그곳에서 왔다고 하면 누가 알아 주냐? 긍지? 그딴 게 있으면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겠죠? 애초에 자랑할 긍지나 있는가 의문이다.
따라서 나는 누군가 ‘국적이 어디냐, 어디에서 왔냐’라고 물으면 ‘다른 먼 곳에서 왔지만 지금은 프레그넌트의 사람이다’라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프레그넌트는 이 ‘하렘 어드벤처’에 와서 처음으로 간 곳이자, 정말 많은 추억을 만든 곳이니까. 나한테 있어서 프레그넌트는 제2의 고향이자 삶의 뿌리를 내린 곳이라고 하더라도 과언은 아니었다.
납치된 지 오늘로 6일. 엄밀히 말해 더 이상 납치된 상태도 아니었고 ‘야만족의 숲’은 ‘죽음의 숲’이 되어버렸기에 마을을 떠난 지 6일째라고 해야겠지. ‘자지의 맹세’를 비롯해 가지고 있던 마법을 모조리 쓸 수 없게 됐지만 더 이상 숲에서만 있을 수는 없었다.
부서진 코스튬이나 생활용품, 물건 등은 마력을 쓰면 고칠 수 있다만……육체는 아니었다. 낫기를 기다리거나 회복 마법을 걸어줘야만 했다. 안즈는 애초에 마력이 적은 야만족이었기에 치료에 적절한 사람이 아니었고 어차피 프레그넌트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평생 여기서 지낼 수는 없잖아.
영원히 안 들어간 채 살 수는 없다지만……무서웠다. ‘자지의 맹세’가 없어진 지금, 그녀들을 제재(制裁)할 수 있는 방법 따윈 없다. ‘자지의 맹세’에 대해 말했던 건 혜린이뿐이었다만……그녀가 모두한테 그 이야기를 말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응. 알아. 절대 좋은 눈으로는 안 볼 것이다. 여자를 지배할 수 있는 마법이라니. 이 얼마나 좆같은 마법이란 말인가? 심지어 자기가 조종당하는지 어떤지조차 알 수 없는……궁극의 세뇌 계열 마법. 쓰던 나조차 ‘이런 마법이 있어도 되나?’라는 생각을 했었으니 오죽하겠냐.
앗, 정말 중요한 것! 혹시나 싶어 말해둔다만……내가 그녀들을 사랑했던 건 진심이었다. 결코 거짓된 마음이 아니었다. 이것만큼은 확실히 말해두고 싶었다.
가족과의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모자라 더 이상 가족을 사랑할 의미마저 잃어버린 나한테 있어 그녀들은 천사이자 여신, 연인이자 아내였다. 그녀들을 사랑한 마음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내가 한 때 ‘포기하는 삶’ 운운하며 병신 헛짓을 했을 때도 있었지. 그랬던 이유? 간단하다. 그런 삶을 선택하지 않으면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현재가 소중했고, 그녀들이 사랑스러웠으니까. 나 같은 놈을 사랑해주는 여자들이 주변에 있다니. 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그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녀들이라면 ‘자지의 맹세’에 대해 듣고 아주 기분 나빠할 거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겠지.
‘혹시 내가 그(나)를 사랑하게 됐던 것도 조종당해서 그런 거 아닐까?’라고…….
너무나도 슬프지만……당연한 거다. 나조차 현재 진행형으로 ‘내가 선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행동, 사고(思考) 등. 전부 다 사실은 그 머리 하얀 미친년이 조종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는데 하물며 그녀들이야……말할 필요가 있겠냐?
그녀들의 생각에 ‘그렇지 않아!’라고도 답할 수는 없었다. 낙태 마법만 하더라도 쓸 경우 나에 대한 의존도 등이 급격히 늘어난다. 나를 향한 사랑에 낙태 마법의 영향이 단 1%도 없다는 말은 차마 입이 찢어져도 할 수가 없었다.
안나와 니나, 아이라, 아스카 등. 아기를 죽이는 대신 의존도나 충성도가 늘어났기에 마법의 영향이 없다고는 변명할 수가 없었다.
세뇌나 다름없는 마법. 그로 인해 나를 사랑하게 됐다고 생각한다면 그녀들이 품었을 증오와 분노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그냥 장난삼아 나온 게 아니다. 아내들의 질투만 해도 무서운데 살의(殺意)라니. 으으……진짜 바지에 지릴 거 같았다.
낙태 등을 포함해 내가 가진 마법에 대해서는 별로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귀찮기도 했고 여러모로 꼬리를 잡힐 거 같아 별 말을 안 했었는데……설마 내 귀차니즘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사람 인생 진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니까?
어……그래도 사람이란 게. 힘든 상황에서도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고 싶어 하는 타입이잖냐. 난 비록 내 마법이 사라졌더라도 나를 향한 그녀들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마법 때문만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믿고 ‘싶었다’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만…….
생각해봐라. 로라부터 시작해 메이는 스스로 나를 원했던 자들이었다. 내가 ‘자지의 맹세’로 가짜 인격을 쓰기도 하고 조종도 하곤 했지만……그렇다고 그 마법으로 아내들을 노예, 꼭두각시처럼 부렸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아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아꼈다. 만약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온갖 미친짓을 시켰겠지.
그녀들의 자유의사를 모조리 무시하거나 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녀들 또한 나와 같은 사람이었고, 내가 그녀들을 사랑해서 그런 것도 있었다만……. 그녀들을 일종의 게임 캐릭터 따위로 인식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도 있었다.
이 모든 세상과 인물이 머리 하얀 미친년에 의해 창조됐다 치더라도 그녀들을 도구, 캐릭터 따위로 일축할 마음은 없었으니까.
나의 마음은 그러했지만……알잖아. 세상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라는 거. 늘 내가 원하지 않는 일에 휘말리고 했는데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을 거라니? 대체 뭘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자신감이 나올까. 난 그런 자신감도, 생각도 없었으며 낙관적인 놈도 아니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 중,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눈치 챘겠지. 내가 왜 숲에 먼저 왔는지를 말이다. 안즈가 나를 납치했기에 적대적인 대접을 받을 거라는 이유도 있었다만 가장 큰 이유는……목숨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소중한 마음과 사랑을 조종해 마음껏 몸을 탐하고 유린한 나를 기쁘게 맞아줄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그녀들을 사랑했다고 한들 그녀들과 침대 위에서 뒹굴며 그녀들을 범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 지옥 같은 숲에서 겨우 탈출해 들어갔는데 칼빵 맞고 뒈지는 장면이라니……으윽. 상상만 했는데도 소름이 돋았다!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이나 소설, 영화나 드라마 같은 곳에서는 동료끼리 싸우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여행, 생활하던 이들과 서로 싸워야 하는 운명이라니. 참으로 슬픈 장면이라 생각했었다.
헌데 그런 상황이 나한테도 펼쳐질 뻔하다니……!? 아직 확정 난 것은 아니었지만 결코 배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니었다. 잘못했다간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데 바보 같이 쭐래쭐래 프레그넌트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어쩌면 내가 버림받은 이유 중에는 ‘자지의 맹세’를 알게 된 아내들이 나에 대해 적대감 및 불신감을 가지게 된 것도 들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자세하고 확실하게 생각할 수 있는 걸 보니……음. 그럴 거다. 확실할 것이다. 이유는 모두 말 안 해도 알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 불길한 사건, ‘에이 설마 그렇겠어……’하는 불길한 예감.
지금까지 빗나간 적 있었냐? 내가 알기로는 없었다.
예전 세상에서도, 현재 세상에서도.
이런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질 걸 알면서도 자지를 꼿꼿하게 세운 채 프레그넌트로 돌진한다면……으음. 그 튼튼한 물건이 순식간에 몸에서 잘린 채 땅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상상해봐라. 으윽……내가 고자라니!? 아, 아니……이게 무슨 소리야……내가 고자라니……!? 으흑흑……!!
농담 같다고? 군대 안 갔다 왔냐? 군대 갔다 온 사람은 알겠지만……군대에 들어갈 때는 대한의 자식이다. 정말 온갖 복지정책이나 좋은 면만 부각시킨다. 부모님과 장병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지만 들어가면 노예의 자식이 된다. 온갖 잡일을 떠맡게 되고 그러나 다치면 그걸로 THE END. 다친 사람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는 게 대한민국 국군의 현실이었다.
얼마나 당연하면 다친 장병을 치료한다는 게 뉴스 등으로 나왔을 정도니……하아. 한숨이 나온다. 2015년 때 북한의 지뢰 도발 사건 및 그 이전의 대남도발(對南挑發) 사건 때 다친 사람들이 나라를 지키다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우는 참으로 형편없었지.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이 좆같은 상황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야, 조심해라. 인생 한 방에 훅 갈 수도 있어.”
대한민국 국군은 부탁인데 이걸 가르쳐 줘라. 2년 동안 나라에 충성하다 다치거나 뒤지면 되도 않은 같잖은 규칙, 규약 등으로 뭐라 하지 말고 저 말부터 가르쳐 주라고. 인생 한 방에 훅 갔다가 제대로 된 보상도 못 받은 채 다친 몸을 이끌고 나와야 한다니. 참…….
군대에 갔다 왔지만 사회에서도 잘못했다간 훅 갈 수도 있었기에 늘 조심했었지. ‘훅 간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면……단숨에 몸 일부의 기능을 잃어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소리다. 나쁘게 말하자면 장애인이 될 수 있고 더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사람의 몸이란 너무나 연약한 것이다. 다치고 병들기는 쉽지만 그걸 고치는 데에는 천문학적인 돈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시간과 돈을 들여 치료한다 치더라도 몸은 원래대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힘든 상황에서 혹시나 또 병에 걸리거나 다치면……죽음에 더욱 가까워진다.
사람의 몸은 너무나 약하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병원이나 보험 등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병이나 사고 발생 후 그걸 수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사고나 병을 방지할 방법은 그저 조심하며 몸을 관리하는 방법밖에 없다.
사람 인생이 한 방에 훅 갈 수 있는데 내가 미쳤다고 프레그넌트로 의기양양하게 들어가냐? 개선장군(凱旋將軍)처럼 갑옷이라도 걸치고 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오는 문제였다만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난 죽음과 비난, 매도를 각오하고 프레그넌트로 들어갔다. 여자들이 놀라기도 하고 반겨주기도 할 거라 생각했다. 내가 비록 ‘자지의 맹세’부터 시작해 다양한 마법을 이용하고는 했지만 아무런 믿음과 사랑도 쌓지 않았던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줬으면 좋겠다 싶었지. 아내들이 나한테 분노하거나 증오를 내뿜는다면 나 또한 이렇게 묻고 싶었다.
‘그래, 미안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할게. 그치만……꼭 그래야 했냐?’
아, 벌써부터 눈물이 나오려 했다. 아직 말을 제대로 다 하지도 않았는데 이토록 슬퍼지다니. 한숨을 푹 쉬고 마지막 문장을 중얼거렸다.
“나를 꼭 버려야 했냐……?”
단 한 명도. 단 한 명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니. 지금 생각해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에 대한 증오심이 그 정도로 컸냐? 내가 썼던 마법에 대한 혐오감이 그토록 너희를 못 움직이게 했냔 말이다. 목숨을 바쳐 여행도 하고 괴물도 쓰러뜨렸건만…….
그녀들의 분노와 내 증오. 어느 쪽이 강할지는 모르겠지만……그래도 프레그넌트에는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안즈를 데리고 프레그넌트로 들어갔다. 6일 만에 돌아온 내 고향은……폐허가 되어 있었다.
† † † † † † † † † †
“이, 이게……프레그넌트라고……?”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안즈였다. 미안. 먼저 말하렴. 난 지금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말하는 줄도 잊어버린 상태니까. 난 내 눈을 의심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은……폐허라는 말 외에 무어라고 표현하면 좋은지조차 모를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주민들이 살던 곳은 마치 괴수영화에 나오는 괴수라도 날뛰었던 것 마냥 철저하게 박살이 나 있었다. 간신히 남아 있는 건물들의 기둥과 파편이 즐비했고 저 멀리에는 부서진 가구마저 있었다.
탈리아와 레인이 살던 집도 보였다. 부서진 상태였긴 했지만 위치는 정확했으며, 그 집은 철저하게 박살이 난 상태였다. 난 입을 벌린 채 닫을 줄을 몰랐다. 뭐가……뭐가 어떻게 된 거지?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안즈는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난 다시 한 번 외쳤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야, 이게 말이 돼!? 이거 봐……이거 보라고! 다 박살났어! 세상에!? 프레그넌트가……너한테 납치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번성했던 프레그넌트가 이렇게 개박살이 났다고! 하하, 말이 돼!?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야? 가당키나 하냐고? 세상에……이런 미친! 어떻, 게? 어떻게 이런 일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보게 되면 사람이 실성한다고는 하는데……그 말 맞다. 난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조차 몰랐다. 격렬한 섹스를 할 때 아내들이 온갖 미친 말을 하고는 했었는데 그것과 아주 똑같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대가리가 돌아버렸다.
“얘들아……얘들아!!”
아내들한테 버림받았다는 사실마저 잊을 정도로 감정이 요동친다. 그래, 내가 씨발놈이고 죽일놈이니까 버림받았다고 치자. 그치만 아내들은……내 사랑하는 여인들만큼은……!!
경비대는 더욱 더 가관이었다. 초병은 없는 것도 모자라 그곳에 있던 입구나 시설들이 완전히 박살난 채 남아 있었다. 재활용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부서진 것들을 복구하려면 얼마나 많은 마력을 써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아내들은……설마 아내들도 저 꼴이 난 건 아니겠지? 내 사랑스러운 아내들이 이 영문 모를 일에 휩싸여 다치거나……죽은 건 아니겠지? 응!? 누가 대답 좀 해봐! 부탁할게, 대답 좀 해보라고!
“혜린아! 로라! 메이! 아이나!”
프레그넌트에서 만나게 된 네 명의 아내들의 이름을 부르며 경비대 막사로 향했다. 막사는 박살이 난 상태였고 레이 시리즈가 있던 헛간마저 엉망이 된 상태였다.
“미카! 안나! 니나! 아이라!”
여행을 하며 아내로 맞이한 그녀들의 이름을 불렀지만……대답은 없었다. 함께 식사를 하던 식당에는 깨진 식기들이 난잡하게 버려져 있었고, 함께 모여 담소(談笑)를 나누었던 집무실은 더 이상 집무실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씹창이 되어 있었다.
“희진아! 은채야! 아스카! 제발……누구 없어!? 누구 없냐고!?”
부서진 검이나 찢긴 은색 비키니 아머를 보니 가슴이 마구 뛴다! 설마……죽었나!? 마을 안에서 누군가 죽은 건가? 누구지? 은색 비키니를 입는 사람들은 경비대원들인데? 검이 부러졌어? 왜? 대체 무엇과 싸운 거길래?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거지? 뭘 한 거지!?
“우, 쿠훅! 쿨럭! 쿨럭!”
“세린!”
다급하게 날 부르는 안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또 과다호흡이냐……하필 이 중요한 순간에! 바닥에 쓰러진 채 켁켁 대면서도 내 머리는 끊임없이 그녀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박살나다니……뭐가 어떻게 된 거지? 프레그넌트 주변에는 더 이상 괴물이 없었다. 초록색 촉수괴물은 전멸했으며 그 괴물의 여왕인 아스카는 내 아내……였었지. 그녀들한테 받는 사랑과 신뢰가 끊겼기에 더 이상 마력 회복 및 증폭의 효과를 받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사랑과 괴물은 별개의 문제였다. 사랑이 없어졌다 해서 갑자기 괴물이 쳐들어올 리도 없었거니와 이 주변의 괴물은 이미 토벌한지 오래였다. 그놈들을 때려잡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의문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아스카뿐만 아니라 레이 시리즈를 경비대와 함께 근무시킴으로써 혹시나 다른 괴물이 다가오면 바로 눈치 챌 수 있도록 안배를 마쳐 놓았다. 수상한 괴물이 나타났더라면 안즈가 오기 전에 말했을 텐데 그런 언질조차 없었다.
괴물은 서로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기에 그만큼 다른 괴물의 기척에 민감했다. 레이 시리즈를 경비대와 함께 근무시켰으니 성벽을 돌며 그 감지 범위를 더욱 넓혔는데……감지조차 못 했던 적이 들어와 순식간에 프레그넌트를 박살냈다고? 그게 말이나 막걸리냐?
이해할 수 없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도저히 납득이 안 가지만……그래. 그런 괴물이 있었다 치자. 그럼, 경비대랑 내 아내들은? 걔들은 손 놓고 마을이 이 지경이 되는 걸 보고만 있었겠냐? 천만의 말씀이다! 아이나는 이 프레그넌트의 촌장이었고 로라는 이 마을의 경비대장이었다!
메이는 로라의 딸이었으니 당연히 이 마을을 지키려 했을 테고 그건 미카나 안나, 니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스카를 포함한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그녀들의 전투력은 다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안다! 함께 여행을 하고 싸워왔으니 모를 턱이 없잖아!
마법사 양성소에서 선생님이었던 아이라는 수도 근무를 권유받을 정도로 우수한 마법사였다! 그런 아내들의 전투력을 다 합친다면……괴물 토벌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모습은 무엇인가? 아무리 봐도 이 박살난 마을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녀들이 마을을 지키지 못했다’잖아!?
“……!!”
과다호흡에서 겨우 벗어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사람을 발견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부서진 파편이나 건물에서 느껴지는 기시감(旣視感, 데자뷰Dejavu)……! 이건!
부서진 파편들은 처참하게 부서진 것들도 있었지만 검게 그을린 자국도 있었다. 파편의 경우 마치 뜨거운 열에 의해 녹다가 만 것처럼 뭉툭하게 변한 것도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강한 열을 가할 시 물체가 그 열에 버티지 못해 녹아들어가는 현상이었다.
왜 이런 중요한 순간에 과학 시간 때 말할 거 같은 현상이나 말을 하냐고? 그야 뻔하지. 이 현상을 나는 본 적이 있다. 본 적이 있는 정도가 아니다. 이러한 공격에 맞을까봐 피한 적도 있었지. 그때 나 대신 맞은 것은 나무였으며 검게 탄 자국과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기도 했다. 엄청난 고열을 버티지 못해 나무가 타버린 것이었다.
“이, 이건……설마……!”
안즈도 부서진 파편들에서 기시감을 느낀 건지 입을 열었다. 거울은 없지만 내 표정은 틀림없이 절망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리라.
“그 괴물 새끼들…….”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다시금 나오기 시작한다. 안 돼……안 된다고……! 왜……왜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이 ‘아내들한테도’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청록색 촉수괴물이……여기에도 왔었어……!!”
무릎을 꿇은 채 땅을 주먹으로 힘껏 쳤다. 마른 모래가 살짝 날렸고 내 눈물은 그 모래 위로 떨어졌다. 눈물은 모래를 적시며 넓게 퍼져갔고 그 확산이 멈췄을 때의 형상은……몸에서 떨어진 혈액으로 만들어진 핏자국과 같았다.
============================ 작품 후기 ============================
건강문제로 후기는 다음에 쓰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