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5 「15-4 : 왜 내 인생은 늘 이러냐……? (20)」 =========================
납치당한지 5일째 되는 날 점심. 아침부터 출진(出陣)했던 95명의 야만족들은 50명 이상의 동족을 잃은 채 패퇴(敗退)했다.
부상자부터 시작해 부축하는 사람까지 모두 합쳐 37명. 나까지 합쳐 38명이 숲을 빠져 나가기로 했지만 살아남은 것은 겨우 두 명. 그것도 만신창이가 되면서 겨우 목숨만을 부지했다.
내가 이 세상에 소환된 지 6개월이 넘었고 그동안 많은 아내들을 만들어왔다. 모두한테 공평한 사랑을 줬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는 생각했다. 그녀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괴물도 많이 쓰러뜨렸다. 머나먼 타지(他地)에 여행도 떠났었지.
과정을 많이 뛰어 넘어 결과만 말하자면……난 ‘하렘 어드벤처’의 임금이자 왕이 되었다. 그래, 쪽팔리는 거 아니까 놀리지 마라. 일단 직책이 그런 거지 실제로 내가 왕이라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하는 게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과 관계없이 내 아내들은 나를 사랑해줬고 나 또한 그녀들을 사랑했다.
안즈에 의해 납치된 나는 마력봉인수갑으로 인해 마력을 전혀 쓸 수 없게 됐었다. 마력을 쓸 수 없게 되면 아이템 사용 등이 불가능해지므로 스테이터스 메뉴 등을 전혀 보지 않았었다. 그럴 시간이 없었던 것도 한 몫 했다만.
프레그넌트에서 3시간 거리밖에 되지 않는 야만족의 숲. 5일 동안 단 한 명도 안 왔다는 건 사실상 내가 버림받았다는 걸 의미했다. 그것만 해도 환장할 노릇인데 이것도 모자랄까봐 내가 미치고 팔짝 뛸 소식들이 가득했다. 마치 원하지 않는데 받는 스팸 메일처럼.
아이나와 섹스를 하며 얻게 된 2.5배의 마력증폭 효과. 마리아한테서 받은 사랑과 신뢰의 반지. 두 개의 마력 증폭 효과는 모조리 사라져 42,500에 윽박하던 찬란한 마력은 겨우 3,000이 되어버렸다. 단숨에 거지가 된 것이다.
이것도 미치겠는데 내가 가지고 있던 아내들의 코스튬 또한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팔지 않는 이상 없어지지 않던 아이템들의 소멸은 내 생각 이상으로 일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서도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것은 마법이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마법이 있다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괴물이 나타나도 쓰러뜨릴 수 있고, 뭣하면 다른 사람의 마법을 복사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었으니까.
무엇보다……나한테는 그게 있었다. 바로 이곳에 처음 떨어졌을 때부터 가진 마법! ‘자지(좆)의 맹세’가 말이다! 여성을 지배할 수 있는 그 힘! 그 힘만 있다면 어떤 년이든 간에 내 자지에 들러붙은 채 얼굴을 비벼대는 암캐에 불과했다.
그 힘 덕분에 혜린이부터 시작해 많은 여자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 나한테 있어서는 최고의 효자 마법이었다.
날 버린 아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변심(變心)까지 시킬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날 버린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지. 헌데……다 사라져 있었다.
아이템의 소멸, 마력의 급감. 모두 다 충격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마법의 소멸이었다. 마법이 사라지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으로 변해버렸다. 대표적으로……지금 우리를 봐라. 텔레포트가 사라져 정말 말 그대로 ‘목숨 걸고’ 도망쳐 온 결과가 이거다. 단 두 명. 두 명만이 살아남았다.
텔레포트를 쓸 수 있었더라면 그녀들을 바로 이 프레그넌트의 숲으로 옮겨 어떻게든 치료나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 두 명만 살아남은 이 현실보다 더 찬란하고 아름다운 미래가 펼쳐질 수 있었겠지!
하지만 백발의 시발년은 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무기와 코스튬으로 겨우 겨우 도망쳐 나와 다다른 곳이 이 숲. 텔레포트는커녕 자지의 맹세조차 사라진 나는 더 이상 마법사라 부를 수도 없었다. 그저 마력을 쓰는 버러지일 뿐.
참으로, 정말로, 진실로……비참했다. 잃어버린 것은 너무나 컸지만 아직도 내가 잃은 것은 남아 있었다. 하하, 웃기다. 잃은 것이 남아 있다니. 쉽게 말해 ‘아직 내 비참한 현실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말이었다.
마력, 마법, 아내, 아이템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내가 있을 곳]마저 잃어버렸다. 봐라. 숲이다. 내가 어쩌다 이 숲에서 노숙을 하게 됐을까? 맨 처음 ‘하렘 어드벤처’에 소환됐을 때는 이렇게 잤었지. 마을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으니까.
프레그넌트를 제2의 고향으로 삼은 후부터는 거의 대부분 방에서 잤다. 내 아내들과 관계를 나누며 자던 그 시절이 이토록 사무치게 그리워지다니. 아내가 늘어남에 따라 잘 수 있었던 곳은 많아졌었고, 왕궁에서 자보기도 했다.
한 때는 누구 하나 부러울 이 없었고 무엇 하나 모자란 게 없었는데 납치된 후로는 모든 걸 잃고 돌아갈 고향마저 잃어버리다니!! 이래서야 패주무사……아니. 몰락한 왕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마리아한테서 사랑과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건 버림받았다는 뜻이며, 이것은 내가 더 이상 왕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테나, 헬레나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그들의 사랑과 신뢰로 마력 백업(Back Up)을 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들을 아내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
그래! 다 좋다 치자! 아, 음……솔직히 별로. 아주. 존나 안 좋다만……그래. 좋다 쳐. 잃어버린 걸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는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뭐?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것도 아니라고? 제발……나도 알거든요? 자식 잃은 부모한테 ‘느그 자식 뒤짐 ㅋㅋㅋ’하면서 패륜드립 치고 싶냐? 내가 너님들보다 뼈저리게, 미치도록 잘 알고 있거든요!?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조금씩이나마 되찾을 수 있었다. 신뢰도, 사랑도. 모두 다 되찾을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내가 가진 ‘마법 - 자지의 맹세’만 있다면 말이다.
눈앞에서 낙태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자지에 맹세와 사랑의 키스를 하던 니나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했다. 그걸 떠올리자 하반신이 불끈거린다.
그래! 그 정도로 최고였다! 내 평생 ‘자지의 맹세’ 같은 마법은 듣도 보도 못 했었고, 그것보다 뛰어난 마법을 찾을 수도 없을 거 같았다!
모든 걸 잃어버려도 그 마법만 있다면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정도로 그 마법은 나한테는 최고의 마법이자 최강의 마법이었으니까! 맨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나한테 모든 것을 안겨 준 마법이나 진배없었으니까!
그런데……그 마법이. 그 소중한 마법마저 없어져 버리다니……!?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한테 ‘자지의 맹세’마저 사라졌다는 사실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사형을 알림과 동시에 지금까지 내가 저질렀던 모든 죄와 행동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메시지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여자들을 취하고 범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세상이 가지는 특수성도 있었다만, ‘자지의 맹세’를 등에 업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남자의 물건과 정액. 임신을 행복으로 여기는 여자들은 내가 어떠한 것을 요구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혜린이를 대낮부터 강간했던 것부터 시작해 안나와 니나한테 여관 주인을 살해하도록 명령시킨 것도. 그녀들이 나를 배반하거나 의심하지 않을까 마음을 감시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다 ‘자지의 맹세’라는 마법이 있어서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녀들을 내 곁에 있게 해줄 최고·최강의 마법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다니……!! 내가 당장 프레그넌트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에는 이러한 요소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나를 버린 것부터 시작해 ‘자지의 맹세’의 효과가 끊긴 그녀들은 더 이상 내 여자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저질렀던 무례함, 죄, 행동에 대해 얼마든지 추궁할 수 있으며……난 거기에 대해 변명할 수단이 없었다. 그것은 사실이며 진실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내가 한 짓이 용서받을 만한 게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서운함과 억울함 또한 가득했다. 내가 죽일 놈, 나쁜 놈 소리만 들을 정도로 악랄하게 살아온 게 아니라는 건 독자들 모두가 알 거라 믿는다. 나 자신을 위해 많은 짓을 했다만 그렇다고 나만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만 행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시발 내 사리사욕만 채우려 했으면 미쳤다고 여행을 떠났겠냐? 미쳤다고 괴물 토벌한다고 매일 나가서 싸웠겠냐? 그녀들을 위해 무리한 리퀘스트까지 받아서 해결했잖아. 적어도 죄에 대한 정상참작(情狀參酌)을 받을 정도의 선행(善行)은 해왔다고!
그 정상참작이 날 버리는 거였나? 그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숲에 버려두는 게 내 죄와 행동에 대한 대가였냐고. 마법도 못 쓰고 마력도 줄어든 나한테 ‘죽어라. 아니면 알아서 살아남든가 ㅋㅋㅋ’라는 선택지를 주는 게 너희의 최선이었냐? 망할 년들……!!
주관식 문제도 답을 모르겠지만 나에 대한 그녀들의 감정 또한 알 수가 없었다. 나한테 원한을 품고 있다면 당장 날 죽이려 들 수도 있었기에 여기서 조금이나마 체력과 마력을 회복한 후에 들어가야만 했다.
아아~!! 내가 어쩌다 이런 처량한 신세가 됐을까? 날 차지하기 위해 그토록 교태를 부리던 아내들은 어디로 가고 내 목숨을 빼앗지 않을까 겁먹어 오밤중에 이딴 숲에나 돌아오다니! 그것도……날 이 지경으로 만든 원흉과 함께!
내가 소리 지르고 한숨 쉬고 눈물 흘리며 온갖 발광을 하자 안즈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침묵을 지킨 채 무릎을 끌어안은 그녀의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고혹적인 것이었기에 하반신이 불끈거렸다. 그러고 보니……어제 이후로는 여자를 안지 못했군. 사실은 ‘어제까지 강간당했다’라고 표현해야 옳은 말이다만.
하아……. 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으며 과일을 하나 더 꺼냈다. 이 오밤중에 과일을 찾아 먹으라니. 그거야 뭐……할 수는 있겠지. 그 지옥에서 살아남았는데 그거 하나 못 하겠냐? 그치만……동족을 모두 잃은 그녀한테는 너무 무리한 요구 같았기에 그냥 먹을 거나 다시 주자 싶었다.
“자. 먹어라. 또 던지면 진짜 안 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걸 받고는 바로 베어 먹었다. 그래. 고맙다는 인사는 필요 없단다. 싸가지 같으니라고. 고맙다는 말 좀 하면 어디가 덧나냐? 하아……대체 그 많은 야만족 중에 왜 쟤가 살아남았을까?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과일을 다 먹은 그녀는 조금 전처럼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배고픈 게 사라지니 아픈 걸 느꼈는데 쟤는 괜찮으려나……그렇게 괴물이랑 치고 박고 싸웠는데 배가 능력이나 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몸은 좀 괜찮냐? 난 온몸이 쑤시는데.”
젠장. 욕하던 여자한테 갑자기 친근하게 굴다니. 나도 미친놈이지. 이미 모든 마법을 잃었기에 그녀를 지배할 수도 없었지만 지배할 생각도 없었다. 정신이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는 그녀를 지배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가 텔레포트를 하려 했던 곳이야?”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래. 나랑 내 아내들이 괴물을 토벌한 곳이지. 괴물도 없고 먹을 것도 많고. 그렇게 춥지도 않아서 여기로 걔들을 옮길 생각이었어. 근데 수갑 풀어보니 마법은 모조리 사라지고, 아내들은 다 날 버렸지.”
말을 안 해도 될 것까지 술술 튀어 나왔다. 그 말에는 ‘사태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너님 탓임^^ 이제 어쩔 거임?’이라는 뉘앙스도 들어가 있었다. 안즈는 내 비아냥이 들어간 말에 웃음을 지었다. 무시하는 건가?
“……좋은 곳이네.”
으음. 이젠 비아냥마저 분간할 능력이 없어진 거 같았다. 그래, 뭐. 좋은 곳이긴 했지. 아내랑 고향 잃은 병신이 도망쳐 올 곳으로는 충분하다만 딱히 오고 싶어서 온 곳은 아니었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라면……그 애들도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아기랑 같이…….”
당연한 소리지만 ‘그 애들’이란 이미 죽은 야만족을 뜻하는 말이었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난 고개를 저었다.
죽은 사람을 아무리 생각해도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건 원래 있던 현실 세상도, 여기도. 모두 다 마찬가지였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건 신이겠지.
“……내가 모두를 죽인 거야.”
제발 이런 말 좀 안 하면 좋겠다……. 난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 이미 다 뒈졌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고 소용이란 말인가? 당장 앞일을 생각해도 모자랄 판에.
“……그런 생각 하지 마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힘들어질 테니까 그냥 잊어.”
내가 말해놓고도 웃긴 말이었다. 잊어? 어떻게? 죽기는커녕 겨우 6개월 넘게 살아온 아내들마저 아직 잊지 못해 이렇게 빌빌대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위선자 새끼! 어딘가에서 나를 비난하는 아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키리는 목이 날아가 버렸지. 아하하, 키리는 나보다 말도 잘 했었는데.”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듣기 싫었다. 이제 와서 무슨 과거 이야기인가? 과거의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고 모두가 돌아올 거 같냐? 그냥 잊어야 했다. 잊으면 편하니까. 앞만 보고 살아가면 되니까.
“다친 애들 중에는 바깥 세상에 나가면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싶다며 웃던 애도 있었는데.”
“아, 씨발. 닥치라니까. 말이 안 들리냐?”
잊어? 닥쳐? 웃기고 있네. 그러는 너는 아내들의 목소리를 그리워하며 눈물 질질 짤고 있는 주제에 누가 누구한테 그딴 말을 해?
“……난 모두를 죽인 시발년이야.”
“마지막으로 말한다. 하지 마. 이미 늦었으니까 그만두라고.”
어차피 좋든 싫든 직면할 사실이다. 적어도 이 밤만큼은 좀 편하게 자자. 현실도피 하루 정도 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다 끝났어.”
폭발하자. 응. 그래. 빡쳐도 된다.
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씨발 하지 말라고! 내가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넌 왜 그걸 씹냐? 너 철권하냐? 패링이나 반격기로 내가 한 말 흘렸냐? 씹었냐고!? 아니,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야지, 왜 그걸 꿋꿋하게 씹으며 사람 열 받게 하냐고! 이 개년아!”
내 폭발에 그녀는 가만히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어, 어어……이게 아닌데? 얘는 그냥 얌전히 듣다가 눈물을 흘려야 하는 포지션 아니었어?
“그래, 개년이다! 개씨발 새끼야! 너 같이 무능하고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도망치는 거밖에 없는 놈 말을 듣고 뛰쳐나간 내가 병신이었다고! 머저리 새끼야!”
머, 머저리……!? 내 눈에서 뜨거운 게 마구 흘러넘쳤다. 억울함과 슬픔은 더 이상 눈물샘을 억제하지 못했다.
“아하하, 그래! 다 니 탓이야! 모두가 죽은 건 다 니 탓이라고! 니가 얌전하게 우리 숲에 왔더라면……! 니가 처음부터 프레그넌트가 아니라 우리 숲에 왔더라면 모두 행복해질 수도 있었잖아!”
“뭐, 뭐……뭐 이딴 년이 다 있어!? 야! 그걸 말이라고 해!? 니가 멋대로 날 납치해 내 인생 좆망 수준까지 끌어내린 다음에 하는 말이 뭐? 사죄도 아니고 사과도 아니고 뭐? 다 내 탓? 하, 쒸벌! 너님 책임전가(責任轉嫁)스킬이 좀 쩌는 듯? 미쳤냐? 대가리 돌았냐고!?”
내 비아냥이 들어가자 이제야 그걸 알아먹었는지 더욱 더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그래, 돌았다! 이제 어떻게 해줄 거야? 어떻게 해줄 거냐고!? 내 동족은 다 죽었어! 니 잘난 말 듣고 수갑 풀어줬는데 도망가자는 헛소리나 지껄였어! 그런 헛소리를 지껄였으면 목숨 걸고 우리를 지키다 뒈졌어야지!”
이, 이 씨발년이……!! 난 주먹을 들어 힘껏 그녀를 쳤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능숙하게 피한 뒤 내 배에 카운터를 먹였다. 개, 개년아! 배빵 치면 어떻게 해!? 아헤가오 더블피스 포즈 취하면 니가 나 남편으로 받아줄 거냐, 썅년아!?
……음. 미안. 이건 좀 아니었다. 무리수였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쳐다보니 그녀는 나를 납치했을 때처럼 비웃음을 가득 담은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꺄하하핫! 거 봐! 완전 약해빠졌잖아! 니가 무슨 임금이고 왕이야? 다친 사람 하나 못 구하는 머저리지! 너 같은 놈을 버리는 게 그렇게 억울하고 짜증났어? 나 같아도 버리겠다, 무능한 새끼야……컥!?”
응, 그 무능한 새끼 태클 좀 받아보렴. 주먹으로 때리는 게 어려우니 온몸으로 태클을 걸었다. 덕분에 그녀를 쿠션 삼아 땅에 떨어졌고 우리의 꼬라지는 더욱 더 형편없게 변해버렸다.
“하핫, 무능한 새끼의 태클은 맛이 어떤가요? 멍청하고 무능한 살인자 지휘관(指揮官)님?”
우린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심한 표현과 잔혹한 수식어로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이런 부분에서 호흡이 맞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만……별로 기쁘지도 않았다. 내 말에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구겼다.
“그건 다 니 탓이었어! 니가 무능하고 능력이 없어서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거라고!”
“지랄 쌈 싸먹고 계십니다! 지가 무능한 걸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것도 걸작인데 뭐? 구해주려 한 사람의 선의까지 자기가 무능하고 병신 같았던 걸 감추려는 도구로 쓰다니! 너 같은 년 때문에 뒤진 야만족이 불쌍하다 못해 가련하다! 퉷!”
숲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얼굴에 침을 뱉자 그녀는 나를 발로 찼다.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찬 것이었기에 타격은 별로 없었지만 발로 차였다는 것 자체가 나를 더욱 열 받게 했다.
“이 애미레스(Motherless) 애비레스(Fatherless) 년이 뒤질라고 환장했냐!? 남 탓하지 마! 날 데려온 것도, 아이들을 죽음에 내몰았던 것도! 전부 다 무능하고 판단능력 창렬이었던 니 탓이었어! 너 때문에 일어난 죽음을 남 탓으로 돌리지 마!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떠넘기지 말라고!”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마치 사형선고라도 들은 것 같이 가만히 있었기에 이때다 싶어 더 심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래, 시발! 나 무능하다! 근데 넌 뭐야? 그 무능한 새끼 데려와 멋대로 아기 씨앗을 받을 대로 받아놓고 싸우러 나갔지! 그 결과가 그거냐? 50명 넘는 동족을 괴물 새끼들한테 꼬라박은 게 그 찬란한 결과냐고! 아, 그래! 좋아했겠지! 괴물들은 틀림없이 좋아했을 거야! 암, 좋아하고말고! 웬 미친년이 겁도 없이 덤벼서 먹을거리를 50명이나 두고 갔는데 싫어할 리가 있나!?”
풀썩 주저앉은 안즈는 눈물을 흘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날 향한 그 눈빛에는 원망과 당황스러움이 있었다.
“어, 어떻게……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어? 니가 인간이야!?”
“인간이다, 시발년아! 심하긴 뭘 심해? 심하다고? 그럼 처음부터 하지를 말았어야지! 니 입맛대로 날 납치해 내 인생 박살낸 건 안 심하냐? 그건 내가 웃으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거냐? 와, 씨발! 쩔어주는 이중잣대 보소!”
그녀한테는 더 이상 날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논리(論理)면에서는. 힘으로는 나를 어떻게 제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제 와서 제압한들 아무런 쓸모도, 소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잠잠히 내 욕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니가 한 짓은 마땅히 해야 하며, 그 때문에 누군가 피해를 입는다 치더라도 용서를 빌 필요도, 받을 필요도 없다 이거냐? 그럼 잘 됐네! 시발, 괴물들도 마찬가지 아냐? 지들이 살고 싶어서 너희 잡아먹었잖아! 무능하다 못해 병신이었던 니가 호화찬란하게 95명 만한전석(滿漢全席) 코스를 가지고 놈들한테 갔는데……그건 괜찮지? 응? 그 괴물들은 너나 죽은 년들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할 필요도, 용서해달라고 할 필요도 없지? 응? 대답해봐, 이 개년……억!”
씨발, 또 때렸어! 그녀는 나처럼 태클을 걸었고 중심을 잡지 못한 나는 뒤로 쓰러져버렸다. 젠장, 또 마운트 포지션이냐!? 아아……또 존나게 처맞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꼭 감았다. 으응……왜 안 때리지? 혹시 눈 뜰 때 때리려고 하나? 이런 사악한 년을……!?
“……어?”
얼굴과 목덜미에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은 내 것이 아니었다. 슬며시 눈을 뜨니……안즈가 울고 있었다.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끅끅대는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조금 전의 당찬 모습이 아니었다.
“……저기, 안즈 씨?”
“……흐, 윽……그럼 어쩌라고 개새끼야!? 난 최선을 다했어! 최선을 다했다구! 결과가 그렇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는데……대체 난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되냔 말이야……흐윽, 흐아아아앙────!!”
아, 씨팔! 울음보 터졌어! 그 모습을 보자 내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넘쳐흘렀다. 아, 쟤가 불쌍해서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왜 이 지경이 되어서도 여자 멘탈 케어(Mental Care ; 정신 관리)나 해줘야 하나 싶더군. 그렇게 생각하니 감정이 복받치더라.
서러웠다. 사랑, 아내, 마법, 아이템, 마력, 지위, 있을 곳. 그 외에도 내가 지금까지 일구어낸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고 앞으로 갈 곳도 막막한데 남은 것은 얘와 나. 이렇게 초라한 차림에 만신창이가 되어 서로 울고 있다니. 이래서야 닮은꼴끼리 모여 서로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장면 같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웃겼다. 의외로 들어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녀 때문에 모든 걸 잃어버렸다. 안즈는……야만족의 죽음이 전부 다 나 때문은 아니다만, 숲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실행하다 동족들을 잃어버렸다. 괴물들의 수나 생각지 못한 요소는 많았다만 ‘나가야 한다’라는 말을 한 건 틀림없이 나였다.
물론 내 말을 듣지 않고 그 숲에 남아 있었더라면 전멸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 숫자와 놈들의 흉폭함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절로 일어난다. 싸운다는 선택지를 골라도 죽음은 피할 수 없었겠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녀들한테 제안했던 ‘최선의 선택’에 아주 조금도. 눈꼽만큼도 책임이 없냐고 묻는다면……그건 아니었다. 그녀들뿐만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기 위한 선택지였으며, 그 선택지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죽었으니까.
어쩌면……그 선택지를 그녀들한테 강요했던 건 나 대신 죽어줄 사람. 내가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도록 대신 죽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네년들 때문에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됐으니 대신 너희의 죽음과 희생으로 내 퇴로(退路)를 열라는 마음이 1%도 없었다고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미래를 망쳐도 자기들의 앞날만 밝으면 된다고 생각한 쓰레기 같은 년.
전부 다 너희 탓이니 나를 위해 죽으라는 마음으로 도망을 제안했던 쓰레기 새끼, 나.
우리 둘 다 쓰레기였고, 구제할 길 없는 병신이었으며,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모르는 패배자들이었다. 패잔병, 몰락한 사람, 머저리. 하필이면 남아도 왜 이런 여자랑 남았을까 싶었는데 다 그런 이유가 있었군.
별로 칭찬할 생각은 없지만 그 머리 하얀 미친년이 이런 것까지 생각해서 나와 안즈를 남겨 놓은 거라면……그래. 인정한다. 넌 나한테 끝까지 빅엿을 먹였고 멋지게 성공했다. 그 빌어먹을 노력과 안목은 인정해주마, 개년아.
더 이상 때릴 마음조차 없어진 그녀와 나는 울었다. 그녀는 내 가슴팍에 안긴 채 동족의 죽음을 슬퍼했고, 나는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몰라 그녀를 끌어안은 채 그저 울어댔다.
소중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두 사람은 그렇게 눈물로 밤을 보냈다.
더욱 슬픈 것은……눈을 뜬 후에 닥쳐올 현실이 지금 당장 슬퍼하고 있는 현재보다 더욱 가혹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6월도 끝이 보이네요. 근데 제 직장생활은 좆같기 그지없습니다. 돈 없어서 야근이나 주말근무도 못 시키는 주제에 바라는 건 존나 많은 직장이거든요. 빌어먹을 놈들.
프레그넌트의 숲에 도착한 두 명이지만 상태는 심각합니다. 세린은 있는 것 대부분을 잃어버렸고 안즈는 동료와 고향을 잃어버렸습니다. 얻은 건 거의 하나도 없다시피 한 상황. 과연 앞으로 두 명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물론 잘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
안즈의 책임전가 부분은 꽤 즐겁게 적었습니다. 잘 되는 건 내 덕이지만 못 되는 건 니 탓. 참으로 멋지기 그지없는 삶의 자세였거든요. 물론 이딴 걸 현실에서 써먹었다간 좆★망! 인망이 비 떨어지듯 후두둑 떨어질 겁니다. 남탓만 하는 건 능사가 아니거든요.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남이 무조건 나쁘다는 식으로 대하는 건 좀 아니죠. 그러므로 우리는 ‘적당히 남의 탓으로 돌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세상일 제대로 안 돌아가는 게 본인 탓만은 아니잖아요.
덧붙여 본문에 철권이 나왔습니다만……이번에 나온 철권7은 온라인은 괜찮은데 싱글 플레이는 진짜 씹창 수준이었습니다. 튜토리얼도 없고 초보자를 위한 모드도 없고. 캐릭터별 루트나 스토리는 초 날림. 그런 주제에 미시마 가문 이야기가 결판난다뇨. 헤이하치가 다음 작품에서 부활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이빨 까는 걸까요.
있는 캐릭터들 모조리 없애고 이상한 신캐나 넣은 이 상태에서 과연 철권8이 나올지 어떨지. 나온다 치더라도 현재만큼의 화력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저야 안 하긴 하지만 적당히 보면 재미있거든요.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보랏빛날개님, 지금까지 온갖 호강을 시켜줬으니 이 정도의 고난은 겪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하반신을 움직여대며 즐길 거 다 즐겼으니까요. 까놓고 말해 마법이나 아내들의 힘을 빌려 일을 해결해왔습니다. 자기자신만의 힘으로 마법 없이 사건에 직면하는 건 이게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Baramdolyi님, 저도 이걸 배신이라 칭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만……구해주러 올 거라 믿었던 아내들은 안 오고 신뢰나 사랑 등은 모조리 소멸. 거의 좆망급의 사태다 보니 배신이라는 표현 외에는 적절한 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더 진행되면 왜 아내들이 배신을 했을까 하는 것까지 나오긴 합니다만……너무 성급하게 적은 게 아닌가 싶네요.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이상입니다. 앞으로 급전개를 뛰어넘는 초☆전개가 될 수도 있으니 'ㅋㅋㅋ이 작가가 그럼 그렇지'하며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코멘트와 선작, 쿠폰 등 많은 응원에 다시금 감사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