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4 「15-3 : 왜 내 인생은 늘 이러냐……? (19)」 =========================
그 후에는……그저 달렸다. 키리의 목 부분이 눈 깜짝할 새에 날아갔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곳에서라면 날아온 각도를 산출(算出), 거리를 역산(逆算)하여 적의 위치를 파악했겠지만……다들 알잖아? 좆같은 현실에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거.
괴물의 수는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난 그 숫자를 보고 내 생각이 잘못 되어도 아주 단단히 잘못됐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많은 숫자가 야만족의 숲을 에워싸고 있으니 어느 한 부분만 뚫으면 탈출의 희망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괴물은 그런 내 생각에 멋지게 빅엿─BIG + 엿. 엿 머겅 두 번 머겅 할 때 그 엿이다. 실제 엿은 맛있지만 세 번째 올리는 엿은 사양이다─을 선물했다. 놈들의 수는 우리를 에워싸고도 다른 곳에 감시를 배치할 정도로 많았다. 쉽게 말해……남은 야만족이 무사히 탈출한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후좌우, 사방팔방. 앞뒤 가릴 것 없이 마구 날아오는 빛을 피하며 달려야만 했다. 쓰러진 야만족을 뒤돌아보다 죽은 애들도 있었다.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몰랐지만 바로 앞에서 쏘는 괴물을 보고도 우린 도망쳐야 했다.
내 아기 씨앗을 에너지 원으로 삼은 배가 능력을 쓰면서까지 도망쳤지만 그것도 헛수고였다. 다친 사람을 데리고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뒤에서 후속 그룹을 지키던 세 명 또한 죽은 지 오래였다. 죽은 사람보다 남은 사람을 세는 게 훨씬 더 빨랐을 정도니 얼마나 빨리 사람이 죽어갔는지는 쉽게 상상이 가리라.
허겁지겁 도망쳤다는 말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음……꼬리가 빠지게 도망쳤다고 해야 할까? 그녀들을 패잔병이라 칭한 게 부끄러울 정도로 힘차게 도망쳤다. 아마 한 평생 그렇게 힘차게 도망치는 일은 겪을 일이 없겠지 싶을 정도로. 패잔병이 ‘ㅋㅋㅋ 쟤들 뭐임?’이라고 비웃을 정도로 정신없이 도망쳤다.
야만족이 쓰러지고 죽을 때마다 나는 어쩜 이다지도 나는 쓸모없는 인간인가 하고 탄식했다. 마법을 쓸 수 있었더라면……!! 텔레포트를 쓸 수 있었더라면! 이 빌어먹을 죽음의 숲에서 단숨에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만 마력은 증폭 효과고 지랄이고 나발이고 간에 모조리 없어진 3,000. 마법은 모조리 사라진 상태. 내가 있는 곳은 괴물이 득실거리는 죽음의 숲이었다. 우리한테 주어진 선택지는 ‘도망간다’밖에 없었고 우리는 그걸 충실하게 수행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나와 안즈는 끝까지 그 빛을 맞지 않았다. 빔 병기나 다름없는 그 빛은 ‘맞는다=죽는다’ 공식이 성립될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안 맞아야만 했다. 괴물들은 눈 감고 아무데나 쏴도 상관없지만 우리는 한 발이라도 그 눈 먼 빛을 맞았다간 [축(祝) 사☆망]이었으니까…….
아, 그렇다고 내가 멀쩡하다는 말은 아니고. 놈들의 아가리에서 나오는 빛만이 모든 공격은 아니었다. 갑자기 날아온 촉수에 등, 배, 손 등을 강하게 맞았고 지금도 그 아픔은 계속 되고 있다. 움찔해도 아픈 걸 보니 부러진 게 틀림없는 거 같았다.
그치만 덕분에 내 HP는 30% 이하로 내려갔고 M16A1와 K2 소총은 자동사격모드로 전환됐다. 부카케에서도 그랬지만 두 정의 소총은 추진제도, 슬러스터도 없이 하늘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적을 공격했다. 어디에 적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 총이 날아간 이상 무사히 살아남기는 어려웠다.
총이 우리 주위의 적 중 가장 진로에 방해되는 놈들을 자동으로 사격할 때마다 고마움을 느끼며 달려 나갔다. 뒤에 누가 있는지, 몇 명이나 살아남았는지 따위는 알아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안 돌아봐도 결과는 뻔하다는 걸 이미 머리가 알고 있었으니까.
미친 듯이 도망친 결과, 나와 안즈는 숲을 나올 수 있었다. 광활한 대지가 우리를 반겼고 우리는 서로를 봤다. 그 후의 시선은 뒤를 봤고 우리의 뒤에는……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아니……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안즈. 오직 둘. 우리‘만’ 살아남은 거였다.
† † † † † † † † † †
나까지 합쳐 38명 중 오직 두 명만이 살아남다니. 프레그넌트의 숲까지 온 지금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숲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그야말로 혼이 나간 인형 같았다. 그 와중에도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혹시나 괴물이 따라온 건가 싶어 헐레벌떡 도망친 내 모습은……정말 역겨웠다.
걸어가는 도중 우리는 단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난 그제야 그토록 원하는 프레그넌트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근데 그거 아냐?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나 진짜 가도 되나?’
정말 가도 괜찮을까? 그렇게 많은 야만족 애들이 죽었는데 꼴랑 우리 두 명만? 그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놓고 나 혼자 가도 괜찮은 걸까? 프레그넌트로 돌아갈 사람은 사실상 나 한 명이었기에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래봤자 다 합쳐도 두 명이었다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었다. 나와 안즈는 피투성이, 흙투성이가 된 채 볼품없는 상태로 걸어갔다. 비싼 돈을 주고 산 코스튬은 여기저기가 부서져 있었고 그녀의 붕대와 훈도시는 완전히 찢겨 걸레짝이 된 상태였다. 막말로 그냥 거적더기를 입어도 현재 상태보다는 나아 보일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내 HP는 30%이하. 신체 일부는 뼈가 부러졌음에 틀림이 없었으며 안즈 또한 크고 작은 상처를 지닌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그넌트로 바로 가지 않은 이유는……내 경우에는 이대로 아내들을 만나기가 좀 그랬기에 우선 좀 쉬고 싶었다.
안즈의 경우 내가 아내들한테 버림받은 것과 관계없이 적대적인 접대를 받을 거라 생각했기에 우선 이곳에서 쉬다 가는 게 나을 거라 권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말에 따라줬다. 사실……아무 말조차 못 할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진 것도 있었다만.
점심을 먹은 때부터 이 숲에 도착할 때까지. 30명이 넘는 야만족이 죽고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가며 여기까지 왔건만 시간은 오후 8시를 간신히 넘긴 상태였다.
미쳤군. 시간이 고작 7시간 정도밖에 안 지났다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꿈이라면 당장 일어나길 바랐다만……후후. 그럴 리가 없지. 나도 잘 안다. 이건 잔혹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배가 고팠기에 아이템 창 안에 남아있는 음식이 없나 살펴보던 나는 다시금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내 아내들한테 줬던 코스튬이 모조리 사라진 상태였으니까. 아내들한테 줬지만 소유권은 나한테 있었던 코스튬들이 왜 다 사라진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지. 이해할 필요가 있나? 괴물부터 시작해 모든 일을 다 만든 원흉이 존재하는데 내가 왜 힘들게 이해를 하려 노력해야 할까. 전부 그 머리 하얀 미친년 때문인데……. 속으로 그 여자를 욕하며 아이템 창을 다시 살펴본다.
그레이트. 쩔어주는군. 내가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배틀 코스튬은 내 손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가장 처음 샀던 시라누이 마이의 코스튬부터 시작해 비싼 돈을 주고 샀던 코스튬. 심지어 마리아와 아테나가 선물로 줬던 모든 코스튬들도 사라졌다. 남아있는 거라고는 내가 입고 있는 것뿐. 하하……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됐군.
예전에 주웠던 과일들을 꺼내 안즈한테 줬다. 먹을 것이 남아 있는 것에 대해 ‘먹을 걸 남겨줘서 고마워요!’라고 감사의 인사말을 올려야 할까, 아니면 ‘시발, 먹을 거 외에는 아주 탈탈 털어갔구만!’이라고 욕을 해야 할까? 내 경우에는 주로 후자쪽을 선택하겠다만.
“먹어. 진수성찬은 아니다만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
구차하군. 내가 생각해도 웃긴 말이었다. 기운을 차려? 기운을 차려서 뭐하게? 100명이나 있던 야만족은 얘 한 명을 놔두고 모조리 죽어버렸는데 이제 어디로 가라고? 어떻게 이렇게 많은 걸 생각해도 답 하나를 못 찾냐? 질문은 많은데 답은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과일을 베어 먹어도 그녀는 가만히 있었기에 어쩐지 죄 짓는 느낌이 난다만……어쩔 수 없다. 죽은 건 죽은 거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다. 죽은 사람을 위해 나까지 굶어죽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배가 능력 때문에 날 데려간 건 자기들이면서 멋대로 죽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다니. 너무하잖아……. 차라리 살아남아 날 풀어줬으면 오죽 좋았겠어? 너희도 살고, 나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잖아.
그렇지만……이제 그런 미래는 볼 수 없었다. 누구나 한 번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역사에는 IF라는 말이 없다]라는 말을. 이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미 일어난 사건은 되돌릴 수 없으며 우리는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게 아무리 불합리한 일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으니까.
과일을 다 베어 먹자 배고픈 게 좀 사라졌다만……이젠 몸이 아픈 게 느껴진다. 망할. 피곤해서 아픈 걸 못 느꼈던 건가? 어휴, 이런 멍청이. 배고픈 것도 싫지만 아픈 것도 싫은데. 이젠 지쳐서 화를 낼 힘도 없었기에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래, 아파라. 내일 프레그넌트에 들어가 치료를 받으면 나아질 테니까.
배고픔은 가셨는데 고통은 남아 나를 괴롭게 만드는 이 엿 같은 상황에도 안즈는 전혀 입을 대지 않고 있었다. 아, 젠장. 저러다가 진짜 아무것도 안 먹어서 죽으면 더 좆같잖아.
“야, 먹으라고.”
안즈는 과일을 내려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먹어서 뭐하게?”
“……뭐?”
……이게 미쳤나? 숲에서 나온 후 처음으로 꺼낸 말은 꽤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먹어서 뭐하게라니? 그야……먹어서 살아야 할 거 아니냐. 평생 안 먹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 죽었어. 다 죽었다고……다 죽었는데……애들이 다 죽었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씨발!”
욕을 하며 던진 과일은 나무에 부딪치자마자 쪼개져 버렸다. 쪼개졌다고 표현은 했다만 좌우로 깔끔하게 쪼개진 게 아니라 아예 파열(破裂) 수준으로 나뉘어졌으니 폭발했다고 해야 하나……? 산산조각이 난 과일 조각은 과즙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음……강렬하군. 저 과일 폭발 쇼에 대한 감상?
“배고파지면 니가 알아서 찾아 먹어라. 난 안 준다?”
“누가 먹고 싶댔어!? 누가 먹고 싶다고 부탁이라도 했냐고!? 웃기지 마! 이게 뭐야!? 이게 다 뭐냐고? 니 말대로 했잖아……니 말대로 우리가 살던 숲까지 포기했다고……!! 그런데 이게 뭐야? 나랑 너 빼고는 다 죽었잖아……이게, 이게 대체……!? 흐, 윽! 흑흑……!!”
지금까지 담아놓은 감정이 폭발한 건지 나한테 화를 내던 안즈는 갑자기 또 울기 시작했다. 하아……나도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너 뭐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
울고 있던 안즈는 눈물이 가득한 눈동자로 날 올려다봤다. 나도 분노 한 번 폭발 좀 시켜보자, 개년아.
“……너 말이야. 번지수를 완전히 잘못 짚은 거 아냐?”
“……무슨, 훌쩍. 말이야?”
훌쩍 소리를 내며 물으니 누군가는 귀엽다고 생각하겠지만……아서라. 날 꼬라보는 저 눈빛에는 증오와 분노가 가득했다. 시발, 너만 증오와 분노를 가지고 있는 줄 아냐? 나님도 있거든요?
“넌 애초에 왜 일이 이렇게 됐는지 아냐? 모르지? 답은 간단해……니가 날 납치해서 이 꼬라지가 된 거라고, 시발년아!!!”
괴물이 없는 고요한 숲에 내 더러운 욕만이 울려 퍼졌다. 안즈는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뭐, 뭐라고……!?”
“뭐라고는 무슨 뭐라고야!? 말했잖아! 다 니 탓이라고! 알겠냐? 날 납치하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거야! 애초에 뭐냐!? 배가 능력? 아기 씨앗이라고? 날 노예, 도구 취급까지 해가며 아기 씨앗을 얻었는데 결과가 이 모양이냐? 응? 최선을 다해 싸운 결과가 너 하나 살아남은 거냐고!?”
동족을 모두 잃은 여자한테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날 비난하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잊은 거 없냐? 나, 신세린이다. 지금까지 온갖 병신 짓거리를 다 했는데 그 질문에 대한 대답 하나 준비 못 했을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이미 준비한 상태였다.
“왜? 죽은 동료들 생각해서 내가 너 배려할 거라 생각했냐?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빌어먹을 개년아! 넌 동족을 잃었지만 난 모든 걸 다 잃었어! 아내! 마법! 도구! 전부 다! 내 아내들은 날 구하러 오지도 않았고 더 이상 사랑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아!”
사실이었다. 겨우 세 시간. 죽음의 숲─더 이상 야만족은 없었으며, 그들의 죽음만이 남겨진 숲이었기에 ‘야만족의 숲’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에서 이 숲까지 오며 나는 혹시나 아내들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지니고 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만났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미련이 너무 많다고? 그래, 미련 많다. 오죽하면 나 자신도 그런 나를 보며 ‘어휴, 병신 같은 새끼……그럼, 만족하냐? 널 버렸던 아내가 여기서 널 기다리고 있다 치자. 만족해? 널 버린 걸 모조리 다 용서하고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거 같냐 병신아?’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그렇게 해서라도 보고 싶었다. 왜 있잖아. 자기는 나름 유능한 간부라고 생각하는 악당. 그런 악당이 보스한테 버림받으면 ‘아냐……그분이 나를 버리셨을 리가 없어……’라고 중얼거리잖아. 현실도피긴 하다만……지금에 와서는 그 악당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함께 지냈던 시간만큼 우리의 유대(紐帶)는 강하다고 믿었건만……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 오늘로 딱 5일째. 어쩌면 그 전부터일 수도 있지만……6개월이 넘도록 함께 지내온 시간은 납치당한 5일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게 그토록 원통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에 나도 폭언을 던지고 있었다.
“그거 아냐? 난 아내들이랑 6개월을 넘게 같이 지냈어! 모든 여자들은 내 아기를 임신하고 있고! 난 내 아내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어! 목숨 걸고 모험도 했지! 지금 니가 있는 이 숲도 나랑 내 아내들이 노력해서 이렇게 된 거야! 괴물을 모두 없앤 평화로운 숲이 됐다고! 근데 너 때문에 다 끝났어! 다 쫑났다고! 내 아내들한테 버림받다니……다 너 때문이라고 씨발년아!”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거 아냐? 너보다 내가 더 어이없거든? 감히 누구 앞에서 그딴 표정을 짓는 건데?
“아, 그래! 니가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잘 알아! 존나 잘 알지! 내 말을 따라서 수갑 풀어줬는데 쓰라는 텔레포트는 안 쓰고 숲 밖으로 나가자는 병신 헛소리나 지껄여 대서 그렇지? 암, 그렇지! 우리 총명한 안즈쫭이 감히 그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거 내가 모르겠어? 모를 리가 있나!? 날 끝까지 도구, 노예로 쓰려 했던 니년의 그 더럽고 얄팍한 생각을 내가 모를 리가 있겠냐고!?”
안즈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곳에서 나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막을 권리나 자격조차 없다. 누군가 있다 치자. 그 새끼가 뭔데 나를 막을 수 있는데? 무슨 권리나 자격이 있어서 날 막을 수 있냐고?
내가 지금까지 뼈 빠지게 고생했던 것, 목숨 걸고 이룩했던 것들이 단숨에 날아가버렸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나한테 개입하겠다는 건가!?
다친 것도 모자라 모든 동족을 잃어버린 아이한테 이게 무슨 졸렬한 짓이냐고? 그래 시발! 난 존나 졸렬하고 병신이다! 그러니까 아내들한테 버림받았지!
그런 내가 졸렬함을 발휘해 이 아이한테 정신적인 공격을 가한다고 한들 뭐가 문제인데!? 애초에 모든 사건의 발단은 바로 이 개년인데!? 나한테는 틀림없이 분노할 자격과 권리가 있었다.
“너 때문에 망한 게 한두 개인 줄 아냐? 아내들한테 버림받은 것도 좆같지만 가지고 있던 마력이나 마법을 잃어버린 것도 존나 좆같아! 4만을 넘던 MP는 꼴랑 3천이 되지를 않나, 목숨 걸고 싸워서 얻은 마법들은 모조리 사라져 있지를 않나!? 그것도 모자라 아이템도 다 사라졌어! 너한테 납치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고! 대체……넌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니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기는 알아? 알기는 하냐고!?”
“나, 나는. 나는 그저……. 우리 야만족을 위기에서 구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살아남기 위해서 그랬던 것뿐이……꺅!?”
메마른 피부에서 ‘찰싹’이라는 비명 소리가 났다. 이미 폭발한 분노는 이성보다는 본능을 보다 중요시하게 만들었고, 본능은 저 더러운 입을 패야 한다는 명령을 충직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이 개 같은 년이……!! 그럼, 나는!? 너희 때문에 내 인생은 좆망해도 돼? 너희만 살 수 있으면 내 인생은 모조리! 송두리째 빼앗겨도 상관없냐고!? 이거 봐! 이거 보라고!”
난 손을 마구 휘저으며 숲을 가리켰다. 붉어진 뺨을 잡은 채 안즈는 주변을 둘러봤다.
“하하, 웃기지? 존나 웃길 거다! 야, 난 주인이야! 여왕인 마리아랑 결혼했고 공주인 아테나랑도 결혼했어! 임금님이자 왕이지! 그뿐인 줄 알아? 프레그넌트부터 시작해 모든 여자들한테 아기 씨앗을 주입시켰어! 생명의 씨앗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는 그녀들을 괴로움에서 해방시켜줬다고! 아, 아니다! 그거 이전에 더 중요한 게 있었지!? 이 마을을 위해 노력했어! 매일 괴물 사냥을 나가 많은 괴물을 죽였다고!”
난 내가 잃어버린 지위와 명예, 권력, 힘, 업적을 모조리 토해내고 있었다. 마치 지금 이 여자한테 말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불타버린 후 남은 재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설령 사라지지 않더라도 말하고 싶었다. 안즈 때문에 잃은 내 모든 것을 그녀는 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럴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그거 알아? 그런 내가 지금 숲에 있어……숲에 있다고! 마을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어! 이게 뭐냐고……? 내가 더 묻고 싶다 개좆같은 시발년아! 이게 대체 뭔데!? 왜 내가 이룩한 평화를 난 못 누리는 건데? 내가 모두를 구했는데! 생명의 씨앗, 괴물투성이였던 숲! 모든 것으로부터 그녀들을 구했는데 왜 내가 이 좆같은 숲에 와서 너랑 같이 벌벌 떨고 있냐고!?”
그렇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내가 모두를 위해 그토록 노력했건만 나를 구하러 오지도 않은 것도 모자라 버리다니!? 그럼 난 대체 뭔데!?
“이 세상에 와서 맨 처음 도착한 곳이 바로 저 마을이었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프레그넌트는 나한테 있어 제2의 고향! 새로운 삶을 시작한 마을이었다고! 저 안에 있는 여자들과 모두 몸을 섞었고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어! 평화를 이룩하고 여자로서의 기쁨을! 어머니로서의 기쁨을 알게 해줬지! 심지어 아무것도 안 했을 때조차 여관에 들어가서 잠을 잤었어! 근데……이게 뭐냐? 이게 뭐냐고!? 어떻게 마을 안에 들어갈 수조차 없냔 말이다……!!?”
난 결국 털썩 주저앉았다. 그 움막 속에서 그토록 많이 울고 소리쳤건만 아직도 이만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니……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노릇이었다.
그치만……그 정도로 내가 아내들과 마을을. 이 ‘하렘 어드벤처’에서 보낸 시간과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기에 어떤 의미로는 기뻤다.
전에 살던 삶에는 전혀 애착이 없었다. 빚 투성이에 멍청한 부모.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모르는 삶. 그저 힘들고 괴로웠기에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 했던 삶이었다. 그런 삶에서 벗어나 여기에 온 후……지금까지 그렇게 많이 노력했건만……!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 이게 사람으로서 할 짓이냐고!? 너희가 어떻게 날 버려 이 시발년들아! 이혜린! 로라! 메이! 아이나! 미카! 안나! 니나! 아이라! 항희진! 박은채! 아스카! 마리아! 아테나! 헬레나! 이 빌어먹을 좆같은 시발년들아! 당장 배때기에 칼을 쑤셔도 시원찮을 개년들아! 어떻게……너희가 어떻게 날 버릴 수 있냔 말이다아아아앗──────!!?”
미친 사람처럼 마구 울어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안즈는 조금씩 떨며 날 보고 있었지만……이제 와서 안즈의 시선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나한테 있어서 소중한 것들은 모조리 사라져버렸는데……당장 내일 아침 프레그넌트에 들어가는 것조차 이토록 무서운데 대체 저년의 시선을 신경 쓸 이유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목 놓아 울음을 터뜨리니 너무나 시원했다. 이제는 죽음의 숲이 되어버린 야만족의 숲에서는 우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날 때리고는 했던 간수를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만……그렇게 죽어버리다니. 밉긴 했지만 차라리 살아있는 게 나았지, 이렇게 죽어버리니 뭐라고 할 수조차 없었다.
안즈는 조용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자지의 맹세’로 그녀의 마음을 읽어 내 말에 반격할 수가 없어서 조용한 것인지……아니면 동료의 죽음 때문에 말문을 잃은 것인지를 파악할 생각이었다만 이내 마법을 쓸 수 없게 된 것을 떠올렸다.
그걸 깨닫자 다시금 상상을 뛰어넘는 공포가 밀려왔다. 어떻게 하지……!? 지금까지 저질러온 대부분의 짓은 마법 덕분에 회피가 가능했다. 아니, 마법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많은 것을 이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괴물을 상대하는 것부터 시작해 무기 사용, 아이템의 보관 등. 마력을 쓰는 것을 포함해 마법은 내 생각 이상으로 생활이나 행동에 깊숙이 침입한 상태였다. 그런 내가 마법을 쓸 수 없게 되다니……!
소총이나 투영마술은 여전히 쓸 수 있지만 줄어버린 마력 수치로 인해 함부로 난사할 수는 없었다. HP가 30% 이하가 되면 발동되는 자동사격 모드는 자동으로 적을 소탕해주지만 마력 빨려나가는 게 장난이 아니었기에 2.5배의 마력 뻥튀기 효과가 있어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부카케에서는 아이라한테 줄 5배 마력 증가 아이템. 마력증폭기 구슬이 있었기에 더욱 더 안심이었지. HP가 30% 이하로 떨어진 나한테 있어서 자동사격모드는 남은 MP를 모두 소진할 때까지 자동으로 적을 죽여주는……아주 든든한 마법이었다.
HP가 30% 이하. 즉, 한 대 맞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태였다만……그런 리스크를 끌어안더라도 충분히 쓸 가치가 있는 ‘자동사격 모드’ 마법. 필살기나 다름없는 마법을 이제는 마력 부족 현상이 뜨지 않을까 걱정하며 써야 한다니. 참으로 가혹한 일이었다.
남은 마력 게이지를 보니 비웃음이 나올 정도로 처참했다. 한때는 400명 이상의 분신을 소환하고도 남을 정도의 마력이 이제는 꼴랑 3,000이라니. 자동사격부터 시작해 투영마술 등 생각보다 많은 마력을 써야 했기에 남은 마력은 거의 100에 가까웠다. 하하……정말 처참하군.
마력도 큰 문제지만 그것보다 훨씬……아니. 이곳에 온 후에야 깨달은 가장 커다란 문제점 중 하나는……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마법. 내가 지금까지 많은 일을 이룩할 수 있도록 도와준 가장 든든한 마법.
……‘자지(좆)의 맹세’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기껏 탈출했지만 남은 건 단 두 명. 그 중 한 명은 자기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린 안즈. 기가 막힌 멤버 편성이네요. 이게 스포츠였다면 당장 감독한테 ‘저 새끼랑 못 해먹겠는데 다른 놈이랑 팀 짜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물을 정도로 개판입니다.
키리의 죽음은 상당한 충격이었겠죠.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아는 사람 대가리가 순식간에 뎅겅 날아감’. 괴물들이 쓰는 ‘마법’이라 불리는 공격은 레이저나 빔 병기에 가까운 공격입니다. 즉, 제대로 맞았다는 가정 하에서 본다면 흔적도 없이 날아간 겁니다. 시체를 찾을 수조차 없게 된 거죠.
서로 살아남은 걸 기뻐하지도 못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두 명은 어떤 운명을 걷게 될까요. 눈치 빠르신 독자분들은 ‘어떤 운명은 어떤 운명이야, 작가 농간에 놀아나겠지’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사실 맞는 말이에요. 이런 개막장 작가가 있는데 두 명이 멋진 운명을 걸을 리는 없잖아요.
회사 생활은 여전히 바쁩니다. 야근시킬 돈이 없어 야근도, 주말 출근도 못 시키는 주제에 허세만큼은 대단한 회사. 얼른 이 회사 나가서 다른 곳 찾아야지 싶습니다. 계약직을 존나 부려먹어 시발…….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박성빈님, 계속 더 굴릴 생각입니다. 100편 넘게 꿀 빨아왔으니 후반부까지는 열심히 굴리고 굴려야 수지가 맞지 않을까 싶네요.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절대 세린이 부러워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믿어주실 거죠?
이상입니다. 코멘트 및 쿠폰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약 빨고 적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