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0 「14-9 : 왜 내 인생은 늘 이러냐……? (15)」 =========================
“그래서……이제 어떻게 할 건데?”
남자와 여자가 이런 대화를 할 때는 주로 알몸이 된 채 서로를 마주보는 상황이다. 그러나 밖에서는 여전히 피와 비명이 진동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딴 분위기를 만들 정도로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퉁명스럽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 울어댔지만 10분 정도 지나니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우리는 눈물을 멈췄다. 좋아서 멈춘 게 아니라 현실을 어떻게 한 후에 울자 싶었겠지. 안 울어도 상관은 없지만 밖에 있는 일은 해결해야만 하는 사항이었으니까.
키리의 목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아마 이럴 때는 침착하게 상황 판단 및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좋을 것이다. 키리는 그런 부류에 들어갔지만 안즈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지략파 캐릭터가 아니었다. 나도 그렇다만…….
“어떻게 할 거냐고. 벙어리냐? 꿀 줘? 아, 미안. 줄 꿀도 없어. 손모가지가 이 따위인데 무슨 꿀을 주겠냐?”
내가 대놓고 비꼬며 수갑을 흔들자 안즈는 고개를 숙인 채 떨고만 있었다. 하아……이젠 비꼬는 것에 분노조차 못 할 정도로 맛이 간 건가. 하긴……자기 때문에 50명이 넘는 동족이 죽었는데 헤벌레 웃으며 장난치면 그게 미친년이지.
어떻게든 그녀의 말문을 열어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럼 질문을 바꿀 수밖에 없군.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대답을 못 하니까 바꿔서 물을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고개를 떨구었던 그녀는 천천히 반응을 보였다. 눈시울은 붉었고 여전히 조금씩 떨리고 있지만 저렇게 반응을 했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지녀야 했다. 이 정도로 사람이 달라지다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원…….
“나갈 때는 개선장군(凱旋將軍)처럼 나가더니……아, 미안. 개선장군은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이나 어떤 일에 성공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거든. 음, 그래. 완전 성공할 것처럼 씩씩하게 나가더니 왜 피칠갑이 되어서 돌아온 건데? 이길 수 있다며?”
살짝 장난삼아 말하긴 했지만 이건 정말 궁금했다. 배가 능력을 쓸 수 있다며? 그 배가 능력을 쓸 수 있는 야만족이 95명이나 있었는데 50명 이상이 죽어버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밖에 생각할 길이 없었다.
“……마법을 썼어.”
“……마법을 썼다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얘 바보 아냐?
“그래, 마법도 썼겠지! 배가 능력 못 쓰면 마법이라도 써서 이겨야지. 마법내성 있다고 해서 마법이 아예 안 통하는 건 아니잖아?”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왜 저러냐?
“……괴물들이 마법을 썼다고.”
……
…………
………………방금 이 미친년이 뭐라고 지껄인 거지?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괴물이 마법을 썼다는 헛소리를 지껄인 거 같은데.
“……야.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괴물이 마법을 썼다고 들은 거 같은데.”
“……잘못 들은 거 아냐. 맞아.”
“……푸, 푸하하! 아하하하핫!”
웃었다. 그야말로 폭소대잔치였다. 배를 제대로 잡지도 못한 채……밖에서는 피와 슬픔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데 나는 혼자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말이 될 법한 소리인가? 괴물이 마법을 쓰다니!? 서큐버스인 레이 시리즈도 ‘매혹’마법을 쓰긴 했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저 말은 마치……그 촉수 괴물이 살상용 마법이라도 썼다는 소리 같지 않은가!?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웃던 나는 간신히 웃음을 멈춘 후 그녀를 본다. 내가 웃었음에도 불구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날 보는 그녀의 표정은 조금 전과 변함이 없었다. 설마…….
“그러니까 니 말은……그 괴물이 살상용 마법을 썼다 이거지?”
고개를 끄덕인다. 긍정.
“원래부터 쓸 수 있던 걸 까먹은 건 아니고?”
혹시나 ‘아차! 미안해! 원래 그 괴물들이 마법도 쓸 수 있었는데 깜빡하고 있었어!’라고 말하면……차라리 그게 낫겠지.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게 정상이겠지. 지금까지 부모, 친구를 죽인 괴물의 특성을 까먹는다고? 그럼 내가 목을 벴을 거다. 너 같은 년이 무슨 지도자냐면서.
“즉, 니 말은 이거네……? 동료들 데리고 갔더니 괴물놈이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마법을 써서 큰 피해를 입었다. 맞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한숨과 웃음이 동시에 나왔다.
“어. 잠깐만. 진짜 잠깐만.”
고함 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천장을 봤다.
그래. 음. 잘 참았어. 왜 참았냐고?
지금부터 소리칠 거니까.
“시발, 말이 되냐!? 이 미친년아! 말이 돼? 지금까지 마법 쓰는 괴물은 서큐버스 정도밖에 못 봤는데 뭐? 촉수 괴물이 마법을 써? 아하하! 이게 말이 될 법한 소리냐고!? 그럼 뭐야? 지금까지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괴물이 마법을 써서 50명이나 되는 야만족이 죽었고, 이제 우리도 얼마 안 지나서 뒈질 거다 이 말이네? 응? 응!?”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난 무언가 나한테서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정신줄? 영혼? 방금 나한테서 빠져나간 게 뭔가 싶었더니……아아. 그렇구나. 희망이 나한테서 빠져나갔다.
괴물이랑 얘들. 어느 쪽이 더 위험하냐고 묻는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괴물이었다. 초록색 촉수 괴물과 파란색 촉수 괴물의 장점만을 모아 만든 것도 모자라 마법내성이라는 특성까지 갖추다니. 무슨 생각인가요? 밸런스 붕괴 같은 걸 끼얹었나요?
야만족이 괴물을 모두 물리치거나 하면 어느 정도 기분도 좋아질 테고, 그들의 생존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면 수갑을 풀어달라고 할 생각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근데 그 계획이 단숨에 박살이 나버렸다. 하하…….
그것뿐이랴? 그 강하기 그지없는 괴물이 마법까지 쓴다니!? 지금까지 촉수괴물과 싸우며 M16A1이나 K2 소총. 혹은 마법을 쓰며 편하게 토벌을 해왔는데 놈들이 마법을 쓴다니!? 만약 놈들이 마법을 썼더라면 나라고 해도 결코 무사할 수는 없었다! 먼 거리에 적을 학살하는 게 그나마 내가 가진 이점이었는데 그게 봉쇄된다는 거니까!
아무리 봐도 괴물은 마법을 쓸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마법내성도 웃기지만 놈들이 마법을 쓴다면 토벌 따위는 불가능했을 테니까. 맨 처음 만났을 때는 공포 그 자체였지만 지금은 그냥 쪼렙 사냥감인 초록색 촉수 괴물. 그 약한 초록색 촉수괴물이 만약 마법을 쓸 수 있었더라면……?
세상에!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어……! 끔찍했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할 수 있는 건지 내가 더 궁금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안즈를 보니 초췌한 얼굴과 비참한 표정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아마 지금 내 표정이 저거랑 닮았겠지. 생각만 해도 이 정도인데 실제로 겪은 그녀에 비할 바가 못 될 것이다.
“무슨 마법을 썼냐?”
이렇게 되니 더 궁금했다. 무슨 파이어 볼 같은 마법이라도 썼나? 마법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 ‘어떤 마법을 어떻게 썼냐’라는 것도 중요했다. 어떤 마법을 쓰는지 알면 대처가 가능하니까.
야만족이 당한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그 마법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마법을 쓰지 않던 놈들─사실 못 쓴다고 해야 옳다. 괴물이라도 자기 목숨 아까운 줄 아는데 쓸 줄 아는 마법을 안 쓸까? 못 쓰는 거지─이 마법을 쓰니 갑작스런 상황에 대처할 줄 몰라 당한 거겠지.
화염 계열 마법이면 강력한 바람이나 얼음(물) 계열 마법을 쓰면 될 일이고, 놈들이 혹시나 물(얼음)의 속성을 지녔다면 번개 계열 마법을 쓰면 될 일이다. 속성과 상성에 맞게 카운터 마법을 쓴다면 그녀들한테도 승산이 있겠지. 자, 어떤 마법을 쓴 건지 들어나보자.
“……그건, 처음 보는 마법이었어.”
시발, 시작부터 불안하다. 어떻게 제대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첫 문장부터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만드냐? 꼭 한밤중에 귀신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왜 있잖아. 다 큰 어른이 됐는데도 뭔가 무서운 방송이나 이야기가 TV에서 시작되면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되는 현상. 지금이 바로 딱 그때였다.
“우리는 언제든지 배가 능력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고……그 괴물들은 정면과 측면, 후방에서 우리를 감쌌어. 95명이나 있으니 우리한테는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지. 이긴다 쳐도 놈들이 도망가기 어려운 포진(布陣)이었으니까.”
오오. 이렇게 들으니 마치 실제로 전쟁사(戰爭史)를 듣는 느낌이 드네. 희생된 사람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이런 정보를 들어야만 내 궁금증도, 그녀의 응어리도 풀릴 거 같았다. 도망가기 어려운 포진이라……하긴. 둘러싸고 있는데 도망가면 그게 더 웃기겠지. 둘러싼다는 것 자체가 병력이 훨씬 더 많다는 뜻이니까.
“배가 능력을 발휘해 달려 나간 순간……무언가 빛이 났어. 난 그걸 간신히 피했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능력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놈들의 입에서 나온 빛이 닿자……도, 동료의 팔과 다리가……자, 자, 잘려……나갔……으윽……!! 흑, 흐윽……!! 아, 안 돼……!!”
지독히도 무서운 광경을 떠올리는 소녀의 모습이 겹쳐졌다. 자신만만하게 날 패고 매도하던 그녀가 이렇게까지 타락해버리다니. 그 모습에 욕정을 느끼는 나도 참 병신이었다만 그녀가 말한 것도 병신 같았다. 난 그녀가 본 게 뭔지 금방 알 수 있었다만……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빛이……닿자마자 팔이나 손이 잘려나간 거야?”
“흐윽……그래! 그런 건 처음이었어……!! 갑자기 팔이나 다리가 잘려나간 동료들은 도와달라고 소리쳤어! 난 구하려 했어! 하지만……그 빛이 머리나 상반신에 닿자마자 모조리 사라졌어! 마치 화염 마법으로 재가 된 것 같이! 그렇게 강하고 발동이 빠른 마법은 난생 처음이었다고! 어, 어떻게……어떻게 그런 마법을 놈들이 쓸 수 있었던 건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어!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고!”
지금까지 난 안즈를 일종의 리더, 지도자, 지휘관으로 보고 있었지만……이렇게까지 슬퍼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그녀를 보니 내가 너무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동료의 죽음에 이렇게까지 슬퍼하는 여자한테 지휘관 같은 엄중한 직책을 겹치게 하다니. 좋아서 이런 상황에 처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메이나 니나는 내 딸이지만 다른 어머니나 여성들에 비해 약간 어려보일 뿐. 실제로는 20살을 넘은 아이들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2개월 정도로 20세에 준하는 체격과 정신을 가지게 된다고 했었지. 그 나이에 행동거지가 약간 어린애 같은 건 ‘생명의 씨앗’으로 낳은 효과 때문인가 하는 생각도 들긴 든다.
그런 그녀들도 전투를 할 때는 정말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괴물이 상대면 단 한 번의 자비도 없이 강력한 마법이나 마력을 담은 근접 공격을 마구 먹여줬다. 그걸 보며 난 상대가 안 되겠구나 하고 느꼈었지.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의 정신(멘탈)이 강철급인 것도 아니었다. 혹시나 내가 다쳤을까봐 늘 내 안부를 묻는 아이들의 모습은 천진난만한 딸의 모습이었으며, 그럴 때마다 괜찮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했었다. 젠장……걔들 보고 싶어지잖아.
내가 안즈한테 욕하고 지랄 발광을 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마땅하고, 욕먹어도 싸니까. 범죄를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하지만 이곳에서는 벌을 내릴 사람도. 나를 납치한 것을 ‘범죄’라고 규정지을 사람조차 없었다.
법 없이 살 사람 따위는 이 세상에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왜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되냐고? 법이 없으니 뭐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 자체를 못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바로 안즈처럼.
나를 잡아온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 것도 있긴 있었다. 근데 그럼 뭐하냐? 날 납치해 오늘날 여기까지 온 건 모두 그녀의 선택과 판단이다. 다른 사람한테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야?’라고 물어도 ‘너님이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음’이라는 대답밖에 못 들을 것이다. 세상일이란 다 그런 것이니까.
딸부터 시작해 아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다시금 물씬 피어오르지만……지금은 아니다. 과거를 떠올리며 행복해하는 건 언제든지 가능하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그 괴물들이 썼던 게 마법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떠오른 것은 있었다.
“닿자마자 팔이나 발이 날아가 버렸으면……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무사하게 돌아온 거야?”
끅끅거리던 안즈는 눈물을 닦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데 이런 걸 묻는 내가 너무 잔혹하다고? 나보다는 그 괴물들이 더 잔혹하다고 생각하는데. 난 묻는 것뿐이지만 걔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일 테니까.
“그게……놈들의 입이 빛날 때 그 이상한 빛이 나타났었어. 간신히 그걸 깨달은 나나 동료들은 그걸 최대한 큰소리로 전파(傳播)하며 나무 위나 뒤로 몸을 숨기며 동료들을 구했어. 그 빛은 나무도 단숨에 없애버릴 정도로 강했는데……닿은 후에 슬쩍 보니까 나무가 타고 있었어. 마치 화염 마법을 쓴 것처럼……하, 하지만 이상해!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어! 그런 강력한 화염 마법은 본 적도 없거니와, 괴물이 쓸 마법이 아니었단 말이야! 애, 애당초……어떻게 괴물이 그런 마법을 쓸 수 있었는지 영문을 모르겠어! 나는……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잡은 채 바들바들 떠는 안즈를 보니 더 이상의 질문은 무리였다. 그녀의 정신 상태를 위험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마구 보챌 수는 없으니까. 츤데레냐고? 마음대로 판단해라. 나도 불쌍하지만 얘도 불쌍할 뿐이다. 날 납치한 것만 뺀다면 더 불쌍하게 여길 수 있었을 텐데. 어휴……!!
날 납치한 원인 중 하나가 괴물이었기에 그 새끼들 또한 용서할 수가 없었다. 니들은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6개월 쯤 지나서 이 지랄이니? 이것도 다 그 머리 하얀 미친년이 시킨 거지? 응? 역시……죽여야 할 연놈들 리스트에서 0순위로 빛나고 있는 건 그년이다.
아아, 다시금 살의가 끓어오른다. 안즈도, 괴물도. 모두 다 그 시발 미친년 때문에 만들어진 거라면 대체 왜? 대체 왜 이제 와서 이 지랄을 했냔 말이다…….
6개월 동안 뼈 빠지게 고생했더니 혹시나 고생할 게 부족할까봐 확장팩을 출시한 건가? 만약 그 확장팩으로 날 엿먹일 생각이었다면……축하한다. 확실하게. 아주 확실하게 성공했다. 울고 있는 안즈한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울어야 하거든? 난 너부터 시작해 괴물이나 그 미친년 때문에 다 잃었거든? 소중한 아내도, 딸도, 미래도, 평화도! 다 잃었단 말이다!’
목구멍까지 기어 나온 그 한 마디를 참는 건 예상 외로 쉬웠다. 이거보다 힘든 상황도 겪어봤는데 이걸 못 견디면 어떻게 사냐. 그렇다고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뜻은 아니었지만……하아. 한숨을 쉬고는 안즈한테 다가갔다. 원래라면 머리라도 쓰다듬어 줘야겠지만 팔이 묶였으니 뭘 할 수도 없었다.
“그래, 실컷 울어라. 그렇게 해서라도 슬픔이 풀리면 울어야지.”
안즈는 크흥거리며 콧물 막힌 소리를 내며 날 본다.
“왜 날 보냐? 너 비난하는 거 아냐. 사람은 슬플 때는 울고 소리치며 감정을 발산해야 하거든. 그냥 목석(木石)처럼 가만히 있을 거 같으면 사람으로 태어날 이유가 없잖아. 나는 야만족은 아니지만 저렇게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은 걸 보니 슬프긴 슬펐어. 너는 오죽하겠냐.”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는 말이 절대 아니었다. 혹시나 내가 실패해라, 죽어라 하고 생각한 것 때문에 저렇게 된 게 아닐까 하며 죄책감을 받았던 나다. 비위를 맞추려고 누군가의 죽음을 이용할 정도로 썩어문드러진 놈은 아니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해졌으니 더 이상 그녀들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어떻게 하기는……. 다른 누군가가 힘을 빌려줘야만 했다.
“야,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할 테니까 울지 마. 눈물 뚝! 자, 눈물을 그치고 코도 풀고……야, 시발! 때리려 하지 마! 니가 아이나냐? 왜 날 패려 해? 니 그 육중한 펀치에 맞으면 내가 뒤지거든요 씨발년아!?”
나름 괜찮은 분위기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나처럼 날 패려는 안즈를 보니 식겁했다. 아이나야 귀엽지만 안즈는 내장형 근육이라도 장착한 건지 엄청 강하게 날 팼지. 쟤한테 맞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만……그렇다고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이제 울만큼 울었으니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모르겠어.”
아니, 모르면 안 되지! 여기 총사령관은 너나 다름 없잖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 되겠군. 내가 그녀를 이끌지 않으면 이 멍청한 지휘관 때문에 밑의 아이들이 다 죽게 생겼다. 그녀의 약해진 마음을 이용하는 느낌이 들어서 좀 그렇다만, 사람 생명이 걸렸는데 느낌이고 지랄이고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잘 들어. 너한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어. 내가 그 선택지를 말해줄 테니 잘 생각해봐.”
원래라면 계획에 성공해 개선장군처럼 돌아왔어야 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50명 이상의 동료가 죽은 현 상황에서 개선장군 따위는 환상이나 다름없었다. 나나 그녀. 그리고 남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환상이 아니라 안전한 곳이었다.
“첫 번째. 싸운다. 말 그대로 싸우는 거지. 겨우 40명도 채 안 되는 이 인원으로 싸우다 뒈질 건지, 아니면 안 싸울 것인지는 너한테 달려 있어. 키리한테도 그런 권한이 있겠지만 일단 여기 있는 건 너니까 너한테 먼저 말해두는 거지.”
그녀는 그 말을 듣고는 계속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건 안 되겠군…….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여자가 이렇게까지 자신감을 잃은 걸 보니 그 마법이 어지간히도 강력했던 모양이다. 그 마법은 아마 ‘마법’이 아니라 ‘현상(現象)’이라고 생각한다만……직접 본 게 아니었기에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수비 태세에 들어간다. 남은 인원을 최대한 수비 태세에 돌려 살아남는 거지. 미리 말해두지만……첫 번째도 가망 없지만 이건 더 가망 없을 거야. 말하고 있는 나도 어디까지나 ‘선택지’로 생각한 걸 말하는 거지. 가능성을 보장하고 말하는 건 아니라는 거 알아둬.”
싸우는 것도 웃긴 일이었지만 수비 태세라니. 내가 말하고도 미친 거 아닌가 싶었다. 수비? 방어해서 뭐 할 건데? 걔들이 ‘음, 강력한 방어 태세로군……. 물러간다! 퇴각!’이라고 말할 거 같냐?
부카케에서도 사람을 던져 기둥을 파괴했던 괴물이다. 파란색 촉수괴물이 그 정도의 힘과 지능을 지녔는데 이제 마법까지 쓰는 저놈들은 그 새끼들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 낭비군.
남은 세 번째는 들으면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한 것이었다. 아마 화내지 않을까 싶었다만……사람 생명이 걸린 중요한 시기에 더 이상 체면을 차릴 필요는 없었다.
“세 번째 선택지는……이 숲을 버린다. 다른 숲으로 가는 거야.”
“웃기지 마! 그딴 선택지를 고를 바에 차라리 죽겠어!”
어우, 야! 깜짝이야!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그녀가 큰 소리를 치자 나도 모르게 뒤로 넘어갈 뻔했다.
“이 씨발년아!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잖아!”
“넘어져서 죽으라지! 이 망할 자식! 뭐? 숲을 버리라고? 이런 개 같은 자식! 어떻게 나한테 감히 그딴 말을 지껄여!? 우리 야만족의 조상, 긍지, 역사가 깃든 이 땅을 버리라니! 지금 널 안 죽이는 걸 고맙게 여겨!”
아아, 대체 왜 이럴까. 그녀가 이런 모습으로 돌아오자 내 속은 ‘후후, 그래야 따먹는 보람이 있지!’ 같은 말이나 지껄여대고 있었다. 어, 따먹는 보람 이전에 그녀와 내가 다시 잠자리를 가질 수 있는지 없는지도 의문이다만…….
“그럼 어떻게 하려고? 싸우려고? 야. 밖을 보고 이야기를 해. 아까 돌아온 사람들 중 팔이나 다리가 잘린 사람한테 그렇게 말할 거야? 목숨 걸고 싸우라고? 그 아까운 목숨 꼴아박아서 고기방패가 돼라고?”
“아냐! 누가 그딴 짓을……!!”
“니가 시켰잖아 병신년아! 잘 들어! 아니, 잘 봐! 니가 정말 다시 싸우라고 명령할 마음! 그 명령 때문에 죽을 동족을 마주 바라볼 자신이 있으면 밖에 나가서 한 번 둘러보고 와! 모두한테 다시 싸우자고 웃으면서 말해보라고!”
내 반격에 그녀는 말조차 꺼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꿈이랑 이상은 존나 높은데 현실은 더럽게 시궁창이거든? 그것도 몰랐냐? 야, 잘 봐. 이 움막의 문을 살짝만 열어도 무슨 냄새가 나는지 알아? 피 냄새야! 안 열어도 여기까지 풍기는 피 냄새가 더 짙어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지? 다 죽을 거야! 그런데 너는 다시 싸우자고 할 거야? 니 소중한 동족들의 목숨이 무슨 과자 쪼가리로 보여? 응?”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젓는 걸 보니 더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했다. 결정났네. 3번으로.
“난 말이지……. 너한테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희가 죽는 걸 기뻐하며 볼 생각도 없어. 무엇보다……그 괴물들이 이 주변에 있다는 건 너와 나를 포함한 모두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뜻이야. 이 숲이 너희한테 얼마나 소중한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그치만……이 숲이 그렇게 소중하냐? 저 밖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친구들, 동족들을 버리고 지켜야 할 정도로 소중하냐고?”
눈물샘이 망가진 것인지 안즈는 그렇지 않다며 눈물을 또 흘려댔다. 이런. 이래서야 완전히 감정 조절 못 하는 어린애잖아. 얘가 이런 타입이었던가……. 지금까지 보여주던 모습과 현재의 모습. 둘 중 어느 쪽이 진짜 안즈인지 감이 안 잡힌다.
“긍지도 좋고 역사도 좋지만……우선 살고 봐야 하잖아. 죽은 니 동료들의 시체 속에서 긍지와 역사, 숲을 지켰다고 외치고 싶어?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자랑스럽다고는 생각 안 해. 아니, 못 해. 사람의 목숨만큼 소중한 건 없는 거야. 이해가 가?”
훌쩍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어떻게든 이해는 한 것 같다. 숲을 버리기로 한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언제 그 괴물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늑장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너희 동료 중에 텔레포트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있어?”
“……없어. 우리 중에 그런 고위급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능력으로 괴물을 없앴을 테니까.”
하아……맞긴 맞는 말이다. 물어본 나도 바보다만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친 것도 웃겼다. 하긴……얘들은 아무리 봐도 공격용 스킬에 스킬 포인트 몰빵 찍고 가는 애들이다. 범용성보다는 공격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무투가 타입. 얘들한테 텔레포트 같은 걸 바란 내가 멍청이지.
“그래? 그럼……내 수갑을 풀어줘.”
“……뭐, 뭐?”
지금까지 멍청하게 듣다가 겨우 대답하던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얘 왜 이럼?
“왜, 왜 니 수갑을 풀어야 하는데!?”
“내가 텔레포트를 쓸 수 있으니까!!”
안즈의 반응은 기가 막혔다. 그녀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양 내 얼굴을 빤히 봤다. 내 발부터 머리끝까지 천천히 올려다 본 그녀는 단 한 마디만을 물었다.
“……니가?”
“……그래.”
아, 사람 열 받게 하네. 어지간히 안 믿기는지 또 물었다.
“……텔레포트 같은 고위급 마법을 쓴다고?”
“……한 번만 더 이딴 말장난 하면 정말 안 도와준다?”
내 말에 그녀는 주춤했다. 얘 도대체 왜 이러냐?
“미, 믿을 수 없어……! 설령 니가 텔레포트를 쓸 수 있다 치더라도 너 혼자 도망갈 수 있다고! 난 너를……!!”
“믿을 수 없다고? 그럼 다 같이 죽자 이거네? 아, 그래 좋아! 아주 좋아! 내가 그럼 지금 당장 저 밖에 나가서 노래 부를까? 모두의 목숨을 살릴 방법이 있는데 지휘관이란 년이 무능하게 동족 50명을 죽인 것도 모자라 최후의 전투에 가족 목숨을 꼬라박았다고 병나발 불어줘? 엉!? 잘 들어, 이 답답한 계집애야! 내가 나 혼자 살 거였으면 말도 안 꺼냈어! 난 너를 믿고 선택지까지 말했는데 뭐? 이 씨발년이 뒤질라고! 그래, 죽어! 니 소중하디 소중한 가족들이랑 같이 괴물들한테 윤간 당하다 죽어라, 이 더러운 년아! 퉷!”
철퍽!
그녀가 지금까지 나한테 했던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침을 얼굴에 뱉었다는 모욕적인 행동에 화를 내야 마땅했지만, 그녀는 내 속사포 같은 말을 듣고는 주저앉았다. 몸을 부들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단 한 마디의 말을 간신히 짜냈다.
“……믿을게……믿을 테니까……!! 제발 우리를 도와줘……!!”
더 이상 욕을 할 시간도 없었기에 난 단 한 마디만을 던졌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며, 여기 왔을 때부터 되찾아야 했던 자유를 위한 한 마디를.
“도와줄 테니까 이 좆같은 수갑 당장 풀어.”
안즈는 아무런 대꾸조차 없이 허겁지겁 내 수갑에 손을 댔다. 오랜만에 자유를 되찾은 손은 당장이라도 성욕을 해결하고 싶다며 아우성이었지만……지금은 그딴 짓을 할 때가 아니다. 얼른 쓸 수 있는 마법과 마력의 가용량(可容量)을 확인해서 빨리 이곳에서 나가야 하는데…….
“……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을 몇 번이고 경험했다만 이 정도로 쇼크를 받은 적은 없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몸을 떨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홀로그램 윈도우를 몇 번이고 조작하고 다시 봤지만 믿을 수 없는 사실은 이게 현실이라며 잔혹한 결과만을 내밀었다.
……마력의 용량은 3,000. HP와 같은 수치.
……쓸 수 있는 마법은 0개.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손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고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희망이 빠져나간 이유를…….
============================ 작품 후기 ============================
개인 사정으로 인해 늦게 업로드하게 됐습니다. 초반에 업로드할 때랑 비슷한 시간대에 업로드를 하게 되니 옛날 생각 나네요. 하렘 어드벤처를 처음 업로드할 때는 '과연 잘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많은 분들이 즐겁게 봐주셔서 '연재하기를 잘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