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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141화 (141/235)

00139 「14-8 : 왜 내 인생은 늘 이러냐……? (14)」 =========================

전쟁에서 승리와 패배는 일상적인 일이라 한다. 이를 들어 승패병가지상사(勝敗兵家之常事)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패배에 너무 낙심하지 말고 앞으로 보다 신중을 기해 작전을 짜야 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패배조차 배워야 하는 발판으로 삼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일반적으로 패배를 싫어한다. 그야 그렇겠지. 졌는데 ‘아앗, 내가 졌어! 졌다는 쾌감과 패배감에 몸이 흥분하고 있어! 아앗~♡’이라고 지껄이는 놈이 어디 있겠냐?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사람일 테고, 내 주위에 그런 놈은 없었다. 그딴 놈은 필요 없다고!

말이 나와서 말하는 건데, 내 주위에는 흔히 말하는 ‘대단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친척이나 지인(知人) 중에 의사, 변호사, 검사, 판사 등 뒤에 사(士)자 들어가는 사람 따윈 한 명도 없었다. 있어도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지. 그런 잘난 사람은 내 주위에도, 부모님 주위에도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두 알 것이다. 흔히 있잖아. 친구 중에 의사나 변호사, 판사 같은 사람을 부모님으로 둔 자식. 그런 자식과 친해져서 우정을 쌓는다거나, 곤란할 때 도움을 받는다거나 하는……그런 일이 왜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몇 번이고 해봤다. 속물(俗物)같다고? 나도 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나를 비난 혹은 비판만 하는 것은 삼가줬으면 한다. 나를 비판 혹은 비난하는 사람들한테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나는 내 자신을 속물 같다고 생각했다. 친구를 사귀어도 부모가 의사나 변호사, 판사. 흔히 말하는 ‘잘 나가는 사람’ 혹은 ‘잘 사는 계층’의 친구를 사귀려는 속물적인 생각에 나 자신 또한 역겨움을 느꼈지. 하지만……하지만 말이다.

그러한 생각을 해야 할 정도로 시궁창에 살고 있는데 그럼 어쩌란 말이냐? 그럼, 죽어야 하냐? 속물적인 생각 따윈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며 그냥 입 닥치고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평생 그렇게 빈곤하게 살다가 죽어야 하는 건가? 희망도, 미래도 없이?

대체 어느 개새끼가 ‘그래, 그렇게 죽어야 한다! 너 같은 놈이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꿈을 꾸냐? 가난한 새끼는 영원히 가난한 채 죽어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새끼는 구족(九族)을 멸망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친구를 이용하려 드는 나도 참 개새끼였지만 믿을 만한 친구가 주변에 없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잘 사는 집안 아들이나 딸’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면 내가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겠지.

대한민국의 또 다른 이름은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 아니었다. 헬조선이었다. 청년실업이 심해진 것도 모자라 취업의 난이도는 상승했고, 사람들이 요구하는 ‘스펙’은 점점 높게 치솟았다.

설령 스스로가 높은 스펙을 쌓는다 치더라도 완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취업을 하는 것은 어려웠다. 흔히 말하는 누군가의 입김. 혈연, 지연, 학연. 그 3연 덕분에 취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수성가(自手成家)에 필적할 능력과 스펙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잘 사는 집안 아들이나 딸’과 사귀어 조금이나마 유복한 미래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그렇게 비난받고 비판받아 마땅한 일일까. 이게 나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역겨운 변명이자 핑계라는 걸 알면서도 내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 누군가를 이용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그럼 아예 잘 사는 집안이나 그런 조건을 배제(排除)시키자. ‘좋은 친구’라도 사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멋진 일이 아니겠는가? 친구는 둘도 없이 소중한 보물이자 존재니까. 그럼 친구를 사귀는 건 쉬울……거라 생각했냐?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통칭 미연시에서는 그런 친구들이 많이 나온다. 잘 생긴데다 능력까지 있는 친구는 주인공의 연애를 늘 응원하며, 연애가 제대로 풀리지 않거나 힘들 때 아낌없이 주인공을 응원 및 서포트해준다. 이런 친구가 있다면 내가 사귀고 싶다 시발.

미연시에서는 이런 친구가 수도 없이 튀어나온다. 자신의 연애나 미래, 고민보다는 오직 주인공이 가진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배려해주는 친구. 이딴 캐릭터가 현실에 있을 턱도 없지만 설령 있다 치더라도 나 같은 놈 주변에는 없다. 능력 있는 주인공 주변에 있겠지.

현실의 친구란 만만하다 싶은 놈들을 괴롭히거나 놀리면서 자기보다 강한 상대한테는 꼬랑지를 마는 병신들을 뜻하는 거다. 물론 이런 놈들을 ‘친구’라고 부르진 않는다. 친구란 서로를 배려하고 위하는 벗을 뜻하는 거지, 저런 병신들을 친구라고 부르진 않잖아?

주위에 있는 게 술주정꾼, 아들한테 빚을 떠넘기는 부모, 무책임한 사람들, 친구라고도 부를 수 없는 병신들이라니. 이렇게 보니 내 인생도 참으로 막장이었다. 어떻게 현실 세상에서 용케 살아남았을까? 궁금하지만 그걸 확인하러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다. 돌아갈 능력도 없다만…….

그런 대단한 사람 없이 살아온 나지만 별로 대단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내가 말했지? 승리와 패배는 병가지상사. 싸우는 사람한테 늘 있는 거라고.

나한테 있는 건 대부분 패배였다. 아니, 나한테는 승리라고 해야 하나? 적어도 ‘살아남은 패배’였으니까. 승리가 대금(大金)을 의미하는 거라면 패배는 현상 유지라고 봐야 했다.

설령 지더라도 목숨을 위협받거나 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대한민국은 누가 뭐라 해도 치안이 꽤 괜찮은 곳이었으니까. 밤중에 서슴없이 나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였기에 목숨을 주고받는 미친 일 따위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군대에서도 피를 보거나 하는 일을 겪지는 않았기에 전쟁물을 볼 때마다 ‘ㅋㅋㅋ 설마 나중에 우리가 저 꼴 나는 거 아니겠지?’라며 웃기도 했었지. 까놓고 말해서……요즘 누가 백병전을 벌여? 미사일 한 방이면 모조리 날아갈 텐데.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유혈사태 같은 건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사고 현장 같은 곳에 있지 않은 이상 그런 일을 접할 일도 없을 테니까. 즐겁지는 않지만 목숨을 위협받는 위험천만한 사태와 조우할 일은 거의 0(제로)에 가까웠다.

……이 ‘하렘 어드벤처’에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정신 차려! 이봐, 누가 치료 마법 좀 써봐!”

“그것보다 여기! 팔이 완전히 날아갔어! 누가 지혈(止血) 좀 해! 이러다가……아, 아악! 피가 더 많이 나와! 제발! 안 돼에에엣!”

“마력 좀 남은 사람 없어!? 잘린 다리 부분이 점점 썩어 들어간단 말이야! 누가 좀 어떻게 해봐!”

난장판. 그게 지금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대한 감상이었다. 위풍당당하게 출진했던 아침 때와 달리 점심이 조금 지나 돌아온 야만족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비규환(阿鼻叫喚). 헬게이트가 열린 듯했다.

팔이나 다리가 잘려 돌아온 건 그나마 나을 정도였다. 그래, 말이 안 되지. 팔이나 다리가 잘렸다면 한평생 생활에 지장이 있을 텐데 이게 낫다니. 그치만 사실이었다. 아예 목이 없는 시체나 죽은 동료를 데리고 온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난 그녀들이 실패해서 죽기를 바랐지만……이런 피해를 입고 막상 돌아오니 또 그 생각이 들더라.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내가 실패해라, 죽어라 같은 불길한 생각을 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겠지? 그래, 아닐 거야. 당연히 아니지! 그저 바라는 것만으로 모든 걸 이룰 수만 있다면 여기에서 진작 빠져 나갔을 테니까……!!’

내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난 그녀들한테 아기 씨앗을 제공해 배가 능력의 발동 조건을 충족 시켜줬을 뿐이다. 오히려 여기까지 납치당해 노예, 도구 취급을 받았는데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안 한 채 허리만 즐겁게 흔들어대는 놈이 있다면 그게 미친놈이지. 난 정상이라고……!

그런 생각을 했지만 막상 피투성이의 야만족들을 보니 후회가 막심했다. 누군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니가 불길한 생각을 해서 그런 거야! 우리의 실패를 바라서 이 꼴이 난 거라고!’라고 소리치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였다.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을 리도 없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도 참 새가슴이군. 누군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그 전에 날 죽이거나 구타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마법을 쓸 수 있다면 회복 마법이라도 썼겠지만 마력봉인수갑을 찬 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사태가 된 야만족들은 나 따위는 신경도 안 쓴 채 마구 울부짖었다. 마력이 있다면 회복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괴물과의 전투에서 대부분의 마력을 다 쓴 거 같았다.

안즈와 키리를 봤지만 ‘무슨 일이 있었냐’라는 말은 도저히 물을 수가 없었다. 늘 자신 있고 능글맞았던 안즈는 안색이 새파래져 있었고 키리는 파르르 떨고 있었다. 질내사정을 당할 때 부르르 떨던 것과는 다른 부류의 것이었기에 척 봐도 그녀들의 사태를 알 수 있었다.

실패했구나……!! 그걸 깨닫자 왠지 모를 불안함과 슬픔, 안타까움. 그리고 즐거움이 내면을 마구 돌아다닌다. 사람이 죽었는데 즐겁다니, 미쳤냐고? 그래,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 내가 처한 사태를 이렇게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난 사실상 아내들한테 버림받았다. 버림받은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저 두 년들이다. 특히 안즈의 책임이 더 크지. 저년이 나를 납치만 안 했더라도 난 지금쯤 밥을 먹고 검술 훈련을 준비하고 있었을 테니까.

나를 데려와 괴물과 싸우기 위한 정액뽑기 기계로 삼은 것부터 시작해 나를 아내들한테 버림받게 만든 원인이자 원흉. 지금까지 나를 모욕하고 업신여겼던 것이 이런 형태로 나타나니 기쁘지 않을 리가 없지. 기쁘냐고 묻는다면……기쁘긴 기뻤다.

하지만 기쁜 것과 슬픈 것은 별개다. 많은 동족들을 잃어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무리 나랑 관계없고 짜증나는 사람들이었다지만 이렇게 괴물들한테 죽은 걸 보니 슬프긴 했다. 마력이 없어 뭘 해주고 싶어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동료가 죽어가는 걸 봐야만 한다니. 끔찍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그럼 당장 안즈한테 가서 수갑을 풀어달라고 하세요! 회복 마법을 쓸 수 있을 테니 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도 살려야 할 거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근데……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회복 마법을 복사한 건 사실이다. 이런 때를 위해서 말이지.

근데 치료하다 죽으면? 내 치료 마법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을 내가 어떻게 치료해? 마력이 많아서 치료 마법을 쓰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치료 마법은 뭐든지 다 고칠 수 있는 만능 마법이 아니다. 끽해야 다치거나 피나는 거 정도지. 날아간 팔이나 다리를 재생시킬 수는 없단 말이다.

그래, 팔이나 다리는 못 고쳐도 피 나는 거나 다친 거 정도야 고칠 수 있다 치자. 하지만 다친 곳은 팔이나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심장이나 배, 장기 등을 다친 곳 또한 치료 마법으로 고칠 수 없는 예외 중 하나였다.

지금은 내 아내가 되어 별 신경을 쓰지 않지만 미카의 왼쪽 눈은 괴물 때문에 잃게 됐다. 당시에도 고위급 마법사가 없어 재생 마법 등을 쓸 수 없었는데 하물며 이런 숲. 소유 마력도 적어 회복 마법조차 쓰기 어려워진 그녀들이 그런 고위급 마법을 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팔이나 다리, 내장 등. 고치자니 어려운데다 그럴 능력도 없고, 이미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은 상태라 그저 죽어가는 동족들한테 ‘괜찮을 거야’ 같은 말만을 되풀이하는 그들을 보니 절로 고개가 돌려진다. 이런 곳에서 사람의 죽음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대체 얼마나 다친 건지도 궁금했다만 더욱 더 내 뇌를 활발하게 하는 것은 ‘생존가능성’이었다. 아주 잔인한 짓이지만……난 죽은 사람보다 살아있는 사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시금 전투가 가능한 사람’을 세기 시작했다.

작업은 간단했다. 신체 일부가 날아간 사람, 죽은 사람, 피를 많이 흘리는 사람을 제외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죽은 동족들을 다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만 모든 사람들을 세어 보니 기가 막혔다. 모두 합쳐도 70명이 채 안 됐고 그나마 다시금 싸울 수 있는 사람은 30명을 조금 넘은 숫자였다. 반은 시체, 반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잔인한 평가지만 이것조차 후하게 쳐준 거였다. 95명쯤이 나갔는데 시체까지 합쳐 70명도 채 안 되는 동족이 이 땅에 돌아왔다는 소리는……25명 이상의 동족이 괴물들한테 찢어발겨졌다는 소리니까.

알아듣기 쉽게 말하라고?

다 뒈졌다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안즈를 보니 기가 막혔다. 리더인 니가 그렇게 행동하면 사람들은 더욱 더 혼란스러워할 텐데……지금은 정신줄 놓고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다. 부상자를 치료하며 다시금 전투를 할 수 있도록 전열을 가다듬어야지. 멍하니 있으면 우주가 도와주냐?

멍하니 있던 안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인사하기도 뭐한 상황이었기에 가만히 보고 있자 그녀의 표정은 상실에서 분노로 물들었다. 키리를 놔둔 채 나한테 성큼성큼 다가온 안즈는 내 손을 붙잡은 채 움막으로 들어간다. 얘가 왜 이래?

“어떻게 된 거야……!?”

움막에 들어오자마자 한 말은 ‘어떻게 된 거야’였다. 하아……불쌍하다고 여겼지만 이런 짓을 하니 다시금 썅년으로 보이는군. 자, 뭐라고 대답해야 잘 대답했다고 소문이 자자해질까? 응, 그걸로 하자.

“일단 주어와 서술어를 좀 갖춘 다음에 물어봐라.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내가 알고 싶다.”

원래라면 건방지다며 나를 패야 했지만 안즈는 그러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꾹 참고 있는지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어쭈, 때리게? 때린다고 일이 해결되냐? 때리고 싶으면 때리든가. 그런 짓을 하면 할수록 내 얼마 안 되는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은 LTE급 속도로 사라질 테니까.

지금 폭발하면 때리거나 울거나 소리 지르거나. 어느 쪽이든 간에 크게 한 번 터질 거 같았지만……그렇다고 ‘히익, 미안해! 잘못했어! 살려줘! 목숨만은!’ 같은 3류 엑스트라 대사를 뱉을 마음은 전혀 없었다.

부르르 떨고 있는 그녀를 보니 지금까지 쌓아온 분노가 사르르 풀리는 느낌이다. 음……나도 확실히 인간쓰레기긴 인간쓰레기로군. 많은 동족을 잃어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 그녀를 보고 좋아하다니. 내 아내들이 나를 버릴 만도 하……다고 인정할 거 같냐 시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호흡이 거친 걸 보니 아직 제정신으로 못 돌아온 것 같기에 슬쩍 떠볼까 싶었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얘가 설명충왜건처럼 좔좔좔 이야기를 할 리도 없었으니까.

한 때 신세린왜건이란 놈이 튀어나오긴 했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결국 움직여야 하는 건 나밖에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냐?”

“뭐?”

내가 이야기를 꺼내자 그제야 반응한다. 으음……뭘 어떻게 할 거라는 생각도 없이 날 끌고 온 건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녀가 내 몸을 탐할 리도 없다. 지금 이 와중에 그딴 짓 하겠냐? 동료가 죽어 가는데?

“35명을 그나마 넘으면 다행이겠네.”

“……무슨 소리야.”

어이쿠, 이거야 원……. 왜 나이든 사람이 당찬 아가씨를 괴롭히는지 이해가 좀 가는구만. 처음의 그 건방졌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한 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다니. 이건 이거대로 즐거운데……. 좀 즐겨볼까?

“뭐긴 뭐야. 다시 싸울 수 있는 사람 숫자지. 다시 싸울 거잖아?”

안색이 새파래진다. 이런 잔인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 않냐고? 아니, 있다. 얘들이 안 싸우면 괴물이 쳐들어올 테고, 그럼 나는 죽는다. 왜 내가 남의 마을 싸움 때문에 죽어야 하는가? 날 버린 아내들을 용서할 생각은 없다만 여기서 죽을 생각도 없었다.

“100명 있던……아, 아니다. 5명 내버려두고 갔으니 95명이네. 그 중 30명 약간 넘게 돌아왔으니 여기 있던 5명이랑 합쳐도 40명이 채 안 되네. 전력이 순식간에 반절 이하로 줄어들었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나, 나는…….”

우와아……엄청 쇼크 먹었긴 쇼크 먹었구나. 늘 나를 괴롭히며 웃음을 잃지 않았던 안즈가 이렇게까지 말을 더듬다니. 그야……서로 몸을 나눌 때는 헛소리도 지껄이며 신음도 내곤 그랬지만 어디까지나 ‘관계를 맺고 있는 시간’에만 그랬지. 평소에는 안 이랬다고.

동료가 죽은 것도 불쌍하고 이렇게까지 멘탈이 박살난 걸 보니 안타깝기도 했다만……잊지 마라. 사람한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목숨이다.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목숨이나 소중한 것을 짓밟을 줄도 알아야 한다.

……바로 나처럼 말이지.

“싸울 거지? 안 싸울 리가 있나. 나를 납치해서 이 지경까지 만들었는데 이제 와서 꼬리 말고 도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내 도발적인 말에 그녀는 당장이라도 찢어죽일 눈빛으로 날 본다. 음, 어울리긴 하는데 막상 당하니 기분은 더럽군. 내가 왜 그녀를 걱정해야 할까 싶지만……나도 사람이 좋은 건지, 아니면 호구인 건지.

이런 상황에서도 ‘안즈는 안즈답게 쾌활하게 이 사태를 해결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날 도구로 쓰는 년 마음이나 신경 쓰다니. 병신 확정이군.

나도 내 마음을 정확히 모르겠다. 이 빌어먹을 년들이 다 죽었으면 했는데 막상 다친 걸 보니 불쌍하게 여기고 있다. 모질게 마음을 먹어 이용해도 모자란데 도와줄 수는 없을까를 생각하다니. 내가 정상일까? 아니겠지. 이러다가 ‘빛과 어둠의 영혼을 지닌 자. 유희와아아아아앙!’이라는 소리와 함께 변하는 건 아닐까?

‘응, 그건 아냐’

썅년. 이 질문에만큼은 아주 빠르고 명확하게 대답하는구나, 머리 하얀 미친년아.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이 분노를 안즈한테 실컷 퍼부어주자.

“왜? 도망칠 거냐 물으니 기분 나빠? 근데 어떻게 하냐? 상황을 봐. 넌 이렇게 될 걸 모두 예상하고 날 납치한 거잖아? 아직 100명 중 40명 덜 되는 인원이 남아 있어.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도 하잖아? 뭐어, 그러다 다 뒤지면 야만족이라는 종족도 끝이겠다만……큭!”

내 어깨를 잡은 채 힘껏 뒤로 밀었기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흙으로 범벅이 된 몸에 신경 쓸 틈도 없이 마운트 자세로 날 내려다보는 그녀를 마주본다.

“기분 나쁘냐?”

주먹을 올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다. 하아, 시발년……. 어떻게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을 그렇게 왕창 깎아먹냐?

“나 때리려고? 기분 나빠서? 야, 정신 차려. 넌 리더야. 대장이라고. 모두의 목숨을 맡고 오늘 아침에 출진했던 년이 고작 자기 마음 하나 못 다스리는데 남은 야만족들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남은 야만족을 들먹이자 천천히 주먹이 내려가기 시작한다. 옳지, 잘 한다 내 주둥아리! 하하, 물에 빠지면 주둥아리만 동동 뜰 거 같았는데 이럴 때에는 쓸모가 있구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좀 더 확실히! 멋지게 괴롭혀주마!

뭐? 이런 상황에 꼭 그딴 짓을 해야겠냐고?

물논(물론)!! 요태까지 그래와꼬, 아패로도 계속!

원래라면 아이나나 메이를 놀리며 보냈을 행복한 시간을 얘가 빼앗았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거 아냐? 생각 같아서는 찢어발겨도 시원찮을 이년한테 동정심을 가져줬다는 것 자체를 감사히 여겨야 하는 거 아니냐?

원래라면 얘들이 뒤지든 말든 간에 그런 건 나랑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얘들이 다 죽으면 그건 그거대로 나한테 곤란하다만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자기들이 원해서 덤빈 결과. 난 거기에 대해 일말의 책임조차 느낄 수 없었고, 느끼지도 않았고, 느낄 생각도 없었다.

“야,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소중한 동족들 데리고 간 결과가 이건데……쟤들이 너를 가만히 놔둘 거 같냐? 아, 놔둘 수도 있겠네. 지휘도 제대로 못 해서 동료들을 죽음으로 내몬 년이라도 그 소중하디 소중한 ‘동족’한테 감히 뭐라고 하겠어?”

“으, 하아……하아……!!”

과다호흡인가? 좋지! 나도 내 아내들한테 버림받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딱 저 꼬라지였으니까! 잘 알고말고! 저게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는 누가 말 안 해줘도 잘 안다. 너도 깨달아야지?

너는 동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만 ‘스스로 한 행위’ 때문에 그런 거지. 나는 내가 원하지도 않는 납치를 당해 버림받았다. 어느 쪽이 자질이 더 나쁜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야, 하아 하아 거린다고 일이 해결되냐? 어떻게 할 거냐니까? 남은 병력 꼴아 박아서 최종돌격명령 내릴 거야? 함정 카드 발동할 거냐고? 참고로 지속 함정 카드인 최종 돌격 명령은 발동시키면 수비 표시 못 한다?”

난 예전에 플레이했던 ‘유희왕’의 함정 카드를 예시로 들며 설명했다. 지속 함정 카드인 ‘최종 돌격 명령’은 발동 시 필드의 앞면 표시 몬스터가 모조리 공격표시로 변하며, 표시 형식 변경도 불가능한 카드였다. 실로 현재의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지는 카드이지 않은가?

“설마 숲에서 수비를 견고하게 한 채 버틸 생각은 아니겠지? 넌 애초에 괴물을 소탕하기 위해 날 납치한 거잖아. 난 아직 그 괴물이랑 싸운 적이 없다만……생각해보니 싸울 이유도 없네? 내가 뭐 하러 싸우냐. 이 수갑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그냥 죽어야지 시발ㅋㅋㅋ”

뒤에 ㅋㅋㅋ라고 표시는 했지만 정말 그렇게 웃었다. 웃겼다. 그 잘난 계획이 이렇게 박살나서 50명 이상의 사람이 죽으니……웃기잖아. 아니, 그렇게 잘난 척하며 날 납치해 만든 계획이 요 모양 요 꼴로 박살이 났는데……안 웃길 리가 있냐?

완전 울상이 되어버린 안즈를 보니 이제 피니쉬 어택을 넣어줄 때라 느꼈기에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후 힘껏 외쳤다.

“더 웃긴 게 뭔지 알아? 니들 인생만 박살났으면 안쓰럽기라도 하지……. 내 인생도 박살났다 시발년아! 알아? 내 아내들한테 버림받았다고! 니년의 그 바보 병신 헛짓거리 때문에 내 인생이 개박살 좆병신이 됐단 말이다! 알아!?”

새파래진 안색은 더욱 더 새파래졌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단숨에 폭발해버린 분노는 겨우 한 마디로 끝날 정도로 작은 게 아니었으니까.

“니년 병신년이 저지른 짓 덕분에 내 아내들은 날 버렸어! 그래 씨발년아! 바로 너다! 너! 마운트 포지션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니년 때문에 모조리 다 망했다고! 너는 동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어 야만족이 멸망 직전의 천연기념물이 되게 만들었고, 나는 내 아내들한테 버림받아 요 모양 요 꼬라지가 됐다! 만족해? 만족하냐고! 암, 만족해야지! 만족하고말고! 나뿐만 아니라 니 소중하디 소중한 동족까지 저렇게 병신에 시체로 만들어놨는데 만족해야지! 후회 한 점 없지? 티끌만한 후회조차 안 하는 거지? 응? 대답해……대답하라고! 이 개좆같은 시발년아아아────ㅅ!!”

그녀의 눈에서는 커다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 눈시울 또한 금방 붉어졌고 우리는 서로 눈물을 흘리게 됐다. 그녀는 후회의 눈물을, 나는 슬픔과 분노의 눈물을. 서로 다른 성질의 눈물이었지만 눈물을 터뜨리게 되자 우리는 결국 서로의 슬픔에 빠져 소리 높여 울었다.

나도, 그녀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넌 상태였으니까.

……물론 내 탓은 전혀 없었다만.

============================ 작품 후기 ============================

우스갯소리 삼아 쓰긴 했지만 초반의 ‘뒤에 사(士)자 들어가는 사람은 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라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 흔한 변호사나 판사는 여전히 제 주변에 없고 그런 사람들과 끈끈한 우정을 쌓아가는 과거 따위도 없었습니다. 현재도 없으니 미래도 없겠죠, 아마.

본편과 후기를 잘 보신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실제로 겪었던 삶을 세린의 모티브로 잡고 있기에 좀 시궁창 느낌이 날 겁니다. 어쩌면 독자분들 중에는 저보다 더한 삶을 살아오신 분들도 계시겠죠. 그분들을 생각하면 좀 가슴이 아픕니다.

서로 원하지도 않았는데 힘든 인생을 열심히 살아왔구나 하는 안타까움도 들고, 여러 모로 힘든 삶을 살다가 결국 이 맛간 소설에서 작가와 독자라는 형태로 만났구나……하는 슬픔도 느낍니다. 현실은 소설보다 기묘하다는 말, 진짜 틀린 거 하나 없습니다.

그런 삶과 마찬가지로 야만족들의 모습도 난장판입니다. 승리와 미래를 꿈꾸며 나갔던 여자들은 대부분 반병신이 된 채 돌아왔습니다. 이쯤 되면 독자분들도 ‘아, 야만족 끝났네 ㅋㅋㅋ’하고 웃으실 겁니다.

옙, 대패(大敗).

전멸에 가까운 전과를 이룩했습니다 ^0^/

지금까지 당해온 게 있어서 속을 살살 긁으며 깝죽대는 세린. 그치만 틀린 말은 없기에 결국 때리지를 못합니다. 결국 세린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둘 다 좆망했다는 걸 알리고, 그렇게 이번 편은 끝납니다.

더 이상 여유고 뭐고 없는 사태. 이런 사태에서 서로 소리 지르며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을 보니 주인공이고 뭐고 간에 위험하면 얄짤 없이 허둥대는구나 싶습니다. 실제로 이런 상황에 빠지면 당황해하는 게 보통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태연하게 있다니. 그게 미친놈이죠.

아내들한테는 버림받았고 야만족은 개박살. 본 적도 없는 괴물들은 세린과 야만족들을 노리며 점차 다가오는 상황. 좆 to the 망! 좆망테크트리네요. [축☆지옥 입★갤☆하]라고 플랜카드라도 써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과연 이들은 이제부터 어떻게 대응할까요. 이 시궁창 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나갈지 궁금합니다. 세린의 용기와 활약이 빛을 발할 거라 믿으며 글을 마치려고 하는데…….

……

…………

………………세린이 활약했었던 적이 있었나?

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없었던 거 같기도 하고. 늘 하반신만 흔들어 댔지 딱히 주인공다운 활약은 안 했던 거 같은데……응? 세린아. 그건 뭐냐. 왜 이상한 걸 나한테 들이대는(레드썬!)……?

……

…………

………………데프프……세린이 알아서 잘 할 것인 데스웅……(행복회로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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