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4 「14-3 : 왜 내 인생은 늘 이러냐……? (9)」 =========================
“윽, 그만 좀……하아……하아……으윽! 야, 제발 좀 쉬게 해달라고!”
“낑! 끼잉! 아기가 잔뜩 들어오고 이쪄! 아앗, 응아아아아앗!!”
빌어먹을……쾌감을 느끼면서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 생각한다. 그런 생각과 달리 솔직한 몸은 하얀색의 정액을 힘차게 내뿜었고 두 발 째의 사정을 맛본 여성은 몸을 비틀며 열락에 겨워했다.
“칫……약해빠진 놈. 이봐, 휴식이다! 이 자식 완전 약해빠졌어! 이래서 바깥 놈들은 안 된다니까……!!”
날 감시하던 여자는 나를 욕하며 휴식 명령을 내렸다. 휴식조차 누군가의 명령이 없다면 취할 수 없다니. 하늘을 향한 채 벌러덩 누운 나는 천장을 바라봤다. 수갑 때문에 자유로운 행동이 불가능하니 이런 식으로 쉴 수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여기에 온지 대략 3일이 지났다. 3일 동안 하는 일이라고는 그녀들한테 강제적으로 정액을 추출 당하는 것뿐이었다. 하는 일이 아니라 ‘당하는 일’이라고 해도 괜찮겠지. 내 의사는 완전 개무시하고 진행되는 일이었으니까.
뭐? 안 즐겁냐고? 이런 시발! 너네들이 대신 당해볼래? 이건 정말 고역이었다. 아무리 내가 여자와 섹스를 좋아한다지만 그런 나조차 고개를 저을 정도로 심했다.
일어나자마자 식사나 화장실 외에는 섹스, 교미, 정액 발사, 절정. 내가 섹스를 하는 건지 합체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정도였다.
100명밖에 안 되는 인원이라지만 하루 종일 그녀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마력봉인상태가 됐기에 분신술을 못 쓰는 나는 단 한 명. 하지만 저들은 달랐다.
맨 처음 정액을 얻은 안즈와 키리를 제외하더라도 9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8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냐?
난교나 2P. 두 명 이상의 여성과 관계를 가지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내가 지금까지 분신술을 적극적으로 썼던 이유는 단 두 가지다.
첫 번째. 쓸 수 있으니까. 현실에서 쓸 수 없었던 분신술을 써서 적극적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어서 그랬던 거다. 쓸 수 있는데 안 쓰면 아깝잖아.
두 번째. 내 아내들이나 다른 여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분신술의 힘이 꼭 필요했었으니까. 14명이나 되는 아내들을 한 명씩 상대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이미 앞서 말했지만 그 외에도 상대는 필요했다.
레이 시리즈를 비롯해 근무를 마치고 온 경비대원 여성들. 내 아기를 가진 채 생활하고 있는 마을의 여성들. 그 모두를 위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던 도중 안즈가 왔었지.
임신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체적 쾌락을 찾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관계를 바라는 그녀들을 위해 앞으로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그런 생각을 한지 하루도 안 지나 납치당했다. 이게 무슨 꼬라지냐?
하물며 나는 육체적인 스펙으로 볼 때 그리 높지 않은 성적을 지닌 남자였다. 다들 차이가 있겠지만 남자는 하루에 몇 발 정도 빼버리면 사정을 통해 나오는 정액의 양이 줄어들게 된다. 이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기분 좋다고 막 해버리다간 홍콩 가는 수가 있다니까?
그러나 이들은 그러한 것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계속해서 내 정액을 뽑으려 했고 난 그걸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아, 물론 거부하려 했지만 ‘거부할 권한조차 받지 못했다’라고 표현해야겠지. 안 그러면 현재 진행형으로 이렇게 좆물을 추출당하고 있겠냐?
처음에는 뭐……그래. 솔직히 말해 좋았지. 남자란 게 다 그렇잖아. 눈을 뜨면 하반신이 텐트를 치고 있고, 여자 친구가 없는 남자들은 로망을 안으며 하반신의 도킹을 원하지. 헌데 그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복 마법이랑 욕 처먹으면서 원하지도 않는 섹스를 해야 하는데 뭐가 부럽다는 거야!?
날 상대하는 여자들 또한 문제였다. 나와 관계를 가지는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나와 호의적인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을 배려했고 나 또한 그녀들을 배려했지. 흥분하면 과격한 행동을 하고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흥분 상태에 한해서이다. 평소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야만족은 달랐다. 사람을 이름이나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얘들은 그러한 편견을 스스로 박살내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욕하며 빨리 하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 하고 침을 뱉는 경우도 있었다. 하아……진짜 왜 이러냐 싶었지.
2016년 4월 1일로 팬미팅이 끝나버린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러브라이브」. 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아이돌 그룹 「뮤즈(μ's)」에서 유명한 호시조라 린의 어투를 따라하자면…….
『나에 대한 배려? 인정할 수 없어!』
……로 요약할 수 있겠지. 저것도 귀엽게 표현한 거다. 실제로는 ‘시발, 존나 약해빠진 병신 새끼네! 야, 빨리 아기 씨앗 내놓으라고! 안 내놓으면 박살낸다 새꺄!’라는 느낌이 강했다. 나는 그 말에 찍 소리도 할 수 없었지. 처맞기는 싫었으니까.
산 넘어 산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만큼 문제가 많다는 뜻이지.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들도 충분히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아직도 문제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녀들의 섹스 페이스와 막무가내식 행동이었다.
야만족이라는 이름답게 육체적으로 꽤 발달한 그녀들은 그 탐스러운 꽃잎과 엉덩이로 사정없이 내 하반신을 내리찍었다. 덕분에 이 엿 같은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쾌락을 얻을 수는 있었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얻을 것을 얻었으면 빨리 끝내야 하지만……알잖아? 자위도 그렇듯이 한 번 하면 아쉬움이 남아버린다. 아직 멀쩡한 몸은 더욱 더 짜릿한 자극을 원했고 뇌는 ‘아직 괜찮아. 할 수 있어’라는 신호를 보낸다. 무리를 하면서까지 자극을 맛보고 싶어 하는 건 누구나 다 같다.
이 여자들의 ‘무리’가 내가 생각하는 레벨과 달랐다는 게 가장 큰 오인(誤認) 중 하나다만. 그녀들은 3~4번 정도를 하고도 남을 체력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난 달랐다.
한 사람 당 두 발 정도를 뽑더라도 몇 십 명과 상대해야 하는 나. 자기 꼴리는 대로 하반신을 찍어대며 정액을 더 달라고 난리치는 그녀들. 아무리 봐도 내가 불리하잖아.
그녀들이 더 많은 걸 원한다며 내 몸을 쥐어짜려 하면 감시하는 사람이 그걸 말리고는 했다. 한 사람이 독차지할 수는 없으니 그게 당연한 수순이었고.
하지만 그녀들은 나를 껴안거나 허리나 목에 자신의 신체 일부를 휘감아 무리하게 꽃잎을 찧어댔고, 난 어쩔 수 없이 정액을 줄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나한테 거부권은 없었으니까.
그녀들 덕분에 육체적으로 힘든데 정신적인 피로까지 받게 되어 평소보다 더욱 녹초가 된 상태. 이런 상태에서 무언가를 할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회복 마법? 회복 마법은 체력을 회복시켜주는 마법이지 피로 자체를 없애는 마법이 아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가 없다고.
약국이나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피로회복제’도 마찬가지였다. 음, 국어학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피로회복제는 ‘피로’를 회복시켜주므로 힘든 걸 계속 힘들게 한다는 뜻이 되긴 한다만……그렇다고 피로소거(疲勞消去)제라고는 할 수 없으므로 저런 말을 계속 쓰게 됐지. 국어가 좀 이상한 부분이 있긴 하다.
국어가 소중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자. 피로회복제를 마시면 지친 상태를 빨리 낫게 하는 효능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읽어보면 알듯이 ‘지친 상태를 빨리 회복시켜준다’는 것이지 ‘이미 느끼고 있는 피로를 없앤다’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시간을 되돌리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이가 드신 어른들이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지. 그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의 몸은 시간과 마찬가지로 한 번 안 좋아지면 원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설령 되돌릴 수 있어도 이전보다 좋지 않은 상태로 간신히 돌리는 게 고작이지.
3일이 지났지만 날 잡은 채 막무가내를 부리는 그녀들 때문에 간신히 60명 정도를 임신시킬 수 있었다. 그마저도 간수의 제지가 있어서 그런 것이었지. 그치만 답답하군. 60명을 임신시키면 뭐하냐? 아직 30명 이상의 여자가 남았고 더 큰 문제는…….
“……아기를 죽이면 다시 받을 거잖아.”
바로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내 아내들이 나를 구하러 오는 것은 솔직히 문제가 아니다. 구하러 온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구조 신호도 못 보내는 내가 믿는 거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런 면에서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아기를 에너지 소스로 써버리는 행동과 사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배가(倍加) 능력’을 써야 한다는 것은 이해한다. 나라도 쓰겠지. 하지만……그렇다고 아기를. 뱃속에서 아직 완전히 형체조차 갖추지 못한 아기를 에너지 원(源)으로 써버리다니……!! 그래서는 살인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예전에는 ‘생명의 씨앗’을 써서 배가 능력을 썼다고 했었다. 그렇겠지. 남자의 정액으로 임신할 경우 9~10개월이지만 ‘생명의 씨앗’을 쓴 임신은 3개월이면 충분하다. 거의 3배 이상으로 농축됐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내가 직접 쓴 적은 없고 쓸 생각도 없다만.
그 정도의 생명력을 지녔으니 부스트 계열의 능력인 ‘배가’를 쓰는 데에는 안성맞춤이었겠지. 뱃속에 든 에너지를 모조리 능력으로 돌렸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희생된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잠시간이나마 묵념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원하지도 않는데 태어나는 것도 모자라 그렇게 덧없이 사라지다니. 그런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명의 씨앗을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자 눈을 돌린 곳이 바로 나였다.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지 않았겠는가? 그녀들에 비해 허약하니 멋대로 납치해 이렇게 아기 씨앗을 추출시키는 용도로 쓰고 있으니까!
임신을 한다고 해서 곧바로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태아가 형체를 만들며 점차 커져가는 등 다양한 단계를 거쳐 아기는 만들어진다. 헌데 이들은 아기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는 거 같았다.
섹스할 때는 아기 씨앗, 소중한 아기라고 지껄이면서 정작 그 아기를 능력 발동을 위한 에너지로 삼다니. 이 무슨 표리부동의 자세인가?
살아남기 위해서라지만 그녀들의 모습은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여자들과는 매우 달랐다. 아기를 위해, 남자와의 쾌락을 위해 살아가던 여자들이 지금까지 겪었던 아내들과 사람들이라면……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뭐든지 이용하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모든 야만족 여자들을 잔인하고 인간성도 없는 사람으로 몰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도 사정이 있어 이런 짓을 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죄 없는 사람. 관계도 없는 사람을 데려다가 마음껏 이용해도 좋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생명의 씨앗을 써서 싸우다 안 되니 나를 이용하다니. 영어로 치자면 [I'm being used by women]이라고 해야 하나? 현재진행형 + 절찬리에 이용당하고 있으니 내가 남자인지 도구인지 모르겠군. 가벼운 자괴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괴물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얻을지 패배를 할지는 모르겠지만……나를 이용한다 치더라도 그리 오래는 못 갈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언제까지고 이런 짓을 계속할 수는 없다. 겨우 3일 지났는데 벌써부터 이런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뿐일까? 내 아내들이 온다면? 내가 납치당했는데 내 아내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없겠지? 이건 좀 불안했다. 으음, 내가 지금까지 아내들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어쩌면 안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어, 음……하아. 미치겠군. 내가 그녀들의 인간성을 운운했지만 정작 나도 그리 좋은 인간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안 그럼 이런 고민은 안 했겠지.
“인간성이라…….”
감시가 있든 말든 중얼거렸다. 누가 보거든 봐라 그래라. 듣고 있거든 들으라 그러고. 지금까지 여자들 때문에 개고생을 했는데 겨우 말 한 마디 못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휴식이라고는 하지만 언제 다시 이 빌어먹을 짓을 재개할지 몰랐기에 이왕 한 생각, 끝까지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내 아내들한테 비록 짓궂은 짓, 살짝 맛이 간 짓 등 다양한 바보짓을 하긴 했지만……그래도 난 그녀들이 나를 구하러 올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다만. 적어도 이렇게 납치당했는데 잔치를 벌일 정도로 나쁘게 살아오지는 않았다고 생각하거든.
내가 납치를 당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게 됐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놔두고 밖으로 나갈 사람도 아닌데 벌써 3일씩이나 모습을 감추었으니 모를 리가 없겠지.
안즈 또한 함께 사라졌고 내가 이 숲으로 오기를 제안한 사람이었기에 납치됐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그리 늦지는 않았겠지.
지금쯤 다들 뭘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약한 새끼가 눈물만 많다고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무시하자.
너희가 날 납치한 주제에 뭐? 나한테 강철 같은 정신이라도 바랐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정말 뻔뻔한 것도 이 정도면 노벨상 감이었다.
자기들이 나를 잡아와 이렇게 노예처럼 부려먹는 건 괜찮지만, 내가 그런 현실에 좌절해서 울거나 슬퍼하면 나약한 새끼라며 욕을 하다니. 정말 대단한 이중잣대 나셨군.
자기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무슨 짓이든 해도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은 도덕과 예절, 질서를 지키며 설설 기어야 한다니……진짜 내가 어쩌다 이런 년들을 만나게 됐을까?
오히려 반대 아닌가? 납치당했는데 싱글벙글 웃으며 지친 기색, 힘든 기색도 없이 허리만 흔들어대며 정액을 헌납하는 새끼가 미친놈이지. 움막이 엉망이 됐기에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긴 했지만 그곳도 매한가지였다. 그리 크지 않은 곳에 나까지 합쳐 간신히 네 명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지.
나는 늘 누워 있거나 겨우 상반신을 일으키는 정도였고 감시는 늘 한 명 이상이 존재했다. 차례를 기다리지 못해 누군가 들어오더라도 네 명 정도가 한계였기에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좋은 크기이기는 했다만.
식사? 빵이랑 수프 정도였다. 특식도 없고 케이크도 없고. 심지어 빵마저 내 손으로 직접 찢어먹어야 했다. 수프를 좀 떠먹여 달라고 하면 거칠게 입 안에 밀어 넣었기에 개처럼 먹는 게 차라리 편했다. 양도 그리 많지 않았기에 식사나 거처에는 빵점을 줘도 모자랄 정도였다. 내 처지를 본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혹시 그거 없나요? 왜 있잖아요! 인질을 잡은 범인과 인질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랑!’
아,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 말이군. 범죄자한테 잡힌 인질이 그들의 사상에 동화되거나 행동에 따르는 현상이다. 범죄자가 주된 주체였지만 이러한 현상은 꼭 범죄 현장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은 왜 인질을 잡은 범인들의 사상이나 행동에 동조하는 걸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확실히 말해둘 것은 스톡홀름 증후군은 상당한 특수성을 지니고 있기에 발생하는 것이지 원래부터 그들의 사상이나 행동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고 심하면 총이나 칼에 의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가 호의나 친절을 베풀면 그것에 마음이 놓이게 되어 그들한테 동조하게 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케이스였다.
일반적인 케이스라고 하지만 인질한테 친절이나 호의를 베푸는 경우는 소수이므로 스톡홀름 증후군 자체도 상당히 보기 드문 것이다.
당장 나를 봐라. 현재 내 상황의 어디가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릴 건덕지가 있어 보이는가? 당장 모조리 죽여도 시원찮을 판에 스톡홀름 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릴 건덕지도 없지만 설령 내 대우가 달라진다 하더라도 그들을 향한 증오와 마음이 바뀔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당장 이 ‘납치’라는 전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결국 납치범일 뿐이니까. 그런 여자들한테 내가 왜 꼬리를 살랑대며 애교를 부려야 하나?
당장이라도 모든 걸 뒤엎고 싶었지만 이 빌어먹을 마력봉인수갑 때문에 나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처지다. 자유를 박탈하고 인권을 유린한 것도 모자라 노예처럼 쓰는 년들한테 애교를 부리라니. 싫다. 죽는 것도 싫지만……이딴 년들한테 이용당해야 한다니. 그것도 싫었다.
그녀들을 죽을 정도로 증오해도 모자랄 판국이건만 나란 놈은 머리가 병신인 건지 아니면 그냥 마음이 착한 건지. 그녀들이 과연 앞으로 어떻게 괴물과 싸울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나도 참 호구 새끼구만. 날 잡은 여자들을 걱정하다니…….
근거리와 중거리를 제압할 뿐만 아니라 마법에 내성까지 지닌 괴물들을 상대한다는 점에서는 그녀들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저런 놈들이 다시 프레그넌트 주변에 나온다면? 까놓고 말해 토벌하겠지. 이길 자신은 있다. 아직 싸워보지는 않았지만.
그치만 싸움에 ‘절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늘 생각지 못한 변수가 존재한다. 당장 이 상황을 봐라. 그녀들은 나를 데려와 괴물 토벌을 위한 정액 헌납 기계로 쓸 생각이었겠지.
헌데 지금은 어떠냐? 하루에 상대할 수 있는 여자들의 수는 정해져 있다. 물론 내 체력도. 이런 내부적인 요인만 하더라도 이미 그녀들이 생각지 못한 변수였겠지.
변수는 내부적인 것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내적인 요인이 있다면 외적인 요인도 있듯이 외부적인 변수 또한 존재했다. 바로 내 아내들과 괴물이었지.
내 아내들이 이곳으로 온다면 장담컨대 절대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오지는 않을 것이다. 가족이 납치당했는데 미쳤다고 좋아하겠냐?
하물며 혜린, 로라, 메이의 경우 나와 함께 여행을 하며 납치까지 당한 기억이 있으니 더하겠지. 안나와 니나의 대우가 이것보다 좋다고는 하지만 다시 납치를 당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시발 미쳤냐? 내가 납치 못 당해 안달하는 영화의 히로인도 아니고 원.
마리아나 아테나, 헬레나까지 가세한다면 더 볼 만하겠지. 그녀들은 왕가(王家)의 사람인데다 전투력 또한 자자하게 알려질 정도로 강한 여성들이었다.
내 아내들이 온다면 괴물이나 여자들은 모르겠지만 날 구출하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수행할 수 있을 터였다.
내 아내들과 이 야만족들이 싸우는 건 솔직히 별로 원하는 게 아니었다. 안즈나 키리를 후려패는 거라면야 거리낌 없이 할 수 있겠다만, 그녀들과 내 아내들이 싸우며 혹시나 피가 흐르면 어쩌나 걱정됐으니까. 난 살인이나 살육에 미친놈이 아니거든.
이 야만족들이 괴물한테 당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외부적인 변수라고 말했던 괴물이 이렇게 등장하게 되니 나도 참 입을 잘 놀리는 거 같다. 이 괴물들이랑 싸운다 치자. 그럼 두 가지 상황이 벌어지겠지.
1. 이긴다
2. 진다
이게 무슨 OX 퀴즈도 아니고 흑백 논리도 아니건만……이런 식으로 정리하는 걸 보니 나도 참 웃긴 놈이었다. 납치당한 이후로 쉬는 시간에는 이런 가능성만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기분이냐고? 군대 다시 온 기분이다……. 끔찍하지? 어쨌든, 각 가능성에 따른 결과도 보자.
1. 이긴다.
- 이긴다 치자. 그럼 나는 어떻게 될까? 내 장담하는데 절대 그냥 안 보내주겠지. 지금까지는 배가 능력을 위해 죽였던 아기지만 이제는 종족의 보존과 번성을 위해 아기 씨앗을 받겠다며 온갖 짓을 다 할 거다. 물론 마력은 봉인당한 상태로.
게임 오버. 오 ^0^/
2. 진다.
- 정말 우스운 이야기였지만……진다면 차라리 내가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냐고? 나도 그녀들을 도와야 할 테니까! 지금은 이렇게 마법도 못 쓰는 병신 상태지만 다들 잊지 않았겠지?
난 코스튬, 무기, 마법 등 온갖 마법과 무기를 쓰며 싸워왔던 놈이다. 괴물이랑 싸우는 전력(戰力)으로서 든든하면 든든했지 부족함은 없다고!
차라리 나를 이런 정액뽑기용 노예가 아니라 함께 싸울 동료로 취급해줬다면 그녀들에 대한 인상과 감정 또한 훨씬 더 나아졌을 것이다.
생각해봐라! 불타오르는 전개 아니던가? 함께 숲을, 야만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맡긴 남자와 여자들! 서로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힘을 합쳐 싸우며 꽃피는 우정과 사랑! 크으으으~!! 최고잖아!?
왜 있잖아! RPG나 만화에서 서로 적이었던 캐릭터들끼리 함께 공동전선(共同戰線)을 만들며 우정을 다지는 장면! 서로 라이벌이었던 만큼 서로의 실력이나 버릇, 강점을 알기에 그걸 보완해가며 만들어지는 우정 이야기! 남녀라면 러브 스토리겠지! 근데…….
“아, 시발……이 새끼 진짜 완전 맛이 갔네. 오늘은 더 이상 좆물을 못 뽑겠는데……?”
저 시발 간수년은 저딴 소리나 지껄이고 앉아있다. 하아……정말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주륵주륵 흐르는 눈물과 한숨에 안타까움을 실어 보내며 오늘 노예짓은 끝났구나 하는 걸 느꼈다.
나도 어지간히 맛이 간 거 같군. 현실도피도 작작 해야지. 사람은 마음이 약해지면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싶어 한다. 현실을 봐도 시궁창밖에 없고 그걸 고칠 힘도, 능력도 없으니까. 그건 나 또한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그런 짓을 하고 있지.
아내들이 나를 구하러 오는 걸 애타게 마음속으로 그렸다만 현실은 좆이다. 저 간수의 말만 하더라도 그랬다. 나를 환상에서 현실로 되돌려 놓는 방법은 정말 간단했다. 때리거나 욕하거나 하면 끝. 그걸로 만사 OK였다.
난 처맞기 싫으니 더 열심히 하반신을 흔들어댔고 그럴 때마다 여자들은 황홀해하며 아기 씨앗을 받아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환상이나 현실도피뿐. 그녀들에 대한 반항조차 용납되지 않았기에 내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환상이나 망상밖에 없었다.
한심한 자식 같으니라고……. 나 자신에 대한 경멸감과 짜증이 물씬 솟아오른다. 내가 원해서 한 것도 아닌데……!!
“저어…….”
“응, 뭐야? 잘 거면 빨리 쳐자라고. 그래야 내일도 일할 수 있잖아.”
빌어먹을……말 한 마디 묻는 거 가지고 더럽게 생색내는군. 빨리 자야 내일도 일할 수 있다고? 일이라고 해봤자 그녀들이 내 위에 올라타 마구 짓누르는 것뿐이었고 서로에 대한 사랑이나 합의조차 없는 교미 따위는 이젠 지긋지긋했다. 난 짐승이지만 이성(理性)을 지닌 짐승이거든요?
나름 싹싹하게 대하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그야말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 관리에 짜증과 생색만을 내는 그녀였기에 나 또한 말을 거는 게 짜증스러웠다. 그런데 왜 말을 걸었냐고? 그야 당연히 물어볼 게 있어서 그렇지. 나도 저런 년이랑 이야기하기 싫다. 아아……메이나 니나랑 오랜만에 이야기하고 싶다. 보고 싶어…….
“그……청록색 괴물이랑은 언제 싸우나요?”
“니가 그딴 건 알아서 뭐하려고?”
씨발년. 군대에서 들었던 말이랑 똑같다. 훈련 나간 부대원들 언제 오냐고 물으니 그걸 내가 알아서 뭐 할 거냐고 묻더군. 그 시발 새끼나 이 개년이나 다 같은 연놈들이다.
호기심을 가지는데 권리나 자격이 필요하냐? 궁금해서 묻는 거지 썅년아……. 목구멍 끝까지 밀려나온 욕을 간신히 집어넣으며 일부러 우물쭈물대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 그게……혹시나 그 괴물들이 여기에 쳐들어오는 게 아닐까 걱정돼서요.”
내 소심스러운 걱정과 발언에 그녀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터뜨려라……그래야지. 그래야 멍청한 니가 정보를 마구 쏟아낼 테니까. 얼마든지 바보 역할을 맡아주마. 내가 원하는 것만 알 수 있다면…….
“푸하핫! 이거 완전 병신이잖아? 왜, 걱정돼? 죽을까봐? 걱정 마. 내일이나 모레면 싸울 테니까. 넌 그냥 아기 씨앗이나 열심히 주입하라고.”
“싸운다면……설마 야만족 모두가 다 나가 싸운다는 뜻은 아니죠?”
설마 싶어 물었다. 에이……스타크래프트에서나 쓸 법한 어택땅 전술을 쓸 건 아니겠지?
“바보냐? 이 주변을 지키는 인원을 제외하면 당연히 다 나가야지. 괴물이랑 싸우는데 그 정도 인원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도 모르냐?”
세상에. 진심이냐 이 바보들……? 내 미래가 점점 깜깜해지는 느낌이다. 눈을 떴는데 캄캄한 어둠만이 몰려오는 느낌을 알고 싶다고? 나랑 바꾸자. 바꿔줄게. 아니, 바꿔주세요. 레알…….
더 이상의 질문이 없자 ‘밖에 감시하는 사람 있으니까 허튼 짓할 생각은 하지도 마’라는 말을 하고는 그녀는 떠나버렸다. 나갈 생각도 없지만 나갈 수조차 없었다. 육체적인 제약도 있거니와 그녀의 대답이 너무 충격적이었으니까.
싸울 수 없는 사람들과 야만족의 마을을 지키는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싸우러 나간다고? 그러다 전멸당하면 어쩌려고? 죽고 싶어 단체 자살 계획이라도 세운 거냐!?
무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며 천장을 본다. 저 천장은 변함도 없군. 하긴, 변하는 게 이상하겠지만…….
이대로라면 모두가 위험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마음에 걸리는 것들을 내일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수면세계로 다이브했다.
============================ 작품 후기 ============================
군대에 있을 때 ‘모르는 게 있으면 선임이나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봐라’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겁니다. 모르면 물어야지 혼자 끙끙 앓으며 생각한들 답이 나올 리가 없잖습니까?
혼자 일하면 왜 보고나 상담 안 하고 일을 진행시키냐고 한 소리 듣습니다. 그러니까 물어봐야겠죠. 군대에서는 대화와 연락, 보고를 절대 게을리 해서는 안 되니까요. 저도 그렇게 배웠고 생활했습니다. 후임들한테도 잘 가르쳐줬구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훈련 중에 후번 근무자가 안 왔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탄약고든 위병소든 간에 후번 근무자 늦게 오면 존나 짜증납니다. 돌아가서 작업이든 개인정비든 간에 해야 하는데 늦게 오면 본인 손해니까요.
훈련이 끝나고 들어올 거 같은 차량을 생각하니 ‘언제쯤 후번 근무자가 올까?’ 싶었습니다. 안 오면 좆같은 상황이었거든요. 평소 탄약고 관리하는 다른 중대 선임한테 전화를 걸어 물어봤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탄약고 관리하는 본부 중대 및 군수과 계열은 원래 위병소장 근무를 안 합니다. 그건 소총이나 포병 중대가 하거든요.
하지만 훈련이다 뭐다 해서 어쩔 수 없이 본부중대 인원을 처박아놓을 정도로 인원이 부족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막장이네요.
여하튼, 물어봤습니다. 언제쯤 오냐고. 차량 들어왔냐고. 지금 생각해도 당연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후번 근무자가 근무 종료 시간으로부터 30분 후에 올지 한 시간 후에 올지 모르는데 당연히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훈련 차량이든 뭐든 간에 무조건 위병소를 거칩니다. 그 후에 지휘통제실로 들어간 차량과 탑승자 등이 전달되구요. 지휘통제실의 간부한테 물을 수도 없었기에 당연히 같은 병사(선임)한테 물어봤습니다. 그리고 멋진 대답이 들려오더군요.
‘그걸 니가 왜 알고 싶어 하는데?’
……이 시발 새끼가? 평소 위병소장 일은 절대 들어갈 일 없는 새끼가 미쳤나 싶었습니다. 아니, 물으라매. 모르는 건 물으라고 해놓고 왜 이 따위 대답이 돌아오나 싶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요. 모르는 건 물으라고 해놓고 왜 알고 싶어 하냐니. 말과 행동이 반대잖냐, 등신 새끼야.
그냥 ‘나도 모른다’라든가 ‘지휘통제실에서 연락 가겠지. 대기해라’라고 말하면 차라리 밉지나 않지. 뭐? 그걸 왜 알고 싶어 하냐고? 모르는 거 물으라고 니 선임들이 안 가르쳐주디, 시발놈아?
이미 그 당시에는 군대에 대한 믿음이나 호의를 완전히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만, 주변에 있는 선임이나 전우(ㅋㅋㅋ)들이 이 따위였기에 즐겁지도 않았습니다. 용케 대한민국 군대 돌아가는구나 싶었죠.
군대는 어쩔 수 없이 갇혀 지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참았지만 사회에서 그런 말을 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남한테는 연락이나 보고가 중요하다면서 다른 사람이 물으면 ‘그걸 왜 알고 싶어 하는데’라고 하다니.
아니, 생각해보니 그럴 용기나 있을지 궁금합니다. 후임병이 물으니까 그 따위로 대답했지, 대등한 일반인이나 지위가 더 높은 사람한테 과연 어떤 태도로 임할지 존나 궁금하네요.
여러분. 혹시 아직 군대 안 다녀오신 분들이 계시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군대는 병신력 높은 놈이 유명해지는 곳입니다. 그냥 최대한 평범하게, 존나 노멀하게 행동하세요. 너무 열심히 하면 이용당하고 너무 일 못 하면 욕과 이상한 평가 듣는 곳입니다.
군대는 그냥 군대입니다. 인생 2년 묶인 상태에서 듣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 같은 거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대부분 병신들이 툭툭 던지는 말이니까. 그 새끼들 말에 귀 기울이며 슬퍼할 바에야 영어 공부를 하세요. 그게 인생에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영어 같은 지식은 공부하면 자기 것이 되지만, 같이 지내는 병신들은 전역하면 볼 일 없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