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2 「14-1 : 왜 내 인생은 늘 이러냐……? (7)」 =========================
프레그넌트 주변에 있었던 괴물은 초록색 몸을 가진 촉수괴물이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눈치 챘겠지만 ‘있었다’라든가 ‘이었다’라는 표현은 과거형. 예전에는 그랬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프레그넌트의 숲에는 더 이상 괴물이 없다. 우리가 모조리 전멸시켰으니까.
초록색 괴물은 등에 있는 수많은 촉수로 멀리 있는 사람을 공격할 수 있었다. 잡을 수도 있고 그 더러운 촉수로 여자를 범할 수도 있었기에, 내 아내나 나한테 있어서는 흉측하기 그지없는……그야말로 아무리 죽여도 죄책감을 전혀 받지 않는 벌레 같은 놈이었다. 실제로 엄청 죽여 댔었지.
초록색 촉수 괴물은 중거리(中距離). 말 그대로 검을 휘두르면 맞지 않지만 아주 멀리 있는 것은 아닌 거리에서 최고의 포텐셜(Potential ; 잠재력)을 발휘했다.
우리의 포텐션을 발휘해도 짜증날 판에 괴물(적)의 포텐션이 폭발하는 건 참으로 짜증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 아니겠는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돌격 앞으로를 외쳤다간 전멸할 수도 있었기에 상대방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건 이 세상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무턱대로 돌격하다 죽을 일 있냐?
우리한테는 검이 닿지 않는 거리지만 놈들한테는 촉수가 닿고도 남을 거리였기에 대처법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로라나 혜린이─코스튬의 힘을 빌린 상태─처럼 놈들의 품으로 파고 들어 단숨에 접근전을 벌이는 것. 놈들은 힘은 보통 사람보다 강했지만 근접전에서는 약하기 짝이 없었다.
멀리 있는 적을 처리하는 데에는 적절한 촉수였지만 접근전에서의 방어나 공격에는 적합하지 않았기에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쓸려나갔었지. 가끔은 메이도 로라를 따라했기에 접근전 실력 자체도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 증명된 상태였다.
두 번째는 말할 필요도 없이 마법이나 원거리 공격 난사(亂射)였다. 당시 시라누이 마이의 코스튬을 입고 있었던 혜린이는 부채를 던졌고 로라나 메이는 마법을 썼다.
나는 만병지왕(萬兵之王 ; 모든 병기 중 왕)이라 불리는 M16A1님의 힘을 빌어 탕탕탕! 민주주의를 위하는 야수의 심정으로 괴물을 탕탕탕! 죄수번호 503을 총살하듯 탕탕탕! 언젠가 죽을 매국노 노역자 새끼들을 쏴죽이듯 탕탕탕!
……이러다 마티즈가 우리 집 앞에 와서 날 납치한 후, 물고문 등으로 날 실컷 괴롭히다가 죽일 거 같은데……. 에이, 설마. 이 ‘하렘 어드벤처’에 오면 걔들은 나를 잡을 생각보다는 괴물이랑 싸워서 살아남는 걸 먼저 생각해야겠지. 걔들한테는 권력도 안 통해요.
여하튼 초록색 촉수괴물을 잡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나중에 가니 경험치나 아이템, 돈 등의 입수가 매우 부진했기에 썩 반길 놈은 아니었지만, 프레그넌트의 평화를 위해서도 박멸당하는 게 나은 놈들이었다.
파란색 촉수 괴물은 몸이 시퍼렇고 4족 보행을 하는 놈들이었다. 생긴 것도 개 같았지만 하는 행동도 개 같았기에 ‘개새끼’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었다.
촉수는 달리지 않았지만 다리 사이에 생식기 대신 날카로운 촉수가 있었기에 꽤 무서운 놈이었다. 그 육중한 몸으로 단숨에 덤벼들면 초록색 촉수괴물보다 더 대응하기가 힘들었으니까.
개떼 같이 몰려와 쪽수로 몰아붙이는 전법을 썼기에 다가오기 전에 최대한 놈들을 죽여야만 했다. 이놈들을 토벌할 때는 미카도 함께였기에 마법을 마구 난사했었지. 그 당시에도 난 코스튬이 없었기에 M16A1의 힘을 빌렸었다. 레벨 10이 되며 K2 자동소총도 추가됐었으니 총 두 정으로 신나게 쏴재꼈지.
그 육중한 몸으로 단숨에 덤벼드니 접근전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은 당하기도 쉽거니와,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 다른 놈들이 덤벼들면 정말 죽을 맛이었기에 두 번 다시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처럼 각각의 괴물은 장단점이 뚜렷했기에 상대하는 방법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물론 방법만 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야 훨씬 더 낫지 않은가. 대처 방법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괴물을 죽일 확률이 높아지니까.
그런데……야만족인 안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에 나타나는 괴물들은 지금까지 싸운 놈들보다 훨씬 더 버거운 놈이었다. 두 괴물의 장점을 모은 괴물이라니. 그럼……근거리와 중거리를 완전히 제압한다는 소리잖아. 뭐 어떻게 하란 거야……? 게다가 그녀들이 가진 ‘힘의 배가(倍加)’라는 것 또한 의문이었다.
“청록색 괴물은 2족 보행이나 4족 보행. 어느 쪽이든 할 수 있는 괴물이야. 괴물이긴 하지만 능력도 괴물이지. 접근전을 위해 촉수를 마구 휘두르며 달려올 수도 있고, 그 교묘한 색으로 숲과 하나가 된 채 촉수를 쓴 중거리 전투도 가능해. 어디 있는지 눈치 채기도 어렵지만 눈치 챈다고 한들 선공을 당하기 쉽지.”
하하, 완전 개판이네.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이건 완전히 차(車)랑 포(包) 떼고 두는 장기나 다름없잖아. 돌진력 강한 차(車)와 장기말을 뛰어 넘는 포(包). 말 그대로 촉수를 이용한 돌진 공격과 트리키한 공격을 보통 사람이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너 눈치는 좋네? 표정을 보니 얼마나 강한지 짐작이 가지?”
멍청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대답이 안 나왔다. 세상에……그딴 놈들을 상대로 어떻게 이기란 말이냐? 내가 설령 코스튬을 입은 상태라 하더라도 놈들한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 장담할 수가 없었다. 투영마술도 마력을 쓰는 ‘마법’으로 취급될 테니까. 데미지는 줄어들겠지.
“힘도 괴물인데 하는 짓도 괴물. 마법은 잘 안 먹히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란 말이지 이게. 더군다나 이놈들, 이 지역에서 벗어나지도 않아. 여기 있으면 우리 야만족을 먹을 수 있다는 걸 학습한 거겠지. 정말 더러운 새끼들이라니까?”
웃음을 띤 채 뱉는 말에는 경멸과 증오가 섞여져 있었고 주변의 야만족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들 또한 안즈의 말에 동의하면서 힘들었던 과거, 죽었던 동료들을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이럴 수가? 우리한테도 놈들한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답니다! 그 방법이란 바로 「힘의 배가」라는 능력이었지! 우리 야만족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힘이자 능력! 그 능력을 쓴다면 상대가 청록색 괴물이라 해도 전혀 꿀릴 게 없었어. 몇 마리가 오든 단숨에 죽일 수 있었지!”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능력이지만 모르는 게 당연했다. 이 ‘하렘 어드벤처’는 세상의 창조부터 시작해 신의 개념이나 떨어진 마을의 정보 등을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저 ‘힘의 배가’라는 능력 또한 그냥 [마력은 약하지만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었으니 오죽할까.
“힘의 배가는 말 그대로 힘이 강해지는 걸 말해. 하지만 위력은 2배 이상이지. 강화마법을 쓴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해져. 상상이 가? 단순히 손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종잇장 찢기듯 나무가 찢겨나간다고? 응?”
하하, 깝치면 안 되겠네. 헛웃음이 나왔다. 시발, 난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상대한테 깝싹대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하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사람들만 만나게 될까? 로라나 메이도 처음에 사이가 나빴는데 왜 내가 모든 문제에 고개를 들이밀고 해결책을 생각해야만 하는 걸까? 눈물이 흐를 거 같았다. 슬퍼서.
“저기. 있잖아.”
내가 손을 들자 발언권을 준다. 난 조금 전부터 묻고 싶어 환장할 것만 같았던 질문을 마침내 입에 담고야 말았다.
“그 능력이 강하다는 건 알겠는데……나랑 무슨 상관이야?”
바로 이거였다. 그래, 존나 강한 거 알겠다. 듣도 보도 못 한 능력이지만 그건 정보통제─그 머리 하얀 미친년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 그 년이 또 일의 흑막이겠지─ 때문에 그런 거라고 쳐. 근데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힘의 배가인지 뭔지 모를 그 강려크한 힘으로 적을 모조리 찢어발겨서 평화를 되찾고 싶다고? Go ahead! 마음대로 해! 나랑 관계없잖아?
애초에……자기들 지역의 문제에 왜 나를 꼴아박는 건데? 내가 칩이냐? 도박할 때 부족하다 싶으면 목숨 대신 거는 칩이냐고? 이게 무슨 '하렘 어드벤처 - 철혈의 오펀스'냐? 번지수 잘못 찾았다고, 시발!
힘의 배가? 그래, 좋다. 마음껏 써라.
청록색 촉수 괴물? 그래, 다 죽여라.
근데 나는 대체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입 닥치고 좀 들어봐. 아직 이야기 안 끝났으니까.”
“네.”
이야기를 끊긴 것에 대해 불만을 토하자 난 얌전하게 대답했다. 아, 힘없는 나약한 남자. 그 이름은 신세린! 이걸 보고 있는 독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힘 앞에서 사람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특히 폭력과 권력 앞에서는. 내가 어쩌다 이 꼬라지가 됐을까? 내 기구한 팔자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지만…….
“힘의 배가는 정말 굉장한 능력이야. 강해지는 건 신체능력뿐만이 아니거든. 힘의 배가가 발동되면 적은 마력을 쓰더라도 효율이 고위급 마법급으로 올라가. 약한 마법이 순식간에 몇 배 이상으로 강해진다는 거지.”
쩔어주는군. 그 이야기를 들으니 ‘힘의 배가’라는 마법에 대한 본질이 점점 보이기 시작한다. 이건 부스트(Boost) 혹은 버프(Buff) 계열의 힘이군. 그것도 신체능력뿐만 아니라 MP의 효율이나 마법 위력까지 뻥튀기 해주는 초고급 스킬이었다.
부스트나 버프. 말 그대로 어느 능력이나 위력을 기존보다 더욱 더 올려주는 성질의 능력은 RPG나 격투 게임 등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빈사 상태에서는 공격력이 1.5배 이상으로 늘어난다거나 하는 시스템도 있었고, 캐릭터의 에너지가 적으면 적을수록 필살기의 위력이 올라가는 각성 시스템 등도 존재했었지.
야만족이 지닌 ‘힘의 배가’는 그런 각성이나 공격력 상승 시스템과 매우 비슷한 성질의 것이었다. 신체능력의 경우 단타(單打)라고 해야 할까. 마법을 쓰지 않는 대신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고, 마법의 경우 연타(連打)라고 칭해야 할 거 같았다. 으음……저 말을 들으니 좀 걸리는 게 있는데. 다시 손을 들었다.
“또 이상한 말 하면 때린다?”
아, 이 미친 여자 보소! 지 마음에 안 들면 때린다니! 어떻게 생겨먹은 인성이냐? 부모 얼굴 보고 싶구만! 분노를 간신히 참으며 마음에 걸리던 것을 뱉었다.
“그, 그런 대단한 걸 막 쓰면……몸에 이상이라든가 있지 않아? 쉽게 지친다거나 사용 후에 일정 시간 동안 마법을 못 쓴다거나 하는…….”
내 말을 듣자 주변이 웅성거렸다. 아무래도 정답 같군. 하긴……그런 강력한 힘에 아무런 대가가 없을 리가 없잖아. 생각이 들어맞았지만 별로 기쁘지는 않았다. 날 데려온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만 능력의 단점은 알게 됐으니까.
“역시……넌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유능한 놈 같네. 맞아. 우리가 가진 ‘힘의 배가’. 통칭 「배가 능력」은 자기 꼴릴 대로 마음껏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냐. 쓰기 위해서는 많은 힘을 필요로 하지.”
역시……. 오히려 당연한 거였다. 강화 마법보다 더 강한 것도 모자라 마법의 위력까지 바꿔주고, 등가교환의 법칙마저 무시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효율 변환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펑펑 쓸 수 있다면 뭐 하러 지금까지 괴물한테 당했겠냐?
앞서 말했듯이 에너지가 빈사 상태로 떨어지거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부스트나 버프 계열 스킬을 발동시킬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따른다. 바로 ‘에너지가 빈사 상태급으로 떨어진다’거나 ‘일정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아무런 대가 없이 부스트를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마블 코믹스의 유명한 주인공 [스파이더맨]에서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았던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그것과 마찬가지다. 강한 힘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강한 제약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다양한 매체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유유백서(幽☆遊☆白書), 헌터X헌터(HUNTER×HUNTER) 등으로 유명한 작가, 토가시 요시히로(冨樫義博)의 경우 그러한 제약이나 조건을 잘 나타냈다. 능력자 배틀물로 유명하기도 했기에 나도 접해본 적이 있었지.
능력자 배틀물과는 다르지만 배틀물의 왕도라 하면 역시 드래곤볼 아니겠는가? 토리야마 아키라(鳥山明) 선생의 드래곤볼에서는 계왕권, 초사이어인 3, 퓨전 등에서 그러한 제약이 나타난다. 강한 힘을 아무 대가 없이 뻥뻥 축구에서 공을 뻥 소리 나게 차듯이 마음껏 쓸 수는 없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야만족이 지닌 배가 능력은 그러한 능력과 같았다. 부스트든 버프든 간에 강한 힘을 아무런 제약 없이 쓸 수 없기에 이런 상황에 직면한 거겠지. 그녀들이 웅성거리는 이유는 내 질문(이자 생각)이 맞아 떨어졌다는 좋은 증거였다.
“배가 능력은 함부로 쓰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능력이야. 그렇기에 우리는 전투를 할 때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만들고 싸워야만 해. 능력이 강하다지만 영원히 쓸 수는 없으니까. 능력을 최대한 온존시켜 놨다가 일망타진이 가능하다 싶으면 주저 없이 써서 죽인다. 그게 바로 야만족의 싸우는 방법이야.”
호오, 대단하군. 강한 능력을 지녔지만 거기에 의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든 뒤, 최소한의 시간으로 최대한의 효율 및 성과를 꾀한다라……. 시간 및 자원의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방법. 마음에 드는데?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어느 세상에 가든 존재하는 거 같았다. 이들의 전법이 그러했다. 이길 수는 있지만 그 방법에 너무 의존하다간 언젠가 큰 수모를 겪게 되겠지.
이길 수 있는 방법을 항상 쓰기보다는 필요한 때에 쓰는 것이 자기들로서도 좋을 것이다. 몸에 무리도 별로 안 갈 테고.
“배가 능력은 우리한테 있어서는 한줄기 빛이나 다름없었어. 괴물이 나타나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어.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배가 능력의 사용을 최대한 줄이면서 싸우거나, 아니면 그 능력을 써서 단숨에 도망칠 수도 있었어. 전투와 도망. 어느 쪽이든 유용하게 쓸 수 있었기에 그 가치는 더욱 높지. 하지만…….”
칭찬 일색이던 안즈는 지금까지 보여준 그녀의 모습에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그 결연함에는 현실에 대한 원망과 슬픔이 들어 있었다.
“말했지? 이 능력은 잘못 쓰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마력을 써서 발동하는 마법과 달리 이 능력은 우리의 신체능력을 활성화 시키는 힘이야. 신체능력뿐만 아니라 마력의 효율까지 높여주니 아예 모든 능력 자체를 보다 활성화시킨다고 해야 하나? 이런 능력을 많이 쓰면 쓸수록 우리의 몸은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해?”
잔혹한 질문에는 잔인한 대답이 어울리겠지. 내가 생각한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떠오른 대답을 뱉지 않고서는 있을 수가 없었다.
“능력이 몸을 갉아먹어 점점 약해지거나……심해지면 죽겠지.”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라. 니가 물어놓고 왜 그러냐? 슬픈 현실이라는 건 인정한다만 내가 그런 거 아니거든? 이런 현실을 만든 적도 없고 강요한 적도 없거든요?
“……맞아. 이 능력은 우리한테 있어서는 한줄기 빛이었지만 몸을 갉아먹는 저주이기도 했지. 적당히 쓰면 괜찮지만 숲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당히’라는 기준에 맞추어가며 싸울 수는 없었어. 좋든 싫든 써야 했고 그 결과는 몸과 목숨으로 치러야 했지.”
안타까운 현실이다. 프레그넌트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괴물 때문에 죽었는데 야만족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인해 죽은 거니까. 그 간접적인 책임은 괴물한테 있었기에 어느 쪽이든 간에 괴물은 쳐죽여야만 하는 쓰레기였다.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되지 않는 쓰레기. 재활용조차 불가능한 쓰레기다.
“옛 선조들부터 이 배가 능력에 대해 알아본 결과, 능력을 쓰기 위해서는 마력이 아니라 다른 것을 필요로 했지. 그건 바로 체내에 있는 에너지였어.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농축된 에너지. 그러한 에너지를 끌어서 써야만 발동할 수 있는 힘이었지. 신체능력과 마력을 활성화시키는 배가 능력을 쓰는 데에 필요한 게 뭐인지 알아?”
아……왜 난 내가 원하지 않는 일에 이토록 휘말릴까?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젠 점점 이야기가 서로 연결됐기에 그 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이들이 ‘생명의 씨앗’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인력(人力)을 소중히 여기는 중세시대의 가치관부터 시작해 아기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구하고 있다 생각했었지.
근데 이야기를 들으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체력도 아니고 마력도 아닌데 능력을 활성화시켜주고 배가시켜주는 힘. 그 힘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나를 데려온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으니까.
“생명 에너지……겠지.”
내 나지막한 한 마디에 안즈와 키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답이냐?
“……아, 아하하하! 그래! 아주 정확해! 정말 대단한데? 설마 이렇게 단번에 맞출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거든? 아, 하하하핫! 아하핫! 미, 미안! 진짜 미안! 야아~이거 내 눈도 영 아닌 거 같아? 이런 인재를 몰라보다니!”
“아니, 인재까지는 아니고. 그냥 듣다 보니 그렇게 생각한 건데…….”
괜히 유능한 사람 취급 받아서 이 이상 고생하는 것은 사양이었기에 재빨리 둘러댔다만 듣지는 않는 거 같군. 망할. 자기 할 말만 하고 필요한 말만 듣다니. 쩔어주는 고성능 청각을 가지고 계시구만요, 아가씨?
그나저나……망했군. 생명 에너지라니. 말이 좋아 생명 에너지지. 내가 말한 생명 에너지는 바로…….
“이제 이해가 가지? 우리가 너를 잡아온 이유. 간단해. 아기 씨앗을 생산해줘야겠어. 우리를 위해 영원히. 저 괴물들을 쓰러뜨릴 때까지. 배가 능력을 위해 에너지로 쓰일 아기들을 말이지…….”
미쳤군.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마 싶었는데 사실이라니. 말도 안 돼. 웃음이 터져 나왔다만 웃겨서 웃는 게 아니었다. 기가 막혀서 웃는 거였다. 세상에. 이게 말이 돼?
“생명의 씨앗부터 시작해 내 정액이나 캡슐로 임신하는 아이들을 모조리 배가 능력의 에너지원(源)으로 삼겠다……이 말이지?”
비릿한 웃음을 띤 채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안즈를 보니 더욱 더 절망이 느껴진다. 미쳤어. 어떻게 이런 능력을……아, 아니다. 능력을 준 건 어쩔 수 없었다 치자. 살아남아야 하니까. 어떻게 하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아기가 무슨 쓰다 버리는 1회용 생필품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럼……아기는? 태어나지 못한 채 에너지 원으로 쓰이다가 죽은 아기는 어떻게 할 거야?”
도덕적인 공격을 담은 내 질문에 안즈는 뭘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으로 받아쳤다.
“어떻게 하기는……뒤져야지. 괴물을 모조리 말살시키지 않으면 아기를 낳아도 죽을 거야. 어머니인 우리를 위해 한 목숨 바쳐 함께 싸우는 거니 불만은 없을 거야♪”
“……하, 하하…….”
내 자지는 불끈거리고 있었다. 욕정이 들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와 매우 비슷한 상황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이건 마치 예전의 내 모습이 아니던가?
아버지인 내 자지에 찔리는 것만으로 죽어버리는 나약한 아기라면 자지로 찔러 죽이겠다며 미친 짓을 벌였던……성욕에 지배당할 대로 지배당해 인간성을 잃어버렸던 신세린. 바로 나와 똑같았다.
성욕에 지배당하거나 격렬한 섹스가 한창일 때는 모두가 다 미쳐버린다. 나든 내 아내들이든 간에 자기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도 알 수 없게 되고, 그러한 폭언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나중에 조금씩이나마 수치심과 반성을 느끼게 된다. 일시적인 성욕이 폭발해버린 탓에 그랬던 거기에 깊게 추궁하지는 않는다. 우린 그런 생물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안즈는……그런 성욕이 아니라 파괴욕에 물든 광전사 같았다. 어떻게 저런 끔찍한 말을 가볍게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성욕 때문에 그런 거라면 이해가 간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저 여자는 멀쩡한 맨정신으로 저딴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다!
어떻게 저런 미친년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었지만, 그런 그녀를 범하고 싶다고. 저런 여자와 하나가 되고 싶다며 성욕을 내뿜으려 하는 자지에 분노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안 돼……!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아기를 그런 식으로 죽이다니!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는 거야!? 임신을 하게 된 순간부터 너희는 엄마야! 아이의 엄마가 된다고!”
“아니. 그건 틀린 말이야.”
안즈는 내 눈높이에 맞도록 한쪽 무릎을 꿇었다. 풍만한 가슴이 보였지만 지금 내 눈은 거기에 집중할 때가 아니라며 앞을 보게 만든다.
광기(狂氣)에 물든 눈동자. 살아남아 소중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다른 소중한 것들을 희생시키려 하는……모순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마주치자 당장이라도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죽을 아기를 낳기 위해 몇 개월간 누워 있을 병신은 없거든……? 한 아기의 엄마? 그 소중한 아기를 지키지 못해 시체를 끌어안고 슬퍼할 바에야, 영원히 엄마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배가 능력에 쓰이는 게 훨씬 더 낫잖아? 응? 모두도 그렇게 생각하지?”
안즈가 주변을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자 모두가 그렇다고 했다. 개중에는 주춤거리거나 머뭇거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함부로 거부의 의사를 표현하지는 못하는 거 같았다. 키리 또한 표정을 구긴 채 한숨을 쉬고 있었기에 독재자의 기질이 있긴 있구나 싶었지.
……그리고 난 그 빌어먹을 독재자한테 뼛속까지 이용당하게 생겼고. 내 인생은 왜 이따구인가 진심으로 깊게 생각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은 없을 거 같다. 앞으로 이용당하느라 바쁠 테니까.
“알아들었지? 모두 다 같은 마음이야♬ 이제부터 니가 우리한테 주입할 아기 씨앗을 마음껏 유용하게 써줄 테니까……각오해? 우리 아기 씨앗 제조기님……쪽♥”
“읏……!!”
귀여운 말투였지만 그 내용은 영혼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살인마의 것이었다. 그런 잔인한 말을 하면서 앵두 같은 입술로 내 귀두에 키스를 했고, 아주 예전에 봤던 메시지가 떠오른다.
[마력이 봉인된 상태이므로 ‘자지의 맹세’는 발동할 수 없습니다. ‘안즈’의 스테이터스 파티 추가는 무효가 됩니다.]
망할……. 자지의 맹세를 쓸 수 없고 마력마저 봉인 당했기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 이용당한다는 것뿐이었다.
“참! 마법을 쓸 수 없도록 수갑을 채워 놨는 거 알지? 혹시나 힘이 강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스스로 자기 딸보다 약하다며 떠벌리는 걸 들었을 때는 정말 웃겼다니까? 엄청 비웃고 싶었던 걸 꾹 참아야 했던 거. 알아?”
모른다, 시발년아……. 그 한 마디가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참아야 했다. 아직도 입이 비릿한데 또 피맛을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제 곧 아기 씨앗을 받아가겠다며 웃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했다.
‘얘들아……구해줘……!!’
자기 아내들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한심한 남편이라니. 그치만 믿을 게 그거밖에 없었다. 내 힘으로 무언가를 못 하는 이상 아내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사라진지 이미 몇 시간 이상이 지났을 테고 안즈의 모습 또한 없을 테니 납치당한 건 금방 눈치 챌 거라 생각된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아내들의 도움을 바라며 난 눈을 감았다. 앞으로 닥쳐올 수난을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눈을 감는 게 내 정신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희생시키기 위해, 배가 능력을 위한 에너지 공급원으로 쓰이기 위해서 자궁에 착상될 아이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헌터X헌터는 확실히 재미있지만 누군가 ‘헌터X헌터는 존나 개명작이죠?’라고 묻는다면 전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재미는 있는데 평생을 바쳐 기다릴 정도로 개명작은 아닙니다’라고.
아,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전 어디까지나 주관적으로 대답하고 있을 뿐이지, 모든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거나 저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정말 그냥 개인적 생각입니다.
워낙 휴재가 잦고 하니 헌터X헌터는 사실상 떡밥이나 네타로 쓰이는 게 더 많을 정도입니다. [유유백서를 연재할 때 편집부와의 불화+일 안 해도 놀고먹을 수 있는 자산+허리 통증 등]으로 거의 휴재에 가깝게 된 헌터X헌터입니다만……예, 재미있어요. 능력자 배틀물을 정말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적과 자기 능력의 차이, 상성 등을 단숨에 꿰뚫고 싸움에 임하는 모습은 사물이나 사람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는 교훈도 주죠. 유유백서 후반부터 나왔던 ‘영역’이라는 이름의 능력 배틀물을 보다 심화시킨 거라 볼 수 있겠죠.
헌데 그것도 어느 정도껏 해야죠. 잦은 휴재에 애니메이션 리메이크, 러프 원고를 잡지에다 그대로 올리는 만행 등. 재미는 있지만 꾸준히 연재되고 있는 작품들에 비하면 성의도 없고 재미도 점점 없어졌습니다.
까놓고 말해, 단 한 번도 휴재한 적이 없는 강철의 연금술사 쪽을 더 높게 쳐줘야겠죠. 그림체, 스토리, 전개, 떡밥 회수, 성실성 등. 어딜 보더라도 강철의 연금술사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강철뿐만 아니라 쟁쟁한 작품들도 많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나루토나 블리치였지만 그 꾸준함이나 파격적인 전개는 헌터X헌터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대놓고 몇 년 동안 휴재는 안 했잖습니까.
엉망이긴 해도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줄 아는 사람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아주 개엉망도 아니었구요. 그렇게까지 개엉망에 이익도 못 뽑아냈다면 나루토나 블리치가 장기연재 됐을 리도 없구요. 원나블(원피스+나루토+블리치)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그리고 그 말 안에는 헌터X헌터는 없었습니다.
뛰어난 능력은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나 공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실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더 아름답게 보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삶을 더 높게 쳐주고 싶네요.
헌터X헌터랑 좀 다르긴 합니다만 에반게리온처럼 엄청나게 많은 뜻과 떡밥 넣고 ‘ㅎㅎㅎ내 멋진 작품에 사람들이 얼른 보고 싶다며 소란을 피우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감독이나 원작자가 있으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응, 아냐 시발^^ 그거 외에도 볼 거나 즐길 거 존나 많거든?
무한경쟁사회에서 노력 안 하고 과거의 영광에 젖어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정말 특출 난 사람이 아니면 그 시간의 흐름에 뒤처지기 마련이구요. 인기는 여전히 있지만 자기 위치에서 노력을 안 하고 무조건적인 호응과 사랑만을 원하는 사람은 싫어합니다. 진짜 팬이라면 깔 줄도 알아야 할 거 아니겠습니까.
아! 물론 제가 헌터X헌터나 에반게리온의 광팬이라는 건 아닙니다. 안 나와도 상관없고 크게 의미 파악을 하려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거든요.
……근데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후기가 이렇게 삼천포로 빠졌을까요. 참으로 모를 일입니다. 맛간 후기가 아니라 삼천포 빠지는 후기로 바뀌게 생겼네요. 가능하면 맛간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냥 한숨만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