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1 「13-10 : 왜 내 인생은 늘 이러냐……? (6)」 =========================
섹스할 때 똥이나 오줌, 토사물에 범벅이 된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아내들이 이겨낼 수 없을 정도의 충격과 쾌락을 신체 내부에 주입하면 그 반동이 튀어나온다는 걸 알 수 있는 좋은 예시였지. 그렇다고 내가 그것들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똥이나 오줌을 좋아하는 사람은……솔직히 말해서 별로 없잖아.
아이나의 경우 대놓고 마을 광장에서 똥을 싼 적도 있었기에 ‘똥싸개’라고 놀리기도 했지. 그럴 때마다 주먹을 날 때렸는데 요즘에는 그 주먹의 파워와 정확도가 가면 갈수록 늘어나는 게 고민이었지.
하지만 그 고민도 오늘로 끝이었다. 아이나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게 내 배를 때린 년이 있었으니까. 바로 내 눈앞의 썅년, 안즈가 말이지.
“자, 그럼……슬슬 이야기를 시작할까? 거 봐, 키리. 한 대 때리니까 고분고분해졌잖아? 말 안 듣는 새끼는 때려야 제 맛이라니까? 꼭 이렇게 개기다가 한 대 처맞아야 말을 듣는 새끼가 있어요.”
시발년……저 말은 그야말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말하던 것과 같았다. 바로 ‘조선놈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였지.
웃기고 있네. 폭력 앞에서 굴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너 된다고 저딴 말을 지껄인단 말인가? 말 안 들으면 죽일 거고, 죽는 게 싫으니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르는 걸 저딴 식으로 해석하다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까 물었지?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간단해. 내가 너를 여기로 데려왔거든. 너 진짜 약하더라? 그냥 배에 주먹 한 대 꽂았는데 기절하다니. 너무 약한 거 아냐?”
원래부터 조롱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웃으면서 말했기에 날 놀리는 느낌은 더욱 강했고, 그 말을 들은 몇 명의 야만족들은 킥킥대며 나를 비웃었다. 안즈 또한 자기 말에 반응해주는 그녀들을 보며 즐겁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야 뭐……괜히 반항했다가 처맞기 싫으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그치만 느낌이 이상한데……. 다들 농담 섞인 안즈의 말에 킥킥대고 있었지만 키리라는 여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랑 무슨 원수진 것도 아니고 오늘 처음 봤는데 왜 저런담……? 비웃는 거보다야 낫지만 저렇게 보니 좀, 쪽팔린다. 안 그래도 발기가 된 상태인데.
“그래, 니가 제일 묻고 싶은 건 여기가 어디냐 뭐 그딴 게 아니라……‘왜 너를 데려온 건가’겠지? 간단해. 이전에 말했잖아? 야만족 모두를 임신시켜줬으면 한다고. 그것뿐이야.”
어이가 없었다. 그, 그것뿐이야? 데리고 온 이유가? 아니, 잠깐만! 내가 캡슐 준다고 했잖아!? 너 그때 내 이야기 안 들었냐?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거 같았지만 그래도 뭐라고 말해야만 했다.
“그, 저어…….”
“오, 그래. 말해봐.”
존댓말 쓴다고 해서 한심하다고 말하지 마라. 너희가 대신 맞아볼래? 성인 남성이 단숨에 토하게 만들 정도의 위력이다. 게다가 날 약하다고 했으니 힘의 가감(加減)을 했다고 봐야겠지. 쟤 입장에서. 내 입장에서는 뭐든 간에 토하게 만드는 강려크한 펀치였으니까.
“그……캡슐을 드린다고 하셨던 거. 기억하세요?”
“응. 근데 왜?”
근데 왜는 무슨 ‘근데 왜’야, 병신 같은 년아……. 정말 울고 싶었다. 사람이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 일일이 다 분해해서 설명해줘야 하는 거냐.
진짜 어쩌다가 이런 사람들만 만나게 되는 걸까? 날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들과 이렇게 자주 만날 수 있다니. 이것도 어찌 보면 재주였다. 원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발동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닌데 발동되는 재주.
말귀를 못 알아듣는 멍청이한테 관대한 태도로 설명해주자……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그래, 참자. 참아서 남 주냐? 다름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참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최대한 정중한 어휘를 구사한다.
“캡슐을 쓰면……그. 제가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이 임신이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응. 근데?”
바보 확정이다. 안나나 니나조차 이렇게 바보는 아니었는데. 아니, 그래도 걔들은 사람으로서의 양심은 있었지. 납치를 미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안나와 니나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납치했던 거지. 얘는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납치범이 자기 목적을 제대로 말 안 해주면 인질은 어떻게 하란 말이냐? 협상이 인질이 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최소한 뭘 바라는지 정도는 말을 해야 해결 방법을 찾지! 게다가 난 이미 해결 방법을 말했다! 캡슐이라는 훌륭한 해결 방법을 말했는데 ‘근데?’라니? 내가 더 묻고 싶다!
“그, 그런데 왜 저를 데리고 오신 거죠? 제가 오는 것보다 캡슐을 써서 모든 분들을 임신시키는 게 훨씬 빨랐을 텐데요. 이, 이렇게 데려 오셔도 마법을 쓰지 못하면 전 아무것도 못 해요.”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폭발해버리면 다시금 그 철권을 맞겠지. 폭력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당하는 것도 싫었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어휘를 사용해야만 했다. 오죽하면 ‘납치’가 아니라 ‘데려오다’라는 말을 썼겠냐?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나는 은근히 ‘마법을 쓰면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마법만 쓸 수 있으면 당장에 텔레포트를 써서 프레그넌트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 이놈의 빌어먹을 마법봉인수갑만 아니었더라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고도 남았을 텐데……망할! 우라질!
“아아, 그거? 이제 필요 없어.”
“네? 피, 필요가 없다뇨?”
불길한 상상이 떠오른다. 에이, 설마. 설마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겠어? 안나와 니나 때도 그랬지만 납치범이 인질 혹은 바라는 석방 요구는 사람들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것이었다. 설마 이번에도 같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기에 재빨리 그걸 부정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진짜 일어날 거 같았으니까.
“앞으로 평생 여기 있을 텐데 뭐 하러 그딴 걸 써? 귀찮게시리.”
“……네?”
잘못들은 거야……그래. 잘못들은 것이고말고. 난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이는 그녀한테 다시금 되물었다. 에이,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내 청력도 많이 안 좋아졌구만. 2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말하는 걸 잘못 듣다니. 응, 그래. 내 귀가 병신인 거다. 그러니 제발……!
“말했잖아? 넌 앞으로 평생 여기 있을 거라고. 앞으로 우리 야만족한테 아기 씨앗을 제공해야 할 테니까……잘 지내보자?”
끝났다. 영특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어왔던 내 대가리는 단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나한테 게임 종료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 미친 여자는 지금 진심으로 저딴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옷을 벗긴 것도, 마력봉인수갑을 씌운 것도. 나를 이렇게 거칠게 다루면서도 죽이지 않는 것도. 모두 아기 씨앗을 위한 것일 뿐. 말 그대로 ‘노예’나 다름없었다.
난 좀 더 희망적이며 건설적인 미래나 목표. 하다못해 모든 사람들을 임신시키면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대답이라도 원했지만 안즈는 자기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만 한 후 방긋거리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던진 현실 좆망의 메시지에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마, 말도 안 돼요……! 전 아내가 있어요! 아내들이 있다구요! 게다가 곧 태어날 아이들도 봐야 해요! 저, 저를……저를 풀어주세요!”
난 아내들과 곧 태어날 아기까지 들먹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비겁한 짓이 아니잖아! 비겁한 건 납치를 한 저쪽이라고! 이제 아이들이 태어날 때까지 3~4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런 일을 당하다니!?
이딴 일을 당했는데 ‘아, 그렇군요. 앞으로 평생 여기서 아기 씨앗을 제공해 드릴게요’라고 말할 수 있는 놈이 있다면 그 새끼가 미친놈이지!
내가 눈물을 흘리자 더욱 더 비웃는 소리가 커졌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난 프레그넌트로 가야 해……!! 이런 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렸지만 닦을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딴 건……!
“아아, 걔들? 뭐 어때? 니가 없어지더라도 당장 아기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게다가 말이지……그렇게 배가 불러오는 여자들을 보니 나도 참을 수가 없었거든! 좋은 건 나눠 가져야 하지 않겠어? 각 마을뿐만 아니라 여왕까지 임신시킨 아기 씨앗이라니! 최고잖아? 우리 야만족을 모두 임신시키고도 남을 아기 씨앗을 만드는 너를 두고 오다니, 그거야말로 바보짓이잖아?”
고혹스러운 그 말에 내 물건은 더욱 더 분기탱천하며 불끈거렸지만 그건 흥분해서 그런 거다. 절대 저년한테 반해서 그런 게 아냐! 난 존댓말을 써야 한다는 것조차 잊은 채 억울함과 분노를 토해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을 테니까!
“풀어줘! 풀어달라고! 이런 건……이런 건 말 안 했어! 이게 대체 뭐야!? 난 집에……억, 컥! 아극! 어컥!?”
반항하는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해져 온다. 손과 발로 때리는 것뿐인데 마치 몽둥이로 맞는 듯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난 내가 맞았는지 어떤지조차 모를 정도로 무력했다. 막을 수도 없지만 온다고 해서 어디를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조차 모르는……나약하디 나약한 인간이었다.
자신에 대한 반항이나 저항은 일절 용서하지 않겠다는……겨울 찬바람 같은 매서움 주먹과 발차기에 맞자 피, 침, 콧물, 눈물이 얼굴을 더럽혔다. 일말의 주저함도, 자비도 없는 공격을 맞으며 깨달은 거라면……매우 단순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이 여자는 쓰레기다……!! 자기 욕망을 채울 수 있다면 뭐든지 다 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쓰레기일 뿐만 아니라 미친년이기도 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을 납치한다는 것에 이토록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
미친년에 쓰레기라는 조합에서 이미 최악의 끝을 달리고 있었지만 나를 더욱 더 분노케 만드는 것은……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이딴 년한테 설설 기어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시발! 어떻게……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목숨 걸고 프레그넌트에 평화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한테 생명의 씨앗을 대체할 캡슐까지 줬는데! 모든 게 평화롭고 행복하게 흘러가야만 했는데 어쩌다 이딴 미친년이 나타나 나를 납치하게 됐단 말인가!? 참으로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고기도 씹어 본 놈이 맛을 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무슨 일이든 조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보다 낫다’라는 뜻이다. 내가 사자성어나 속담을 풀이해주는 사람은 아니니까 원래 뜻과 좀 다를 수도 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정확한 뜻풀이가 아니었다. 바로 내 처지였지.
이미 한 번은 납치를 당해봤으니 상대방이 어떠한 사람인가, 무엇을 원하는가,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이게 무슨 꼬라지인가? 그 모든 생각과 노력, 꿈꾸던 미래가 모조리! 와장창 소리를 내며 부셔졌는데!? 다 아무 짝에 쓸모가 없는 것들로 변했다는 말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자세와 정신. 그것만으로도 이미 최악이건만 강력한 힘까지 주다니!
안즈가 저 키리라는 여자와 친분이 있으면서도 대신 뜻을 말해주는 걸 보니 높은 자리에 있는 거 같은데……독재자 타입이 아닌가 싶었다. 빌어먹을. 헬조선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왜 난 매일 독재자만 만나냐…….
“이제 니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잘 알았어? 그 마을에서는 니 뜻대로 행동할 수 있었겠지만 여기서는 입 하나 잘못 놀려도 이 꼬라지가 날 거야. 앞으로 명심해야 해? 건방진 행동을 여러 번 하다 보면 짜증나서 죽일 수도 있으니까. 알겠지?”
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하고 싶지도 않아서 고개를 끄덕인 것도 있지만 입 안에 피가 가득 있어서 열기도 좀 뭐 했다. 기침을 하니 침과 피가 쏟아졌고 그걸 보자 안즈는 흡족한 듯 웃음을 지었다. 개 같은 년……!!
“어,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아, 씨발. 이 새끼 입이 씹창 나서 말도 잘 못 하잖아. 키리,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이야기보다는 날 때리는 게 더 중요했다 이거군. 그 이야기를 듣자 내가 왜 이런 곳에 끌려와 이딴 취급을 받아야 하나 싶었다. 키리는 한숨을 쉬더니 ‘그 약해빠진 놈 데리고 와서 아기 씨앗 얻는 거’라고 했다. 약해빠진 건 말 안 해도 된다니까…….
“아, 맞아. 그래. 그랬지?”
자기가 말해놓고도 잊어먹는 걸 보니 꽤나 다혈질이군. 키리는 답답하다는 듯 스스로 나섰다.
“하아……안즈. 그냥 왜 데려왔는지에 대해 먼저 설명해. 안 그러면 또 날뛰잖아. 어차피 날뛰지도 못하는데 설명 한 번 해주면 다 알아먹겠지. 목숨 아까운 줄 알면 또 덤비겠어?”
……착각인가? 키리라는 여자의 말은 다르게 해석하면 ‘말해줄 테니까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라. 또 대들면 죽을 수도 있다’라는 말 같았다. 너무 처맞아서 머리가 이상해진 걸까……. 안즈는 그 말도 일리가 있다는 듯 알았다고 대답했다.
“내 말 들리는 거 아니까 잘 들어. 너 같이 나약한 놈을 우리 숲에 데려온 이유, 궁금하지? 설명해줄 테니까 조용히 잘 들어야 한다?”
고개를 끄덕이자 ‘응, 그래야지!’라며 웃었다. 내가 기특해서 그런 게 아니라 ‘역시 노예는 맞아야 한다니까? 그래야 자기 주제를 알지!’라는 기쁨이 담뿍 담긴 웃음이었기에 더욱 더 이가 갈렸다. 하지만 대놓고 이를 갈 수도 없고 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럼 뭘 할 수 있냐고? 바로 ‘잊지 않는 것’이지.
두고 봐라……안나와 니나는 불쌍해서 용서해줬다만 네년은 얄짤 없다. 내가 비록 마음이 약한 것도 있고 무른 부분도 있지만 네년한테만은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 이런 짓을 한 걸 대대손손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고개를 숙인 채 그런 생각을 하니 그나마 상태가 좀 나아진 거 같았다. 내 반항적인 표정을 보면 또 마음에 안 든다고 팰 수도 있었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았기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나았다.
“자, 그럼……즐거운 이야기 시간이네. 우리 야만족에 대해 아는 거 있어?”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위해 나한테 질문을 하다니. 시발, 안 그래도 입 안에 피가 고여 비릿한데 너 같으면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겠냐? 난 간신히 마력은 약하지만 굉장한 힘을 가졌다는 걸 말했다.
“그래, 그게 야만족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겠지. 우리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해. 이야기를 안 하니까.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겠지만……. 자!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세린을 위해 야만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게요♪ 내가 왜 널 데려왔을까?”
“……임신을 위해서.”
간신히 뱉은 게 여섯 글자라니. 나도 어지간히 힘든가 보군.
“음, 정답에 들어가긴 하지만 완벽한 정답은 아냐. 하긴, 이야기도 안 듣고 답을 바로 맞히는 게 이상한 거겠지. 잘 들어? 우리 야만족은 말이야……보통 사람들이 말대로 마력은 약하지만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그 강한 힘이 뭐라고 생각해?”
모른다고 답했다. 알면 여기 왔겠냐 내가……? 겨우 몇 글자 말할 때마다 비릿한 입이 공기와 맞닿아 따끔따끔했기에 미칠 것만 같았다. 당연한 소리지만 안즈는 내 사정 따윈 신경도 안 쓴 채 이야기를 진행했다.
“모르는 게 당연하지. 음, 따지고 보면 니가 우리 야만족의 비밀을 알게 되는 첫 번째 사람이 되는 거네?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만 중요한 건 ‘알고 있다’는 거거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정말 딱이라고 생각 안 해? 우리한테 아기 씨앗을 제공하면서 함께 살아갈 사람. 서로의 비밀을 알고 있는 관계라……응, 괜찮네.”
난 안 괜찮아, 시발년아……. 쿨럭거리자 안즈의 이야기 속도가 빨라진다.
“우리 야만족은 말이지, 마력은 약하지만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어. 그게 뭐냐 하면 말이지……바로 「힘의 배가(倍加)」야.”
그 말을 듣자 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힘의 배가……? 그게 무슨……?”
배가? 배가(倍加)라면 두 배로 늘리는 그런 거 말하는 건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뜻이었다. 힘을 배가시킨다니?
단순히 완력을 강하게 만드는 거라면 강화 마법만 써도 충분하다. 강화 마법을 써도 힘은 강해지는데 그게 야만족의 비밀이라고? 내가 이런 고민과 생각에 빠져 있는 걸 눈치 챈 건지 안즈는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아. 니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아. 강화 마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그렇게 놀랍다는 표정 지을 필요 없어. 마법사가 생각하는 거 정도야 쉽게 알아맞힐 수 있으니까. 확실히 말해둘게. 그딴 거랑 똑같이 취급하지 말라고. 기분 더러우니까. 우리가 말하는 ‘힘의 배가’란 너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위력이야. 이 부근에 무슨 괴물이 나오는지 알아?”
대부분의 질문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걸 묻는데 ‘응, 알아!’라고 대답할 수는 없잖냐. 아마 지식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있는 거겠지. 그녀는 더욱 더 즐겁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부근에는 말이지. 청록(靑綠)의 촉수 괴물이 나와. 본 적 있어?”
“청록색……이라고?”
무슨 소리야 이건……? 내가 지금까지 본 촉수 괴물의 종류는 두 가지다. 등 쪽에 많은 촉수를 가진 초록색 괴물. 날카로운 촉수 자지를 가진 파란색 괴물. 전자인 초록색 촉수 괴물은 여왕인 아스카를 포획함으로써 사실상 전멸했다. 더 이상 괴물을 낳지 않으니 식량도 없고 우두머리도 없는 그들이 아사(餓死)하는 건 당연한 결말이었다.
파란색 촉수 괴물의 경우, 부카케 주변에 있던 놈들을 미카와 함께 토벌했었기에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초록색이나 파란색이라면 모를까 청록색이라니. 혹시 색을 잘못 이야기한 거 아닌가 싶어 물어봤지만 정말 청록색 같았다.
“청록색 촉수 괴물은 초록색과 파란색 괴물들의 장점을 모두 다 가진 놈이야. 수없이 많은 촉수로 멀리서 공격할 뿐만 아니라 접근전에서도 아주 강한 힘을 발휘하는 놈이지. 너희한테 있어서는 그런 괴물이 주변에 없으니 다행이겠지만 우리한테 있어서는 아주 좆같은 놈이야. 그 새끼들 때문에 죽은 동료들이 한두 명이 아니거든.”
동료들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얼굴을 찌푸렸기에 동료나 동족을 아끼는 마음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앞에서 죽은 여자나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괴물이 강하다’라는 건 정말 짜증나는 요소일 뿐, 기쁘게 여길 건덕지는 참새 눈꼽만큼도 없었다.
“저, 근데……그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야?”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기에 결국 물어버렸다. 찌푸렸던 얼굴을 다시금 피며 웃지만 이제 와서 보니 억지웃음 같다. 찌푸리고 있을 바에야 그냥 웃고 있자는 느낌이랄까. 가짜 웃음 같았기에 보고 있는 나 또한 기분이 좀 그랬다.
동료를 잃은 것에 대해 슬퍼하던 사람이 진심으로 웃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만약 웃는다면 그건 사이코패스다.
“이제 이야기할 테니까 좀 가만히 있어봐. 여하튼, 그 괴물은 정말 세. 방심을 해도 죽고 안 해도 죽을 수 있을 정도야. 그런 놈들이랑 싸우는데 맨손으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니가 우리라면 어떻게 싸울 거 같아?”
곰곰이 생각한다. 음, 그야 당연히…….
“원거리에서 마법을 쓴다……아냐?”
내 대답이 모두 킥킥댔다. 왜 저러냐? 난 그냥 대답했을 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대답은 틀린 대답이 아니었다. 그렇게 강한 놈들한테 미쳤다고 덤벼드냐? 덤벼들다간 ‘우리의 용기가 세상을 구할 거라 믿으며! ─지금까지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완(完)─’이라는 메시지가 허공에 뜰 거 같은데 뭘 믿고 돌진하겠니?
“정답이지만 틀렸어. 그놈들한테는 마법내성(魔法耐性)이란 게 존재하거든.”
“마법내성이라면……마법이 안 통한다는 거야?”
내 말에 안즈는 고개를 끄덕인다. 웃고 있지만 그 입꼬리에는 분노가 차있다. 그걸 듣자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난 어느새 내 일도 아닌 것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럼 어떻게 싸워!? 너희는 마력이 약하다며? 그런데 마법에 내성까지 있다고? 그럼……강력한 마법도 쓰기 어렵지만 설령 쓴다 해도 타격을 제대로 못 준다는 뜻이잖아!?”
……어, 응? 왜 다들 그런 표정으로 날 보냐?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에 소리를 쳤는데 모두 날 쳐다보고 있었다. 키리라는 여자도 눈을 크게 뜬 채 날 보고 있었고 안즈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사라진 상태였다. 얘들 왜 이럼?
“……어, 왜?”
하도 뻘쭘해서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이 빌어먹을 아가씨야, 물으면 대답 좀 해라. 나만 대답하냐? 누가 물으면 마음에는 안 들어도 대답 정도는 해야 할 거 아니냐…….
“너……의외로 머리 좋다?”
아, 씨발! 지금 장난치나? 다시금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내가 RPG 게임을 한두 번 해본……적은 있군. RPG는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본 적은 있다.
적한테 마법내성 속성 따위가 붙어버리면 마법사 캐릭터로는 쓰러트리기 어렵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잖아. 그건 머리 좋은 거랑은 별개다.
“뭐어, 니 말은 맞아. 마력이 약한 우리 야만족은 그렇게 고위급의 마법을 쓸 수도 없지만, 설령 쓴다 해도 제대로 된 타격을 주긴 힘들어. 그 빌어먹을 촉수 괴물은 멀리 있든 간에 가까이 있든 간에 지놈들 입맛대로 우리를 죽이지만, 그놈한테 목숨 부지하는 것조차 힘든 우리는 어디에 있든 간에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조차 없어. 가죽도 두껍거든, 그 새끼들은.”
이럴 수가. 내가 잡혀온 것은 열 받는 일이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근·중·장거리 중 장거리는 모르겠지만 근거리와 중거리에서는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는 괴물이라니!?
초록색이든 파란색이든 간에 멀리 있는 괴물을 상대할 때는 마법이 최고였다. 마법을 마구 난사하면 대부분은 케르륵 거리며 생을 마감했다. 설령 살아있다 치더라도 로라나 미카. 근거리 데미지 딜러의 활약으로 저 세상 편도행 티켓을 끊었지.
헌데 이건 아니지? 근거리에서 싸우자니 가죽이 두꺼워 데미지가 잘 안 들어가고, 멀리서 마법으로 공격하자니 마법내성이 있다고? 와, 나 같으면 진짜 미치고 팔짝 뛰고 환장하겠다!
아직 보지도 못한 그 괴물을 생각하니 분노가 끓어오른다. 나랑 관계없는 사람들이라지만 사람이 죽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반길 만한 소식이 아니었으니까.
당장은 나랑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여기 있는 야만족들이 모조리 죽는다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괴물들은 먹이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올 것이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지역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프레그넌트다. 바로 내가 있는 고향이라고! 그런 괴물들이 우리 고향을 습격한다고? 생각만 해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야, 괜찮냐? 표정이 좀 그런데?”
조금 전과 달리 걱정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가 내 귀에 전해진다. 괴물 이야기만 나오면 나도 모르게 흥분하는 거 같군. 이렇게 된 것도 모두 다 괴물 때문이다.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데 그걸 응원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했다.
“그, 그럼……너희는 지금까지 어떻게 싸워온 거야? 접근전에서도 불리하고, 마법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괴물을 상대로 어떻게 지금까지 버텨온 거지?”
안즈는 ‘이제야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군’이라는 소리를 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고? 그 말은 설마……?
“그래. 눈치가 빠르면 이미 알아챘겠지? 접근전에서도 불리. 마법도 안 통하는 괴물을 상대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던 수단은 단 하나밖에 없었어. 우리 야만족이 가지는 고유의 힘이자 능력. 바로……「힘의 배가(倍加)」였지.”
그쯤 되니 나도 안즈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데려온 이유부터 그녀들이 가진 고유의 힘. 앞으로 할 이야기는 말 그대로 ‘그녀들이 가진 고유의 능력과 내가 가진 힘’을 알고 있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 작품 후기 ============================
납치범이 대놓고 ‘너님 평생 집에 못 감ㅋㅋㅋ’이라고 말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모르긴 몰라도 이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 겁니다. 평화롭게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사람한테 납치당해 폭행이나 이상한 일을 당하는 거니 말입니다.
독자분들 중에는 ‘눈물이나 질질 짜고 앉아있고. 이 새끼 병신 아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사실 좆병신 같은 주인공을 만들자 싶어 적은 게 세린이니까 병신 아니냐는 의견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집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세린의 태도나 반응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갑자기 납치당했는데 ‘야레야레다제, 이런 놈들한테 납치당하다니’ 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현실에서는 폭행이나 강간을 당해 죽는 게 일상다반사입니다. 테러범이나 납치범은 절대 함부로 자극하면 안 되는 거거든요.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테러나 강도 발생이 많은 미국 쪽만 봐도 답이 보이잖습니까.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이나 소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는 홀로 멋지게 테러범이나 납치범과 싸우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예, 알아요. 매우 강하고 멋있죠. 누구나 한 번쯤은 ‘저렇게 되고 싶다’라는 소망을 가질 거예요.
하지만 현실은? 총 한 발 잘못 맞으면 그냥 골로 갑니다. 테러범이나 납치범을 쓰러뜨려? 몸이 묶여 있을 수도 있고 설령 자유롭다 하더라도 함부로 덤빌 수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칼이나 총에 맞을 수 있거든요. 그럼 죽어버리는데 대체 누가 목숨 걸고 영웅 노릇을 하겠습니까?
마법도 못 쓰고 탈출이나 흥정도 못 한 채 처맞기만 하는 세린의 모습은 일반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한 상황에 말려들어 험한 꼴 당하는 건 굳이 세린만 그런 게 아니니 말입니다.
덧붙여서, 드디어 세린의 개고생이 시작됐습니다. 지금까지 120편 넘도록 호강만 시킨 세린입니다. 이제 개☆박★살날 차례! 굴렁쇠가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굴려야죠. 절대 세린이 부러워서 이러는 거 아니라는 걸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예? 거짓말 같다고요?
……레드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