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9 「13-8 : 왜 내 인생은 늘 이러냐……? (4)」 =========================
응접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안즈는 척 봐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경비대의 식당을 이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마을을 둘러보던 것 때문이었겠지. 낮부터 돌아다니다 이왕 나온 거, 맛있는 거나 먹자 싶어 우리랑 다른 곳에서 저녁을 먹었을 거라 생각했다.
“저녁은 맛있게 드셨어요?”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식사 여부부터 물으니 참 궁금했다. 왜 늘 식사를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를 묻게 될까? 까놓고 말해 먹었든 안 먹었든 거절의 의사를 전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말이다.
비단 여기뿐만이 아니었다. 현실 세상에서도 ‘식사 하셨습니까?’라는 말은 언제 어디서든 쓸 수 있는 말이었다. 안부를 묻는 거랑 비슷한 개념일까……?
“응. 당신들도 저녁 먹었어? 여긴 맛있는 게 많더라고. 이것저것 사먹다 보니 그게 저녁이 됐어.”
예상이 맞긴 맞았네. 밖에 나가서 이것저것 사먹다 보니 배가 불러 그냥 저녁 먹은 셈 친 건가. 경비대의 식사도 맛있었지만 그녀처럼 군것질로 배우는 채우는 것 또한 좋은 선택이었다. 선택할 수 있는 맛의 폭이 넓어지니까. 나도 가끔은 그렇게 먹고 싶었지만 함께 먹는 저녁의 분위기도 매우 아늑했기에 선택할 수가 없었지.
자리에 앉은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는 형태였다. 으음……이렇게 보니 확실히 미인이긴 미인이다. 좀 제멋대로인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건강미를 띠고 있는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붕대로 말고 있는 저 가슴과 훈도시를 보니 다시금 욕정이 일어나는군.
“그래서, 대화는 끝났어?”
다짜고짜 돌직구라니.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건 좋지 않은 일이다만 그녀는 이름과 모습 그대로 야만족에 가까운 여자였다.
어, 뭐라고 해야 하지? 정신적인 배려와 생각보다는 본능적인 움직임과 목적을 중시한다고 해야 할까? 그게 나쁜 건 아니었지만 내 아내들 중 이렇게 돌직구를 퍽퍽 던지는 타입은 별로 없기에 당황스러웠다.
“예. 대화는 끝냈습니다만…….”
내가 말을 흐리는 이유는 거절 의사의 표현 때문이었다. 아무리 거절한다지만 ‘하핫, 멍청한 년! 내가 니년 말 듣고 쭐래쭐래 따라가야 할 이유가 어디 있냐? 그딴 거보다 다리 벌려! 보지를 활짝 펼치란 말이다! 니년 다리 사이에 있는 아기의 보금자리에 내 좆물을 실컷 뿌려주마!’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렇게 보니 나도 남말 할 처지가 아니군. 그녀와 비교하며 나나 다른 아내들을 문명인에 가깝게 묘사하고 취급했지만, 정작 이런 상황이 되니 온갖 야한 생각과 폭언을 던지며 그녀를 범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 나 또한 짐승에 가까운 놈이었다. 단지 안즈보다는 그걸 덜 표현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
그런 면에서 볼 때 사람은 누구나 짐승에 가까운 본능과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았다. 내 아내들 또한 나와 사랑을 나눌 때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채 마구 폭언을 일삼을 때가 있었으니까.
그러면서도 섹스가 끝난 후에는 다시금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깊어지는 걸 보니 다시금 이곳은 현실과 다른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하렘 어드벤처’가 현실과 다른 곳이지만, 나한테는 또 다른 현실이기도 했기에 무턱대고 행동할 수는 없었다. 몇 번이고 말했지만 입 끝, 손 끝, 좆 끝 때문에 인생 좆망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으니까.
나도 여기 와서 좆 끝과 입 끝을 잘못 놀렸다가 좆망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다시금 행동에 흐트러짐이 없도록 주의해야만 했다.
저렇게 웃으며 긍정적인 대답을 바라고 있는 사람한테 어떻게 ‘죄송합니다’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아내들한테 ‘야, 나 못 가니까 니들이 알아서 잘 말해라!’와 같은 책임전가성 발언을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게 바로 가장(家長)의 의무이자 슬픔이겠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그, 아내들과 여러 모로 대화를 나눠봤습니다만……. 죄송스럽게도 안즈 씨가 사는 마을에 가는 것은 역시 못할 거 같습니다.”
어렵사리 꺼낸 말이었지만 죄송스럽다는 부분은 진심이었다. 밝게 웃던 그녀는 내가 부탁을 들어줄 거라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그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느낌이었으니 죄송하지 않을 리가 있겠냐. 부탁을 들어줄 의무는 없지만 그렇다고 미안함을 전혀 느끼지 않을 정도의 인간 쓰레기는 아니란 말이다. 부디 화를 안 내면 좋을 텐데…….
“아하하, 역시 직접 가는 건 어려웠나보네? 어쩔 수 없지 뭐.”
뭐니, 이 여자!? 왜 이렇게 쿨(Cool)한 건데?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간신히 꺼낸 거절 의사를 안즈는 너무나 시원시원하게 받아들였다!
어, 어? 이게 아닌데? 무, 물론 화를 안 내서 좋긴 좋은데. 보통 이럴 경우에는 ‘우리한테도 사정이 있어. 이해해주면 안 될까?’부터 시작해 ‘너를 데려가기로 약속했단 말이야’ 등의 말이 나오는 게 정석인데? 응? 어어?
판타지나 무협에서는 보통 강려크한 주인공─강려크든 강력이든 큰 차이는 없지만 판타지나 무협에 나오는 주인공은 보통 존나 쎈 놈이니까. 어찌 됐든 존나 강하고 센 인물이라는 점을 묘사하는 데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으니 이렇게 쓰마─의 힘을 빌리려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아, 난 그렇게 강하지 않는 놈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언급하고 강조한다. 나는 그런 위인이 아니라니까?
주인공은 거의 백방 남자다. 그런 남자의 강력함을 빌려 마을이나 사건을 해결하려는 여자가 나타나지. 남자가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 경우 동행하는 여자나 부탁하는 사람들의 가족, 지인(知人), 친척 중 예쁜 여자와 썸씽이 있는 게 대부분이다.
시발……어떻게 된 게 안 봐도 스토리 라인이랑 플롯이 이렇게 명확하게 드러나냐? 사람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군!
내가 무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지략이 빼어난 것도 아닌데 내 힘을 빌리려는 이유는 이 ‘하렘 어드벤처’의 특성으로 인한 것이지, 절대 내가 잘난 인간이라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몇 번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강조할 생각이다. 너희는 여자한테 한 대 맞고 움찔거리는 남자 새끼가 위대해 보이냐? 직접 당하면 그런 생각은 전혀 안 들 거다.
여하튼……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힘을 빌려야 하는 대목인데 왜 안즈는 이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내 아내들도 그녀가 화를 내거나 간곡히 부탁할 거라 생각했던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 음……우리가 다 뻘쭘하네. 안즈는 헤헤거리며 웃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한테도 사정이 있지만 그쪽에도 사정이 있을 테니까. 그럼 어쩔 수 없이 캡슐을 쓸 수밖에 없겠네……. 만드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려?”
너무나도 내가 생각한 대로 일이 흘러가니 오히려 불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만……가만히 있다간 또 마음이 바뀌어 화를 내거나 할 수도 있었기에 곧바로 대답해야만 했다.
“그……야만족 여성분들은 총 몇 명 정도 있죠?”
“100명 정도? 괴물이랑 싸우면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거든. 원래는 그것보다 더 많았는데 지금은 간신히 그 정도야.”
100명이라고? 200명 정도밖에 없는 루인보다 인구수가 적다니……. 그 원인이 괴물이라는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젠장……왜 나는 내가 저지른 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두근거림과 죄책감을 받아야 하는 걸까. 참으로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러다간 이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것까지 모조리 내 탓으로 느낄 거 같군.
그리 많은 인구수는 아니었기에 레이 시리즈를 동원한다면 어떻게든 오늘 밤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야간 경비를 설 때 동원되는 레이 시리즈를 제외하더라도 매혹 마법이 있으면 숫자의 많고 적음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아마 내일 아침……늦어도 내일 점심쯤에는 캡슐을 드릴 수 있을 거 같네요.”
“와아, 생각보다 빠르네? 역시 당신, 꽤 유능한 거 아냐?”
난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유능하다는 칭찬은 좋게 받아들이자면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나쁘게 받아들이자면 어디든 써먹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자기 일 아닌 것까지 해야 했던 시절은 군대와 계약직만으로 충분하다. 이 세상에서까지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군대부터 시작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 대답할 수 있겠지만 난 그 대답이 틀린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게 아니라 틀렸다고 말할 정도니 거기에 대해 증오와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것 정도는 모두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고.
내가 생각하는 ‘군대나 직장,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절대 유능한 사람이 되지 마라]였다. 이 말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은 의아해하겠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거다.
‘아니, 그게 말이 돼? 유능한 사람이 되지 말라니? 이 세상은 무한경쟁 시대이고 그곳에서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낙오자가 되기 마련인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우리 보고 죽으라는 말이냐!?’라며 분노를 나타낼 수도 있겠지. 음, 이해한다. 그게 보통 사람의 반응이니까.
보통 사람이란 말이 이상하지만 뜻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사고(思考)하고 반응하는 사람들. 그게 바로 보통 사람이지.
그런 사람들이 내 말을 듣는다면 위와 같이 분노를 나타낼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한 말은 결코 누군가를 분노케 만들기 위한 말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말해둔다.
보통 사람들 머리에서는 나오지도 않고 나온다 해도 함부로 입에 담기 어려운 생각이다. 근데 왜 이런 걸 말하냐고 묻는다면……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현실이 얼마나 좆같은지 아니까 이용당하지 말라는 걱정과 배려를 담아 격려하기 위해서.
보통 사람들은 군대나 회사, 사회에 들어갈 때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인정받아 좋은 평가를 받으며 함께 나아가고 싶다고. 공동체에 들어가 그곳을 발전시키며 함께 성장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하면 거기에 걸맞은 평가가 올 거라 생각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멋진 자세다. 문제는……현실은 절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의 반 강제적으로 가야 하는 군대.
살아남기 위해 취업을 해야 하는 회사.
군대와 회사를 아울러 모두가 살아가는 사회.
그들이 꿈꾸던 올바른 자세와 희망찬 삶은 어디로 가든 간에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나 휴지통으로 들어가게 된다. 노력과 능력을 인정받기는커녕 자신이 원하지 않는 미래로 가야만 하는 것에 슬픔과 염증을 느끼게 된다.
노력과 능력보다는 눈치와 아부, 분위기 파악에 점점 익숙해지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어느새 사회에 찌들었구나 하고 씁쓸해하겠지.
그렇다고 노력과 능력을 인정받으면 그걸로 끝나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진짜 헬게이트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자신의 업무가 아닌 일을 있는 시간 없는 시간 쪼개어가며 해야만 하는 현실에 부닥치게 되겠지. 자기 일도 아닌데 열심히 해야 하는 의미조차 모른 채 일을 끝낸다면? 그 끝은 이용당한 자만 남을 뿐이다.
열심히 노력해 일을 멋지게 끝내도 좋은 평가나 응원, 업적에 대한 평가는 전혀 받을 수 없다. 자신이 응당 받아야 하는 정당한 평가나 보수 등은 일을 맡긴 사람이 가져가기 때문이다.
유능하다는 뜻은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자기 일이 아닌데도 최선을 다해야 하고, 최선을 다한 후에는 토사구팽당하는 것. 그게 바로 ‘사회에서 유능(有能)하다’는 뜻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챙긴다는 옛말은 정말 틀린 게 하나 없었다. 회사로 치자면 고생은 유능한 사람(이 경우 신입)이 하고 좋은 평가 높은 점수는 일을 맡긴 사람이 챙긴다고 해야겠지.
자신의 미래를 위해 갈고 닦아 얻은 유능함이 누군가의 인생을 풍족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용만 당하다니. 이런 사회에서 ‘유능한 사람이 되어라’라니. 참으로 웃긴 이야기였다.
회사에서 일을 잘 하는 사람, 수완이 좋은 사람, 유능한 사람이라는 말은 결코 좋은 말이 아니다. 그 말은 언제든지 이용당할 수 있고, 본인의 능력은 다른 사람의 출세와 미래를 위해 쓰여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굳이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다른 사람 꼴리는 대로 이용당하고 단물 빠지면 버림받는 자]라고 할 수 있겠지. 응? 대화하듯이 문장 형식으로 만들어달라고? 그야 뭐,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야, 너 일 잘 한다며? 이거 받아라 신입. 이거 점심 때까지 알아서 해놔라. 뭐? 못 하겠다고? 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하아, 씨발. 어쩌다 이딴 꼴통 새끼가 들어왔냐…….
야, 잘 한다는 새끼가 그 따위로 행동해서 되겠어? 일을 주면 고마운 줄 알고 냉큼 받아서 하지는 못할망정 뭐? 하는 방법을 몰라? 니 일이 아냐? 와, 존나 호로 새끼네 시발.
야, 그 따위로 무슨 회사일을 하겠다는 거야? 아오, 내 때는 진짜 선배나 윗사람이 일 주면 고마워하면서 했는데 이제는 아주 꿀 빨며 별 지랄을 다 하는구만…….
회사 일이 니 일만 딱 하면 쉬어도 되는 그런 건 줄 아냐? 시발, 다 하면 알아서 선배 일을 해도 모자랄 판에 니 일만 딱 하고 끝내겠다고? 시발, 회사 생활 얼마나 잘 하나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유능하다는 말은 안 나와 있지만 일을 잘 못하거나 망칠 거 같으면 아예 시키지를 않는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의 능력을 ‘회사를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마음껏 쓴 후 그 결과와 업적, 성과는 맡긴 사람이 얻게 된다. 일을 열심히 한 사람한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게 바로 군대나 회사, 사회의 현실이다.
아, 그래! 여기서 사람들은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겠지. 회사는 월급을 받아먹으며 일하는 곳이기에 이러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수 있다 치며 군대로 눈을 돌리겠지. 함께 전장(戰場)을 누비는 전우(戰友)라면 이러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믿을 것이다.
……군대에 아직 안 가본 사람들은 말이다. 회사에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기에 잘 안다. 군대가 어떤 곳이며, 그곳이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더 좆같은 건 군대나 사회나 그 기본적인 골격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군대에서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존재할 거라 생각했어?
유★감!
쟌☆넨!
그딴 거 없답니다~♪
오히려 군대는 어떤 의미로는 사회 이상으로 좆같았다. 짜증난다고 나올 수도 없고 그만둘 수도 없었으니까. 병역의 의무는 열심히 했는데 인권은 찾을 수가 없는 곳. 그곳이 바로 그 위대하고 멋진 군대였다.
아아, 지금 생각하니 또 빡친다……. 중대장이라는 새끼가 다른 대대에서 소원수리 긁혀서 온 것도 웃기지만, 중대운영비까지 자기 배를 불리는 데에 썼다니. 분노가 다시금 들끓는다.
평소 잡일부터 시작해 교보재 정리, 막사 주변 청소 및 정리, 진지 수리 등 온갖 일에 다 불려다니는 병사가 있다면 그 병사는 ‘유능한 병사’다. 유능한 병사가 되면 좋든 싫든 그 능력 덕분에 인기가 있을 것이다.
인기가 있다는 말이 정말 인기가 있어서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써먹기 편하고 좋다는 뜻이라는 건 이미 다 파악했을 거라 믿는다.
일을 못 하면 사회에서의 평가와 관계없이 쓰레기, 개폐급, CS급 병사로 전락해버린다. 밖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별 관심도 없고 관계도 없지만……그렇게 다른 사람을 쓰레기로 평가하며 써먹을 대로 써먹는 곳이 군대다.
그러다 다치면? 으하하핫! 인생 끝이지 뭐긴 뭐야? 나라에 들어올 때는 국가의 자식이지만 들어온 후에는 남의 자식. 그게 바로 대한민국 군대의 현실이자 생태였다.
회사가 시궁창인데 강제로 가야 하는 군대도 시궁창이라는 사실에 모두 이렇게 생각하겠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난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하하, 이거 왜 이러시나?
알 거 다 아는 사람들이?
다 알잖아?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니까.
스스로 지배받기를 원하는 노예들한테 인권(人權)이라는 개념 따위,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미 몇 십 년 전부터. 단순히 누군가를 이용하는 과거만 친다면 세계 각지에서 몇 백 년도 전부터 이어진 행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현실을 용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잘못된 것이 있는 걸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그걸 일종의 문화나 특수성으로 인정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미쳤다는 걸 뜻하지.
높으신 분들은 청년실업부터 시작해 많은 사회 초년생들이 이런 사회에 적응해가지 못하는 걸 보고 헝그리 정신이 없다, 노오오오오오력이 부족하다, 하늘을 감동시킬 정도로 노오오오력을 해봤느냐, 부당한 일을 해결할 방법은 없으므로 좋은 경험 셈 치고 노예처럼 부려 먹혀라 같은 말을 지껄였다. 이러한 잘못된 사회와 개념을 단숨에 인정해버린 것이다.
……시발, 내가 어쩌다 그런 헬조선에서 태어나게 됐지? 아, 아니. 그 전에. 용케 살아남았구나 신세린?
아르바이트와 계약직뿐이었지만 용케 그런 곳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구나 하는 감탄이 들었다. 더 이상 갈 수 없고 가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서도……진짜 대한민국은 죽으나 사나 안타까움과 부끄러움, 분노밖에 안겨주지 않는구나. 망할 헬조선.
그런 헬조선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참으로 웃긴 것이었다. 바로 ‘유능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거였지. 쉽게 말하자면 [요령 있게 무능해져라]라고 해야 할까?
적절하게 자기한테 주어진 일, 자기가 해야만 하는 일을 간신히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만을 보여야 했다. 너무 잘 하면 다른 사람한테 이용당할 테고 너무 못 하면 사원평가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따라서 ‘있어야 할 부분’은 겨우 자기 할 일만 간신히 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쟤는 일도 못 하고 속도도 느리니까 일 맡기지 마라’라는 평가를 받는 부분이어야만 했다.
일을 너무 못하면 속도에 관계없이 모가지가 될 수 있으니 최소한 다른 사람들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업무 능력은 갖추어야 한다.
업무 능력은 갖추되 너무 열심히 하지도 않고 너무 못 하지도 않는……스스로 능력을 낮추며 느리게 일을 해야 하는 웃긴 상황을 접해야만 한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필요한 자세였다. 이용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말이지.
일을 맡겨도 그리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직접 하는 거랑 비등비등한 수준인데 괜히 시간만 늦어진다면 사람들은 일을 맡기지 않는다. 일을 맡겨봤자 그리 잘 하는 수준도 아닌데 시간만 늦어지고, 그 경우 좋지 않은 평가나 불평은 일을 맡긴 사람이 받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자를 수는 없을 정도의 성과를 보여주는 것 또한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이처럼 ‘유능하다’라는 말 속에는 칭찬하는 사람이 바라는 것을 이뤄줄 수 있다는 소망과 흑심이 담겨 있었기에 그녀의 말에 기뻐할 수는 없었다.
유능하면 이용당할 뿐인데 내가 미쳤다고 그녀의 말에 ‘하핫, 그렇죠! 제가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아주 유능한 사람입니다! 제 아내들은 그것도 모르고 절 매일 패고 놀리기 바쁘죠!’라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능하다고 생각되면 곤란하니 내 무능함을 최대한 강조하자. 겸손은 미덕 아니던가? 유능한 게 아니니 겸손해야 하는 게 사실이긴 했지만 무능함을 드러내면서까지 평화와 행복을 지키려 하다니. 나도 참 많이 변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능청스러운 척을 했다.
“하하, 유능하기는요. 오히려 그 반대에요. 딸이랑 싸워도 질 정도로 약한걸요 뭘.”
사실을 웃으며 말하지만 내용으로 보자면 슬픈 것이었다. 경비대장급의 검술 실력을 지닌 로라와 달리 메이는 마법에 좀 더 재능을 보였다. 그렇지만 아예 검을 못 다루는 것은 아니었다.
꼬집어 말하자면……경비대장 클래스는 아니지만 검으로 괴물을 견제하는 것 정도는 가능한 수준이라고 할까. 묘하게 어중간한 그 힘이 메이의 특성을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메이한테도 이길 수가 없었다. 메이가 나름 봐줬지만 초보자인 내가 보기에도 메이는 나보다 몇 배는 검술 실력이 높았다.
니나는 아예 괴물의 품으로 파고 들어가 마력을 듬뿍 담은 강력한 타격을 때려박으며 살아왔기에 메이보다 훨씬 더 강했다. 즉, 니나랑은 싸울 필요조차 없었다. 어차피 내 패배가 정해져 있는데 미쳤다고 싸우냐…….
아직 기초적인 검술 수련밖에 안 하는 나한테 패배는 당연한 것이지만 딸한테 패배하니 묘한 안타까움과 두근거림이 있더군.
응? 안타까운 건 둘째 치고 왜 두근거리냐고? 하핫, 모르는 척하기는! 강력한 힘으로 아버지를 내리누르는 딸이 밤이 되면 내 아랫도리에 매달린 채 열락 어린 신음을 뱉어내다니! 이 얼마나 배덕적이며 황홀한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그렇게 쓰레기 보듯 보지 좀 마라. 나도 내가 쓰레기인 거 알거든요? 인간실격 프로그램에 당당히 입후보로 선출될 정도로 훌륭한 쓰뤠기인 거 알거든요?
어차피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갈 생각도 없으니 이곳에서 욕망을 푸는 것뿐이다. 실제로 피가 이어진 딸도 아니고, 그녀들도 나를 원했으니까. 법적인 문제도 없었고.
그치만……딸한테 질 정도로 약하다는 사실마저 무능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쓰다니. 나도 참 사람이 못됐다고 해야 할지, 치졸하다고 해야 할지. 나 자신의 나쁜 점마저 내 행복과 안위를 위해 쓴다니. 내 아내들의 뱃속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딸들은 부디 나 같은 인간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내 말을 들은 안즈는 ‘아하핫! 솔직해서 좋네! 그치만 너무 약하면 아내들이 걱정할 테니 강해져야 하는 거 아냐?’라며 쾌활하게 웃어댔다. 후우……어떻게든 내가 무능한 인간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에는 성공한 거 같군.
좋아, 이대로 내 뜻대로 일을 진행시키자. 물어야 할 일을 물어서 해야 할 일을 정한 뒤, 단숨에 이 대화를 정리하는 거야.
“그, 100명 분의 캡슐은 만들 수 있는데……안즈 씨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캡슐을 쓰실 건가요? 아니면……?”
으음, 내 아내들은 이미 내 계획을 알고 있었기에 오기 전부터 못 마땅한 표정이었지만……어쩔 수 없어. 이해해주라. 내가 그녀들의 숲으로 가는 것보다야 여기서 안즈 한 명만 임신시키는 게 훨씬 더 나을 테니까. 나한테도, 그녀들한테도. 모두한테 말이지.
“아, 그거 말인데. 숲에 있는 다른 여자들한테는 캡슐을 가져다 줄 생각이지만 난 가능하면 한 번 해보고 싶거든. 그 ‘섹스’라는 거 말이야. 그렇게 기분이 좋다니까 한 번은 경험해보고 싶었거든, 헤헤.”
훈도시 부분을 긁어대는 천진난만함과 순수함이 더욱 더 배덕적으로 어우러졌기에 하반신이 불끈거렸다. 좋아, 일은 내 뜻대로 진행되고 있군.
“그럼……오늘 밤에 어떠신가요? 어차피 내일 떠나신다면 주무시고 가셔야 할 테고, 그 사이에 좆물을 주입해드릴게요.”
현실이었다면 성희롱 발언으로 좆망 테크 트리를 타야 하는 말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너무나 자연히 쓸 수 있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내 말에 ‘정말? 그렇게까지 날 생각해주다니, 고마운걸?’이라 반응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너무하다며 안타까움을 뱉어내는 아내들한테 키스를 해주며 이해해 달라 말한다. 안즈는 아기를 가질 수 있어서 좋고, 나는 이 여자와 즐길 수 있어서 좋고. 나쁠 거 하나 없잖아. 서로 즐기고 이기는 Win-Win 전략이라고.
섹스라는 걸 경험할 수 있어서 기쁘다며 좋아하는 그녀를 보며 난 일이 생각대로 흘러가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완만한 거절 표현을 하면서도 서로가 이득을 챙기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왜 내 인생은 늘 이러냐……? (1)」의 초반에서 나왔듯이 이후의 사태는 내 상상을……. 아니. 내 아내들이든 누구든 간에 상상도 못 했던 방향으로 사태는 흘러갔다. 그녀의 함박웃음과 시원시원한 승낙, 말투를 접하며 진작부터 깨달아야 했다고 후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하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모두의 행복’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 작품 후기 ============================
이번 편을 쓰며 가장 짜증났던 건 역시 상사의 잔소리나 헬조선의 실상이었습니다. 특히 상사가 ‘하, 씨발. 뭐 이딴 놈이 들어왔냐’하는 부분에서는 군대에서 겪었던 것도 살짝 넣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대한민국 국군은 정의의 집단이 아니라 악폐습 덩어리거든요 ^^
아직도 여전히 구타, 악폐습, 가혹행위 존재합니다. 안 존재할 리가 없죠 =_=; 줄긴 했지만 구타는 여전히 있고 가혹행위나 별 의미 없는 갈굼도 있습니다. 역시 대한민국 국군! 대일본제국의 황군을 모티브로 만들어졌으니 이 모양 요 꼬라지가 된 거겠죠? ^^
분명 장르는 떡타지인데 헬조선과 현실 까기가 이렇게 많이 나오다니. 진짜 어지간히 저도 현실을 싫어하는가 봅니다. 작가인 제가 현실에 혐오감을 가지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까는 글이 나올 리는 만무하니 말입니다.
그래도 후회는 별로 안 합니다. 적어도 이런 현실을 까는 사람이 한두 명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 됐을 뿐이지, 이게 아주 잘못됐다는 생각은 안 합니다. 가만히 당하면서 살아가는 건 존나 싫거든요.
딱히 정의로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짓을 골라서 할 만 한 놈도 아닙니다. 그냥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네요. 조그마한 소망을 품은 채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갈 생각입니다.
아! 물론 이런 개막장 떡타지를 쓰는 건 정신적으로 존나 황폐해서 그런 거니 이해해주시면 됩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이런 거 안 씁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P.S - 1화의 조회수가 1만을 넘었습니다. 무료공개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조회수를 얻은 것은 태어나 처음입니다. 이 글을 봐주신 분들께 다시금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앞으로도 노력하는 작가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