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7 「13-6 : 왜 내 인생은 늘 이러냐……? (2)」 =========================
결혼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내가 비록 결혼을 하긴 했지만……음. 그건 현실 세상이 아닌 ‘하렘 어드벤처’의 세상에 와서 했던 것이었으며, 이곳에 왔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현실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
연애-결혼-출산의 3단 콤보는 사실 인생을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연애는 좋겠지. 하지만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평범한 사람들은 ‘에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시발, 연애는 결혼이든 아무래도 좋으니까 빚이나 갚고 싶다’라고 생각했지. 지금은 어떻냐고?
빌어먹게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연애와 결혼은 매우 다른 것이다. 연애는 사귀는 사람과 어떻게 될지 모르니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가 없다. 히든 카드 같은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비밀스런 부분, 은밀한 사정을 함부로 발설할 수가 없다.
요즘 시대에 정보의 누출은 매우 위험한 것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사람 대 사람으로서 상대방을 믿어도 괜찮은지 어떤지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애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자들이랑 사귀면서 알게 된 것은……사람들한테 보여주는 모습이 그 사람의 진정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한 거 아니냐고? 어, 그래. 당연한 거긴 한데…….
근엄하거나 모두의 사랑을 받는 조신한 여자가 밤에 자지로 아기를 죽이라며 열락 어린 신음을 뱉어내는 걸 보면 그게 당연한 건지 어떤 건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울 거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결혼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결혼 전에 흔히 있는 이벤트가 있다. 바로 속도위반 결혼이다. 속도위반이 뭐냐고? 혼전(婚前). 결혼 전에 성 관계를 나누어 임신을 시켜버린 경우다.
서로 성관계를 나누다 임신한 것을 알게 되어 결혼을 하게 됐다……라는 스토리는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이야기다. 그래, 그건 좋다.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됐으니까.
하지만 속도위반 결혼. 혼전임신(婚前姙娠)에는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다. 부모가 되는 상대방이 부모로서 적합한가 어떤가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근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는 것도 모자라 죽여 버리는 사건까지 벌어지고 있는 현 사회에서 부모의 자질이 있는가 없는가는 꼭 확인해야만 하는 것 중 하나다. 그런 걸 모른 채 그저 임신했으니 결혼한다는 루트로 가버리다간 나중에 태어날 아이한테 어떤 영향이 미칠지 알 수 없게 된다.
자신들의 소중한 사랑의 결정체인 아이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과 폭언을 행사하며 학대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다. 그런 나쁜 사람이 부모라면 애초에 결혼을 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지만……사람은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꿰뚫어볼 수 없는 존재다.
상대방의 폭력적인 경향이나 면모를 처음부터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학대가 일어나는 거고.
결혼 후에 임신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혼 전에 임신을 하게 된다면 진심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과연 결혼할 서로가 부모로서 적합한가, 함께 살아갈 배우자로서 적합한가 등을……. 사람은 사랑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생물이니까. 돈 등의 현실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아이를 학대하는 쓰레기 같은 부모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그 머리 하얀 미친년이 날 죽이려 들 수도 있겠지만……그 전까지는 아기를 위해. 아이들한테 있어 멋진 부모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었으니까.
아내들과 아기들을 지키기 위해. 나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여러 이유가 있었기에 체술과 검술 훈련을 시작하게 됐다. 갈 길은 멀고 할 일도 많지만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는 3~4개월의 여유가 있었기에 단련 시간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근데……아무리 생각해도 ‘멋진 아빠’가 되는 건 요원한 일 같았다. 야, 생강 먹고 생각을 해봐라. 당장 찾아온 야만족 여자가 자기들을 모두 임신시켜 달라는데 이건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우리 아빠는 멋진 사람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내가 남자라도 ‘이 새끼는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라고 생각하는데 하물며 딸들은? 하하, 말할 것도 없죠?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한 집무실이라니. 아이나야, 넌 일을 하렴. 아이라는 아이나를 도우고. 로라는 슬슬 경비대장 일을 그만둬야 하니 좀 쉬면서 하세요. 저는 하던 수련 마저 할게요……라며 나갈 수도 없었다. 안즈라는 여성은 웃으며 말했지만 상당히 진지하게 날 보고 있었으니까.
“……죄송한데,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뭘 잘못 들은 거 같아서요.”
그래, 잘못 들었을 거야.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냐? 아직 만난 지 10분도 안 된 사람한테 자기를 임신시켜 달라니. 자기뿐만 아니라 야만족 전체를 임신시켜 달라니. 이 여자가 잘못 말했거나 내가 잘못 들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우리 야만족들을 모두 임신시켜 달라니까? 간단한 일이잖아?”
아, 신이시여! 대체 너님은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 따위 이벤트를 하사하신단 말입니까!? 당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벗어나고 싶었지만 내 아내들과 이 여자가 나를 가만히 놔둘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기에 그냥 입 닥치고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됐길래 이런 일이 발생한단 말인가?
“……세린은 인기가 많아서 좋겠네? 만나본 적도 없는 야만족 여자들이 세린을 기다리고 있다니까 기분 참 좋지? 째지지?”
으아아아아아아! 망할! 아이나는 당장이라도 날 죽일 기세였다! 더 무서운 건 웃으면서 저런 말을 한다는 거지!
아, 내가 어쩌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됐을까? 몇 번이고 이런 생각을 했지만 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내가 전부 알아서 하라 이거지!? 이 망할 백발 미친년! 니년은 언젠가 반드시 내가 죽일 거야!!
“무, 무슨 소리야! 좋기는! 하, 하나도 안 기뻐……!!”
“입은 웃고 있는데?”
뭐!? 난 즉시 내 입에 손을 올렸다. 어, 이게 왜 웃고 있지? 왜 내 입이 귀에 걸린 채 헤벌쭉거리고 있지? 망할! 설마 그건가? ‘헤헤, 솔직히 기뻐하라고! 마음이 부정해도 니 몸은 기뻐하고 있다고?’ 같은 부류인가?
썩을! 난 즉시 입을 원상태로 되돌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 이제는 내 몸마저 나를 거부하는구나!
19금 동인지나 야애니 같은 곳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어루만지자 ‘큭……누가 너 같은 놈을 좋아할 거 같으냐?’ 혹은 ‘너, 너 따위가 어루만져준다고 내가 기뻐할 거 같아? 이 쓰레기!’라며 남자 주인공을 매도한다. 남자 주인공은 그런 말을 하면서 착실히 애무를 하며, 여자 주인공은 거기에 반응한다. 그럼 이런 대사가 나오겠지.
‘헤헷,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몸은 솔직한데? 이거야 원……입으로는 싫다, 쓰레기다, 꺼져라 라고 하면서도 이렇게 몸이 질척질척하게 반응해버리면 설득력이 없잖아? 후후……그렇게 바라니 소원대로 해주마!’
거의 열에 아홉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응? 소원대로 해준다는 게 뭐냐고? 아, 아시는 분들이 왜 이럴까? 그런 건 말 안 해도 알잖아.
세크스다! 섹스! 쎾쓰! 남자가 저런 말을 하면 대부분의 여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만……그렇지 않을 리가 없지! 19금 애니메이션이나 동인지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헤헷, 좋으면서 앙탈 부리기는! 모든 사람들한테 존경받고 동경 받는 여자가 이렇게 걸레 같은 년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모두 어떤 눈으로 널 바라보게 될까?’ 같은 말을 하면 여자는 ‘아, 안 돼! 그것만은……!’이라며 남자한테 매달리게 된다.
그 후 쎅쓰다! 하반신 합체! 현관합체 요스가노소라! 내가 어떻게 동인지나 야애니의 전개, 대사에 대해 잘 아냐고?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하냐?
봤으니까! 인기가 없고 집안이 가난하니 연애 따위 꿈도 못 꾸는데 딸이라도 쳐야 할 거 아니냐!? 일본 애니메이션이 유아용이나 덕후용으로만 나온다는 생각은 버려!
매달마다 출시되는 야애니, 동인지를 보며 살아갈 기운……은 좀 그렇군. 야애니랑 동인지로 살아갈 용기와 기운을 얻는 건 너무 비참하잖아. 그냥 성욕 해소라고 하자.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매체가 있었으니까! 그걸 여러 본 보다보면 싫어도 패턴 정도는 금방 알게 된다.
얼마나 많이 봤냐고? 여러분이랑 같은 시간을 함께 살아왔으니 그 시간 동안 봤습니다! 아시는 분들이 왜 이러시나? 우리 솔직해 지자구요. 사람은 솔직하게 자기 마음을 터놓음으로써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볼 때 내 몸은 정말 솔직하다 못해 순수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건 둘째 치더라도……당장 눈앞의 이 매력적인 여성, 안즈. 그녀를 포함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지만 그 ‘야만족’ 여성들을 모조리 임신시킬 거라는 생각을 하니……후후, 몸은 솔직하구만! 역시 내 몸! 솔직하며 순진하며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 멋져!
“세린. 검술 훈련 때 박살나고 싶어요? 그 자지에 힘차게 한 방 갈겨드려요?”
로라의 살기 어린 말에 내 시선은 하반신으로 내려간다. 헉스! 젠장! 입만 웃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마저 반응하고 있었던 건가, 존슨!?
자지, 좆, 꼬추, 꼬치, 존슨, 베이비, 세린 주니어 등. 온갖 이름으로 불리는 내 소중한 생식기는 벌떡거리고 있었고, 그걸 보자마자 손으로 감추며 주변을 둘러본다. 안즈 빼고는 모두 경멸 어린 시선이다.
안즈야 나와 내 아내들의 관계부터 시작해 내 생식기의 반응 등을 처음으로 접하기에 그저 신기하기만 하겠지만……당사자인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런 경멸 어린 시선으로 앞으로 남은 시간을 계속 보내야 한다니……! 그런 건 싫다!
내가 안즈라는 여자의 말에 기뻐한 건……그래. 솔직히 말하마. 기뻤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부탁이었지만 적어도 괴물이랑 싸우는 부류의 스펙터클한 부탁은 아니었잖아.
내용면에서는 둘 다 맛이 간 부탁이긴 하지만, 적어도 섹스를 하는 것 자체가 부탁이었으니 나한테는 전혀 손해가 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부탁을 무조건 승낙할 생각은 아직 없었다. 우선 왜 그런 부탁을 하는지 물어봐야 했으니까. 갑자기 다짜고짜 찾아와 자기들을 임신시켜달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잖아. 내가 마음속으로는 좋아했지만 ‘예, 알겠습니다!’하고 단칼에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절하는 이유에는 아내들의 저 경멸어린 시선과 태도도 안 들어간다고는 차마 말을 못하겠군. 썰렁해진 분위기와 저 시선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기에 난 평소에 부리지 않는 애교까지 듬뿍 담아 아기 같이 말했다.
다시금 말하지만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한 것이지, 결코 지금보다 더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한 짓이 아니라는 걸 알아다오.
“오, 오째서 구런 눈으로 보눈 고야아아아~!? 세린, 부끄러워!”
씨바아아아아아알! 내가 했다지만 정말 무리수였다! 아아, 당장이라도 내 머리를 박살내고 싶었다! 어떻게 이딴 걸 애교라고 부리냐?
아니! 내 딴에는 그냥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자는 생각에 했지만 해놓고 보니 이건 아니라는 느낌이 팍팍 든다! 부끄럽다고? 그래! 좆 빠지게 부끄럽지!
로라는 ‘구제불능이네요……’라는 표정이었다. 아이나는 ‘아, 내가 어쩌다 이딴 놈을 좋아하게 됐을까?’라는 눈빛이고. 아이라는…….
“아, 아이라 양?”
“……그냥 어보션으로 돌아갈까……?”
“죄송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가지 마아! 아니, 진짜 미안하다니까! 다들 그런 눈으로 보지 좀 마! 아니, 보지 마세요……저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네?”
아내들의 경멸 어린 시선은 동정심으로 바뀌었고 난 그 동정심 어린 시선 + 경멸 어린 눈빛을 받으며 속으로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그거 어떤 새끼가 생각해낸 아이디어야?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런 생각을 한 놈 뒤통수를 힘차게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그게 나 자신이라는 걸 깨닫자 한숨밖에 안 나왔다. 또라이 새끼…….
“한 번만 더 그딴 짓 하면 다른 애들 다 불러서 확 조져버린다?”
아! 우리 귀엽고 깜찍했던 아이나가 어쩌다 이렇게 변했을까? 옛날에는 마을의 미래와 여동생인 아이라를 위해 있는 카리스마 없는 카리스마 모조리 동원해 노력하던 그 착실하던 처자가 어쩌다가 이렇게 변한 걸까? 권력을 이용해 약한 사람을 다구리 놓으려 하다니!?
권력에 젖어 변해버린……게 아니라. 나 때문에 이렇게 변한 그녀를 보니 미안하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권력뿐만 아니라 다른 아내들의 분노와 마음까지 적절하게 이용하려는 아이나를 보니 난 그저 사과밖에 할 말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조금 전 한 바보짓은 내가 봐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다가 내 몸이 박살나서 부드럽게 변할 거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죄송합니다. 두 번 다시 무리수 두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알아서 기겠습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반성을 하자 그제서야 모두 한숨을 쉬며 대화에 돌아간다. 니들……각오해. 얼굴 봤어……! 오늘 밤에 아기의 보금자리를 자지로 문지르며 애간장이 녹게 해주마……!
“음, 대화 끝났어?”
“……어, 예. 죄송합니다.”
손님 앞에서 온갖 추태를 다 보이니 이젠 체면을 차릴 필요도 없었다. 웃고 있는 그녀를 보니 화가 난다. 망할! 누구 때문에 아침부터 이런 수모를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네년은……!?
“사이가 좋네? 부러워. 우리 야만족도 사이가 좋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없거든.”
당신 같은 사람? 그 사람이 ‘남자’를 말하는 건지 나처럼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기에 묻고 싶었다.
“남자 말인가요? 아니면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사람 말인가요?”
“그야 둘 다지.”
아, 내가 왜 그딴 걸 물었을까. 마음속으로 후회가 막심했다. 남자야 그렇다 치더라도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사람으로 아예 낙인 찍혔군. 하아……아내들이 이걸 가지고 또 며칠이나 씹어댈지 걱정이다. 왜 나는 내 무덤을 스스로 파는 걸까? 그것도 특대로.
남 무덤을 파도 모자랄 판에 내 걸 파서 어쩌겠다는 거냐……. 그런 생각을 하며 다른 질문을 한다.
“저, 왜 그런 부탁을 하시는지……그 이유를 알고 싶은데요.”
몸으로는 좋다고 반응을 했지만 나도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장 ‘예, 알겠습니다! 당장 가죠!’라며 자리를 박찰 수도 없잖냐. 기껏 얻은 평화와 행복이라고. 성욕은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풀 수 있지만 평화와 행복, 안전은 대체재(代替財)로 바꿀 수가 없었다.
이곳에 있는 거라면 모를까 다른 지역에 가서 그 짓을 해야 한다니. 난 당장 체술이랑 검술 훈련하는 것만 해도 녹초가 될 지경인데 이제 와서 또 그런 모험을 하라고? 사양이다.
“제일 쉽게 설명하자면……‘생명의 씨앗’을 구할 수 없게 된 게 가장 큰 원인이지. 당신들도 잘 알고 있잖아?”
모를 리가 없지. 그 생명의 씨앗을 만드는 마리아와 아테나부터 시작해 그녀들을 지키는 여왕기사단의 부단장, 헬레나. 왕궁부터 시작해 다른 마을에까지 퍼진 ‘좆물 캡슐’이 모두 다 내 작품이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길고 긴 여정이었기에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음……6개월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나 하는 감탄이랄까.
“아무리 우리가 다른 마을이나 사람들이랑 함께 지내지 않는 야만족이라지만 아기는 낳아야 하거든. 그래서 수도나 프레그넌트에 들러 남은 생명의 씨앗 등을 거래하고는 했는데……최근 반년 동안 어보션부터 시작해 수도에서도 생명의 씨앗을 구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 생명의 씨앗을 못 보다 보니 소문이 너무 과하게 난 거 아닌가 싶어 수도까지 갔는데……하하, 정말 없는 거 있지? 놀랐다니까?”
무리도 아니다. 나 또한 어보션에 가서 그 크기에 놀랐는데 더욱 놀란 건 생명의 씨앗을 구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수도에 비하면 1/2 크기라지만 프레그넌트에 비해 몇 배 이상이나 더 큰 어보션에서 생명의 씨앗 하나 구할 수 없다니. 심지어 수도에서도 그러한 품귀(品貴) 현상이 일어난 것에 대해 심상치 않다고 느꼈었지.
“수도, 어보션 등. 커다란 마을에서 품귀 현상이 일어나니 아무리 우리라도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느꼈어. 아기를 낳지 않으면 여러 모로 곤란하니까 말이지…….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혹시나 남은 것이 있다면 그거라도 구하고 싶었지만 늘 허탕을 치던 가운데 소문을 들었거든. 생명의 씨앗을 대신해 아기 씨앗을 주입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로라, 아이나, 아이라. 부탁이니 그렇게 한 마음 한 뜻으로 날 보지 마라. 아니, 그 소문 내가 만든 거 아니라니까? 난 소문을 퍼트린 적조차 없어요!? 오히려 납치당하랴, 괴물 토벌하랴, 이런저런 일에 휘말리랴. 힘든 일만 겪었기에 우리에 대한 소문이나 정보는 최대한 안 퍼지게 노력했었지. 내가 뭐가 좋다고 내 정보를 막 퍼트리겠냐?
결혼에 대해 말할 때 약간 말했지만……현대에 있어서 정보라는 것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요소 중 하나였다. 정보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하하, 뭘 모르는 말이다. 축구로 유명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트위터로 인해 사회적 물의를 빚은 선수에 대해 조언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건 책임에 관한 문제입니다. 전 선수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트위터에 올린 내용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솔직히 이해가 안 됩니다. 사람들이 왜 그런 종류의 것(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총칭)에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어요. 그거 할 시간을 어떻게 내죠? 인생에서 그거 말고도 할 수 있는 게 백만 개는 되는데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으세요. 진심입니다. 시간 낭비예요.]
시간이 지나며 SNS로 병신 인증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고, 퍼거슨 감독의 저 말은 그때마다 두고두고 회자(膾炙)됐다. 흔히 말하는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 = 트인낭’이라는 말은 바로 저 말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정말 명언이 아닐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모욕이나 비난, 비판, 감상 등이 눈 깜짝할 새에 SNS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걸 본 적이 있다면 그 누구도 ‘정보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말은 할 수가 없겠지. 그로 인해 사회적 물의나 민사적 고소 혹은 고발 등이 일어나기도 했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돌이 개구리를 죽였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말이 순식간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었다. 이렇듯 정보라는 것은 빠르게 확산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과 사용 여하에 따라 사람들을 도와줄 수도, 기분 나쁘게 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 책임은 전적(全的)으로 말한 사람, 그 자신한테 있었다.
난 내 정보가 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람들한테 내 정액의 효과에 대해 이야기한 적도 별로 없었다. 물은 사람도 별로 없었다만…….
하지만 소문이라는 것은 발 없이 천리를 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다녔던 곳부터 시작해 내가 했던 짓을 시작한다면 오히려 소문이 안 나는 게 이상했다.
아아……그러고 보니. 왕궁에서 시녀들과 경비대원들을 상대로 그렇게 질펀하게 즐기고 즐겼는데 소문이 안 나는 게 이상하겠지. 그것뿐인가? 마리아, 아테나, 헬레나를 데리고 잊지 못할 기억도 남겨줬지. 뭐어……자기들끼리 막 흥분해서 빡친 내가 그녀들을 똥싸개로 만들며 왕궁으로 돌아갔기에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겠다만.
소문이 퍼진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내가 ‘먹는 것만으로도 아기를 임신할 수 있는, 생명의 씨앗을 대체할 물건’. 정식명칭 ‘좆물 캡슐’을 만들어 각 마을에 전달시킨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니까.
생명의 씨앗과 달리 캡슐은 먹은 후 9~10개월의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두 명한테 캡슐은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라 했다. 내 이름이나 명성, 업적을 드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다.
더 이상 생명의 씨앗을 만들 수 없게 된 두 명은 캡슐의 효과는 둘째 치더라도 생성을 할 수가 없다. 지금은 약간 남아 있는 캡슐이지만 만약 모두 다 써버리게 된다면? 캡슐로 인해 태어난 아이가 생명의 씨앗을 써서 태어난 아이와 다르다면?
그럴 경우 비난의 화살은 캡슐을 나눠준 마리아와 아테나. 왕가의 사람들한테 향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걸 싫어하는 인간이다.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느끼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모두 다 그 머리 하얀 미친년 짓이긴 하지만 그걸 해결할 힘이 있고, 그 힘을 행사한 이상 ‘난 너님들이 바라는 대로 해줬음 ㅋㅋㅋ 나한테 부작용이 어쩌고저쩌고 하지 마삼 ㅋㅋㅋㅋ’ 같이 무책임한 말만을 지껄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야 내 부모님과 똑같은 어른이었으니까.
만든 사람은 나지만 캡슐을 배포할 때는 마리아와 아테나의 자애로운 생각 끝에 모두한테 무상(無償)으로 분배하는 거라고 말하라 했다. 책임은 내가, 명성은 그들한테.
본 적도 없는 나보다야 자애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명성이 자자한 두 명한테 명성과 명예, 사람들의 찬사가 가는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나도 그 편이 더 좋았고. 아마 안즈는 그러한 소문을 듣고 날 찾아온 것이이라.
“그, 수도에 가셨다면 왕궁에 가보지 그러셨어요? 아마 남은 캡슐이 좀 있었을 텐데…….”
“알아. 직접 갔더니 약간 남아 있다고 하더군. 그치만……캡슐보다는 직접 주입을 받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거든.”
으윽……부탁이니까 제발 그렇게 좀 보지 마라. 자신만만하게 보며 ‘좆물을 주입받고 싶다’라고 말하면 아무리 나라도 힘들단 말이야……! 당장 내 입은 실실 웃고 있었고 아내들의 눈초리는 더욱 더 차가워진다.
경멸받는 걸 알면서도 왜 입이 웃냐고? 그야……여자가 남자한테 ‘아기 씨앗을 주세요……’라고 말하는 거잖아. 기분 나빠할 요소는 없다고. 어, 아내들이야 기분이 매우……안 좋으시지만.
하아……평화와 행복이 겨우 여자 한 명 때문에 깨지다니. 어, 내 책임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경우에는 이 여자 탓으로 돌려도 되겠지?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되니 완만하게 거절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고 가야겠다 생각했다.
“캡슐을 원한다면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만……그, 직접 해드리는 건 좀…….”
캡슐을 만드는 거야 분신을 써서 만들면 단숨에 해결할 수 있다. 이렇게 완곡하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혀 뜻을 굽히려 하지 않는 태도였다. 왜일까? 내가 갈 필요도 없이 캡슐 하나만 먹으면 임신이 완료되는 건데. 효율로만 치자면 캡슐 쪽이 압도적이었다.
“음……캡슐이란 게 편하긴 편한데. 역시 난 당신이 우리 야만족의 모든 여자를 임신시켜줬으면 좋겠어.”
……안 된다. 말이 안 통한다. 아무리 논리와 효율을 앞세워 말해도 이렇게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한테는 이길 수가 없는데. 슬슬 노기(怒氣)를 띠는 로라와 아내들을 보니 대화를 정리해야 할 거 같았다.
일단 개인적인 일과가 있으니 저녁을 먹은 후에 답변을 주겠다며 자리를 정리했다. 소극적이지만 아내들을 분노하게 만들 바에야 이러는 게 낫지.
한 시간 정도 남았다지만 그냥 점심을 먹자니 배가 부른 상태였기에 훈련장으로 나갔다. 안나와 니나한테 배운 급소 찌르기를 반복하며 다시금 안즈를 생각한다.
왜 효율적이며 훨씬 간편한 캡슐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가까워졌고,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가버린 것에 놀라워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세상에는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많습니다. 분명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사람이고, 말의 요지나 내용을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견만 밀어붙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견이 매우 옳거나 엄청난 행동력 or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만……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걸 여러 번 하면 점차 사람들의 신뢰와 인덕을 잃게 됩니다. 당연하겠죠. 자기 의견만 몰아붙이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최근에는 많이 없어졌지만 박근혜 탄핵 때 기승을 부리던 박사모가 딱 그거였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박사모를 위의 글에 비유하자니 정당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네요. 그냥 병신 같은 꼰대들이 쓸데없는 행동력을 구사한다고 이해해주시면 편할 겁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우리 공주님이 그럴 리가 없다! 너희는 다 나라를 망치는 좌파 빨갱이 새끼들이다!’라는 식으로 대응합니다. 자기들이 휘두르는 폭력은 정당하지만 사람들이 드는 촛불이나 시위는 죽어 마땅한 매국노 행위로 취급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좋아해야 할 이유도 없고 건덕지도 없습니다. 이건 굳이 말씀 안 드려도 되겠죠.
본편에 나온 안즈는 야만족 모두를 임신시켜달라고 합니다. 사실, 세린한테 있어서는 전혀 손해될 게 없는 제안입니다. 게다가 그 나름대로의 정당성이나 설득력도 있고, 무조건 자기가 옳다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아니라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능합니다.
그런 안즈와 대화를 하면서도 답답함을 느끼는 게 세린입니다. 그 이상으로 말이 안 통하는 사람(대화는 가능한데 내용은 평행성인 경우)과 대화하면 진짜 답답해 죽겠죠. 이건 굳이 세린한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독자분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당될 겁니다.
자기 의견이 옳으면 남 의견도 옳고, 자기 의견이 존중받아야 한다면 남의 의견도 존중받아야 합니다. 항상 일방적으로 정의롭고 좋은 것만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헌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인정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왜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존나 싫거든요. 늘 자기가 원하는 것, 편한 것만을 추구하다보니 타인에 대한 존중과 이해보다는 자기 이익과 안락을 추구하게 된 겁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지만 너무 심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여러 모로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가 힘들어질 겁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매우 극소수입니다. 그 극소수 안에는 ‘재능이 있거나 존나 부자거나’라는 조건이 들어갑니다. 말할 것도 없지만 그 극소수를 제외한 사람들은 저 조건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존나 슬픈 현실이죠. 이렇게 글을 적고 있는 저도 포함되는 이야기입니다.
힘든 현실을 뛰어넘어 멋진 미래를 거머쥔다는,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인생역전의 계획입니다만……실제로 이루기는 존나 힘듭니다. 이걸 이룰 바에야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편이 훨씬 쉽습니다. 좌절도, 노력이 무너지는 고통도. 받을 필요가 없거든요. 나름 편하기도 하고.
저요? 현실을 어떻게 못 해 병신 같은 발버둥이나 치는 놈이죠.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이 글을 쓰는 저는 매우 특별하고 예외라는 생각은 전혀 안 합니다. 그런 생각하면 이런 글 안 씁니다 ㅋㅋㅋ
현실이 너무 힘들다보니 푸념만 쓰게 되네요. 다음에는 약 한껏 빨고 후기 적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