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6 「13-5 : 왜 내 인생은 늘 이러냐……? (1)」 =========================
특별편 끝난 지 아직 한 줄도 안 끝났는데 제목부터 저 지랄이라니. 아! 난 깨달아야만 했다. 서장이 끝나고 중장(中章)에 들어온 순간부터 또 내가 한 바탕 구르며 여기저기 치여야 한다는 사실을!
굴렁쇠가 ‘허이구, 저놈은 나보다 더 구르네?’라고 감탄을 보낼 정도로 굴러야 한다니!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며……아, 아니다. 실제로 입으로도 한숨을 푹 쉬고 있으니 마음과 몸이 모두 씹창이 된 상태군.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는데 그건 틀린 말 아닐까? 몸이 건강해도 정신이 나가거나 이상한 사람은 많잖아. 독재자의 딸이면서 대통령이 된 후 국민의 말은 그냥 씹어버리고 자기 정치만 하는 사람이라든가…….
왜 더 이상 대한민국에 돌아갈 수 없는 내가 이 따위 걱정을 해야 하는 걸까? 한숨을 푹 쉰 후 독자들한테 고개를 돌려 힘껏 외친다.
“여러분! 이 소설을 포함해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 지명, 단체를 포함해 그 어떠한 요소든 간에 절대 현실과는 관계가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소설에서 한국 까는데 마티즈가 집에 와서 며칠 후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긴 싫거든요! 물론 저는 현재 한국에 매우 불만이 많습니다!”
할 말을 끝낸 나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젠장, 이게 무슨 짓이냐. 지금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주제에 이런 걸 걱정하다니. 하아……. 아내들 보고 싶다……! 이렇게 헤어지니 다시금 아내들이 소중한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럼 텔레포트로 만나러 가지 뭐 하고 있냐고? 그래, 나도 그 생각했지. 마법 복사로 복사한 마법이 몇 개인데 그걸 생각 못 하겠어? 하지만……그럴 수 없으니까 더 슬픈 거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후 다시 내 팔을 보았다. 검은 수갑. 다시 찰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생각했던 마력 봉인의 효과를 지닌 수갑이 내 손을 봉인하고 있었다.
또 한숨을 쉬었다. 내 아내들이었으면 ‘한숨 좀 그만 쉬어! 무슨 일이 있으면 말을 해야지!’라고 핀잔을 줬겠지만 내 곁에는 그럴 아내들이 없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금 묻는다.
“왜 내가 이 꼬라지가 됐을까……?
그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과거로 돌아가야만 했다.
† † † † † † † † † †
“……손님이요?”
“네. 듣자하니 세린을 찾아온 거 같더군요.”
체술 훈련을 나가려고 하던 나한테 온 것은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손님? 손님이라니? 나한테? 이상하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손님이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현실 세상에서는 매일 공부하고 다른 짓 하느라 친구를 만들지도 못했다. 이 ‘하렘 어드벤처’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예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과 만날 수 없다는 걸 뜻했지만……그렇다 하더라도 손님이라니. 그것도 말이 안 됐다. 손님으로서 찾아올 정도로 친한 사람이 나한테 있던가? 내 기억에 따르자면 없는데? 오히려 내가 묻고 싶었다.
“이름이 뭐라고 하던가요?”
“이름은 ‘안즈’라고 하더군요.”
안즈? 더더욱 모르겠다. 이름으로 모든 사람의 국적(國籍)을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주로 일본 이름에 많이 쓰이는 이름이다. 내가 지금까지 여행을 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손님이라니. 갑자기 걱정이 됐다. 설마 그 미친년은 아니겠지……?
“혹시……머리카락이 하얀색인가요?”
만약에 그 여자라면 만나는 걸 고려해봐야만 했다. 하아……어쩌다가 사람 한 명 만나는 것에 이렇게 겁먹게 된 걸까?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여자 때문이다. 아아……정말 싫다. 부디 그 안즈라는 여자가 내가 생각한 인물이 아니기만을 빌며 대답을 기다렸다.
로라는 갑자기 머리카락에 대해 왜 묻는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대답했다. 내 얼굴이 당장이라도 똥 씹은 표정인 거 같아서 그런 거겠지.
복권 같은 건 다 빗겨 나가지만 안 좋은 예감은 확실하게 들어맞거든. 이런 건 만국공통이라 생각한다만 정도가 심하면 무슨 저주에 걸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든다.
“아뇨. 회색이었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하얀색은 아니지만 회색이라……한없이 하얀색에 가까운 색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불안해한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 여자가 머리 하얀 미친년이든 아니든 간에 손님으로 온 이상 만나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었다. 그 손님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그럼 만나러 가보죠. 어디에 있죠?”
“촌장님이 계시는 집무실에 있는데요. 그게…….”
언제나 명확한 로라답지 않게 말을 흐렸기에 혹시나 뭔가 잘못됐나 싶었다. 설마 그 손님이란 사람이 깽판이라도 부린 건 아니겠지? 그런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마을에는 로라를 비롯해 많은 실력자들이 있다. 마을에서 함부로 행동하다간 경비대한테 구속될 수도 있고, 심하면 다칠 수도 있는데 미쳤다고 난동을 부리겠는가?
“세린. 있잖아요. 음……야만족 중에 혹시 아는 분 계신가요?”
로라가 꺼낸 말은 상상도 못 했던 말이었다. 야만족……?
“어, 야만족이요? 혹시……우리 마을에서 조금만 가면 있다는 그 야만족(野蠻族)말씀하시는 거예요?”
로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기억의 바다에 다이빙한 나는 즉시 바다를 헤엄치며 자료를 모았다. 분명히……야만족은 마력은 약하지만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아주 가끔씩 이곳에 온다고 들었었지.
수도로 가기 위해 머무르게 되는 주변 마을이 이곳밖에 없으니까. 언젠가 한 번 보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주 예전의 이야기다.
“야만족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는데……그게 왜요?”
손님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을 했기에 나도 질문으로 답했고, 그녀는 그 질문에 머뭇거리며 답했다.
“그게……. 그 찾아온 손님이 야만족 분이시거든요.”
“……Pardon me?”
“네?”
아, 이런. 실수했다. 영어로 묻다니. 난 ‘아, 아니에요. 그보다 뭐라구요? 찾아온 사람이 야만족이라구요?’라고 물었다. 왜 내가 영어로 되물었을까? 로라가 서구적으로 생긴 여자라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정신줄이 나가 사용 언어를 한/영 버튼 누르듯이 막 바꿔서 그랬던 걸까?
임신 6개월 상태가 된 로라는 커다랗게 불러오는 배를 문지르며 웃었다. 내가 하도 표정이 확확 바뀌어서 웃겼던 거 같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확확 바뀌는데 본인인 나는 어떤 기분이냐고? 내 표정을 내 스스로 볼 수 없는 게 아쉽다……그 정도? 감정 바뀌는 걸 느끼는 건 마음만으로 충분하다. 내 못 생긴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다고…….
“야만족 분이 손님으로 찾아오는 건 저도 처음 겪는 일이거든요. 혹시나 세린이 저희 몰래 임신시킨 걸까 싶었어요.”
웃으면서 하는 말이지만 가시가 있는 말이다. 으윽. 레이 시리즈한테 매혹 마법에 걸려 아내들을 소홀히 했던 때가 떠오른다. 캡슐 만드느라 그 짓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는 걸 보니 이번에도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한 거 같다.
하긴……내가 생각해도 하반신을 엄청 흔들어댔지. 아스카도 임신시켰는데 야만족을 임신시키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아, 아닐 거예요. 그, 일단 집무실로 가볼까요? 손님을 계속 기다리게 만드는 건 예의에 어긋나니까요.”
정론을 말하며 말을 돌리자 로라는 살짝 뾰루퉁해 보이는 표정으로 내 곁에 왔다. 하아……정말 귀엽구만. 당장이라도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 손님한테 찾아가야만 했다. 근데 대체 누구야? 아무리 생각해도 야만족을 만난 기억은 없는데…….
집무실에 들어가니 그곳에는 아이나와 아이라만이 있었다. 모두 함께 모여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고, 아내들과 사랑을 나누기도 했던 집무실이 이렇게 넓게 느껴지는 이유는……아마 사람이 얼마 없어서 그런 거겠지. 나와 로라, 손님까지 포함해 다섯 명이 있는 집무실은 평소보다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들어가자 보였던 것은 회색 머리카락이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아이나, 아이라 자매와 살구색 머리카락의 로라. 검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나. 서로 다른 머리카락을 지닌 사람들끼리 모이니 눈이 부시다고 해야 할지, 비현실적이라 적응을 못 하겠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야 뭐 이미 적응했으니까 상관없다만.
회색 머리카락이라 상당히 얌전하고 조신해 보이는 여성이라 생각했지만……정면에서 보니 헉 소리가 났다.
하얀색 붕대를 상반신. 특히 가슴 부분에 둘둘 말아 가슴골 부근에 리본을 맺어놓은 모습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러다가 붕대가 찢어지기라도 한다면? 곧바로 아름다운 과실이 세상에 훤히 드러나겠지! 하반신 부분을 보니 더 기가 막혔다. 저, 저건……훈도시(褌 ; ふんどし)잖아!?
훈도시는 일본의 전통적인 ‘남성용 속옷’이었다. 스모 선수들이 입는 거랑 같은 거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스모 선수가 입는 훈도시는 마와시(廻し ; まわし)라고 한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착용하는 방법이나 모양, 쓰임새에 따라 종류가 나뉘는 물건이었다.
손님으로 찾아온 그 야만족 여자가 입은 훈도시는 가로 폭은 가까스로 골반을 가려줄 정도로 짧았지만 세로 폭은 무릎까지 올 정도였다.
무릎까지 올 정도니 치마로 치자면 매우 짧지만, 하반신의 소중한 부분이 슬쩍 슬쩍 보일 정도니 세로 폭이 매우 길어 보이는 묘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혜린이의 피부는 구릿빛이지만 어디까지나 건강미적인 것을 과시하기 위해. 그리고 야외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적인 선탠 및 태닝을 통해 그렇게 된 것이다. 로라나 메이는 원래부터 혜린이보다 더 아름다운 구릿빛이었기에 더욱 더 아름다워 보였지.
야만족인 이 여자는 로라나 메이보다 약간 더 구릿빛……어쩌면 흑인에 가까운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다. 흑인은 아니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흑인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햇빛 밑에서 보일 그녀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니가……아, 미안하군. 당신이 세린인가?”
사람을 부를 때 ‘니가’라고 부르는 걸 보니 반말이 입에 익은 사람 같았다. 혜린이나 안나, 희진이, 은채 등. 나한테 반말을 하는 여자들은 많았지만 대놓고 ‘니가’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야만족이라는 이름답게 예절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봐야 할까?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자니 내가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 같아보여서 기분이 좀 그랬다.
사람이 가져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는 편견이라 생각한다. 물론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고 서로 생각하는 바도 다르겠지만 편견은 그런 개인차나 생각이 안 좋은 쪽. 아주 극단적인 쪽으로 치우쳐진……공정하지 못한 생각이었다.
흔히 말하는 지역감정부터 시작해 인종, 종교, 국가, 문화 등. 어디에든 들어갈 수 있는 게 편견이었다. 이 편견은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의 사람들도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이었기에 비단 한국만을 한정으로 까이는 게 아니었다.
편견으로 인한 차별대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기에 이게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이 경우 편견을 가질 뻔한 부분은 그녀의 말투였다. 갑자기 반말을 하니 야만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문화나 생활이 우리─라고 해도 프레그넌트다. 프레그넌트를 비롯해 대부분 중세시대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마을이었기에 문화적으로 아주 상위권에 위치한 건 아니지만, 예절은 어느 정도 있었다─보다 떨어지는 건가 싶었다.
응? 복장은 왜 편견을 가지지 않냐고? 시원시원해서 보기 좋고, 저거보다 심한 코스프레는 얼마든지 봤으니까. 당장 그녀 옆에 있는 아이나를 봐라. 배가 불룩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검은색 T팬티와 세일러 복(상반신)을 입은 그 모습은 흡사 창녀와 같았다. 하, 하반신이 불끈거린다고……!!
안 그래도 손님으로 찾아온 ‘안즈’라는 여성의 옷이 자극적이었는데, 임신 6개월 상태가 되어 배까지 불러오는 아이나의 모습은 정말 고혹적이었다.
로라도 그렇고, 아이나도 그렇고. 내 주위의 여자들은 왜 이렇게 매력적인 걸까? 나이가 들지 않아 노화(老化)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좋았지만, 아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매력적으로 변해가는 거 같아 무서웠다.
“오오……그게 소문의 ‘자지’라는 건가……!?”
이, 이런……. 손님 앞에서 무례하게……. 나는 나답지 않게 부끄러움과 후회감을 느끼고 있었다. 희진이와 은채가 이 ‘하렘 어드벤처’에 왔을 때는 아예 따먹을 생각이었기에 얼마든지 발기를 할 수 있었다만, 그녀는 내 손님이었다. 손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어 면목이 없기도 했지만, 그녀가 말한 것을 되물어야 했다.
“저어, 저에 대해 아시나요?”
이 여자는 조금 전 [소문의 ‘자지’]라고 했다. 즉, 나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내 하반신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걸 모른다면 단순히 바지가 부풀어 올랐다고 해서 그런 단어까지 쓸 수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이 세상에는 ‘남자’가 없으므로 내 신체기관을 가리키는 단어는 말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인사가 늦었군. 미안해. 내 이름은 안즈. 보다시피 야만족이지.”
자신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인사하는 걸 보니 야만족이라는 단어나 성질에 거부감이 전혀 없는 거 같았다. 으음, 우리의 경우 ‘야만적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싫어할 텐데.
하긴……이 세상이 원래 내가 살던 세상과 똑같을 리는 없다는 사실은 내가 제일 잘 알 텐데 뭘 이제 와서 문명인인 척하는 걸까. 나도 참 가식적인 놈이다.
마을을 비롯해 사람, 괴물, 문화. 모두 다 내가 살던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개방적이며 순수했다. 이곳이 원래 세상이었다면 난 아내는커녕 여자 친구 하나 못 사귀었겠지.
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문명인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시점에서 내가 얼마나 오만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 건 그녀가 아니라 나다.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자기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개자식이니까.
내성적이며 소극적인 나한테 있어서 이 세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매우 솔직하며 순수한 곳이었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혜린이, 희진이, 은채. 모두 다 사람들이 순수하며 때가 타지 않았다고 했다. 가식 없이 사람을 대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여기서 깨달았지.
그런 면에서 볼 때 ‘야만적이다’라는 뜻은 거리낌 없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어쩌면 본능이나 성욕을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보다 더 충실하게 표현할 수도 있다.
당장 입은 옷을 봐라. 비키니 아머도 쇼킹한 복장이지만 저 복장도 결코 평범한 복장은 아니었다. 가슴을 만 붕대나 훈도시. 어느 쪽이든 현실 세상이라면 하나만 해도 보기 어려운데 둘 다라니. 정말 대단하군.
“하핫, 내가 그렇게 신기해? 하긴, 야만족은 어지간해서는 숲을 안 떠나거든.”
대놓고 말할 정도로 뚫어지게 봤다니. 어휴, 내가 무슨 문명인이야. 그냥 여자 몸에 정신 팔려 뚫어져라 보는 바보지. 마음속으로 후회와 자기혐오를 하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앗……죄송합니다. 그게……사실. 야만족 분은 처음 뵙거든요. 설마 처음 뵙는 분이 손님으로 오실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해서 그만……. 초면(初面)에 정말 죄송합니다.”
일단 미안하다는 사과부터 해야겠다 싶어 온갖 말이 다 튀어나왔다. 나도 참 웃긴 놈이었다. 보통 남자라면 발기한 것에 사과를 해야 하는데 지금 하는 사과는 물끄러미 본 것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더 웃긴 건……‘안즈’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하핫, 괜찮아. 보통 다 그래. 우리가 워낙 안 나가니까 야만족에 대해 잘 모르거든. 하긴, 안다고 해도 우리는 사람들이랑 같은 마을에 안 사니까 아무 소용이 없겠지.”
웃으며 말하지만 보통 사람들과 약간 거리감을 두는 표현에 살짝 긴장이 됐다. 자기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건 굳이 말 안 해도 안다.
헌데 그런 사람이 왜 나를 이런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온 걸까? 나를 찾아올 건덕지가 뭐가 있다고? 부자도 아니고 뭘 부탁해도 그 부탁을 들어줄 능력도 없는데?
“그나저나 대단한데? 이 마을의 촌장님까지 당신 아내라니. 당신, 꽤 센가봐?”
밑도 끝도 없이 나온 말에 난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이나가 내 아내라는 건 상관없다. 그건 사실이니까. 그런데……세다니? 아내랑 강한 거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저, 죄송한데……말씀하시는 것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공손하게 내 말을 전하자 그녀는 깜빡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밑도 끝도 없이 세냐고 물었는데 ‘예, 강합니다’라고 대답하면 그게 미친놈이잖냐.
게다가 난 안 강하다니까? 헬레나한테 처맞은 걸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쓰리다. 망할……그래서 내가 체술이나 검술 연습을 하게 됐지. 그 머리 하얀 미친년도 내가 훈련을 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다만…….
“아, 미안. 야만족에 대해 하나도 모르지? 우리는 『힘』을 가장 중요시하거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강한 힘』이라고 해야겠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가 나오자 안즈를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야만족은 숲에서 사는 종족이야. 필요한 때 외에는 숲에서 전혀 나가지 않아. 숲에만 있어도 우린 행복하니까. 하지만 필요한 게 있을 때는 밖으로 나가지. 주로 수도를 가지만 그걸 위해 반드시 들르는 곳이 이 프레그넌트야. 이런 내용, 들어본 적 있어?”
“어……없는데요.”
안즈는 가볍게 웃었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한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게 즐거워서 웃는 느낌이 들었다. 이 나이에 학생이 될 줄은 몰랐다……라고 말할 거라 생각했냐? 천만의 말씀이다.
최근 시작한 체술이나 검술부터 시작해 이 세상에 와서는 모르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걸 배우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 관심을 가져야만 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야만족은 그들만의 마을에서 숙식을 해결한다는 듯했다. 숲에 있는 나무 등을 써서 집을 만들어 생활하며, 숲에 있는 걸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밖에 나가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물건이나 도구를 사는 듯했다.
숲에서 대부분의 일을 해결할 수 있어 좋아 보였지만 그곳에는 하나의 커다란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괴물’이었다.
토벌에 성공한 우리야 더 이상 괴물놈들을 볼 일이 없다지만 그녀들한테 있어 괴물은 함께 숲을 쓰는 생물이자 라이벌이었다. 물론 괴물들한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이 ‘강한 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바로 괴물 때문이었다. 어떠한 종류의 괴물이 오든 간에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괴물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공격하더라도 그걸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자신들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었으니까.
괴물 이야기가 나오니 다시금 한숨이 나온다. 야만족도 다 여자일 테니까 ‘그녀들’이라 칭하겠지만……그녀들의 마음은 정말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숲에 아무리 많은 괴물이 있더라도 우린 그걸 처리해야만 했다. 괴물들이 숲에 존재하는 한 진정한 평화와 행복은 찾아올 수 없었으니까.
아이라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나, 혜린, 로라, 메이는 힘을 합쳐 괴물들을 처리했다. 레벨 업과 돈, 아이템을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프레그넌트를 위협하는데 어떻게 손 놓고 볼 수 있겠냐? 이곳의 위험은 내 위험이기도 했는데.
성벽에 둘러싸였다지만 그래도 위험한 건 여전했는데 하물며 숲에서 무리를 지어 살고 있는 그녀들한테 있어 괴물을 죽여야만 하는 대상. 그야말로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을 것이다. 서로 죽이려 들고, 죽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곳에서 산다면 ‘힘’은 절대적인 가치이자 기준이 될 수밖에 없겠지.
괴물의 수나 놈들의 습격, 자신의 힘이 부족한 것. 모두 다 슬프고 안타까운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죽으면 땡. 모든 게 끝나는 것이다.
프레그넌트에 오기 전에 봤던 그 여자. 이미 죽어버린 그 여자를 생각하니 다시금 마음이 아파온다. 그 당시에도 구할 수 있었지만 이미 너무나 늦은 상태였기에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었지…….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나 그녀들한테 큰 차이는 없는 듯했다. 우리나 그녀들이나 모두 괴물 때문에 속 썩이고 있고,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는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
뭐어……마을과 달리 그녀들이 숲에서 살며 ‘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은 차이가 될 수도 있지만, 일종의 문화로도 볼 수 있으니까. 거기에 편견이나 악감정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었다.
“고생 많으셨겠어요…….”
아이나의 그 말에 안즈는 ‘아니라고는 차마 말을 못 하겠네. 아하핫!’하며 호쾌하게 웃었다. 굉장하군. 자기가 겪어온 일에 저렇게 웃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많은 일을 겪었다는 거겠지. 아무리 슬퍼하고 우울해해도 달라지지 않는 일이라면 차라리 웃는 게 더 나을 거라 생각해서 저러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적어도 내 생각에 의하자면 말이다.
우울해하고 슬퍼해도 누가 다 받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 감정과 행동이 추후의 전투에서 목숨을 빼앗는 요인이 되어버린다면 손해 보는 건 자기뿐이다.
만약 자기 실수로 다른 사람이 죽어버리면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게 되는 일이니 질이 더 나쁘다. 어느 쪽이든 저렇게 웃는 편이 더 낫겠지.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만…….
“그, 여러 모로 힘드신 일을 많이 겪으셨다는 건 잘 알았습니다. 헌데……왜 저를 찾아오신 건지……?”
이야기를 하면서도 끝내 알 수 없었던 이유. 어째서 나를 찾아온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자 그녀는 ‘아, 맞다! 깜빡했어!’라며 웃는다.
으음……처음 만났을 때 미카가 생각난다. 호쾌하면서도 모두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미카와 안즈의 모습은 상당히 겹쳤기에 좀 부담스러웠다. 지금이야 깜찍한 내 아내가 됐다지만 처음 만났을 때 내 좆을 자르려 했으니 안 무섭겠냐……. 용케 아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응, 당신을 찾아온 건 아주 중요한 부탁을 하고 싶어서 온 거야.”
중요한 부탁이라니. 그 말만 들어도 부담스러웠다. 난 하루하루의 평화와 행복을 느끼기에도 힘든 몸이다. 체술이랑 검술 연습도 초보 레벨부터 시작해야 하는……약하디 약한 놈. 그녀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힘’이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뭘 부탁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음직스러운 놈도 아닌데, 중요한 부탁이라니. 뭘까?
“아아, 걱정 마. 사례는 확실하게 할 테니까. 음……정확히 말하자면 당신 외에는 안 된다고 해야 할까?”
사례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대놓고 묻기에는 너무 속물적이었기에 부탁의 내용을 물었다.
“간단해. 우리 야만족들을 모두 임신시켜줘.”
그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아이나와 아이라, 로라는 모두 나를 본다. 사랑을 가득 담은 눈이 아니라 분노와 경멸, 짜증이 듬뿍 들어간 눈이다.
아아, 알아. 날 저렇게 보는 이유는 대부분 ‘시발, 뭘 했길래 처음 보는 야만족이 저런 걸 부탁하냐? 대체 얼마나 하반신을 박아댄 거야? 얼마나 그 짓을 했으면 초면(初面)인 사람이 저런 부탁까지 하려고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냐고!?’라고 생각해서 그렇겠지.
보통은 내가 아니라 그런 부탁을 한 안즈를 봐야 했지만 내 아내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하, 지조 없고 절조 없이 마구 하반신을 움직여댄 업적이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좆으로 흥한 자, 좆으로 망한다고 해야 할까……. 분노와 눈물을 머금은 채 천장을 봤다. 하고 싶은 말이라…….
“……내 인생 퀄리티가 이렇죠, 씨팔…….”
아무래도……나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거 같다.
============================ 작품 후기 ============================
제목부터 시작해 본문 들어가자마자 ‘제목이 왜 이 따위일까’하고 까다니. 죠죠처럼 말하자면 ‘제목부터 주인공 엿 먹이려는 냄새가 풀풀 나는구만!’이겠네요. 고마워요, 스피드왜건!!
드디어 새로운 캐릭터, 새로운 사건의 시작입니다. 새 캐릭터는 복장부터 작가가 개막장 새끼구나 하는 걸 알려주네요. 가슴은 붕대로 묵고 하반신은 훈도시(처럼 생긴 T팬티로 이해하시면 편합니다)라니. 나니☆코레?
그것도 모자라 자기들 야만족을 임신시켜달라니. 독자들분들의 정신줄이 안드로메다로 전속전진이DA!! 카이바 사장 못지않게 전속전진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니라구요? 레드썬!!
그리고 마침내 추천수가 1,000을 넘겼습니다. 지금까지 추천해주신 분들께 다시금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선작수는 추천수보다 더 많은데 추천은 거기에 따라가질 못해서 아직 제가 많이 부족하구나 싶었거든요.
조금씩 쌓이고 쌓여 마침내 1,000 추천수를 넘겨 진심으로 기쁩니다. 앞으로도 독자분들께 즐거움과 웃음을 선사하는 작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 물론 그 즐거움과 웃음 안에는 개막장 요소(웃우우우웃! 같은 거)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차피 막장으로 시작한 소설, 끝까지 막장으로 도배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작가, 캐릭터, 스토리, 세계관도 다 막장이잖습니까.
드디어 6월이네요. 2017년의 반에 가까워졌는데 성과는 별로 없었던 거 같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안정적인 직업과 생활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게 어렵네요. 소설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도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