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3 「13-2 : 평화로운 이야기 (4)」 =========================
아무런 탈도 없이 4개월이 흘렀고, 난 아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라는 미래는 없었다. 이 소설이 그렇게 흘러가면 작가가 ‘테에? 이 새끼(주인공)는 더 고생해야 하는 테치! 아직 더 굴러봐야 정신을 차리는 테틱! 작가의 손아귀 안에서 굴러보는 테챠아아아!’라며 지랄발광을 떤다. 아아, 이 얼마나 불쌍한 주인공이란 말인가?
최근 나오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등에서는 ‘임신 엔딩’이라는 게 존재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성과 맺어지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게 아니라 그 여성이 주인공의 아기를 임신 혹은 출산한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플레이어나 시청자, 구독자들한테 만족감과 훈훈함을 주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한 엔딩이 있다는 사실에 ‘오, 그럼 좋겠네. 아기 낳고 훈훈하게 끝나니까 보기 좋네’라며 생각했던 적이 있다. 아기나 가정을 가진다는 건 나한테 있어서 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예전에도 그랬다만 현재 헬조선에서 결혼이나 출산 따위는 꿈도 못 꿀 일이다. 하물며 빚쟁이인 내가 연애라니. 웃음만 나올 이야기다.
이 ‘하렘 어드벤처’에 와서 하렘까지 만들었는데 날 방해하는 요소라면 역시 그 빌어먹을 미친 여자다. 머리 하얀 미친년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한지는 여러분이 잘 아실 거라 생각한다.
뭐? 모른다고? 야, 생강 먹고 생각을 해봐(이거 개그다). 너 같으면 백발(白髮)의 미친년이 니 목숨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데 안 무섭겠냐?
어찌 됐든 혜린이의 부탁대로 현재 내 아내들은 모두 임신 6개월 상태가 됐다. 이제 곧 7개월로 접어든다지만 갑작스럽게 성장한 아기들로 인해 그녀들은 평소보다 행동을 조심스럽게 취해야만 했다.
이전처럼 훈련 중에 나와 섹스를 나누는 것도 하기가 어렵게 됐다. 갑작스럽게 성장한 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안정이 최우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3~4개월이면 출산이다. 아기를 낳은 후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 전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지도 않는 사람이 되기는 싫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작은 것들밖에 없겠지만, 그런 것들을 조금씩 실천해 나가는 걸로 아내들을 지킬 수 있다면 난 만족한다.
현재 로라는 경비대원들과 함께 나가 경비대장이 해야 하는 일 등을 가르치고 있었다. 원래라면 미카가 경비대장으로 잠시 있었어야 했지만 동시에 아기를 낳기 위해 고속성장의 효과를 받은 지금, 누구 한 명을 경비대장으로 선출하기는 어려웠다.
차기 경비대장을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험할 때 바로 경비대장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로라가 노력 중인 거다.
이는 미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가지 않는 경비대원들한테 경비대장이 갖추어야 할 지식이나 시선 등을 가르친다. 필기와 실습 같은 느낌이었지만 배워둬서 생존율을 높이는 거니 누구 하나 불만을 말하는 자는 없었다.
괴물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때 로라나 미카가 없다면 자기들 중 누군가가 경비대장의 업무를 맡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체술 훈련과 검술 훈련은 안나와 니나가 돌봐주게 됐다. 정식적으로 교육을 받은 건 아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용병 생활에 익숙해져야 했던 안나와 니나는 필요하다 싶은 것만을 가르쳐줬다. 이렇게 해도 되냐고 물으니 자기들과 경비대의 사정은 다르기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나?
경비대원들은 성벽이나 기둥 등을 써서 방어에 특화된 타입이라 한다. 괴물이 쳐들어오면 싸우긴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싸우는 거지, 직접 토벌을 하러 갈 정도의 적극성도 없고 그럴 인력도 없다며 살짝 비꼬았다. 내가 과거에 혜린이랑 토벌을 했었으니 그 말에는 동의했다. 그때는 용케 그 짓을 했어…….
경비대나 기사단은 기술을 익히며 필요할 때 적절한 기술(체술이나 검술)을 쓴다. 여러 가지를 익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그만큼 대응의 폭이 넓기에 용병보다는 높게 평가된다……그게 일반적인 의견이었다.
반대로 용병의 경우 기술 같은 걸 단련할 시간은 거의 없다. 용병은 어디까지나 임무 완수와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므로 확실한 타격 & 도망이 우선시된다.
확실하게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적의 약점이나 버릇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항상 관찰력을 높여야 하며, 안 되겠다 싶은 적을 만나면 바로 도주해야 한다.
경비대원은 쓰러지면 다른 동료가 구해주지만 용병은 아니다. 자기 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버릴 수도 있는 것이 용병이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 걸 최우선으로 여겨야만 했다. 죽은 다음에 금은보화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모녀가 용병 생활을 하는 건 좀 드물었지만 가족이 함께 있는 덕분에 생존율은 비약적으로 올라간다. 게다가 안나는 용병이었던 어머니의 기술을 전수받았기에 생존과 함께 니나의 교육도 맡을 수 있었다. 경비대처럼 훈련이 아니라 늘 실전을 경험했기에 지식이나 대처에 곤란할 일도 별로 없었다.
주로 괴물과 싸웠던 안나와 니나지만 혹시나 사람과 싸우게 된다 해도 ‘사람이 상대라서 졌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패배에 이유는 있을지 몰라도 이유가 모든 걸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강해진다고 해도 개인차는 있었고 개인의 성향에 따른 차이도 물론 존재했다. 안나는 원거리 마법 등을 주로 써서 괴물들을 죽였지만 니나는 마력을 이용해 신체능력을 상승시켜 근거리 전투를 자주 벌였다. 다른 성향의 사람끼리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주기도 했지만, 가족이라는 유대감으로 인해 다른 용병들보다 더 많은 전과를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용병이란 정규군이나 경비대원들과는 다른 것이다. 식사나 숙소 등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생활 부분에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해야만 했다. 믿을 수 있는 동료를 만들기도 어렵고 어딘가에 터전을 잡는 것도 어려웠으니 니나가 진절머리를 냈겠지.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간다.
현실에서 괴물은커녕 사람이랑 싸운 적도 없는 내가 어떻게 니나의 기분을 이해하냐고? 나도 비슷한 경험을 이미 했거든. 계약직이라고 들어는 봤냐? 아마 알겠지. 내가 몇 번이고 말했고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점 중 하나니까.
계약직으로 어떻게든 취업한 건 좋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내가 취업한 계약직은 겨우 1년 짜리고 정규직이 되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노오오오오력의 문제가 아니라 시험 등을 볼 필요가 있었고, 그런 준비에 대해 알아보려 해도 일을 하는 곳에서는 의도적으로 그런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1년 더 연장하나 싶었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이 소설 프롤로그를 읽어봐라. 하아……그 당시 기억은 떠올리기도 싫다. 단숨에 내쳐지는 그 아픔! 생각만 해도 아프다.
노력이고 지랄이고 아무런 쓸모가 없다니까? 마음 붙일 직장도 없는데 무슨 노력을 하란 말이냐. 빌어먹을.
사람이 가정을 가지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 사람과 함께 결혼해서 아기를 낳고, 가정을 꾸림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어 하는 것도 포함된다.
자기가 있을 곳을 만들고, 그곳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의 귀가(歸家)를 기다린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계약직이 용병과 완전 똑같은 개념은 아니다만, 자기를 기다려주는 소중한 사람이나 가족도 없고 돌아갈 곳도 없다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용병은 돌아갈 집이 없다. 소중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안나와 니나는 내 아내가 되기 전까지는 서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급박했기에 그럴 시간이 없던 것도 문제였지.
계약직이 용병 같은 시궁창은 아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규직 선출부터 시작해 계약직이나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원인을 해명해야만 한다.
그 원인을 고쳐야만 하는데 대한민국 정부는 그러한 짓을 하지 않았고 지금도 안 하고 있고, 앞으로도 안 할 것이다. 자기들을 빨아주는 노예들이 산더미처럼 있으니까…….
……으응? 자, 잠시만. 이렇게 보니 좀 시궁창인 게……. 뭐야!? 중세 시대보다 몇 십 년이나 앞선 것도 모자라 사람들의 의식이 개혁됐음에도 여기의 용병생활과 현실의 계약직이 비슷한 처지라니?
시발 그럼 현재 대한민국은 판타지 세상만도 못 하다는 소리잖아!? 예전부터 있었던 문제가 아직도 해결 안 된 것도 모자라 더 심각해졌으니까!
난 경제론도 모르고 제왕학을 배운 적도 없다만 그래도 현재 한국이 심각한 문제에 처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니, 중세시대랑 비교해서 도찐개찐이면 어쩌자는 거야…….
더 이상 돌아갈 수도 없지만 판타지 세상에 와서까지 나를 걱정하게 만들다니. 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나라다. 한숨을 쉬며 다시금 체술 연습에 들어갔다.
안나와 니나가 가르쳐 준 체술은 까놓고 말해 급소 공격이었다.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짓는 행위를 할 필요도 없지만 설령 한다 치더라도 승리(생존)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실용주의적인 그들의 사상과 생각을 받아 난 정말 필요한 기술, 적절한 방법만을 배우기로 했다. 그 중 하나가 급소 공격이었다.
국부 또는 급소라고 불리는 곳은 사람한테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였다. 약점을 노오오오오오력으로 극복하면 안 된다고 지껄이는 분한테 내가 하나 물어보자.
“너희는 눈, 코, 입, 좆, 배 안에 있는 내장을 노력해서 단련할 수 있냐?”
묻고 나니 또 웃겼다. 대답은 정해져 있는데……. 절대 할 수 없다. 눈이나 코, 입 같은 부분은 살면서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인식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다. 필수적인 기관이며 이러한 신체들은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내장을 단련해서 어디다 써먹는단 말인가? 애초에 단련조차 불가능한 것을……!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급소를 잘못 맞으면 황천 갈 수 있고, 살아남는다 치더라도 치명적인 데미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안나와 니나는 그런 급소를 누구보다 집요하게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급소를 맞은 사람은 반격을 할 수 없다. 당장 몸 안에 들어간 데미지에 괴로워하느라 죽을 지경인데 씩씩하게 일어나 반격이라니. 현실은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다.
얼굴이나 배, 옆구리, 정강이 등 사람의 약점이 이렇게 많은 건가 싶었다. 체술 훈련이 어느새 인체 해부 시간이 된 거 같아 살짝 오싹했다만……강해지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 여자한테 통할지 어떨지는 둘째 치고 배워둬서 나한테 나쁠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체술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사람의 급소에 주먹이나 발을 꽂아 넣는 행위는 할 수 없었다. 난 변태일지는 몰라도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쓰레기는 아니다.
이 훈련은 어디까지나 지식을 듣고 그 지식을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실행하기 위해 하는 훈련이지, 사람 죽이거나 괴롭히는 게 아니니까.
현재 내 훈련은 안나나 니나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었다. 좀 어설프게 따라하니 부끄럽기도 했지만 비웃지는 않았다. 실제로 급소 공격 등을 했던 안나와 니나 입장에서는 복잡한 기분이겠지. 나한테 가르쳐주는 내용은 사실 매우 위험한 것이니까. 함부로 썼다간 죽을 수도 있는 지식을 가벼운 마음으로 가르쳐줄 수는 없잖냐.
오후에는 검술 훈련이었다. 이전처럼 목검 휘두르기만 하면 충분했기에 나 혼자가 됐다. 아무도 없는 훈련장 구석에서 홀로 목검을 내리치는 건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었다. 내려치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 내 미래, 잡생각 등 온갖 걸 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했으니까.
괜히 나 때문에 시간낭비뿐만 아니라 힘들었던 과거까지 떠올리게 만든 게 미안했기에 두 명한테는 푹 쉬라고 했다. 고속성장으로 인해 아기를 돌봐야만 하는 두 명은 아직까지는 경비 업무에 나갈 생각이라고 했다.
난 말렸지만 두 명은 프레그넌트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힘이 닿는 곳까지 하고 싶다며 스스로 나섰다. 고집 센 건 나 닮은 거 같다.
이런 나날이 계속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들이랑 함께 지내는 시간이 줄어든 건 아쉽지만 앞으로 한 달 정도만 지나면 안전을 위해 경비대의 숙소에 머무르게 될 거다. 함께 웃으며 지낼 훈훈한 미래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가 지금까지 바랐던 평화와 행복을 얻으니 이렇게 기쁘지만……반대로 무섭기도 하다. 이 행복함이 단숨에 박살난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가 그러냐고? 그 머리 하얀 미친년이지 누구긴 누구야…….
레벨 10이 됐을 때 아이나가 날 불렀던 것처럼 괜히 또 이상한 짓을 벌여서 이 평화가 깨지는 건 사양이었다. 문제는 내가 사양해도 그 년은 그냥 밀어붙인다는 거지. 내 말을 듣지도 않는 폭군을 어떻게 처리하란 말이냐? 내가 이렇게 흐뭇한 기분으로 훈련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비웃겠지.
‘ㅋㅋㅋ 병신 새끼, 꼬라지 보소! 야, 니가 지금 겪고 있는 행복이 니 힘으로 이룬 거라 생각해? 어휴, 쪼다 새끼! 야, 넌 그냥 병신이야! 내 손 동작 하나로 깨꼬닥! 뒈질 수 있는 그냥 버러지라고! 니가 지금까지 이룬 업적은 모두 내 힘 덕분이었지? 그 힘이 없으면 괴물한테도 쩔쩔 매는 병신 새끼가 뭐가 좋다고 헤벌쭉 대는 건데? 하반신 박아대는 것도 내 마법 아니었으면 못 했을 놈이……야, 넌 나한테 뭐 해야 할 말 있지 않냐?’
고맙다, 시발년아. 단순히 생각만 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열이 받는다. 참 신기하다. 만약 내가 화를 내야 하거나 억지로 흥분한 척을 해야 한다면 앞으로 그 년을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이 얼마나 쉬운 방법이란 말인가? 그저 생각만 하면 된다니!
……아니지. 기억의 바다를 좀 더 뒤져보니 아직 더 생각해야 할 것이 남아있었네. 바로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레벨 10이 됐을 때, 너희가 부카케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안나랑 니나한테 납치당했을 때. 마리아랑 아테나까지 보냈었지. 니 생각 맞아. 니가 말하는 ‘원하지도 않는데 휘말리는 상황’을 만든 건 바로 나야. 하지만 말이지……니가 그때마다 했던 일을 생각해봐. 그 이벤트가 뭘 뜻하는지 금방 답이 나올걸?’
‘힌트 잘 들어? 힌트는 바로……. ‘언제나 너는 거기에 있었다’야. ‘거기’가 어디냐고? 그건 니가 찾아야지. 단어 선택에 따라 다르겠지만 찾으면 분명 반성할걸? 태어나서 지금까지 했던 걸 합쳐도 도저히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엄청!’
그녀는 대체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내가 했던 일? 나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고? 마치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주관식 문제를 푸는 느낌이었다.
객관식이라면 예시를 보고 조금씩 답을 줄여가는 소거법이나 쓸 수 있지. 주관식은 모르면 글자조차 못 적는다. ‘친구들아, 미안해’라고 적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이게 무슨 도전 골든벨도 아니고.
그냥 날 비웃는 년이 막 지껄이다 나온 헛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음에 걸렸다. 내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여자가 굳이 나한테 그런 걸 가르쳐준 이유가 무엇일까?
저렇게 생각해보라고 힌트까지 준 것도 모자라 그걸 깨달으면 내가 엄청나게 반성할 거라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했던 것을 다 합쳐도 모자랄 정도의 반성이라……. 내가 그렇게 엄청난 죄를 지었나?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문제로 끙끙 앓는 건 내 취향이 아닌데. 에이, 나중에 되면 알게 되겠지. 그 여자가 나중에 날 죽일 때 물어볼 수도 있는 거다. 그걸 가지고 죽기 전까지 답이 뭘까 하며 고민할 바에야 차라리 아내들을 한 번 더 안아주는 게 나한테는 이득일 것이다.
멋대로 결론을 내며 다시금 목검을 휘둘렀다. 혼자 있어서 좋긴 좋지만 역시 휘두르다보니 생각은 고민 해결에 집중하게 된다. 평화로워졌으니 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고민을 해결하자는 생각은 잘 알겠다. 하지만 해결 방법이 없고 답도 모르는데 다른 거나 생각하자.
아, 맞다. 마리아랑 아테나, 헬레나를 잊고 있었군.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아내들한테 마음속으로 사과를 하며 다른 생각으로 접어들었다.
왕궁에 있는 그녀들은 아직 프레그넌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고속성장을 쓴지 3일도 채 안 지났다는 건 우리가 프레그넌트에 돌아온 지 채 4일이 지나지 않았다는 소리다. 해결해야 하는 일이 많겠지.
훈련하고 있는 내 모습을 헬레나가 본다면 과연 어떤 말을 할까? 열심히 하고 있어서 기쁘다……라는 말을 바라긴 하지만 헬레나 입장에서 보면 난 햇병아리조차 못 되는 인간이다. 아마 둘러서 틱틱 까지는 않을까?
‘임금님, 목검이라지만 목검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는 물건입니다. 그런 위험한 물건은 올바르게 쓰셔야지, 장난감 휘두르듯이 가지고 노시면 안 됩니다. 표정이 왜 그러신지? 기분이 나쁘면 스스로 노력하시면 될 일입니다.’
“으윽……네 이년……!!”
갑자기 입에서 욕이 나왔다. 굉장해! 아직 만나서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헬레나의 반응을 이렇게까지 유추해낼 수 있다니! 나 어쩌면 예언가 아닐까? 선지자? 미래를 볼 수 있는 남자? 뉴타입!? 온갖 잡생각이 들자 목검을 휘두르던 손이 멈추게 됐다. 이런, 계속 휘둘러야지.
날 에둘러 까는 내용이었지만 생각해보니 이게 엄청 웃겼다. 하핫, 그래. 그렇게 건방진 너라도 밤에는 아랫도리에 매달려 내 똘똘이를 빨아대는 암캐일 뿐이지!
내가 또라이 짓을 하게 된 건 전적으로 내 탓이지만 헬레나로 인해 곤란하게 된 점을 꼽으라면 ‘말투’였다.
헬레나가 아침 식사 때 날 살해하려 했던 때 이후로 가끔 임금님 같은 말투를 쓰게 됐었지. 그게 왕궁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나와 버려 요즘에는 나도 모르게 ‘짐’ 같은 말을 쓰게 됐다. 아내들은 엄청 웃어댔지. 망할. 내가 생각해도 참 미친 말투였다. 예시? 음, 이미 말했지만 굳이 예시로 말해주자면…….
‘오오, 기쁘구나. 짐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렇게 꽃잎을 적시다니. 귀여운 것……내 너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마. 걱정 말거라. 무서운 건 곧 쾌락으로 변할 테니. 짐한테 모든 걸 맡기거라……’
ㅋㅋㅋㅋㅋ 아 쫌
ㅋㅋㅋㅋ 이건 ㅋㅋㅋㅋㅋ
내가 생각했지만 부끄럽기 짝이 없다! 아니, 진짜 무슨 생각이냐? 내 대가리가 원래부터 미쳤다는 건 나도 인정해! 근데 말투가 이게 뭐야 대체!? 왕궁에 있었을 때는 섹스 삼매경이었고 말투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웃는 사람이 거의 없었었다.
하지만 프레그넌트에 돌아와 그런 말투를 쓰니 엄청 웃겼다. 와, 내가 용케 저런 말투를 썼구나 싶더군. 노인이나 국왕 같은 말투를 나이 27 처먹은 놈이 쓰니 쓰는 나도 부끄러운데 듣는 사람이야 오죽하겠냐? 그것도 왕궁이 아닌 마을에서?
내가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임금의 권위를 살리려 했기에 쓰게 된 것이었고, 그 권위를 살리려 했던 이유는 날 살해하려 했던 헬레나와 경비대원들을 막기 위함이었다. 빌어먹을! 내가 이렇게 된 모든 원인 중 하나는 바로 헬레나, 너였단 말이다!
닿지도 않는 내면의 목소리로 그녀를 욕하며 힘차게 목검을 휘둘렀다. 어휴, 이게 무슨 꼴이람. 한숨을 쉬며 잠시 연습을 멈췄다. 이렇게 되긴 했지만 화가 났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즐거웠다. 즐거우니까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즐거운 일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괴로운 일이나 고통에서는 끝을 찾기가 어렵다.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찌 보면 굉장히 나쁜 것일 수도 있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으려는 발버둥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이제 곧 저녁인가. 저녁이 되면 따뜻한 빵이랑 스프가 준비됐겠지. 아내들도 기다리고 있을 거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웃으며 말할 거고 사람들이랑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도 말하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두 다 알고 있을 거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의 기분이 이런 걸까. 내 처지가 하도 가엾고 딱하다 보니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됐다. 내가 어쩌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됐을까 묻는다면 ‘내 목숨 쥔 미친년 때문에 이렇게 됐습니다’라고 대답해야겠지. 남 탓하는 건 좋지 않은 행동이지만 이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그 썅년 때문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만 나고 답은 없군. 부정적인 생각은 그만두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나 생각하자. 마리아랑 아테나, 헬레나가 오게 된다면 틀림없이 배가 부르게 된 아내들을 보고 놀라겠지. 진심이 들어간 축복을 할 거고 그 다음에는 나를 쪼아댈 것임에 틀림없다.
아! 참으로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미래나 내 미래는 모르는데 왜 한심하고 불행한 미래만큼은 어떻게 이토록 잘 보이는 걸까?
나를 쪼아대는 세 명의 말투와 표정, 감정까지 보일 정도면 나도 참 맛이 간 놈이다. 그 머리로 다른 걸 생각하라고 멍청아…….
저녁시간이 가까워지자 바람도 살짝 쌀쌀해졌다. 목검을 들고 숙소로 천천히 걸어간다. 만나는 경비대원들마다 인사를 하며 오늘은 어땠냐, 식사는 맛있냐 등의 질문을 던졌다.
누가 보면 평범하고 별 가치 없어 보이는 인사지만 나나 아내들한테 있어서는 소중한 것들이다. 더 이상 괴물의 위협을 받지 않고 서로 웃으며 대화를 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이던지!
어차피 내 말이나 소원은 들어주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머리 하얀 미친년한테 부탁하고 싶은 거라면……어차피 아이가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운명이다. 부디 현재의 평화와 행복만이라도 즐겁게 누리게 해주세요. 이 정도다.
금은보화나 명성, 지위 따윈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 게 아무리 있으면 뭐하냐. 불행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인데.
사람은 가지고 있을 때는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한 가치를 모르지만, 잃어버린 다음에는 뼈저리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난 이미 가지고 있던 대부분을 잃어버렸기에 기껏 손에 넣은 것들을 다시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 이상 다른 무언가를 바라지는 않으니 그저 현재에 만족하게 해달라는……그런 소심하다 못해 누군가 들으면 ‘그게 소원이냐?’라고 비웃을 거 같은 소원을 마음속으로 빌며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와, 세린. 배고프지? 빨리 먹어.”
“아빠, 아빠! 오늘 아기가 경비 서는 도중에 막 움직였다? 에헤헤, 아빠랑 같이 놀고 싶어서 그런 걸 거야!”
“니, 니나만 그런 거 아니에요! 제 아기도 움직였어요! 아빠, 메이의 말. 믿어주시는 거죠? 네?”
식당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내 딸과 아내들은 오늘 있었던 일을 서로 이야기했다. 모든 걸 들어주기 위해 식사시간이 늦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한테 있어서는 식사도 중요하지만 아내들(딸 포함)과의 대화도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그 내용을 들으니 벌써부터 웃음이 멈추지가 않는다. 아빠가 오는 걸 기다렸다가 문이 열리자 도도도 뛰어가는 병아리 같았다.
“그래? 우리 메이랑 니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어볼까?”
그 말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식탁으로 날 안내하는 두 명의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후후, 몇 번이고 말하지만……내 딸이다. 내 아내고. 안 줄 거다.
여러 가지로 고민할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태산 같았지만……오늘 하루도 충실한 하루였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요약하며 스프를 떠먹었다.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 작품 후기 ============================
19금씬이 없는 편이라니. 그러면서도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다니. 작가인 제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잘 보여주는 편이네요. 저도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단지 이 좆같은 세상이 저를 놓아주지 않을 뿐.
이야기도 중반을 넘었으니 슬슬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야겠죠. 그 전까지는 세린을 쉬게 할까 싶네요. 몸과 마음이 힘드니 후기 쓰는 것도 힘듭니다. 저도 세린처럼 쉬고 싶은데 왜 이토록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존나 미스테리입니다.
점점 뜨거워지는 계절입니다. 부디 몸조리 잘 하시며 일상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