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9 「12-8 : 중장(中章)의 시작 (18)」 =========================
시간은 화살과 같다는 말은 누구나 듣는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미 아침까지 먹은 우리는 왕궁에 마련된 텔레포트 에어리어에 들어간 상태였다. 황금빛 비키니에 둘러싸인 수박 크기의 가슴을 출렁거리며 마리아는 키스를 요구했다. 이게 마지막 키스라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그녀를 강하게 안았다.
아테나와 헬레나 또한 키스를 잊지는 않았다. 배웅할 때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있고 싶어 한 그녀들이었기에 배설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몸이 더러운 상태로 즐기는 것도 좋았지만 역시 그녀들은 깨끗하고 고귀한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린다.
“그럼……나중에 봐.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정이 되면 저희가 찾아갈게요. 세린도 늘 몸을 챙기세요.”
“나야 뭐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으니까 챙기지 말라고 해도 잘 챙길 거야. 아테나도. 엄마 속 너무 썩이지 말고.”
“그런 거 안 해. 그, 아빠……꼭 가야 해?”
그 말에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어제부터 시작해 왕궁의 아내 세 명은 꼭 가야 하냐며 물었다. 프레그넌트에 돌아가지 말고 왕궁에서 함께 생활하자는 그녀들의 권유는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귀가 솔깃해질 정도지.
이 아름다운 아내들뿐만 아니라 모든 여자를 마음대로 탐할 수 있고, 원하면 권력을 써서 모든 여자들을 범할 수도 있는 절대적인 위치였으니까.
하지만 난 그 권유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 한 후, 만약 시간이 꽤 흐른 다음에 여유가 있으면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다 알겠지만 내가 한 ‘만약 시간이 꽤 흐른 후 여유가 있으면’이라는 말은 그 머리 하얀 미친년이 날 살려뒀을 때를 말하는 거다. 내 목숨을 내가 보장할 수 있다니. 완전 살아있는 시체로군. 그런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나왔다.
생(生)과 사(死)는 누구나 겪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자라면 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자유로울 수 없는 것에는 세금도 들어가고 한국인 남성의 경우 군대 혹은 신체검사(신검)도 들어가긴 한다만, 절대 피할 수 없는 건 죽음이다. 내 경우에는 그 죽음이 미친년의 손아귀에 달린 노릇이니 환장 안 할 수가 없었다.
머리 하얀 미친년에 대해서는 그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혜린이한테도. 그 정도로 그 백발의 여자는 위험한 요소였다. 함부로 말해서 다른 아내들이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니, 말한다 치자.
뭐가 달라지냐?
나를 포함해 우리는 그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추측만 할 뿐이고 그 추측이 맞든 틀리든 간에 달라지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우리를 마음대로 다루고 지배한다. 불공평한 것도 이 정도면 신(神)급이다. 헬조선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미친년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니. 내 인생 왜 이러냐…….
내 인생의 암울함을 후회하는 거라면 나중에 하자. 지금은 서운해 하는 아테나를 달래줄 때다.
“아빠 생각을 그렇게 해주니 고맙네. 마리아랑 자주 찾아와. 아빠는……여러 가지 해결할 일이 있어서 프레그넌트로 가야 해. 우리 착한 딸은 아빠 이해해줄 거지?”
눈물을 참으며 대답하는 아테나를 착하다며 다시 쓰다듬었다. 헬레나는 두 명에 비해 감정을 많이 드러내지는 않았다.
“몸도 중요하지만 단련도 빼먹지 마시기를……. 임금님은 상상 이상으로 약하시니까요.”
조금 사무적인 말투로 돌아온 건 내가 돌아간 후부터 다시 마리아와 아테나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두 명을 사모하지만 그 마음을 허락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었다. 헬레나답다면 헬레나다운 선택이다.
“끝까지 신세만 지고 가네. 그래, 말한 대로 강해지려고 노력할게. 너도 건강하고……두 명 잘 부탁해.”
“걱정 마십시오. 그럼……안녕. 세린.”
맨 마지막의 애틋한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기러기 아빠도 아니고 이게 뭐야……. 손을 흔들자 그들도 안타까운 얼굴로 손짓했고 곧 눈앞의 광경은 바뀌었다.
프레그넌트 안에는 텔레포트 에어리어가 없다. 따라서 주변에 텔레포트를 한 후 걸어서 돌아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돌아 왔네요……저희 고향으로.”
로라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보이는 성벽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다. 견고하면서도 모두를 지켜주는 느낌이 드는 따스함. 헤어진 슬픔은 어느새 고향의 풍취로 치유되고 있었다.
마을로 돌아가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음……. 이제 혜린이나 로라, 메이는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배가 불렀다. 이 상태에서 격한 움직임을 취했다간 아기한테 큰 부담이 갈 수가 있으니 그녀들은 무조건적으로 안정을 취해야만 했다.
로라가 움직이기 힘든 동안에는 미카가 대신 경비대장 일을 맡을 것이다. 로라가 출산한 후에는 원래대로 경비대장 일을 맡겠지. 그 동안 미카는 출산에 전념을 할 거고. 아이나 또한 꽤 배가 불러왔기에 촌장 일을 하며 안정을 취해야만 했다.
안나와 니나, 아이라, 희진, 은채, 아스카. 이 여섯 명은 아직 임신 초기였기에 다른 아내들이 활동할 수 없는 분야나 업무에 대신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만 했다.
아이라의 경우 아이나의 동생이며 오랫동안 공부를 했기에 촌장의 자리를 잠시 동안 맡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안나와 니나는 미카를 따라 경비대 업무에 들어가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했다. 그녀들 또한 서류 업무보다는 용병 생활 때처럼 몸을 움직이는 편이 더 적합했다. 괴물이 없어진 지금에 와서 목숨 걸고 싸울 필요도 없을 테니 편하기도 했고.
희진이와 은채는 실전은 겪었지만 경비대 업무를 맡기에는 좀 불안했기에 여러 분야에 도전을 해봐야만 했다. 경비대 업무든 허드렛일이든 간에 자기 할 일을 해야만 프레그넌트의 일원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마법 공부를 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부카케에서 검사나 마법사를 타입별로 육성시키는 걸 보고 로라도 우리 마을에서 저런 걸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말을 했었다. 난 그 아이디어를 채택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희진이와 은채가 그 첫 번째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온다.
아스카와 레이는 순찰 및 경비를 서며 주변에 괴물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는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다.
괴물은 자기들 이외의 종족과 공존하지 않는다는 걸 들었을 때 ‘그럼……괴물은 일종의 레이더 아닌가? 자기 이외의 괴물을 잡아낼 수 있는 능력을 쓴다면 마을의 안전에 일조(一助)할 수 있을 거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었지.
그런 용도로 쓸 생각이 아주 많았던 건 아니지만 이왕 함께 살게 된 이상 그녀들도 프레그넌트의 안전과 평화, 행복을 위해 일해 줬으면 했다. 아주 어려운 것도 아니고 목숨 걸 필요도 없으니까 그녀들도 기꺼이 동참하겠지.
아이나와 거의 동일하게 마을 여성들을 임신시켰기에 그녀들의 임신 또한 3개월 정도에 도달한다. 아이나와 함께 출산할 그녀들을 생각하니 아랫도리가 다시금 팔팔해진다.
뭐……여기서는 분유 값이나 질병, 보험비 등을 생각할 필요가 거의 없으니 나야 좋지. 박아대고 좆물을 싸며 즐기면 끝이라니. 최고잖아?
쓰레기 같은 말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 ‘하렘 어드벤처’를 살펴본 결과 알아낸 것 중 하나는……이곳에는 내가 살던 곳처럼 암이나 심각한 질병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생명의 씨앗’으로 인해 체력이 급격히 내려간 상태에서 아기를 출산할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었으며, 아이나와 아이라의 어머니가 그러했다.
생명의 씨앗이 맞지 않는 사람이 1명 이상의 아기를 출산할 경우 몸 상태는 급격히 나빠진다. 그 경우 아기를 지워버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아이나와 아이라의 어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그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됐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 외에 질병이나 중병에 의해 사망했다는 걸 들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체력이 떨어진다면 또 모를까 병에 걸린 것 자체를 본 적도 없었다. 이 세상은 노화(老化) 외에도 없는 것이 가득했다.
오직 남자를 즐겁게 하기 위해 방해가 되는 요소를 모조리 빼버렸다는 점에서는 그 미친 여자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그 덕분에 이런 문란한 생활이 가능한 거지.
문란한 생활이 나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곳에는 그것 외에 즐길 거리가 없었다. 생각해봐라. 중세시대에 뭐가 있냐? 폰? 컴퓨터? 책이나 있으면 다행이지.
책조차 얼마 없었다. 책의 형태를 갖춘 것들은 대부분 예전의 촌장들이나 아주 중요한 걸 기입(記入)해둔 것이었으며 그마저도 3권 정도? 그걸 볼 바에야 차라리 다른 걸 하지.
검투사 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살인 같은 범죄를 저지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을의 평화와 안전을 되찾은 이상 그걸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그 노력을 섹스로 보상받는 것뿐. 그들 또한 즐기고 있으니 나쁠 건 전혀 없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면 그 미친 여자와 출산 정도?
프레그넌트에 도착하니 모두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리가 없다고 해서 큰 문제는 없었지만 역시 10명이나 넘는 마을 사람들이 나가버리니 아쉽긴 아쉬웠나 보다. 아침을 풍성하게 먹었기에 점심은 조금만 먹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식사라며 내놓는 게 꽤 양이 많았지…….
레이 시리즈는 여전히 건강했다. 마력만 있으면 충분한 그녀들을 위해 경비대원들한테 마력 공급을 부탁하길 잘 했지. 촉수 괴물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은 덕분에 경비대원들은 전투에 나가는 횟수가 매우 줄어들었다. 사실상 우리가 토벌한 이후로는 훈련이나 연습 외에는 전투 행위 자체를 하지 않게 됐다.
마력을 안 쓴다고 해서 나쁜 일은 없지만 실전의 감각을 익히거나 유지하는 건 중요했다. 갑자기 괴물이 나타났는데 ‘실전 경험이 없어서 졌습니다’ 혹은 ‘전투를 경험한지 너무 오래 돼서 졌습니다’ 같은 변명은 할 수가 없었으니까. 애초에 괴물이 나타나서 진다면 저런 변명조차 할 수 없다. 죽을 테니까.
남는 마력을 레이 시리즈한테 공급하기 위해 로테이션을 짰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 로테이션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덕분에 서로 곤란하지 않게 됐으니 금상첨화지. 오늘 밤은 내 분신들이 열심히 노력해줘야겠군.
이런 저런 일을 생각했지만 아직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았기에 난 성벽을 걸으며 생각하기로 했다. 성벽의 이점 중 하나는 높은 위치에서 적을 견제·공격·감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자주 보였던 괴물들이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 기쁨을 느끼며 천천히 걸었다.
아내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부터 시작해 다양한 걸 정리하며 걷는 건 꽤 즐거웠다. 머릿속은 복잡하지만 모두 내가 좋아서 하는 것,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었으니까.
현실에서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이런 말하면 ‘찌질이라서 그런 거 아님?’이라고 할 수 있으니 미리 말해둔다. 돈이 없어서 그런 거였다.
그저 가족과 집안을 위해 노력했는데 알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빚쟁이의 자식이 되어 있었다. 그 빚 갚는 것도 억울한데 공무원 되어야 한다며 끝까지 자식새끼 등골까지 빨아먹으려는 부모를 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당장 빚 갚기도 어려운데 취미 생활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좋아하는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만화 등을 볼 때는 설정이나 캐릭터 관련 데이터를 보곤 했지만 그건 누구나 하는 거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려고 하는 자세는 좋았지만, 그게 정말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궁금해서 보는 것과 진심으로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돈은 없고 빚을 갚아야 했지만 휴식 따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어찌될지 모르는 미래에 불안함과 불만만을 느끼며 도서관에 나갔고 그 결과 이곳에 오게 됐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 도서관에 있다가 여기 소환되는 걸 알고 날 공부시키러 보낸 거라면……부모님한테 고맙다고는 해야겠지. 알 턱도 없겠다만.
성벽을 도는 경비대원들과 간단한 인사를 하며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생각하는데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괜히 신경 쓰이니까.
사실……내가 할 일이라고 해봤자 거의 없고. 처음에 프레그넌트에 왔을 때는 정말 신들린 듯이 괴물 토벌만 했었다. 레벨 업과 자금 획득이 목적이긴 했지만 증오심도 적지 않았기에 그랬지.
생명의 씨앗 대신 모두한테 아기 씨앗을 주입해줬고 마을의 평화를 위해 아낌없이 노력한 결과, 난 경비대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정식 대원은 아니지만 경비대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일종의 명예대원이라고 해야 하나?
명예라고 해도 정말 이름뿐인 바지사장 같은 게 아니라 꽤 강한 발언권을 지닌 특수한 케이스였다.
그런 내가 같이 걸어봤자 괜히 부담만 줄 테고. 노가리 까면서 근무해도 될 정도로 평화로워지긴 했지만 내 스스로 기강을 무너뜨릴 순 없잖아. 지금 그럴 때도 아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마리아, 아테나, 헬레나. 이 세 명은 아마 큰 문제가 없으면 프레그넌트로 놀러올 테니 문제는 없을 거다. 겨우 마을 하나인데도 이렇게 생각할 게 많다니. 용케 여왕이나 공주 같은 직책을 맡을 수 있구나 싶었다.
로라나 아이나를 비롯해 내 아내들이 사는 마을을 안전하게 만드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괴물이랑 싸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느낌이었다.
괴물을 죽이는 건 단순하다. 총으로 죽이든 마법으로 죽이든 간에 조준-발사 혹은 공격. 이거면 충분하다. 죽이면 아이템과 경험치를 주며 사라지겠지.
하지만 무언가를 운영한다는 건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유지와 보수부터 시작해 생각 외의 사태까지 모조리 고민해야만 했으니까.
기껏 얻은 평화와 행복에 젖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상태가 될 필요는 없다. 자멘 때도 그랬지만 스스로 부패하고 낙태한 자들은 결국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쟁취한 것의 가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평화, 행복, 안전. 정말 많은 희생과 시간을 통해 얻은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다간 점점 그 가치를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럼 그때부터 파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파멸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변명조차 할 수 없다. 이유?
마을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 토벌조차 감행할 수 없었던 때를 잊어버리고 평화와 행복이 당연한 것이라 여기다 죽었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단 말인가?
변명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은 절대 오지 않기를 바랐다. 내 아내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어리석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위험한 요소는 최대한 배제해두는 게 좋다.
어느 정도 해야 하는 일이 윤곽이 잡혔고 정리까지 끝나자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먹구름이 좀 있었다. 비가 올 거 같은데……. 오랜만에 오는 비니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 같았다. 비를 맞으며 하는 야외 섹스도 즐거울 거 같다는 생각을 하니 나도 참 미쳤다는 느낌이 든다. 날씨까지 섹스를 위한 도구로 삼다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입에서 불쑥 그런 말이 나왔다. 응? 고민 있냐고? 고민은 있지만 지금은 행복했다. 이 세상에 와서 거의 6개월이 지난 오늘이 되어서야 대부분의 일을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 대낮부터 평화와 행복을 만끽하니 오히려 이게 환상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느낄 정도다.
현실 세상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달성감과 행복, 뿌듯함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누가 보면 등신 같다고 손가락질하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래, 어떻게 좋지 않을 수가 있겠냐…….
날 사랑해주는 아내들과 여자들. 그들과 함께 평화와 행복을 누리며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다니. 내 위치에서 충실하게 일을 하며 모두와 고민 없이 살아갈 수 있다니. 너무나 멋진 일 아닌가?
꼰대 같은 부모님과 노인들, 도움도 안 되는 정부, 좆같은 헬조선 대한민국 등.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날 위해 마련된 곳이나 미래 따위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넘어와 내 힘으로 이룩하며 정착한 곳이다. 기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여기까지 오니 이제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평화와 행복을 이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떻게 그걸 누리면 좋을지 모르다니. 이거 완전 병신이잖아 ㅋㅋㅋㅋ
문제는 그 병신이 바로 나라는 거지……. 누군가 내 말을 듣는다면 ‘그냥 누리면 되잖아! 평소처럼 생활해. 그게 어렵냐?’라고 말하겠지. 아니, 그건 나도 알거든요?
난 무서운 거다. 이 평화와 행복이 갑자기 깨지면 어떻게 하지? 그 미친 여자가 당장 날 죽이면 어떻게 하지? 터전을 잃은 괴물놈들이 다시 프레그넌트의 숲을 자신들의 영토로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불안한 생각들이 마구 들었다.
아, 그래. 문제가 닥쳐오면 해결해야겠지. 괴물이 나타나면 싸워야 할 테고.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니 나도 참 답이 없을 정도로 소심한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력해서 얻은 평화와 행복을 어떻게 누리면 좋을지 몰라 고민하는 것부터 시작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노심초사하며 끙끙 앓다니. 이런 모습, 아내들한테 보여줄 수는 없잖아.
늘 아내들한테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이미 몇 개월 간 같이 살았기에 그런 환상 따위 부서진 지도 오래고. 하지만 걱정하는 건 나만으로 충분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싫었고, 걱정하게 만들기도 싫다. 세상 모든 일을 모두 나 혼자 떠안고 가는 느낌이군. 내가 어쩌다 이런 오지랖이 되었을까…….
“아기가 태어나면 내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절대 아니지. 바로 즉답이 나왔다. 아기를 빌미로 온갖 섹스를 해왔던 내가 좋은 아빠라니. 칼빵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겠군.
생각해보니 헬레나가 단련하라고 했었지. 미친 여자와의 전투를 위해서도 해야겠지만, 아빠로서 딸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해야만 하겠지. 그런 생각이 드니 단련을 하긴 해야겠구나 싶었다. 당장은 말고.
아니, 그런 눈으로 좀 보지 말라고!
왜 있잖아! 이런 말하는 사람들!
‘그래, 금연이다! 앞으로 몸에 백해무익한 담배를 끊는 거야! 일단 남은 거 다 피고! 니코틴 중독을 막기 위해 일단 남은 니코틴을 모조리 빨아먹는 거야!’
……맛이 갔냐? 니코틴을 때려 박으면 때려 박을수록 중독 상태가 심해져서 금연 따윈 불가능하게 될 텐데?
뭐? 돈 주고 산 거니까 피워야 한다고?
넌 돈 주고 독을 사서 몸에 처넣냐?
담배 끊으라고!
‘다이어트다! 이 돼지 같은 몸을 언제까지고 유지할 수는 없어! 앞으로 살을 빼서 정상적인 삶을 사는 거야! 아, 그 전에 일단 치킨이랑 피자부터 먹고! 우, 운동하는 데에는 칼로리가 필요하니까!’
있잖아. 치킨이랑 피자를 먹는 건 좋은데. 나눠서 먹거나 하는 방법도 있잖아. 체형도 문제겠지만 그렇게 입에 쓸어 넣는 거 때문에 돼지 취급받는다고는 생각 안 하냐? 나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 그래……금딸이다! 하도 딸을 치다보니 몸이 너무 피로해……! 이대로 가다간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하겠어……그, 그래도. 헤헤……이전에 구해놓은 딸감이 좀 많으니까 그걸로 몇 번 치고 그만두자. 응, 정력은 가만히 있으면 회복될 테니까……!’
당장 컴퓨터 꺼라. 지우라는 말은 안 한다. 너무나 잔인하고 잔혹한 말이니까. 하지만 그만둬라. 나도 몇 번이고 자위를 해서 아는데 딸은 치면 칠수록 더 하고 싶어진다.
자위, 딸딸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행위지만 중독성이 강하기에 끊기가 쉽지 않지. 그러니까 컴퓨터를 꺼라. 그게 제일 빠른 방법이다. 다시 켜서 준비하기 귀찮아서라도 그만두거든.
내가 한 말은 바로 위의 사람들과 같은 말이었다. 해야 한다면서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안 하게 되는 타입.
금연이든 다이어트든 간에 무언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해야만 한다. 자기가 생각했던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하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둬야지. 첫 술부터 배부를 수는 없잖냐.
로라를 비롯해 무예에 조예가 깊은 여자들은 내 주위에 얼마든지 있다. 쪽팔리기는 하지만 그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지. 내가 지금부터 혼자 아류(我類) 검법을 창조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쪽팔리게 아류가 뭐야 아류가. 이러다가 진짜 중2병처럼 [청룡승천] 같은 이름 붙이며 연습하는 건 아니겠지? 제발 참아주라…….
해야 하는 일에는 아내들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것도 추가해야만 했다. 왕궁의 훈련장에서 헬레나한테 깨지기 전부터 생각했던 걸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는 시점에서 여전히 실천은 하고 있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고 있었으니까.
남의 단점이나 허물은 더럽게 잘 지적하면서 정작 그걸 지적하는 자기는 노력하지 않다니. 이런 주제에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도 한 편의 코미디였다. 해야 할 일은 정해졌고 남은 건 실천뿐이다. 내일부터……라는 점에서는 변동이 없지만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나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성벽을 내려온다. 마을을 둘러 다니며 사람들이랑 인사도 하며 안부도 묻고 그래야지. 저녁 때가 되면 로라나 미카한테 부탁해보자. 안나와 니나도 있고 하니 검을 배우는 데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연습을 빙자해 지금까지 당했던 걸 나한테 검술로 때려 박지만 않으면 말이지……. 위험천만하지만 결코 가능성이 제로(0)는 아닌 미래를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괴물이 없어진 덕분에 사람들은 한 층 더 밝은 분위기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생명력 넘치는 느낌은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태어날 내 딸과 이 거리를 걷고 싶다. 이루어질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 감상적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발걸음을 옮긴다. 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물론 경비대의 기숙사다.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아내들한테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해야겠지. 검술을 배우기 위해 부탁도 해야 하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전전긍긍하며 앓기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후회는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아. 몇 번이고 경험했잖아?
후회는 언제나 늦게 하기 마련이고 대가는 항상 큰 법이라고. 후회를 먼저 할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대가? 언젠가 치르겠지만…….
“지금은 아냐.”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젓는다. 먹구름이 낀 하늘이지만 맑았다. 일구어낸 평화 위에 퍼지는 먹구름이 아름답게 보이다니. 나도 참 맛이 간 놈이라니까……. 당장 비가 오는 건 아니었기에 천천히 걸으며 다시금 평화의 공기를 맛본다.
프레그넌트는 오늘도 평화로웠다.
============================ 작품 후기 ============================
다이어트든 금연이든 간에 무언가를 그만둔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입니다. 당연히 여기며 즐기던 걸 갑자기 그만두라니. 스트레스가 존나 쌓이거든요. 그게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나타난 게 회사죠. 성장해서 해야 하는 일이 회사 들어가는 일이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일까요.
옛날에는 뭐 하고 싶냐는 선생님의 말에 과학자, 축구 선수, 프로게이머 등 다양한 대답이 나왔었는데……지금은 꿀 빠는 직업 찾아서 쉽게 좀 살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넵, 인간 쓰레기.
그치만 어쩌겠습니까. 회사의 노예가 돼서 '하, 하읏! 가버려! 야근으로 가버렷! 주말 출근으로 가버렷! 회사의 노예가 되어버렷!' 같은 말은 지껄이기 싫습니다. 까놓고 말해 이딴 말을 누가 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미쳐도 적당히 미쳐야죠.
후기를 쓰며 철혈의 오펀스를 보는데 참 이것도 막장이네요. 제가 개막장 소설을 많이 쓰긴 했지만 막장 부분에서 철혈의 오펀스를 이길 자신은 전혀 없습니다. 이유요?
소설이든 뭐든 간에 최소한 생각을 하고 쓰거든요.
유희왕은 아크 파이브
건담은 철혈의 오펀스
드래곤볼은 드래곤볼 슈퍼
그 유명하고 팬층 두터웠던 작품들이 추억 강간을 하며 독자들을 통수 때렸습니다만, 철혈은 진짜 원탑급이네요. 아크 파이브나 드볼슈퍼조차 이 정도는 아닐 겁니다. 최소한 야쿠자 뽕을 듬뿍 넣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주인공인 세린은 정신적 성장을 약간 이룬 것 같기는 한데……전 이렇게 말해주고 싶네요.
'아니, 시발. 많이 하라고. 정신적 성장 할 거면 존나 많이 해야지, 왜 조금만 하고 하반신을 부풀리고 지랄인데!?'
정신적 성장을 할 거면 이빠이 하든가. 왜 조금만 하고 마냐, 등신아. 오죽하면 작가인 저조차 이렇게 말할까요. 독자분들도 아마 공감하실 겁니다. 하긴……정신적 성장이 하고 싶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설문조사란에 설문을 하나 올려뒀으니 그냥 재미 삼아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일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