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6 「11-5 : 중장(中章)의 시작 (5)」 =========================
사람이 이세계(異世界)에 가게 된다면 어떤 이벤트가 발생하게 될까? 난 여기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마. 싫어도 말하게 될 테니까. 일단 이세계. 흔히 말하는 판타지 월드에 가게 된다 치자.
1) 기연(奇緣)을 얻어 파워업! 소드마스터가 되거나 9클래스 마법사가 된다!
- 이건 뭐 기본중의 기본이다. 소드마스터가 되든 9클래스 마법사가 되든. 혹 둘 다 될 수도 있겠다만 중요한 점은 ‘존나 짱센 인간이 된다’라는 사실이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강대한 힘을 얻게 되는 걸로 시작하지.
2) 여자가 많이 꼬인다. 하렘 건설!
- 이것도 남자의 로망 아니겠는가? 이러한 이벤트는 주로 현실에서 인기 없던 남자. 혹은 여성과 접점이 없는 남자한테 더욱 좋다! 여러 여자와 만나며 달콤한 이벤트를 겪게 되는 건 무협이나 판타지나 매한가지! 오죽하면 영웅한테 삼처사첩은 기본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중국 무협 영화나 한국의 판타지 소설. 일본의 라이트노벨 등에서 영웅이란 존재는 늘 매력적인 존재로 나온다. 그 매력에 매료된 여자들이 줄줄이 남자한테 사랑을 고백하며 사랑싸움이 일어나는 건 이제 언급하기도 지겨운 이벤트다.
3) 계속되는 적과의 싸움!
-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적을 쓰러뜨려야만 한다. 이세계 혹은 판타지 세상으로 소환된 주인공은 늘 위기에 처한 여자나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마련이다. 그런 이벤트에 강제적으로 참여당하기 마련이고!
마을이든 술집이든 간에 약한 사람. 주로 어여쁜 처자를 구해주면 아주 좋다고 난리를 친다. 난 그런 걸 읽으면서 ‘약한 사람들 구해주는 이벤트가 자동 발생하나?’하는 생각을 했었지. 그런 식으로 진행하는 게 제일 편하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닫게 된다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정의로운 일을 했는데 온갖 적이 다 나타난다. 무협소설의 경우 사파, 판타지 세상의 경우 부패한 귀족 등. 이딴 놈들이 우글대는 세상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만 어느 작가가 쓰든 간에 그런 놈들이 나와 설치는 것도 신기하다. 다들 짜고 소설 쓰냐?
아무리 적이 많다지만 강려크한 주인공한테 있어서는 소중한 경험치 공급원이다. 존나 짱센 주인공한테는 그냥 밥이라고!
몇 번 두드려주면 ‘오오, 저런 신묘한 무공(힘)을 지니다니!’ 혹은 ‘우웃! 오러블레이드!? 소드마스터!?’라며 경악한다. 그리고는 너나 나나 주인공을 모셔가려 하지.
이외에도 많지만 여하튼……저런 공통된 요소를 지닌 채 나오는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 소설은 생각보다 잘 팔린다. 이유야 간단하지.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기에는 최고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게임 같은 건 실력이나 레벨이 뒷받침 되어야 즐길 수 있다. 졸개 적이라도 초반에는 버겁기 마련이다. 레벨이나 실력이 모자라 졸개한테 당하는데 보스는 어떻게 쓰러뜨리겠냐? 여러 번 도전하면 어떻게든 깰 수 있겠지만 늘 시간이 부족한 현대사회에서 그런 노가다를 하기에는 요원한 일이다.
게임을 해도 즐거운 이벤트만 겪을 수는 없듯이 레벨 노가다, 실력 키우기 등이 필요하다. 그럼 게임을 하며 짜증을 느끼게 되겠지. 짜증 느끼려고 게임하는 건 아니잖냐. 그 게임보다 더욱 스피디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력이나 레벨 따위는 필요도 없는 매체가 있다. 그게 뭐냐고? 바로 책이다.
무협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이 시대에 관계없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잘 써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수요가 있으니 그런 거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원하니 너도나도 쓰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쓰는 걸 슬쩍 베껴서 바꾸기만 해도 훌륭한 소설 하나가 완성되니 이 얼마나 간편하단 말인가?
좀 심한 말로 개나 소나 다 쓰는 장르가 판타지, 무협이라고 하니 그만큼 레드오션이 되기도 했다만……현실의 이야기는 집어 치우고. 난 현재 3번에 가까운 위기에 처하게 됐다. 적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만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과 대련을 하게 됐다. 이제 10분 정도 후면 싸우게 되겠군.
“세린, 괜찮겠어?”
혜린을 비롯해 많은 아내들이 내 걱정을 한다. 솔직히 말하마. 안 괜찮다. 싸움을 해본 적도 별로 없는 내가 대련이라니.
목검? 휘두를 수 있는 것과 다룰 수 있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저 여자는 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오묘한 기술을 쓰겠지만 난 이 목검을 나무 막대기처럼 휘두를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20분 후에 붙기로 했지만 까놓고 말해 200분이 있어도 모자랄 거 같다. 가슴은 두근거린다. 마리아와 아테나의 낌새를 보니 헬레나가 나한테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 같았다. 너희 그런 눈치로 용케 여왕이랑 공주 해먹는다……하긴. 물적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반대로 혜린이나 희진, 은채 같이 현실에서 온 여자들은 바로 눈치 챈 모양이었다. 말투나 행동에서 반감을 가졌다는 걸 느낀 아내들도 있었고. 안나와 니나는 바로 그 점을 꿰뚫었는지 ‘세린, 저 여자한테 예전에 무슨 짓 했어?’라고 묻더라. 그랬으면 저런 태도를 취했겠냐.
아스카는 종족이 다른 만큼 반감에 대해서는 눈치를 못 챈 거 같았다. 내가 대련을 한다는 말에 ‘날 쓰러뜨렸던 너라면 틀림없이 이길 것이니라’라는 말로 돌려주더라.
음, 강화 마법을 쓰면 이기긴 이기겠지만……일단은 그냥 맨몸으로 싸워볼까 싶었다. 마법은 언제든지 쓸 수 있지만 대련은 자주 있는 이벤트가 아니니까. 사실상 이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하는 대련이다.
10분이 지나자 나와 헬레나를 대련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걸어올 때마다 저 토실거리는 엉덩이가 눈에 들어오니 미칠 지경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박아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저 건방지고 도도한 얼굴부터 울상을 짓게 만들어주자.
……이겼을 때의 이야기지만.
“사용하는 건 목검. 시간제한은 없으며 눈이나 하반신과 같은 급소에 공격을 가할 경우 패배. 마법을 사용해도 패배로 처리됩니다. 이 조건으로 괜찮나요?”
“마, 마법도요?”
“예, 물론입니다. 실전이라면 모를까 대련에서 마법을 쓰면 부상의 위험이 있으니까요.”
썩을. 어떻게 한다? 지금 마법을 쓸까? 그치만 괜히 아무 말 없이 마법을 썼다가 들키면 패배 처리잖아. 내가 마법을 발동하는 걸 눈치 챌 수 있냐 없냐의 문제도 있지만 안 쓰면 바로 패배할 텐데. 그보다 마법 안 쓰면 진짜 잘못하다 죽는 거 아냐?
원래라면 ‘흥, 너 같은 년……마법이 없어도 단숨에 개박살을 내주마!’ 같은 패기(覇氣)를 보여야 했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괴물의 여왕이었던 아스카는 여왕 타입이라 전투력은 전무(全無)했지만 그래도 평범한 내가 싸웠다면 죽었을 확률이 높았다. 난 괴물 하나 못 없앨 정도로 평범하며 연약한 남자다. 이 조건으로 그대로 가면 패배는 확정이라고.
“왜 그러시죠? 얼굴색이 많이 안 좋네요.”
대련장 중앙에 둘만 있다고 이젠 아주 대놓고 디스하는군. 우리 둘 외에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보통은 심판이 있기 마련인데.
“심판은 없나요?”
“네. 패배를 인정하면 곧바로 멈추는 것이 대련의 규칙이니까요. 패배를 인정한 상대한테 공격을 가하는 건 당하는 사람한테도, 가하는 사람한테도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약한 자를 괴롭히는 일이니까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힐 때 그런 생각은 안 한다. 그저 자기 힘에 도취되어 고통을 토하는 사람을 보며 즐길 뿐이지.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기사단을 포함해 하렘 어드벤처의 전사들은 확실히 개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 중 탑 클래스 급의 실력을 지닌 여자와 맞붙게 된 게 문제라면 문제다만…….
“저기요.”
“말하세요.”
이젠 ‘말씀하세요’라는 말도 안 하는군. 망할년.
“질문이 하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웃긴 말이다. 이렇게 물을 거랑 부탁할 걸 하나씩 선언하고 말하는 놈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나쯤 되니 이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녀의 표정은 도도함에서 살짝 호기심과 웃음으로 바뀐다.
“세린 님은 특이한 분이네요.”
“저도 압니다.”
내가 특이한 거 내가 모를 리가 있겠니? 나도 날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자, 직격탄을 날려볼까?
“저 싫어하세요?”
“……네?”
오오, 이건 통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아무런 감정 없이 날 보는 눈동자는 딱 봐도 마음이 들켰다는 걸 나타내주고 있다. 하핫, 어떠냐! 이런 건 상상도 못 했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간신히 웃음을 되찾으며 묻지만 그런다고 티가 안 나겠니? 시합 전에 물어서 그 분노와 감정을 모조리 풀어버리는 게 차라리 낫다 싶었기에 계속 입을 열었다.
“압존법 안 지켰잖아요.”
“……압존법?”
아, 모르는 건가. 하긴……압존법이라 말한들 이 세상이 한자나 한글, 영어 등의 언어를 구별하며 말하는 곳도 아닌데 알아먹을 리가 없나. 그냥 말하자.
“말 속에 가시가 느껴졌거든요. 제가 헬레나 씨한테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과드리겠지만 제가 아는 한 헬레나 씨와 전 오늘로 초면이거든요. 처음 만난 사람한테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태도가 그러면 좀……짜증납니다.”
“……쯧.”
우, 우와아아아!? 방금 들었냐? 쯧이라고!? 혀를 차다니!? 아니, 사람 앞에서 혀를 찰 수도 있어! 암, 그렇고말고!
근데 대놓고 면전에서 하다니! 가정교육을 못 받았거나 날 존나 싫어하거나! 둘 중 하나일 수도 있고 둘 다일수도 있지만 적어도 혀를 찼다는 건 분노를 나타내는 거겠지? 응?
혀를 찬 그녀의 표정은 매우 띠거워 보였다. 근데 너 그거 아냐? 그 표정이 내 지금 마음이다! 아니,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너한테 디스를 받아야 하는 거냐……. 미소를 짓지만 여전히 얼굴에 힘줄이 남아있는 느낌이 든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임금님인 세린 님한테 짜증을 느끼게 해서 정말 죄송하네요.”
국어책 읽기라고 아냐? 그냥 국어책 줄줄이 읽는 그 느낌이다. 미안한 감정은 1%도 없는 책 읽기식 사과. 엎드려 절 받기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라니. 어휴……어쩌다 이런 여자와 싸우게 됐담. 목검에 힘을 꾹 주는 걸 보니 존나 화난 거 같다. 그래, 이건 넘어가자.
“물은 건 그게 다인가요?”
“네. 하나만 묻는다고 했으니까요. 부탁은 간단합니다. 마법 하나만 쓰게 해주세요.”
그 말에 우위를 점한 인간이 지을 법한 미소를 띠며 그녀는 그러라고 했다. 살상력이 있는 마법은 쓸 수 없다는 말에 그런 마법은 쓰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너무나 시원하게 대답하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
1) 살상력 있는 마법만 아니라면 뭘 쓰든 자기 상대가 될 리가 없다.
2) 뭘 쓰든 빨리 써라, 얼른 족치게 시발놈아.
……대체 난 왜 맨날 이런 여자만 만나는 걸까. 얀데레, 똥싸개, 날 이용하려는 여자 등. 힘이 쭉 빠지는 걸 느낀다. 대련 전에 이러다니. 나도 여자복이 참 없다고 생각한다. 강화 마법을 사용해 신체능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이거 하나면 일단 붙을 만하겠지.
살상력이 있는 마법은 나한테 별로 없다.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 자지의 맹세나 텔레포트, 좆물 캡슐 등. 파이어 볼 같은 것도 없다니. 참으로 안습한 스테이터스다.
마법을 쓰지 않기로 했기에 그녀의 마력을 봉인시킨다 한들 이 대련에서 이길 수는 없다. 그럼 나 자신의 신체를 최대한 강화해서 싸우는 수밖에 없지.
이겨서 얻는 게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다 해서 고통을 즐기는 변태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일단 싸워서 이기면 좋은 거고 져도 대련 한 번 나눠봤다……라는 느낌을 받으면 그걸로 족하겠지. 내 자지에 매달린 채 좆물을 호소하는 여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건 나중에 고민해도 될 일이다.
“그럼……시작하겠습니다.”
목검을 세운 채 자세를 잡으니 존나 무서웠다. 그걸 본 순간……난 중요한 것 하나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 잊고 있었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에이, 곧 싸울 건데 기억 안 나는 거 보니까 그리 중요한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이 자리에 서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그건 바로…….
나……아스카 외에 대인전(對人戰) 경험이 거의 없어……!!
지금까지 괴물을 향해 신나게 소총 난사, 투영마술 난무를 했다. 원거리 경험이라면 썩을 정도로 넘치고 마력도 4만이나 있지만, 정작 지금 필요한 대인전 스킬 혹은 경험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썩을!
난 바보다! 왜 이렇게 중요한 걸 깜빡하고 있었지? 아니, 어. 그래. 잊을 수도 있지! 근데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와 버리다니! 아무리 강화 마법을 걸었다지만 그건 내 몸이 강화된 것일 뿐이지, 전투 스킬이 자동으로 상승되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유야 간단했다. 지금까지 이런 경험이 없었으니까! 매일 괴물이랑 싸울 때마다 ‘이쯤 오면 맞겠지’라는 생각으로 총을 쏘고 투영마술을 쓰던 나한테 있어서 근거리 전투는 정말 위급한 때가 아니면 생각할 수도 없던 선택지였지.
그 ‘생각할 수도 없는 선택지’. 접근전을 좋다고 수락한 나도 참 미친놈이다. 무슨 배짱으로 그랬을까 하는 후회도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 대화로 해결합시다!’라며 대련을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작한지 1분도 안 지났는데 그럴 수 있겠냐?
“으헉!”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나자빠졌다. 목검이 맞았는데 왜 내 몸이 넘어 가냐고? 파워가 장난 아니니까! 강화 마법 덕분에 어떻게든 타박상은 피했다만……날 향해 싱긋 웃는 저 얼굴을 보니 분노가 끓어오른다.
짧은 괴성을 지르며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강화된 손으로 휘두른 목검인데도 어렵지 않게 막아내는 걸 보니 기사단의 부단장이란 칭호는 딱지치기로 얻은 게 아닌 거 같았다.
“흐읍!”
숨을 뱉음과 동시에 헬레나가 앞으로 나왔다. 야, 잠깐만! 목검을 마주 댄 채로 막 달려오니까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도 접근전 경험이 없는데 이거 완전 가지고 노는 거나 다름없군!
“괜찮나요, 임금님? 벌써 숨이 차신 거 같은데요?”
말 참 곱게 한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은근히 높여주는 저 말투! 진짜 짜증 만땅이군. 숨을 몰아쉬고 있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힘껏 목검을 휘둘렀다.
“안 괜찮습니……닷! 커헉!”
옆구리를 깔끔하게 강타한 목검의 느낌은 매우 단단하고 차가웠다. 맞은 부분에 손을 댔지만 그건 바보짓이었다. 두 손으로 잡고 받아도 이러다 뚫리는 거 아닌가 싶던 위력의 목검 아니던가? 맞은 옆구리에 손을 댔기에 목검은 자연히 한쪽 손으로만 잡게 됐고 이 절호의 찬스를 놓칠 여자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가로로 힘껏 목검을 휘둘렀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위력에 난 목검을 놓아버렸고 목검은 저 멀리로 핑그르르 돌며 날아간다.
아, 썩을! 날아간 목검에 아쉬워 할 틈도 없이 앞을 봐야만 했다. 옆구리 아파서 이 지랄했는데 눈 돌리면 바로 또 맞을 테니까!
“어머, 안 주우셔도 괜찮겠어요? 임금님?”
“그러는 너님은 임금님을 패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신하가 왕을 막 패는 건 또 처음이네요.”
불만과 농담이 섞인 한 마디지만 헬레나는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대련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이 상황이 좋아서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이 든다.
“왕이라……이렇게 약해서야 여왕님과 공주님을 지킬 수 있겠어요?”
으윽! 안 그래도 아픈데 마음까지 아프게 하다니! 이 여자, 진짜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러냐?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주둥아리는 저 말에 반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시 내 주둥아리! 물에 빠져도 동동 뜨겠지!
“마리아와 아테나가 절 지켜주겠죠. 제 아내들이랑 저랑 비교하면 제가 제일 약하거든요.”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사실이잖냐. 이 말에 그녀가 웃기를 바랐지만……헬레나의 표정은 매우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이 아가씨 왜 이럼?
아니, 약하다고 말하니까 그래 나 약하다 이렇게 말했잖아. 근데 왜 또 분위기 싸~해지냐? 진짜 뭐 잘못 먹은 거 아냐?
“……약한 걸 자랑하는 한심한 임금님이라니. 최악이네요.”
그 말이 끝난 지 1초도 안 됐는데 어깨가 뜨거워졌다. 멋지게 어깨를 가격당한 나는 남은 손으로 어깨를 쥐었고 그 순간 내 몸은 완전한 무방비 상태가 됐다. 사람의 손은 두 개밖에 없는데 어깨와 옆구리. 두 곳을 가격당한 나는 두 곳 모두에 손을 댔다. 살아있는 샌드백 하나가 즉석에서 완성된 꼴이다.
“으극!?”
왼쪽 다리가 아픔을 호소하기가 무섭게 난 무릎을 꿇었다. 망할! 존나 아프다!
“패배를 인정하나요?”
너 같으면 하겠냐 시발년아……! 그 말이 입 안에 맴돈다. 꺼내자니 또 때릴 거고 그렇다고 말을 안 해도 때릴 거다. 이런 패턴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무기는 저 멀리로 날아갔기에 도저히 주우러 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왼발의 아픔을 무시하며 그녀를 향……
“어컥! 악!”
달려들려고 했지만……그것도 헛수고였다. 가슴팍 아픈 걸 느끼면서 바닥을 구르다니! 두 가지 고통이 동시에 엄습하니 어디가 아픈지도 모를 정도였다. 가격당한 어깨와 옆구리는 귀여울 정도군. 나뒹군 상태에서 입에서 흐르는 침을 닦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패배를 인정하나요?”
내 눈앞에 위치한 목검을 보니 인정을 안 하면 또 때리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그녀의 얼굴은 승리와 만족감으로 가득 찬 웃음을 띠고 있다. 난 눈을 감았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이거 과거 회상 아니다? 내가 이런 짓 한다고 갑자기 숨겨져 있던 힘 발휘하는 거 아니니 기대하지 마라?
눈을 감은 이유는 ‘여기서 내가 마법이나 다른 힘을 써서 이긴다면 어떨까?’라는 걸 상상하기 위해서였다. 이 국면에서 다른 마법을 쓰거나 코스튬의 힘을 빌리면 이길 수도 있겠지. M16이든 K2든 한 정만 있어도 충분하고, 투영마술로도 그녀를 상대할 수 있다. 승률로만 치자면 100%에 가깝겠지.
하지만 그런 짓을 한 시점에서 이긴다 한들 이 대련의 결과는 내 패배다. 조건을 어겼으니까. 부정을 저질러 얻은 승리는 얻은 사람도 찜찜하고 진 사람도 억울하게 만든다.
그녀는 비록 건방지고 짜증나지만 조건을 어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가 그걸 어긴다면? 안 그래도 날 싫어하는데 한 층 더 날 싫어하게 되겠지. 이유도 모르는데 이 이상 증오를 받기는 싫었다. 한숨을 깊게 쉰 후 패배선언을 했다.
“내가 졌다.”
그녀는 수고했다는 말도 없이 목검을 거두었다. 패배를 인정한 상대를 때리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었군. 뭐? 그럼 왜 빨리 패배를 인정 안 했냐고? 어……나도 일단 남자니까. 한 번 역전승을 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느라 그랬지. 아프다고 바로 항복하면 너무 초라하잖아…….
아내들이 날 향해 달려온다. 으음, 달려올 때마다 가슴이 움직이는 거 보니 눈은 즐거운데 걱정된다. 저러다 가슴 축 늘어져서 힘들어지지 않을까? 뭐, 여기서는 노화(老化)의 개념이 없는 거 같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봐, 당신! 그렇게 세게 때릴 필요 없었잖아!”
혜린은 헬레나한테 항의했지만……헛수고다. 저 영악한 여자가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세린 님께서 바로 패배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기에 대련을 계속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무기를 주우러 갈 거라 생각했는데 달려드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시발! 또 압존법 빼먹었어! 게다가 내가 달려든 걸 ‘갑자기 달려들어서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격했다!’라는 이유와 핑계로 삼다니! 우와, 저 가증스런 표정 보소! 마치 ‘어쩔 수 없었어요, 용서해주세요……’ 오라를 뿜어내고 있구나! 망할 년!
혜린 외에도 다른 아내들이 헬레나를 향해 차가운 눈길을 보냈다. 마리아와 아테나 또한 불편한 시선을 보내자 다른 아내들 때와 달리 상당히 죄송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날 싫어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리아와 아테나한테 미움받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힘들어하는 표정이네.
원래라면 ‘히히, 잘 한다! 날 때린 그 여자를 아주 떡실신 시켜버렷! 홍콩으로 보내버렷!’이라는 헛소리를 지껄여야 했지만, 까놓고 말해 저 여자가 한 짓은 대련. 오직 그것뿐이었다. 난 거기서 졌고 몇 대 맞았지.
맞은 건 아프고 짜증나지만 그렇다고 저 여자가 죽을 만한 대역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기에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헬레나 씨 말 맞아. 그, 빨리 포기했으면 됐을 텐데. 내 실력도 모르고 막 덤벼들다 이렇게 된 거니까 너무 그러지 마. 앞으로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좋은 경험도 됐고.”
“……정말 괜찮아? 응?”
“어, 괜찮아. 어깨나 옆구리를 때린 것도 내가 어설프게 피하다가 그런 거겠지. 헬레나 씨가 날 때려서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그랬겠어?”
도와주긴 한다만 무조건 100% 선의로 도와준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단다! 은근히 그녀가 나한테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전제로 한 발언을 하자 헬레나의 눈썹이 아주 조금이지만 움직였다. 그러게 누가 나쁜 짓 하래? 니가 신나게 때린 사람이 너 도와주는 것 자체에 감사하다고 생각해라. 치졸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배를 꺼트릴 생각이었는데 살짝 배가 고프네. 마리아, 둘러볼 곳은 거의 다 둘러봤지?”
“아, 네. 정말 괜찮으신가요? 아프면 치료 마법이라도…….”
괜한 걱정을 끼치기도 싫었다. 아픈 거야 나중에 메이나 니나한테 부탁해 몰래 치료받으면 되니까. 이 이상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도 싫었고, 그거 때문에 헬레나랑 같이 있는 것도 거북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은근슬쩍 해결하고 넘어가자. 나한테 반감을 가진 이유야 나중에 1:1로 물어보면 되니까.
살짝 배가 고프다며 내 상처나 헬레나한테 이목이 집중되는 걸 어떻게든 막은 덕분일까. 진짜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밤일 전에 뭘 먹으면 좀 그렇지만……상관없겠지. 뒤를 슬쩍 봤다. 그 여자, 승리와 만족감에 가득 찬 웃음을 짓고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
얼른 가자며 재촉하는 아내들 때문에 잘 보진 못했지만 헬레나의 얼굴은 바닥을 향한 채 그대로였다. 더 이상 보면 상처 때문에 아프냐고 할 거 같았기에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지만……대인전. 사람과의 대련에서 처음으로 겪은 패배였다. 프레그넌트에 돌아가면 로라나 미카한테 부탁해 훈련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더 간절해졌다.
그 허연 머리 미친년과 싸우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패배하니 오기가 생겼다. 적어도 내 한 몸은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싶은 마음이 든다.
물론 강화 마법 없으면 검술을 배워도 별 쓸모가 없겠지만……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한 덕분일까? 아픈 곳도 점점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패배는 안 좋은 것이지만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워 성장할 수 있다면……그것만으로도 싸운 가치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패배는 ‘기분 좋은 패배’……라고 해두자.
============================ 작품 후기 ============================
혹시나 이 소설을 읽으며 ‘사실 주인공한테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하신 적이 있나요? 그런 분이 있다면 전 자신 있게 11-5편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마법 걸고도 대인전 경험이 없어 처발리는 주인공, 신세린의 늠름한 모습을!
좆☆망!
좆 To the 망!
‘자지의 맹세’를 쓰거나 무기를 든 상태라면 모를까, 검 같은 걸로 대결하는 부분에서는 완전 생초짜. 그것도 강화마법까지 걸고 저 모양 저 꼬라지가 됐습니다. 한 때 유행했던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식으로 말하자면…….
마법 쓰고 노력한 꼬라지가 코레다Yo!
옙, 좆망. 약자한테는 강하지만 강자한테는 한없이 약해지는 인간상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실제 대련에서 패배한 사람이 느낄 법한 분함이나 안타까움이랑은 좀 다르지만, 세린이라는 주인공이 그리 잘난 놈이 아니라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적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굳이 약빤 식으로 적자면……플로듀서! 개처발렸어요!
웃우우웃! 주제도 모르고 깝치다가 개처발렸어요!
NDK? NDK?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루인sv님, 가혹행위도 문제지만 윗대가리놈들도 좋게 봐줄 건 없습니다. 간부라는 놈들이 사병한테 와야 하는 중대운영비 빼앗아 자기 이익 챙기는 것부터 시작해 온갖 거 다 봤거든요. 어떻게 2만원 남짓 되는 중대운영비를 자기 주머니에 꿀꺽할 생각을 하는지 원.
전쟁나면 가혹행위한 놈들도 문제지만 간부들도 자기 등짝 조심해야 할 겁니다. 네? 목조심이요? 요즘 누가 목을 자릅니까. 총 한 방 빵야빵야면 전부 해결되는데.
전쟁 나서 벌벌 떠는 간부가 있다면 도둑이 제 발 저린 겁니다. 부디 이번 대선을 통해 이런 군납비리 등이 없어지면 좋겠네요.
로리콤MK님, 현재 세린의 전투력으로는 일방적으로 당할 뿐이겠죠. 이번 편을 통해 [인간한테도 못 이기는데 어떻게 백발 여자한테 이기겠냐]라는 생각을 세린과 독자분들한테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헬레나의 전투력을 백발의 여자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같은 인간 상대로 빌빌대다 처발리는 세린입니다. 박진감 넘치는 전투나 스릴 넘치는 타격전은 아무래도 힘들겠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야기의 구도는 상당히 달라져 있을 테니 여러 모로 생각하는 게 즐겁네요.
이상입니다. 사전투표를 끝내서 그런지 기분이 상쾌하네요. 여러분도 사전투표나 투표당일날, 소중한 한 표 행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코멘트를 비롯해 구독, 추천, 선작, 쿠폰 등을 주시는 분들께 다시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노력하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P.S - 약 빤 후기를 못 적는 대신, 본편을 약 빨고 적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히힛, 이 소설은 똥이야! 이 소설을 쓴 작가 새끼(나)도 똥이라고! 오줌 발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