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106화 (106/235)

00104 「11-3 : 중장(中章)의 시작 (3)」 =========================

바닥에 뒹구는 느낌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감촉은 늘 사람의 기분을 더럽게 한다.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는 좋은 일이나 의미로 뒹구는 게 아닐 테니까. 내 기분이 딱 그거였다.

왕궁 안의 대련장에서 뒹구는 내 모습을 실시간으로 20명 넘는 사람들한테 보여주니 아픔보다는 창피함이 더 든다.

아픔을 호소할 틈도 없이 앞을 보니 이미 내 눈앞에는 체크메이트를 알리는 목검이 보였다. 노란색 비키니 아머를 입은 여왕기사단의 부단장(副團長), 헬레나는 승리와 만족감으로 가득 찬 웃음을 띠었다. 원래라면 ‘빌어먹을! 날 내려다보지 마!’와 같은……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쳐야 했지만 그럴 기분도 안 들었다.

잠시 눈을 감아 과거를 회상한다. 아, 참고로 말하지만 과거 회상한다고 미지의 힘이 발휘되는 거 아니다? 그런 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나오는 일이지, 실제 세상에서는 그딴 거 없다니까?

그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차분히 이야기를 할 테니 일단은 과거 회상부터 하자. 내가 회상해야 하는 건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뭐 어쩌다가 이런 꼬라지가 됐지?]

† † † † † † † † † †

수도는 매우 넓었다. 프레그넌트를 돌아다니며 골목이나 으슥한 곳의 지리, 그곳에 누가 사는가 등을 파악하느라 꽤 힘들었었는데……대도시에 오니 프레그넌트는 정말 시골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농촌 애니메이션에서 한 여자 아이가 ‘우리 시골에 살고 있는 거양?’이라 물으니 상급생이 이렇게 대답했었지. ‘하하, 무슨 소리야? 우리가 살고 있으니 시골이 아니지!’라고. 순수하며 좋은 대답이지만 난 이렇게 반론하고 싶다.

너희 시골 살고 있는 거 맞어……. 나도 시골에 사니 알겠는데 하물며 너희가 모를 리가 없잖아. 그 농촌에는 TV나 컴퓨터, 게임기라도 있지. 이 ‘하렘 어드벤처’에는 그런 건 있지도 않아. 있는 건 괴물과의 전투나 경비, 섹스. 그 정도겠지.

점심을 먹은 후니까 저녁까지는 아무리 그래도 4~5시간 정도의 시간이 있다. 수도를 돌아다니며 배도 꺼트리고, 구경도 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 내 생각에 변수를 둔 건 마리아와 아테나였다. 뭘 했냐고?

……우리가 나간다니까 같이 나가려고 하더라. 어, 그 말을 듣고 먼저 말한 게 ‘저기. 일은?’이었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 여왕이랑 공주잖아. 얘들이 업무를 안 보면 누가 보냐 싶었지. 근데 대답은 간단명료하더라. 가장 비중이 컸던 ‘생명의 씨앗’을 해결 못하는 동안 다른 업무를 대부분 처리했기에 할 일이 별로 없다나.

초등학생 때 여름방학이 되면 숙제가 더럽게 많이 나왔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많지도 않았다. 단지 초등학생이 노는 동안 무슨 숙제냐며 화가 났던 거겠지. 양이 많다 치더라도 일주일 정도 때려 박으면 다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요즘 학생들은 학원 같은 곳에 가느라 숙제할 시간도 별로 없을 거 같다.

여왕과 공주가 나가면 큰일 나는 거 아니냐고 물으니 그렇지 않다고 했다. 자주 도시를 돌아다니며 수도의 상태 등을 파악한다는 말에 역시 이 세상은 우리가 사는 곳과 달라도 참 다르구나 싶더군. 한국은 보여주기식 문화가 팽배한 것도 모자라 윗사람이 천하디 천한 하층민을 신경 쓰는 일도 없으니까.

경호원이나 다름없는 여왕기사단의 단원들까지 나오려는 걸 어떻게든 막은 후 나오니 그것 또한 참 웃겼다. 여자 열세 명에 남자 하나. 총 14명이 돌아다니니 단체 관광 나온 기분이 들더라. 이 나이에 단체 관광 기분을 느끼다니. 소풍 느낌이라면 또 모를까 이게 뭐야…….

마리아와 아테나 말이 사실일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리아와 아테나한테 친숙하게 인사하며 건강을 묻더라고.

이런 일은 한국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은 잘못된 유교 문화와 권위주의로 인해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평범한 사람들 간의 소통이 자유롭게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니까.

수도에 온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안나, 니나, 아이라. 세 명뿐이었다. 아이라야 어보션에 있었으니 여러 사정으로 가끔씩 온 적이 있다고 했다. 안나와 니나는 용병 활동을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녀봤다고 했다. 으음. 아내 중 몇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촌이나 시골 사람이라는 생각이 떠나지가 않는다.

수도에 온 경험은 있지만 근방의 지리를 잘 알지는 못하였다. 마리아와 아테나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수도 가이드를 받게 된 우리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신기한 것, 재미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됐다.

광장부터 시작해 여관, 음식점, 무기점, 액세서리 판매점 등. 다양한 물건들을 파는 곳이 많아서 돈을 쓰기도 했지. 옷을 산 이후로 괴물 토벌을 한 적도 없었기에 내가 가진 돈 자체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기념으로 뭘 사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중 눈에 들어온 건 노점상에서 흔히 보는 싸구려 액세서리였다.

잘 어울릴 거라며 칭찬하는 노점상의 여인의 칭찬 때문일까. 모두가 서로 원하는 걸 말하다보니 결국 사게 됐다. 가격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기에 내심 다행이라고 느꼈다. 내가 가진 돈으로 어떻게든 커버를 칠 수 있는 금액이었으니까.

하지만 가격이란 양날의 검 같은 것이었다. 저렴하면 살 때는 좋지만 그것보다 비싼 물건, 가격에 비하면 초라함을 느끼게 만든다. 적절한 가격과 품질이라는 이름의 묘한 경계선을 스스로 파악해야만 하는 게 여자들의 숙명 같은 것이었다.

나한테 있어서는 저렴해서 사기 좋은 물건이지만, 아내들한테는 싸구려 비지떡으로 생각될 수도 있으니까. 처음으로 수도에 온 기념품이 정말 이런 걸로 괜찮겠냐고 물으면서도 내 마음은 두 개로 나뉘어졌다.

[현재 있는 돈 안에서 충분히 살 수 있는 물건이니 이걸로 사자]라는 마음.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싸구려를 준다면 너무 염치없는 거 아니냐?]라는 마음.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알고 싶으면 누군가한테 줄 선물에 대해 생각해봐라. 어느 정도의 가격을 생각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을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아내들이 웃으며 괜찮다고 하니 사주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전투와 관련된 옷만 가득 사줬지, 실생활에서 입을 예쁜 옷이나 속옷은 사주지를 못했구나……라는 후회부터 시작해, 액세서리 같은 것도 신경을 못 썼군 하는 자책감도 들었다.

그나마 저렴한 액세서리를 산 것에 대한 변명을 할 수 있다면……아스카는 괴물의 여왕이니 인간의 액세서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둘 수 있겠고. 마리아와 아테나 같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실제 보석보다 이런 싸구려가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것 또한 어디까지나 내 상상이었기에 결국 미안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수도 투어는 계속됐다.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마리아와 아테나를 보니 역시 대단하구나 싶었지.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랑 이야기가 통한다는 건, 약간 과장을 입혀서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거니까.

프레그넌트의 주민들과 섹스를 하기 전부터 시작해 섹스 후까지.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지만 여전히 그들의 이름을 모두 외우지는 못했다. 파티 멤버로 구성은 되어 있기에 이름은 언제든지 알 수 있지만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누구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그에 비해 마리아나 아테나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인사를 하며 이전에 나누었던 대화 거리, 새로운 화제 등을 꺼내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이니 존경심이 절로 생길만 하다. 여왕기사단의 단원들이 날 보고 탐탁지 않게 생각할 만했다. 이런 아름다운 여자들 곁에 나 같은 놈이 있으니 좀 그렇겠지.

나 자신의 가치를 낮게 책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익숙해진 것이었기에 그렇다 치자. 그치만 이렇게 보니 참 우습구만. 여왕의 명령이라며 자지를 깊게 박으라며 난리를 치던 마리아. 그 자지를 빼앗기는 게 싫어 쯉쯉거리며 빨던 아테나가 저렇게 사람들한테 사랑받는 걸 보니…….

[부셔버리고 싶다……!]

“……읏!”

급히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내들이 괜찮냐며 걱정했기에 약간 어지러운 것뿐이라 대답한다. 삶을 포기했던 때의 내 상태가 너무 씹창이었기에 아내들의 걱정은 여전했다. 그 걱정에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방금 들린 목소리……내면의 목소리에 눈썹을 찡그렸다.

틀림없다. 그 백발 여자의 목소리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소름이 끼쳤다. 닭살이 돋는 걸 급히 감춰야만 할 정도의 공포가 엄습했다. 뭐가 무섭냐고? 난 마리아와 아테나가 저토록 사랑받는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멍청한 년들……그 고귀하며 아름다운 두 년은 내 자지에 매달려 창녀처럼 울부짖던 년들이야. 그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내 좆을 게걸스럽게 빠는 모습을 보인다면 과연 저 둘의 평판은 어떻게 될까……?’ 라고.

이 생각 자체도 무서운 것이지만 난 그보다 더욱 오래전……. 이와 같은 생각을 언제부터 하기 시작했나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런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게 된 첫 번째 시기는 바로 로라와 메이 때였지. 두 명의 모녀가 사이좋게 서로의 보지를 비벼대는 걸 본 때부터 이런 생각을 했던 거겠지.

‘사이좋은 모녀의 모습을 모두 앞에서 박살내주고 싶다’라고. 혜린이를 대낮에 강간했던 건 내 미친 생각 때문이라 치자. 어쩌면 그렇게 느꼈던 건 내 쓰레기 같은 인성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백발의 여자가 이미 그때부터 날 조종하기 시작했던 거라면?

모든 걸 그녀의 탓으로 돌리는 건 솔직히 내가 봐도 좀 에러였다. 마치 내가 한 모든 나쁜 짓은 그 여자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정당화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호소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치만 미카 때부터 시작해 그녀가 이 ‘하렘 어드벤처’의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 조종할 수 있다는 걸 전제로 생각한다면……?

과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짓은 내 생각에서만 기인(起因)한 걸까? 오직 내 미친 생각과 쓰레기 같은 인성으로만 여기까지 일을 벌인 걸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든다.

이 마음 안에는 내가 한 일을 그녀 책임으로 돌려 조금이라도 양심적인 자유를 찾고 싶다는 마음도 들어가 있겠지. 그 여자가 날 쓰레기 취급할 만도 해…….

여자나 아내들을 사람들 앞에서 욕보임으로써 그들이 보다 나한테 의존하고, 내 자지에 매료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 하는 이 마음은……과연 오직 나만의 것일까. 아니면 그 여자에 의해 주입된 걸까? 모르겠다. 고개를 저으며 찜찜한 기분이 더해져만 가는 걸 느꼈다.

그 여자를 싫어하면서도 내가 불리한 일, 내가 저지른 안 좋은 일은 모조리 그녀 탓으로 돌리려는 더러운 성질과 근성 또한……그녀가 나를 싫어하는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별로 좋아해줄 건덕지가 없다는 사실도 좀 슬프네.

씁쓸함과 찜찜함을 안은 채 투어를 계속했다. 마리아와 아테나가 자기들 때문에 수도 구경이 재미없지 않았냐며 걱정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오히려 두 명에 대한 사랑이 더욱 늘어난 느낌이었고, 그 사랑을 오늘 밤에 섹스로 나타낼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응? 근데 왜 소설 처음부터 바닥에 뒹굴고 있었냐고?

어허, 이 사람들이!

사람이 힘들고 쪽팔려 하는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그 심보! 그 심보가 나쁜 것이다! 걱정 안 해도 내가 설명충이 설명 줄줄 하듯이 말해줄 테니 일단 기다리시라!

저녁의 식단 또한 그리 다를 것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점심과 같은 해프닝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거 하지 말라는 부탁에 감명 받아 안 한 건지, 아니면 오늘 저녁에 있을 이벤트를 위해 힘을 온존해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아마 후자쪽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남편의 위신보다는 본인들의 쾌락과 짜릿함을 위해 부탁을 들어준다니. 옛날 같았으면 침울한 표정을 지었겠지.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한다. 밥 먹는데 표정이 왜 그러냐는 희진이의 걱정은 못 들은 걸로 치자. 그래.

밥까지 다 먹었지만 아직 6시가 되지도 않은 상태다. 이대로 바로 잠에 들기에는 너무 이른데……. 마리아와 아테나는 보통 저녁 10시쯤에 취침에 들어간다고 한다. 캡슐 분배 전이든 후든 취침 시각은 10시라는 말을 듣고 군대 생각나더라. 예비군 거의 다 다녀오고 여기 온 거 생각하니 또 화가 날 거 같다…….

평소에 뭘 하며 시간을 보내냐는 질문에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생명의 씨앗을 만들 수 있었을 때는 씨앗을 만들며 각 마을에 분배될 수 있도록 수량의 검사 등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씨앗을 만들 수 없게 된 후부터는 괴물한테 죽는 사람이 안 나오도록 하는 행동과 지침을 최우선으로 일했다고 한다.

생명의 씨앗이 있다면 또 모를까 그게 없어진 이상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이 시대에서 인력(人力)의 손실은 매우 큰 손실을 뜻했기에 있는 인력을 최대한 보호하는 방향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겠지.

여왕인 마리아는 본격적인 업무를 담당했고 공주인 아테나는 어머니를 보조함과 동시에 기사 단장으로서 활동했다. 생명의 씨앗을 만들 수 없게 된 후부터는 단원을 비롯해 경비대원들의 실력 향상 및 대련에 도움을 주며 최대한 인재 양성에 노력했다고 한다. 죽으면 안 되니 강해져라 이 말인가…….

대련장에 한 번 가보겠냐는 아테나에 말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고, 지금까지 밖을 돌아다녔으니 왕궁 안도 보고 싶었으니까.

으리으리한 왕궁은 겉뿐만 아니라 안에도 충실했다. 용케 이 건물의 모든 통로나 방을 파악하고 있구나 싶더군. 대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큰 건물의 여러 방을 재빨리 파악해야 하니까.

여러 방이 있었지만 그 중 특별히 마음에 들었던 곳은 무기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게임이나 만화, 애니에서 봤던 무기들이 상당히 많았기에 감탄을 하며 봤지. 여자들은 보통 이런 방을 보면 뭐가 재미있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는 게 보통이지만……관심을 보였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경비대장인 로라와 이전 경비대장인 미카. 안나와 니나는 그 방을 둘러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괴물뿐만 아니라 대인전(對人戰)을 상정한 훈련 또한 했었기에 뛰어난 무기가 유사시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준 옷은 결코 나쁘지 않지만 이렇게 많은 옷과 무기들을 보니 좀 초라해 보이긴 했다. 더군다나 로라와 메이는 여행 시작 전에 사준 옷이니 솔직히 오래 입었다는 느낌도 나긴 난다. 옷은 깨끗하지만 여자는 옷을 비롯해 외관에 치중한다. 같은 옷을 계속 입히는 거 같아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메이, 아이나, 아이라는 마법이나 마력에 특화된 무기, 코스튬을 보며 입을 벌렸다. 얘들아. 이 세상에 벌레는 없지만 그렇게 입 벌리고 있으면 파리 들어가겠다……. 뭐, 그렇게 입을 떡 벌린 채 주변을 구경하는 기분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난 전사나 마법사 어느 쪽이든 둘 다 관심이 있었으니까.

마법소녀 코스튬부터 시작해 마력을 절약해주는 성능을 가진 무기들을 보니 나도 솔직히 구미가 당긴다. 이 나이에 남자 새끼가 마법 소녀가 들 법한 지팡이(스틱)를 들고 설쳐대긴 좀 그렇다만.

세일러문의 의상을 입고 있는 희진이도 ‘앗, 저 옷 옛날에 보던 만화영화에 나오던 건데……’라며 중얼거렸다. 세대 차이를 느끼는군. 혜린이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와 은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옛날 세대도 아니었으니까. 은채는 아예 만화나 애니 자체를 별로 접하지 않은 거 같으니 논외인가.

무기고는 우리가 쓸 수 있는 물건이 많으니 그렇다 치자. 그 다음 놀랐던 건 드레스 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도 많은 옷이 있었다만……놀라웠던 건 배틀 코스튬. 전투복이나 전투에 필요한 옷이 아니라, 평소에 입는 옷들이 매우 많았다는 점이었다. 드레스를 비롯해 예쁜 속옷 등이 나열된 걸 보고 아내들이 모두 놀라워했다.

마리아와 아테나는 여왕과 공주다. 그런 그녀들이 늘 같은 옷을 입고 다닐 리는 없었기에 여러 옷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드레스 룸’이라는 걸 접하니 살짝 컬처 쇼크를 느낀다. 남자 놈한테 드레스 룸의 개념이 어디 있겠냐. 그냥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입지. 애초에 드레스 룸 같은 걸 가질 정도로 옷이 많지도 않고.

그 방 안에 들어가니 모두 이거 예쁘다, 저거 예쁘다를 남발했다. 난 원래라면 ‘어휴, 여자들이란……야레야레’ 따위의 중2병 대사를 말해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미안한 마음이 쩔어 줬으니까.

괴물과 늘 싸우며 경비 태세를 강화해야 했던 프레그넌트에서 평상복의 개념은 사실 찾기가 어려웠다. 마력으로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 옷을 놔두고 굳이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옷 갈아입을 바에야 차라리 내일 전투나 괴물 토벌에 대비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경비대원을 포함한 경비대 사람들. 로라와 메이, 아이나도 그렇지만……. 그들 또한 나와 같았다. 정확히는 내가 그들의 삶에 감화됐다고 해야겠지. 평소 같은 옷을 자주 입던 나한테 이런 삶은 오히려 대환영이었다. 굳이 매일 다른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잖아. 똑같은 옷 입는다고 누가 욕하는 것도 아니고.

맨 처음 아이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상복 같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난 손님맞이용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늘 입던 옷이었다. 가끔 다른 옷을 입을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 옷을 주로 입는 걸 보고 여기 사람들은 패션에 큰 관심이 없나 싶었다.

물론 그건 내 무식한 생각이었다. 여자들이 예쁜 옷, 아름다운 복장, 귀여운 의복 등에 관심이 없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남자가 야한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과 동일한 뜻이었다. 남자 중에 야한 것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여자를 찾게 된다. 왜냐하면 그게 본능적인 것이니까.

초등학생 때는 아무것도 몰랐던 순진한 아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포르노나 AV를 찾게 되는 것과 동일했다. 사람의 본능이나 성욕, 식욕, 수면욕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건 이전에 설명했으니 넘어가자. 여자들도 그러했다. 그럼 왜 같은 옷을 계속 입었냐고?

프레그넌트는 괴물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는 준전시(準戰時) 상황에 가까웠었기 때문이다. 토벌이 마치기 전까지. 정확히는 ‘생명의 씨앗’을 얻을 수 없게 된 때부터 인력의 소중함은 더욱 더 극명히 드러나게 됐다.

한 사람이라도 아쉬운 판국에 사람의 목숨과 자신들의 생존을 걱정해야 했던 그들한테 있어 옷이나 패션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세상이라면 속옷은 기능적이며 필수품으로 취급됐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개방적이었기에 굳이 속옷을 입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속옷처럼 생긴 비키니 아머를 입는다면 또 모를까. 오히려 옷보다는 섹스와 쾌락, 아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 이유는 모두가 알 것이라 생각한다.

생명의 씨앗을 받을 수 없게 된 것부터 비롯해 이 ‘하렘 어드벤처’는 19금 남성향 게임이나 마찬가지인 세상이다. 예쁜 옷도 좋지만 아기를 만드는 것과 섹스에 의한 쾌락만큼 소중한 것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그나마 괴물을 섬멸했기에 다른 옷이나 속옷에 저렇게 관심을 보일 수 있는 거다.

겨우 옷이나 속옷 하나에 이렇게까지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나도 참 미친놈이다만,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아내들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팍팍 든다. 오늘 진짜 왜 이러냐?

수도 구경하다 그 백발 여자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들고. 무기나 코스튬, 옷이랑 속옷 보며 또 죄책감 받고. 동네북도 나보다는 훨씬 더 존중받는 거 아닐까?

오늘 잘 때 입어도 좋다는 말에 모두가 기뻐했고 나 또한 기쁜 마음이 든다. 늘 같은 옷만 입던 아내들이 다른 매혹적인 옷으로 날 유혹할 거라 생각하니 하반신이 움찔거린다. 다른 곳을 둘러본 후에 옷을 골라도 늦지는 않다고 했기에 우리의 발걸음은 드레스 룸으로부터 멀어진다.

여러 방을 둘러봤지만 마지막으로 둘러보게 된 곳이자 내가 나뒹구는 것으로 소설을 시작하게 된 방. 정확히는 대련장. 혹은 훈련장에 들른 순간 땀 냄새가 났다. 호오, 그렇군. 말 그대로 훈련 및 대련을 하는 곳인가.

대련장에 들어가니 사람은 적었지만 훈련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노란색 비키니를 입은 사람들도 몇 명 있네. 근데 왜 밥 먹고 훈련을 하지? 저러다 배 아플 텐데.

“헬레나랑 다른 단원들이 자주(自主)훈련을 하고 있는 거 같네요.”

“헬레나?”

처음 듣는 이름을 말하니 아테나가 저 멀리 있는 노란색 비키니 아머의 여성을 가리켰다. 단발머리에 검은색 머리카락을 보니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낀다. 그녀 또한 아테나와 다른 사람들이 온 걸 이미 눈치챈 것인지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가슴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만, 걸어올 때마다 실룩거리는 둔부를 보니 이미 하반신이 꼿꼿하게 서있는 상태였다. 저 엉덩이를 스팽킹하고 싶다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 그녀는 점점 우리한테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왕님, 공주님. 이 시간에 훈련장에는 어떤 일로 오신 것인지……?”

깍듯하게 예절을 차리며 묻는 그녀의 말을 들으니 평소에는 이 시간에 오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후후, 세린한테 왕궁을 안내해주고 있었어요. 남편을 데리고 하는 왕궁 구경이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네요.”

응? 착각인가? 방금 저 ‘헬레나’라는 여자의 눈썹이 살짝 움직인 거 같았는데.

“소개할게. 얘는 헬레나. 여왕기사단의 부단장을 맡고 있어. 단장은 나지만 내가 어머니를 도우느라 부재중일 때는 모든 기사단의 업무를 헬레나가 맡아. 굉장하지?”

사실상 자기 직속 부하이자 위급상황 시에는 단장의 업무까지 모두 맡는 인물이라. 굉장한데. 엄청난 인재를 데리고 있구만. 이런 인재가 있다면 나라도 일할 맛 나겠다.

그 말에 ‘아테나, 칭찬은 좋지만 업무를 떠넘길 생각은 해서는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죠?’라는 마리아의 말에 아테나는 조금 더듬거리며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야 임마…….

그런 대화를 하느라 헬레나에 대해 자세하게 관찰하지 않았지만……솔직히 자세히 관찰했더라도 상상할 수는 없었겠지. 저 ‘헬레나’라는 여자에 의해 내가 대련장 땅바닥을 뒹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머리 허연 그 미친년은 알 수 있었다 치더라도 별 도움은 안 된다만. 난 나한테 다가올 뜻밖의 이벤트를 깨닫지도 못한 채, 웃음을 지으며 대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초반 부분에서 나온 시골 이야기는 농촌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논논 비요리'입니다. 논과 밭을 간다고 해서 논논비요리가 아닙니다. 이 애니는 그런 애니 아닙니다.

야근 때문에 녹초가 돼서 후속편을 적는 것도 어렵네요. 해야 할 일도 많지만 집에 온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나는 건 아니죠. 집에서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후기를 겨우 쓸 정도입니다. 뭐……백수생활보다야 훨씬 더 낫지만 말입니다.

논논비요리라고 하니 생각나는데, 이번 주에 강원도 강촌을 갔다왔습니다. 괜찮은 곳에서 잠을 자서 좋긴 좋았는데……어, 강촌이나 강원도 사시는 분께 악의는 없다는 걸 미리 말씀드립니다.

강촌이 아니라 깡촌이었습니다. =_=; 시내나 번화가로 보이는 구역을 제외한다면 대구가 최첨단으로 보일 정도라니. 도로 표지판 같은 곳에 편의점이나 특산물 비슷한 것을 광고할 정도여서 제가 더 놀랐습니다.

강원도라고 하면 군복무나 서울 가까운 지역으로 유명한 곳이었는데……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강원도를 설마 이런 식으로 접하게 될 줄이야. 역시 사람은 견문을 넓히며 여러 가지를 배워야 하는 거 같습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루인sv님, 원인은 백발 여자 때문이지만 세린도 아주 잘한 건 없죠. 이런 면에서는 주인공을 거침없이 까려고 합니다. 주인공이니까 잘 봐주고 실드치는 게 아니라, 이런 병신 같은 주인공이 있으니 소설이 요 모양 콘나 꼬라지니 낫딴다요-!! 같은 걸 말해주고 싶어서요.

잘못된 일, 그릇된 가치관에 대해서는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네요. 저도, 세린도 말입니다.

로리콤MK님, 건담에 대해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건담이나 그렌라간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제 취향일 뿐, 소설은 늘 그랬듯이 맛간 인간처럼 막 진행할 생각입니다. 예? 로리 캐릭터는 언제 나오냐고요?

……

…………

………………

다음역은 징역, 징역입니다.

내리실 문은……교도소입니다……라고……!?

홍차

맛차

녹차

둥글레차

으아니─차!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가, 감옥이라고? 교도소?

내, 내가……구속됐단 말인가? 어? 내, 내가……아청법 위반으로……구속됐다고?

으, 으흐흐흙……아, 아니……이게 무슨 소리야……구속이라니……? 내가, 내가 범죄자라니이이잇!?

……그, 그래! 이 악몽에서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단 하나! 이 선택지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거야! 그럼 난 정상인으로서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어!

[질문]

로리콘 그만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인간 그만두시겠습니까?

……

…………

………………

답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예? 뭐 해야 할 말 없냐고요? 흐, 흠! 크흠!

……로리!

다이스키이이이이잇──!!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