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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102화 (102/235)

00100 「10-9 : 서장(序章)의 끝 (9)」 =========================

역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처음이 가장 어려운 거 같다. 자기가 하던 익숙한 일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한 일이니까.

어렸을 적에는 도전심과 새로운 일에 대한 즐거움 등으로 그걸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당한 긴장감이 삶에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

그러나 나이가 들다 보면 그러한 도전적인 정신과 열정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손이나 눈을 떼기가 힘들어진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 도전할수록 겪는 좌절과 두려움이 순식간에 몸을 옥죄이고, 이는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준다.

소설이나 현실에서 흔히 보이는 보수파나 온건파, 급진파 등의 단어에서 이 현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보수파는 기존의 것을 지키며 나가자는 성향을 보인다. 물론 옛것을 지킬 필요는 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니까? 뜻은 좀 다르다만…….

그치만 오직 옛것만을 소중히 여기며 새로운 것을 배척하는 자세를 보이는 게 일반적인 수구파의 형태이기도 하다. 이를 흔히 말해 ‘꼴통수구’라고 한다.

옛날 것만을 소중히 여기고 생각하다보니 새로운 것을 무조건 나쁜 것,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꼴통이 됐기 때문이다. 과유불급이란 말도 더해야겠군.

나? 난 정치적인 사상으로는 진보다. 내 한 몸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온건파를 선택해야겠지만. 한국의 독재당이 수구파, 보수파로 유명했기에 더욱 그런 부류를 싫어하게 된 원인이 됐지.

정치적인 성향이야 둘째 치더라도 옛날 것에 너무 얽매이다간 현재나 미래를 볼 수 없게 되는 것 또한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자기들이 이룩한 체제나 업적이 묻힐까봐. 사라질까봐 겁이 나서 그런 거겠지. 정권의 교체를 두려워하는 놈들이니까.

정당이라는 커다란 단체에 속해 있지만 실상 그 속은 관료주의(官僚主義)에 젖은 쓰레기들뿐이다. 그런 놈들이 나라의 녹을 거덜 내고 있는데 그 새끼들을 미쳤다고 좋아하겠냐?

이야기가 너무 많이 벗어났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그래. 사람이든 정당이든 단체든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한다’는 행동은 상당히 많은 용기와 행동력을 필요로 한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다시금 여러 가지를 겪어야 한다는 심리적 요인 또한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 일로부터 벗어나고 싶기에 우리는 안정, 안전, 평화를 원하는 거다.

나도 그랬다. 처음에는 주저했다. 모든 것을 말이다. 처음으로 학교에 가는 것부터 시작해 모르는 수학, 영어 등. 공부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처음으로 겪는 모든 것들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었지.

물론 중간에는 재미있는 것도 있었고 즐거운 일도 있었다. 군대는 좀……생각하긴 싫지만 여하튼 여러 가지를 겪기도 했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졸업 전부터 시작해 취업, 빚, 공무원 공부 등. 내가 원하지 않는 일도 해야 했기에 그것들을 맞이하는 내 기분은 결코 좋지가 않았다.

원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만 어려운 것도 장난이 아닐 정도로 어려웠지. 좋아하지도 않는 어려운 일을 꿋꿋하게 해야 한다니. 이딴 새로운 일 따위는 줘도 사양이었다.

난 이제야 선택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쾌락에 젖어 사는 삶’을. 그렇지만 이 선택은 처음에는 나를 매우 힘들게 했다. 참고로 이 ‘처음’이라는 말은 ‘하렘 어드벤처’에 와서 선택한 때가 아니라 맨 처음 이 삶을 생각했을 때다.

내가 포기하는 삶이라고 하니 누군가는 술을 진탕 마시며 술주정뱅이처럼 돌아다니는 삶을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 난 술을 잘 못 마신다. 금방 얼굴이 붉어지고 화장실도 자주 간다. 술, 담배, 도박은 나한테 있어서 절대적인 악(惡)이다. 기호식품이라지만 그거 때문에 인생 망치고 병 걸린 사람 한두 명 본 것도 아니고.

아직 30도 안 된 새파란 청년. 이팔청춘의 파릇파릇한 사내. 열정과 꿈을 가져야 하는 나이대에서 ‘아……그냥 다 포기하고 싶다. 공부고 빚이고 지랄이고 간에 다 포기해서 그냥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구름 흘러가듯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막장이었다.

오해의 여지가 생길까봐 말한다만 저런 식으로 생각했다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급진적인 삶보다는 점차적이면서 조용한 삶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선택을 비하하거나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건 나 자신을 까는 일이기도 하니까. 그럼 뭐가 문제냐고?

원하지도 않는데 빚에 짓눌려 영원히 노예처럼 살아야 했던 삶부터 시작해 그 탈출구가 그런 선택지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지. 진취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삶 따윈 개나 줘버리고 쾌락에 탐닉한 채 모든 걸 잊고 사는……그런 삶을 선택함으로써 현실에서 도망치려 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근데 더 큰 문제가 있었지. 난 절대 그 삶을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당장 내가 ‘어머니, 아버지. 앞으로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겠습니까? 저 긴따로, 앞으로 부정(不正)을 사랑하며 비겁한 짓, 쓰레기 같은 짓만 골라하면서 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과연 우리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

난 병신이지만 그래도 나름 지식과 교양을 갖춘 병신이다. 그런 말을 실제로 했을 리는 없잖냐. 그래도 이 말을 했다면 그 후에 나올 반응은 안 봐도 비디오다.

응? 비디오가 뭐냐고? 어허, 이런 불쌍한 중생들을 보았나? VHS란 Video Home System. 일단 명목을 유지하고 있는 ‘비디오 방’의 비디오를 뜻하는 말이다. 비디오 플레이어도 포함되겠지만.

요즘은 Micro SD Card부터 시작해 USB 등 다양한 이동식 저장 매체 등이 있지만 옛날에는 기본이 플로피 디스크, 용량이 많으면 CD였지. 지금처럼 다양한 이동식 저장 매체 등은 생각도 못 했었다. 이러한 점은 영상매체도 마찬가지였지. 최신식 비디오 나오면 1000~2000원 정도 주고 빌려 보는 게 그나마 낙이었다.

나도 참……기술의 최첨단 발달이 이루어진 시기를 거치다보니 참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됐다. 이야기하다가 삼천포 빠지는 거 별로 좋은 거 아닌데. 음, 그래. 부모님한테 내가 병신 같이 살겠다는 이야기를 하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미리 말해두지만 아빠는 아마 날 때렸을 것이다. 초장부터 강력하다. 정말 강려크한 한 방이다. 옛날에 몇 번 맞았지만 맞을 때마다 생각하는 건 ‘기분 존나 더럽다’였다.

아니, 대기업 사장이나 공무원. 혹은 돈 잘 버는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아, 아니. 나 맞는 거 좋아하는 변태 아니라니까? 어디까지나 ‘그런 사람들이라면 그나마 이해가 간다’ 정도로 이해해라.

아빠 같이 상의도 없이 집 사고 빚 내서 나한테 던져준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날 때리냐. 자기들이 병신 같이 살았다는 것에 대한 반성 따위 추호도 없다.

그저 아들인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줄 거라는 근거 없는 신뢰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뿐. 그런 내가 갑자기 병신 같이 살겠다고 하니 당연히 때렸겠지. 아……상상만으로도 짜증이 이빠이다.

엄마? 쌍수를 들어 반대하는 건 기본 요소다. 온갖 욕을 다 했겠지. 무슨 생각이냐,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 이 세상 험한 줄도 모르고 아주 병신 소리를 한다, 이런 좋은 집에 살 수 있게 된 것이 다 누구 덕이냐, 집빚을 우리가 어떻게 다 갚느냐, 결혼은 어떻게 할 것이냐 등. 당장 생각나는 거 적은 것만 해도 이 정도다.

……어, 있잖아. 음……그냥 하렘 어드벤처에 소환된 게 몇 백 배는 더 좋은 거 같은데.

장난 아니라, 그렇잖아. 빚 만들 때는 상의도 안 해놓고 이제 와서 다 갚으라니. 그런데 나는 불평불만 같은 건 말하지 말고, 입 닥치고 최선을 다해 빚 갚으라고? 갚아줘도 아무런 이득도 없고 보답도 받지 못하는데?

결혼? 내가 여기 와서 결혼했으니까 망정이지, 현실에서 결혼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낭비되는 줄 아냐? 여자친구 사귀는 것부터 시작해 데이트 비용이 엄청 나가겠지! 옷도 그렇거니와 돈 나갈 데가 한두 군데라고 생각하냐? 그러다 헤어지면? 그 비용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환급(還給)이라도 되냐?

결혼? 야, 난 아직 빚도 제대로 못 갚았는데? 그럼, 여자친구(곧 신부가 될)한테 이렇게 프로포즈를 해보자. 어디까지나 생각으로만!

‘난 빚을 갚고 싶어……너와 함께! 존나 많은 빚이지만 너와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될 거라 믿어!’

이 말 들은 여자가 당장 내 뺨을 후려갈기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한 말이다만 정말 정신이 나갔다고밖에 형용할 길이 없다.

빚을 함께 갚고 싶다고? 아니, 빚을 갚을 생각으로 여자랑 결혼하냐? 진짜 무슨 생각이냐? 이보다 더한 개막장이 있을 수 있을까? 좀 더 다른 형식으로 프로포즈를 해보자.

‘저기 있잖아……난 널 사랑해. 근데 우리 집에 빚이 많거든. 그래서 말인데……나랑 같이 빚을 갚아줄래? 분명 너와 함께라면 어떻게든 될 거 같애’

아우우우우우────ㅅ!

시발, 아웃이다!

병살타가 차라리 나을 정도의 멋진 아웃이라고!

아니, 바보냐? 빚이 있는데 함께 결혼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라고! 그 빚을 배우자한테 갚게 하다니!? 그럼, 내가 그토록 욕하는 부모님이랑 내가 다를 바가 무엇인가!? 난 부모님 같은 사람이 되기 싫으니까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거라고!

아빠는 때리겠지만 엄마는 욕할 거다! 근데 그 빌어먹을 잔소리는 맞는 것보다 훨씬 더 용서하기가 어려웠다! 자식 새끼 미래 멋지게 망쳐놓고 이제 와서 개천에 용나기를 바라다니! 정말 무슨 생각이냐 빌어먹을……!

모든 걸 포기하는 삶을 선택했다지만 이렇게까지 머리의 뚜껑이 열리게 하다니! 역시 내 부모다! 하는 짓이 비열하다 못해 졸렬하기 짝이 없군!

이 지경까지 오니 정말 울고 싶을 지경이다. 그나마 멀리 떨어진……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부모님의 이미지한테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는데 이런 시궁창 결과가 나오다니.

원래부터 최악이었지만 이쯤 되니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건 바로 내가 그 부모님의 자식이라는 거겠지. 그 비겁함과 졸렬함은 이 세상에 와서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별로 감사할 마음은 없지만…….

모든 걸 포기하는 건 처음에는 힘들었다. 현실 세상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위의 반응뿐만 아니라 내 인생까지 모조리 말아먹는 결과를 상상할 수 있었기에 결국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 덕분에 공무원 공부 하다가 이 세상에 오게 됐다만.

처음에는 힘들었다.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해야 하나.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 대가와 결과가 고작 이거냐.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니. 이건 정말 무슨 개뼈다귀 같은 짓이냐 하며……후회하고 슬퍼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하듯이, 내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나한테 무언가를 바라긴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를 정확히 모르기에 딜(거래)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

난 지쳤다. 더 이상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도망치고 싶지도 않았고. 싸우는 건 그냥 육체적인 의미의 싸움만 포함되는 게 아니었다. 삶은 전쟁이고 그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이든 간에 써야만 했다. 이유? 간단한 걸 왜 묻냐? 죽기 싫으니까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치열한 무한경쟁 사회에서 겨우 떨어진 곳이 도서관 구석이라니. 아, 빚도 추가해야겠네. 한 푼도 쓴 적이 없는데 빚쟁이 자식이 되어 공무원 공부를 강요받다니.

흔하디흔한 스토리다만 바란 적도 없는 그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 내 기분은 알 사람만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세상에 소환되어서 괴물이랑 싸우고, 여행도 해보고. 납치도 당해보고. 여러 일을 겪으며 다다른 곳이 바로 이곳. 포기하는 삶이었다.

생각해보면 참 험난하고 힘든 길이었다. 그 여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이었으니까. 그걸 또 좋다고 나선 나도 문제가 있긴 있는 거 같다.

싸우는 게 안 된다면 도망이라도 칠 수 있어야 했다. 일본의 그 유명한 포켓몬 시리즈에서도 ‘도망간다’라는 선택지 정도는 주니까. 이벤트 배틀에서는 도망칠 수 없다지만 내 인생은 늘 이벤트 배틀이었다는 점이 함정이지. 싸움도 포켓몬이 아니라 트레이너인 내가 싸워야 했고. 웃음만 나온다.

도망? 어디로? 이 하렘 어드벤처라는 세상에 있는 이상 그 여자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도망을 치려해도 어느 새 내 정신과 육체는 그 여자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겠지.

자기가 지배당하고 있는지 어떤지도 눈치 못 챈 채 조종당하는 것도 끔찍하지만, 조종당하면서 ‘난 자유다’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더 끔찍하겠지. 으으, 소름 돋았잖아. 젠장.

유명한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를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가상현실에 있다는 것조차 인지 못 한 채 살아간다.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지 않은가?

자기가 꿈속에 있는데 그게 꿈인 줄조차 모르다니. 어찌 보면 호사(好事)지만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한테는 악몽이나 다름없겠지.

난 지금 일부분이나마 진실을 깨달았다. 좀 건방지게 말하자면……이 세상에서 가장 진리에 가까이 있는 남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놀랍다만 아예 대화까지 나누며 목숨을 잃어버릴 위기에 노출된 적도 있으니까.

포기하는 삶을 선택했다. 난 앞으로 죽음이라는 무서운 현실로부터 도망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정말 매트릭스 영화에 나왔던 알약처럼 ‘모든 걸 다 잊을 수 있는 약’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걸 먹는다면 지금까지 했던 여행이나 싸움, 기억과 추억까지 모조리 날아가겠지.

그렇지만 내가 그 여자에 의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사실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그거 하나 잊자고 다른 추억까지 모조리 잊으려 하다니. 나도 참 죽음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아니지? 생각해보니 아니네? 기억까지 읽을 수 있는데 기억 조작을 할 수 없다고 누가 단언하겠는가? 추억이나 경험을 모조리 잊어도 그 여자가 날 죽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하게 남겨 놓을 수도 있다!

어휴, 현실에서는 부모님 때문에 죽을 맛이었는데 여기서는 그 미친 백발 여자 때문에 죽을 맛이군! 대체 내 인생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하하……. 킥킥 거리며 혼자 웃었다. 모두가 자는 밤에 너무 크게 웃으면 누가 깨잖아. 고민해서 슬퍼하거나 힘든 건 나 혼자만으로 족하다. 응, 그렇고말고. 지금도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혜린이와 로라, 메이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아내들을 얻게 됐을까. 정말 신기하다.

그녀들의 머리카락을 한 번씩 쓰다듬는다. 혜린이는 가볍게 움찔했고 로라는 웃음 지었다. 메이는 ‘우웅, 아빠……엉덩이는 하지 마……’라며 특이한 잠꼬대를 한다. 엉덩이를 자주 공략해서 이젠 똥싸개의 칭호는 아이나가 아니라 메이가 가지게 됐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똥싸개의 칭호는 앞으로 너의 것이라고 말하면 분명 날 패겠지. 날 때리려는 메이의 모습을 보니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물론 전적으로 내 탓이다만……괄약근의 힘이 너무 약한 거 아닐까. 이 똥싸개의 칭호를 메이한테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아주 간단하지.

“음, 앞으로 아이나랑 섹스할 때는 항문에 박아주자. 아이나가 똥을 많이 싸면 똥싸개의 칭호는 계속 아이나 거니까.”

실로 명답이 아니겠는가? 솔로몬도 울고 갈 내 판결에 메이는 ‘흠냐……아빠, 거기 안 된다니까……’라며 다시 한 번 잠꼬대를 한다. 걱정 마렴, 메이야. 똥싸개의 칭호는 계속해서 아이나 거란다. 이거 말하면 또 날 패겠지만…….

문제의 해결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다웠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답을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부모님을 포함해 한국의 노예 같은 꼰대들, 백발 여자. 모두 다 미쳤다고 생각했다. 헌데 지금 보니 나도 미친놈이다. 하긴……미친놈들 사이에서 27년을 살아왔는데 내 정신이 온전하고 멀쩡할 리 있겠냐?

난 내 나름대로 내가 미쳤다는 걸 합리화시키기 위해 그들을 생각했다. 근데 왜 이러냐. 눈시울이 계속 뜨거워진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떨렸기에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떨면서 그녀들을 만지면 틀림없이 잠을 깨울 테니까. 내가 두렵고 슬프다는 걸 알리게 될 테니까. 난 즉시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복도로 나왔다.

아무도 없는 복도 끝에는 달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있었다. 이 어두운 통로에서 유일하게 빛을 밝혀주는 그곳으로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간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내 눈에서는 뜨거운 게 흘러넘쳤다. 다행이야, 눈물이 여기에서 나와서. 방 안에서 나왔다가 시트라도 젖게 하면 좀 그렇잖아.

복도 끝으로 간신히 도착했지만 난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두 손을 복도 바닥에 두고 눈물을 흘렸다. 마음 같아서는 큰 소리로 울고 싶었다. 정말 울부짖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달라지는 일은 없다. 아내들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끅끅 거리며 우는 내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분명 ‘저 새끼 왜 저럼?’이라고 생각하겠지.

안 되겠다. 도저히 안 되겠어. 참을 수가 없다고……!!

난 그렇게 생각하며 결국 입을 열었다.

“……죽기 싫어……!”

내가 바보였다. 멍청이였다. 그래, 멍청이지.

병신도 이만한 병신이 없을 것이다.

포기하는 삶?

도망치는 삶이라고?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도망친단 말인가!?

포기하는 삶을 살자고 결심한지 오늘로 이틀이다! 2주도 아니고 1주도 아니다! 고작 이틀! 1주일의 반보다 적은 3일조차 지나지 않았는데 이 꼬라지! 이 한심한 꼬락서니라니! 눈물과 웃음이 절로 나왔다.

죽음으로부터 도망치자고? 그런 게……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리석다 못해 바보 같았던 내 생각에 그저 후회심만 느껴졌다.

그래, 알고 있었다! 현실로부터 도망치던 내가 다다른 곳이 이 세상이라 생각했는데……알고 보니 이 세상에서도 도망만 쳤다! 그리고 그 결과가 여기다!

그 누구한테도 내 사정을 말할 수 없어서 혼자 햄스터 챗바퀴 돌리듯 빌어먹을 짱구를 굴렸지! 그 도피방법마저 이렇게 순식간에 박살났기에 혼자 끅끅대며 울고 있다!

이 와중에도 나 때문에 아내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깨면 어떻게 하나를 걱정하다니? 병신인 거냐, 멍청한 거냐?

자기 죽음보다 다른 사람들 수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는 마음과 배려의 표현인 걸까? 미치고 환장하겠군. 끝까지 호구구나, 나는.

수많은 아내들한테 사랑받는 게 기뻤다!

내 손으로 일구어낸 현실을 누리고 싶었다!

모두가 그렇듯이 행복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잘난 결과가 바로 이거다!

그 누구의 위로조차 받지 못한 채 홀로 복도 구석에서 쓸쓸하게 울고 있다니! 이게 무슨 꼬라지란 말인가? 무슨 귀신 영화에 나오는 귀신도 아니고!

아니지!? 귀신은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힘이라도 있지! 난 아무것도 없다! 무력하게 죽음만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지 모르는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힘없고 나약한 존재다!

이제야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딴 거 없고, 그 여자의 말이나 생각 한 마디에 지금까지 얻은 모든 걸 한 방에 잃어버릴 수 있는 병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단 말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 빌어먹을 죽음을 잊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려 했다. 그렇기에 어제부터 그토록 아내들을 탐하고 범했다! 쾌락으로라도 그 공포를 잊고 초연하게 죽음을 기다리려 했지만……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죽는다! 뒈진다고! 흔히 말하는 ‘시발 뒤질래?’라는 그런 정도의 일이 아니다! 정말 죽는단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도 못 먹고 좋아하는 것도 못 한다! 아내들을 껴안는 것은 더더욱! 정말 죽어서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데 어떻게 무섭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죽기 싫어……죽기 싫다고……!”

흑흑대고 끅끅대며 죽기 싫다니. 누가 보면 저승사자라도 곁에 있는 줄 알겠네. 웃긴 말이었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언제든지 그 여자가 날 죽일 수 있으니까.

지금도 날 보며 깔깔 웃고 있겠고, 이 생각을 읽으며 더욱 자지러지게 웃고 있겠지. 난 살아있는 장난감일 테니까.

그렇게 힘들게 결심했던 ‘포기하는 삶’은 단 이틀. 이틀 조금 넘었을 수도 있겠지만……어찌 됐든 작심삼일보다 못한 결심이 되어버렸다. 난 결국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게 가능하거든 가능한 놈이나 하라고 그래라.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어, 그래. 포기하는 삶은 이미 포기했다. 말장난이 아니라, 정말 포기했다.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선택한 삶이 아무런 쓸모가 없었는데 더 이상 그런 삶을 살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럼 어떻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죽음을 무서워하며 사는 것도 싫지만 그 외에 뾰족한 방법이 있나? 또 호구처럼 그 여자한테 휘둘려서 살아야 한다고? 그것도 싫단 말이다! 왜 나한테 주어진 삶은 이용당하느냐, 죽느냐. 이거뿐이지? 제3의 선택은 없냐? OX 퀴즈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니!?

내가 한 생각이지만 꽤 재미있었기에 킥킥댔다. 눈물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복도 끝에 등을 기댄 채 시선을 옮기니 달빛이 운치 있게 복도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젠장……사람이 죽음을 각오해서 그런 걸까. 이런 하찮은 것조차 아름답게 보인다. 이래서야 죽을 수도 없잖아.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고민이군. 산 넘어 산이어야 하는데 난 아직 산에도 도착 못 한 느낌이다. 아니, 그 산이 무슨 산이며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지.

속담한테도 태클을 받다니. 얼마나 불쌍한 인생이란 말인가? 그 주인공이 나만 아니었다면 완벽했을 텐데!

포기하는 삶을 관두니 재미있는 표현이 막 쏟아진다. 쾌락에 모든 걸 맡긴 채 잊으려 했지만 결국 죽음이란 건 언젠가 찾아오는 것. 그런 방법으로는 죽음에 도망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다.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왔군. 눈물을 닦으며 집중한다.

1) 이용당하는 삶을 계속 산다.

- 마음에는 안 들지만 그나마 유일한 길이다. 하지만 이 길의 결말은 결국 죽음이며, 죽을 때까지 열심히 그 여자가 만든 이벤트와 퀘스트에 희생되어야만 한다. 시발년.

2) 포기하는 삶을 계속 산다.

- 이것 또한 마음에는 안 드는 길이다. 지금 막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이걸 또 할 수는 없잖냐.

빈약하다 못해 이게 선택지인지 강요인지조차 모를 삶의 길을 보니 나도 참 한심하게 살아왔구나 싶었다. 부모님이 이걸 본다면 자식 농사 망쳤다고 한탄을 하시겠군. 그 한탄에 내가 랩을 붙여주면 멋진 음악이 될 거 같다.

무슨 길을 고르든 간에 힘들고 험난한 인생이 될 거 같네. 이젠 익숙하다. 선택도. 그 후에 일어날 모든 일도. 모두 내 책임이다. 정말 ‘인간 신세린’이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정해야 하는 이 중요한 순간에 누구 하나 주변에 없다는 사실이 좀 쓸쓸하다만……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도 없잖아. 모두 내 소중한 아내들이니까.

“자…….”

아무도 없는 복도 끝에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 각도에서 하늘은 안 보이고 천장만 보이는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은 없었다. 이 대답은 누군가한테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라는 걸 생각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100편까지 1화. 단 1화를 남겨둔 상태네요. 2016년 11월 말부터 지금까지, 주말을 제외하면 끊임없이 달려왔습니다. 100편이라니, 감개무량하네요. 감동에 젖어도 좋은 장면인데 내용은 시궁창입니다. 현실과 이상의 차이(갭)에 괴로워하는 세린의 모습이 잘 보이네요. 이런 걸 한두 편 가득하게 적는 작가 새끼가 변태 같다고요? 어허, 이분들이!?

'변태인 거 같다'가 아니라 변태인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딴 소설 쓰겠습니까?

중요한 사실도 아닌데 왜 띄어쓰기에 엔터까지 했냐고요? 변태 같다는 것과 변태라는 것에는 큰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변태 같다는 소리는 자신의 은밀한 취향을 드러내기 부끄러워한다는 거죠. 근데 평소 제가 쓰는 글은 하나 같이 약 빤 미친놈이 쓴 느낌이잖아요. 이걸 변태라고 말 안 하면 뭘 변태라고 하겠습니까?

여하튼, 이번 편에서는 세린이 현실에 염증을 느꼈던 이유 및 상황을 자세하게 표현했습니다. 현대로 치자면 「N포 세대」라는 말이 가장 적합하겠죠.

취업, 연애, 결혼, 내 집 마련, 인간 관계. 흔히 말하는 5포 세대(5개를 포기한 세대)의 기본 소양입니다. 여기서 꿈이나 희망 같은 걸 더하면 7포 세대로 잡 체인지를 하게 되죠. 디지몬으로 치자면 진화, 록맨EXE로 치자면 스타일 체인지. 예? 소울 유니존? 크로스 시스템? 명작인 에그제 3을 기준으로 칩시다.

현실에서 아무것도 못 한 채 한심한 삶이나 살고 있던 세린이 부모나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분노를 드러내는 장면은 꽤 열심히 썼습니다. 제가 쓴 [S.A.O - 마법사 이야기]나 전자책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러한 설정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조건 나옵니다. 왜 그런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죠.

힌트요? 소설이 '현실에 있을 법한 일'을 적는 것이라는 말이요.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을 겁니다.

전자책인「아스라이」를 쓸 때도 그랬지만, 저는 무적최강 먼치킨 주인공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감정이입이 어렵거든요. 그래서 글을 쓸 때에는 찌질하거나 현실적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힘든 현실이나 상황에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물론 이런 전개나 생각을 싫어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먼치킨 주인공은 대부분 다 쓰지만 이런 찌질한 주인공을 쓰는 글은 별로 없으니까요. 그냥 이런 글 쓰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기에 현실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게 됐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도망치는 길을 선택했지만 결국 죽기 싫다고 오열하는 세린의 모습으로 99화가 끝나게 됩니다. 당연한 반응이겠죠. 갑자기 크툴루 신화 뺨치는 신적 존재가 'ㅎㅎㅎ 내가 너님 불러서 고생시켰음! 너님 이제 죽을 수도 있고 미칠 수도 있음! 근데 계속 지켜볼 테니까 열심히 해보3! ㅃㅇ~♬'라고 하다니. 용케 제정신이다 싶더군요.

포기하는 삶을 선택하며 아내들을 마구 범하는 세린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일시적 광기 현상에 가까워 보입니다. SAN체크에서 5이상의 이성 수치를 잃게 된다면 일시적 광기 현상에 빠져들듯이, 세린도 일시적 광기(성욕 증가)에 빠졌을 수도 있겠네요. 신화 생물 중 그레이트 올드 원이나 아우터 갓을 보게 된다면 1D100 굴립니다. 그러면 영원한 광기 현상에 빠질 수 있으니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5포 세대나 7포 세대라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죠. 그러니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거구요. 저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보다 더 나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마침내 100편 업로드. 잠시간 휴식을 가지게 되겠네요. 남은 1화도 노력해서 글쓰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101화부터는 다시금 힘차게 약 한 사발 빨고 후기를 적을 테니 기대하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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