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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100화 (100/235)

00098 「10-7 : 서장(序章)의 끝 (7)」 =========================

흑역사(黑歷史)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자주 TV나 인터넷에서 쓰이는 단어다. 뜻은 예전의 과오, 어렸을 적 아무것도 몰랐던 채 저질렀던 부끄러운 일 등을 가리킨다.

쉽게 말해 ‘아, 존나 쪽팔려! 옛날에는 존나 멋있는 줄 알고 간지 좀 잡았는데……지금 보니까 완전 개쪽팔리잖아 씨팔! 와, 존나 죽고 싶다!’라는 거다.

요즘에는 ‘와, 이불킥 존나 세게 때리고 싶다’라든가 ‘집에서 발로 찰 이불 없냐? 사줘?’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불킥’이란 이불 속에서 부끄러웠던 과거를 회상하며 발로 찬다는 뜻이다. 흑역사보다 더 와 닿는 말이다. 그야 당연하겠지. 흑역사는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에서 가져온 말이니까.

흑역사라는 말의 어원(語源)은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작품인 [∀건담]이다. 전쟁을 계속 하고 있던 어두운 과거의 역사라는 의미에서 만든 말이지만, 이게 한국으로 오다 보니 부끄러웠던 과거, 치부(恥部)를 뜻하는 말로 변하게 됐다. 한국이 한자를 쓰는 국가이기도 했고 뜻도 그럴 듯했기에 큰 위화감 없이 쓰이고 있지.

중2병이라는 말도 일본에서 왔지만 한국과는 살짝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반항기나 청소년기를 일컫는 말로 쓰이고는 있지만 꽤 의미는 다르다.

여하튼, 중2병 걸렸거나 과거에 했던 부끄러운 짓을 보면 ‘아, 흑역사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 이상한 거 올렸다가 쪽팔린 사람들이 많으니까.

나? 나도 많지. 학교에서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못했던 것부터 시작해 이것저것 많다. 하지만 가장 큰 흑역사이자 이불킥을 날리고 싶은 거라면……바로 그 백발의 여자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겪었던 모든 일에는 그 여자가 있었으며 오래 전부터 생각했었다. 나를 포함해 내 아내들이 이 세상으로 소환된 것도. 마리아와 아테나가 생명의 씨앗을 만들 수 없게 된 것도. 모두 다 그 여자 탓이라고. 그 여자가 원흉(元兇)이라고.

모든 걸 남 탓으로 돌리는 건 바람직한 짓이 아니지만 적어도 그 생각에 한해서는 내 가정이 맞아떨어졌다. 아주 훌륭하게.

그녀는 나를 포함해 남자만 13명이나 소환했다. 날 13번째라고 칭했다. 이 세상이 남자를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바람직하겠지.

나중에 생각한 거지만 혜린을 비롯해 희진이나 은채 같은 여자들도 소환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들도 아마 죽었을 것이다. 여자가 혼자든 몇이든 간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마법이나 무기가 있어도 죽을 수 있는데 아무런 힘도 없는 그녀들한테 찾아올 것은 죽음밖에 없었겠지.

레벨 10때부터……아니, 나와 혜린이를 이 세상에 소환했을 때부터 날 가지고 놀았던 여자다. 아이라를 데리고 오기 위한 여행부터 시작해 부카케 마을의 습격, 안나와 니나의 납치, 희진이와 은채의 소환, 마리아와 아테나까지. 모두 다 그녀가 한 짓이다. 그걸 다 해결하고 나니 난 참을 수가 없었다.

RPG 게임이나 소설에 나올 법한 모든 퀘스트나 미션은 끝났다. 한데 또 이 짓을 하라고? 현실이랑 마찬가지로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휘말리는 일’에 평생을 바쳐야 한다고? 그건 싫었다. 현실도 싫었지만 그런 삶을 여기서 살기도 싫었다.

겨우 손에 넣은 평화와 행복이 부서지는 건 더욱 싫었다. 그 여자가 준 ‘자지의 맹세’부터 시작해 다양한 무기, 생각지 못한 이벤트 등으로 인해 난 소중한 아내들을 얻게 됐다. 그 아내들과 함께 지내니 정말 꿈만 같았다.

현실에서는 시궁창 같다 못해 좆같았던 가족의 개념이 단숨에 뒤바뀌었다. 가족이란 정말 소중한 것이구나 하고 다시금 깨달았다.

날 따라주는 아내들을 보니 너무나 행복했다. 물론 말다툼도 하고 그랬지만……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녀들은 날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 또한 그녀들을 사랑했다. 서로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지낸다는 게 이렇게 행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애초에……현실에서 그런 경험조차 없었으니 난 더욱 더 감명 받기 쉬운 타입이었겠지.

난 그저 지키고 싶었다. 겨우 얻은 평화와 행복이다. 괴물도 더 이상 없고 생명의 씨앗을 대체할 좆물 캡슐도 다 만들었다. 나중에 또 만들어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모든 일이 끝나 평화로운 숲에 소풍까지 갔다 오면서 난 느꼈다. 예전부터 느꼈던 것에 결의를 했었지. 그 백발 여자를 죽이자고.

까놓고 말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것인가? 갑자기 소환당한 세상에서 살아남느라 싸웠고 그러던 도중 아내들을 만나게 됐다. 몇 명의 경우 조금 억지스럽게 아내로 삼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대체 왜 내가 내 인생 전체를 남한테 이용당하며 휘둘려 살아야 한단 말인가? 현실에서도 그랬는데 이 판타지 세상에서도 그러라고? 좆까라고 그래라.

죽이자. 그래, 죽이면 되는 거다. 아무리 백발 여자라도 사람으로 보인다.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으면 제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죽는다.

한국에서 ‘죽창이다……죽창이 필요하다……존나 크고 아름다운 죽창이 필요하다……죽창 한 방이면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라는 드립을 괜히 쳤던 게 아니라니까!?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소총 두 자루부터 시작해 비싼 돈 주고 산 코스튬까지. 전투력 부분에서 내가 질 리가 없었다. 무기만 좋은 게 아니다. 괴물이랑 싸우면서 얻은 경험까지 살린다면 여자 한 명을 죽일 수 없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일어나니 주변은 온통 검은색.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기 사용은 고사하고 홀로그램 윈도우를 조작하는 것조차. 다가오며 내 부끄러운 과거와 어리석었던 행동을 너무나 자세하게 늘어놓는 그녀한테서 나는 도망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과거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모두 읽고, 내 행동까지 지배하는 절대적인 권력자이자 창조주. 그런 그녀로부터 내가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이기는 건 때려치우고 도망조차 못 쳐서 내 과거와 더러운 마음까지 모두 들어야 했다. 내가 어리석었다고 뼈저리게 느꼈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생사의 여탈을 정하는 자 앞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 그야 당연히 ‘살고 싶다’지. 죽고 싶은 놈이 대체 어디 있겠냐는 말이다!?

날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지만 내가 발버둥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말하며 날 살려뒀으니 그게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든 아니든 난 살아남았다. 아주 꼴불견으로.

흔히 만화 같은 곳에서 ‘흥……정말 처절하군. 죽이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다’라는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꿈에서 일어난 내가 가장 먼저 확인했던 건 ‘내가 살아있나?’였다. ‘살아있으니까 꿈도 꾸고 숨도 쉬지, 바보야’라고? 그래, 난 바보다.

하지만 알아둬라. 내가 살아있는 것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의 공포를 맛본다면 누구든 간에 이렇게 된다. 당연한 것도 모르게 된단 말이다.

내가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날 살려두다니. 굴욕이라고 느껴야 했지만 난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꼴불견이었던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참 한심한 생각이었다.

그 여자가 날 비웃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도 나 자신을 보고 비웃고 싶어지는데 하물며 그 여자는 어땠겠는가?

내가 아등바등 대며 겨우 손에 넣은 행복과 평화를 지키려는 게 그토록 우습게 보였다니. 그걸 깨닫자 슬프고 웃겼다. 아무도 소중하다고 생각 안 하는 걸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내 병신스러움에 슬프기도 했지만……그런 것조차 얻지 못했던 내 인생에도 슬픔을 느꼈다.

기쁘기도 했다. 어, 내가 매저키스트 기질이 있긴 하지만 그 여자한테 이렇게까지 모욕을 당해 기쁜 건 아니다. 그럼 뭐가 기쁘냐고? 적어도 지금은 이렇게 살아남았으니까. 비참한 생존이긴 해도 생존은 생존이었다. 그래, 난 살아남았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판국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정확히는 ‘살아나게 해줬다’라고 해야겠지만…….

난 알고 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평화와 행복은 언젠가 깨어질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했으니까. 내가 일구어 놓은 업적 등에 쥐뿔도 관심은 없었다. 무언가 원하는 게 있었고 그게 나랑 관련이 있다는 거 정도? 그 이외의 것은 생각해봤자 의미 없고 생각할 근거도 없었기에 생각하는 것을 그만뒀다.

그 여자를 만나기 전에도 엄청 고민했지만, 살아남은 후에도 더럽게 많이 고민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여자한테 살려달라고 빌어야 하나? 비굴하다 못해 병신 같은 생각이었지만 실행 가능성은 꽤 높았다. 그런 식으로라도 살아남고 싶어 하다니. 사람은 참으로 대단한 생물이라고 느꼈다. 어쩌면 나만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누군가는 ‘긍지’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의식주’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고. 나한테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자존심이나 긍지 같은 걸 버릴 줄 알아야 한다’라고.

자존심?

긍지?

의식주?

지금 장난 빠냐?

그거 아무런 소용없다니까?

꿈에서 보기도 했고 현실인 이 ‘하렘 어드벤처’에서도 봤다. 그 여자한테 있어서 꿈이든 현실이든 그런 경계나 구분 따위는 아무런 쓸모없는 것이었다. 자기가 원할 때 언제든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게 바로 창조주이자 절대자의 능력이겠지.

나? 내가 어디에 있든 그 여자의 샌드백, 심심풀이, 장난감이 될 운명이다. 원하지도 않는 일에 휘말려 고생하는 것도 싫은데 죽을 거라니?

싫다!

그런 건 싫다!

지금까지 노력해서 겨우 여기까지 왔다!

사랑하는 아내들과 가족을 만들고, 곧 태어날 아기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죽어야 한다고?

싫다……싫단 말이다!

죽기 싫으면 살려달라고 빌어야지!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 나보고 싸우라고? 그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진 여자랑? 남의 일이라고 존나 쉽게 말한다!

지금 당장 평범한 사람들한테 최신식 무기를 주며 ‘자, 우리를 노리는 적이랑 싸워!’라고 말해봐라. 그 사람들이 ‘알겠습니다!’라며 두말없이 싸우러 갈 거 같냐? 그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정신병원에 가야 한다.

사람한테 있어서 자기 목숨과 행복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살아도 이승의 똥밭에서 구르는 게 낫다고, 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

죽으면 끝이다. 죽어서 얻을 수 있는 건 죽음과 안식뿐. 그 안식에 행복이 있다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사후세계의 존재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니까.

그 여자의 신발을 핥든 뭘 하든 좋다. 살고 싶다. 살아남아서 내 아내들과 곧 태어날 아기들. 모두랑 함께 겨우 얻은 행복과 평화를 누리고 싶었다. 그거뿐이잖아……내가 바란 건 겨우 그거뿐이라고!

그것만을 위해 노력해왔는데 이제 와서 죽으라고? 또 이용당할 만큼 이용당한 다음에 아무런 이득도 없이?

그럼 대체……그럼 대체 내 인생의 의미는 뭐였는데?

내가 현실이든 이 ‘하렘 어드벤처’든 간에 인생과 목숨까지 바쳐가며 노력했던 거, 싸웠던 건 다 뭐였느냔 말이다!?

난 알고 있다! 현실의 내 인생은 쓰레기였고 개천에 용 난다는 속담처럼 내가 화려한 사람으로 다시금 태어나는 것 따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이룰 수 있는 것, 올라갈 수 있는 곳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빌어먹을 부모 때문에 평생을 노예처럼 살아야 했다는 사실을!

그것뿐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 빌어먹을 개고생 해놓고도 빚을 갚을 생각 없이 자기 꼴리는 대로 살아갔던 부모! 그 빌어먹을 부모 때문에 내 인생을 전부 쓰고도 모자랐던 나!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는 주제에 자식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것만큼은 최강 클래스를 자랑했던 부모님 덕분에 내 인생은 산산조각 났다!

그 현실로부터 도망쳤다는 걸 알았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솔직히 말해주마, 그래! 좋았다! 아주 째졌다!

내가 죽은 건 둘째 치자! 어차피 내가 죽었다고 그리 슬퍼하지도 않을 위인들이니까! 내가 죽은 덕분에 보험금 받으면 그걸로 잘 먹고 잘 살겠지!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냐! 그딴 게 아니라고!

난 자유다!

드디어 자유를 얻었던 거였다!

현실 세상에서 빚, 공부, 미래, 부모님, 정치 등 온갖 힘든 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말 그대로 자유(自由)!

내가 소환된 ‘하렘 어드벤처’에서 내가 겪었던 일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사실조차 몰랐기에 더욱 더 좋았다! 힘들고 비참했던 과거 따위 알려주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 당시에는 아직 ‘자지의 맹세’조차 제대로 쓰지 못했었다. 괴물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던 시절. 그래도 난 마음 한 구석으로는 기뻤다. 혜린이랑 같이 있어서?

아니! 이곳에서 나는 자유였으니까! 그 쓰레기 같은 현실과 제약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었으니까!

괴물들이 당장 내 목숨을 위협하는 그 와중에서도 기쁨을 느껴야 했을 정도로 내 인생은 시궁창이었다! 그래, 그 시궁창에서 아등바등 살아왔던 날 생각하니 그 백발의 여자가 내 발버둥을 좀 더 보고 싶다고 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용케 살아남았으니까!

최고라고 생각 안 해? 다른 세상에 소환된 것으로 비참하고 슬펐던 과거, 절대 이룰 수 없었던 허황된 환상이나 꿈으로부터 해방됐다! 난 자유인(自由人)이 된 것이다! 과거도 없고 얽매인 곳도 없는 말 그대로 자유! 프리덤!

성격도, 과거도, 미래도. 모두 골라잡을 수 있다!

힘들었던 공부?

날 괴롭히기만 했던 부모님?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여기 한국 아니라니까? 지구 아니라고! 오히려 왜 지금에서야 온 건가 후회가 될 정도였다! 군대까지 갔다 왔다는 사실에 ‘시발, 부를 거였으면 빨리 부르던가!’라며 분노했었다니까? 보통 ‘왜 여기로 날 부른 거냐!?’라며 분노해야 정상인데?

독재당이 정권을 잡으며 ‘노오력’이라는 단어가 생겼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노력이라는 글자를 더 길게 발성하는 이 단어는 ‘시발, 니가 노력을 안 해서 가난한 거야!’라는 식으로 쓸 수 있었다. 모든 걸 노력 탓으로 돌리며 실제 사회의 문제나 빈부격차에 대해서는 당연하다는 양 묘사했지.

내가 살던 곳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모든 걸 ‘노오오오오오력이 부족하다! 시발! 노예 새끼가, 노오오오오력을 해도 모자랄 판에!’라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상승, 빚으로부터의 탈출 따위는 꿈꿀 수 없었다!

부모는 저질러놓은 일, 싸질러놓은 똥을 나한테 맡기고 사회는 그런 빚과 과오를 평생 안고 가라며 나 같은 이를 죽게 내버려뒀다!

평생을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기분이 어떤지 아냐? 알 사람은 알겠지! 깜깜했다! 그 여자가 나를 불러냈던 곳처럼 그저 깜깜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지만 해야 하는 일, 갚아야 하는 빚은 계속해서 불어났다……. 내 자유나 미래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다며 그저 현실을 저주했었지.

그런 현실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가졌는데 이제 와서 죽으라니……너무하잖아. 너무한 처사잖아 그건……!!

그럼, 난 이용당해야 마땅한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는 거냐? 거기서는 부모와 병신 같은 사회, 꼰대들. 여기 와서는 그 여자들과 다른 사람들 뒷바라지만 하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냐……!?

깨어난 나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랬던 건가? 난 현실에서도, 여기에서도. 결국 병신 호구 머저리였던 건가? 그 여자의 손짓, 생각 하나에 이리 가고 저리 가는 꼭두각시였다니. 내가 살고 죽는 건 내가 잘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여자 덕분이었다니.

본질적으로는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은 내 인생.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하는 나. 모두 다 싫었다.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어떻게 하지? 바꿀 방법 따위는 없다. 이미 경험했다. 이것도 같았다. 현실, 하렘 어드벤처. 결국 난 이용당하면서도 그 원인을 제거하거나 바꿀 수는 없다. 그저 당하기만 할 뿐.

살려달라고 부탁해도 어떻게 할지 모른다. 앞으로도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한다니. 그럼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걸까?

미래를 바라보며 미래지향적인 인생을 살라고? 좆 까라 그래라. 그래봤자 또 이용당하는 멍청한 삶을 살겠지.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우습게도……난 방법을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 이미 생각했지만 절대 쓸 수 없었던 방법. 그렇게 살고 싶었지만 그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삶의 방향’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정말 웃겼다. 현실에서 하지 못했던 일을 여기서 할 수 있다는 것도 우스웠지만, 그 종착점이 설마 최악의 삶을 사는 방법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언젠가 파멸과 죽음을 맞이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영원이란 있을 수 없다. 불로불사? 무슨 영화 찍냐? 그런 거 없다니까?

누구나 한 번 태어나면 한 번은 죽는 거다. 그렇기에 역사에 이름 남긴 유명한 권력자들, 지배자들, 독재자들은 불로불사를 원했지. 니들 바보냐? 그딴 게 있겠냐?

아, 그래! 나도 이해는 한다. 응? 나 같이 병신 좆찌질이 + 시궁창 같은 삶을 살았던 놈이 어떻게 그런 권력자들의 마음을 이해하냐고?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거 모르냐? 난 진시황 같은 지배자도 아니거니와 무슨 독재자도 아니다. 권력자도 아니고. 아니, 나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내 말은 전혀 다른 벡터(방향)의 것이었다.

이 세상에 와서 만나는 사람들과 환경, 사건. 힘든 일도 있었고 고된 일도 있었지만……그래도 난 이 세상을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고. 여자들과 만나며 겪었던 환상적인 경험은 현실에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것들이었지. 혜린이, 로라, 메이 등……아내들과 만나며 난 이렇게 생각했다.

‘계속 이 행복이 이어졌으면 좋겠다……계속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다……’라고 말이다. 다른 사람은 신경도 안 쓰는 행복과 평화를 바라다니. 얼마나 시궁창 같이 살았으면 그딴 생각을 하게 됐을까? 늘 내가 불쌍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 심리까지 자세히 파고 들어가 보니……. 불쌍하다 못해 가련하다 씨발.

겨우 행복이다. 행복과 평화를 누리며 ‘아, 영원히 이들과 함께 있고 싶다……’라며 느꼈다. 그런데 나보다 훨씬 엄청난 행복, 권력, 힘을 누린 사람들은 어땠을까?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들의 체제를 보다 견고하고 굳건한 것으로 만듦과 동시에 그걸 영원히 지켜보고 싶었겠지! 자기들이 이루어낸 모든 것들을 영원히!

권력 등으로 대부분의 것을 이룬 자들이 영원히 그걸 가지고 싶어 하는 건 굳이 외국을 볼 필요도 없었다. 김재규에 의해 타살된 박정희는 연임제를 철폐해 15~16년 간 독재를 일삼았다.

오죽하면 그의 부하도 ‘2번은 했는데 3번째에도 또 대통령을 하고 싶어 하는 박정희를 보니 솔직히 무서웠다’라고 했을까? 불로불사가 아니라 독재만 해도 이 정도다. 권력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효과를 지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자기가 일구어낸 것, 이룩한 업적이 계속 되기를 바라는 마음? 오락실에서 하이 스코어를 갱신해 이름 남기는 것만 해도 그 기록이 깨지지 않았을까 걱정되는데 하물며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떻겠는가?

치열한 무한경쟁 사회에서 자기가 이루어낸 업적이 순식간에 퇴색되는 걸 본다면 누구든지 간에 열심히 노력하고 싶어 하는 의욕을 잃어버릴 것이다.

자기가 해낸 업적이 누군가의 공로나 노력으로 인해 잊혀지는 것도 싫고 부서지는 것도 싫다. 그렇기에 영원히 그걸 지속되게 만들고 싶겠지. 그걸 위해서 불로불사. 혹은 불로장생은 필수다. 오래 살아야 뭘 어떻게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나를 포함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지만 죽음을 빨리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다. 내가 안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매우 당연한 마음이자 반응이다. 그렇지만 이미 내 죽음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한다. 그 여자가 있는 한 내 죽음은 그녀의 마음대로일 테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저 밝은 석양을 향해 함께 뛰어가는 거야!’같은……옛날 청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희귀한 놈이겠다만, 난 그런 놈이 아니었다. 내가 그런 놈이었다면 이 세상에 올 일도 없었겠지. 아마 그 백발의 여자는 내가 이런 놈인 걸 알고 불렀을 테니까.

내가 선택하고자 하는 삶은 전혀 어려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쉬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걸 실행하는 것은 어려웠다. 말이 말 같지가 않네. 실행은 어렵지만 본질은 너무나 쉽다고 해야 할까. 설명은 어렵지만 모두가 보면 단숨에 알 수 있는 삶이었다.

동시에 이 삶은 현실에서는 절대 실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산다면 부모님도 날 쓰레기라며 욕하거나 때렸겠지. 나도 그런 건 싫었고 이 삶 자체가 실행 가능성이 너무나 낮았기에 ‘이런 식으로 살면 막장일 거야……’라 생각했다. 그냥 ‘이렇게 살게 된다면 그건 그거대로 힘들 테니까 지금처럼 살자’라 생각했지.

막장이고 쓰레기나 다름없는 삶. 하지만 그 빌어먹을 여자에 의해 내 죽음이 확정된 상태에서 내 정신이 온전했을 리가 없다. 그녀가 나한테 말해줬던 힌트의 답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언젠가 죽을 것이고 그 죽음이 그녀 때문이라 한다면 노력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백발의 여자가 나를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빌미로 현실에서 도망치려 한다고? 그래, 그 말도 맞겠지. 인정한다. 아무렴, 틀릴 리는 없겠지. 지금까지 개고생 했는데 앞으로도 그 여자의 장단에 맞추며 온갖 고생을 할 바에야 그 여자 변명을 대며 꿀이나 빠는 게 더 좋겠지.

비겁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고? 여기에 떨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5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했던 모든 노력이 단숨에 쓸모없게 되는데. 심지어 언제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영원히 노력하는 진취적 자세를 가지라니. 그딴 건 할 수 있는 놈들한테나 하라고 그래라.

나는 안 할 테니까.

나는 이제 다른 삶을 선택할 테니까.

어쩌면 아내들도 날 경멸할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삶은 좆같은 삶이었다. 미움 받는 걸 싫어하면서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삶. 다가오는 죽음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된 내가 마지막으로 고르게 된 인생. 그건 바로…….

============================ 작품 후기 ============================

드디어 선거도 다음 달로 다가왔네요. 2017년 5월 9일, 운명의 날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투표는 꼭 합시다. 누구를 안 찍어도 좋으니 가서 무효표라도 찍고 옵시다. 그래야 '아, 무효표=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라는 뜻이구나!'하고 깨닫거든요.

죽창은 가진 사람만 찌를 수 있지만 투표는 일정 연령만 넘으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한 방입니다. 20대 총선 때 친박, 진박 등으로 지랄하던 새누리당이 아가리 닥치고 버로우 탄 까닭이요?

투표에서 졌거든요. 정치랑 외교, 경제 관리 개같이 하면서도 박정희-박근혜 타령만 하던 놈들입니다. 새누리당의 참패였죠. 그 정도로 민심은 투표에 반영된 겁니다.

이번 편에서 헬조선 타령을 하며 분노하는 세린의 모습은 비단 저 혼자뿐만의 생각은 아닐 겁니다. 이명박근혜를 포함해 새누리당 집권 9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한국이 어쩌다 헬조선으로 불리게 됐는지는 여러분도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서민이나 국민 생각 안 하고 [부어라 마셔라 뇌물 바쳐라 우리만 살면 된다 ㅎㅎㅎ] 이딴 식으로 국정을 운영해왔거든요.

4대강 실패한 이명박도 용서할 수는 없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TOP of TOP. 이명박조차 좋은 지도자로 보이게 만들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실로 무섭죠. 바닥에는 더욱 더 깊은 바닥이 있습니다. 이런 한국에서 촛불시위 및 박근혜 탄핵이라는 기적이 나왔습니다. 이 기적의 여파가 끊기지 않도록 투표 잘 해야겠죠.

네? 너무 편파적으로 글을 적는 거 아니냐고요? 어……전혀요. 중립을 지키려고는 하는데 중립을 지키게 만들 건덕지가 없어요. 당장 국민의당만 하더라도 새누리당 2중대라고 불리는데 뭐 하러 제가 걔들을 예뻐합니까? 그런다고 뭐 해줄 사람들도 아닌데.

더불어민주당이 잘 해서 뽑는 게 아니라, 걔들이 그나마 차악(次惡)이라 뽑을 생각이거든요. 누가 말했잖습니까. 정치는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뽑는 거라고.

코멘트에 대한 답변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에 적게 됐습니다만……여러분, 투표하세요. 어차피 투표하는 날은 쉬는 날이고 투표장소는 여러분의 집 근처에 있을 겁니다. 찍고 싶은 후보가 있으면 찍고 무효표를 날리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세요. 아예 안 가는 것보다는 가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시는 게 더 좋습니다.

여러분 자신한테도.

이 좆같은 헬조선한테도 말입니다.

꼭 투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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