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7 「10-6 : 서장(序章)의 끝 (6)」 =========================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귀신이나 괴물이 있으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단언컨대 좆같은 느낌일 거다. 어떻게 단언할 수 있냐고? 내가 지금 그런 기분이거든.
눈을 뜬 곳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저 검은색. 하늘도 땅도 검고 그림자도 검은색이었다. 내 머리카락이 검은 건 오히려 귀여울 정도로 검은색 천지. 또 여기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으, 흐흐! 드디어……드디어 여기 왔구나!”
저 빌어먹을 웃음소리! 난 바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속에서 이질적일 정도로 밝아 보이는 백발(白髮). 드디어 찾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기랄! 더럽게 무섭다! 여기가 어디고 왜 저 여자가 여기 있는지! 애초에, 난 왜 여기 있는지! 저 여자를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공포감이 내 몸을 휩싼다.
“날 죽일 수나 있겠어? 후회할 텐데? 크큭……!!”
그럼 그렇지. 아니나 다를까 저 여자는 내 생각까지도 읽고 있었다. 일이 너무 잘 굴러간다고 생각했지. 나한테 죽을 거라는 생각조차 안 하고 있겠지. 그럼 내 앞에 나타났겠냐?
“넌 뭐냐?”
내가 먼저 질문했다. 그녀의 몸은 조금씩 흔들림이 멎고 있었다. 웃음소리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레벨까지는 줄어들었네. 이렇게 보니 평범한 사람이지만 난 알고 있다. 저 여자는 절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런 걸 물어서 어쩌려고? 우리 13번째 용사님? 크, 크흐흑……!”
또다. 또 저 호칭이다. 13번째라고? 설마…….
“13번째라면……내가 설마 이 세상에 온 13번째란 말이냐?”
그녀는 배를 잡은 채 웃어댔다. 젠장……대체 무슨 뜻이냐? 13번째로 온 사람? 그럼 그 전의 12명은 전부……!?
“뒈졌쥐이이이~! 그 12명은 정말 쓰레기였어! 아아……그런 놈들을 소환한 내가 병신 같아질 정도로 말이지……!”
놀라웠다. 첫 번째로는 내가 생각하던 13번째라는 호칭이 말 그대로 13번째로 소환된 사람이라는 걸 나타내는 호칭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말대로라면 그 이전의 12명은 모두 죽었다고 봐야 한다.
두 번째로는 그녀가 스스로 우리를 소환시킨 소환자(召喚者)라는 사실을 너무나 간단하게 인정했다는 것이었다. 나와 혜린이, 희진이와 은채. 그 외에도 12명이나 되는 사람을 소환시키다니. 그 말인즉슨…….
“……12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고도 웃음이 나오냐?”
“죽이다니? 아냐 아냐! 걔들이 멋대로 뒈진 거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책임전가란 말인가?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어?”
“변명이라니. 듣기 거북하네? 히히♪ 오히려 감사의 인사를 받아도 모자랄 판인데?”
“감사라고……?”
당장이라도 총으로 쏴죽이고 싶은 나와 달리 그녀는 정말 즐거운 거 같았다. 조금 전의 그 말에는 오히려 ‘야, 넌 나한테 고맙다고 큰절부터 올려야 하지 않냐?’라는 뉘앙스마저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과장스럽게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그럼! 야, 생각해봐! 대체 누가 널 여기 불렀다고 생각해? 누가 이 멋진 세상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냐고?”
“……너겠지.”
“그럼~! 잘 아네! 역시 13번째야! 지금까지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곳까지 단숨에 도달한 것도 모자라 그런 거까지 모조리 추리해 내다니! 아하핫! 이번에는 진짜 빙고였어! 죽은 열 두 명 다 모아도 너 한 명을 못 따라오다니! 정말이지, 니가 사는 세상에는 쓰레기들로 가득하다니까? 너 같은 인재 하나 모으느라 12번이나 힘을 소모한 거 알기나 해?”
이젠 아주 대놓고 말한다. 소환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창조주이기도 한 그녀를 보니 이젠 기분이 더럽다 못해 안타깝다. 내가 저런 병신 같은 년한테 소환당해 이 지경까지 왔단 말인가? 내가 지금까지 저런 년 때문에 그 고생을 했단 말인가?
“그리고 넌 그 병신 같은 년 때문에 동정 딱지도 떼고 아내까지 만들었지? 니가 나를 병신이라고 할 처지가 아닐 텐데, 병신아? 응, 우리 똘만아? 아하하핫!”
그래. 난 병신이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난 사람 목숨 가지고 노는 병신짓은 안 하는 병신이거든.”
내 나름대로의 반항에 그녀는 비릿한 비웃음으로 대답했다. 기분 더럽군.
“오오, 그러셔쪄요 우리 세린 어린이? 내가 같이 보내준 여자들을 강간하면서 온갖 변명을 해대더니 아주 말빨이 늘어나셨나 봐요? 혓바닥 굴리는 걸 보니 진짜 애처롭네?”
난 정말 못난 놈이다. 입으로는 평화와 행복을 위해 이 여자를 죽이겠다고 온갖 다짐을 한 주제에, 정작 만나니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입만 벙끗대고 있다. 오히려 논리를 앞세워 날 공격하고 있는 건 저 여자였다.
“현실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찌질이를 영웅으로 만들어주고 아내까지 듬뿍 줬는데 이 꼬라지라니! 우리 세린, 그렇게 자격지심(自激之心)이었어? 하긴……병신 같은 부모한테서 태어났는데 병신이 어디 가겠어? 개천에서 용 날 일 없다니까? 그냥 죽어야지.”
“……우리 부모님이 그리 좋은 분은 아니지만 너한테 병신 소리 들을 정도로 형편없게 살아오시지는 않았거든, 좆병신년아?”
싸움할 때 절대 꺼내면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부모 욕이었다. 가정교육 못 받았냐 등의 표현은 그렇다 치자. 다른 사람의 부모님을 모욕하는 말이 나오면 바로 주먹이 날아가도 변명을 할 수가 없다. 가만히 있는 부모님은 뭐 하러 건드린단 말인가?
“또 그런다! 얘도 참……속으로는 부모님을 원망하고 경멸하면서 이런 때만 효자인 척하는 거, 그만하면 안 돼? 역겹거든……끄, 끄흐흑……!!”
“효자 아니라도 부모 욕 들어서 좋은 사람 없거든? 너야말로 니가 하는 짓 정당화하는 거 그만 좀 하지?”
“정당화? 내가 뭘?”
두 손을 하늘에 슬쩍 올리며 취하는 제스처를 보니 진짜 때려눕히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라. 지금은 때가 아니다. 내가 궁금한 걸 모두 물어도 모자랄 판에 괜히 도발해서 좋은 거 없다.
“날 포함해 13명. 나랑 같이 소환된 여자만 해도 16명이야. 넌 그 16명의 인생을 망친 거야. 존재 자체를 없애버린 거라고! 그런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있을 수 있는 거냐!?”
“새 삶을 줬다고 표현해야겠지? 마을 사람들 앞에서 혜린이를 강간했던 주제에 그딴 말이 나와?”
저 말에 뭐라고 반박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거수(擧手).
나도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인간 쓰레기 병신이라 생각하지?
그래, 맞다. 그러니까 반격할 거다.
“내가 한 일이 나쁜 짓이라고 니가 한 짓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거든요? 남 욕하면 자기도 욕 들을 거 각오해야 하는 거 아냐?”
“모르는데? 내가 왜 그딴 걸 알아야 해? 그리고 니가 한 짓이 그거뿐인 줄 알아? 희진이랑 은채를 강간하며 니 입맛에 맞는 여전사로 키우려 했던 주제에? 난 소환도 했고 상황에 맞게 이벤트도 만들어줬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희진이와 은채 이야기가 나오자 난 주춤했다. 그래. 저 말은 맞다. 난 은연중에 그녀들을 내 입맛에 맞는 여자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니 프레그넌트에서 사는 걸 빌미로 그녀들을 범했던 거겠지. 하지만……저 말뜻은 뭐지? 이벤트를 만들어 줬다고?
“레벨 10이 됐을 때, 너희가 부카케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안나랑 니나한테 납치당했을 때. 마리아랑 아테나까지 보냈었지. 니 생각 맞아. 니가 말하는 ‘원하지도 않는데 휘말리는 상황’을 만든 건 바로 나야. 하지만 말이지……니가 그때마다 했던 일을 생각해봐. 그 이벤트가 뭘 뜻하는지 금방 답이 나올걸?”
프레그넌트 밖에 있는 숲은 괴물 천지였다. 난 그 괴물들을 토벌하며 경험치와 돈을 얻었다. 레벨이 10에 도달하자 아이나의 부름을 받아 어보션까지 가게 됐지. 마력증폭기를 전해주기 위해서. 그녀의 동생인 아이라를 데려오기 위해서.
도중에 들린 첫 번째 마을, 부카케. 거기에 도착한 날 밤에 괴물들의 습격이 있었고 그걸 저지하느라 꽤 많이 다쳤었다. 미카를 구해주다 기절한 나는 처음으로 내 눈앞에 있는 백발의 여자를 봤다. 꿈속에서 본 거라지만 저 여자가 꿈속에 못 들어 올 리는 없다고 느꼈다.
두 번째로 도달한 마을, 자멘. 그곳에서 나와 내 아내들은 안나와 니나한테 납치당했다. 이 나이에 납치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실제로 당하니 기분은 더럽더군. 마력을 봉인당한 상태에서 그녀들을 말로 구워삶느라 엄청나게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마리아랑 아테나가 ‘생명의 씨앗을 대신할 아기 씨앗’. 나를 찾아왔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이 시점에서 백발 여자가 모든 일을 관리하고 사주한다는 점을 눈치 챘다. 내 주위에서 나를 목표로 한 이벤트가 그렇게 자주 일어나니 내가 아무리 바보에 눈치 없는 놈이라지만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없다. 무슨 뜻인지 아냐니. 이벤트는 이벤트다. 내 아내들을 만나게 해준 은공(恩功)을 묻는 거라면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그녀는 다시금 우위를 점한 표정을 지으며 도도한 여성을 연기했다.
“아하핫, 모르는구나? 응, 그 꼬라지를 보아 하니 모르는 거네? 뭐야……실망이야. 그렇게 잘난 척했으면서 지금 내가 한 말의 의미를 모르다니. 능력은 뛰어나지만 반성은 할 줄 모르는 타입이네?”
“……반성?”
지금 그 말이 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반성? 난 이미 충분히 반성하고 있다. 내가 저지른 짓도 아닌데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을 위해 노력했다고. 근데 반성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 내 목숨이랑 인생까지 바쳐서 다른 사람들을 영원히 도우라, 이 말이냐?
“설마~! 아무리 나라도 그런 짓은 안 시키지. 그치만 내가 한 말의 의미를 모른다면 그렇게 살아도 별 의미는 없을걸?”
“……그럼 대체 무슨 의미인데?”
적대감을 없애며 진심으로 물었다. 모르니까 묻는 거지.
“대답은 스스로 찾아야지. 그래도 힌트는 줄게.”
문제의 답을 모르는 어린이한테 인심 써서 큰 힌트를 주겠다는 양 거들먹대는 꼬라지를 보니 당장 저년의 보지에 내 자지를 박아주고 싶었다. 당장 자기를 죽일지도 모르는 여자한테 박아주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나도 이 세상에 와서 정말 많이 변했군. 하지만 그 여자는 그런 생각 따위 아무래도 좋은 거 같았다.
“힌트 잘 들어? 힌트는 바로……. ‘언제나 너는 거기에 있었다’야.”
“……내가 늘 거기에 있었다고? ‘거기’가 어딘데?”
“그건 니가 찾아야지. 단어 선택에 따라 다르겠지만 찾으면 분명 반성할걸? 태어나서 지금까지 했던 걸 합쳐도 도저히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엄청!”
반성……어째서? 왜 저런 말만 하는 거지? 몰라도 되지만 알면 더 좋다는 저 태도를 보니 정말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내가 궁금한 걸 하나씩 물어도 정답을 알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저 여자는 내가 현실에서 겪었던 것들, 과거, 여기 와서 겪은 일들과 내 생각까지 모조리 알고 있으니까. 이 무슨 불공평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계속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아왔으면서 이제 와서 왜 엄살이야? 오히려 불공평하다면서 온갖 행복을 누리고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바로 너잖아? 자기가 누리는 행복과 우위는 당연한 거지만, 자기가 당하는 부당한 대우나 불공평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뭐 이런 거야?”
저 여자와 나 사이의 불공평에 대해 생각하던 중 날아온 말을 포함해, 저 여자 입에서 나오는 말은 늘 의미심장한 것들뿐이었다. 내가 온갖 행복을 누리며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당연한 걸 왜 물어? 있잖아……너 너무 뻔뻔한 거 아냐?”
내가 저 여자한테 ‘어떻게 죄없는 사람들을 소환해 죽여놓고 그렇게 뻔뻔할 수 있지?’라는 식으로 물었던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저 여자한테 저런 질문을 들을 줄이야. 이쯤 되니 오히려 내가 더 궁금하다. 내가 뻔뻔하다고?
“그럼, 아냐? 생각해봐. 내가 준 마법 중 가장 강하면서 니가 가장 많은 득을 보게 해준 그 마법. 설마 모를 리는 없겠지?”
“……자지(좆)의 맹세.”
여자 앞에서 이런 말을 하면 보통은 죽고 싶다고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말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이 읊은 말에 그녀는 박수를 쳤다. 마치 ‘옳지! 잘 대답했어요!’라는 반응 같다.
“응, 잘 아네! 그걸 알면서 그딴 말을 지껄여?”
그게 뭘 어쨌단 말인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답도 못하는 게 답답했던지 결국 정답을 말해줬다.
“불공평? 어떻게 그런 말을 지껄일 수 있어?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게 짜증나? 두려워? 무섭기도 하겠지! 그치만 넌 그런 말을 지껄일 자격이 없을 텐데? 아니, 이 ‘하렘 어드벤처’에서 불공평이라는 말을 거론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난 단언컨대 너를 지명할 거야. 신세린.”
지금까지 실실대며 날 도발하던 그녀의 태도가 변했다. 빌어먹을……좀 무섭다.
“무섭다고? 하하, 응. 무섭겠지? 근데 내가 한 질문에 대해 이해도 못하고 대답도 못했지? 여자 보지에 박아대는 건 더럽게 잘 하면서 정작 자기한테 불리한 질문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안 하려는 쓰레기 같은 자식 같으니라고. 내가 대답해줄 테니 귀지 파고 잘 들어, 이 멍청아.”
그 말과 함께 조금씩 다가왔다. 기분이 어땠냐고? 도망치고 싶었다. 저 말을 듣고 싶지도 않았고 저 여자와 가까워지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도망가? 어디로? 사방은 검은색이고 애초에 저 여자한테서 도망친다는 선택지가 나한테 있기는 했는가 묻고 싶다.
손을 뻗으면 닿지는 않지만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온 그녀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오히려 지금까지는 전초전(前哨戰)이었고 이제부터가 진짜 대화라는 듯이.
“지금 니가 자지의 맹세로 지배할 수 있는 여자가 몇 명인지 알기나 해?”
스테이터스 윈도우가 그녀 앞에 펼쳐졌다. 그녀는 손도 안 댔는데 윈도우가 자동으로 넘어갔다. 빌어먹을. 무기를 꺼내 위협하거나 하는 짓은 꿈도 못 꾸겠군.
“세 자리 숫자. 게다가 400은 넘어갔어. 넌 니가 얼마나 말도 안 될 정도로 비겁한 놈인지 모르지? 쓰레기 같은 놈. 불공평? 그럼 이건 뭔데? 응? 대답해보렴, 찌질아?”
자지의 맹세로 인해 나한테 복종하게 된 여자들의 리스트. 그곳에는 그녀들의 행동과 상태, 생각이 모두 표시되고 있다. 내가 그녀들한테 걸었던 암시까지 모조리. 그걸 본 순간, 이 여자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이제 알겠어? 사랑한다, 지키고 싶은 아내라고 지껄이면서 강간해서 임신시키고. 수틀린다 싶으면 암시나 지배를 써서 꼭두각시로 만들고. 남의 생각을 읽으며 항상 우위를 점하던 니가 불공평? 감히 그딴 짓을 해서 자기 찌질함과 병신 같았던 과거를 지우려고 노력했던 니가 불공평을 입에 담아? 하……. 13번째라지만 결국 뒤진 12명이랑 다를 바가 없구만.”
“…….”
난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논리적인 면에서 볼 때 난 이미 강간당했다. 너무나 압도적으로. 하지만 패배했다고 해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그녀의 집요한 공격이 날 다시 때렸다.
“내가 만든 세상에서 내가 만든 마법 덕분에 온갖 이득을 보고 위험을 헤쳐 나왔었지? 니가 누릴 건 다 누려놓고 이제 와서 나한테 불공평하다고 해? 그럼, 너한테 강간당한 혜린이는? 한국 최고의 섹시 스타라는 타이틀을 놓은 채 사라진 것도 모자라 너 같은 찌질이의 아기를 임신 당했는데? 응? 이건 공평한 거야? 이건 누구나 옳다고 생각할 만한 거냐고? 응?”
임신을 ‘했다’가 아니라 ‘당했다’라고 말하는 시점에서 이미 강간이다. 난 그 말에 대답도 못한 채 주춤댔다. 빌어먹을! 뒷걸음질조차 칠 수 없다니!?
“지금까지 능력 믿고 도망만 쳤지? 늘 내가 준 능력만 믿고 깝치던 새끼가 좀 불리하니까 도망을 가려 해? 찌질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아, 그래. 우리 희진이! 엉덩녀, 축구공녀로 불리던 항희진! 늘 딸감으로 썼던 그녀가 오자 넌 횡재했던 기분이었겠지? 내가 불러온 여자들이 니가 쓰던 딸감을 기준으로 불러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거야! 그렇지?”
아니라고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백발 여자……내 앞에서 날 다그치고 있는 그녀가 희진이와 은채를 소환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기준은 나였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저 침만 삼킬 뿐이었다.
“은채는? 독재당이라지만 걔는 금수저였지? 너랑 절대 만날 일도, 친하게 지낼 일도 없는 전혀 다른 세상의 여자였어. 그런 여자가 오니까 속으로 군침을 흘렸겠지? 아, 대답 안 해도 돼. 그 여자들 앞에서 레인과 섹스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아주 발정이 났었지?”
난 고개를 숙였다. 그거 외에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답도 못 하고 도망도 못 친다. 공격 따위는 용납조차 되지 않는……그저 내가 저질렀던 병신짓을 듣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자. 그게 바로 나였다.
“마을에서 여자들이랑 단체로 하는 것도 그랬지만, 희진이랑 은채한테 레인과의 섹스를 보여주며 생각했었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해도 너희는 갈 곳조차 없는 여자라고. 나한테 몸을 제공하는 것 외에는, 나한테 다리를 활짝 벌려 보지를 펼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쓸모없는 존재라고 말이지……? 응? 표정이 왜 그래?”
난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자기가 잘못했던 짓부터 시작해 당시 내 더러운 마음을 그냥 ‘듣는 것’뿐인데 이렇게 괴로울 줄이야……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도망치고 싶겠지? 걱정 마. 도망치게 해줄게. 이 이야기가 끝나면 말이지. 음, 어디까지 했지? 아, 맞아♪ 그 외에도 마음껏 ‘자지의 맹세’를 썼지? 아스카를 니 아내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레이 시리즈까지! 괴물까지 탐하는 걸 보니 와……내가 이런 발정 난 새끼를 데려왔구나 하고 느꼈다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인정할게! 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변태였다는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칭찬을 받다니. 난 한손으로는 가슴을 잡은 채 헉헉대고 있었다. 심장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숨 쉬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혜린이가 알면 비웃겠군.
“어때? 이래도 내가 니 마음을 읽고 과거를 볼 수 있다고 욕할 거야? 혜린이가 걸레인 건 사실이지만 그건 모두 자기 인생과 미래를 위해서였다는 거, 알아? 너 같이 힘든 상황에서 걔는 발버둥 치며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런 과거를 모조리 본인한테 말하면서 너도 즐거웠잖아?”
그래. 즐거웠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 목숨을 가지고 날 이용하려는 혜린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숨겨왔던 과거를 깨닫는 것. 그리고 그 과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그녀를 혼란시켰던 것에 즐거움을 느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가짜 인격까지 불러서 니 마음대로 부려먹었잖아? 과거를 폭로하며 강간하는 것도 모자라 강제 결혼. 심지어 인격까지 니 마음대로 바꾸며 가지고 놀다니. 그런 니가 나한테 불공평? 불공평이라고? 입을 찢어버려도 속이 시원찮을 더러운 새끼가…….”
꼴사납다. 그게 내 현재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었다. 하반신은 완전히 땅에 누워있었고 어떻게든 상반신만 조금 일으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남은 한쪽팔로 바닥을 질질 끌며 뒤로 가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도망을 어떻게, 어디로 칠 것이란 말인가?
“아직 할 말이 많은데 더 좋은 거 알려줄까? 겨우 한 명이야. 난 니가 혜린이한테 했던 더러운 짓거리의 일부분만 말했을 뿐이라고. 그걸 남은 아내들한테, 남은 여자들한테 말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 후훗♡”
“아, 안 돼……!”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건데? 말하면 안 된다고? 그걸 왜 니가 정하는데? 무슨 권리가 있어서? 그럴 자격이나 돼?”
가슴에 쏟아지는 정론(正論)에 난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안 돼……안 된다고……’라는 말만을 쏟을 뿐이었다. 이래서야 애새끼잖아……!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이 자기가 하지 말라는 것만 말하다니.
“지가 애새낀 건 알고 있나 보네? 하긴, 그거 안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겠어? 죽이려고 했는데 죽이긴커녕 논쟁에서조차 못 이긴 니가 뭘 할 수 있겠어?”
……어리석었다.
난 너무나 어리석었다. 이토록 생각이 짧았다니……!
이 세상의 창조주인 그녀를 죽이겠다고? 미쳤냐? 중2병 걸렸냐?
이거 보라고! 지금 난 쓰러진 채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보고 있다! 그녀는 나한테 육체적이거나 물리적인 충격은 아주 조금도 가하지 않았는데! 그저 말만 했는데도 날 압도했다!
말로만 해도 이길 수 없는데 무력으로 이기겠다고? 내 생각을 모두 읽고 다른 사람들마저 조종하고 지배할 수 있는 그녀한테?
“헤헤, 이런 부분에서는 머리가 빠르단 말이지? 응, 다른 사람들을 조종할 수도 있어. 미카 때도 그랬잖아? 눈두덩이에 좆을 비벼대는 너 같은 변태가 그걸 깨닫는다고 한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말이지.”
실시간으로 생각을 읽고 대답까지 해주니 이젠 친절하게 보일 지경이다. 그럼, 어떻게 되지?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일구어 놓은 모든 것들이 설마……사라지는 건가?
“흐음……? 그것도 재미있겠네! 이 정도까지 와도 충분하니까! 비록 멘탈은 여전히 병신이지만 이렇게까지 변했으니까 이제 그만둬도 나야 땡스 베리 감사지!”
“……벼, 변해……?”
내 귓가에 걸린 그 한 마디에 정신을 조금 차렸다. 그, 그래. 이전에도 말했어……!
“도, 도대체 무슨 뜻이야……내가 변하다니……!? 그리고 충분하다는 건……!?”
내가 겨우 얻은 평화와 행복을 부수고 싶지 않았기에 난 온힘을 짜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날 보며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니가 묻는다고 내가 대답해야 할 의무 있어? 후후……. 근데 의외로 재미있네? 그렇게까지 발버둥 치니 오히려 더 두고 보고 싶어졌어…….”
사형수한테 ‘넌 사실 당장 죽어야 하지만 내가 당분간 널 살려줄게. 날 위해 개처럼 일하면 당분간은 살려줄게. [당분간]은 말이지……’라고 말한다 치자. 사형수는 과연 어떤 심정일까?
언젠가 자기한테 찾아올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좋은 찬스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헛된 희망을 가지게 하는 악마의 속삭임이라며 거부하려 할까?
백발의 여자가 말한 것의 의미를 난 알 수 있었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여기서 죽지도 않고, 내가 겨우 잡은 행복과 평화가 당장 부서지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하지만 저 말은 반대로 말하자면……언젠가는 반드시 부수고 말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 또한 난 알고 있었다.
“살려줄게. 그렇게 원했던 평화와 행복을 마음껏 누려봐. 그리고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던 것도 계속 생각해보고.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백배는 더 좋았을 거라고 후회할걸? 쿡, 아하하핫! 꺄하하하하핫────!!”
맨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녀는 웃었다. 미친년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니 참으로 무서웠다. 시커먼 세상처럼 내 몸도 발끝에서부터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다.
저 여자를 죽인다는 어리석다 못해 미친 생각을 한 나 자신도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지만, 도망조차 치지 못하는 현실에 다다르니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살아남고 싶었다. 언젠가 부서질 걸 알면서도 현재에 안주(安住)할 수밖에 없는 한심한 존재, 신세린. 처음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그 끝은 도망도, 싸움도 아닌……방생(放生)에 가까운 결말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생사는 그 여자한테 있어 아무래도 좋은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 여자한테 있어서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 쓰레기라는 사실을…….
============================ 작품 후기 ============================
마침내 만난 백발의 여자. 모든 일의 원흉이자 최종보스와의 대담에서 세린은 처발리기만 하네요. 사실 그럴 수밖에요. 실제로 잘난 것도 없고 백발 여자가 만든 세상을 마음껏 탐닉하며 살아오던 세린입니다. 이제 와서 정의의 용사 코스프레를 한다고 한들 '죄송합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라며 잘못을 빌 리가 없죠.
오히려 '시발, 그렇게 잘난 척 하는 놈이 여자들 강간하면서 다녀쪄요? 우쮸? 우쮸쮸? 우리 세린, 표정이 왜 그래요? 기분 나빠요? 좆같아요? 더러워요? 헤헤……그럼 시발 처음부터 잘 하던가, 병신 새끼야'라며 역공격을 가합니다. 주인공인 주제에 세린은 단 한 마디도 반박 못 한 채 역관광만 타버리죠.
사실……그게 맞는 말입니다. 모든 일의 원흉이긴 하지만 동시에 모든 쾌락과 힘을 준 장본인이기도 하죠. 그런 존재가 세린한테 적대시 당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나쁜 감정 팍팍 드러내는 세린도 절대 정의의 용사라고는 부를 위인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아내라고 부르는 여자들을 강간하는 것도 모자라 자지의 맹세로 조종.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를 낙태시키며 쾌락을 누렸었죠.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 행동이 모두 옳다는 건 아닙니다.
잘못된 점이라면 고칠 줄 알아야 하는데 주인공은 반성'만' 하고 고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백발의 여자를 통해 비판 및 비난을 했습니다. 주인공이긴 하지만 항상 옳지는 않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거든요.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루인sv님, 혹시나 제 글을 보실 거라면 5월이 되어서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100편까지 업로드한 후에는 잠시 쉴 생각이거든요. 오랫동안 꾸준히 봐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환절기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로리콤MK님, 잉여라고 하니 생각나는 게 백수의 장점이네요. 다른 사람들 다 출근할 때 'ㅎㅎㅎ 어리석은 것들! 난 따스한 이불 속에서 온기를 느끼며 잠을 퍼자고 있지! 게다가 출근도, 퇴근도 안 해! 어때, 부럽냐? 부럽냐? 데퍄퍄퍗! ㅋㅋㅋ' 하며 노는 거죠. 물론 그 후에 오는 정신적 데미지는 작살납니다. 울먹이며 '흐, 흥! 슬프지 않다고! 내 가치를 몰라주는 회사 따위는 내쪽에서 사절이라구!'라는 정신승리틱 츤데레 대사도 날려줘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정신적으로 힘들거든요.
예?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요?
……레드썬!!
파이팅맘님, 개인적으로 TS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세린 같은 변태를 여자로 만들다니.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예쁜 미소년이나 미청년이라면 여자로 변한 후에 '흐, 윽! 뭐, 뭐야 이거……나, 여자가 됐잖아……!?' 하며 당황하겠지만 세린은 'ㅋㅋㅋ 나 여자 됐네? 이제 가위치기로 즐겨야 하나?' 같은 생각이나 할 놈입니다. 얘는 진짜 안 될 놈입니다. 그냥 앞으로 고생하게 냅둘 생각입니다.
이상입니다. 여러 모로 이상한 생각이나 대사가 들어가있지만 그러려니 칩시다. 제가 약 빨고 글이나 후기 쓰는 거 한두 번도 아니잖습니까. 앞으로도 즐겁게 약 빨고 쓸 것을 기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