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5 「5-4 : 다가오는 위기(4)」 =========================
“정말이지……불쾌한 사람들이었어요.”
로라는 여관방에 들어오자마자 불만을 내뱉었다. 그 로라가 이토록 화를 내다니. 하긴……무례한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다짜고짜 자기들을 고용하라니.
원피스의 주인공이 ‘야, 너! 내 동료가 돼라!’라고 하는 것보다 더 황당했다. 아니, 그 고무고무 인간의 동료가 되면 안심이라도 되지. 우리 파티가 뭐 어디의 졸병만 모은 피크닉 팀도 아니고…….
“아빠는 그런 말 듣고 화나지도 않았어요? 정말 기분 나빴어요!”
화를 내는 메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쓰다듬자 조금이지만 표정이 풀어졌다. 혜린도 뚱한 표정이다.
“저 사람들, 정말이지 예의나 예절이란 걸 모르는 거 같던데. 다짜고짜 하는 말이 약해보이니까 고용하라니…….”
“황당하긴 했지.”
그래도 방에 오니 좀 안심이군. 오늘 푹 쉬고 내일 출발할 걸 생각하니 화를 내는 시간마저 아깝게 느껴졌다.
“화를 내는 거야 쉽지만 참는 건 어렵잖아. 우리 목적은 어보션에 가는 거니까. 괜히 트러블을 만들 필요도 없으니까 무시하면 돼.”
“그치만…….”
메이는 너무 날 신경 쓴다니까. 머리를 쓰다듬던 손은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타 가슴으로 갔다. 가슴을 주물럭대니 ‘아, 아빠도 차암……’이라며 은근히 그 쾌감을 즐긴다. 아아……좋군.
“아 참, 로라. 생명의 씨앗이 그렇게 귀중한 건가요? 아까 그 사람들, 무슨 넋 나간 사람처럼 있던데.”
내가 한 짓이다만 생명의 씨앗이라는 걸 실제로 본 적이 없었기에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3개월이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아이템이라니. 어찌 보면 내 정자(精子)보다 더 좋을 거 같은데.
“세린. 아이나님한테 들으셨겠지만……세린이 괴물 퇴치를 하기 전, 저희 마을 사람들도 많이 죽은 건 아시죠?”
모를 리가 있나.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의 씨앗은 그 수에도 제한이 있지만 가격도 꽤나 비싸요. 최근 생산량이 너무 줄어든 것도 이상한 일이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로 인해 아기를 얻고 싶어도 얻을 방법이 없었어요. 이건 아마 저희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도 공통된 점일 거예요.”
맨 처음 만났을 때 미카가 혜린한테 듣고 나를 부러워했던 이유를 알 거 같군. 그렇게 귀중한 걸 몸에서 생산해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대단하다고는 생각 안 한다. 남자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생리적 기능이잖냐.
“그치만 막상 여기 와서 경험하니 정말 대단하네요. 치안이 나쁜 건 둘째 치더라도 저런 사람들이 대낮부터 난동을 부린다 생각하니……이 마을의 경비대가 불쌍하게 여겨져요.”
사람 때문에 겪는 고통이나 문제는 프레그넌트에서는 거의 없었다. 싸움도 없고, 평온한 곳이었지. 아아……아이나 만나고 싶다. 그 바보 푼수 허당 아가씨를 놀려먹는 맛도 좋았는데. 이걸 듣는다면 펄쩍 뛰겠군.
“딱한 일이라는 건 공감하지만 어쩔 수 없죠. 저희도 저희의 일이 있으니까요. 대신 여기 경비대 사람들은 괴물이랑은 별 인연이 없잖아요?”
“그건 그래요. 이 마을……방어 하나만큼은 정말 대단해요. 부카케에도 이런 성벽이 있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안타깝군요.”
누구는 성벽이 없어 기둥으로 마을을 보호하느라 힘든데, 여기는 아주 복에 겨워 난리가 났구만. 침대에 누우니 벌써부터 잠이 쏟아지려고 한다. 잠을 자면 마력도 회복될 테니까 조금 자놓을까.
“많이 피곤한가봐?”
“그럼. 아내들이랑 오붓하게 시간을 지내느라 꽤나 힘들었지.”
과장이 아니라 진짜다. 지금도 허리가 아프고 눈꺼풀이 절로 내려온다. 그러면서도 불끈거리는 하반신을 보니 모두 웃음을 지었다.
“자장가 대신 빨아줄까?”
“아니……고맙긴 한데, 그거 하면 진짜 또 발동 걸릴 거 같아서. 내일 일찍 일어나서 가고 싶거든. 이런 마을, 오래 있고 싶지도 않고.”
“그건 동감이야. 로라랑 메이도 쉴 거지?”
“예. 원래 나갈 일은 없었습니다만 조금 전 일을 겪으니 더욱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네요.”
“저도 아빠를 모욕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아빠 곁에 있을래요.”
딸이 섞이긴 했지만 내 아내들의 공통된 의견을 들으니 마음이 놓인다. 저녁 먹기 전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잠을 좀 자둘까. 룸서비스까지 부탁했으니 저 밑에 내려가 가족의 오붓한 식사시간을 방해받을 일도 없고 말이지.
한숨 자니 저녁 식사는 이미 도착한 후였다. 치안이나 밑에 있는 용병들의 성질은 더러울지 몰라도 음식은 한 솜씨 하는구만. 입에서 씹히는 게 아주 그만이었다. 꽤 돈을 줬던 이유야 간단했다. 이왕 마을에 온 거 맛있는 걸 실컷 먹어두는 게 남는 거니까.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거고, 아침은 아이템 창 안에 있는 음식들로 간단하게 해결할 생각이다.
행군과 비슷한 여행이었지만 배가 너무 고파서도, 불러서도 안 된다는 건 어디든 같았다. 배가 고프면 당연히 여행에 지장이 있다. 하지만 너무 부르면 포만감으로 인해 여행의 템포가 늦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문제다만 많아도 문제. 적당한 수준을 유지하는 게 베스트(Best)지.
그나저나……왜 이렇게 피곤하지? 밥을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눈꺼풀이 계속 내려왔다. 이상하네……잠도 한숨 잤고 밥도 잘 먹었는데 왜 이렇게 졸리지?
로라와 메이는 이미 서로한테 기댄 채 잠을 자고 있었고 혜린 또한 하품을 하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 그런데……생각하는 것도……귀찮……아…….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를 기점으로 내 의식은 끊겨버렸다.
† † † † † † † † † †
“윽……!!”
아프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난 아픈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뭐, 뭐야……!? 왜 내 손이 묶여있는 건데?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현실에 당황스러운 나머지 난 손을 마구 흔들었지만, 마치 수갑에 묶인 것 같이 내 손은 앞으로 돌릴 수 없었다. 왜 내 손이 묶여 있지……?
“오오, 일어났네?”
머리가 아팠지만 어디선가 들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몸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없나? 간신히 고개를 드니 그곳에는 자기를 ‘안나’라고 소개했던 여자가 있었다. 뭐, 뭐야……? 왜 저 여자가 우리 방에 있지?
“아하핫! 니들 진짜 바보다……. 이 자멘에서 그런 비싼 옷 입고 돌아다니는데 무사할 리가 없잖아?”
무슨 말이야……? 머리가 아파서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었다. 내 표정을 보니 뭐가 즐거운지 안나는 계속 지껄여댔다.
“아프지? 응? 존나 아플 거야! 그 수면제, 내가 가진 것 중에서 특별히 나쁜 품질로 골랐거든! 너희 같이 돈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놈들 보면 정말 죽이고 싶다니까? 그런 놈들한테 좋은 품질의 수면제를 쓸 거라 생각했어? 응?”
수면제……? 아,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은 후 모두 잠에 빠진 건 그것 때문이었나? 조금씩이지만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젠장……몸이 진짜 나른해. 제대로 몸을 가눌 수도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궁금했다.
“왜……이런 짓을……?”
“그야……뻔하잖아?”
퍽! 나른함은 어느새 통증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있는 힘껏 발로 내 배를 찼다.
“커, 커헉! 후, 우웩! 우욱……!!”
헛구역질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조, 존나 아파! 시팔!
“왜긴 왜야? 나랑 우리 딸은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데……너희 같은 새끼들이 잘 먹고 잘 지내는 걸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단 말이지. 응? 무슨 뜻인지 알아?”
내 어깨에 발을 대고 꾹꾹 누르자 통증은 더해졌다.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만둘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너무나 아팠기에 난 결국 소변을 지리고 말았다.
“우왓, 더러! 이 시발 새꺄! 새롭게 얻은 옷이 더러워지면 책임질 거야!? 병신 새끼!”
다행이도 그녀는 자기 옷이 더럽혀지지 않았나 확인하고 있었……어?
“그, 그 옷은……!?”
하얀색과 붉은색이 잘 어우러진 옷. 혈맹기사단의 단원복이자 내 두 번째 아내인 로라가 입던 코스튬을……왜 저 여자가 입고 있지……?
“그, 그 옷……로라! 로라한테 무슨 짓을 했어!?”
“로라? 아……그 멍청한 년? 후후, 걱정 마. 소중하게 잘 ‘쓰고’ 있으니까.”
“……써?”
무슨 소리야.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왜 난 묶여있는 거고, 왜 로라 대신 저 여자가 소중한 코스튬을 입고 있는 건지.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참고로 말해두지만, 소리 질러봤자 소용없어.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
고통으로 겨우 눈이 떠졌기에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내가 자던 여관방이 아니라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원망하려면 너희 자신들을 원망하라고. 이 자멘에서 이렇게 비싼 옷을 입고 여관이나 들르다니. 제정신이 아니지? 뭐, 덕분에 좋은 옷을 구하게 됐지만……후훗.”
“자, 잠깐만. 여기가……여관이 아니라고?”
어떻게든! 어떻게든 정보를 모아야 해! 난 지금 나한테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빨리 분석해야 했다. 설마……설마 이런 일을 당하게 될 줄이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일은 TV나 신문에서 보았던 ‘납치(拉致)’였다. 어쩌면 인신매매(人身賣買)일 수도 있겠다만……이 세상에서 남자는 없었기에 후자라고 생각하기에는 좀 그랬다. 저 떠벌리기 좋아하는 여자한테서 조금이라도 좋으니 정보를 얻어야 해!
“그러엄~. 그거 알아? 너희가 먹는 음식에 이걸 타달라고 돈이랑 주니 아주 환하게 웃더라? 후후, 이 자멘에서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니까? 심지어 살인을 저질러도 돈이면 말끔하게 해결! 오호호홋!”
……어, 어처구니없는 곳에 들어와 버렸어!!
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사, 살인(殺人)이라고? 판타지 세상에서 사람의 목숨은 우리가 있던 때와는 달리 큰 의미나 가치가 없다. 하지만 살인이라니? 설마……설마!!
“혜린아! 로라! 메이! 얘들아!”
눈물까지 흘리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설마! 아냐! 그래,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내 소중한 아내들한테 무슨 일이……설마 목숨을 잃어버렸거나 하는 일이 생겼을 리가 없어! 응? 그렇지? 누가 제발 대답 좀 해줘! 제발!!
“시끄러, 병신아!”
“윽! 우욱!”
이번엔 옆구리에 킥이 들어왔다. 아무런 예고 없이 들어온 강력한 킥은 내 내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결국 먹은 것들을 토해버렸다. 토를 하자 내 허름한 옷은 더욱 더 더러워졌다.
“우웩! 토하는 꼬라지 보니 진짜 더럽네. 그러게 누가 소리 지르래? 정말이지, 천한 것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웃기지 마……그렇게 천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이런 짓까지 하는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엄청난 분노가 몰려왔지만 지금은 그딴 거보단 내 아내들이 더 중요했다.
“모두……모두는……우, 웩! 허, 허억!”
“아, 씨발! 존나 더럽네……걱정 마. 니나, 들어오렴!”
살짝 부드러워진 말투. 그러자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세 명의 여성. 알몸이 된 그녀들을 보자 조금 전까지 토하던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난 놀랐다.
“혜린아! 로라! 메이! 다들……!!”
“세, 세린……미안.”
“세린……으, 읏……!!”
“아빠……미안해……나…….”
세 명은 실오라기조차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평소라면 그녀들의 알몸을 즐겼겠지만 지금 그딴 거 할 상황이 아냐! 뭐, 뭐야……왜 다들 알몸이야? 로라는 그렇다 치더라도……?
함께 들어온 ‘니나’라는 여자는 안나와 마찬가지로 꽤 빨간 머리카락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안나는 그 머리카락을 롱헤어로 가만히 놔뒀고, 니나는 트윈 테일로 묶어 나름 귀여움을 표시하려 했다는 것 정도일까. 둘 다 가슴은 로라 정도로 컸지만 전혀 욕정할 수가 없었다. 니나가 입고 있던 건 메이의 배리어 재킷이었다.
“그 옷은……메이 거야!”
“아하핫, 엄마! 이 새끼,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한 거 아냐?”
“그러게……불쌍하구나. 뭐, 어쩌겠어. 천한 것들을 상대하는 우리가 참아야지.”
니나를 끌어안고 상냥하게 키스를 하는 모녀(母女). 시, 시발년들이……뒤지고 싶어 환장했냐? 감히 우리 메이 옷을 훔쳐? 내가 그 옷을 얼마나 생각해서 골랐는 줄 아냐?
로라와의 화해 기념이자 선물로 준 소중한 선물을 니년들 같은 도둑년들이 써? 이, 이 죽여도 시원찮을 년들……!! 부들거리던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자 이젠 아예 대놓고 웃었다.
“꺄하하핫! 아, 아핫! 아, 엄마! 배 아파! 너무 아파! 아하핫! 쟤, 울고 있어!”
“오호홋! 정말이지……이런 놈들한테 이런 고가(高價)의 옷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것에도 정도가 있지! 이런 옷은 우리 니나한테 어울리는 거지. 뭐……우리한테 바친 거라 생각하면 바보도 쓸모가 있구나. 오호호홋!”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시발……시발! 그런 내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안나는 혜린이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다 내가 토한 웅덩이에 그녀를 던졌다.
“어, 어풉! 으, 크윽……!!”
“혜린아!”
내 다급한 반응이 웃겼던지 그녀들의 비웃음은 더욱 심해졌다.
“으, 으하하핫! 아, 엄마! 아, 흐극! 아, 너무 웃어서 배 아파! 크, 으흐흐흑……!!”
“그년이 입고 있던 옷은 팔기에는 아까워서 일단 가지고 있지만……정말이지, 제일 천해보이는 년이 그렇게 비싼 옷을 입고 있었다니. 기분이 더럽다고……!!”
“윽, 아악! 앗!”
혜린의 뒤통수를 밟은 채 누를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토사물 범벅이 되어갔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그만해주세요’를 잘못 말한 거겠지……씨발놈아!”
강력한 킥. 이번에는 내 뺨에 맞았고 덕분에 잠시간이지만 세상이 환하게 보였다. 입에서는 비릿한 냄새와 액체가 났고, 그게 피라는 걸 깨닫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세, 세리인……!!”
“쓰레기 같은 것들을 살려두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도 모자랄 판에 반항이라니……니나, 우리 니나는 저런 쓰레기들과 상종해서는 안 돼. 알지?”
“응! 그도 그럴 것이 난 엄마 같이 고귀한 존재한테서 태어난 딸이잖아?”
지랄 염병을 해라 병신년들……. 살의가 이토록 들끓었던 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한 때 숲에서 아무런 죄 없는 여자가 살해당했을 때 이상으로 살의(殺意)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이렇게 묶인 상태에서 뭘 어떻게 하란 말이야……?
“그 더러운 몸을 써서 우릴 즐겁게 했으니 오늘은 이 정도로 할까. 미리 말해두지만 너희는 여기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단다. 그 여자들의 손에 있는 거, 보여?”
너무 다급해서 자세히 볼 수 없었던 걸까. 내 아내들의 손은 마치 수갑과 같은 것에 묶여 있었다. TV에서나 나올 법한 목제 수갑은 옛날 사극(史劇)의 범죄자가 쓸 법한 칼(죄인에게 씌우던 형틀)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그 수갑을 쓰면 마법은 일절 쓸 수가 없거든. 꼴에 마법 좀 쓸 줄 안다고 나댔던 거 같은데……이거 어쩌지? 마법을 못 쓰는 너희 천한 년들 쯤이야 얼마든지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이렇게!!”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 착한 메이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다니!?
아,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으, 윽! 하윽! 어, 엄마……!!”
“메이! 괜찮아요? 우리 딸……!!”
로라는 예전부터 울고 있었기에 눈물로 범벅이었다. 화해 이후 로라는 늘 메이한테 신경을 썼다. 그토록 소중하게 여긴 딸이, 저런 좆같은 년들한테 무방비 상태로 맞다니! 상상을 초월해도 정도가 있는 거다! 어떻게 저런 짓을……!
“흥……어미나 딸이나 쓰레기 같군. 가자꾸나, 니나.”
“응, 엄마! 그럼, 안녕~밥은 나중에 줄 테니까, 재회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라고……킥킥!”
나가는 와중에도 ‘저런 쓰레기들을 생각하다니……우리 니나, 정말 착한걸?’이라고 말했다. 지랄 탭댄스를 춰라, 미친 시발년들아!! 아니,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우리 메이! 우리 착한 메이!
“메이! 메이! 괜찮아?”
눈물을 흘리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혜린도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 메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코에서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고, 위생적으로 최악인 바닥에 나뒹군 덕분에 먼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나도 어떻게든 그녀의 곁으로 가니 메이는 울고 있었다.
“엄마……아빠……미안.”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괜찮아? 다친 데는? 응?”
빌어먹을! 욕이 절로 나왔다. 그치만 수면제의 영향인지 여전히 몸은 내 말을 제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내 아내들은 수갑이 앞에 있었지만 난 뒤로 묶여서 제대로 뭘 할 수도 없었다.
“미안해요, 세린……우리가 부주의한 바람에 그만…….”
“무슨 소리에요! 로라, 그런 말 하지 마요! 다 저 빌어먹을 년들 때문이지, 그게 왜 로라 탓이에요?”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할 수 없다니! 시발! 그나마 무사한 로라가 혜린의 얼굴을 손으로 닦아줬다.
“혜린아, 괜찮아!?”
“아마……아니. 미안. 안 괜찮아. 존나 열 받았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혜린이 입술을 문 채 눈을 감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일어나니까 여기였어. 옷은 모두 벗겨진 상태였고, 이 빌어먹을 수갑도 그때부터 계속 손에 걸려 있었어. 그 니나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자는 동안 우리 옷을 모두 벗겨서 이 지경으로 만들었대.”
“그 여자도 떠벌이는 거 좋아했어?”
내 말을 듣자 혜린이는 피식 웃었다.
“아까 그 안나인가 하는 아줌마도 그랬나 보네. 그래, 맞아. 그래서 우리 세 명은 아무것도 못 걸친 채 밖에서 대기하다가 여기 온 거야. 니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바보야! 뭐가 다행이야! 너랑 메이가 심한 꼴을 당했는데 그게 다행은 무슨 다행!? 저 시발 좆같은 년들 당장 찢어발겨도 시원찮을 판에……!!”
안타까웠다. 내 사랑스런 아내들이 이 따위 대우를 받다니……!!
그녀들을 위해 사주었던 옷은 별 듣도 보도 못한 잡년들이 멋대로 입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한데 감히 내 아내들한테 손찌검을 해? 이런 개년들이……!!
“너는……쓸 수 있어? 마법?”
그걸 듣자마자 바로 조작 윈도우를 불러냈다. 손을 못 쓰는 것과 달리 내 의지로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지만 [마법] 메뉴로 들어간 순간, 절망만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붉은색의 메시지가 날 반겼기 때문이다.
[현재 마력이 봉인된 상태이므로 마법은 쓸 수 없습니다.]
……하, 하하. 정말 오늘 무슨 날인가? 아니, 내가 뭐 죽을 짓이라도 저질렀어? 눈물이 다시금 나왔다. 내 반응을 보자 혜린도, 로라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누가 보면 줄초상이라도 났냐고 묻겠지만, 그거보다 심각했다.
혹시나 싶어 [무기] 메뉴로 들어갔지만 마력 봉인 상태로 인해 소환조차 할 수 없었다. 마력을 못 써도 휘두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내 간절한 바람은 산산조각이 난 채 흩어졌다. 말도 안 돼……그럼……영원히? 영원히 여기에 있어야 한다고?
아냐……이건 아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거지? 조금 전만 하더라도 미카와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내 아내들이! 함께 미래를 살아갈 아내들과 내가 이런 더러운 곳에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한다고?
머리로는 부정했지만 이미 모두의 마음은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 따윈 없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서로의 몸을 비비며 우는 것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감(無力感)과 절망(絶望)을 느끼며…….
늘 희망만을 느낄 수는 없었다. 기쁜 것만을 느끼며 살아갈 수는 없기 마련이지. 그래도 난 이 세상에서 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이 여행이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바라며 존재를 함께 했었다.
어디선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은 깜깜했으며 아무것도 없었다. 난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잘못된 종착역’이며, 그 소리는 우리의 여행과 희망이 사라지는 소리라는 것을…….
============================ 작품 후기 ============================
잘 나가나 싶었더니 순식간에 납치 & 감금 테크트리라니. 역시 제가 쓴 글이네요. 가끔 제가 쓴 글을 스스로 볼 때 '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적었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앞날 창창한 젊은이들이 순식간에 빈털털이가 되어버리다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겠죠.
도적이나 이벤트로 인해 순식간에 빈털털이가 되는 이벤트. 그런 이벤트를 배우게 된 것은 국내 RPG 게임인 '포가튼 사가'였습니다. 제가 한 RPG 중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충격적인 작품이었죠. 도적들한테 모든 것들을 빼앗겨 무기는커녕 방어구조차 남지 않게 되다니. 지금 생각해도 엄청나게 파격적인 이벤트라고 생각합니다.
이왕 주인공을 함정에 빠트리는 거, 거하게 한 번 빠트려보자 싶어 그 이벤트를 참고로 썼는데……지금 생각하면 참 무서운 이벤트라는 생각이 드네요. 실제 세상이었다면 유괴, 납치, 감금, 장기매매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사건이니까요. 요즘 세상에는 장기는 물론이거니와 인신매매까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으니……게임보다 현실이 더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설 연휴긴 하지만 별로 즐겁지는 않습니다. 음식이나 제사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설날 제사 준비는 항상 힘든 법입니다. 어린애였을 때는 마냥 모든 게 즐거웠었는데 어른이 된 후로는 힘든 일과 귀찮은 일 투성이네요.
그렇다고 어린애로 돌아가고 싶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지금 돌아가면 또 IMF랑 힘든 시기를 맞이해야 하거든요. 지금도 싫지만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도 싫다니. 참 귀찮기 짝이 없는 성격이라 생각합니다. 이게 제 성격만 아니었더라면 딱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현실은 변하지 않으니 최선을 다해 음식 준비에 임해야겠죠. 여러분도 설 연휴, 즐겁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기름기 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체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아, 이번 후기에 약이 없는 건 이전에 적은 패러디에서 워낙 약을 많이 빨아서 그런 겁니다. 설 연휴 보내며 기름진 음식과 함께 힘껏 약을 빨 테니 앞으로도 여러분의 많은 사랑과 응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