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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25화 (25/235)

00025 「3-4 : 여정(旅程)의 준비」 =========================

가운을 벗고 오랜만에 파란 바지를 입었다. 예전에 혜린한테 줬다가 옷이 찢겼기에 위에는 타이츠와 T셔츠를 입은 채 녹색 코트를 걸쳤다. 이 사람들이 타이츠가 내복 비슷한 거라는 사실을 알 리는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 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운을 벗고 이렇게 예절을 차리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웨딩드레스 겸 선물인 코스튬을 준 다음날의 일이었다. 한 병사가 말하기를 촌장님께서 로라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로라는 경비대장으로서 촌장이란 사람을 찾아갔고, 그 촌장이 말하기를……나를 포함해 내 아내들과 식사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왜 나랑 식사를 해?’라고 말하겠지만, 난 꽤 또라이였기에 이렇게 물었다.

“여기에 촌장도 있었어?”

“……어, 세린. 한 번도 보신 적 없나요?”

당황하는 눈치였고 난 힘차게 대답했다.

“어.”

“……어, 음. 촌장님께서는. 잘……안 나오세요. 업무가 그렇게 많으신 건 아니지만 밖에 나갈 필요가 없는 한은 잘 안 나가시는 분이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시지 않아요. 친절하고 좋으신 분이신데 왜인지는 몰라도 사람들과의 교류를 꺼리시는 느낌이 들어요.”

듣고 보니 이상했다. 내가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두 달 정도 살았는데 단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다니.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도 아니고 원…….

“그런데 왜 그런 분께서 나랑 식사를 하자고 하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촌장님은 밖에는 잘 안 나오시지만 매우 속이 깊으신 분이시거든요. 분명 뜻이 있겠죠.”

로라가 저렇게까지 칭찬을 하니 틀림없이 그럴 거다.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을 보태지는 않는 성격이거든.

“메이는 촌장님을 만나봤어?”

“저도 몇 번 못 만나봤어요. 그래도 신비한 분이세요. 같이 있으면 기분이 편안해져요!”

기분이 편해진다라. 그런 사람과 식사를 하게 된다고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긴장돼서 그런 거다.

식사를 하자고 했을 때 ‘난 나쁜 짓은 안 했는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3초도 안 돼서 내가 어떻게 그딴 말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반성했다.

사람들 앞에서 오픈 섹스 겸 강간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 온갖 병신짓을 다 했는데 오히려 지금까지 참아준 거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니 오죽할까?

물론 이곳에서는 그걸 사랑의 일환(一環)으로 받아들여주니 고마웠지만, 부른다면 아마 그게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었다.

그 결과. 난 지금 저녁을 먹기 위해 나름 차려 입고 있는 중이었다. 내 아내 세 명 모두 화려한 코스튬을 뽐냈지만 정작 나는 제일 개성 없는 옷을 입고 있어서 웃겼다. 하긴 뭐, 나한테 어울리는 옷은 못 찾았다. 무기점에서 남자 방어구는 안 파나?

오더 메이드를 주문해야 하는 잡생각이 들었다만, 이제 출발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곤 갈 길에 집중하기로 했다.

경비대의 기숙사를 따라 올라가니 저 멀리에 조그마한 집 한 채가 있었다. 뭐랄까……산책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 크지 않은 집에 서니 ‘정말 이런 곳에 촌장이 사나? 촌장이라면 좀 더 격식이 있거나 부자이지 않나?’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속물적이라고? 원래 한국에 살다보면 이렇게 변하기 마련이다.

문을 두드리며 ‘로라입니다’라고 말하자 ‘들어오세요’라는 맑은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촌장으로 생각되는 사람은 예상 외로 평범했다.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포니테일로 묶은 상태였고, 옷은 드레스 비슷한 걸 입고 있었다. 검은색 드레스라니. 상복(喪服)도 아니고 원.

그래도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명색이 촌장인데 은색 비키니 아머 같은 걸 입고 맞이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슬펐을 거 같다. 아무리 그래도 촌장인데 야한 복장으로 나오면 기품이나 격식이 좀…….

내가 기품이나 격식을 아주 깐깐하게 따지는 놈은 아니지만, 그런 내가 걱정을 할 정도였으니 이 마을에서 여자들이 얼마나 개방적으로 사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어서오세요. 오랜만이에요, 로라, 메이.”

“오랜만입니다. 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오. 메이가 저렇게 격식을 차리는 걸 보니 높긴 높은 분 같다. 그녀는 로라는 둘째 치고 메이의 말투를 듣곤 쿡쿡 웃었다.

“메이.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요. 편하게 있으세요.”

“그, 그래도 괜찮을까요?”

“저녁을 먹는데 긴장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예쁜 옷이에요. 두 분 다.”

옷을 칭찬 받자 로라와 메이는 얼굴이 붉어졌다. 나? 당연히 기쁘지. 돈도 돈이다만, 옷과 함께 두 명의 미모가 인정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니까. 구면(舊面)과의 인사를 마친 촌장은 이번에는 내 쪽을 본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나라고 합니다.”

“신세린입니다. 세린이라고 불러주세요. 이쪽은 제 첫 번째 아내, 이혜린입니다.”

“이혜린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예. 저도요. 식사가 식으면 맛이 없으니 우선 들죠.”

자리에 앉으니 빵이나 스프, 고기가 침샘을 자극한다. 경비대를 위해 무상(無償)으로 일했지만 식사는 먹어야만 했기에 식당에서 해결을 했다. 먹는 게 나쁘진 않았다만 역시 고기라든가 맛있는 게 있는 쪽이 더 좋지. 샐러드와 빵 같은 서양식 식사를 먹다 보니 오랜만에 밥도 먹고 싶었다.

맛있는 식사까지 다 끝내니 내가 너무 성급하게 먹었나 싶었다. 눈치를 보니 그렇게 게걸스럽게 먹지는 않은 거 같군. 식후에 나오는 홍차를 보니 침이 절로 넘어가네. 으음, 달달한 거 먹고 싶은데……이 부근에서 팔까? 홍차를 다 마신 후 아무것도 없는 탁자를 보니 슬슬 대화의 시간이 도래한 거 같았다.

“오늘 여러분을 초대한 이유를 말씀 드리기 전에……세린님.”

“네? 어, ‘님’ 자 같은 거 안 붙이셔도 되는데요.”

“아뇨. 그렇게 불러야 당연한 겁니다. 세린님 덕분에 저희 마을 주변에 있는 괴물들의 수가 매우 줄어들었으니까요.”

“저만 한 건 아니에요. 오히려 로라나 메이가 공로를 인정받아야죠.”

레벨 업과 아이템, 가끔씩 드랍(Drop)되는 무기를 위해 싸웠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을 못 하니까 말이다. 물론 나도 이곳에 살면서 이 마을을 좋아하게 됐고, 괴물로 인한 피해를 직접 눈앞에서 봤기에 사냥에 열정적이었다. 당장 내 옆에 사는 사람들이 괴물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봐. 기분 안 더럽겠냐?

“물론입니다. 로라와 메이, 그리고 혜린님도 정말 많이 수고해주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괴물의 위협에 대해 이전보다 덜 신경 쓰며 편안하게 살아갈 걸 생각하니 저 또한 매우 기쁩니다.”

이렇게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좋긴 한데……내 본능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우리를 부른 게 아닐 텐데’라는 메시지를 계속 보냈다. 그도 그럴 게……이런 이야기 할 거면 그냥 회식 하라고 돈 주거나, 칭찬하기만 하면 됐지. 굳이 수고스럽게 식사를 준비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도 높으신 분이 직접?

“감사와 함께 오늘 제가 여러분을 초대한 이유를 슬슬 말씀드려야 할 거 같군요. 제가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역시. 그럼 그렇지. 고생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가 귓전까지 들린다 들려. 잘 풀린다 싶었지. 마음속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지으면서도 표정은 최대한 진지하게 유지해야만 했다. 대놓고 표정 구기면 실례잖아.

“이 부탁은 세린님께 드리는 겁니다. 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렇게 말하는데 ‘싫은데염? 전 밥만 먹고 갈 거예염! ㅃ2~’라고 하며 갈 수는 없잖은가. 빌어먹을. 영악하기는. 승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부탁드리고 싶은 건 다름이 아니라 어느 물건을 전달해주셨으면 합니다.”

드레스의 주머니에서 꺼낸 건 검붉은 구슬이었다. 어렸을 적에 구슬치기 같은 거 할 때 봤던……딱 그 정도 크기의 구슬. 단지 검붉은 색이었고 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걸 제외하면 크게 대단한 걸로는 안 보였다.

“그 구슬이요?”

“평범한 구슬처럼 보이지만 이건 보통 구슬이 아닙니다. 그렇네요……메이. 이걸 잠시 쥐어볼래요?”

구슬을 건네는 모습 자체에 크게 이상한 점은 없었다. 구슬을 받은 순간, 메이의 표정이 엄청나게 변한다. 처음에는 눈이 커졌고, 그 다음에는 입을 크게 벌렸다. 끝끝내 벌벌 떠는 걸 보니 무언가 잘못됐나 싶었다.

“초, 촌장님……이거……!?”

“예. 맞아요.”

“자, 잠깐만요! 메이! 괜찮아? 어디 아파?”

혹시나 몸에 이상을 주는 건가 싶어 일어났지만 아무래도 헛수고였던 거 같다. 이제 메이의 표정은 ‘굉장해요!’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이, 이거 굉장해요 아빠! 마력이……마력이 순식간에 늘어났어요!”

……메이야. 한국말로 말해줘서 고마운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다. 내 표정이 ‘쟤 지금 뭔 소리함?’이라는 표정으로 보였던지 촌장인 아이나는 날 보고 웃었다.

“저 구슬은 가진 자의 마력을 다섯 배로 증폭시켜주는 마력증폭기(魔力增幅器)입니다.”

다, 다섯 배? 메이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하니 정말이었다. HP는 그대로인데 MP는 통상의 다섯 배를 상회(上廻)하고 있었으며, 능력치를 알리는 부분에 ‘Boost’라는 글자가 떠있었다.

“이 마력증폭기는 오랜 시간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대략 5년 정도일까요. 최근에 겨우 완성시킨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에. 5년이라니. 마력을 다섯 배로 증폭시켜준다지만, 그거 하나 만드는데 5년? 1년 당 1배씩이라 치더라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겠구만!

“이걸 어보션(Abortion)에 있는 제 동생한테 가져다 주셨으면 합니다.”

어보션이라니. 완전 반대잖아? 이 마을의 이름이 프레그넌트……임신을 뜻한다면 반대로 어보션은 낙태(落胎)를 뜻하는 단어였다.

평소라면 웃었겠지만 너무 확 달라진 어감 때문일까. 약간이지만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혜린도 그 단어의 뜻을 눈치 챈 건지 살짝 표정이 달라지는군.

“동생분이 계셨나요?”

“예. 이름은 아이라입니다. 어보션의 마법사 양성소에서 일하고 있으니 찾기는 쉬우실 겁니다.”

동생이 마법사니 주면 확실히 좋긴 좋겠지. 마력을 다섯 배로 늘려준다는데 싫을 리가 있겠냐? 나라도 좋아하면서 덥썩 받겠다. 하지만 곤란한데……. 이 마을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그리 없거든.

“어보션은 여기서 얼마나 머나요?”

“꾸준히 걸어가도 대략 3주 정도는 걸릴 겁니다.”

거 참……쉽게 말한다. 3주 동안 걸으라는 게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행군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 무거운 군장을 지고 다섯 시간만 걸어도 발이 씹창이 났었다. 그걸 3주나 하라고?

“외람된 부탁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 구슬은 다른 사람한테 함부로 드릴 것이 못 됩니다. 아무리 약한 마력을 가지고 있어도 다섯 배가 된다면 욕심이 생길 테니까요.”

메이도 저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둑질을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 게 아니라 자기라도 저렇게 판단할 거라는 뜻을 담은 거겠지.

“경비대장인 로라가 적임(適任)이긴 합니다만, 로라를 혼자 보내긴 위험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평소 우글거렸던 괴물들이 세린님에 의해 어느 정도 해결이 됐다는 거죠. 만약 괴물이 이전과 같이 많았다면 로라한테도 부탁을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쉽게 말해 ‘너님이 열심히 괴물 잡아준 덕분에 최근 치안(治安)이 좋아졌음! 이 틈을 타서 내 부탁 좀 들어줬으면 좋으삼!’이라는 뜻이다. 확실히 로라를 포함해 우리가 나가 있는다 하더라도 괴물이 급증(急增)하지는 않을 거 같다.

타이밍이 타이밍이라 그런 걸까? 어쩐지 이 부탁이 우리가 괴물을 모두 처리하고, 더 이상 레벨 업 등이 어려워서 다른 곳에 원정(遠征)을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그런 절묘한 타이밍에 부탁이 들어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로라한테 부탁하려 했지만 현재 나한테 부탁을 한다니 한편으로는 기뻤다.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만, 그것보다는 로라를 귀찮게 만들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싶었다. 아내 걱정이란 게 바로 이런 느낌일까?

“보수(報酬)는요?”

혜린이의 현실적인 말에 모두의 이목(耳目)이 집중됐다.

“왜 그런 눈으로 보냐?”

“어, 아니…….”

“일을 부탁하는 건 좋지만 세린도 가정을 가진 남자에요. 함부로 집을 비워선 아내들이 걱정한다구요.”

혜린이도 내가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 거 같군. 내가 가버리면 혜린이는 따라와 줄까? 그럼 좋겠다만 그 이유가 남편이 걱정되어서 그런 건지, 혼자 있으면 위험해서인지는 모르겠네.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정말 많이 달라졌어.

“물론 드릴 겁니다. 그 건에 대해서입니다만……세린님께서 절대 거절하실 수 없을 보수를 드릴 생각이었거든요.”

‘절대 거절할 수 없다’라니. 저런 걸 단언(斷言)할 수 있을 정도의 보수라……대체 뭘까?

“이 마력증폭기의 반에 해당하는 성능(性能)을 가진 구슬 조각……. 세린님의 마력을 앞으로 평생 2.5배 이상으로 증폭시켜드릴 조각을 드릴 생각입니다.”

뭔가 내 뒤통수를 쳤나? 할 말조차 생각이 안 났다. 2……2.5배? 2.5배라고? 다섯 배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생각되겠지만 내 레벨은 10. HP와 MP는 각각 1000을 나타내고 있었다. 만약 그 조각을 얻게 된다면 앞으로 2.5배. 즉, 2500의 MP를 영구적(永久的)으로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그것 외에도 내 욕심을 마구 찌르는 가설(假說)이 머릿속에서 생겨났다. 평생이라는 말은……만약 내가 레벨이 1 올라가더라도 이전처럼 100만 오르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수치의 MP가 증가할 가능성도 있다는 거잖아?

지금까지는 레벨 1에 따라 100씩 올라갔던 HP와 MP지만, 그 조각을 얻게 된 다음 레벨 업을 하면 과연 얼마나 스탯(Stat ; 능력치)이 올라갈지 궁금해지는데?

“그뿐만 아니라 하나 더 보수를 드릴 생각입니다만……. 아직 그 보수에 대해서는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하지만 세린님께서 틀림없이 만족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사람 존나 골 때리게 만드는구만! 내 머릿속에서는 MP의 절대량이 늘어나는 것과 함께, 레벨 업과 아이템 등을 위해서도 어차피 밖에 나가야 하지 않았냐 하는 속삭임이 계속 맴돈다. 솔직히 존나 구미가 당긴다. 근데 나가긴 싫고. 어떻게 한다……?

“저, 촌장님.”

지금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로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저도, 따라가도 괜찮을까요?”

분명 나한테 부탁한다고 했건만 로라가 그런 이야기를 꺼내다니. 놀랍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오오……로라! 너를 아내로 삼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아, 로라한테 부탁드리고 싶었다고 말했지만 그건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로라가 굳이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아뇨. 남편을 두고 혼자 남기가 싫어서 그런 거랍니다.”

눈물 흘려도 되지? 마음속으로 철철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현실 세상에서는 쓰레기 같았던 인생이지만 적어도 여기 와서 이룬 것과 얻은 것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경비대장으로서 살펴본 결과, 최근 마을 주변에 있는 괴물의 수는 매우 줄었습니다. 경비대원들의 사기나 실력 또한 올라갔으며, 차기 경비대장 선출 또한 슬슬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차기(次期) 경비대장이라……. 경비대장을 나타내는 멋진 흰색 망토는 사실상 코스튬에 의해 대체(代替)됐다. 하지만 그런 것과 관계없이 이제 슬슬 로라도 경비대장을 그만둘 때가 된 거구나.

“경비대장을 그만두면 로라는 어떻게 할 생각이죠?”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 저한테는 남편과 딸. 가족이 제일 소중하니까요.”

‘언니는 필요 없어?’라며 짓궂게 혜린이 놀리자 ‘가족에 포함되어 있어요’라고 웃으며 대꾸했다. 가족이라……. 현실에 있던 내 가족은 부모님뿐이다. 빚을 왕창 안겨준 게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가족인데.

내가 없어진 걸 알기나 알까? 알면 뭐라고 할까? 사망 보험에 들었으니 보험이나 받으셨으면 좋겠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에 온 아들이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 될 테니까.

“저,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촌장님.”

메이야아아아! 정말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하핫, 봤냐! 잘 키운 딸, 열 아들 안 부러워! 아니 그 이전에, 시발 내 인생에 더 이상 남자 새끼는 필요 없다고! 딸이면 충분하다! 어쨌든, 날 따라간다는 두 번째 주자를 보니 기쁘기 한량(限量)없다!

“아빠 혼자 보내는 것도 싫고, 엄마가 따라가는데 혼자 남기도 싫어요. 무엇보다……엄마를 도와드리고 싶어서 마법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아빠도, 엄마도, 언니도. 모두 지키고 싶어요. 같이 가고 싶어요!”

언니라는 말이 나오니 혜린도 웃는다. 이번에는 확실히 언급됐군. 혜린은 내 시선을 보고는 아예 대놓고 말했다.

“지조(志操)나 절조(節操)가 없는 하반신을 가진 남편이라……갔다가 또 여자를 한 트럭 데리고 오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라도 같이 갈 거야.”

‘아냐! 그런 일은 없어! 난 너희만을 사랑해!’라고 말해야겠지만……솔직히. 아니, 남자잖아. 새로운 곳에 가면 과연 어떤 여자들이 있을지 또한 흥미에 포함됐기에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아! 모두 감동적으로 말하는데 왜 난 이 따위냐?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세린님을 포함해 총 네 분이 가시는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보수는 한 명분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나요?”

나를 제외한 모두가 괜찮다고 했다.

“여러분이 마을을 벗어나 어보션으로 향하게 되는 건 대략 일주일 후가 될 겁니다.”

“마을을 떠나는 건 아쉽지만 그 정도로 긴 준비 기간은 필요하지 않습니다만……?”

로라는 가장 경험자답게 우리가 이미 출발을 위해 준비할 시간까지 계산해둔 거 같았다. 군대에서 행군 하느라 이것저것 챙기던 때가 생각난다. 시발, 북한군 새끼들이 이상한 짓이라도 했다간 곧바로 휴가고 외박이고 다 짤렸었지.

“필요할 겁니다. 사실, 그것도 짧지 않을까 싶은 기분이 듭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로라도, 나도. 짧다니? 내가 여행을 떠나본 적은 없지만 2~3일이면 짐 꾸리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않나? 우리 표정을 보고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는 양 웃음을 띠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보수는 두 개입니다. 그 중 하나를 위해서 일주일의 시간은 꼭 필요합니다. 어쩌면 돌아오신 후에도 그 보수는 계속될 수 있고요.”

“그 보수란 게 뭔데요?”

혜린이 결국 물었다. 버릇없어 보이지만 촌장은 이 마을의 촌장이지, 혜린한테 있어서는 별 의미가 없는 권위였다.

“그건 세린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한테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만 신체에 해를 끼치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점점 애매모호해진다. 어, 구슬 조각이야 좋지. 마력 늘려준다는데. 근데 대체 저 보수가 무얼 뜻하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물건이면 물건이지 다른 사람한테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고? 무슨 맵 병기도 아니고 원.

“드릴 말씀은 모두 드렸습니다. 하지만 세린님. 세린님께서는 남은 보수에 대해 말씀을 드려야 하므로 남아주셔야겠습니다.”

예의바른 말투지만 쉽게 말해 ‘남아라’라는 뜻이다. 로라는 가볍게 인사를 드린 후 일어났고 메이 또한 따라 일어섰다. 촌장이라는 사람에 대해 상당한 신뢰감을 지니고 있는 거 같다. 혜린은 별로 마땅치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어섰고.

“아마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습니다만 양해 바랍니다.”

“예. 세린, 저희 먼저 갈게요.”

“아빠, 먼저 갈 테니까 조심해서 오세요!”

“걱정 마라. 내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집에 가는 길은 아까 외워뒀어.”

걱정도 팔자지. 근데 알만하다. 난 여기 지리에 대해 두 명만큼 잘 모르니까. 혜린도 ‘너무 늦지 마’라며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진짜 결혼한 느낌 팍팍 나는구만. 남고 싶어서 남는 건 아니다만, 그리 늦지는 않겠지.

세 명이 나가는 걸 자리에서 배웅한 촌장. 아이나는 갈색 머리카락을 풀어헤쳤다. 으응? 왜 저걸 풀어헤치지? 손님맞이 하느라 일부러 묶은 상태였나?

“절 따라오시죠.”

그녀를 따라 걸어간 곳은……어? 왜 침실(寢室)에 왔지? 여기에 구슬 조각이 있나? 문을 닫는 소리가 났고 무언가를 풀어 헤치는 소리도 들렸다. 뒤를 돈 순간……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상복 같았던 검은 드레스를 벗은 그녀의 몸은 매우 화려한 속옷에 감싸져 있었다. 로라나 메이가 아웃도어 여성 같이 구릿빛 피부를 자랑했다면, 그녀는 인도어 여성 같이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검은색의 파격적인 속옷 세트. 더군다나……유두(乳頭) 부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예 뚫려 있었고 팬티는 예쁜 빨간색 리본이 앙증맞게 달려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조차 몰라 어버버 거리던 나한테,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두 번째로 드릴 보수(報酬)는……바로 저희 마을의 미래입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2016년 마지막 업로드입니다. 팬픽을 제외한다면 첫 노블레스 연재로 한 해를 넘기게 되네요. 감개무량합니다. 2017년은 부디 많은 행복과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야기도 새로운 방향으로 접어들기 시작했으니 제 운도 새로운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싶네요. 2016년은 어땠냐고요? 어……회사 그만둔 것만 보더라도 견적 나오잖아요 ㅋㅋㅋ

kpkec님, 쿠죠죠타로님. 코멘트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기가 점점 없어져서 사실상 코멘트와 추천, 구독수가 글을 평가해주는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77페스티벌에 참가하지 못해서 그렇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12월 무렵에 77페스티벌이 뜰 줄은 몰랐거든요 =_=;;

열심히쓸게요님을 비롯해 제 글을 봐주시는 모든 분들께 다시금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새롭게 맞이하는 2017년. 앞으로도 재미있는 글을 많이 연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께도 좋은 한 해가 오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감사했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P.S - 앞으로의 연재는 0시(밤 12시) 후에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이 점,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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